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조선 사기장이 일본에 남긴 도자기

보허 步虛 2017. 3. 3. 22:49



      

조선 찻사발 이야기

조선 사기장이 일본에 남긴 도자기


정충영(옛그릇연구회)

 

  가라츠의 오꾸고라이.
  높이 6.7~6.8cm, 입지름 11.8~12.4cm, 
  굽지름 5.8cm.

   후루따오리베가 도요토미의 차두(茶頭)가 된 배경과 조선에 고쇼마루(御所丸)라는 어용선을 보내 고쇼마루 찻사발을 만들어 간 사정을 살펴본 것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후루따오리베와 관계가 깊었던 무장들과 조선 사기장 피랍의 관계와 그들이 남긴 도자기에 대해 알아보자. 

     나베시마(鍋島)는 충청도 금강일대에서 이삼평(李參平)을 데려가 아리따(有田) 자기를 구웠고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는 박평의(朴平意)와 김해의 성산중차(星山仲次) 등을 데려가 사쯔마(薩摩) 자기를 구웠다. 또 모리데루모또(毛利輝元, 1553~1625)는 이작광(李勺光), 이경(李敬)을 데려가 하기에서 자기를 굽게 했으며 호소가와츄꼬(細川忠興, 1563~1645)는 존해(尊楷)를 데리고 가 아가노요(上野窯)를 열었다. 그리고 구로다나가마사(黑田長致, 1568~1623)가 팔산(八山)을 데리고 가 다까또리(高取)자기를, 데라자와히로다까(寺津廣高, 1563~1633)는 현재의 나까자또가(中里家)의 조상을 피랍하여 가라쓰(唐津)를 구웠으며, 고또이에노부(後藤家信)는 종전(宗傳)과 백파선(百婆仙)을 피랍하여 큐슈의 다케오(武雄), 가라쓰(唐津) 지방에서 자기를 굽게 했다. 

   위에 열거한 무장은 모두 후루따오리베와 관계가 깊었으며 사승관계(師承關係) 또는 어떤 식으로든 차와 연결고리가 있는 사이로 차에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다. 조선 사기장을 납치한 이들은 한결같이 큐슈(九州)일대에 가마를 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한반도의 고령토 토맥이 현해탄을 건너 큐슈일대에 퍼져있어 도자기 제작이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다시피 일본 열도는 화산이 빈번하고 화강암의 풍화로 생기는 1차 점토의 생성이 거의 없는 신생대 땅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일하게 큐슈는 한반도 남부에서 떨어져 나간 곳으로 백토가 있어 자기의 생산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 큐슈의 자기가 급속하게 발전하게 된 계기는 명나라의 멸망으로 세계 고급 자기의 공급원인 경덕진(景德鎭)의 폐쇄에 따라 대체 수요의 급증에서 찾을 수 있다. 경덕진요는 청나라 강희(康熙) 연간에 와서 완전히 복구되었는데 약 50여 년간의 공백기가 있어 일본 자기의 비약적인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조선 사기장의 기술과 자토(磁土)의 발견 그리고 몇십 년 뒤 중국 채색 자기기술의 접목으로 큐슈는 세계적인 자기고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18세 후반 아리따 자기의 기술은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 마이센 자기의 원조가 되었다. 조선 사기장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피랍된 사기장의 역사는 오늘날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이 피상적이며 자의적으로 기록해 놓은 문서 일부와 예로부터 전해오는 구전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주요 가마 몇 군데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언급해보자. 

   먼저 아리따야끼(有田燒)를 들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가현 니시마쯔무라군 아리따쵸(佐賀縣西松浦郡有田町)다.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이삼평을 데리고 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광을 발견 1616년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웠다. 이중 텐구다니요(天狗谷窯)는 최초의 가마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텐구다니요보다 선행(先行)된 가마가 있다는 설도 있지만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아리따 자기가 급속하게 발전한 데는 아무래도 그 이전 즉 왜구들의 소굴인 마쯔우라당(松浦黨)이 조선에서 몰래 데리고 온 사기장들의 기술이 빠르게 접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왜구들이 몰래 굽고 있었던 것은 백자가 아닌 도기류로 고가라츠(古唐津)가 여기에 해당되며 진해 웅천자기와 비슷한 오꾸고라이(奧高麗)(사진Ⅰ), 계룡산요와 비슷한 철화문 그릇 등이 있다. 

