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 - 국보 제101호 (둘) 完

2014. 3. 22. 02:02여행 이야기

 

 

 

 

 

      

경복궁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 - 국보 제101호 (둘) 完

                                     / 20140314 금요일 오후

 

 

 

 

 

 

 

 

 

 

 

 

 

 

 

 

 

 

 

 

 

 

 

 

 

 

 

 

 

 

 

 

 

 

 

 

 

 

 

 

 

 

 

 

 

 

 

 

 

 

 

 

 

 

 

 

 

 

 

 

 

 

 

 

 

 

 

 

 

 

 

 

 

 

 

 

 

 

 

 

 

 

 

 

 

 

 

 

 

 

 

 

 

 

 

 

 

 

 

 

 

 

 

 

 

 

 

 

 

 

 

 

 

 

 

 

 

 

 

 

 

 

 

 

 

    성인이 되고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고 보니 지금까지 이만큼이나 살아올 수 있는 이유가 스스로 뛰어나고 잘나서가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의 보살핌과 도움으로 살아왔음을 어렴픗하게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낳아 길러준 부모님, 형제, 애써 가르쳐준 스승들, 사회에서 만난 지인들, 훌륭한 책과 그림과 음악들. 더 나아가 푸른 하늘과 초록빛 수목, 황토 빛 대지 등 무엇 하나 나에게 베풀지 않았던 것이 없습니다.

 

    그 중 오랜 풍상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주는 문화유산도 매우 고마운 대상인데 현재 우리의 생각과 생활이 왜? 어디서 왔는지? 를 알려주기에 더욱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수많은 귀중하고 고마운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 볼 때마다 저의 가슴 한편이 얼얼할 만큼 뭉클함을 전해주는 문화재가 한 점 있으니 경복궁 고궁박물관 옆에 외롭게 서있는 국보 제 101호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址 智光國師玄妙塔碑) 입니다.

 

 

은행나무 밑 벤치에 앉아 묘탑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저만의 특별한 즐거움입니다.

 

 

 

    지광국사 현묘탑은 지광국사 해린(海麟)의 묘탑으로, 지광은 시호(諡號)이고 현묘는 묘탑 이름입니다. 국사는 열여섯 살 때 법천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평양 중흥사, 수다사, 해안사등을 거쳐 덕종 때 삼중대사에 올랐다가 수좌(首座)가 되고, 정종 말에 승통(僧統)이 되었습니다. 문종 때는 현화사로 옮겨 법상종 교단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1056년 왕사(王師)가 되었고, 얼마 안 있어 국사(國師)에 올라 왕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은퇴한 뒤로는 계속 법천사에 머무르다 1070 10월에 입적했습니다.

 

    원주 부론면 법천리에 서있는 국보 56호 지광국사현묘탑비를 고려 선종 2(1085)때 세웠으므로 현묘탑의 조성 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화려하게 조각된 현묘탑. 특히 여러 문양에서 옛 페르시아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당시 국제적 문화교류의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왕조가 얼마나 그를 존숭했는지는 그의 묘탑의 화려함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부도에서 보기 쉽지 않은 평면 방형으로 안정감과 장중함을 보여주며 각 부재마다 사리 장엄구를 운반하고 있는 인물상, 구름, 신선들, , 산수풍경 등 정교한 문양들이 수를 놓듯 조각되어 있습니다.

 

    현묘탑 문양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1층 탑신에 새겨진 이국적인 사람들이 가마에 사리를 운반하는 문양인데 원나라 시대의 가마와 그 가마를 들고 가는 사람들의 머리모양과 옷차림으로 볼 때 서역사람들을 표현한 것이 분명합니다.

 

 

 

 

마치 커튼을 친듯한 모양의 옥개석과 그 아래 사리운반용 가마의 화려함이 매우 인상적이다.

