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7. 02:37ㆍ사진이야기
강화 전등사 영산대재 - 승무
/ 20140928 일요일, 맑음
계절을 잊은 듯 늦게 핀 붉은병꽃나무(봄에 피는 꽃)
가족들과 함께 오신 분들...
이삭여뀌
뽕나무버섯부치
생태: 여름부터 가을까지 각종 활엽수 밑동, 그루터기,
죽은 가지 위나 매몰된 나무 위, 또는 주변 땅에 속생하는 버섯이다.
식용여부: 식용버섯이나 소화가 잘 안된다.
약리작용 : 항종양(Sarcoma 180/마우스, 억제율 54%)
항그람음성균(Salmonella typhy, S. typhimurium, Shigella sonnei)
항곰팡이(Trichopyton mentagrophytes, 무좀균)
항바이러스
적응증 : 담낭염, 만성간염
-< 한국약용버섯도감>1999. 교학사 간행,143~145쪽 참조
표범나비 종류
관솔에 새긴 석가모니불좌상
승무 예행연습
호국사찰 답게 무궁화도 곱게 피었다.
- 오후 1시에는 호국영령을 위한 ‘영산대재(靈山大齋)’를 연다.
호국영령 위령제에서는 1944년 중국군 유격대에서 활동한
인천출신 애국지사 이경훈 독립운동가를 기린다.
청사초롱과 각종 오방색 번기(幡旗)들
바라춤 비구니팀 입장
약사전
영산대재 꽃꽃이 장식
바라춤 비구니스님팀 좌정
명부전 벽화들....
명부전의 벽화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망자(亡者)들의 넋을 위로하고
영가들을 극락에 천도하기 위하여
과거에 어떠한 불교사상으로 어떤 불교의식을 행하였는지
그 족적이 불교회화 문화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천주악천녀도(飛天奏樂天女圖)
바라,요고(腰鼓), 푸른 꽃을 들고 춤을 추는 천녀
청룡도 (靑龍圖)
비천주악천녀도
쟁(箏), 세로피리,법고
구름무늬(운문 雲紋)위의 삼존불좌상도
지장보살(좌) 석가모니불(중), 관음보살(우)
비천주악천녀도
요고(腰鼓,장구)를 치는 천녀, 황(篁)을 부는 천녀, 춤을 추는 천녀
비천주악천녀도
천녀들의 얼굴이 중성화되어 표현.
대금,법고,춤
황룡도
제 14회 삼랑성 역사문화축제 일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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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 주요내용 | 일시 |
개막식 | 내빈소개 / 위원장 인사 / 내빈축사 | 9월 27일(토) 오후 6:00 |
가을 음악회 | 김종환 / 리아킴 / 권진원 / 최백호 / 마야 / 사회: 전재향 | 9월 27일(토) 오후 7:00 |
전등사 역대조사 다례재 | 육법공양 / 다례재 / 음성공양 | 9월 28일(일) 오전 10:30 |
영산 대재 | 2014인천출신 이경훈 독립운동가 위령제 | 9월 28일(일) 오후 1:00 |
전통혼례 한마당 |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강화지역 이주여성 부부 2쌍에 대한 실제 결혼식 | 10월 4일(토) 오후 1:00 |
마당극 | 돌아 온 약장수 | 10월 5일(일) 오후 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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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 장소 | 일시 |
和 Ⅰ. 현대중견작가 和- Harmony 展 | 정족사고 특별전시관 | 9월 19일(금) ~ 10월 5일(일) |
和 Ⅱ. 그림전시 會通 展 | 무설전 특별전시관 | 9월 19일(금) ~ 10월 5일(일) |
和 Ⅲ. 서각書刻 展 | 대조루 특별전시관 | 9월 19일(금) ~ 10월 5일(일) |
和 Ⅳ. 사찰 사진 展 | 무설전 마당 | 9월 19일(금) ~ 10월 5일(일) |
和 Ⅴ. 시화 展 | 대웅전 마당 | 9월 19일(금) ~ 10월 5일(일) |
和 Ⅵ. 고 기와 그림 展 | 전등각 | 9월 19일(금) ~ 10월 5일(일) |
제14회 전국학생 미술실기대회 | 전등사 일원 | 9월 27일(토) 오전 10:30 |
제4회 삼랑성 글쓰기 대회 | 전등사 일원 | 9월 27일(토) 오전 10:30 |
경관조명 및 국화전시 | 전등사 일원 | 9월 19일(금) ~ 10월 26일(일) |
템플스테이 및 템플라이프 | - | 9월 19일(금) ~ 10월 5일(일) |
의의 | 행사내용 | 일시및장소 |
체험 행사 | 서각 / 도자기 물레/ 천연비누/ 한지공예/ 목공예 외 | 9월 27일, 28일, 10월 4일, 5일 |
부대행사 | 특산물 장터 / 먹거리 장터 | |
기타 행사 | 무료가훈 써주기 |
- 다음 카페 <길상초등학교 제45회 동창회> 안용석 님의 글 중에서 발췌 ...
