능가산 개암사

2013. 10. 1. 14:42여행 이야기

 

 

●. 개 설.

 

▲. 일 자 : 2012년 10월 15일.

▲. 장 소 : 부안군 개암사.

▲. 주 최 : 문화재청.

▲. 주 관 : 문화재청 가족 문화재 지킴이.

▲. 목 적 : 아름다운 천년고찰의 사찰문화 답사.

▲. 인 원 : 가족 문화재 지킴이 3명.

▲. 날 씨 : 초가을 날씨.

▲. 사 진 : 첨부 하였습니다.

▲. 작 성 : 문화재청 가족 문화재 지킴이.

 

●. 개 요.

 

開巖寺는 保安에서 扶安을 향해 올라가다가 보은리에서 개암저수지를 휘돌아 거슬러 올라간 곳 楞伽山을 사이에 두고 來蘇寺와 거의 반대편쯤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大韓佛敎 曹溪宗 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末寺인 開巖寺는 百濟 634년(武王35)에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전을 절로 고쳐 각각 開巖寺와 묘암사라 부른데서 비롯되었으며 그 後 통일신라 676년(문무왕 16)에 元曉大師와 의상대사가 와서 중창했으며 고려 1313년(충숙왕 원년)에는 원감국사가 이 절을 중창하면서 30여 동의 건물을 지어 대규모 사찰을 이루었습니다. 황금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청련각 남쪽에는 청허당 북쪽에는 팔상전 서쪽에는 응진당과 명부전을 지었으며 총30여동의 건물을 세워 능가경(楞伽經)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여 산의 이름을 楞伽山이라 하였습니다.

 

●. 내 용.

 

