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차문화고전 (다경-다부-대관다론-다신전-동다송-다소)

보허 步虛 2016. 4. 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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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경이 | 조회 52 |추천 0 | 2007.06.27. 15:41


---------국어고전문화원 윤경혁 원장님 글------

 

차문화 고전

   차문화 고전에는 우리 조상이 누려 살던 차 마시며 생활한 과거와 근대가, 그리고 거기서 온고(溫故)한 새로운 음차생활(飮茶生活)의 방향이 결집(結集)된다.
우리는 황인종 중에서 넓게는 한겨레, 좁게는 동이(東夷) 배달민족이다. 동이는 주대(周代)에 빈읍(?邑→?邑→彬邑)을 중심한 반정집단이 “동쪽 어질고 질서 있는 사람”을 가리킨 말이다.
기원전 30-3세기, 우리 조선(祖先)은 중국의 중부, 북부, 북동부(滿洲), 한반도에 걸쳐서 선주인(先住人)과 이동인이 조화정착(調和定着)하고 황하문명을 일으키며, 여러 가지 문자를 개발, 종합, 보완하면서 BC 3세기에 이르러 소전문(小篆文)으로 일차 완성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약 700년 후인 543년에 소전문(小篆文)을 본자로 확정한 옥편(玉篇)이 편찬되고, 다시 751년에 당운(唐韻), 다시 1067년에 집운(集韻), 청대(淸代)에 와서 강희자전(康熙字典)으로 결완(結完)되었다.
호경(胡京)과 서안(西安)의 태터에서 동평만리(東平萬里)를 넘보며, 매조(每朝) 동침(東侵)을 일삼던 서이족(西夷族)은 동이족과 동이강역과 동이문자를 흡수하되 만주족의 청조(淸朝)까지를 어음융합(語音融合)으로 잠식(蠶食)했다.
실로 어음과 어문은 민족 존망의 중추이다. 만일 淸나라가 대륙을 점령 통치할 때에 만주어를 버리지 않고 또 한자음을 중어음(中語音, 당시 明語音)으로 쓰지 않고 원음으로 발음하여 썼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동이족 중심국’으로 존속했을 것이며, 역사 또한 ‘동이족 중심사’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東方 공통고전인 육경(六經)을 비롯한 무제한(無制限)의 기록유산(記錄遺産)도 순수한 공통유산으로 받아 누렸을 것이다.



   광개토경 호태왕비(廣開土境 好太王碑)는 고구려 문자로,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문자로, 삼국사기는 고려문자로 써왔는데 오늘날 못난 후손들이 중국문자를 빌려 썼다는 망언으로 조상까지 욕을 보이는 것은 무슨 개벽인가? 영문, 일문, 불문할 것 없이 문화와 예술성이 뛰어나면 우리정서로 여과(濾過)시켜 살찌울 때에만 우리문화는 찬란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역사 우리성명(姓名) 우리국호(國號) 모두 한자인데 중국것을 빌려 온양 호도(糊塗)함은 황하문명을 일으키고 한자(실은 동이문자)를 만들고 중원을 다스리던 조상의 문화역사까지를 짓밟는 패륜(悖倫)의 짓이다. 한자는 문자명(文字名)이 그럴 뿐이지 갑골문(甲骨文) 6000자는 동이족이 만들고 그 이후는 여러 민족에 의해서 발전시켜온 동방 공유문자다. 특히 우리조상이 3000년 이상을 우리 글로 써온 문자다.
차문화고전에 엮은 다경, 차부, 대관다론, 다신전, 동다송, 다소 역시 우리 조상들이 피아(彼我)의 의식조차 없이 보고 배우며 보존한 우리문화 고전이다. 누구의 소유물도, 어느 국가의 전유물도 아니다. 한자로 써 남겼으되 중국은 그들의 발음으로 읽고 우리는 우리의 발음으로, 일본은 또 일본의 발음으로 읽으며 탐구해 왔다. 한자이건 한글이건 영어이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고전은 자유스럽게 탐구할 수 있어야 한다.


