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美 -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0)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동영상
- EBS 지식채널
한국의 美 -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0) 안견의 몽유도원도 | ||||||||||
네 개의 景群 꿰는 독특한 구도 … 道家적 사상의 뿌리 구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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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화 가운데 쌍벽을 이루는 인물은 안견과 정선으로, 각각 조선 전기와 후기를 대표한다. 특히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시·서·화의 어우러짐과 독자적 화풍의 확립으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회화사 연구자 중 안휘준 교수는 ‘몽유도원도’를 최고로, 홍선표 교수는 ‘인왕제색도’를 최고의 산수화로 평가하는데, 이번 호에서는 ‘인왕제색도’에 이어 안휘준 교수가 ‘몽유도원도’의 뛰어난 점을 짚어보았다. / 편집자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화가 세 명만 꼽으라고 하면 신라의 率居, 고려의 李寧, 조선왕조의 安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三大家 중에서 유일하게 작품이 남아있는 인물이 안견이고 또 그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眞作이 ‘몽유도원도’이다. 따라서 ‘몽유도원도’가 지닌 역사적 의의와 회화사적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하겠다.
둘째로 ‘몽유도원도’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안견의 유일한 진작이며 우리나라 최고의 산수화라는 점이다. 안견은 수많은 작품을 남겼음이 이런저런 기록들에 의해 확인되나 현존하는 진작은 ‘몽유도원도’ 뿐이다. 안견이 평생의 정력을 다해 그렸다는 ‘靑山白雲圖’도, 안평대군이 젊은 시절에 모았던 30여점의 작품들도 모두 없어지고 전해지지 않는다. 오직 몇 점의 傳稱作들이 알려져 있으나 진작으로 보기 어렵다. 그것들 대부분이 안견보다 후대의 것이거나 다른 사람의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四時八景圖’가 화풍이나 제작연대로 보아 비교적 안견의 산수화풍에 핍진하여 크게 참고가 될 뿐이다.
넷째로 무엇보다도 ‘몽유도원도’를 값지게 하는 것은 이 작품 자체가 보여주는 화풍상의 특징이라 하겠다. 우선 구성과 구도가 특이하다. 현실세계의 야산과 도원의 세계로 이어지는 바위산이 갈라지는 왼쪽 하단부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오른쪽 상단부로 가상의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는 구성은 한·중·일 삼국의 회화를 통털어 유일하다. 통상적으로는 오른쪽으로부터 왼편으로 횡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 관례이다. 또한 왼편으로부터 오른편 쪽으로 평상세계, 도원의 바깥 입구부분, 도원의 안쪽 입구, 널찍한 도원 등 4개 부분이 따로따로 떨어진 듯 이어져 있는 점도 독특하다. 왼쪽 하단부에서 시작해 오른쪽 상단부에서 절정을 이루는 대각선적 전개가 개별적으로 분리된 듯한 네 개의 景群을 꿰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유기적 연결보다는 시각적 연계가 화면 전체를 조화롭게 이어주고 있음이 괄목할만하다. 高遠, 平遠, 深遠의 3원이 높은 산, 넓은 도원, 깊숙한 골짜기 등에 갖추어져 있음도 엿보인다.
얹히고 받힌 기이한 형태의 암산들과 그것들이 자아내는 환상적인 분위기, 오른쪽 상단에 고드름처럼 매어달린 바위들이 시사하는 方壺와도 같은 도가적 신선세계로서의 도원의 모습, 특정한 준법을 구사함이 없이 붓을 잇대어 담묵으로만 표현한 바위와 산들이 드러내는 담백한 수묵화의 전형적 양상, 담묵의 수묵화적 표현과 대조를 보이는 청색, 녹색, 홍색, 금분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복사꽃들과 그것들 주변에 감도는 아득한 煙雲 등도 간과할 수 없는 특징들이다. 특히 복사꽃은 확대경으로 보면 표현의 정확함과 섬세함, 색채와 분위기의 영롱함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안휘준 / 명지대 석좌교수 |
조선시대 화가 안견의 진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그림은 일본의 천리대가 소장하고 있는 <몽유도원도>한 점 뿐이다.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세종 29년(1447)음력4월 20일에 안평대군은 도원을 거니는 꿈을 꾸었다. 그는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아름답고 깊은 골짜기를 서성거리다가 산관야복을 한 사람을 만나 그에게서 “북쪽으로 휘어져 계곡에 들어가면 도원”이라는 말을 듣고는 말을 달려가 보니, 산벼랑이 솟아있고 나무숲은 빽빽한데 시냇물은 돌고 돌아 굽이굽이 휘어져 흐르며 사람을 홀리는 전경을 보게 되었다.
그 골짜기로 들어가니 탁 트인 넓은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 사방엔 깍아지른 듯한 산이 솟아 있었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했으며, 드넓은 복숭아 꽃 숲엔 붉은 노을이 비쳐 떠오르고 대나무 숲과 싸리문이 반쯤 닫힌 초가집에 무너진 흙담이 보였다. 그곳에 가축은 전혀 보이지 않고 집 앞 시냇물에는 조각배만이 한가로이 물위를 떠다녀 마치 신선세계와 같았다.
