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차의 유래 / 역사 / 시대별 차의 역사 / 신라시대의 차,고려시대의 차
보허 步虛
2016. 4. 8. 14:37
차의 유래 / 역사 / 시대별 차의 역사 / 신라시대의 차,고려시대의 차| 종교&다도관련
꼭지 | 조회 15 |추천 0 | 2007.12.31. 13:33
신라의 차 역사는 귀화식물인 차나무의 전래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삼국사기 흥덕왕 3년 12월 조에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성행되었다.’ 하였고, 선덕여왕(632~646)을 전후해서 차종자가 중국으로부터 불교 전차와 더불어 전래되었다. 신라에서 차를 자급하기 시작한 시대는 832년 이후로 추정된다. 그 시대의 차는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차가 운반이 쉽고 변질의 염려가 적은 각차. 산차. 말차. 떡차였으므로, 그 영향으로 하여 떡차를 만들기 십상이었다.
전라남도 지방에서 전승된 전차(錢茶)가 다경(茶經)에 적힌 떡차의 제다법(製茶法)과 같은 것에 유의할 일이다. 신라의 차이야기를 하면서 원효대사(617~689)와 그의 아들 설총(薛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원효는 스스로 말하기를 ‘스승을 모시지 않고 배웠으며, 마음에 의지하여 저절로 깨닫는다.’라 하여 독자적으로 해동종(海東宗)을 창시하는 한편, 차의 공적을 수양의 방편으로 삼고자 원효방(元曉房)을 차렸다. 그리고 설총은 그 아비의 훈도(訓導)에 의해서 출중한 다인(茶人)이 되어 신문왕(681~691)께 화왕계설화(花王戒設話)를 강론하였다.
신라의 다도와 신라의 화랑은 신라정신의 쌍벽이다. 화랑도는 그 당시 위상대사에 의해 전도된 화엄종(華嚴宗)을 신봉하면 아침이면 맑은 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서 문수보살께 공양하는 것을 일과로 하였다.
신라 경덕왕과 충담사(忠談師)의 이야기는 당시의 다도를 이해하는 첩경이다. 왕이 누각에 높이 앉아 말하기를 “대덕스님으로 하여 3월 3일을 기리고자 하노라“하니 마침 한 스님이 해어진 장삼차림에 벗 나무통을 지고 남쪽으로 오고 있기에 왕이 “요행이로다“하여 누각 위로 맞아 들였다. 왕이 “그대는 누군가.“라고 묻자 중이 “충담입니다.“하였다. 왕이 ”어디서 오는 길인고,”하니 중이 “산 삼화령(三花嶺)에 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거기는 왜?” 하니 대답하기를 “소승은 해마다 삼짇날과 중구날이면 차를 달여서 삼화령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공양하옵는데 오늘이 바로 삼짇날입니다.” 였다. 왕이 기뻐하고 “과인에게 차 한잔을 주겠는가“ 하니 충담이 곧 차를 달여 바쳤다. 왕이 즐겨 마시고 말하기를 ”차에 기미(氣味)가 있으며 향기가 풍기도다.“하고 나서 ”그대가 기파랑(耆婆郞)을 기린 사뇌가(詞腦歌)를 지었는가.“ 하니 ”그러합니다“하였다. 왕이 ”하오면 백성들의 태평을 구가할 수 있겠는가“하니 충담이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충담을 왕사(王師)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충담은 이를 사양하였다. 여기서 다시 주목할 대목이 있다. 경덕왕(742~764)대에 차의 기미(氣味)와 향을 식별할 수 있었다면, 760년에 저술된 다경과는 상관없이 신라인들은 이미 차의 진수를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우의 다경에 실내다법과 야외다법이 있기는 하나 신라인들은 이미 이를 개발하여 충담이 차통을 메고 다니듯 화랑들이 산천유오(山川遊娛)에 알맞게 야외다구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대목이다. 신라의 차는 도의연마(道義鍊磨)의 방편과 영육일치(靈肉一致)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미덕’으로 요약된다. 아름다움(美)은 화랑의 산화정신(散花精神)으로, 덕성스러움(德)은 미륵하생(彌勒下生)의 사상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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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차의 특성은 20개 안팎의 다소(茶所)에서 만들어졌다는 데에 있다. 다소란 다원(茶園)을 만들어서 채엽하여 직접 제다(製茶)란 후, 왕실 사원 등에 바치기도 하고 팔기도하는 한편, 다도를 수련하기도 하는 곳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동을산(冬乙山)에 있었던 평교다소(坪郊茶所)와 하동(河東) 화개(花開)에 있었던 화개다소(花開茶所)이다.
평교다소는 사원에 차를 바치는 곳으로 다원의 둘레가 4만 7천 보(步)이고, 화개다소는 주로 조정에 차를 바치는 곳으로 다전(茶田)이 장광(長廣) 50리였다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으며, 이 대목은 초의 선사(草衣禪師)가 동다송(東茶頌)에, 이규보(李奎報)는 유다시(孺茶詩)에 고증(考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차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점차 좋은 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유차(孺茶), 납전차(臘前茶)가지가지의 연고차(硏膏茶), 그리고 세기의 명류인 중국의 구양수(歐陽修) 채군모(蔡君謨) 조선의 김정희(金正喜) 이하응(李昰應)등이 감탄하여 마지않았던 용단승설차(龍團勝雪茶)까지 수입 또는 제다(製茶)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밖에 자순차(紫筍茶) 납면차(蠟面茶) 뇌원차(腦原茶)등도 보인다.
좋은 차가 만들어지면 거기에 알맞는 다구다기(茶具茶器)가 개발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신비의 비색(秘色)을 발산하는 청자(靑磁)를 위시하여 차맷돌, 은화로(銀爐), 솥 가지가지의 초두와 차술, 차선(茶?), 차시(茶匙), 연분(硏盆) 기타 약 30여 가지에 이른다.
차와 다구다기가 조화를 이루어 차의 삼미(三味 : 色, 香, 味)가 극치에 달하면 또 거기에 걸맞는 다례(茶禮)가 숭상되기 마련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차를 관제(官制)로 다스렸다. 다방(茶房) 행노군사(行爐軍士) 다담군(茶擔軍)등이 그것이다. 고려의 큰 명절은 연등회(燃燈會 : 음력 2월 15일)와 팔관회(八關會 : 음력 11월 15일)였다. 태조 왕건이 내린 훈요(訓要)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짐(朕)이 지극히 원하는 것은 연등과 팔관이다.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는 일이요,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명산(五嶽名山)과 대천(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일이니 군신이 회동하여 조진(組眞)께 섬배(贍排)한 후에 제악(諸樂)과 백희(百戱)를 설하되 차로써 헌수할지어다. 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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