영산대재 시작을 알리다.
영산대재 반주자 : 국립국악원 단원
이번 영산대재는 일체의 보여주기 위한 공연요소를 배제하고
불교음악과 춤의 전통 작법(作法)대로 봉행하라는
제14회 삼랑성 역사문화축제 위원장이신
전등사 주지 범우스님의 당부를 전하는
조계종 전통불교문화원 지도교수 스님의 안내가 있었다.
승무 봉행 교수님 입장
풍어판(風魚鈑)이 없는 풍경
- 전등사 명부전
승무 시 詩의 산실 - 수원 용주사
승무 시비
▲ 2005년 6월5일 용주사에서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 2005년 6월5일 용주사에서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조지훈 趙芝薰 [1920.12.3~1968.5.17]
본명 동탁(東卓). 1920년 경북 영양(英陽)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혜화전문(惠化專門)을 졸업하였다.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과 함께 1946년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1952년에 시집 《풀잎 단장(斷章)》, 1956년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을 간행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와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은 이 무렵에 쓰인 것들이다.
1962년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겼으나 그 방대한 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詩碑)가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 다음 블로그 <강원 양양 동명서원 (해월정) >
晛溪亭 님의 글 중에서 발췌 .....
명부전 문의 연화단청
승무는 법고춤으로 이어지고.....
참고 자료 - 조지훈의 <시의 원리>(珊瑚莊刊, 1956)에서
"나는 한편의 시가 이루어 지기까지에는 어떠한 과정을 밟는가 하는 데 대하여
졸시 '승무'의 작시 체험을 말함으로써 시의 비밀을 토로하겠습니다.
내가 승무를 시화(詩化)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는 열 아홉 때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이 '승무'로써 나의 시세계의 처녀지를 개척하려고 무척 고심하였습니다만
마침내 이 보다 늦게 구상한 '고풍의상'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난산(難産)의 신(新)을 회태(懷胎)하기까지 나는 세 가지의 승무를 사랑하였습니다.
첫 번은 한성준(韓成俊)의 춤, 두 번째는 최승희(崔承喜)의 춤, 세 번째는 이름 모를 승려의 춤이 그것입니다.
나는 무용 비평가가 아니므로 그 우열을 논할 수 없습니다만 앞의 두 분 춤은
그 해석이 나의 시심에 큰 파문을 던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승무에의 호기심을 일으켜 몇 번의 기녀(妓女)가 추는 승무에까지
이끌어 갔던 것이니 승무를 시화케 한 최초의 모멘트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내가 참 승무를 보기는 열 아홉 살 적 가을이었습니다.
그 가을 어느 날 수원(水原) 용주사(龍珠寺)에는 큰 재(齎)가 들어 승무 밖에
몇 가지 불교전래의 고전음악이 베풀어지리라는 소식을 거리에서 듣고 난
나는 그 자리에서 수원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밤 나의 정신은 온전한 예술 정서(情緖)에 싸여 승무 속에 용입(溶入)되고 말았습니다.
승무 / 이당 김은호
1912년 8월 서울의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화과(畵科)에 입학하여 조석진·안중식의 제자로 전통 회화 기법을 배웠다. 1915년에 화과(畵科) 과정을 졸업하고, 1917년에는 서과(書科) 과정도 수료하였다.
재(齋)가 파한 다음에도 밤늦게까지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서
넋없이 서있는 나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시정(詩情)을 느낄 땐 뜻 모를 선율이 먼저 심금을 부딪힘을 깨닫습니다.
이리하여 그 밤의 승무의 불가사의한 선율을 안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이듬해 늦은 봄까지 붓을 들지 못하고 지내왔었습니다.
춤을 묘사한 우리 시가(詩歌)로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이 아직 없을 때이라
나에게는 오직 우울밖에 가중(加重)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마디의 언어 한 줄의 구상도 찾지 못한 채 막연한 괴로움에 싸여 있던
내가 승무를 비로소 종이 위에 올리게 된 것은 내 스무 살 되던 해의 첫여름의 일입니다.