▲. 개암사중건사적을 보면 고려 숙종조에 원감국사(圓鑑國師)가 절을 크게 중창하였는데 당시 開巖寺는 황금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청연각 서쪽에 백옥교 남쪽에 청허루가 있었으며 경내에는 연못이 있어 못 속에 화죽(花竹)이 서로 반영됨으로써 마치 극락세계와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개암사의 현황은 기록상의 배치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은 주불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쪽에 응향각 동쪽에 응진전이 있고 도량 아래에는 월성 대와 요사가 마당 한쪽에 치우쳐 있다. 大雄殿은 우금바위를 등지고 남향하여 높게 자리하고 있다. 기단은 2중인데 장대석을 5단으로 가지런히 쌓은 상부 기단은 원래의 것이고 자연석을 허튼 층으로 쌓은 하부 기단은 마당을 낮추며 근래에 만든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추녀 끝에는 활주가 받치고 있다. 1636년(인조 14)에 계호대선사(戒浩大禪師)가 중건한 것이며 1783년(정조 7)과 1913년에 중수가 있었다. 초석은 자연석 주초를 사용하였고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기둥간에는 창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주간포를 배치하기 위한 평방을 짜 올렸는데 평방을 통부재로 쓰지 않고 두 개의 부재를 맞대고 촉을 끼워 단일재처럼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통부재 보다 목재의 뒤틀림에 대해 보다 효과적이며 이와 같은 방법은 위봉사 보광명전이나 내소사 대웅보전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건물의 두드러진 특징은 공포의 짜임과 그 부재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이다. 공포는 모두 내외 3출목 구조로서 전면의 공포는 연꽃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주두는 연꽃잎을 조각한 하엽주두(荷葉柱枓)인데 하엽의 형태가 세 가지이다. 어칸의 주심과 주간포에는 복잡한 형태의 두 가지 하엽주두를 번갈아 사용하였고 귀공포와 인접한 주간포에는 단순한 형태의 하엽주두를 받쳐서 통식(通式)의 직절한 귀주두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였다. 숭림사 보광전과 화암사 극락전에서도 하엽주두를 볼 수 있으나 이 건물처럼 다양하지는 못하다. 이 주두 위에 살미와 첨차가 중첩되어 짜여진다. 각 제공의 외단은 3제공까지 앙서형이고 보 밑의 4제공은 당초문을 초각하였다. 도리 밑의 초공은 전면에서 봉두를 초각한 반면 후면과 측면에서는 당초문을 새긴 형태로서 그 시기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출목첨차의 모습은 그 유래가 드문 독창적인 형태이다. 줄기와 연화문을 초각한 첨차와 소로의 중첩된 모습은 마치 연꽃이 올라가며 겹겹이 피어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화려한 공포는 숭림사 보광전과 정수사 법당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숭림사 보광전은 공포의 세부적 수법과 천장의 구성수법 등 전체적인 기법이 이 건물과 거의 유사한다. 지역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동일목수 또는 같은 계보를 가진 목수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불교세가 취약한 호남에 위치한 사찰에서 200일간 100만배 기도를 회향한 스님이 있다. 부안 개암사 주지 재안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재안스님은 10월 07일 오전10시 개암사에서 100만배 기도 회향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법회에는 선운사불학승가대학원장 재연스님을 비롯한 사부대중 200여명이 동참해 재안스님의 100만배 회향을 축하했다. 재연스님의 축사에 이어 무상스님이 축가를 불렀다. 재안스님이 100만배 기도의 원력을 세운 것은 지난 02월 開巖寺 주지 소임을 맡은 직후였다. 당시 스님은 척박한 호남불교의 중흥을 위해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며 불자들과 함께하는 도량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03월 12일 100만배 기도에 입재한 後 每日 5000배를 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양시간과 잠깐의 포행을 제외하고는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사실 매일 몇 천배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처님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은 불제자의 도리가 아님을 명심하며 절을 했다. 10여 년 전에도 서울 봉은사 포교국장 소임을 보면서 100만배 기도를 회향했다. 당시 스님은 다시 한 번 100만 배를 올리겠다는 발원을 했는데 이번 기도로 부처님과의 약속을 지켰다. 100만배에 가까워질수록 개암사에는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신도들도 재안스님의 변함없는 정진에 신심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동참하는 불자들도 늘었다. 멀리 서울이나 울산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와 며칠씩 함께 기도하는 이들도 생겼다. 참배객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열심히 기도하는 신도들 때문에 저 또한 힘이 났다는 재안스님은 開巖寺를 일년내내 기도가 끊이지 않는 도량으로 만들겠다는 원력도 세웠다. 재안스님이 100만배 기도를 회향하는 지난 07일 開巖寺 대중들도 원을 세웠다. 불국정토를 실현할 불자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발원이다. 또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전법(傳法)과 자비사상의 社會的 실천도 다짐했다. 저희 불자들은 깨달음을 구하면서 더욱 더 감사의 기도를 성실하게 하고 가정에 충실하며 사회에 봉사하고 법회를 봉행하는 불자로 더욱 닦아 나가고자 하옵니다. 법회를 마친 재안스님은 통도사와 봉정암 등 적멸보궁을 參拜하며 100만배 기도 회향을 부처님께 고(告)했다. 100만배 기도는 회향했지만 재안스님은 지난 02월 29일 입재한 천일기도를 신도들과 함께 계속한다. 100만배 기도 회향을 하루 앞둔 지난 06일 開巖寺에서 만난 재안스님은 소회를 묻는 질문에 佛法僧 三寶에 感謝하다고 답했다. 기도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가피력 때문입니다. 佛敎의 소중한 세 가지 보배인 佛法僧 三寶에 귀의하는 마음을 놓지 않을 겁니다.

 

●. 결 론.