안평대군은 이 꿈속의 도원을 실컷 거닐며 구경하다가 깨어나 안견으로 하여금 이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던 것이다. 안평대군의 명을 받은 안견은 이 그림을 3일만에 완성했다. 세로 38.6cm에 가로 106.2cm의 옆으로 긴 그림인 몽유도원도는 세련미 넘치는 섬세함과 웅장함, 또한 환상적인 신비감과 시적 깊이감을 격조 높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걸작이며 세계 최고급의 명화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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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유도원도 |
이야기 내용상으로 보면 이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가 있다. 화면 왼편의 야산풍경은 속세의 경관이며, 험준한 바위산들이 있는 화면 중간부분은 도원으로 가기위한 과정의 경관이고, 화면 오른편에 그려진 넓은 산위의 마을이 도원경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이야기 내용상이 아닌 형식 구조상으로 나누어 보면, 두 번째 부분의 험준한 바위산 풍경은 가운데로 세차게 흐르는 시냇물을 경계로 해서 다시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이렇게 하면 전체 화면은 네 부분의 경관으로 나누어진다. 화면의 왼쪽에서 두 번째 부분의 경관을 보면 바위산 사이로 오솔길이 꼬불꼬불 나있고, 이 산길은 바위산 중턱의 굴로 연결되어 사라지는데, 사라진 산길은 다시 굴이 나있는 산 뒤편 오른쪽에 희미하게 그려진 산길로 잠시 이어져 보이다가, 이번에는 세 번째 부분의 경관으로 들어와 기암산에 의해 가리어져 다시 폭포 옆 산길로 이어지면서 도원경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도원경에 이르는 길은 화면 왼편 하단에서 시작되어 오른편 상단으로 이어지는 사선 방향을 취하고 있으며, 이 사선의 상승하는 방향을 따라서 화면의 눈높이도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 변화되어 오른편의 도원경에 이르면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국의 부감법적 시각이 적용되어 답답하지 않고 탁 트인 넓은 도원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안견이 이와 같이 한 화면에서 다양한 눈높이의 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기암산으로 둘러싸인 도원을 드넓게 보이게 하기위한 회화적 배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변화되어지는 눈높이에 따르는 확장된 공간처리 방법은 기기묘묘한 바위산들의 험준하고 다양한 형상과 어울려 환상적인 웅장함과 신비로운 생동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안견의 그림에서 보는 도원은 고요한 시냇물이 있고 빈 배가 한 척이 적막하게 떠 있으며, 도원의 먼 곳에는 안개가 가득 차 흐르고 안개 위로 복숭아꽃 나뭇가지들이 빛을 발하며 떠 있는 듯 그려진 가운데 정적에 싸인 집들이 몇 채 도원 멀리 보이는 시적인 정경이다.
전체 화면의 색감은 은은한 중간톤의 먹색을 중심으로 해서 군데군데 농담의 변화를 주어 먹을 칠하고 있으며, 도원의 복숭아꽃은 붉은색과 연분홍색으로 칠해져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다. 안견이 <몽유도원도>에서 쓰고 있는 필선은 매우 섬세하고 정치하며, 변화무쌍하고 유려하여 선의 흐름만으로도 우리에게 깊은 미적 쾌감을 주고 있는데, 이것은 인쇄된 사진 상태의 그림만 보아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몽유도원도>의 원화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품격이다. <몽유도원도>는 조선시대의 훌륭한 예술 유산으로서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임두빈 교수 dkdds@dankook.ac.kr
화대백과사
전
몽유도원도
다른 표기 언어 夢遊桃源圖시대 | 조선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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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자 | 안견 |
창작/발표시기 | 1447년(세종 29) |
성격 | 산수화 |
유형 | 작품 |
크기 | 세로 38.7㎝, 가로 106.5㎝ |
권수/책수 | 1점 |
재질 |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 |
대표자 |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 |
분야 | 예술·체육/회화 |
소장/전승 |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 |
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 비단에 수묵담채, 38.7×106.5㎝,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1447년 4월 20일 안평대군이 도원을 꿈꾸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안견이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하자 안평대군이 그림의 제목과 시와 글을 쓰고 뒤이어 신숙주, 김종서, 박팽년 등 23명의 글이 썼다. 이 그림은 왼쪽의 현실공간과 오른쪽의 도원 세계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통일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개설
안견이 1447년(세종 29)에 그린 산수화로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다. 크기는 세로 38.7㎝, 가로 106.5㎝이고,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447년 4월 20일안견의 독실한 후원자였던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이 꿈 속에 도원(桃源)을 방문하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안평대군이 쓴 발문(跋文)에 의하면, 안견이 이 걸작을 단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여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구성 및 형식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에는 안견의 그림뿐 아니라 안평대군의 제서(題書)와 발문, 그리고 1450년(세종 32) 정월에 쓴 시 한 수를 비롯해 20여 명의 당대 문사(文士)들과 1명의 고승(高僧)이 쓴 제찬을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찬문(讚文)이 곁들여져 있다.
