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다큐멘터리 암자순례 12부작] 6 ~ 10부 두륜산 북미륵암 ~ 선운산 도솔암 外

보허 步虛 2017. 3. 28. 01:56
    


[다큐멘터리 庵子암자순례 12부작] 6부 두륜산 북미륵암



게시일: 2013. 6. 18.




12. 곤륜 산맥의 막내 '두륜산'  구룡쟁주(九龍爭珠) 명당
바닷게 기운 누르는 마애여래
서남현 시민기자  |  fheh12@hanmail.net



승인 2015.07.17  10:20:16
  
  
▲ 북미륵암 일대는 바닷게 형국이어서 그 기를 누르기 위해 두 개의 3층 석탑을 세운 뒤 북미륵암마애여래불좌상을 조성하였다.


   대둔산은 정감록에서 십승지지(十勝之地)로 규정하였고,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조계종 종찰 대흥사를 품은 해발 703m의 높지 않은 명당에 해당한다. 이 산은 두륜봉을 중심으로 가련봉·고계봉·노승봉·도솔봉·연화봉 대둔산 등 여덟 개의 대표 봉우리가 있다. 북쪽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월출산(808m)은 기둥이 되고, 남쪽 달마산은 지축이니 튼실함은 더할 나위 없고, 동쪽 천관산과 서쪽 선은산이 마주해 솟아나며, 바다와 산이 둘러싸고 있어 골짜기는 깊고 그윽한 곳에 위치한 두륜산은 물과 불과 전란을 피하고 만세토록 훼손이 없는 땅(三災不入之處 萬年不敗毁損之地)이라는 서산대사의 평가가 가장 적절한 묘사이다. 지세를 보는 안목이 탁월했던 대사는 자신의 옷가지와 밥그릇을 대흥사에 가져다 놓으라 했다.


   이곳은 가련봉 등 이어지는 여덟 개 봉우리가 소담하게 피어난 연꽃과 같다하여 연화만개형국(蓮花滿開形局)이라 한다. 두륜산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중국풍수 시조 산으로 일컬어지는 곤륜산에서 한 글자씩 가져다 이름 지었다. 존재만 전하는 '고기'에 "중국 곤륜산맥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해남에 이르러 그 줄기가 다했다"고 전함으로써 이 산의 풍수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대흥사를 풍수관점에서 보면 지세는 주능선 아홉 봉우리 아홉 개의 산줄기가 대흥사 일주문을 향해 내려오는 형국인데 이게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것과 같다'하여 구룡쟁주(九龍爭珠) 명당이라고 한다.

또 대부분 사찰의 배치는 본존불을 봉안하는 대웅전이 중심이나 대흥사는 대웅전, 천불전, 대광명전, 표충사가 각기 중심이 되어 배치되어 있다. 이에 대해 여연 스님은 "대흥사 가련봉, 노승봉 등의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으며, 봉우리마다 지맥을 각기 받아 가람배치가 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대흥사에는 사천왕상이 없는데 이는 향로봉 등 봉우리가 가람수호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굳이 불법수호를 하는 사천왕상을 둘 필요가 없었다는 것.


   북미륵암 동편에 두 개의 3층 석탑이 동서로 대칭을 이루며 서 있는데 이 쌍탑의 조화가 하도 아름다워 대둔8경의 하나로 꼽는다. 풍수지리에서는 북미륵암 일대를 일러 '바다의 게와 같은 형상'이라 말한다. 이곳에 석불을 조성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풍수적 안목에 따라 대신 게의 오른발에 해당하는 서쪽과 왼발에 해당하는 동쪽에 3층 석탑을 세워 게가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지금의 마애여래좌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는 땅의 기운을 눌러 좋은 기운의 기세를 만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북일암 정상으로 가는 길에 천년수가 있는데 이는 북미륵과 남미륵을 조성할 때 해가 지지 않도록 해를 잡아맸다는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한다.


   끝으로 도선 국사가 천불전을 조성했다는 전설을 소개하면, 국사가 대웅전에서 불경을 외우던 중 잠에 들었는데 꿈에 계곡 아래에서 수많은 스님들과 함께 몰려오던 노승이 도선에게 호령하기를 "너는 불법을 크게 편 신라를 망하게 하고 불법을 탄압할 고려왕국이 일어서도록 협력했으니 잡으러 왔다" 해서 놀라 빌었다. "왕건에게 고해 그런 일 없게 하고 여기에 천불상을 짓겠다"며 약속하자 스님들은 물러갔다. 이 사실을 왕건에게 들려주어 왕건이 숭불을 국책으로 삼고 대흥사에 천불전을 지었다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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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庵子암자순례 12부작] 7부 사불산 묘적암



게시일: 2013. 6. 18.