    아리따 자기는 이후 크게 발전하여 몇 가지의 종류로 분화된다. 크게 나눠보면 ‘이마리야끼 (伊萬里燒)’, ‘가끼에몽(右衛門)’, ‘이로나베시마(色鍋島)’ 등이다. 이마리야끼는 초기 이마리(初期伊萬里)와 고이마리(古伊萬里)로 나눠지는데 조선풍의 기형과 문양으로 만든 것이 초기에 해당되며(사진Ⅱ) 이후 중국 형태와 문양이 복잡하게 전개되는 것은 고이마리에 해당된다.(사진Ⅲ) 1638년 나베시마 번이 대규모 어용요를 쌓은 후 청화를 밑그림으로 하고 그 위에 색을 올리는 자기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로나베시마(色鍋島)다. 또 1644년 가끼에몽(右衛門)이 중국 기술자로부터 적회(赤繪)의 비법을 전수받아 완성한 자기가 가끼에몽이 되었다. 현재 아리따에는 이삼평 씨 가문이 15대를 이어가며 조선 사기장의 맥을 잇고 있다.


  아이따이로에접시. 높이 5.5cm,
지름 35.5cm
    다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쯔마야끼가 있다. 1598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80여 명의 사기장을 사쯔마(薩摩)에 데리고 가서 만든 도자기다. 80여 명의 사기장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개 성씨(姓氏)가 가고시마 해안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에는 심수관과 박평의(朴平意) 등이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 쿠시키노(串木野)라는 곳에 요장(窯場)을 열었으나 원주민의 박해를 못 견뎌 산속으로 쫓겨나 정착한 곳이 지금의 가고시마현( Y小島縣) 히오끼군 이찌끼쵸(日置郡市來町)다. 

    구전에 의하면 남원일대에서 끌려온 사기장들이 산속으로 쫓겨가면서 고향인 남원과 너무 닮아서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후 도자기가 돈이 되기 시작하자 번주 시마즈는 토지와 가옥을 주고 사족(士族)의 대우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번주의 수입이 시원찮게 되자 사기장들은 다시 천덕꾸러기가 되어 성도 못 고치고 결혼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참패하고 항복을 한 1945년 미국과 항복문서를 작성하고 교섭한 외무대신(外務大臣)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조선 사기장 박평의의 후손 도오고오시게노리(東鄕茂德, 1882~1950)다. 그는 일찍 개명(改名)하고 도쿄대학을 졸업하여 출세한 경우지만 불행하게도 시대를 잘못 만나 A급 전범으로 몰려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쯔마야끼는 시로몬(白物)과 구로몬(黑物)으로 대별된다. 전자는 자기에다 백유를 씌우고 금채(金彩)와 색회(色繪)를 올려 정교하고 화려하게 만든 도자기로 일반 서민용이라기보다는 신분이 높은 층에서 썼다고 한다.(사진Ⅳ) 1900년 심수관가(沈壽官家)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도자기를 출품하여 명성을 날린 바 있고 유명한 소설가 시바료타로오(司馬遼太郞)는 14대 심수관을 주인공으로 해서 《고향을 어찌 잊을 리야》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후자의 구로몬(黑物)은 시로몬과 대비되며, 일반 서민들의 일상 잡기로 널리 쓰이는 도자기로서 소박하며 자연미 넘치는 게 특징이다. 시마즈번에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은 옥산신사(玉山神社)에 모셔져 그 영혼을 위로 받고 있고, 15대 심수관은 사쯔마야끼를 대표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다음으로 하기야끼(萩燒)가 있다. 일본에서 찻사발의 등급을 말할 때 첫째 이도(井戶), 둘째 라꾸(樂), 셋째 하기(萩) 또는 카라츠(唐津)라 한다. 이것은 찻사발의 국적에 관계없이 등급을 매길 경우이며, 일본 내에서 만든 찻사발의 등급을 말할 때는 첫째 라꾸(樂), 둘째 하기(萩), 셋째 카라츠(唐津)로 불린다. 이는 모두 조선 사기장들에 의해 만들어진 찻사발들이다. 일본 찻사발의 역사가 한국 도자사를 떠나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면 하기야끼(萩燒)의 유래를 살펴보자.