안평대군과 더불어 찬문을 남긴 인물은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하연(河演), 송처관(宋處寬), 김담(金淡), 고득종(高得宗), 강석덕(姜碩德), 정인지(鄭麟趾), 박연(朴堧), 김종서(金宗瑞), 이적(李迹),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윤자운(尹子雲), 이예(李芮), 이현로(李賢老), 서거정(徐居正), 성삼문(成三問), 김수온(金守溫), 만우(卍雨), 최수(崔脩) 등으로 모두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안견의 그림과 이들의 시문(詩文)은 현재 두 개의 두루마리로 나누어져 표구되어 있다. 첫 번째 두루마리에 박연의 시문까지, 두 번째 두루마리에 김종서의 찬시부터 최수의 찬시까지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순서는 일본에서 다시 표구할 때 변형된 결과로 여겨진다. 일본에 널리 알려진 신숙주의 찬문이 맨 앞에 배치된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본래는 고득종의 찬문이 제일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시문은 각 인물의 친필로 쓴 것이어서 그 내용의 문학적 특징은 물론 서풍(書風)까지 파악할 수 있어 서예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즉 「몽유도원도」의 그림과 거기에 곁들여진 시와 글씨가 함께 어우러져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초기 세종대 문화예술의 성과가 집대성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내용
이 그림은 회화 양식상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야기의 전개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상적인 예와 달리 왼편 하단부로부터 오른편 상단부로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왼편의 자연스러운 현실세계와 오른편에 배치된 환상적인 도원(桃園)의 세계가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것도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현실세계는 부드러운 토산(土山)으로 이루어져 있고, 도원의 세계는 기이한 형태의 암산(巖山)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그 차이가 현저하다.
무엇보다 큰 특색은 전체 경관이 몇 개로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경군(景群)들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즉 여러 개의 산 무더기들이 합쳐져 하나의 통일된 전경(全景)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와 그 영향을 받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산수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두 가지 두드러진 시각의 차이가 엿보인다. 즉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오른편 대부분의 도원은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俯瞰法)을 적용하여 표현되었다. 이처럼 부감법을 사용함으로써 안견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공간이 넓은 도원의 경치를 성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산들은 왼편에서부터 오른편으로 점점 높아지는 경향을 띠고 있어서 서서히 웅장감이 느껴지도록 하였다. 이 밖에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은 전혀 그려져 있지 않아 중국에서 그려진 도원도(桃園圖)와는 차이를 드러낸다.
이상의 여러 가지 양식적인 특색은 바로 안견이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고, 그러한 특징들이 후대의 한국 산수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또한 붓을 잇대어 쓴 필법(筆法), 조광효과(照光效果)를 살린 표현, 그 밖의 세부에서 안견이 토대로 삼았던 북송대(北宋代) 이래의 이곽파 화풍(李郭派畵風 : 중국 북송대 이성과 곽희가 이룩한 산수화 양식), 특히 곽희 화풍(郭熙畵風)의 영향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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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안견과 몽유도원도』(안휘준·이병한, 예경, 1991)
- 「조선초기 안견파 산수화 구도의 계보」(안휘준, 『초우황수영박사고희기념미술사학논총』, 통문관, 1988)
- 「안견과 그의 화풍-몽유도원도를 중심으로-」(안휘준, 『진단학보』38, 진단학회, 1974)
출처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조선의 화단을 지배한 위대한 화원
안견
안가도(安可度), 安堅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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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대표작 | 〈몽유도원도〉 등 |
시기 | 조선 초기 |
한국적 산수화풍을 창출했으며, 이후 조선 회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안견은 조선 초기에 활동한 화원으로, 한국적 산수화풍을 창출한 조선 시대 최고의 화가로 꼽힌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부터 조선 중기 이후까지 조선 시대 화원 대부분이 그의 화풍을 이어받았을 정도로 우리나라 회화사상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이다. 신분이 낮은 화원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어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기록들에서 잠깐 언급되는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전부이다. 전해 오는 그림 역시 매우 적으며, 그의 작품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의 작품으로 확실하게 인정되는 것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유일한데, 조선 초기는 물론, 조선 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그림 중 하나로 꼽힌다. 그 밖에 안견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적벽도(赤壁圖)〉, 〈산수도(山水圖)〉, 〈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 등이 있다.
안견은 1400년 혹은 1418년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나 확실하지 않다. 세종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으며, 세조 시기까지 활동했으리라고 추정된다. 자는 가도(可度), 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 주경(朱耕)이며, 자나 호가 지어진 배경이나 그 의미도 밝혀진 바가 없다. 본관은 충청남도 지곡으로 알려져 있다.
안견은 조선 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인 도화원(성종 때 도화서로 개칭)에 소속된 화원으로, 젊은 시절부터 산수, 묵죽, 장송, 노안도 등 못 그리는 그림이 없었으며, 산수화에 있어서는 필적할 이가 없다고 평가받았다. 신숙주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 조정에 유명한 화가 한 사람이 있는데, 안견이라 한다. 성이 총민하고 정박(精博)하며, 옛 그림을 많이 보아 그 요체를 모두 얻고 여러 대가들의 좋은 점을 모아 총합하고 절충하였다. 옛것으로부터 빌었지만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은 얻기 어렵다.”