 

扶安 開巖寺는 우금산성의 끝부분에 우뚝 서 있는 우금바위 아래 자리 잡은 아늑한 사찰로 開巖寺의 大雄殿이 우금바위를 정면으로 등지고 있어 마치 우금바위가 大雄殿의 작은 병풍처럼 느껴지며 이 開巖寺는 百濟 武王 35년(634년)에 창건된 寺刹로 가까이에 있는 내소사와 비슷한 시기에 창건되었으나 그 後 쇄락과 중창을 거듭해 한때는 내소사보다 사세가 더 컸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내소사보다는 작은 절이나 아늑한 雰圍氣가 살아 있고 사람으로 붐비는 내소사에 비해 훨씬 한적한 寺刹이어서 조용히 寺刹을 찾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이 開巖寺는 巨大한 一柱門을 지나 寺刹 앞마당까지의 길이 아름답고 一柱門을 지나면 큰 상록수들이 도로를 호위하듯 늘어서 있는 풍광이 멋지고 마당으로 이어지는 소로는 아늑한 느낌을 주는 예쁜 길입니다. 開巖寺의 大雄寶殿은 寶物 제29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물 제1269호로 개암사영산회괘불탱및초본(開巖寺靈山會掛佛幀및草本)은 朝鮮時代 유물 / 불교회화/ 탱화/ 불도 2폭 1997년 08월 08일 지정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개암로 248 개암사 釋迦牟尼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掛佛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괘불에서 많이 그려지는 영산회상도는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길이 14m 폭 9m의 이 괘불은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현보살이 서 있고 뒤쪽에는 다보여래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세지보살이 있으며 앉아 있는 2구의 작은 불상도 보인다. 석가는 머리끝에서 다섯 줄기의 빛이 나며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서 있는 모습이다. 각 상들의 얼굴 형태와 어깨는 각 지게 표현하여 경직되어 보이며 눈썹은 처지게 처리했고 선은 매우 정밀하고 세련되어 강한 인상을 준다. 채색은 주로 붉은색과 녹색에 금색을 사용하였고 군청색을 넣어 색채 대비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영조 25년(1749) 승려화가 의겸이 참여한 그림으로 화면을 꽉 채운 구도와 경직된 형태 강렬한 색채 등으로 18세기 중엽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며 제작연대도 확실하여 우리나라 불교회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물 제292호부안 개암사 대웅전(扶安 開岩寺 大雄殿)은 조선시대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1동으로 1963년 01월 21일 지정되었으며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개암로 248 개암사의 연혁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부안향토문화지 등에는 백제 무왕 35년(634)에 묘련왕사(妙蓮王師)가 변한의 궁궐을 절로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感謝 합니다!

 

●. 揭 載.

 

1. 國家報勳處 2. 國務總理室 3. 牧民 Forum 代表 4. 國防部 5. 保健福祉 家族部 6. 警察廳 7. 國政院 8. 全州市廳 9.傷痍軍警會 10. 武功 受勳者會 11. 6.25參戰 戰友會 12. 獨立紀念館 13. 文化財廳 14. 全羅北道 道廳 15. 報勳敎育 硏究院 16. 戰歿軍警 遺族會 17. 戰爭 紀念館 18. 仁川大學 敎授 19. 益山市 嘉藍協會 理事 20. 全南大同財團 局長 21. 文化遺産 踏査會 Cafe' 22. 南原 崔明姬 文學會 理事 23. 大田顯忠院, 任實護國院 24. 全州市 圓佛敎 會長 25. 大韓民國 國家有功者會 26. 全羅北道 道廳 Monitor Cafe' 27. 越南 參戰 戰友會 28. 傷痍 軍警會 Cafe' 29. 南原 文化院 局長 30. 大韓民國 國家有功者 31. 國家有功者 廣場 32. 其他 同僚입니다. 感謝 합니다!

 

●. 2012年 11月 03日. 文化財廳 家族 文化財 지킴이 龍湖 宋 哲 孝. 

 

 

 

 

 

 

 

 

 

개암사는 변산에서 2번째 규모의 사찰로 유명한데 개암사 관련 상세 정보는 "변산반도 전자책 ebook" 메뉴의 '변산반도 관광자원 전자책 ebook' 을 클릭하여 열리면 페이지 검색에서 142  페이지를 입력하고 클릭하면 개암사 유래와 역사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개암사 입구 체련공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개암사를 관광하고 오른쪽으로 나오면 우금암으로 오르는 등산로 안내표지를 따라 800m 지그제그로 오르면 우금암 입구가 나타난다. 우금암을 왼쪽으로 벗어나면 삼거리에서 오른쪽은 우금산성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변산마실길 9코스로 가는 길입니다. 

