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7. 16:46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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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 속 조선의 장인(匠人) ?
고종 홍릉은 조선 장인의 혼이 깃든 대한제국의 황제릉이다
글˚장경희 (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문화재청 전문위원)
금곡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 1901년 10월 2일 완공.
침전의 형식은 일(一)자형이고, 내부는 궁궐의 정전처럼 당가(唐家)를 조성하였다.
현 금곡 홍릉의 당가는 1897년 청량리 홍릉의 것을 1919년 2월 9일에 뜯어 옮겨 배치한 것이다.
3.1절이 되면 고종황제가 생각난다. 1919년 그날, 고종황제를 영원한 안식처인 홍릉(洪陵)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에 온 백성이 만세를 불렀기 때문이다. 경기도 금곡 홍릉은 어릴적 봄·가을 소풍지여서 친숙하다.
2009년 11월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중 26대 고종 홍릉과 27대 순종 유릉은 조선왕릉과 형식이 전혀 달라 일제 식민지양식으로 알려져 왔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아니다. 홍릉은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인데, 그동안 우리가 애써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홍릉은 언제 어디에 만들었는지, 명성황후의 죽음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자.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은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시신조차 불에 타 온전치 못한 민왕비의 죽음은 사후 2개월간 비밀에 부쳐졌고, 이듬해 국장(國葬)을 치르고자 동구릉에 숙릉(淑陵)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왕비를 잃은 슬픔에 밥조차 먹지 못하던 고종은 그해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하며 왕릉 공사는 모두 중지되었다.
『명성황후홍릉산릉도감의궤』에 의하면 1897년 1월 3일 고종은 청량리를 새 능지(陵地)로 정하고, 2월 25일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이 때부터 청량리 홍릉을 다시 조영했고, 화원 김신학(金信學)을 비롯하여 석수 125명, 야장 16명, 니장 55명, 개와장 20명, 석각수 3명, 마석장 16명 등 총 236명이 동원되어 4월 22일 왕릉 공사를 모두 마쳤다. 그러나 국장은 미뤄졌다.
1897년 10월 11일,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로 즉위하고, 민왕후를 명성황후로 추봉하였다. 10월 28일 사후 2년이 지나서야 명성황후는 비로소 청량리 홍릉에 안치될 수 있었다. 물론 이때 이미 고종황제는 홍릉을 황제릉을 만들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다음으로 미뤘다.
그러나 황제릉을 만들 기회는 곧 왔다. 1898년 1월부터 청량리 홍릉의 비석과 혼유석 등에 문제가 생겨 중수하였고, 『홍릉석의중수도감의궤』에서 고종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1900년 당시 문제가 없던 문무석인이나 양호마석 등을 화원 김성구(金聖九)와 김영준(金榮浚)을 포함하여 18종 총478명의 장인이 동원되어 새로 만든 것이다. 석수의 우두머리인 석수변수 홍봉석(洪奉石) 등 5명과 서울·개성의 석수 이육복·신명석·김성준·임상길·신명석·김사득·양봉득·김보협·김광석 등 200여 명을 차출하였다. 석조물의 세부 묘사는 조각장(彫刻匠) 백천석(白千石) 등 5명이 담당했고, 마석장(磨石匠) 윤창식 등 20명은 조각상의 표면을 매끈하게 갈았다.
이제, 금곡 홍릉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살펴보자.
고종은 1897년 중국 공사로 베이징에 있던 박제순에게 영선사의 주사 1명을 특사를 파견하여 중국 명 황제릉을 조사하고 모사해 오게 했다. 이 모사본을 본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릉을 명 황제릉처럼 조성하려면 한두 해에 역사를 끝내기 어려울 것이라며 우리나라의 규례대로 규모를 축소하기로 하였다. 청량리 대신 금곡을 능지로 선정하고, 북경에 있는 명13릉의 조산(朝山)을 천수산(天壽山)으로 부르듯, 금곡 뒤 묘적산(妙績山)을 천수산(天秀山)으로 개칭하고 황제릉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금곡 홍릉은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이 생전에 자신의 수릉(壽陵)으로 만들고 명성황후의 청량리 홍릉을 옮기려 했다. 비록 황제릉이지만 그 제작체계는 여전히 조선왕릉과 마찬가지여서, 국장도감·빈전혼전도감·산릉도감을 설치하고 인력과 물력을 총동원하였다.