사불산 묘적암 (퍼옴)| 자유게시판
박형우 | 조회 16 |추천 0 | 2006.11.03. 10:12
   
'佛國土' 문경 사불산
'다 비우고 가라' 아서라, 그냥 그대로 맡겨둘 일이다

나옹 스님과 관련된 전설이 서려있는 사불산 안장바위. 높이 40여m의 암벽 위에 있는 말 안장 모양의 이 바위는 나옹 스님이 수행하던 곳으로, 당시 마을 청년들이 바위의 일부분을 깨뜨렸다가 다시 붙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어 전설의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나옹 스님과 관련된 전설이 서려있는 사불산 안장바위. 높이 40여m의 암벽 위에 있는 말 안장 모양의 이 바위는 나옹 스님이 수행하던 곳으로, 당시 마을 청년들이 바위의 일부분을 깨뜨렸다가 다시 붙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어 전설의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의 느낌이 다르고, 개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더욱 새롭다. 봄 기운이 갈수록 완연해지고 있다. 해마다 맞는 계절이지만, 초봄의 자연은 무엇이나 항상 새롭게 느껴진다. 일상을 잠시 벗어나 자연에 다가가면, 우리도 자연과 하나가 되면서 그 새로운 기운이 몸과 마음에 저절로 가득해지는 때다.

자동차 소리도, 컴퓨터 화면도 없는 한적한 시골이나 산골 어디를 가든지 그런 자연에 빠질 수 있다. 빼어난 산수가 아니라도 좋고, 화려한 꽃들이 없어도 좋다. 초봄은 그 모습보다 기운을 느끼는 계절이다.

이런 때 한적한 암자를 찾아 보자. 암자가 목적이 아니라도 좋다. 암자 가는 길에 만나는 작은 개울의 물소리와 새소리는 자신을 잊게 하기에 충분하다.

수많은 암자 중에 문경의 윤필암과 묘적암에 가면 특별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고려말 대표적 선승인 나옹 스님의 전설과 그것을 증명해주는 흔적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신기하고 흥미로운 전설의 내용을 실감나게 하는 유적이 곳곳에 남아 그 유적을 따라가다보면 믿지 않기도 어려운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깨끗하고 수려한 산과 암자를 둘러보면서 전설이 담긴 유적을 답사하는 여행은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점촌에서 예천 가는 방향으로 10분 정도 가다보면 김용사와 대승사 팻말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10여분 가면 대승사로 올라가는 길과 안내 표지를 만나게 된다. 윤필암과 묘적암은 대승사 가는 길에 있다. 암자에 도달하기 전 어디쯤에서 잠시 차량의 시동을 끄고 눈을 감으면 맑은 새소리와 함께 봄기운이 느껴질 것이다. 봄 기운에 아득해진 상태로 7백년 전의 세계로 빠져들어가 보자

# 윤필암-국내의 대표적인 비구니 도량

   윤필암과 묘적암이 있는 사불산(四佛山)의 명칭은 사불바위에서 유래했다. 윤필암에서 30분 정도면 오를 수 있는 사불바위는 사방 네 면에 네 개의 마애불상이 새겨진, 높이 3m가량의 바위이다. 현재 마애불상은 많이 훼손돼 그 흔적만 남아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사불산의 유래가 나온다. 신라 진평왕 때(587) 이 사불바위가 붉은 천에 싸인 채 하늘에서 내려와 산꼭대기에 떨어졌다. 진평왕이 그 소리를 듣고 찾아와 경배하고는 그 옆에다 대승사를 짓게 했으며, 그 산을 사불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비구니 참선도량인 윤필암은 대웅전 격인 사불전을 건립, 이 사불바위를 불상으로 모시고 있다. 사불전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적멸보궁처럼 따로 불상이 없으며, 사불바위 쪽 벽이 대형 유리로 돼 있는 법당이다.


   윤필암의 명칭은 신라시대 원효와 의상이 각각 사불산의 화장사와 미면사에 머물 때 의상의 이복동생인 윤필 거사가 토굴을 짓고 머물던 터라는 데서 유래했다. 화장사와 미면사는 지금 남아있지 않고, 윤필암은 고려말에 창건됐다. 현재 윤필암은 비구니 스님 40여명이 수행하고 있는 암자로, 한국의 대표적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한국 최초의 비구니 참선도량이기도 한다.

25년 전 주인도 없이 버려져 있다시피하던, 스러질 듯한 건물 하나만 있던 암자를 오늘날의 윤필암으로 성장시켜온 장본인은 윤필암 주지인 은우 스님(64)이다. 은우 스님이 이곳에서 25년 동안 머물며 주변 동네 노인들로부터 들었던 나옹 스님 이야기와 그 유적을 따라가 본다.


# 묘적암-나옹 스님의 갖가지 異蹟 전설

   윤필암에서 조금 올라가면 묘적암이 나온다. 묘적암은 나옹이 출가한 곳이다. 나옹은 태어날 때부터 도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행자(출가 후 정식 승려가 되기 전 신분)로 있을 때부터 갖가지 이적(異蹟)을 보였다는 것이다.