안견이 위대한 화원이 될 수 있었던 데는 타고난 재능도 작용했겠지만, 이에 더해 안평대군과 교유하며 화가로서의 안목을 기르고 그의 비호를 받은 덕분이기도 하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 후원자였다. 시와 글씨, 그림에 능했고, 중국 고전 회화에 박학했으며, 수많은 서화를 수집했다. 안평대군이 25세 때 안견이 그의 초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일찍부터 안평대군과 교유하며 총애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445년경 안견은 정4품인 호군(護軍)의 벼슬에 올랐다. 화원이 정4품의 지위에 오른 것은 그가 최초이다. 화원은 세종 시기에 최고 5품까지 오를 수 있었고, 성종 시기에는 종6품 별제까지 오를 수 있는 지위였다. 안견이 1400년경 출생했다면 40대, 1418년생이라면 20대인데, 어느 쪽이든 젊은 나이에 화원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안정적인 실력과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성종조인 1478년에는 아들 안소희가 문과에 급제했다. 비록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높은 관직을 얻지 못했으나 화원의 아들이 신분 제한을 뛰어넘어 대과인 문과에 급제했던 것은 예외적인 일로 아버지 안견의 명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안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예다.
안견은 최고의 후원자였던 안평대군이 형 수양대군에 의해 희생된 계유정난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세조(수양대군) 시대에도 그 명성은 빛이 바래지 않았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안평대군이 희생된 후 그 역시 죽거나 몰락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윤휴의 《백호전서》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안평대군은 안견을 특히 아껴 집으로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하고 한시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안견은 시절이 수상한 것을 감지하고 안평대군의 집 밖으로 나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안평대군이 중국에서 귀한 용매먹(龍煤墨丸)을 구해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외출했다 돌아오니 용매먹이 사라져 있었다. 이에 종들을 다그치자 그들은 안견을 지목했고, 안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맷자락에서 먹이 떨어졌다. 이를 본 안평대군은 진노하여 안견을 내쫓고 다시는 집에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안견은 이후 자신의 집에서 두문불출했고, 얼마 후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을 비롯해 그 집에 드나들던 사람이 모두 죽임당하거나 화를 입었다고 한다.
안견은 안평대군을 비롯해 사대부들과 교유하며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도화원 화원으로서 의궤도(궁정과 조정의 각종 행사를 그린 그림)도 많이 그렸다. 〈대소가의장도(大小駕儀仗圖)〉,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과거도(科擧圖)〉, 〈기영회도(耆英會圖)〉 등을 그렸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도, 안견의 작품이라고 확증된 것도 거의 없다. 유일하게 확증된 것이 〈몽유도원도〉이다.
〈몽유도원도〉는 1447년(세종 29) 음력 4월 20일 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도원경을 거닐며 본 바를 안견에게 이야기해 주고 그리게 한 그림으로, 사흘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안평대군이 발문을 썼으며 신숙주, 박팽년, 정인지, 최항 등 세종 대의 고사(高士) 21명이 친필로 찬문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 회화사뿐만 아니라 문학사, 서예사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 몽유도원도〉는 구성부터 독창적이다. 동양 회화에서는 화면이 흔히 우측에서 시작되어 좌측에서 끝나는 것이 통상적이나 이 그림은 왼편 하단부부터 오른편 상단부로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크게 네 장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왼편은 현실 세계, 오른편은 꿈속의 도원경이다. 안평대군이 박팽년을 데리고 꿈속 유랑을 나서는 데서 시작하여, 복숭아 숲과 험준한 산을 지나 도원에 도착한 후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총 네 단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림의 시점 역시 독특하다.
