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 상공(鰲城相公)이 쓴 〈이백시초(李白詩抄)〉 발

2016. 3. 19.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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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跋)


오성 상공(鰲城相公)이 쓴 〈이백시초(李白詩抄)〉 발



무술년(1598, 선조31) 겨울, 내가 자상 상공(子常相公 이항복(李恒福))과 더불어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가서 임무를 마치고 한가로이 관사(館舍)에 머물다가 대화 도중 이야기가 이백(李白)의 시에 미쳤다. 상공이 말하기를, “절구와 고시(古詩) 단편(短篇)이 더욱 기절(奇絶)하지요. 원컨대 그대가 약간 수를 선별해 주구려. 내가 그대를 위해 필사(筆寫)해 주겠소.” 하였다. 내가 수백여 수를 선별하여 빈 종이로 된 책자와 함께 보냈더니 공이 흔쾌히 붓을 잡고 써서 이틀 만에 나에게 보내 주기에 내가 시를 지어 사례하고 소중히 간직하여 본국으로 돌아와 가보(家寶)로 삼았다.
나는 자상과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왕사(王謝)와 마주 앉은 것 같고 자상의 서척(書尺)을 받으면 마치 《청리첩(靑李帖)》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으로 적선(謫仙)의 시를 썼으니, 그 시원스런 멋이 또 어떠하겠는가. 매양 이 서첩을 펼쳐 볼 때마다 맑은 향기가 몸에 스며드는 듯하니, 필법이 주일(遒逸)할 뿐 아니라 그 풍류와 호방한 기상 또한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제 공의 묘소에는 해묵은 풀이 덮여 있고 그 글씨만 남아 어느새 다 옛일이 되고 말았으니, 슬프도다.
기미년(1619, 광해군11) 가을, 내가 폐축(廢逐)되어 교외에 우거(寓居)하면서 남창(南窓) 김장(金丈)과 집안의 묵적(墨蹟)을 꺼내어 보다가 이 책을 발견하여 읽으매 나도 모르게 초당인일(草堂人日)의 탄식이 나왔다. 이에 남창에게 글씨를 부탁하여 권미(卷尾)에 적어 둔다.


[주D-001]왕사(王謝) :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와 사안(謝安)의 병칭이다. 두 사람은 모두 호기와 풍류가 있었다.
[주D-002]청리첩(靑李帖) : 청리(靑李)는 왕희지(王羲之)의 필첩(筆帖)인 《내금첩(來禽帖)》으로, 첫머리에 ‘청리(靑李)’ 두 글자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주D-003]초당인일(草堂人日) : 두보(杜甫)의 시 〈고인이 된 고 촉주가 인일에 부쳐 준 시에 뒤미처 화답하다.〔追酬高蜀州人日見寄〕〉의 소서(小序)에 “시문을 뒤적이며 망각한 것을 찾다가 고(故) 고 상시 적(高常侍適)이 예전에 성도(成都)에 촉주 자사(蜀州刺史)로 있으면서 인일(人日)에 내 생각이 나서 부쳐 준 시를 발견하고 눈물이 흘러 행간(行間)을 적셨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