   차경(茶經)이 저작된 764년은 당나라가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란(亂)을 평정한 1년 후이다. 국권과 국경은 주권자에 의해서 바뀔 수 있으나 문화는 패자(敗者)와 도망자(逃亡者)에 의해서도 번자(蕃滋)할 수 있다.
혹자는 우리 문화를 중어(中語)에 의한 중국문화로 알고 있으나, 그들의 원류문화가 동이(東夷)에 의해 발전되고, 진, 한대(秦, 韓代) 이후에도 그들에게 동화된 절대 다수의 동이혈통이 공영발전(共營發展)시켰으며, 고려멸망 이후에도 아직 문화중추인 문자의 정음과 본뜻을 우리가 지켜가고 있다.
기조사상 철학(基調思想 哲學)의 전성기인 BC 10-4세기, 동방 문자는 제자성기(製字盛期)를 거쳐 AD 100년에 설문(設文), 설문을 근거로 옥편(玉篇→543년), 다시 200년 후 즈음에 이 방대(尨大)한 문화유산인 차경(茶經)이 찬술(撰述)되었다. 생활문화의 기록이 거의 그렇듯이 차경(茶經)도 첨삭(添削)없는 원문이며, 차서(茶書)이기 이전에 중, 고대에서 유전(遺傳)된 또 하나의 우리 고전이다. 때문에 당시의 문자 자료로도 귀중하다.


   식물의 일생을 싹남(發芽), 영양생장(營養生長), 생식생장(生殖生長), 개화결실(開花結實), 락토(落土)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사람도 생물이니 비슷한 과정을 살아간다. 더 줄여 3단계로 나누면 25세까지의 성장, 50세까지의 활동, 75세까지의 누림이라 할 것이다. 오늘날은 과거 20세까지의 성장기간이 흔히 30세 이후까지도 연장된다.
한재 리목(李穆) 선생은 3804년(성종2. AD 1471년)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가금리에서 참의공 리윤생(李閏生, 전주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8세에 취학하였고, 14세부터 성리학자이며 차인(茶人)인 점필재 김종직(?畢齋 金宗直)선생 문하에서 수업(수업)하였다.
한훤당 김굉필(寒萱堂·金宏弼), 일두 정여창(一? 鄭汝昌),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과 같이 수제자(首弟子)에 속하였다. 19세에 초시 갑과에 합격하여 생원 진사로서 반궁(泮宮)에서 독서하게 되었다.
연산원년(燕山元年), 선생 25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고, 그 무렵 차부(茶賦)를 저술하였다. 탐관오리와 권력에 부화(附和)하는 무리가 적지 않았던 당시 선생만은 한시적 가치추구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며 주옥같은 글을 남겼다. 선생 서거후 전통문화와 겨레의 얼은 급격히 쇠락(衰落)하였으나 일제 병탄시(日帝 倂呑時)까지 명맥(命脈)만은 이어졌다. 선생은 예견이라도 한 듯 자신의 차 즐김에 대한 토로(吐露)와 차 생활의 다짐, 차 생활을 권유(勸誘)하는 계명(誡命)으로 이 차부(茶賦)를 남겼다.
부문(賦文)은 구구절절이 음차생활의 체험에서 맺혀난 술회(述懷)이다. 때문에 선생의 삶을 알고 차부를 읽어 아는 사람이면 음차생활을 하지 않고서는 선생의 경지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차를 따서 익혀 찧고, 茶 떡고지에 박아 말렸다가 구워 맷돌(?)에 갈아 물에 타 휘저어 마시던 陸羽 이래의 찻일은 宋代에 이르러 조금 달라졌다.
차를 따서 익히고 눌러, 膏를 만들고, 불쬐어 굽고 바수고, 맷돌에 곱게 갈아(和劑) 물에 타 휘저어 마시는 방법(?茶)으로 당시의 많은 茶書가 전하는 主要目錄은 다음과 같다.


