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9. 19:37ㆍ여행 이야기
골목길 근대사 - 구림마을산책1 / 골목길 걷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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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림마을산책 1
- 골목길 근대사 : 영암 -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최석호 소장
2016년 5월 7일 토요일
신비한 바위 고을 – 영암
작은 금강산 또는 조계산이라 일컬었던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는 동석(動石)에서 신비한 바위, 곧 영암(靈巖)이라는 고을 이름이 비롯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동석을 신비한 바위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무거워서 천 명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데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뜨릴 것 같은 바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영암은 “푸른 바다와 접하여 웅장한 경치가 많고” 영암사람은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꾸밈이 없다”고 일컫고 있어서 영암이 어떤 고을인지 짐작케 한다.
비둘기 숲과 나라 스승 – 구림마을 국사암
구림(鳩林)은 비둘기 숲이라는 뜻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구림을 도선국사 탄생설화와 함께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라 사람 최씨가 있었는데 정원 안에 열린 외 하나가 길이가 한 자나 넘어 온 집안 식구가 퍽 이상히 여겼다. 그런데 최씨 집 딸이 몰래 그것을 따 먹었더니, 이상하게 임신이 되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부모는 그 애가 사람 관계없이 태어난 것이 미워 대숲에다 내 버렸다. 두어 주일 만에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와 수리가 와서 날개로 덮고 있었다. 돌아와 부모께 고하니 부모도 가서 보고 이상히 여겨 데려다가 길렀다. 자라자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한다. 그는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을 배워고 돌아와 산을 답사하고 물을 보는데 신명스러움이 많았다. 뒤에 그 곳을 구림(鳩林) 또는 비취(飛鷲)라 했다.”
비둘기와 부엉이가 밤낮으로 지켜 나라의 스승을 길러낸 마을이라서 비둘기 숲 ‘구림’이라 했다. 아이를 버렸던 곳은 나라 스승 바위, ‘국사암’이라 했다. 국사암 자리에 국암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국사암
국암서원 강학당 덕성당에는 위창 오세창의 글씨 <朝川德星>을 게액하고 있다. 위창은 우리나라 개화사상의 비조 역매 오경석의 아들로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다. 광복 후 미군정으로부터 대한제국 옥새를 돌려받을 때 우리나라 대표로서 옥새를 받았던 분이다.
위창 오세창이 쓴 글씨. 국암서원 강학당 '덕성당'에 게액하고 있다.
해상실크로드 - 상대포
도선국사와 고운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거나 왕인 박사가 일본에 문명을 전해주러 떠난 곳이 바로 구림마을 상대포다. 지금은 내륙이 되었으나 신라 때에는 바다와 접했던 곳이고 ‘울산-영암-상해-아라비아’로 이어지는 뱃길이 상대포였다. 정원(貞元)이라는 당나라 연호가 새겨진 비석, 貞元銘石碑에는 貞元二年丙寅五月十日이라는 날짜와 함께 猪坪香藏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貞元 2년은 남북국시대 원성왕 2년 즉 786년을 뜻하고, 猪坪은 국가에 바치는 공물을 생산하는 곳을 말하고, 藏은 곡식을 저장하는 穀藏(곡장)을 일컫는 것으로 추측한다. 신라 원성왕 2년 786년 5월 10일에 세운 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호남에서 수확한 곡식 중에서 나라에 바칠 곡식을 구림마을 곡장에 저장했다가 울산으로 가는 배편으로 일차 운반하고 재차 육로를 거쳐 경주로 가는 출항지가 상대포다.
일본 역사서 《日本書紀》에는 백제의 앞선 문명을 일본이 받아들이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제왕이 아직기(阿直伎, 족장을 말한다)를 일본으로 보내 말 두필을 바쳤는데, 아직기는 경서를 읽을 줄 알았다. 그래서 태자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어느 날 천황이 아직기에게 더 나은 박사가 있냐고 묻자, 아직기는 천황에게 王人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천황은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백제로 보내 왕인을 일본으로 불렀다. “왕인이 왔다.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으로 하였다. 여러 전적을 왕인에게 배웠다.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 등의 시조다.”
