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는 꽃같은 소년들이 있었으니 이를 화랑이라 하였다

2015. 2. 1. 02:21들꽃다회

 

 

 

 

 

      [궁금하면오백원] 신라에는 꽃같은 소년들이 있었으니 이를 화랑이라 하였다| 야, 이거봤어?

                   케이트 모스 | 조회 1834 |추천 3 | 2012.10.31. 19:37

 

 

 

내가 아는 카페, http://cafe.daum.net/cs11sz ⓒ 케이트 모스

 




▼ 19세기 유럽을 뒤흔든 우키요에의 거장 토슈샤이 샤라쿠는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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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와 정약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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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모카들?

지난 번에 정조와 정약용 이야기를 쩠던 케이트 모스야.

열화와 같은 성원 고마웠어. 

정약용에 대해서 할말은 더 많지만 안할게 ㅋㅋㅋㅋ

나머지는 우리의 망상으로만 남기자. 


내 글을 꾸준히 봐주고 있는 모카들은 십자군 이야기로 더 잘 기억하고 있겠지?

그런데 십자군 이야기는 당분간 지지부진 할듯ㅜ 

글을 찌기전엔 충분히 이것저것 검색해보고 이해한 다음에 글을 찌는데, 

지금 내가 ㅋㅋㅋㅋ 니케아 공략에서 막혔어. 전투씬이라 헷갈린당.


그래서 오늘은 신라의 화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까 하는데, 

내 글은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작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쓰는거야. 

화랑세기가 위작이다- 라고 생각하는 모카들에겐 좀 불편한 이야기 일 수도 있으니 그 점 감안해주길.


 


화랑花郞

꽃소년

 

 

화랑은 꽃 화 남자아이를 뜻하는 사내 랑자를 써서 뜻은 꽃소년, 혹은 미소년으로 해석할 수 있어. 

우리들이 생각하는 화랑의 이미지도 위와 같은 이런 이미지잖아? 

그렇다고 손에서 불♨ 안나옴여;;; 

사실 이 그림은 어딘가 일본색이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저 다리에 하고 있는 붕대들 때문일거야.

저건 일본 사무라이들이 하고 다니던 복색임. 

그리고 복색만 봐서는 낭도일거야. 쓰고 있는 관모가 낭도가 쓰는 관모임.


 

공의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는데,말이 떨어지면 바람이 일었다.

필사본 화랑세기, 1세 위화랑


피부가 옥과 같이 부드럽고, 눈은 미소짓는 꽃과 같고, 음율과 문장을 잘 하였다. 

필사본 화랑세기, 4세 이화랑


 

으악, 손발이 퇴화되는 듯한... 이 클리셰.

bl의 시초는 이 때부터라고 해도 될듯하다. ㅋㅋㅋ


화랑세기에는 화랑들의 미모에 대해서 서술되어 있는데, 정말로 미소년의 집단이었나 봄.

우리가 bl물을 볼 때도 얼마나 미소년이고 꽃소년인가를 생각하게 되잖아?

신라는 어쩌다가 이렇게 꽃돌이들만 모아서 한 집단을 만들게 된걸까?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서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이름하여 이를 받들게 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가악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유람하는데,

 먼 곳이라도 다니지 않는 데가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장

 


 


선덕여왕에서 나온 미실. 원래 원화도 화랑과 같은 것이었어.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었으니 풍류라 이른다.

최치원의 난랑비서

 

이에 앞서 이미 풍류라는 도가 있었고, 

이미 신라사회에는 이들 사상을 포함하였다고 할 만한 고유사상을 가진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신라에는 원시 때 부터 촌락 내부에 청소년집단이 있었는데, 이 집단을 말하는 것 같아.

그러다가 이 집단이 원화제도로 발전했어. 

그런데 익히 알다시피 질투에 눈이 먼 준정이 남모를 살해하면서 

여자 대신 남자를 화랑으로 삼게 되었다는 설명이지. 


