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자하의 글씨는 또 다른 큰 특징이 있다. 해서체와 행서체의 차이도 그리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글씨가 크기만 다를 뿐 글씨의 모양새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 자하는 전서나 예서를 거의 쓰지 않았다. 주로 거의 해행(楷行)이었다. 대련은 청나라 초기부터 유행한 하나의 격식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 이후부터 유행하여 자하와 추사가 꽃을 피웠다. 대련 글씨는 그 전부터 조금씩 쓰기 시작한 현액(懸額)과 더불어 하나의 고유형식이 되었다. 가로, 즉 옆으로 쓴 한 개의 현액과 세로로 내려 쓴 한 쌍의 대련은 누가 어떤 내용으로 어떤 글씨로 썼느냐가 그 집 주인의 품격을 나타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재료인 종이와 붓의 부족, 집의 구조 등 여려 조건이 중국과 달라 크게 발전할 수 없었다. 여기에 소개하는 작품인 '조화(造化) 선생(先生)' 대련은 평소 자하가 즐겨 쓰던 글씨의 특징이 덜 나타난다. 자하는 적잖은 대련이 남아있는데 이 대련처럼 두 배나 큰 글씨는 거의 처음 본다. 또 대부분 중국 운룡지(雲龍紙)나 옥판선지(玉板宣紙)에 쓴 글씨인데 이렇게 우리 한지에 쓴 글씨도 드물다.
하여 필자가 처음 이 작품을 볼 때 자하의 도장이 찍혀있질 않았다면 자하필체라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연구해 보면서 자하 글씨라는 확신을 가졌고, 또 자하의 장인인 송하옹 조윤형(松下翁 曺允亨: 1725-1799)의 글씨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울러 자하 글씨가 조윤형을 배워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그동안 자하는 글씨에 특별한 선생이 없었기에 글씨의 내력이 막연히 동기창(董其昌)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만 하였는데 이 대련을 통해 조윤형을 통해 동기창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내용은 소동파(蘇東坡)의 시구(詩句)을 따다 썼다. '만년에는 도기 빗듯 학생들을 가르치고, / 봄이 오면 지팡이 집고 한가히 산보하네(年抛造化陶甄外, 春在先生杖?中). 필자는 이 글씨를 보면서 옛 그림이나 글씨를 감별할 때 처음 본다고 해서 함부로 쉽게 위작으로 결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