나옹이 하루는 공양(식사) 준비를 위해 상추를 씻는 중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불이 난 것을 알고는 상추 씻은 물을 해인사쪽을 향해 뿌렸다. 큰 불이 난 해인사에서는 갑자기 북쪽 하늘에 검은 구름이 생기더니 상추 잎이 섞인 소나기가 내려 불길이 잡혔다. 그러자 해인사의 노장 스님들은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틀림없이 도인이 한 도술일 것으로 보고, 그 주인공을 찾기 위해 곳곳으로 스님들을 파견했다.

한편 묘적암 스님들은 늦게 돌아온 나옹에게 그 이유를 묻자 해인사 불을 끄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대답했다.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고 꾸짖자 나옹은 실수한 것처럼 하면서 일부러 물그릇에 부딪혀 물을 방바닥에 쏟아버렸다. 스님들은 다시 나옹을 꾸짖으며
윤필암 주지 은우 스님2
윤필암 주지 은우 스님
물을 치우라고 하자 나옹은 스님들이 보는 앞에서 방바닥의 물을 모은 뒤 공중에 빙빙 돌게하다가 밥주걱으로 그 물방울을 마당으로 탁 쳐내었다. 그러자 그 물방울이 마당의 작은 바위에 부딪치더니 그 자리에 한자로 '심(心)'자가 새겨졌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묘적암 스님들은 나옹을 법석으로 모시고 법문을 들었다고 한다.

묘적암 가는 길에 나옹이 상추를 씻던 샘과 해인사를 향해 상추 씻은 물을 던진 큰 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샘에는 지금도 물이 나오고 있고, 물맛도 좋다. 묘적암 마당에는 '심'자가 새겨진 바위도 그대로 남아있다. 샘 바로 위쪽에는 잘 생긴 나옹의 부도가 자리잡고 있다. 묘적암에는 비구 스님 한 분이 수행하고 있어 함부로 들어가기는 미안한 곳이다. 샘 아래 있는, 나옹이 새겼다는 대형 마애불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 안장바위·좌선대-나옹 스님이 수행한 곳

   묘적암 서쪽 능선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면 말 안장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 나옹은 40~50m나 되어 보이는 암벽 위 끝자락에 있는 이 말안장 형상의 바위에 앉아 자주 수행했다. 졸거나 딴 생각을 할 수 없는 낭떠러지 위를 수행처로 삼은 것이다. 여기에서 내려다 보면 아랫마을의 논밭이 보인다. 자신들은 매일 허리가 아프도록 일하는데 나옹은 항상 바위 위에서 '노는' 것을 못마땅해 하던 마을 청년 몇 명이 몰래 안장바위에 올라가 안장바위의 앞쪽 솟아오른 부분을 깨트려 버렸다.

그 일 이후 마을사람들이 병들거나 죽는 일이 잇따르자 마을사람들은 용한 무당을 찾아 굿을 했다. 굿으로 나옹의 수행처를 훼손해서 그렇다는 것이 드러나자 마을사람들은 그 청년들을 찾아내 사죄케 하고, 떨어진 바위 조각을 다시 붙여놓게 했다. 그리고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은 계를 만들고,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 묘적암을 찾아 밤샘을 하며 참회의 시간을 가져왔다.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는 노인 5명만 왔다갔으나, 많을 때는 150여명이 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안장바위를 확인해보면 떨어진 것을 다시 붙인 자국이 남아있어 신기하기만 하다. 또한 마을사람들의 족보 중에는 '묘적암을 무시하면 자손이 망한다'는 글이 전해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안장바위에서 능선을 따라 10여분 내려오면 나옹이 좌선하던 좌선대도 확인할 수 있다. 30~40명은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나옹이 소변을 본 흔적이다. 좌선대 바로 옆 바위를 보면 중간을 가로지르는 부분이 다른 부분과는 달리 흰색으로 남아있다.

이곳 여행에 은우 스님을 만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충분히 듣을 수 있는 행운이 곁들여진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출처 : 영남일보 보도자료에서






[다큐멘터리 庵子암자순례 12부작] 8부 팔공산 중암암




게시일: 2013. 6. 18.



팔공산 중암암| 암자순례자료실
자유인 | 조회 25 |추천 0 | 2009.07.12. 19:15

구멍 구멍이 불심 솟는 옹달샘이어라

04.01.02 15:19 ㅣ최종 업데이트 04.01.03 11:09


▲ 가지런한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구름처럼 걸려 있는 소운당(小雲堂)을 만나게 된다.
ⓒ 임윤수



















   산사를 찾다 보면 정말 기상천외한 곳에 자리한 산사에 입이 벌어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에 있는, 일명 돌구멍 절로 알려진 중암암(中巖庵)이 그런 산사 중의 하나다.

돌구멍을 통하여 절을 드나들게 되어있고, 우리 나라에서는 제일 깊다는 해우소(화장실)와 보일러실도 돌구멍 속에 있다. 뿐만 아니라 돌구멍 구멍들이 이런 저런 용도로 활용되고 있으니 제격에 딱 어울리는 절 이름이다. 이런 절, 보는 것만으로도 입을 벌리게 하는 절들은 그 규모가 어찌 되었건 찾아가 보는 것만으로도 산사 찾는 맛을 더해 준다.