현실 세계는 정면에서, 도원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부감법으로 구별해 표현했는데, 이는 산으로 둘러싸인 도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기기묘묘하게 뻗어 있는 산세, 복숭아 꽃밭이 늘어선 갈래길, 먼 산을 감싼 안개 등 꿈속 환상의 세계가 몽환적이고도 고요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필묵법에 있어서는 산수화를 완성했다고 평가되는 중국 북송 시대 화가 곽희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으나, 공간감을 표현한 방식이나 구도, 구성, 세부 묘사에 있어 독자적인 화풍을 창출했다고 평가받는다.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시, 서, 화의 정수가 결집된 작품으로 평가되며, 중국의 도원도(桃源圖)각주1) 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지녀 조선 시대 산수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견의 화풍은 화원들은 물론, 사대부 계층까지 폭넓게 전파되어 조선 후기에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등장할 때까지 조선의 화단을 지배했다. 또한 일본 수묵화의 거장 슈분(周文)이 조선에 사절단으로 와 그의 그림을 배워 간 영향으로 인해 무로마치 시대 수묵화에서도 안견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안견은 1464년(세조 10) 김시에게 대나무 그림을 그려 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까지 작품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시기가 끝나 갈 무렵 점차 화원으로서의 활동이 축소되었으며, 아들 안소희가 과거에 급제하던 성종 시대에는 안정된 노년기를 보냈으리라 여겨진다. 1470년대 말에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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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의 몽유도원도 : <안평대군>의 "발문(跋文)" 안견의 몽유도원도 : 夢遊桃源記 몽유도원기<안평대군>의 "발문(跋文)"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서문(序文)▣ ❶歲丁卯四月二十日夜,余方就枕,精神蘧栩,睡之熟也,夢亦至焉,忽與仁叟,至一山下,層巒深壑,崷崒窈窅. ❶세정묘사월이십일야,여방취침,정신거허,수지숙야,몽역지언,홀여인수,지일산하,층만심학,추줄요요. ➀정묘년(1447) 4월 20일 밤, 내가 막 잠이 들려고 할 즈음, 정신이 갑자기 아련해지면서 깊은 잠에 빠지고 이내 꿈을 꾸게 되었다. 홀연히 인수(仁叟)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았고 골짜기가 깊어 산세가 험준하고 그윽하였다. ❷有桃花數十株,微徑抵林表而分岐. ❷유도화수십주,미경저림표이분기.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있고, 그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는데 숲 가장자리에 이르러 갈림길이 되어 있었다. ❸徊徨竚立,莫適所之,遇一人山冠野服. ❸회황저립,막적소지,우일인산관야복.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터에 마침 산관야복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❹長揖而謂余曰.ㆍ"從此徑以北,入谷則桃源也."ㆍ ❹장읍이위여왈.ㆍ"종차경이북,입곡칙도원야."ㆍ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나에게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에 이르게 됩니다”라 하였다. ❺余與仁叟,策馬尋之.崖磴卓犖,林莽薈鬱,溪回路轉,蓋百折而欲迷. ❺여여인수,책마심지.애등탁락,림망회울,계회로전,개백절이욕미. 내가 인수와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갔는데, 절벽은 깎아지른 듯 우뚝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으며, 시냇물은 굽이쳐 흐르고, 길은 구불구불 백 번이나 꺾이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❻入其谷則洞中曠豁,可二三里. ❻입기곡칙동중광활,가이삼리. 골짜기에 들어서니 동천이 탁 트여 넓이가 2, 3리 정도 되어 보였다. ❼四山壁立,雲霧掩靄,遠近桃林,照暎蒸霞. ❼사산벽립,운무엄애,원근도림,조영증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고, 멀고 가까운 곳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빛이 비쳐 연기 같은 노을이 일고 있었다. ❽又有竹林茅宇,柴扃半開,土砌已沈,無鷄犬牛馬,前川唯有扁舟,隨浪游移,情境蕭條,若仙府然. ❽우유죽림모우,시경반개,토체이침,무계견우마,전천유유편주,수랑유이,정경소조,약선부연. 그리고 대나무 숲 속에는 띠풀집이 있는데,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흙으로 만든 섬돌은 거의 다 부스러졌으며, 닭이나 개•소•말 등은 없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내에는 오직 조각배 한 척이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이어서 그 쓸쓸한 정경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 싶었다. ⑨於是踟躕瞻眺者久之.謂仁叟曰.ㆍ"架巖鑿谷,開家室,豈不是與!ㆍ實桃源洞也."ㆍ ⑨어시지주첨조자구지.위인수왈.ㆍ"가암착곡,개가실,기불시여!ㆍ실도원동야."ㆍ 이에 한참을 머뭇거리면서 바라보다 인수에게 말하기를 “암벽에 기둥을 엮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짓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정녕 이곳이 도원동이로다”라 하였다. ⑩傍有數人在後,乃貞父,泛翁等,同撰韻者也. ⑩방유수인재후,내정부,범옹등,동찬운자야. 