 


▲ 개암사

 

 

▲ 우금암 주변

 

 

▲ 우금산성 주변

개암사에서 무르익은 원효의 화쟁사상

 

우리는 우리 원래의 종교 선교(仙敎)에 바탕하여 불교·유교·기독교 등 숱한 종교를 받아들였다. 이중에서 불교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주로 귀족 중심의 통치자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불교를 일반국민에까지 퍼뜨린 으뜸가는 인물은 바로 원효대사(元曉)다. 그는 종교로서의 불교만이 아니라 국민을 가르치고 바르게 살게 하기 위한 정신세계의 도구로 삼아 전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전후한 격변기를 살았던 원효는 종파와 경전을 가지지 않고 모든 분야에 손을 댔다. 그리고 어느 한 학설을 고집하지 않았고 또 버리지도 않았다. 모든 학설을 나름대로 다루면서 개개의 다른 학설과 교리를 자기분열없이 종합하고 융화해서 하나의 사상체계 속에 담았다. 즉 여러 이론을 한 원리 속에 담아서 총화적·통일적인 불교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리도 통일지향성을 근본 원리와 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각론과 내용에 들어가서는 이 원리를 인류사회로 옮겨 화합과 통일이 깃들도록 했고 그 자신 몸소 전국을 돌며 민중 속으로 들어가 이를 실천해 갔다. 이론과 실천을 일원화시킨 것이다. 이런 자세를 그는 '화쟁(和諍)'이라 불렀다. 이 화쟁이야말로 그의 중심사상이요 생활신조였다. 그러다보니 그의 모든 저서나 행적도 이 화쟁을 줄기차게 뚫고 나가는 것이었다. 반면에 하나의 불교이면서 어느 종파니 무슨 학파니 하면서 서로 담을 쌓는 모습은 외면했다. 특정한 어느 경론과 종파를 끄집어 내지 않고 오로지 종합적인 '총화불교(總和佛敎)·통불교(通佛敎)'를 위해서 학문상으로나 실천상으로나 이끌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서론'이었다면 중국에 건너와 '각론'으로 발화하여 조선의 원효에 의해 비로소 '총론'으로 마무리되었다고들 말하며, 삼국으로 나뉘어졌던 민족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던 사상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가 지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1998년11월 21~24일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세계종교학회 정기학술회의에서는‘원효학연구발표회를 갖고 토론을 벌였다. 세계 종교학자 5천여 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원효스님의 화쟁(和諍)·원융회통(圓融會通) 사상이 분열과 혼돈이 갈수록 심화되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21세기를 이끌어 갈 대안 사상'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신(神)에 대한 유일사상에서 ‘신의 해체’를 과제로 안고 있는 미국 신학자들은 원융회통사상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렇듯 원효사상은 통일 등 오늘날 전반적 사회문제에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어 원효를 연구하는 각 학회와 연구원의 원효 사상에 대한 연구가 최근 들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변산에 온 원효

  원효(617~686)는 진평왕 39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원효의 부친 설담날은 당시 신라 육두품으로서 관리의 열일곱 계급 중 열한번째인 내마(奈麻)의 지위에 있었다. 그리고 조부는 잉피공(仍皮公)이라 하여 널리 공경을 받은 사람이었다. 청년 원효는 화랑이 되어 출중한 문무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젊은 시절의 신라는 너무나 힘든 처지였다. 북에서는 고구려가, 서쪽에서는 백제가 쉴 사이없이 침공해 왔던 것이다.

  전장을 누비던 원효는 전투에서 절친한 벗이 죽자 복수를 결심하며 통곡하던 중 지금까지 자신이 적군을 죽여 승리에 들떠 있을 때 상대편에서도 똑같이 복수의 칼을 갈며 애통해 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에다 어머니의 죽음, 방울스님의 가르침을 겪고 배우면서 진정한 삶의 진리를 구해보자는 생각도 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이차돈, 원광과 자장의 뒤를 이어 부처의 나라 신라를 더욱 평화스럽게 만들기 위한 길을 찾고자 결심하게 된다. 마침내 원효는 29살의 나이로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부처의 길에 나섰다.