중암암은 은해사 산내 말사다. 은해사 일주문을 통하여 4Km쯤 들어가야 갈 수 있는 중암암은 신라 흥덕왕 때 심지왕사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중암암'이라는 이름보다는 한문을 풀어 말하는, 일명 돌구멍절로 더 알려진 조그만 암자다.


▲ 돌구멍절에서 제일 큰 구멍인 이 구멍을 지나야 법당엘 갈 수 있다.
곳곳에 있는 돌구멍엔 보일러실도 있고 해우소도 있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창고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 임윤수




















   팔공산은 그 전체가 '불국토(佛國土)'라 할 만큼 많은 절들이 들어서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하나의 산에 두 개의 대찰(본사)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팔공산과 그 주변은 온통 불색(佛色)이다. 대구 쪽으로 동화사와 파계사가 있고 은해사가 영천에 있다. 동화사와 은해사는 힘들지 않게 하루에 산행을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교구본사인 대찰이다.

그리고 대구 하면 언뜻 떠오르는 갓바위도 팔공산에 있으니 팔공산을 불국토라 해도 크게 과장된 말은 아닐 듯하다. 하기야 대구 사람들의 불심을 알면 당연한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듯싶다.

팔공산은 영천, 신령, 하양, 인동, 칠곡 등의 여덟 고을에 걸친 공공의 산이라는 뜻으로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과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의 공산 싸움에서 고려 장수 신승검, 김락, 전이갑, 전의갑 등 여덟 장군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순절한 것을 기리기 위해 팔공산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동화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심지대사가 영심으로부터 전수하여 봉안하여 왔던 8간자를 고려 예종이 궁중에서 친견하실 때 서기가 뿜어 나와 팔간자의 팔자를 공산 위에 씌워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역사적으로는 물론 현재에도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 돌구멍을 들어서면 숨어있다 나타난 듯 법당이 보인다.
허리높이의 담 너머는 아찔한 낭떠러지다.                   ⓒ 임윤수























   울창하고 휘휘 휘어진 가지가 한껏 운치를 자아내는 멋진 소나무로 유명한 은해사 진입로를 지나 중암암으로 오르는 길은 한적하다. 개울을 따라 걷다보면 저수지가 나오고 그 저수지를 지나게 되면 암자를 안내하는 팻말이 있다. 은해사는 8개의 산내 암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중 백흥암 같은 경우는 비구니스님들이 수도 정진하는 선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일반의 절들과는 달리 경내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곳이다.

갈림길의 유혹을 떨구고 곧장 산을 향해 걷다보면 높이가 20m쯤은 되어 보이는 폭포가 나온다. 한여름엔 시원한 물줄기로 산사 찾는 이의 더위와 갈증을 달래 주었을 듯싶다. 계절의 변화에 순응한 듯 폭포는 하얀 얼음과 울퉁불퉁한 고드름으로 볼륨감 있는 순백의 풍경을 만들고 있다.

폭포를 지나 한 두 번쯤 급하게 휘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돌계단이 보인다. 일정한 크기로 놓여진 돌계단을 오르다 고개를 들면 하늘에 걸친 흰 구름처럼 산 중턱에 걸친 소운당(小雲堂)이 보인다.

소운당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바위 길을 따르다 보면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딱 좋은 돌구멍이 보인다. 어둡고 캄캄한 석굴이 아니고 맑은 햇살이 들어오는, 대문 같은 돌구멍이다.



▲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전각도 까치집처럼 벼랑에 매달려 있다.
ⓒ 임윤수
























   돌구멍으로 들어서면 감추었다 내놓은 듯 작은 암자가 벼랑에 서 있다. 이 법당엔 돌구멍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다른 곳으로 돌아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돌구멍 절이란 이름에 걸맞게 암자의 규모도 앙증맞도록 작다. 둥글둥글해 순해 보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절벽 위에 겨우 자리를 틀었다고 해야 맞을 정도로 여유 공간이라곤 하나도 없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날 만한 넓이로 법당 앞에 길이 있고 길에는 허리 높이로 담이 쌓여 있다. 장난이라도 만에 하나 담 너머로 몸이 밀리게 되면 그땐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닐 듯하다. 그렇게 가파르고 높은 벼랑 위에 대웅전이 들어선 것이다.

대웅전 전방 우측에 있는 사무실을 겸한 작은 건물 또한 아슬아슬하게 벼랑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중암암은 법당만 돌구멍을 통해 들어가는 게 아니다. 국내에서 가장 깊다는 해우소(화장실)도 돌구멍 속에 있다. 얼마나 깊기에 국내에서 제일 깊다는 말을 쓰는지 궁금했지만 그 깊이를 알 수는 없었다.

중암암 해우소의 깊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옛날에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돌구멍 절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던 세 분의 도반 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절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통도사에 계시는 스님이 "우리 절은 법당 문이 어찌나 큰지 한 번 열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1말 3되나 떨어진다"고 하며 은근히 절의 규모를 법당 문 크기에 빗대어 자랑을 하셨다.