  • 蔡襄 撰 「茶錄」(1049-1053년간)
  • 宋子安 撰 「東溪試茶錄」(1064년 전후)
  • 黃儒 撰 「品茶要錄」(1075년 전후)
  • 徵宗 趙佶 撰 「大觀茶論」(1107년 전후)
  • 熊蕃 撰 「宣和北苑貢茶錄」(1121~1125. 熊克增補(1158)
  • 趙汝礪 撰「北苑別錄」(1186년). 淸?王繼壕 注(1800년)
  • 審安老人 撰「茶具圖贊」(1269년)


   朝鮮末까지에 걸쳐 우리 나라의 三大 茶書를 든다면 ① 茶賦, ② 茶神傳,③ 東茶頌 일 것이다. 500년 전(1495년 부렵)의 茶賦는 茶에 대한 순수한 예찬서(禮讚書)이며, 茶生活을 통해서 수신구도(修身 求道)하는 朝鮮時代 선비의 賦詩이다. 반면에 茶神傳은 덩이차가 잎차로 바뀐 이래 茶疏와 함께 茶經에 比肩(비견)되는 茶의 교과서이며, 東茶頌은 우리 나라 茶에 대한 古禮 頌詩이다.
다신전(茶神傳)은 23항목의 茶事를 다루었는데, 만보전서 채차론(萬寶全書 採茶論)으로 옮겨지면서 22번째 항목인 분차합(分茶盒)이 결재(缺載)되었고, 끝항목인 茶道가 22항목에 차위(茶衛)로 章 제목만 바뀌었다.
실상 그 茶道의 항목은 ① 만들 때 精하고 ② 간직할 때 燥하며 ③ 달일 때 潔하면 茶道를 다했다는 內容으로, 全文이 ‘造時精 藏時燥 泡時潔 茶道盡矣’이다.


  동다송(東茶頌)은 68행의 장편 7언 고시체 송시(頌詩)이다. 칠언구(七言句)의 고시는 6세기말(隋代)까지 발전된 시형(詩形)으로 시경(詩經)에서 연원(淵源)한다. 시경은 BC 10세기 전후에서 춘추초기(春秋初期)까지 동방시가문학의 총집이다.
연산 원년(1495년)에 리목(寒齋 李穆)선생이 저술한 차부(茶賦)가 부시문형(賦詩文形)으로 쓰인 茶의 예찬서이자 茶생활을 통한 수신구도의 자계서(自誡書)라면, 헌종3년(1837)에 저술한 동다송(東茶頌)은 茶나무를 비롯한 茶전반의 교과적(敎科的) 안내서이다. 차부(茶賦)가 15세기까지에 탐람(探覽)할 수 있는 茶고전과 경서를 섭렵(涉獵)한 여즙(濾汁)의 저술이라면, 동다송(東茶頌)은 당시까지의 고전을 망라(網羅)하여 찬집(撰集)된 우리 차고전의 백미(白眉)이다.
송시의 내용은 ① 생장 개화 ② 꽃과 싹 ③ 고사 ④ 제다 ⑤ 명품 ⑥ 동다 실황 ⑦ 동다 진수 ⑧ 동다 송찬 ⑨ 동다 선 등의 十章 九頌(45韻)으로 짜여 있다.
동다송(東茶頌)은 해거도인의 명을 받아 저술한 책(承 海居道人命 作)으로 저자는 사문(沙門)의 초의(艸衣) 장의순(張意恂)이다.
발문(跋文)은 칠언절구 평기식 新體詩로 음미하다보면 마치 초의선사의 뒷모습을 보는 듯한 탈일감(脫逸感)마저 갖게 된다.
6. 다소(茶疏)
문화란 익히고 누리고 간직하는데 彼我가 없는 것, 그래서 사국시대 이래 조선왕조까지의 차고전이 너무 방대하여 우선 名著인 『茶疏』부터 번역하기로 했다. 『茶疏』는 顧渚紫筍茶 羅?茶로도 불리는 명차의 해설로 36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전세계가 본받아 생산하는 찐차의 원조이기도 하다. 식품학적 근거 없는 비법 묘법 구증구포 연차 보이차 황차 따위 이전에 우선 명저 다소부터 일독하기 바란다.

 

  ---------국어고전문화원 윤경혁 원장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