상대포 '상대정'
2016. 5. 8. 20:48
구림마을산책 2
- 골목길 근대사 : 영암 -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최석호 소장
2016년 5월 7일 토요일
죽림칠현 - 죽림정
서인과 남인은 두 차례 예송논쟁을 했다. 현종 1년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논쟁을 벌였다. 己亥禮訟이다. 우암 송시열은 사대부가와 제왕가의 상례가 다르지 않다면서 기년복(1년)을 주장했다. 반면에 고산 윤선도는 사대부가와 달리 제왕가에서는 차자라고 하더라도 왕위를 계승했다면 次長子가 된다면서 죽은 제왕이 차장자이므로 어머니 자의대비는 참최복(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산 윤선도를 유배 보냈다.
죽림정
숙종 1년 1674년 효종과 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이자 인선왕후의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또 한 차례 논쟁을 벌였다. 甲寅禮訟이다. 제왕가를 높이 받들고자 했던 남인은 기년복(1년)을 주장했지만, 왕과 사대부가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서인은 대공복(6개월)을 주장했다. 대공복으로 하면 현종의 아버지 효종이 서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숙종은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암 송시열을 덕원으로,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1629-1689)을 영암으로 유배 보냈다.
1675년 영암으로 유배 온 좌의정 문곡 김수항은 구림마을 대숲 가에 대나무 집을 지었다. 바람에 부딪치는 대숲소리가 마치 옥 구르는 소리 같아서 풍옥정(風玉亭)이라 했다. 연주 현씨(延州 玄氏) 15세손으로 감역공(監役公, 從9品)과 군자주부(軍資主簿, 從5品)를 지낸 현건(玄健, 1572-1656)이 영암에 처음 터를 잡은 영암사직공파의 중시조다. 현건의 손자 현징(玄徵, 1629-1702)이 숙부의 허물어진 별장 취음정을 옮겨 짓고 정자 이름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문곡은 중국 죽림칠현에 비유해서 竹林亭이라 이름 짓고 죽림정기를 써 주었다. 문곡의 셋째 아들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은 시를 짓고, 넷째 아들 노가재 김창업은 죽림정 당액을 썼다.
죽림정과 당액 및 죽림정기
현징의 아들 현약호(玄若昊, 1665-1709)는 삼연 김창흡을 찾아가 삼벽당기를 받아온다. 아버지 현징이 삼연의 아버지 문곡에게 죽림정기를 받았으니, 아들인 현약호가 문곡의 아들 삼연에게 삼벽당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에서 였다. 그 당시 삼연 김창흡은 아버지 문곡 김수항이 기사환국으로 두 번째 유배지 진도에서 사사된지라 벽계에서 은거하고 있었지만 삼벽당기와 삼벽당 시를 써 주었다. 삼벽당 당액은 우암의 글씨다. 안타깝게도 삼벽당은 사라지고 없다.
때는 1593년 7월 16일이니 그 해 2월 23일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고,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퇴각했다가 6월 29일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행주대첩과 제2차 진주성전투다. 왜군이 호남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견내량을 건너든지 아니면 진주 하동을 거쳐 호남으로 들어가야 했다. 1592년 7월 7일 견내량 앞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했기 때문에 해로를 통해 호남으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산대첩이다. 1573년 7월 21일 마침내 한산도 망하응포(望何應浦, 통영시 한산면 하포리)로 진을 옮겼다. 견내량 봉쇄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이로써 호남으로 가는 해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래서 왜군은 할 수 없이 육로로 침략할 요량으로 진주성을 공격한 것이다.
