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茶와 茶文化] 15. 우리 차문화의 중심, 화개동(下·최종회)

보허 步虛 2016. 9. 21. 18:17



     

[茶와 茶文化] 15. 우리 차문화의 중심, 화개동(下·최종회)
2005년 09월 16일 () 09:03:00 webmaster@mjmedi.com
                                                                               
  
 서산대사<영정>

                                                        김동곤(쌍계제다 대표)


♣ 조선시대(2) - 추사 김정희

    지리산 차를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문인으로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있다. 선생은 항상 좋은 차를 탐닉하고 목말라 하였다.
좋은 차를 보면 무엇이든 아낌없이 주고 토색(討索)하였다. 젊어서 중국에서 맛본 첫물 용정차와 승설차(勝雪茶-자신의 호를 승설도인이라고도 하였다)를 잊지 못했다. 언젠가 지리산 스님이 만든 차를 맛보고는, 그 빼어나고 향기로운 차를 내년에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쁨을 감추기 못해 친구 권돈인에게 편지를 썼다.

  "차의 품질이 과연 승설보다 더 나은 향기가 있습니다. 일찍이 중국 쌍비관에서 이 같은 것을 맛보았고, 우리나라에 와서 40년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영남사람이 지리산 스님으로부터 얻었다고 합니다. 산의 스님들이 또한 금탑에 개미 같이 모이므로 많이 얻기는 실로 어려워 내년 봄에 스님에게 다시 얻어야 되겠습니다. 스님들도 관리들을 두려워하여 깊이 감추고 쉽게 내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영남사람이 스님과 사이가 좋아 가능할 것 같고, 또 그 영남사람이 나의 졸서(拙書)를 매우 사랑하니 몇 번 손을 거치면 교환할 길이 있습니다."

차를 만든 지리산 스님과 영남사람은 친하고, 영남사람은 나의 글씨를 매우 사랑한다. 영남사람으로 다리를 놓으면 차를 얻을 수는 있겠는데… 믿을 수가 없어 확실하게 더 많은 차를 구하려고 직접 나서겠다…. 천재 예술가, 대학자에 고관을 지낸 선비가 차 몇 줌을 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궁구하는 것에 선생의 인간적인 면이 정겹다.

   "만허(晩虛)가 쌍계사 6조탑 아래 주거하는데 차를 만드는 솜씨가 절묘하였다. 그 차를 가지고 와서 맛을 보이는데 비록 용정의 첫물차도 이보다 더할 수 없고 유마거사(향적 香積)의 주방에도 아마 이런 무상묘미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기 한 벌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6조탑에 차를 공양하게 하였다."

선생은 차를 구하기 위해 뇌물과 글씨들을 준비하여 지리산 쌍계사를 찾았다. 이렇게 찬탄에 침이 마를 정도인 쌍계차! 위 두 글에서만 해도 추사의 화개차 칭찬이 과하다할 정도이다.
차를 만드는 솜씨가 절묘한 지리산 스님은 쌍계사의 만허 스님으로 6조 정상탑에 기거하였다. 쌍계차의 품질은 중국의 명차 승설보다 향기롭고, 중국 제일이라는 첫물 용정차보다 뛰어나고, 미식가 유마거사의 주방에도 있을 수 없는 차이라! 중국에서 돌아와 40년 간 마셔본 차 중에서 이런 차는 보지 못했다.

만허 스님의 쌍계차는 동료 스님들과 관리들 까지도 얻고 뺏으려는 명품으로 벌써 소문이 난 차였다. 차에 해박한 지식과 정통한 선생은 차에 걸신(乞神)이 든 듯 차 욕심이 많아, 차를 얻기 위해선 무엇이든지 주고 싶었다. 다기 한 벌에 “6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세계1화조종6엽(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는 현판을 예의 고졸청고(古拙淸高)한 추사체로 써 주었다. 지금 쌍계사 금당의 전면 좌우에 붙어 있는 현판이 그것이다.
산숭해심(山嵩海深)! 산이 높으면 바다 깊은 걸 아는가!
높은 경지에 오른 이는 분야가 달라도 고수를 알아보는가 보다. 이도 모자라 시골 제다장인 스님에게 시도 지어 바친다.

열반이라는 마설로 당나기 해를 다 보내니,
다만 스님에게는 눈 바른 선(禪)이 귀하네
차만드는 일에 참선 공부까지 겸하였으니
둥근 저 탑광(塔光)을 마시라고 권하소서
만허에게 주는 시이다.


♣ 조선시대(3) - 선승들

    조선시대 내내 국가로부터 배척과 탄압을 받아오던 불교도 지리산 화개동에서는 끊임없이 불조(佛祖)의 맥을 이어오면서 오늘의 한국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꺼져가는 선교(禪敎)의 횃불을 화개에서 다시금 높이 피워올린 벽송당! 화개의 수곡골에서 차 따르고 열반에 들면서 스님들에게 적멸(寂滅)을 가르쳤다.
손자인 서산대사<영정>는 화개동에서 머리 깎고 전후 20년을 살았다. 마음의 고향 - 화개동 - 을 사랑하여 노래한 많은 시문과 차시를 남겼다.

중 대여섯
내 암자 앞에 집을 지었네
새벽 종에 같이 일어나고
저녁 북에 함께 잔다네
시냇물 속 달을 함께 길어와
차 달이니 푸른 연기 나뉘네
날마다 무슨일 의논하는가
염불과 참선이라네.

대사가 중창한 7평짜리 신라고찰 “내은적암”을 노래한 시이다. 이 작은 암자가 너무 좋아 청허원(淸虛院)이라 이름짓고 자호(自號)로도 사용하였다.
차의 고향, 화개동에서 스님들이 매일 하는 일은 차다리고 염불과 참선하는 것이라고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제창하였다.
부휴 선수(1543~1615)대사는 서산대사의 법형제로 스님의 일생을 화개에서 시작하여 화개에서 끝낸 분이다.

우리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은 초의(1786~1865)선사는 김대렴이 최초로 화개동에 차를 심은 꼭 천년 후인 1828년에 스승을 따라 지리산 칠불암에 왔다가 아자방에서 [다신전]을 썼다. 부휴가 사명당에게 준 시이다. 사명당은 법조카가 된다.

아침에는 숲에서 차를 따고
저물면 섶나무를 줍는다네.
또 산과일도 거두어
아주 가난하지는 않다네

초의는 우리의 다경이라는 [동다송]에서

차는 총명하여 사방에 통달하여 막힌 것이 없네
하물며 싱그러운 영근(靈根)을 신령스런 산에 의탁하였네
지리산을 세상에서 방장산이라 하는데
신선 같은 풍모와 고결한 자태는 그 종자부터가 다르다네
화개동 차밭은 최고 으뜸차가 자라는
모두 골짜기와 기름진 자갈밭들이 어우러진 곳이라.

하였다. <끝>

※ 그동안 좋은 내용의 원고를 보내주신 필자와 관심있게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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