예술전람회에 갔다가 김은호(金殷鎬)의 {승무도(僧舞圖)} 앞에 두 시간을 서 있은 보람으로
나는 비로소 우려 78자의 스캐치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움직임을 미묘히 정지태(靜止態)로 포착한 이 한폭의 동양화에서 리듬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지당한 발견이었으나 이 그림은 아까 기녀(妓女)의 승무를 모델 한 상 싶어
내가 찾는 인간의 애욕 갈등 또는 생활고의 종교적 승화 내지 신앙적 표현이 결여되어
그때의 초고(草稿)는 겨우 춤의 외면적 양자(樣姿)를 형상(形象)하는 정도의
산만한 언어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을 통해서 내가 잡지 못해 애쓰던 어떤 윤곽을 잡을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나는 이 초고를 몇날 만지다 그대로 책상 위에 버려둔 채 환상(幻想)이 가져오는
소위 시수(詩瘦)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 승무로 인하여 떠오르는
몇 개의 시상을 아낌없이 희생하기까지 하였으나
종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용주사(龍珠寺)의 춤과 김은호의 그림을 연결시키고도
왜 시를 형성하지 못했던가?
이는 오직 춤을 세밀히 묘사하면 혼의 흐름의 표현이 부족하고 혼의 흐름에 치중하면
춤의 묘사가 죽는 말하자면 내용과 형식, 정신과 육체, 무용과 회화(繪畵)의 양면성을
초극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초극하고 한 편의 시를 만들기는 또다시 몇 달이 지난 그해 10월
구왕궁(舊王宮) 아악부(雅樂部)에서 {영산회상(靈山會相)}의 한가락을 듣고 난 다음날이었습니다.
아악부를 나서면서 나는 몇 개의 플랜(plan)을 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이 시를 이루는 골자(骨子)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초고에 있는 서두의 무대 묘사를 뒤로 미루고 직입적(直入的)으로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을 그릴 것,
그 다음 무대를 약간 보이고 다시 이어서 휘도는 춤의 곡절(曲折)로 들어갈 것,
그 다음 움직이는 듯 정지하는 찰나의 명상의 정서를 그릴 것,
관능의 샘솟는 노출을 정화(淨化)시킬 것,
그 다음 유장(悠長)한 취타(吹打)에 닳는 의상의 선을
그리고 마지막 춤과 음악이 그친 뒤 교교(皎皎)한 달빛과 동터오는 빛으로서 끝막을 것,
이것이 그 때의 플랜이었으니 이 플랜으로 나는 사흘동안 퇴고(推敲)에 퇴고를 거듭하여
스무 줄로 된 한 편의 시를 겨우 만들게 되었습니다.
퇴고하는 중에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장삼(長衫)의 미묘한 움직임이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여덟 줄이나 되는 묘사를 지워버리고 나서 단 두 줄로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라 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전편 15행의 다음과 같은 시 하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시 전문 생략…
오래 앓던 작품을 완성하였을 때의 즐거움은 컸다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처음 의도에 비길 때 너무나 모자라는 자신의 기법에 서글픈 생각이
그에 못지 않게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든 구상한지 열 한달, 집필한지 일곱 달만에 겨우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로써
나의 승무의 비밀은 끝납니다.
써 놓고 보니 이름 모를 승려의 춤과 김은호의 그림과 같으면서도
다른 또 하나의 승무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춤은 내가 준 승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춤추는 승려는 남성이었드랬는데 나는 이승(尼僧)으로 그림의 여성은 장삼을 입은 속녀(俗女)였으나
나는 생활과 예술이 둘 아닌 상징으로서의 어떤 탈속한 여인을 꿈꾸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이 승무는 나의 춤이 되는 까닭이 되기 때문입니다.
열 아홉의 아름다운 체관(諦觀)! 슬픔도 이렇게 즐겁고 볼 양이면
내가 어찌 시를 떠나서 살 법이 있으랴만
이러한 고심에 비하여 시가 얼마나 초라한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으니
이는 끝내 내가 시인이 아니고 말아도 서러울 리 없기 때문입니다.
뒷날 어느 선배는 나의 시에서 언어의 생략을 충고하였으나
유장(悠長)한 선을 표현함에 구슬같이 밝고 가벼운 언어만으로서는 도저히 뜻할 수 없어 오
히려 리듬을 위하여 부질없는 듯한 말까지 넣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연(自然)한 해조(諧調)를 이루는 빈틈없는 부연(敷衍)은 생략보담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여기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 조지훈의 <시의 원리>(珊瑚莊刊, 1956)에서
이당 김은호의 미인승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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