마침 옆에 몇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정부(貞父)•범옹(泛翁) 등이 운을 맞춰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⑪相與整履陟降,顧盻自適,忽覺焉. ⑪상여정리척강,고혜자적,홀각언. 이윽고 신발을 가다듬고 함께 걸어 내려오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즐기다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⑫嗚呼通都大邑,固繁華,名宦之所遊,窮谷斷崖,乃幽潛隱者之所處. ⑫오호통도대읍,고번화,명환지소유,궁곡단애,내유잠은자지소처. 오호라, 큰 도회지는 실로 번화하여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노니는 곳이요, 절벽이 깎아지른 깊숙한 골짜기는 조용히 숨어 사는 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⑬是故紆身靑紫者,迹不到山林,陶情泉石者,夢不想巖廊. ⑬시고우신청자자,적부도산림,도정천석자,몽불상암랑. 이런 까닭에 오색찬란한 의복을 몸에 걸친 자는 발걸음이 산속 숲에 이르지 못하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을 보며 마음을 닦는 자는 또 꿈에도 솟을대문과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⑭蓋靜★{足+參:조}殊途,理之必然也. ⑭개정★{족+참:조}수도,리지필연야. 이는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길을 달리하는 까닭이니 필연의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⑮古人有言曰,"晝之所爲,夜之所夢." ⑮고인유언왈,"주지소위,야지소몽." 옛사람이, “낮에 행한 바를 밤에 꿈을 꾼다”고 하였다. ⓰余托身禁掖,夙夜從事,何其夢之到於山林也耶ㆍ ⓰여탁신금액,숙야종사,하기몽지도어산림야야ㆍ 나는 궁궐에 몸을 기탁하여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터에 어찌하여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었던 말인가? ⓱又何到而至於桃源耶ㆍ ⓱우하도이지어도원야ㆍ 그리고 또 어떻게 도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단 말인가? ⓲余之相好者多矣,何必遊桃源而從是數子乎ㆍ ⓲여지상호자다의,하필유도원이종시수자호ㆍ 내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늘, 도원에 노닒에 있어서 나를 따른 사람이 하필 이 몇 사람이었는가? ⓳意其性好幽僻,素有泉石之懷,而與數子者交道尤厚,故致此也. ⓳의기성호유벽,소유천석지회,이여수자자교도우후,고치차야. 생각건대 본디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며 마음에 전부터 산수•자연을 즐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아울러 이들 몇 사람과 교분이 특별히 두터웠던 까닭에 함께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⓴於是令可度作圖. ⓴어시령가도작도. 이에 가도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㉑但未知古之所謂桃源者,亦若是乎ㆍ ㉑단미지고지소위도원자,역약시호ㆍ 옛날부터 일컬어지는 도원이 진정 이와 같았을까? ㉒後之觀者,求古圖,較我夢必有言也. ㉒후지관자,구고도,교아몽필유언야. 뒷날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옛날 그림을 구하여 나의 꿈과 비교하게 되면 무슨 말이 있을 것이다. ㉓夢後三日,圖旣成,書于匪懈堂之梅竹軒. ㉓몽후삼일,도기성,서우비해당지매죽헌. 꿈을 꾼 지 사흘째에 그림이 다 되었는지라 비해당의 매죽헌에서 이 글을 쓰노라. 「夢遊桃源圖」 「몽유도원도」 ⇒歲丁卯四月二十日夜, 余方就枕, 精神蘧栩, 睡之熟也, 夢亦至焉. 忽與仁叟, 至一山下, 層巒深壑, 崷崒窈窅. 有桃花數十株, 微徑抵林表而分岐. 徊徨竚立, 莫適所之, 遇一人山冠野服. 長揖而謂余曰: “從此徑以北, 入谷則桃源也” 余與仁叟, 策馬尋之, 崖磴卓犖, 林莽薈鬱, 溪回路轉, 蓋百折而欲迷. ⇒入其谷則洞中曠豁, 可二三里. 四山壁立, 雲霧掩靄, 遠近桃林, 照暎蒸霞. 又有竹林茅宇, 柴扃半開, 土砌已沈, 無鷄犬牛馬. 前川唯有扁舟, 隨浪游移, 情境蕭條, 若仙府然. 於是踟躕瞻眺者久之, 謂仁叟曰: “架巖鑿谷, 開家室, 豈不是與! 實桃源洞也” 傍有數人在後, 乃貞父•泛翁等, 同撰韻者也. ⇒相與整履陟降, 顧盻自適, 忽覺焉. 嗚呼通都大邑, 固繁華, 名宦之所遊, 窮谷斷崖, 乃幽潛隱者之所處. 是故紆身靑紫者, 迹不到山林, 陶情泉石者, 夢不想巖廊. 蓋靜★{足+參:조}殊途, 理之必然也. 古人有言曰: “晝之所爲, 夜之所夢” ⇒余托身禁掖, 夙夜從事, 何其夢之到於山林也耶. 又何到而至於桃源耶, 余之相好者多矣, 何必遊桃源而從是數子乎 意其性好幽僻, 素有泉石之懷, 而與數子者交道尤厚, 故致此也. 於是令可度作圖. 但未知古之所謂桃源者, 亦若是乎, 後之觀者, 求古圖, 較我夢必有言也. 夢後三日, 圖旣成, 書于匪懈堂之梅竹軒. 「夢遊桃源圖」 歲丁卯四月二十日夜,余方就枕,精神蘧栩,睡之熟也,夢亦至焉,忽與仁叟,至一山下,層巒深壑,崷崒窈窅.有桃花數十株,微徑抵林表而分岐.徊徨竚立,莫適所之,遇一人山冠野服.長揖而謂余曰.ㆍ"從此徑以北,入谷則桃源也."ㆍ余與仁叟,策馬尋之.崖磴卓犖,林莽薈鬱,溪回路轉,蓋百折而欲迷.入其谷則洞中曠豁,可二三里.四山壁立,雲霧掩靄,遠近桃林,照暎蒸霞.又有竹林茅宇,柴扃半開,土砌已沈,無鷄犬牛馬,前川唯有扁舟,隨浪游移,情境蕭條,若仙府然.於是踟躕瞻眺者久之.謂仁叟曰.ㆍ"架巖鑿谷,開家室,豈不是與!ㆍ實桃源洞也." ㆍ傍有數人在後,乃貞父,泛翁等,同撰韻者也.相與整履陟降,顧盻自適,忽覺焉.嗚呼通都大邑,固繁華,名宦之所遊,窮谷斷崖,乃幽潛隱者 之所處.是故紆身靑紫者,迹不到山林,陶情泉石者,夢不想巖廊.蓋靜(조=足+參성급하다)殊途,理之必然也.古人有言曰. ㆍ"晝之所爲,夜之所夢."ㆍ余托身禁掖,夙夜從事,何其夢之到於山林也耶ㆍ又何到而至於桃源耶ㆍ余之相好者多矣,何必遊桃源而從是數子乎ㆍ意其性好幽僻,素有泉石之懷,而與數子者交道尤厚,故致此也.於是令可度作圖.但未知古之所謂桃源者,亦若是乎ㆍ後之觀者,求古圖,較我夢必有言也.夢後三日,圖旣成,書于匪懈堂之梅竹軒. ◎안견(安堅)-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평대군(安平大君)찬시▰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제시(題詩):제첨(題簽)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내게 왜 푸른 산에서 사냐고 물으면 빙긋 웃고 대답 안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복사꽃 잎 떠 흐르는 물길 아득하게 멀어지니 이곳은 별천지요 사람 세상이 아니로다.