 

여기서 잠깐 남모와 준정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남모의 아버지는 법흥왕, 그리고 어머니는 백제 동성왕의 딸인 보과공주 부여씨의 딸이였어. 

이른바 남모공주임. 완전 엄친딸이지? ㅎㅎㅎ


남모와 준정은 최초의 원화(화랑)로 뽑혀 각각 300여명의 무리가 따르게 했어. 

둘 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미모도 뛰어나서 서로가 서로를 라이벌이라 생각했었지.


준정은 박영실이란 자를 매우 섬겼는데 지소태후(진흥왕의 모후)가 이 자를 싫어했어. 

근데 함정은... 박영실은 지소태후의 또 다른 남편이다;;;;;;

그리고 족보가 좀 꼬이는데 영실은 미실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함;;

여튼 지소태후와 영실 둘 사이에 딸도 있었지만 사이 안좋았음.


 지소태후는 그래서 준정의 원화들을 모두 위화랑(제1대 풍월주)에게 낭도로 줬어.

그 후에 준정은 빡쳐서 남모를 집에 초대해 술 맥이고 강에 빠트려 버린거임.

이 이후로 원화를 뽑았던 것이 없어지고 오로지 남자로만 구성된 화랑도가 되었던거야.


 

화랑의 자격은 대게 15, 6세인 꽃소년을 부분장식을 시켜서 받들어 추대했고, 

그 무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낭도라고 하고, 그들 중 대빵인 자를 풍월주라고 했어. 



 

 

유신현우 안녕, 오랜만이네;;



 

우리가 익히 아는 김유신이나 무관랑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사다함, 

훗날 신라 장군이 되는 설원랑, 춘추의 아버지 용춘,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 등등 신라 역사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 대부분이 화랑 출신이야.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삼국사기에 화랑세기의 한 구절에 있는 내용인데 이를 인용한 것으로 보아서

적어도 삼국사기가 편찬 되었던 고려 때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데, 

지금은 필사본 화랑세기만 전해져 오고 있고 진본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 

그래서 위서이냐 아니냐라는 문제로 지금까지도 말이 많아. 



 

덕업일신 망라사방

왕의 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


 

신라 제 14대 왕인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야 신라는 이때까지 사라, 사로로 불리어 오던것을 신라로 고치게 돼.

이때 신라는 덕업일신 망라사방이라는 문장에서 신라라는 국호를 가져 와.

드라마 선덕여왕을 열심히 본 모카라면 이 국호에 담긴 의미 세가지를 찾아오라고 나오는데, 

그건 픽션이 가미된거고 어쨌든 신라를 사방에 알리라는 뭐 그런 뜻임. 


 

하지만 삼국통일이라는 가업은 지증왕때 부터 시작되었던게 맞는거 같아. 

진흥왕은 지증왕의 증손자로 어릴때 할머니 보도부인의 손에 자랐는데,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 즉, 세사람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뜻이지- 



 


 

진흥왕은 법흥왕의 아들이 아니었어.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의 아들이었는데, 법흥왕이 아들이 없었거든. 

그래서 자기 딸인 보도공주와 동생인 입종 갈문왕 결혼시킴. 왕위를 입종 갈문왕에게 주려고.

그런데 입종 갈문왕이 먼저 사망함. 그래서 진흥왕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어. 


하지만 법흥왕도 지증왕의 손자였어. 

왜냐하면 지증왕이 너무 늦게 왕위에 올라가지고 장자였던 큰아들이 일찍 죽음 ㅠ

그래서 손자였던 법흥왕이 지증 마립간(왕)의 뒤를 이었던거야. 

진흥왕의 삼맥종이란 이름은 세 사람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뜻에서 유래한거임. 

어쨌든 지증왕의 유훈이 있기는 있었나 봄. 


* 법흥왕이 지증왕의 손자가 아닌 아들이라는 말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는데 진흥황의 삼맥종이란 이름이나

삼국사기에 있는 왕 재위 기간을 계산 했을때 법흥왕이 지증왕의 아들이 아닌 손자로 보는게 맞대.


