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고려의 차문화 (茶俎)|

보허 步虛 2016. 3. 31. 12:42



      [옮긴글] 고려의 차문화 (茶俎)| 우리 문화와 유적,전통

시리게푸른하늘 | 조회 47 |추천 0 | 2015.04.09. 10:47


 

   오늘은 고려도경에 나오는 고려초의 차문화에 관한 묘사입니다. 현대한국에서 활발하게 살려볼 수 있는 많은 차문화의 양식을 소유했던 시대가 고려시대였습니다. 이는 불교의 사원과 차문화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만 살려본다면, 일본/중국의 전통차문화 못지않은 국제적인 한국의 문화 중 하나로 소개될 수 있는 것이 이 분야입니다. 최근에 많은 연구가 진행중에 있어 기대가 되는 전통문화 중 하나입니다. 많은 전통 차문화가 상업화/일반화되길 기대해 봅니다- 조선시대의 차예법/문화, 그리고 고려시대의 차예법/문화를 나누어서 경험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조 茶俎


   토산차(土産茶)는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고, 오직 중국의 납차(蠟茶)와 용봉사단(龍鳳賜團)을 귀히 여긴다 (주: 꽤나 주관적인 평가지요. 오직 중국차를 귀히 여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신 앞이니 그랬겠지요). 하사해 준 것 이외에 상인들 역시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자못 좋아하여 더욱 차의 제구를 만든다. 금화오잔(金花烏盞: 황금의 검은 잔), 비색소구(翡色小甌),은로탕정(銀爐湯鼎)은 다 중국 제도를 흉내낸 것들이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서 차를 끓여서 은하(銀荷 은으로 만든 연잎 형상을 한 작은 쟁반)로 덮어가지고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다. 그런데 찬자(贊者)가 ‘차를 다 돌렸소’하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으므로 으례 냉차(冷茶)부터 마시게 마련이다 (주: 이게 고려의 차예법 중 하나군요).


   관사 안에는 홍조(紅俎 주: 다홍색 산적 담는 그릇/쟁반)를 놓고 그 위에다 차의 제구를 두루 진렬한 다음 홍사건(紅紗巾 붉은 색의 사포로 만든 상보)으로 덮는다 (주: 청자기로 된 도기와 어울려 꽤나 예쁜 색조합일 듯). 매일 세 차례씩 내는 차를 맛보게 되는데, 뒤어어 또 탕(湯 끓인 물)을 낸다. 고려인은 탕을 약(藥)이라고 하는데, 사신들이 그것을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혹 다 마셔내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면서 불쾌해져서 가버리기 때문에 늘 억지로 그것을 마셨다 (주: '탕'이 '고려차'와는 다른 개념같습니다. 차를 마시고나서 먹는 하나의 입가심용 음료가 아닌가 하는데, '약'이라는 것을 보면 뭔가 그냥 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추후 한국의 다도명칭자체와 관련문제에 대한 좋은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오늘은 고려시대의 차문화에 대한 관련글 두가지로 마무리합니다.


 

완(찻그릇), 고려 10~11세기 (일본의 현재 찻잔과 비슷합니다)


 

꽃 모양 완 (찻그릇), 고려 12세기 (서긍이 다녀갔을 당시의 그릇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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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의 차문화를 향유했던 중심 계층은 왕실과 승려, 그리고 문인들이었다. 궁중에서는 중요한 의식이 있을 때마다 차를 마시는 진다(進茶)의식이 행해졌으며, 국제외교상의 예물로도 차가 이용되었다. 또한 고려 궁중에는 궁중연회나 의식이 있을 때 차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다방(茶房)’이라는 전문기관이 있었다.

『고려사』에는 왕이 차를 하사하거나 공양한 예가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신하들의 상(喪)에 내린 부의(賻儀) 중에는 차가 있었으며, 공신들에게 준 하사품 중에도 차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또한 왕이 승려에게 차를 하사하거나 불전(佛殿)에 공양한 기록도 전해진다. 왕은 승려와 신하들뿐만 아니라 일반백성들을 위한 경로잔치에도 차를 하사했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차는 왕실 중심의 중요한 예물로써 귀하게 취급되었다.


   차문화는 불교와 인연이 깊기 때문에,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는 한국 차문화의 전성기였다. 왕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승들에게 차를 직접 하사하는 예가 많았고, 경남 통도사 주위에는 차를 만들어 사원에 바치던 다촌(茶村)이 존재하였다. 고려 사회에서는 사찰과 승려에게 많은 양의 차가 공급되었고, 사찰은 고려 차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의 문인이나 승려들은 차에 대한 애호를 여러 시(詩)들을 통해 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전남 강진 월남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진각국사 혜심의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래 앉아 피곤한 긴긴 밤(久坐成勞永夜中)
차 끓이며 무궁한 은혜 느끼네(煮茶備感惠無窮)
한잔 차로 어두운 마음 물리치니(一盃卷却昏雲盡)
뼈에 사무치는 청한(淸寒) 모든 시름 스러지네(徹骨淸寒萬慮空)