세 도감의 총책임자는 궁내부 특진관 심순택이 총호사로서 총괄했으며, 산릉도감의 제조는 민영준 등 3인이었다. 산릉도감은 다른 도감보다 규모가 커서 10곳의 하부 제작처를 두어 물품을 전담했다.
삼물소는 능침, 조성소는 건축물, 대부석소는 석조물, 소부석소는 각종 석재, 수석소는 석재 운반, 노야소는 철물, 보토소는 봉분, 별공작은 가구, 번와소는 기와, 분장흥고는 돗자리 등을 제작했다.
대한제국 황제릉으로 조영된 금곡 홍릉은 여러면에서 조선왕릉과 다르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조각상의 종류와 배치이다. 조선왕릉에는 문무석인상과 양호마석상을 능침 위에 삼층단으로 배치했다.
반면 금곡 홍릉에는 문무석인상의 종류는 그대로이나, 동물상은 기존의 양호마 3종에서 기린·코끼리·해태·사자·낙타 등 5종 1쌍씩 총10기를 추가하고, 능침 아래쪽 침전에서 홍살문 사이에 배치하였다. 이것은 중국 명 황제릉의 종류와 배치를 따르되 규모는 줄인 것이다.
곧 명 황제릉에는 사자·해태·낙타·코끼리·기린·말 등 6종 2쌍씩 총24기가 능침 아래 영은전(寧恩殿)에 분포하며, 각 2쌍 중 1쌍은 입상이고 다른 1쌍은 와상이다. 금곡 홍릉보다 명 황제릉의 석수 개수가 2배 이상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금곡 홍릉의 석조물은 1900년 8월에 모두 완성되었다. 다음 조선왕릉의 제향용 침전(寢殿)은 정(丁)자형인데 비해, 금곡 홍릉은 일(一)자형을 세웠다. 건축용 석재는 강화도에서 채취하거나 경운궁의 것을 옮겨 1901년 10월 2일 완공되었다.
이렇게 1901년 말 명성황후를 청량리에서 금곡으로 천릉하기 위한 능묘조성은 완비되었으나, 1903년까지 10여 차례 길일을 택일하다가 차일피일 미뤄졌다. 게다가 1903년 11월 24대 헌종 계비 효정왕후, 1904년 9월 27대 순명황태자비가 서거하여 연거푸 국장을 치르면서 또다시 미뤄졌다.
결국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하고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채 덕수궁에 거주하던 고종이 생을 마감한 1919년에야 비로소 금곡 홍릉은 완결되었다.
금곡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사후 안식처이고, 대한제국의 유일한 황제릉이다. 한말 격동기에 열강에 맞서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드러내려 애썼던 고종황제의 고민이 느껴진다. 또 조선왕릉의 전통 위에 명 황제릉의 형식을 절충하려 고심한 조선 장인의 피와 땀 그리고 장인정신이 배어있다.
같은 금곡 능역 내에 있는 순종 유릉이 1926년 그의 사후 1년간 일본인 조각가에 의해 식민지양식으로 조각상이 제작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3월이 가기 전에 금곡 홍릉에 가서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려보길 권한다.
고종태황제산릉주감의궤 중 침전 도설
금곡 홍릉 침전, 1901년 10월 2일 완공
금곡 홍릉 석인 석수 조각상, 1899-1900년 8월 경 완공
『홍릉석의중수도감』속 문석인상 도설 홍릉 문석인, 1899년 9월 17일 제작 완료
『홍릉석의중수도감』 속 문석인상 도설 홍릉 무석인, 1899년 10월 20일 제작 완료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금곡 홍릉 석수상, 1900년 8월 3일 경 완성. 석인상(1899), 석수상(1900)은 제작 완료되었으나 명성황후의 천릉이 미뤄져 前別營의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1919년 3월 19일 고종의 안장 후 비로소 홍릉 침전 앞에 세웠다.