  출가 직후 그는 자신의 집을 절로 만들어 '초개사'라 부르고 도를 닦는 한편 설법도 부지런히 했다. 그러던 중 34살이 된 원효는 진덕여왕 4년 650년에 이르러 외국은 어떠한지를 살펴보고 보다 더 깊이 불교공부를 하기 위해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나라로 가려다가 국경선에서 고구려의 보초병에게 붙잡혀 간첩으로 오인되어 감금당했다가 한 달 가량 지난 후 겨우 풀려났다. 옥고를 겪은 이들은 그 길로 곧장 되돌아 왔다.

  이후 그는 국내에서 공부도 하고 수도도 했다. 더러는 강단에 올라 설법도 했다. 그는 원래 워낙 설법을 잘했기 때문에 그 인기가 그야말로 높았다. 얼굴도 잘 생기고 화랑출신이라 기골은 장대했던 데다 목소리에 힘이 넘치고 그 내용이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가 설법을 할 때에는 임금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에서부터 무수한 신라인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설법을 경청했다. 또한 그는 <발심장(發心章)>이란 글을 지어 모두들 빨리 불도를 닦도록 권하기도 했다.


우금산성, 백제부흥운동지 주류성으로 비정되고 있다.ⓒ부안21

   백제가 망한 이듬해인 661년 문무왕 원년에 45살이 된 원효는 의상과 더불어 다시금 당나라에 가고자 서해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수원 근처에서 며칠 동안 묵으면서 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밤 해골바가지에 괸 썩은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마음이 있으면 가지가지 일이 생기고, 마음이 없으면 가지가지 일도 없어지니,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나니라." 즉 '모든 근본원리가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또렷또렷하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다. 내 마음 외에 그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일은 나로부터 출발시켜야 한다.' 고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당나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미련 없이 홀로 서라벌로 되돌아 왔고 자기 스스로의 길로 나섰다. 그후 686년 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 동안 인간 구도의 길로 가는 처절하고도 험한 길을 걸었다. 형식과 규율을 싫어했던 원효는 요석공주와 파계하여 설총을 얻은 후 승복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낮추며 전쟁에 찌든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당시의 승려들은 주로 수도 경주의 대사원에서 호화생활을 누렸으나 원효는 전국을 돌며 전쟁으로 인한 참화로 갈가리 찟긴 민중의 마음을 어루어만지며 갈등과 증오를 차단하여 원융회통의 하나 되는 경지로 이끌었다.

  676년 문무왕 16년에 마침내 당나라 군사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자 원효는 화엄종을 연 의상과 함께 3년간 처절하게 전투를 치르며 백제부흥운동을 벌인 중심지였던 변산으로 왔다. 개암사는 이 때 원효와 의상이 중건하였다고 <개암사지>에 전한다. 원효는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던 복신장군이 거처하던 암굴에서 수행에 정진하였으며, 개암사에는 수많은 백제 유민들이 원효의 설법을 들으려 몰려들었다. 원효는 이들에게 야단법석(野壇法席:야외에서 베푸는 강좌)를 차렸다.

  원효는 힘에 의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이 하나로 뭉쳐졌지만 정서와 생활까지의 일체화에는 힘들고도 오랜 시일이 걸리기 마련이므로 삼국통일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를 지은 것도 삼국통일의 원리와 이념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법화경≫에 '부처님이 세 사람에게 각각 다르게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임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 셋은 모두 커다란 한 그릇에 담겨지는 것'이라고 씌어 있음을 찾아내고 주목했던 것이며 이를 널리 폄으로써 사상통일을 꾀하려 하였다. 즉,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다 일시적인 것이며, 보다 더 큰 한 그릇 속에 하나로 뭉쳐 합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되고야 만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셋이 하나로 되어진다는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이야말로 원효가 외친 삼국통일의 이념이었다.