         -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1178-1234) -



이 시를 보면, 진각국사는 긴 밤의 추위 속에서 차를 통해 근심과 걱정을 잊고 마음의 평안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상류 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도 차문화를 향유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거리에 일반백성들도 차를 사거나 마실 수 있는 다점(茶店)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러한 활발한 차문화를 통해 청자 다구가 발전했다. 고려청자 찻잔, 은완, 탁잔, 통형잔형태가 대표적인데, 각 잔들은 다양한 형태와 문양, 뛰어난 비색(翡色)으로 한국 차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주: 이런 고려시대 찻잔들로 한국의 다문화를 현대식으로 만들어내면 어떨런지요). 이외에도 금속제로 만든 찻잔들도 전해진다.
원문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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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茶문화가 귀족과 승려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면 고려시대의 음다풍은 귀족 및 일반 백성들까지 차를 즐겼다. 고려 때에는 차를 다루는 관청인 다방(茶房)과 차를 재배하는 다소촌(茶所村), 백성을 위한 다점(茶店) (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차와 관련된 곳들의 현대명칭을 다방, 다촌, 다점으로 일반화하고 관련 전통상품을 판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예법 등의 연구도 이런 곳을 중심으로 퍼질 수 있겠지요) 이 성행했었다.

그처럼 고려시대에는 차문화의 르네상스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 진차(進茶)예식이 빠지지 않은 것도 그만큼 차가 고려 때 성행하였다는 증거다. 진차란 주과식선을 올리기 전에 임금께서 먼저 차를 명하시면 시신(侍臣)이 곧 차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때 접려관이 전(殿)을 향하여 잡수십사하고 국궁하여 권한다. 이때 임금께서는 반드시 태자(太子) 이하 시신에게 차를 하사하심이 정례가 되었다.

그림은 고려정궁 가칭 만월대의 신봉문에서 행해진 팔관회 상상도입니다 (정문인 승평문 바로 다음 문이죠)


 


  차가 성행하면서 사원에서는 물〔水]과 차(茶)에 밝은 승려도 있었다. 이규보의 시(詩)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노승들 일도 많다오. 차와 물맛을 평하려 하니” 라는 구절이 이를 말해준다. 특히 고승이 입적하면 임금이 그 덕을 기리면서 차와 향을 내려 위로했다는 기록이 금석문 도처에 나온 것을 보면 당시 차문화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청자의 발달과 송의 천목다완 등장, 고려 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을 통해 송나라와 고려의 차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송은 용봉단차를 수입했고 고려는 뇌원차 (주: 고려 뇌원차에 대한 자세한 복원연구가 있습니다- 링크) 송나라로 수출하는데 그 산파역을 했던 의천 대각국사에게 요나라 황제가 제자의 인연을 맺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경기도 풍덕군 덕적산 흥왕사 터에서 발견된 ‘대각국사 묘지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요나라(遼) 천우황제가 재차 경책과 차향과 급백 등을 보내와 국사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송나라 휘종의 『대관다론』에서 용단봉병은 천하에 으뜸간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고려의 토산차(土産茶)와 중국의 납차를 비교했는데 토산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기가 어렵다고 했고 당시에 오직 귀하게 여긴 것이 용봉사단(龍鳳賜團)이라고 했다. 그 차가 의천을 통해 고려에 성행했으니 의천 고려차문화 부흥에 산파역을 했음이 분명해진다.
그의 스승에게 차를 준 것에 대한 화답의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북쪽동산에서 새로 말린 차          北苑移新焙
동림에 계신 스님에서 선물했네    東林贈進僧
한가히 차 달일 날을 미리 알고     預知閑煮日
찬 얼음 깨고 샘줄기 찾네            泉脈冷高永


   의천은 송 황실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은 뒤 송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고려에 천태종을 부활하고 선과 천태사상의 진리 속에 다선삼매의 정신세계를 연다. 이처럼 의천은 송나라와 차문화 교류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주: 한국의 센노리큐로군요).

   고려 인종원년(1123)에 송나라 사적단으로 교려에 왔던 서긍(徐兢,1091~1153)이 남긴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 高麗圖經)』이라는 책의 차조(茶組)편에 “토산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다”고 고려차를 폄하한 글이 실려 있다. 또 그는 고려인은 오직 중국의 납차(臘茶)와 용봉사단을 귀하게 여겨 송나라에서 구입하는 사람이 많다고 기록했다. 그는 다시 나가다구를 적어 놓았는데 “근래에 고려인들은 차 마시기를 기뻐하며 더욱 다구를 다스려 금화오잔(황금의 검은 잔)과 비색소구(靑磁茶碗)와 은로(銀爐)와 물 끓이는 소부가 모두 중국제를 본떴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고려 때에 은 다구의 발달은 비색소구와 금화오잔과 고려자기 발달에 촉진제가 되었던 것 같다. 고려청자의 탄생은 고려 차문화의 발달에 의해 기인되었음을 알 수가 있겠다.


원문링크

 cafe.daum.net/thishistory/Fzsq/132  이것이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