▲ 절 위쪽으로 올라가면 3층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임윤수
























   이어 해인사에서 오신 스님이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 때는 배를 띄어야만 저을 수 있다"고 하며 절의 규모와 큰 솥이 있음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두 스님의 자랑을 듣고 있던 돌구멍절 스님은 절의 규모 등으로 자랑 할 게 없자,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자랑을 하여 한바탕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중암암 스님이 제일 큰 허풍으로 도반 스님들의 절 자랑을 제압했다고 볼 수 있지만 벼랑 위 바위 속에 만들어진 중암암 해우소가 얼마나 깊은가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설화다.

중암암의 또 다른 특색은 여느 절들과는 달리 영가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웬만한 절에서는 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나 49재 등을 지낸다. 그런데 중암암에서는 영가(죽은이)를 위한 재는 일체 없다고 하니 별다른 뭔가가 있는 듯하다.



▲ 이 틈새로 들어서면 극락굴로 들어서게 된다.

들어가 꺾어지고 두 번을 더 꺾으면 이 빛을 다시 보게 된다.

이 빛은 환희의 빛이며 극락의 빛이었다.

ⓒ 임윤수

























   중암암은 그 들어서는 입구가 돌구멍이라서 돌구멍절이라고 하지는 않은 듯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곳곳이 돌구멍이다. 그리고 그 돌구멍으로 들어서면 알 듯 모를 듯한 환희와 성취감이 솟는다.

소운당을 지나 법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면 중암암 부근엔 건들바위와 만년송, 그리고 장군수가 있다고 되어 있다. 안내판이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계단을 딛고 올라 산 쪽으로 올라서면 안내판에 있는 건들바위와 만년송 그리고 장군수를 볼 수 있다.

중암암은 두 번째 찾아가는 길이다. 2년여 전쯤 한여름에 그곳을 찾았던 적이 있다. 땀 뻘뻘 흘리며 찾아가니 때가 아닌데도 밥상을 차려준다. 칠십은 훨씬 넘은 듯한 노보살님께서 "이 꼭대기까지 오르느라 얼마나 시장했느냐"며 장국에 산나물 무침으로 때아닌 밥상을 차려주어 정말 맛나게 먹은 적이 있었다.

그 할머니가 계시면 그때 못 드린 감사의 표현으로 큰절이라도 드린다는 생각으로 찾았건만 그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중암암 경내를 둘러보고 안내 표지판에 있는 장군수와 건들바위 그리고 만년송을 찾으려니 영 찾을 수가 없다.



▲ 작은 힘에도 흔들리는 건들바위. 이 바위 옆 돌구멍을 지나면 만년송을 볼 수 있다.

ⓒ 임윤수
























   할 수 없이 요사채가 있는 곳으로 가 스님에게 여쭈니, 오신 지 며칠 되지 않아 스님께서도 아직 모르고 계신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그곳에 계신 신도들께 여쭈니 한 보살님이 모든 곳을 잘 알고 계신다고 한다.

의성에서 오셨다는 그 보살님, 3남매 모두를 출가시키고 고향인 의성으로 가셔서 노후를 대비하고 계신 듯한 그 보살님의 안내로 3층 석탑은 물론 세 곳 모두를 보게 되고 카메라에 담게 되었다. 그 보살님은 안내 표지판에 소개되지 않은 아주 특별한 곳을 선물하듯 안내 해 주셨다.

다름 아닌 돌구멍절에서는 꼭 봐야 할 곳이라며 극락굴을 안내해 주신 것이다. 법당 위쪽에 있는 3층 석탑 옆으로 들어서는 극락굴은 누군가의 안내가 없으면 찾기도 힘들고, 설사 찾는다 하여도 선뜻 들어서기가 힘든 곳일 듯하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입구로 들어가 2∼3m쯤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굴이라기보다는 틈새라고 해야 할 작은 공간이 나온다. 이 틈새로 들어서 몇 걸음 가다보면 좌측으로 꺾어지는 틈새가 나오고 그 틈새를 따라 다시 꺾어지면 처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

□자 형태의 굴(틈새)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목에 건 휴대폰이 걸려 그 휴대폰을 빼야 할 정도로 틈새에는 에누리가 없다. 등과 뱃가죽이 붙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몸을 축소시켜야 하고 중간쯤에는 몸을 낮추어야 빠져 나갈 수 있는 공간이다.



▲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린 소나무에서 생명의 모짐을 볼 수 있다. 이 소나무가 만년송이다.

동글동글한 바위의 곡선에서 아름다운 여체의 미가 보인다.

ⓒ 임윤수

























   욕심으로 채웠건 허영심으로 채웠건 몸집이 부풀려진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그 굴을 빠져 나오며 느끼는 쾌감은, 말 그대로 극락을 다녀온 기분이다. 비좁은 공간에서의 해방감, 어둠에서 찾게 되는 광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극락굴을 한번 지나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

굴을 안내해 주시던 보살께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앉는 컴컴한 굴 전체를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모양이다. 입구로 들어서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연송 하더니 어디쯤에선 몸을 낮추라고 알려주신다.