개암사 뒷산이 이고 있는 울금바위에는 남. 북. 서 3곳에 굴실이 있다. 북쪽의 굴실은 3곳 중 제일 협소하며 백제부흥운동 당시 군사들을 입히기 위해 베를 짰다해서 베틀굴이라 전해오고 있으며, 서쪽의 굴실은 3곳 중 가장 큰 굴로 역시 백제 부흥운동 당시 복신이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던 굴이라하여 복신굴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남쪽의 굴실은 바위절벽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지표에서 20여 미터나 되는 암벽중간에 있어 사다리가 없이는 도저히 오를 수가 없는 곳으로 이 굴실이 바로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수도했다고 전해오는 ‘원효방’으로 추정된다.ⓒ부안21

  이규보가 가 본 원효방

  조선 중종 때 사람 심의(沈義)는 그의 한문소설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에서 조선의 천자(天子)에 최치원, 수상에 을지문덕, 좌상에 이제현, 우상에 이규보(1168~1241)를 내세워 조각을 단행했다. 중국에 사대의 예를 갖추어야 했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리라. 벼슬이 문하시랑에 올랐던 이규보는 살아서도 상국(相國)이었다. 그래서 그의 문집 이름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다. 이 문집에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란 기행문이 실려 있다. 이 일기는 그가 전주목 사록(司錄)으로 재직 중이던 시기에 쓴 것으로 변산을 비롯한 호남지방을 둘러 본 감상을 적고 있다.

  천재 시인 이규보(1168고려 의종22~1241고종28)는 1189년에 사마시에 수석 합격했으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최씨 일가에게는 소외되어 벼슬을 하지 못하고 노장 철학을 넘나들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이 시기에 많은 시문과 역사 서사시 <동명왕편>을 짓기도 하였다. 자신의 빈한한 처지를 한탄하다가 마침내 그는 1197년 나이 30이 되어 최충헌에게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쓰고 1199년 12월에 전주목 사록(司錄)에 부임을 명받았다. 이후 1년 4개월간 임지에서 하급관리를 지내며 변산의 벌목책임자로 명받아 변산을 처음 오게 되었다. 이 시기의 경험을 그는 <남행월일기>에 기록해 두었다. 그러나 비방과 중상에 휘말려 이 마저 그만둔 그는 중앙에 올라와 또다시 어렵게 생활하다 당시 최고의 문사들이 참여한 한 시회에서 그 재능이 인정되어 최충헌 정권에 중용되었다. 그러던 중 1230년에 한 사건에 연루되어 부안의 위도에 유배되어 8개월 만에 풀려나기도 하였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그에게 벌목 책임을 맡아보라 하였으니 내심 못마땅할 법도 하다. 그의 변을 직접 들어보자.

  12월에 조칙을 받들어 변산에서 나무 베는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변산이란 데는 우리나라의 재목창(材木倉)이다. 궁실을 짓고 고치느라 해마다 재목을 베어내지만, 아름드리 나무와 하늘을 찌를 듯한 거목들이 수두룩하다. 내가 벌목을 감독하고 있으니 나를 일러 작목사(斫木使)라고 한다. 내가 노상에서 장난 삼아 시를 지어보았다.

  짐꾼에게 권세부리니
  이 영화 어떠한고
  벼슬은 나무 베기라
  창피도 하구나


  그러나 변산에 부임한 그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원효방과 부사의방장을 가보았던 것이다.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원효방과 부사의방장의 모습을 알아보자. 그는 부안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색적인 경험을 한다.

  임진년 정월에 처음 변산에 들어가니 층층의 산봉우리, 겹겹의 묏부리들이 솟으락, 엎디락, 구불구불 질펀하여 머리며 꼬리가 어디 놓였는지, 팔쭉지와 뒤축이 어떻게 뻗었는지, 그리고 도대체 몇리(里)인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옆에 큰 바다가 굽어보이고, 바다 가운데는 군산섬, 고슴도치섬( 島), 비둘기섬(鳩島)이 있는데, 모두 아침 저녁으로 갈 수가 있다. 바닷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순풍을 얻어 쏜살같이 달려가면 중국이 멀지 않다."고 한다.