 

그래서 진흥왕 때 백제와 고구려간의 전쟁을 많이 치뤘는데, 

백제로 부터 한강이남의 땅을 차지하게 된것도 진흥왕 때야. 



 


 

사진의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에 있는건데, 

이것 말고도 마운령비, 창녕 순수비, 황초령비등이 오늘날까지 밝혀진 진흥왕 순수비야. 

특히 황초령비는 함경남도 오로군(북한)에 있는건데 그만큼 진흥왕은 영토를 확장해갔어.

이때 많은 힘을 보여준게 화랑들이었지.


오늘날로 치자면 화랑들은 사관학교에 가는 만 20세 이상의 남성여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물론 그 미모들은 캐바캐이겠지 ㅠ

여튼 화랑들은 전장에서 어린나이 답지않게 많은 무훈을 쌓아. 


 

진흥왕은 화랑이라는 집단이 보여주는 능력과 실력을 보고 이 화랑도를 국가조직으로 개편해.

후에 보면 고관대작들 중에 이 화랑 출신인 사람들이 많은데 화랑은 일종의 엘리트 그룹 같은거였던게 아닐까?

조선조 세종 때의 집현전 학자 그룹이나, 

정조 때의 규장각 초계문신들 같은 엘리트 집단 말이지. 


이렇게 화랑은 지증왕의 유훈을 이어받은 신라의 밑거름이자 삼한일통의 시초였어.




 

마복자

배를 문질러 낳은 아이


 

화랑세기에 의하면 당시 신라에는 가톨릭의 대부대모 같은 제도가 있었어.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 시선으로 보면 참으로 요상하단 말이지. 


왜냐하면 계급이 낮은 아버지가 자신을 임신한 어머니를 계급이 높은 상관에게 성관계를 하게 해서 태어나게 하는거거든.

그러니까 생물학적 아버지와 비생물학적 아버지 둘이 생기는 거임. 

이것이 바로 마복자라는 제도인데, 귀족간에도 이 마복자 풍습이 있었지만 대체로 화랑들 사이에서 성행했어.

특히 화랑의 간부층이라고 할 수 있는 낭두들은 대체로 풍월주의 마복자들이었대.


 

제1대 풍월주인 위화랑의 경우 지증왕의 선대왕인 소지 마립간(왕)의 마복자였고,

법흥왕 또한 소지 마립간의  마복자였어. 

그러니까 법흥왕의 모후인 연제부인도 소지 마립간과 관계가 있다는뜻이지. 

또한 신라 장군 이사부- 로 유명한 이사부 역시 소지 마립간의 마복자였어.

(대체 소지 마립간의 마복자는 몇명이냐?)

그리고 우리에게 미실로 유명한 미실궁주의 아들들 몇몇도 진흥왕의 마복자였지. 


 

왕의 마복자일 경우 왕자나 공주는 아니지만 왕의 보호를 받았어. 

그래서 왕의 마복자는 왕족이어야만 했고, 귀족가문의 자제들로만 이루어진 화랑에서 특히 두드러졌지. 


 

 

성적인 토우가 달린 신라토기.  이거 다음클다서 경고올까?



 

성에 대해서 굉장히 개방적인 사회였던 신라에서만이 가능했던 일임에는 틀림없어.

특히나 신라는 역사적으로 보면 족보가 엄청 꼬여있어.

기본적으로는 일처다부제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처다부제임.

왕족이야 원래 자신들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역사적으로 많은 근친혼을 한다지만, 

신라만큼 중혼과 사통이 가능한 나라는 별로 없는듯여;;


김유신도 결혼 많이 했음. 부인이 다섯이나 됐음. 첩 아님. 부인임. 다섯 다 부인임. 

천관녀 말 주살 사건은 고려의 유학적 사관에서 본것이지, 실제론 부인으로 맞아서 아들도 낳았음. 