베이징 명13릉 영락제 장릉 앞 석수상
출처 :
한국문화재재단 - Korea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2014.03.
조선에도 ‘황제’가 있었다고?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11 홍유릉(사적 207호)
고종 황제와 명성왕후의 홍릉과 순종 황제와 그의 왕비가 묻힌 유릉이 함께 있는 ‘홍유릉‘. 이종호 제공
조선 왕릉 중에서 남다른 격식을 갖고 있는 곳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이다. 이곳에는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가 묻힌 홍릉(洪陵), 제27대 순종과 순명황후 민씨, 순정황후 윤씨의 능인 유릉(裕陵)이 있다. 홍유릉이 남다른 격식을 가진 이유는 당대의 품격이 조선의 왕이 아니라 황제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에는 중국보다 한 단계 아래인 왕만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황제(皇帝)’가 있었는데 우선 고종과 순종이 황제였고 이와 더불어 무려 8명의 황제가 더 있다.
이들 8명은 생전에 왕위는 오르지 못했지만 사후 왕으로 추존된 황제가 포함된다. 이들은 영조의 첫 번째 왕자인 ‘진종’과 영조의 두 번째 왕자인 ‘장조’, 순조의 왕자인 ‘문조’이며 각각 진종소황제, 장조의황제, 문조익황제로 추존됐다.
정조와 순조, 헌종, 철종도 각각 정조선황제, 순조숙황제, 헌종성황제, 철종장황제로 추존됐다. 여기에 태조 이성계도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에 추존돼 조선의 황제는 모두 10명이 된다. 이들은 모두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고종과 순종의 세계(世系)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추존된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총 8명의 황제가 있으므로, 이들이 묻힌 능을 왕릉으로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황릉(皇陵)’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김두규 박사는 주장했다. 그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이란 표현도 ‘조선 황릉과 왕릉’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고종과 순종은 엄밀히 얘기하면 조선의 법통을 계승해 선포한 대한제국의 황제이지, 조선의 황제는 아니므로 ‘조선 왕릉’이라면 고종과 순종을 제외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과학유산답사기에서는 이런 명분을 따지지 않으므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을 함께 다룬다.
“내가 바로 조선의 국모니라”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11-1 홍릉(洪陵)
채용신이 그린 명성황후의 초상화(왼쪽)와 을미사변을 주요 사건으로 다룬 뮤지컬 ‘명성황후‘의 한 장면(오른쪽). 동아일보DB 제공
홍릉은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릉이다. 고종은 1852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익종 비인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 조대비는 남편인 효명세자(익종)를 고종의 양부로 하고 자신을 모친으로 입적해 왕위를 이었다. 적통으로 왕위를 받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서류 작업에 완벽을 기했다고 볼 수 있다.
고종은 조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고, 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 조선 역사상 왕의 생부(生父)가 살아있는 경우는 흥선대원군이 처음이다. 그 전에 있었던 덕흥대원군(선조의 생부)과 전계대원군(철종의 생부)은 모두 사후에 추증(追贈)됐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민치록의 딸을 고종의 비로 천거했다. 명성황후 민씨는 8살의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 대원군이 그녀를 왕비를 맞아들인 이유는 외척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 였다. 당시 조선은 외척들이 국정을 농단해 순조·헌종·철종 까지 3대 60여 년 동안 김씨 세도정치에 시달렸다. 그래서 외척이 적은 민씨 집안에서 왕비를 맞으면 이런 위험이 적을 거라고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을 하자 그녀는 민씨 척족들을 활용해 강력한 쇄국정치를 폈던 대원군에 맞섰다.