  산중에는 밤(栗)이 많아 이 고장 사람들이 해마다 양식의 일부를 삼는다고 한다. 얼마쯤 가니 아름다운 대숲이 총총히 삼(麻)처럼 서 있는데, 수백보 쯤마다 울타리로 막아 있었다. 대숲을 건너 질러서 바로 내려가니 평탄한 길이 있다. 여기에 보안(保安)이란 마을이 있다.

  밀물이 들어올 때는 평탄한 길도 순식간에 바다가 되므로 조수가 들어오고 나감을 기다려 때를 잘 맞추어서 가야 한다. 내가 처음 갈 때에 조수가 한창 들어오는데, 아직 50보쯤 거리가 있어서 말에게 채찍을 쳐서 빨리 달려서 가려하니 종자가 깜짝 놀라며 급히 말린다. 내가 들은 채 않고 막 달렸더니 이윽고 조수가 쿵쾅거리며 휘몰아 들어오는데, 그 형세가 사뭇 만군(萬軍)이 달려오는 듯 장하고도 엄청나 심히 두려웠다. 내가 넋을 잃고 달려서 산으로 올라가 겨우 위기를 면하기는 했으나, 물은 거기까지 따라와서 바닷물은 말 있는 곳까지 와서 넘실거렸다.

  바라보니 푸른 물길, 파란 산봉우리가 숨었다가 나타나고 그리고 들락날락, 청(晴)과 음(陰)의 교체, 아침 저녁의 경치가 각각 다르고, 구름과 노을이 붉으락 푸르락 그 위에 둥실 떠 있어, 아스라이 만첩 화병을 두른 듯, 눈을 들어 바라볼 때, 시를 잘 하는 두 셋의 친구들과 함께 가면서 이 좋은 경관을 시로 읊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그러나 만경(萬景)이 내 넋을 호들겨 주니 정서가 스스로 뒤흔들리어, 시를 지으려 하지 않아도 어느 틈에 술술 흘러나온다.


  위 기록으로 보아 이규보는 썰물 때 드러난 개펄을 가로질러 보안에서 유천리 쪽으로 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지금 이곳은 육지로 변해 있다.  


원효샘이 있는 복신굴. 이 굴은 복신이 거처하며 백제군의 지휘소로 사용하였다.ⓒ부안21

  이규보는 원효방(元曉房)을 찾았다. 원효방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살았던 곳이라 전하는데 개암사 뒤 우진암 바위 중간에 있는 굴 속에 있었다. 암자가 있었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바위 아래에는 깨어진 기왓조각도 찾아볼 수 있다. 이규보가 남긴 일기를 통해 원효방의 모습을 더듬어 본다.

  부령현의 사또인 이군(李君)과 다른 손(客) 6, 7명과 함께 원효방에 갔다.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층이나 되어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찬찬히 올라가니,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는 듯 했다. 듣건대 종종 호랑이와 표범이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분이 옛날 이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원효가 와서 살게 되니 사포가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다려서 원효에게 드리려 했으나 샘물이 없어서 딱하게 생각하던 중, 물이 갑자기 바위틈에서 솟아났는데, 그 맛이 매우 달아 마치 젖 같았다. 이로부터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여덟 자의 크기이다. 여기에 한 늙은 중이 거처하는데,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헤어진 누비옷에 도통한 얼굴이 고고하였다. 방 한 가운데를 막아 내외(內外)실로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진용을 모셨고, 외실에는 병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뿐 취사도구도 없고 시중 드는 사람도 없었다. 오직 소래사(蘇來寺)에 가서 하루에 한 재(齋)에 참예할 뿐이라고 한다.


  위 기록에서 보듯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났다고 했는데 지금도 바위 아래 굴 안쪽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땅을 적시며 약간씩 흘러내릴 정도이며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다. 이를 원효샘 또는 유천(乳泉)이라고 한다.

/허정균/huhja@buan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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