중암암을 가면 이 극락굴을 꼭 지나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굴을 안내 해준 보살님의 말에 따르면, 조강지처가 아닌 소위 세컨드는 이 극락굴을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극락굴을 나와 조금 더 올라 능선의 정상에 있는 건들바위는 둥그런 사발을 엎어 높은 듯한 형상이다. 어느날 밤 바위에서 우뢰 소리가 나 주지 스님이 놀라서 달려 가보니 바위가 암자를 덮칠 듯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주지 스님이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하니 바위는 움직임을 멈추고 원래의 위치보다 북쪽으로 옮겨 현재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바위다.

이 건들바위 옆에도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딱 좋은 구멍이 있으니 이 구멍을 지나게 되면 만년송을 만나게 된다.


▲ 김유신장군이 수련을 하며 마셨다는 장군수는 암벽사이에서 흘러 고이는 석간수였다.

ⓒ 임윤수





   아름답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바위들. 잘록한 몸매에 풍만한 몸매를 가진 여인네 몸처럼 둥글둥글하고 완만한 곡선을 가지고 있는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뻗으며 자란 소나무가 있으니 이 소나무가 만년송이다.

흙 한줌 없는 바위틈에서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모진 생명력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 모짐을 헤치며 생존하였기에 더없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다. 만년송이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만 옮기면 산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된다.

"야호∼!"하고 함성 한번 지르고 싶은 욕망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경내라는 생각과 혹시 잠들어 있을 산짐승이 놀랄까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능선을 넘어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장군수를 찾을 수 있다. 깎아 세운 듯한, 높이가 두 길이 넘는 암벽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이는 석간수가 장군수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17세 화랑이었던 시절 이곳에서 수련하며 마셨다는 전설이 있는 약수이다.

중암암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수련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중암암 뒤쪽, 만년송 조금 아래에는 김유신 장군이 수련을 하며 기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10평 남짓한 공간이 있다.



▲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돌구멍절 해우소다.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에야 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 깊이가 깊다고 한다.
ⓒ 임윤수



   대하여 문외한이지만 그곳에서 운동을 하고 마음을 모으게 되며 저절로 산기도 천기도 내려질 듯한 공간이다. 둥그런 배열로 늘어선 길쭉한 형태의 입석들은 마치 장군을 외호하는 호위병 같다. 툭 터진 전망은 호연지기를 키우고, 일상에서 생기는 답답함을 툭 털기에 딱 좋을 듯하다.

돌구멍 절! 비록 그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그곳에 있는 구멍 구멍에선 옹달샘처럼 불심이 솟구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돌구멍 절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 영천IC - 영천시내 - 28번 국도 - 909번 지방도 - 은해사 - 일주문 통과 4Km

극락굴을 안내해 준, 의성에 사신다는 보살님께 감사드립니다. 










































[다큐멘터리 庵子암자순례 12부작] 9부 달마산 도솔암




게시일: 2013. 6. 19.




날개 없는 인간이 어떻게 저런 집을!


13.08.16 15:41l최종 업데이트 13.08.16 15:41l
김정봉(jbcaesar)           
 


   섬은 시간이 넉넉지 않은 여행객에게는 가기 힘든 곳인가 보다. 여름휴가 때 보길도에 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땅끝 선착장에 나가니 안개가 자욱하다. 내심 불길한 생각이 드는데 역시 출항을 못하였다.


땅끝 맴섬 형제바위 형제바위를 감돌고 있는 농무는 보길도로 가는 배를 잡고 있다
▲ 땅끝 맴섬 형제바위 형제바위를 감돌고 있는 농무는 보길도로 가는 배를 잡고 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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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여나 안개가 걷힐세라 시간 보내기를 3시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천릿길을 달려온 정성을 안개는 외면해 버렸다. 또 하나의 땅끝 명물, 애꿎은 맴섬의 형제바위만 묵묵히 하소연을 들어주고 있었다.


땅끝서 만나는 하늘 끝 도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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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길도 대신 찾은 건 도솔암. 반도 끝자락 달마산에 있다. 미황사에 갈 때마다 오르고 싶었던 암자다. 원래 미황사 쪽에서 올라가야 제 맛이지만 준비가 되지 않아 쉬운 길을 택하였다.

땅끝에서 미황사 쪽으로 가다가 대죽리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된다. 하늘로 가는 외길인 듯 가는 길이 아찔하다. 몇 굽이 돌아가면 차 서너 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여기부터 도솔암까지는 800m, 20분 정도 소요된다. 산책하듯 쉬엄쉬엄 갈 수 있는 곳이다. 하늘 끝에 있어도 누구에게나 허락된 암자다.