(세간하처몽도원世間何處夢桃源) (야복산관상완연野服山冠尙宛然) (저화간래정호사著畵看來定好事) (자다천재의상전自多千載擬相傳) (후삼일정월야後三日正月夜) (재치지정인고유작청지在致知亭因故有作淸之) 이 세상 어느 곳이 꿈꾼 도원인가 은자(隱者)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 그려 보아 오니 참으로 좋을씨고 여러 천년 전해지면 오죽 좋을까 그림이 다 된 후 사흘째 정월 밤 치지정에서 마침 종이가 있어 한마디 적어 맑은 정취를 기리노라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찬시
1.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서문 #安平大君 (안평대군) : (1418~1453) 世宗大王(세종대왕)의 三子(삼자)로 이름은 瑢(용), 字(자)는 淸之(청지), 號(호)는 匪懈堂(비해당) 또는 梅竹軒(매죽헌), 諡 號(시호)는 章昭(장소) 2.신숙주의 시 申叔舟 (신 숙주) : {1417~1475} 字(자)는 泛翁(범옹), 號(호)는 保閑齋(보한재) 希賢堂(희현당), 諡號(시호)는 文忠(문충), 功臣(공신)의 號(호)는 高靈君(고령군). 當年(당년) 31 歲(세) 3.이개의 시 李 塏(이 개) : (1417~1456 )死六臣(사육신)의 한사람, 字(자)는 淸甫(청보) 伯高(백고), 號(호)는 白玉軒(백옥 헌), 諡號(시호)는 義烈 (의열) 뒤에 忠簡(충간)으로 고침. 當年(당년) 31歲(세) 4.河演의 시 河演(하연) ; 1376(우왕 2)∼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대표관직(경력)영의정,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5.凊城 宋處寬(송처관) 宋 處寬 (송처관) : (1410~1477) . 當年(당년) 38歲(세) 6.김담(金淡)의 시 金 淡 (김 담) : (1416~1468) 세종 때의 천문학자 본관은 예안(禮安). 字(자)는 巨源(거원), 號(호)는 撫松軒(무송헌), 天文(천문)에 뛰어나 簡 儀(간의) 渾天儀(혼천의)를 만드는데 공헌, 諡號 (시호)는文節 (문 절). 當年(당년) 32 歲(세) 7.강석덕의 시 姜 碩德 (강 석덕) : (1395~1459) 字(자)는 子明(자명), 號 (호)는 玩易齋(완역재)諡號(시호)는 戴民(재민). 當年(당년) 53歲(세) 8.정인지의 시 정인지(鄭麟趾) ; 1396(태조 5)∼1478(성종 9).조선 초기의 문신.병조판서|좌의정|영의정부사,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1446년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다른 집현전 학자들과 훈민정음 창제에 협찬하였고 훈민정음 서문을 찬진하였다. 9.박연의 시 박연(朴堧) : 고려 우왕4년~조선 세조4년(1378.8.20-1458.3.23) 堂號는 松雪堂 初名은 然, 字는 탄보(坦父), 아호(雅號)는 蘭溪, 본관은 밀양, 10.김종서의 시 金 宗 瑞 (김종서) : (1390~1453 } 字(자)는 國卿(국경), 號(호)는 節齋(절재), 諡號(시호)는 忠翼(충익), 癸酉靖難(계유정난)으로 禍(화)를 당함. 當年(당년) 58 歲(세) 11.이적의 시 李迹(이적) : 세종 20년 (1401~1438) 본관은 驪州. 호는 부훤당거사(負喧堂居士) 진실로 비번한 기골이 아니어든 어찌 선경에서 노닐 수 있으리오 밤마다 영혼이 교유하는 일은 아침마다 마음이 꾀한 바로다. 중니(仲尼-공자의 자)는 주나라 성현을 꿈꾸었고, 장자는 꿈에 호랑나비가 됐으니 존귀한 왕자께서 대장부임을 이제야 비로서 알겠도다. 몸은 비록 궁궐에 있지만 뜻은 오히려 신선 세계에 두고 있네. 12.최항의 시 崔 恒 (최항) : (1409~1474)字(자)는 貞 父(정보), 號(호)는 太虛亭(태허정) 㠉 梁(동량), 諡號(시호)는 文靖(문정). 當年(당년) 39 歲(세) 13.朴彭年의 夢 桃源 序 朴 彭 年 (박팽년) : (1417~1456)死六臣(사육신)의 한 사람, 字(자)는 仁叟(인수),號(호)는 醉琴軒(취금헌), 諡號(시호)는 忠正(충정). 當年(당년) 31 歲(세) 14.윤자운의 시 윤자운(尹子雲) ; 1416(태종 16)~ 1478(성종 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재(樂閑齋) 15.이예의 시 陽城 李 芮 (이예) : (1419~1480) 字(자)는 可 成(가성), 號(호)는 訥齋(눌재), 諡號(시호)는 文質(문질). 當年(당년) 29 歲(세) 16.이 현로의 몽 도원도 부 (李 賢老 夢 桃源圖 賦) 李 賢老 (이현로) : ( ~1453) 17.