구림마을산책 完 - 골목길 근대사 : 영암 -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최석호 소장 2016년 5월 7일 토요일
河미술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할 때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상처받고 아픈 인간들을 이해하는 긍휼한 마음과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기도정신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미술작품은 숭고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따라서 미술작품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그 정신을 담는 매개체다. 기도정신은 인간을 구제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기도정신의 매개체인 미술작품 역시 인간을 위로하고 구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 기도정신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작품을 모은 수집가가 있다. 재일동포 하정웅이다. 하정웅은 1939년 히가시오사카시 모리카와우치에서 하헌식과 김윤금의 다섯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하헌식은 16살 되던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식민노동자로 삶을 영위했다. 아키타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한 하정웅은 아키타 시내 여덟 개 고등학교 미술부 연합회 회장을을 하면서 아키타의 사계절을 그림에 담는다. 1959년 졸업식을 마치고 우에노로 가는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메구로에 있는 이코샤라는 회사 설계실에서 근무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일본디자인학교에서 공부하는 생활을 2년째 계속하던 어느 날 새벽 눈이 멀어 석 달 동안 앞을 보지 못한다. 1963년 아내 윤창자와 결혼을 하고 동경 사이타마현에 있는 가와구치에 작은 가전제품판매점을 연다. 1964년 동경올림픽 특수를 누린다. 일본 경제가 급성장하는 와중에 시작한 부동산사업까지 성공하면서 거부가 된다. 이철원 作 <고흐와의 만남> 청운의 꿈을 안고 우에노로 가는 동강 하정웅을 연상케 한다. 아버지의 고향 영암을 찾은 것은 하정웅이 35세 되던 1973년이었다. 광주공항에는 20명도 넘는 일가친척이 마중을 나왔다. 서로 얼싸안고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제일 먼저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문안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그 동안 고향에 오지 못한 것을 계속 사죄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뭔가 울컥했다. 온 가족들은 묘지 앞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하정웅은 자신의 고향이 영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향 영암에 다녀온 지 2년 뒤 아버지는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2015년 10월 현재 총 3,690점에 달하는 작품을 영암군에 기증했다. 동강 하정웅은 고향 영암이 미술문화운동의 거점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기증했다. 기증한 미술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영암군에서는 하미술관을 지었다. 기증한 도자기를 전시하기 위해 영암도기박물관에도 하정웅컬렉션기념실을 만들었다. 미술관을 조성하는데 동강 하정웅은 또 다시 3억 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다. 영암도기박물관
이화여대박물관에서는 1987년과 1996년 두 차례에 걸쳐 구림마을 도기가마터를 발굴했다. 도기가마터는 구림고등학교로부터 상대포까지 2킬로미터에 걸쳐 분포하는데 1차 발굴에서 이미 그 중요성을 인정하여 국가사적 338호로 지정했다. 큰항아리, 사각편병, 목이 긴 병, 작은 기름병 등 흑갈색, 황갈색, 녹갈색 시유도기를 발굴했다. 이는 고분부장용기와는 다른 일상생활요기들로써 삼국시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도기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 도기 역사에서 처음으로 유약을 입힌 도기를 구림마을에서 제작했다. 구림마을 시유도기는 일본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도기에서 자기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한다. 또한 청자 제작 직전단계에 해당하는 구림마을 시유도기는 고려청자의 계기를 형성한다. 신라가 해상권을 장악했을 때는 장보고 선단이 구림마을에서 생산한 도기를 교역물품으로 사용했다. 장보고 유적지인 완도 장군섬 토층 맨 밑에서 구림도기가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보다 앞서 당나라가 해상권을 장악했을 때는 당나라 수군이 구림도기를 사용했다. 663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군대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했다. 664년에는 나주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고 667년까지 7년간 주둔했다. 신라는 670년부터 676년까지 모두 22차례 전쟁을 치러 당나라 군대를 몰아냈다. 해전을 많이 치렀던 이 전쟁에서 당나라 군대는 구림도기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상에서 주로 사용하는 사각편병을 발굴한 것과 당나라 동관요(銅官窯)와 비슷한 모양의 도기를 발굴했기 때문이다. 구림도기 가마터. 우리나라 최초로 시유도기를 만든 곳이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은 1987년과 1996년 두 차례 걸쳐 구림마을 도기요지를 발굴하면서 영암도기박물관을 만들었다. 상설전시실인 제1 전시실에서는 영암에서 출토된 토기, 옹관, 이국시대 구림도기, 조선시대 자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2 전시실에서는 현재도자기실과 기획전시실로 운영하고 있다. 기증전시실인 제3 전시실에서는 동강 하정웅이 기증한 미술품 중에서 도자기를 전시하고 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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