달마산은 남쪽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산마루는 뿔이 잔뜩 난 모양이다. 뾰족뾰족 바위가 산등성을 뚫고 튀어나와 절경이다. 애를 먹였던 안개는 여기까지 따라와 바위를 감추었다 드러냈다 하는데 그 모양이 더 신비롭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바위 하나하나가 뿔난 도깨비 같기도 하고 부처님 같기도 하다. 금강산 만물상 대신 달마산 '만불상'이다.

 
달마산 바위 바위는 보는 이에 따라 부처님으로, 도깨비로 보여 금강산 만물상 대신 달마산 만불상이다
▲ 달마산 바위 바위는 보는 이에 따라 부처님으로, 도깨비로 보여 금강산 만물상 대신 달마산 만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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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촉한 안개바람이 볼에 보드랍게 감겨 시원하다. 그야말로 천연 '수분 미스트'다. 길섶에 핀 원추리는 객들에게 인사하듯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샛노란 꽃잎이 안개에 젖어 더 노랗게 보인다. 원추리는 망우초(忘憂草)라 하였던가? 솔솔 부는 바람과 함께 온갖 근심걱정이 사라지니 천상의 세계가 따로 없다.


 도솔암 가는 길  안개에 젖은 ‘도솔길’은 천상의 길이다.
▲ 도솔암 가는 길 안개에 젖은 ‘도솔길’은 천상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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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 길 낭떠러지 '뿔바위' 사이로 흐릿하게 마지막 지상세계, 마을과 바다가 보이고 이내 도솔천으로 들어가는 문, 도솔암 앞에 다다른다. 아스라이 벼랑바위 위, 한 뼘 공간에 새가 둥지를 틀듯 앉아 있는 도솔암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난다.

색시가 장옷을 뒤집어쓴 채 반쯤 얼굴을 내민 것 마냥 바위에 몸을 숨긴 채 색동 단청한 맞배지붕을 살짝 드러내 어서 달려가 껴안고 싶어진다. 도솔암에 걸친 돌계단은 천상으로 가는 구름다리 같다.



도솔암 정경 벼랑바위 위 한 뼘 공간에 새가 둥지 틀듯 걸터앉아 있다
▲ 도솔암 정경 벼랑바위 위 한 뼘 공간에 새가 둥지 틀듯 걸터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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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은 의상대사와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 월정사 법조스님 등 몇 분과 연을 맺고 있으나 문화적 향기가 짙게 밴 곳은 아니다. 도솔암 앞에 연혁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으나 연혁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이런 암자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이 우선인 듯싶다.



도솔암 벼랑 날개 없는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지, 불심이 아니고서는 만들기 불가능한 위대한 예술품이다
▲ 도솔암 벼랑 날개 없는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지, 불심이 아니고서는 만들기 불가능한 위대한 예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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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려오는 길이 못내 아쉬워 코 아래 삼성각에 들렀다. 도솔암 뿌리가 보이는 곳이다. 새들이 부스러기를 날라 새집을 짓듯 거대한 자연 바위 사이를 돌로 쌓아 집 틀을 만들었다. 새들은 날개라도 있다. 도대체 날개 없는 인간의 능력으로 저게 가능한 것인가? 새들이 집 짓다가 놀랄 일이다 불심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위대한 종교작품 앞에 고개가 숙여지고 몸이 오그라든다.


미황사에 바다생물이 많은 까닭은?

   미황사(美黃寺)는 달마산 아래에 있다. 땅끝기맥이 남으로 뻗치다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힘을 다하여 솟아난 곳이다. 안개는 아직도 달마산 중턱을 휘감고 있다. 미황사 를 병풍처럼 둘러싼 하얀 바위능선이 제일경인데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도솔암에서 그 속을 봤으니 다행이다.

미황사는 연이은 중창불사로 예전의 고즈넉한 맛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최악의 성형(成形)은 아니다. 일주문-돌계단-자하루로 이어지는 길은 아직 착근을 못해 겉도는 느낌을 받는다. 세월이 흐르면 좀 나아질 거다. 

자하루 기둥 아래를 통과하면 대웅전 안마당이다. 대웅전은 멀리 보면 삿갓을 쓰고 곧은 옷매무새를 한 점잖은 선비처럼 보이다가도 가까이 다가서면 고운 피부에 민낯을 한 고운 여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웅보전 단청을 잃은 지 오래, 이젠 민낯이 더 나아 보인다
▲ 대웅보전 단청을 잃은 지 오래, 이젠 민낯이 더 나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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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화장을 한 것보다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은 여인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미황사 대웅전이 그렇다. 애당초 단청을 했겠지만 바다에 인접한 미황사는 해풍에 그대로 노출되어 단청은 해풍에 씻겨 어느덧 민낯이 된 것이다. 피부가 좋지 않으면 민낯으로 나다닐 수 없다. 미황사 대웅전은 본래 때깔이 좋아 더 이상 단청을 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이다.

