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시대별 음다법과 차의종류 / 후박나무

보허 步虛 2016. 3. 25. 11:33



       [차 개요] 시대별 음다법과 차의종류 / 후박나무| 2. 차, 다기 이야기

초인목 | 조회 119 |추천 0 | 2004.10.30. 23:24

                   


차의 유래/음다법 흐름

글쓴이:후박나무



    중국차 역사의 흐름은 찻잎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변천하는데, 대체로 세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찻잎의 약용(藥用)이며, 둘째는 식용(食用)이며, 셋째는 음용(飮用)형태로 즐긴다, 중국인들이 차를 애음하는 습관은 현대만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들에게 차는 기호품이 아닌 필수품으로 자리잡아 왔다.

당대(唐代)를 지나 송대(宋代)에 오면 차는 보편적으로 보급되어 생활필수품 목록에 끼게 된다. 당시 기록을 보면 ‘대개 사람의 집에 매일 없어서는 안되는 물품은 땔나무,쌀,기름,소금,장,식초,차(茶)’이다.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품을 7반사(七飯事)라고까지 칭하면서 차(茶)를 중히 여긴 것은 이후 명청대(明淸代)까지 공통된 사항이었다.

중국인들은 약5천년 전 소위 신농시대(神農時代)부터 차를 알았으며 초창기에는 찻잎을 약으로 이용했다. 중국 다성(茶聖)인 육우(陸羽)가 자신의 [다경-茶經)]의 [신농식경-神農食經)]에 기록된 '차를 오래 마시면 힘이 솟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라는 말을 인용했다.

중국에서 차를 마시기 시작한 기원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중국의 육우(陸羽)가 지은 다경(茶經)중에서는 B.C.2700년 신농(神農)시대부터 마셨다고 하나 실제적으로 신농 시대 이전부터 차나무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5천년 이전부터 차를 마셨다고 볼 수 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B.C.1066년 "서주(西周)의 파촉(巴蜀, 지금의 중경, 성도 부근)지방에서는 차의 재배가 행해졌다고" 고 하며, 이후 "춘추전국시대(B.C. 59년 전한(前漢)시대로 왕포(王褒)의 [동약]중에 "무양(武陽)에서 차를 사온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사천(四川)일대에서는 차가 사대부들의 생활 필수품으로 시장에서 상품화되었고 매매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간인들에게까지 널리 음용되기 시작한 것은 당(唐)대에 들어서 비로소 보편화되기 시작하였고, 송(宋)대에서는 생활 필수품으로서 쌀, 소금과 더불어 매일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물품이 되었다.

차가 음식으로 쓰여진 것은 차나무 잎을 씹던 데로부터 최초로 시작되었으며, 약 2000년 전 중국사람들은 찻잎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들은 찻잎을 나물로 무쳐먹고, 다른 음식과 함께 볶아 먹기도 했으며, 또한 찻잎을 차 죽으로 끓여 먹었으며, 국으로 끓여 마시기도 했다. 

 

시대별로 살펴보면,

- 당(唐, 618-907)


   당(唐)대의 월자(越瓷)라고 불려지는 청자는 평안시대에 [비색(秘色)]으로써 진종되었다. 그 큰 단의 실물이 1987년 서안의 서쪽에 있는 법문사에서 출토되었다.

당나라때는 떡차(餠茶)를 빻아 가루로 내어 솥에 풀어서 끓여 마시는 자차법(煮茶法)이 이용되었다.
당나라 이전의 차문화는 대체로 단편적이었으며 대중적이지는 못했다. 당나라로 진입한 후에야 비로소 차 문화의 윤곽이 형성되고 대중적으로 보편화되었다.

당(唐)중기 이후 차 마시는 풍속이 널리 보급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교통의 발달, 전문서적의 출현, 선승(禪僧)의 역할 등이 지적되었는데,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차가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차가 건강에 좋다는 사실이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지는데는 선승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음다(飮茶)의 기원에서부터 약용 기원설(藥用起源說)이 언급되듯이 차에 대한 약리 작용에 대한 관심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차가 생산되지 않는 지역인 화북지역으로 차가 보급되는데는 차의 약용적 효과에 대한 기대가 가장 큰 역할을 하였고 이는 선승들의 활동을 통하였다.