 

이 마복자라는 제도는 누이좋고 매부좋고 도랑치고 가재잡는 괜춘한 시스템이었어.

마복자를 거느린 자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자신의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었고,

마복자들 또한 자신들의 후원자가 생기는 동시에 마복자들의 생부나 생모의 경우에도 사회적 지위를 보장 받았거든.


그런데 모카들, 

이 마복자라는 시스템이 나이 어린 소년이 나이 많은 남성을 성적으로 만족시켜주는 시스템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용양신

용과 양물, 그리고 신하


 

소지 마립간에게는 마복칠성이라 불리는 마복자들이 있었는데, 

화랑세기에서는 이 마복칠성의 우두머리가 법흥왕이라고 말해. 

그런데 소지 마립간은 마복자를 왜 이렇게 많이 두었을까?


역사적으로는 어떤인물이었는지 기록이 거의 없는 영실공이 자꾸 나오는데, 

이 영실이라 부르는 자는 법흥왕의 용양신이었어. 


용양신의 뜻은 왕과 신하가 양물을 주고 받는다라는 의미야. 

 즉 영실은 남색으로 법흥왕에게 봉사했어. 

용양신은 미실과 같은 색공지신과 같은 뜻인것이지. 


그런데 이 용양신에 대한 이야기도 화랑세기에 나와. 


 

7세 설화랑의 처음이름은 설원랑이다. 금진낭주와 설성이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그 아버지인 설성은 낭도로서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려 구리지의 용양신이 되었다. 


 

여기서 나오는 구리지는 소지 마립간의 딸인 벽화부인이 다른이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야. 

궁궐의 화장실에서 사통하다 낳았다 해서 이름이 구리지;; 

어쨌든 왕족이였는데 설성의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려서 구리지의 용양신이 되었어. 

설성이 남색으로 구리지에게 봉사했다는 말이야. 


그런데 사실 구리지는 사다함의 아빠였음. 그런데 사다함의 엄마인 금진낭주가 설성이랑 사통함. 

그래서 낳은게 설원랑. 설원랑이 사통한게 미실. 둘 사이에 나온게 보종; 

그런데 이 금진낭주가 입종 갈문왕이랑 결혼해서 낳은 것이 숙흘종,

이 숙흘종의 외손자가 김유신. 


 


 

더 대박인것은-

아들 사다함이 아끼고 아낀 무관랑의 죽음의 원인이 이 금진낭주한테 있음. 


설성이 전장터에서 죽고 나서 엄마 금진낭주는 사다함의 절친 무관랑을 강간함;

그 이후로 수차례 금진낭주한테 불려다녔는데,

 무관랑은 사다함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다 해서 궁을 탈출하다 물에 떨어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사다함을 그런 무관랑과의 우정을 생각하며 시를 짓고 7일간 통곡하다 결국 자결함; 

그런데 이 사다함이 당시 미실이랑 연인사이였어.


아, 이 빠져나올 수 없는 섹셉션이여-


 

궁주는 이에 윤궁의 딸 현강에게 보종공을 모시게 했으나, 공은 접촉한 일이 없이 호림공을 불러 함께 살았다.


보종공은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인물과 산수의 절묘함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호림이 좋아해서 부제로 삼았다.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아 스스로 여자가 되어 섬기지 못함을 한스러워했다.

16대 풍월주 보종공전


 

 

천광공은 수품공의 아들이다. 얼굴이 아름다운 꽃과 같고 교태는 마치 부인과 같았다. 

공은 나이 14살에 흠순공이 풍월주로 있을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양도공이 보고 좋아하니 정이 마치 부부같아, 

그 아래 소속되어 폐신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양도공이 여러번 공의 집에 와서 잤다. 

24대 풍월주 천광공전


 


이 수려한 호림공이랑 그... 보종이? 


 

미실의 막내아들 보종이 호림공을 여자로서 섬기지 못해 한스러워 하다니!!

천광공이 양도공의 폐신이 되어 양도공이 여러번 천광공의 집에서 자고 갔다니!!!