왼쪽부터 조대비로 더 잘 알려진 신정왕후 조씨와 흥선대원군의 모습. 조대비는 고종을 자신의 자식으로 입양해 왕위를 물려줬고, 대원군은 조선 말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 노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위키백과 제공
고종 재위 때는 우리나라 역사 중 가장 파란만장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가 악화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아관파천 같은 근대 한국의 주요 사건들이 발생했다. 1897년에는 주변의 국제관계의 영향으로 고종이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고종에게 씻어지지 않는 사건은 대한제국이 탄생하기 전인 1895년 일어난 ‘을미사변’이다. 당시 일제는 일본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명성황후를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에서 시해하고, 시신은 경복궁 뒷산 녹원(鹿苑)에서 불태웠다. 한 나라의 국모가 외세에 의해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주한공사 미우라고로가 경복궁에 침입해 저질렀는데, 한국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의 참령(參領)으로 봉직하던 우범선(禹範善, 우장춘의 아버지)가 도왔다. 우범선은 민비가 시해된 후 정국이 바뀌자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자객 고영근에게 살해된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경위가 어떠하든, 이 사건은 고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왕비조차 일본인에게 당할 정도로 무능한 왕이니 조선이 일제에 멸망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다. 물론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 왕으로 있던 당사자가 고종이라 그가 매우 무능력했던 군주로 인식되는 것도 사실이다.
●유약하지 않았던 고종 황제
고종의 초상화와 사진의 모습. 왼쪽은 채용신이 그린 고종의 어진이고, 가운데는 신식 복장을 한 고종의 모습이다. 오른쪽 역시 채용신이 그린 어진인데, 신식 복장을 하고 있다. 위키백과, 동아이보DB 제공
최근 역사학계에 따르면 고종은 나라를 뺏기지 않으려 다방면으로 노력한 사람이다. 고종의 밀사이자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한 역사학자 호머 헐버트도 “황제가 유약하다는 사람들은 틀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고종의 황제 즉위식 때 ‘독립신문’ 1면 논설은 ‘광무 원년(1897) 10월 12일은 조선 역사에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 년 동안 청국의 속국 대접을 받은 때가 많더니 하나님이 도으사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사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어찌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라 싣기도 했다. 감격적인 희망을 장식한 것이다.
이런 기록을 보면 한국인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고종은 무능한 왕’이라는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고종에 대한 평가는 빛과 어둠이 여전히 팽팽하게 맞서고 있지만 적어도 고종이 대원군의 도포자락에 숨거나 명성황후의 치마폭에 휘둘리기만 한 어리석은 군주는 아니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민비가 일제에 살해된 지 6개월 후 고종과 왕세자(순종)가 두 대의 가마를 타고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다. ‘아관파천’이다. 그리고 같은 날 고종은 온 백성들에게 선언한다.
“8월의 변고는 만고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하였으며 왕후가 죽었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하면 뼈가 오싹하고 말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나운 돼지가 날치고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얼게 된다는 경계를 갑절 더해야 할 것이다.
을미년(1895) 8월 22일 조칙은 모두 역적 무리들이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
명성황후를 폐서인으로 삼은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니었으니 취소하라는 뜻이다. 아관파천으로 만들어진 좁은 틈새로 고종은 본격적인 홀로 서기를 준비한다.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개혁을 꿈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야심찬 의지가 있었다고 해도 고종은 세상을 바꿀 수 없었다.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황제 위를 물려주고 꿈꾸던 근대개혁을 미완의 과제로 남긴 채 1919년 1월 덕수궁 함녕전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장례식마저 불운했던 황제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11-2 홍릉(洪陵)
홍릉의 홍살문과 침전의 모습. 홍릉은 정자각이 변형된 대규모 침전을 가지고 있다. 이종호 제공
고종은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가 된 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사망했다.
고종의 사망 당시 일본인에게 독살됐다는 이야기가 돌아 국장일인 3월 1일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온 나라를 울렸던 백성의 함성은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목소리인 동시에 비명에 떠난 황제를 애도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였지만, 장례는 황제의 국장이 아닌 왕족의 장으로 치러졌다. 그마저도 7개월이 아닌 3개월 장으로 했다. 처음에는 조선 국장제인 ‘상례보편제’를 따랐는데, 갑자기 일제가 개입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일제는 고종의 장례위원회를 도쿄 국내성에 두고, 조선총독부가 ‘대훈위 이태왕 훙거(薨去)’ 칙령에 따라 일본식으로 치르도록 했다. 국장이 아닌 이왕직제로 이뤄져 조선의 상왕제에 일본식이 가미된 특이한 장례가 됐다.