승도들은 세속을 벗어난 오랜 산중생활을 통해 익히 차의 효능을 알 게 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수도생활에 더욱 진력하였다. 민간에서는 승도들의 생활과 그들의 지식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승려와 신도간에 신차(新茶)를 선물하고 다도(茶道)를 담론하는 등도 음다풍속(飮茶風俗)을 확산시키는데 일조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차의 약용적인 효과에 대한 사회적인 확인을 이루어졌던 것이다.





- 송(宋, 960-1279)




당나라때는 떡차(餠茶)중심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송나라 때는 오대(五代907-957)를 걸쳐 개발된 단병차(團屛茶) 중심의 시대라고 한다.
중국의 오대(五代)의 송나라에서 성행된 단병차의 풍습이 전래되었고, 말기에는 송원대(宋元代)에도 마시던 잎차의 풍습이 전래되었다.

단병차(團餠茶)란 시루에서 쪄내고 압착기에서 즙을 짜낸 찻잎을 갈아서 틀에 박아낸 차란 뜻이다. 단병차를 달이는 방법에는 송나라 채양의 [다록]에 보이듯이 차 사발에 넣은 차가루와 끓인 물을 차 숟가락으로 젓는 복건의 점다법(點茶法) 과 소동파가 [시원의 차 달이기]에서 "어지러히 사발을 에워싸고 나는 눈이 가볍네"라고 읊은 서촉의 점다법(點茶法)이 있다.

복건의 점다법과 서촉의 점다법이 모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를 만들면서 찻잎에서 즙을 짜낼 때 엽록소가 빠진 단병차(團餠茶-연고차)를 달이면 젖빛이 되므로 찻가루는 청잔 흑유의 차사발에 달여서 마셨다. 단병의 향기는 순박하고 맛은 달고도 부드럽다.

송(宋 960-1279)나라로 넘어온 후 음다법(飮茶法)은 당나라의 자차법(煮茶法)에서 점다법(點茶法)으로 변해간다.

점다법이란 다마(茶磨)에 부드럽게 잘 갈은 덩어리 고형차 가루를 차솥에 넣지 않고 차사발에 직접 넣어 연고(軟膏)와 같이 끈적하게 만든 후 적당량의 열수(熱水)를 부어 다선(茶筅)이란 다구를 사용하여 잘 휘저어 거품을 내어 마시는 방법인데 지금은 말차(末茶)와 매우 유사하다.




- 명(明, 1368-1644) 



   명나라에 접어들면서 단병차(團餠茶)의 결정들이 점차적으로 다인들에게 인식이 되었는데 제다(製茶)상 지나친 시간과 인력의 낭비,또한 찻잎이 물에 의한 세척,착즙으로 인해 차맛과 향기의 손상 등 요인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점차 잎차를 선호하게 한다.

잎차로 우려 마시는 포차법(泡茶法)이 기존의 점다법보다 간편하고 차의 향기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되었다.

특히 명나라 건국 태조(太組) 황제인 주원장(朱元璋, 1368-1398)이 핍박을 받던 다농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1391년 9월 16일 단안을 내려 단차(團茶)를 폐지시켰으며, 이 칙령으로 인해 근 400년동안 중국 차문화를 이끌어 왔던 연고차의 점다법은 중국 차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포차법(泡茶法)시대가 열렸다.

포차법시대가 등장함으로써 찻잎을 넣고 물을 부어 우려내는 다기인 다호(茶壺)가 출현하여 명나라를 지나 오늘날까지 크게 유행한다. 명나라의 잎차 시대가 열리자 제다법의 연구개발이 급속토록 발전이 되어 덖은 형식인 초청녹차(炒靑綠茶) 제다법이 출현하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홍차(紅茶, Black tea), 황차(黃茶, Yellow tea), 흑차(黑茶, Dark tea). 백차(白茶, White tea),등 새로운 차들도 등장한다.


- 청(淸, 1644-1912)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5대차 종류 이외에 청차(淸茶, Oolong tea)도 나타나 이때야 비로소 오늘날 말하는 중국의 6대차 종류(六大茶類)가 완전히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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