폐신이라 함은 국어사전에는 아첨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는 신하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서 폐는 사랑할 폐, 신하 신자를 써서 사랑하는 신하로 해석 돼. 

폐신이란 말은 곧 용양신의 또다른 말인거지. 


성문화가 지금의 우리와는 다른 신라시대에서는 동성애나 남색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을거야. 

신라사회에서는 일반화 돼 있었다는 이야기야.


법흥왕은 자신이 소지 마립간의 마복자로서 동성애를 공급하는 측이었다면, 

반대로 법흥왕이 자신이 왕이 되었을때 동성애를 공급받게 되는 수요자이지 않았을까?



황창랑은 신라 출신으로 화랑이었다

동경잡기

이때에 자술의 용왕신으로 황창랑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계림(신라)사람이었다.

예쁘게 생겼지만 대담하고 용감하였다. 

스스로 자술을 위하여 분서를 찔러 죽이러 가고자 하였으나 자술이 그를 사랑하였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황창랑은 홀로 미녀로 분장하고 분서를 만났다.

음란한 말로 흥미롭게 하자 분서가 그를 좋아하였다. 

분서가 황창랑을 수레 안으로 끌어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자 하였는데, 황창랑이 거리에서 분서를 찔러 죽였다.

남당유고의 을불대왕전


 

낙락왕 자술과 계림출신의 황창랑은 4세기경의 사람들인데,

을불대왕전은 고구려 미천왕에 대해서 쓴 책임.

화랑도가 6세기 진흥왕때 정비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면 이미 화랑이라는 집단은 300년대에도 있었고,

용양신이라는 시스템이 그때도 존재했다는 뜻이야. 역사가 꽤 깊지?

그만큼 신라 사회는 정말로 다른 무슨 말로 언급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신국의 도가 널리 퍼져있었나봐. 


 


세속오계

다섯가지 계율

 


청도 운문사 벽화. 운문사는 삼국유사가 집필 된 곳이라고도 알려져 있지-

 

세속오계라는 말을 우리는 중학교 도덕시간 때 부터 들어왔어.

다른 말로는 화랑오계라고도 하기도 해.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충성으로서 왕을 섬기며, 효도로서 어버이를 섬긴다.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고,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나지 않으며, 

산것을 죽이는 것에는 가림이 있다.


 

세속오계는 진평왕 때 화랑 귀산과 추항이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원광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받아온 계율이야. 

귀산과 추항은 이 계율을 잘 지켜 오다가 602년 백제와의 아막성 전투에서 화랑으로서 순국했어.

후에 이 다섯계율이 화랑도의 신조가 되었고 화랑도가 더욱 크게 발전하는데 영향을 미쳤어. 

 

유교적인 입장에서 놓고 보면 효보다 충이 먼저 나와 있는데,

이는 신라사람들의 강렬한 공동체 의식을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해. 

하긴 이때에는 신라가 전쟁을 많이 치루던 시기이니까 더욱 그러지 않았나 싶어. 


이 처럼 화랑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초가 되었고, 

지증왕의 유훈을 이어받은 진흥왕에 의해서 대대적인 개편을 거쳐 김유신 장군을 배출해내었고,

태종무열왕을 거쳐 통일의 밑거름을 다진 후, 

문무왕에 이르러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여기까지가 신라 화랑에 대한 내 이야기야. 

스압이 좀 길었지? ㅠ 그래도 재미있게 봐줬으면 좋겠어. ㅠㅠㅠ


화랑세기는 7세기때 신라 문장가 김대문이 쓴 화랑 전기문이야.

현재 필사본만 전해지고 진본은 일본 궁내성 왕립 도서관에 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실존하고 있는지, 공개여부를 알 수는 없대. 


화랑세기로 인해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로만 알 수 있었던 신라시대 정치, 문화적인 부분을

완전 획기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됐는데, 아직도 위작이다 아니다로 의견은 분분해.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다른 이야기로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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