고종의 능을 만들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 민씨의 능도 함께 모셔와 1919년 3월 4일 합장했다.
●왕릉 아니라 ‘황제릉’… 웅장한 규모
홍릉 안에 있는 연못, 원지원의 모습. 가운데 섬도 둥글고 바깥도 둥근 형태다. 조선 왕릉에 있는 것 중 가장 크다. 이종호 제공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고종의 능이 남다른 것은 중국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 따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홍유릉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능, 황릉이다. 그러므로 홍살문으로 들어가는 우측에 조선 왕릉 중 가장 큰 연지(蓮池)가 있다.
조선 연못은 밖은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 안에 있는 섬은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으로 만든 ‘천원지방(天元地方)’을 기본으로 했다. 그런데 홍유릉에 있는 ‘원지원’은 연못 전체의 형태도 원형이고 가운데의 섬도 원형이다. 연못에는 부들과 연꽃 등 수생식물이 있으며 원형의 섬에는 향나무, 소나무, 진달래 등이 심어졌다.
금천교 안쪽 좌측에는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 이는 황제의 능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다.
홍릉은 조선 최초의 황제인 고종을 모신 만큼 황제릉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다른 능에는 없는 재실도 그 중 하나다. 이종호 제공
왕릉에 당연히 설치되는 정자각도 변형돼 중국 황제릉처럼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침전이란 고종의 신위를 봉안한 제전이다. 침전의 기단 아래 홍살문까지 참도가 깔려 있는데 세 부분으로 나눠졌다.
좌우보다 한 단 높게 마련된 중앙 길은 황제와 왕후의 영혼이 다니는 길이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됐던 기존 왕릉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돼 있다.
홍릉의 참도. 침전까지 연결되는 참도에는 각종 석물이 한 쌍씩 배치돼 있다. 이종호 제공
참도 좌우로 석물이 도열하듯 서 있는데 침전 가까이에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서로 세워졌다. 배치 순서가 기존 왕릉과 크게 달라 이색적인 느낌이 든다.
석물은 좌우 1쌍씩 서 있는데, 석마만 2쌍으로 다른 상들에 비해 키가 작다.
문인석과 무인석도 다른 왕릉과 다소 다르다. 문인석은 건릉(乾陵)이나 수릉(綏陵)처럼 키가 크고(385cm) 머리에 금관을 썼는데, 너무 매끈해 오히려 품격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문화재청 동부지구관리소 홍유릉의 곽희용 선생은 문인석, 무인석, 석수들이 모두 침전 앞에 세워져 웅장한데 비해 봉분 주위는 단촐해 보인다고 전한다. 사실 능침만 보면 곽 선생의 말처럼 황제릉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소박하다.
홍릉의 능침. 웅장한 침전에 비해 단촐한 모습이지만, 면석의 꽃무니가 있고 12면에 병풍석이 새겨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종호 제공
그렇지만 고종의 능에는 현종 이후 보이지 않았던 12면 병풍석이 있다. 또 석탑 기단의 대석과 갑석 사이를 막아 댄 넓은 돌인 면석(面石)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안 세웠고, 혼유석 1좌와 그 양옆으로 망주석 1쌍을 두고 이를 3면의 곡장이 둘러싸고 있다. 혼유석 앞에 작은 대석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왼쪽 위는 홍릉의 비각이고 오른쪽은 능표, 왼쪽 아래는 어정(왕의 우물)이다. 이종호 제공
참고문헌 :
「王을 만나다·33]홍릉 (26대 고종·명성황후)」, 이민식, 경인일보, 2010.05.13
「국모 시해…강제 하야…힘없이 나라 잃은 설움이여!」, 이창환, 주간동아, 2011.03.21
『명예의 전당에 오른 한국의 과학자들』, 이종호, 책바치, 2004
『왕릉』, 이상용, 한국문원, 1997
출처 :
Donga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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