서거정의 시 徐 居正 (서거정) : (1420~1488 )字(자)는 剛中(강중) 號(호)는 四佳亭(사가정), 諡 號(시호)는 文忠(문충). 當年(당년) 28 歲(세) 18.성심문의 시 成 三問(성삼문) : (1418~1456)字(자)는 謹甫(근보) 訥翁(눌옹), 號(호)는 梅竹 軒(매죽헌), 諡號(시호)는 忠文(충문). 當年(당년) 30 歲(세) 19.김수온의 시 金 守溫 (김수온) : (1409~1481)字(자)는 文 良(문량), 號(호)는 乖崖(괴애) 諡號(시호)는 文平(문평), 當年(당년) 39 歲 20.만우 천봉선사의 시 만우(卍雨) : 고려 공민왕 6년(1357 ~ ?) 號(호)는 천봉(千峰) 21.최수의 시 성균 사예 최 수. (成均 司藝 崔 脩) 22.고득종의 시 高 得宗. 하늘이 돌보시어 동방에 성주가 임하시니 위대한 오얏나무에 서린 뿌리 깊기도 하도다. 금비옥엽의 자손들 번창하고 빼어나니, 위대하고 아름다운 덕을 찬양하도다. 온화하고 단정한 안평대군 참으로 天人이니, 사람들에게 바람처럼 미치는 덕으로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네. 참되고 바르게 자신을 딖아 그 마음 거울 같으니, 티끌 하나라도 어찌 범할 수 있으리오. 대궐에서 임금님 모시다가 퇴청하여 한가로이경전을 논하고 유생들을 불러들이니 아전(아정)한 생각은 표표히 인간세상 뛰어넘고, 높은 의기는 구름보다 높아 화려한 생활 단념하네. [역사의교훈: 어제와오늘]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칼럼과수필♣┓
안견 몽유도원도 찬시문 재해석 한서대 상기숙교수 한시 21편 새 역주 < 입력 : 2007-03-22 00:00 > < 서산=임붕순 기자> 서산 출신으로 조선시대 대표적 산수화가인 안 견의 `몽유도원도`에 적힌 21편의 찬시문이 새롭게 재해석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는가.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완연하거늘…(안평대군)" 한서대 중국학과 상기숙(여.53)교수는 최근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 기문을 비롯해 신숙주, 이 개, 김종서, 박팽년, 서거정 등 당대를 풍미하던 문사들이 몽유도원도를 찬미하며 지은 21편의 한시를 새 역주를 달아 재해석했다. 이번 작업은 서산시 안견기념관의 의뢰로, 일반인들도 참고해 시문을 읽어 볼 수 있도록 주석을 상세히 달았고 쓰임새에 따라 달리 읽혀지는 한자의 특성을 감안, 음도 일일이 적어놨다. 또 안평대군과 21명의 작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곁들여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하면서 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상기숙 교수는 "원문에 충실해 올바른 번역이 되도록 최선을 다했으나 소홀한 점이 많다"며 "이렇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문들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감상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시는 상 교수로부터 새 번역문을 건네받아 안견기념관에 원문과 함께 전시키로 했으며 연말에는 사진설명 등을 곁들여 책자로도 펴낼 계획이다. 시 사적지관리사무소 김도형 소장은 "그동안 서울대 이병한 교수 등이 풀이한 번역문이 있었으나 저작권 문제 등으로 이번에 새롭게 찬시문을 번역하게 됐다"며 "새 번역문은 원문과 함께 포켓용 홍보 책자로도 만들어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몽유도원도는 조선 세종 29년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의 세계를 안 견에게 얘기 해 3일 만에 완성한 작품으로, 폭 38.6㎝ 길이 106.2㎝의 그림과 안평대군의 제첨, 4행시문을 비롯해 21명의 찬시문이 자필로 쓰여 있는 길이 19.69m의 거작이다. 서산시 안견기념관에 있는 몽유도원도는 일본 천리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원본을 모사 복원한 것으로 1996년 이 대학으로부터 국립 중앙박물관과 함께 기증받았다. <면번호 : 19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