     임진왜란 때 부산에 머물며 군수물자 등을 지원한 모리데루모또(毛利輝元)는 전국에서 가져오는 조선 찻사발을 모아 도요토미에게 상납한 이로 유명하다. 그도 일본으로 돌아갈 때 조선 사기장 이작광(李勺光)과 이경(李敬) 형제를 데리고 가 하기성중(城中)에서 하기야끼를 굽게 했다. 이들 형제는 이후 독립된 가마를 가지게 되는데 형 이작광은 하기성에서 약 30㎞ 떨어진 곳의 나가또(長門: 현재 야마구치현)에서 후까가와(深川)요를 만들었고, 동생 이경은 성중에 남아 사까고라이좌에몽(坂高麗左衛門)성을 받고 사까(坂)가의 조상이 되었다. 하기야끼의 특색은 한마디로 변화무쌍하다. 찻사발의 변화가 다양하여 ‘하기의 나나바께(萩の七化)’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차 한 잔 마실 때 일곱 번 바뀐다는 뜻일 게다.(사진Ⅴ)

    야마구찌현의 대도토(大道土)는 높은 온도에서도 자화가 잘 안 되는 흙으로 유명한데, 이 흙으로 찻사발을 빚으면 유약의 빙렬이 좋고 흡수성이 뛰어나 찻사발의 변화가 풍부해진다고 한다. 또 형태도 소박하여 조선 찻사발 중에서도 이도(井戶)와 덤벙찻사발(粉引)의 특징이 한꺼번에 나타나 차인을 감동시킨다. 그래서 일본 다도의 핵심인 와비차( zび茶)에 가장 적합한 그릇으로 평가된다.

    
   마지막으로 치꾸젠(筑前: 현재 후쿠오카)의 성주 구로다나가마사(黑田長政, 1568~1623)가 귀국할 때 위등(韋登)이라는 곳에서 피랍된 조선 사기장 팔산(八山)이 있다. 다까도리(高取)라는 산에서 구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팔산은 다까도리하찌조(高取八藏)라는 이름과 70여 명의 부역인을 하사받고 어용 가마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우찌가이소(內カ磯), 야마다(山田), 시라하다야마(白旗山) 등으로 옮기며 훌륭한 다기를 생산하였다. 특히 팔산이 만든 것을 고다까도리(古高取)라고 하여 진귀하게 여긴다. 다까도리야끼는 흰 것과 검은 것, 갈색 유, 옅은 푸른색 등이 있는데 모두 광택이 나고 아취가 있다.(사진Ⅵ)

     후루따오리베의 애제자 고보리엔슈(小堀州, 1575~1647)는 다까도리야끼의 찻사발의 우수함을 인정하고 엔슈 7요(遠州七窯)에 넣어 계속 명완(名碗)을 생산하게 하였다. 고보리엔슈는 임진왜란 이후 후루따오리베의 대를 이은 막부의 차두로 특히 부산 왜관요의 주문 찻사발을 제작하는 데 깊이 관여한 인물로 알려진다. 지금도 조선 찻사발의 감정은 고보리 가(家)의 전유물처럼 되어있다.
이 밖에 조선 사기장이 관여된 아가노야끼(上野燒), 가라츠야끼(唐津燒), 야시로야끼(八代燒), 시코꾸(四國)의 도베야끼(砥部燒) 등이 있고 파생된 가마 수백 군데가 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필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차의 세계》2007년 3월호 참조

                                                                                                      기사 작성일 : 4/2/2007 5:40:15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