 

 

 

    또 2층 탑신에 문비 문양과 2층 옥개석 가운데는 부처를 모서리엔 봉황을 새겼으며 상륜부 여덜 모서리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극락정토에 사는 새인 인두조신(人頭鳥身)의 가릉빈가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국사가 죽어 극락정토에 환생함을 기원하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은 현묘탑을 더욱 경건하게 보여주며

 탑신의 문비는 이곳에 중요한 사리가 보관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재주가 너무 많으면 빈곤하고 미인은 박명이라 했던가요?

장중함과 화려함을 두루 갖춘 현묘탑은 원래 원주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터에 현재 그곳에 있는 국보 제59호인 지광국사 현묘탑비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탑과 탑비는 거의 천 년 동안 나란히 서로를 보듬으며 있던 중 1911년 가을 현묘탑을 강제로 머나먼 이국 땅인 일본으로 무단 반출한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천 년 동안이나 서있던 현묘탑을 일본으로 무단 강탈했으니 말썽이 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론이 악화되자 민족감정을 자극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조선 총독부가 일본인 소유자에게 압력을 넣어 1912년 다시 한국으로 가져와 당시 총독부가 있던 경복궁 뜰에 세워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현묘탑 안에 모셔져 있던 사리장신구와 경전들은 행방이 묘연한 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부도탑을 세운 이유는 바로 사리를 모시기 위함인데 사리기를 잃어버렸으니 심장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현묘탑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방이 되고 이제 조국의 품에서 편하게 자리잡으려 했으나 곧이어 터진 6.25 전쟁으로 또 한번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는데 전쟁의 포화 속에서 어느 날 경복궁으로 날아온 포탄 하나가 아무 죄도 없는 현묘탑에 명중되었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끔찍했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두경 사진집]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보고서 하나]에서 재인용

기록에 의하면 탑의 부서진 조각이 1 2천 개나 되었다고 한다.

 

 

 

    제자리를 떠나 밧줄에 꽁꽁 묶여 머나먼 이국 땅까지 갔다가 돌아와서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낯선 경복궁 뜰에 서있다가 눈 먼 포탄으로 온 몸이 쪼개지는 아픔을 겪은 현묘탑.

 

    1 2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진 현묘탑을 복원시킨 것은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혹독한 세월을 예상했듯이 하늘은 우리나라에 뛰어난 문화재 전문가를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한국 고건축계와 수리복원의 선구자인 문화재기술자 임천(林泉, 1908~1965) 선생이 그 입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 춘천 청평사 극락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등을 해제 복원했으며 6.25때 타버린 진주 촉석루의 재건과 서울 남대문도 그가 중수 복원한 것입니다.

 

    그는 국립박물관 일원으로 1957년 경복궁 뜰에 처참하게 쓰러진 현묘탑을 남아있는 조각은 붙이고 가루가 되어버린 부분은 원래 돌을 섞어 만든 재질로 복원을 시켜놓아 여러 상처투성이나마 기적적으로 복원에 성공했습니다.

 

    그런 현묘탑은 마음의 상처를 한번 더 받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로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에 맞춰 그 동안 경복궁에서 함께 어울려 지내던 다른 부도와 석등들이 용산 야외전시관으로 전부 이사를 갔지만 부재를 간신히 붙여놓은 현묘탑은 중환자실 환자처럼 절대 안정을 해야 하는 처지라 함께 새집으로 가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 친구들을 쓸쓸하게 떠나 보내고 이제 홀로 경복궁 귀퉁이 뜰에 서있는 현묘탑. 저는 이 아름다운 현묘탑을 만날 때마다 고맙고 감사하다고 혼자서 말을 걸곤 합니다.

 

    우리 근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함께하듯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다치고, 깨지고 그리고 친구들마저 다 떠나버려 외로움에 쓸쓸하여도 이렇게 아직 살아주어서, 이렇게 천 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선사들의 고귀한 정신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몸으로 보여주어 눈물 나게 고맙다고 말입니다.

 

 

2007 . 11 . 17

 

 

금강안金剛眼

 

 

                                            -      다음 카페 <이화비교문학> 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