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청자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제작에 성공하며 화려하게 동시대를 풍미했다. 고려의 청자는 중국의 자기양식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만의 독특한 미감을 살려 색과 장식기법, 무늬, 기형 등에서 중국과 다른 면모를 뚜렷하게 나타내며 발전해갔다. 또한 청자 제작은 다양한 공예품과의 연관성을 보이는데 특히 금속기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초기의 청자는 금속기 형태를 그대로 본떠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청자 제작기술의 발달은 금속기에 비해 원료수급이 쉽고 변화가 자유로워 다양한 문양이나 조각장식을 가미하기에 적합한 흙의 물성(物性)과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등의 장점으로 인해 금속기의 일부 영역을 허물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예로 향로를 들 수 있다.
청자 향로는 독특한 조각장식을 기능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물론 과감하고 세밀한 장식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미, 안정성을 두루 갖췄다. 특히 조각장식은 뚜껑이 있는 향로에서 자주 나타나며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자나 원앙, 오리 등과 상상 속의 동물인 기린, 어룡, 귀룡 등 동물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다.
사자, 불법을 수호하는 신비스러운 동물로 적극 활용돼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0호로 지정된 ‘청자 사자모양 향로’는 여러 사자모양 청자 가운데서도 색과 조형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조형물이다(사진 1). 산예, 백택(白澤) 등의 이름으로도 부르는 사자는 타고난 용맹성과 위엄으로 인해 백수(百獸)의 왕(王)으로 불리며 신성함과 절대적 힘을 가진 상상의 동물로 여겨졌다. 특히 불교에서 사자는 불법(佛法)과 진리를 수호하는 신비스러운 동물로 인식됐다. 두려움 없고 모든 동물을 능히 다스리는 용맹함 때문에 부처를 인중사자(人中獅子)라 비유하기도 하고, 최고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수호신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사자 위에 앉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불교의 수호신인 사자는 불교와 함께 우리나라에 전래돼 불상의 대좌를 비롯해 불탑, 석등, 부도(浮屠) 등 다양한 석조물에 적극 활용됐다. 특히나 고려시대에는 사자의 형상을 본떠 만든 청자가 상당수 제작됐다.
이 향로는 향을 태우는 화로와 향이 빠져나가는 뚜껑으로 이뤄진 구조로 분리할 수 있다. 뚜껑은 다시 윗면의 장식 부분과 받침으로 구분된다. 뚜껑의 받침은 불상의 대좌를 연상케 하며 향로의 몸체를 덮을 수 있게 둥글게 만들어졌다. 그 위에는 사자모양의 조각이 장식돼 있다. 뚜껑 위에 비스듬히 앉은 사자는 정형적이지 않으면서도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사자의 검은 눈은 산화철(FeO)을 주성분으로 하는 안료로 찍어 넣고, 코는 자연스럽게 들린 모습이며 귀는 뒤로 젖혀져 있다. 입은 벌려 포효하는데, 송곳니의 표현까지 섬세하다. 수염은 뒤쪽으로 길게 날리며 크고 날카로운 오른발은 보주(寶珠)를 움켜잡고 있다. 꼬리는 길게 뻗어 목 뒤에 이른다. 좀 더 세밀히 살펴보면 눈과 입 주변, 수염, 터럭, 꼬리, 발 등 곳곳을 음각기법으로 섬세하게 표현해 생동감이 넘친다. 목과 가슴 사이엔 목걸이가 있고 그 중앙에 커다란 원형방울이 달려 있다. 방울을 달고 있는 사자장식의 유래나 의미에 대해선 명확치 않지만, 다른 종류의 청자는 물론 금속유물에서도 발견되는 점으로 미뤄 고려시대 공예장식에 유행했던 특징으로 여겨진다. 뚜껑을 뒤집어 안쪽 면을 보면 가운데에 둥근 구멍이 있어서 향 연기가 속이 빈 사자의 몸통을 거쳐 입으로 빠져나가도록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몸체인 화로는 원통형, 위쪽 가장자리에 폭이 넓은 전을 뒀고 아래쪽 바닥 세 곳에 다리를 붙인 형태다. 외면에는 음각기법으로 구름을 장식했는데, 전의 윗면 다섯 곳과 몸체 측면에 가득 채웠다. 이러한 구름장식은 조각장식이 있는 종류의 청자 향로에 등장하는 전형적 소재로 조각장식이나 향로의 비례가 달라져도 그려지는 특징을 보인다. 바닥 세 곳에는 도범(陶范)으로 찍어 표현한 괴수 머리모양의 다리가 달려 있어 향로를 지탱한다.
색과 조형의 완벽한 조화, 독창성까지 더한 고려청자
1123년 송의 문신인 서긍(徐兢, 1091~1153년)이 남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당시 고려의 실정을 가늠할 만한 다양한 단서가 남아있는데 여러 기록 중 고려청자에 대한 기록이 돋보인다. 서긍은 학식과 견문이 넓고 서화에 능하며 높은 감식안의 소유자로서 12세기 전반 중국의 문물에 이해가 깊었을 것으로 여겨져 그의 기록이 더욱 가치를 더한다.
도로조(陶爐條)를 살펴보면 “산예출향 역시 비색(翡色)인데, 위에는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는 연꽃이 있어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古秘色)이나 여주(汝州)의 신요기(新窯器)와 대체로 유사하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산예출향(사자모양을 한 향로를 이름)’이라는 청자 향로는 ‘청자 사자모양 향로’와 유사한 특징을 보여 더욱 주목되는데 당대 최고의 가치를 지닌 중국의 자기와 비교하는 대목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는 고려 사자모양 향로의 조형적 우수성을 기술하면서 그것의 색이 ‘비색’이며, 회청색 바탕에 녹색을 띠는 오대 말ㆍ북송 초기의 월주청자나 천청색(天靑色)이나 청록색(靑綠色)으로 부르는 여주신요기 등 중국 자기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물론 연꽃 모양의 받침 위에 사자가 장식된 향로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자 사자모양 향로’와 차이를 보이지만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자장식이 있는 비색 청자라는 점은 공통된 특징으로 사자장식이 있는 다양한 청자 향로가 제작됐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한편, 기록 속 연꽃 형태의 화로로 추정되는 ‘청자 연잎무늬 향로’가 전하고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사진 2). 이 향로는 뚜껑을 받치는 부분과 바닥에 닿는 부분이 대칭되고 이중의 연잎이 벌어진 형상을 취했는데, 이와 비슷한 형태의 향로가 고려 청자의 중심생산지인 전라도 강진과 부안에서 생산됐음이 확인된 바 있다. 기록 속의 연꽃 형태 화로라는 단서만 갖고 서긍이 본 유물과 일치한다고 보긴 어려우나 현전하는 청자에 가장 근접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색과 조형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고려 청자의 뛰어난 독창성은 세계 도자의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일이지만, 실용성에 감상이라는 미적 성취까지 거둔 고려 도자공예의 정수(精髓)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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