미황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749년) 의조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한 연대나 사적에 대한 기록은 없고 창건설화만 전해지고 있다. 설화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척의 돌배(石船)가 땅끝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나 며칠을 두고 가지 않자 의조화상이 기도를 하니 그 배가 뭍에 닿았다. 배안에는 금인(金人)과 검은 바위, 불교경전과 탱화, 60나한이 들어 있는 금함이 있었다. 그날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기는 우전국(인도)의 국왕인데 금강산에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던 중 금강산과 비슷한 이곳을 보고 찾아왔다 하며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도록 하라 하여 소가 처음 멈춘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멈춘 곳에 지은 절이 미황사라는 것이다.

이 설화를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이 창건설화가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 설화는 인도에서 직접 불적이 전래된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불교는 4세기 말에 중국을 통해 북쪽을 거쳐 들어왔다고 배웠다. 통설과 다르게 불교는 1세기경 가야국과 전라도 남해안 지방으로 직접 전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역사의 아웃사이더들이 재평가를 받기 위해 양심 있는 역사가들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듯이 불교의 남방전래설도 전문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대웅전 주춧돌에는 게나 거북, 물고기가 새겨져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파주 보광사나 여수 흥국사와 같이 대웅전이 큰 반야용선을 상징하는 경우 바다생물을 새겨 넣는 경우도 있지만 미황사의 경우 창건설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미황사 부도에도 대웅전보다 더 많은 바다생물이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대웅보전 주춧돌 연꽃잎에 게와 거북이 새겨져 있어 궁금해진다
▲ 대웅보전 주춧돌 연꽃잎에 게와 거북이 새겨져 있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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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황사의 매력은 감흥이 절 안에 머물지 않고 부도밭으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부도밭은 걸어서 10여 분 걸린다. 가는 길은 동백과 소나무가 가득한 숲길이어서 그런 대로 걷기에 좋다. 부도밭은 설화에서 말한 옛 통교사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부도밭 정경 많은 부도는 미황사 사력을 말해주고 있다
▲ 부도밭 정경 많은 부도는 미황사 사력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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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에는 모두 24기의 부도와 부도비가 서 있다. 부도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대략 150년 전쯤의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둥글고 네모난 몸돌에 기왓골이 새겨진 지붕돌을 이고 있다. 지붕돌에는 용머리를 새겨 넣어 장식하였다. 벽하당, 송암당, 영월당, 송월당, 죽암당, 설봉당 등 주인 있는 부도도 있지만 주인 없는 부도가 대부분이다. 그 중 설봉당 부도에 생물이 가장 많아 눈길이 간다.



부도세부 오리가 한쪽 발을 들고 있다
▲ 부도세부 오리가 한쪽 발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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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밭에는 대웅전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다. 거북이와 게는 흔하고 한 쪽발을 든 오리, 장끼처럼 보이는 서조(瑞鳥), 도롱뇽 같은 것도 보인다. 그리고 물고기와 게가 키스하고 있는 것처럼 위아래 나란히 있기도 하고 학 혹은 꿩처럼 보이는 새도 있다. 특히 게와 거북, 물고기 같은 바다생물은 대웅전의 바다생물과 함께 창건설화를 상기시킨다.



부도세부 물고기와 게가 함께 새겨있다
▲ 부도세부 물고기와 게가 함께 새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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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도밭에 있는 노루와 방아 찧는 토끼는 또 놓치고 말았다. 미황사 창건설화의 미스터리와 함께 안개 자욱한 미황사는 한 번에 열리지 않는 모양이다. 어차피 내 땅에 있는 우리 것인데 뭐가 급하고 서운하겠는가? 이번엔 아들과 함께했으니 다음에 꽃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날에 우리 손주 손목 잡고 땅끝 금강산, 달마산에 다시 오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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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庵子암자순례 12부작]  10부 선운산 도솔암




게시일: 2013. 6. 19.



한 경찰관의 용기로 지켜낸 '1500년 절집'


11.10.06 10:27l최종 업데이트 11.10.06 12:09l

           


 선운사 가는 길은 도솔천 따라 가는 길
 선운사 가는 길은 도솔천 따라 가는 길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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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마당은 넓다

   10월로 들어서면서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난다. 하늘이 파랗다. 전북 고창으로 향한다. 선운사에 꽃무릇 필 때 가본다고 했는데, 결국 올해도 늦었다. 축제도 끝나고, 꽃도 져버렸다. 단풍철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길다. 선운사 나들목을 나와 한적한 도로를 따라간다. 길 양 옆은 풍천장어를 요리하는 식당들로 즐비하다.

선운사로 들어가는 길은 도솔천을 따라가는 길이다. 천연기념물 송악이 벼랑을 덮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도솔천을 따라 들어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다. 신작로를 걸어가는 기분이다.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면 가지런한 선운사 경내 담장 옆을 걸어간다. 산속에 있는 절집이지만 마치 평지에 있는 절집 분위기다.

선운사 경내로 들어가는 문은 2층 구조로 된 천왕문이다. 천왕문 치고는 특이하다. 경내는 넓다. 마당 한가운데 강당인 만세루가 있다. 보통 만세루는 절집 마당 입구를 차지하고 있는데 선운사 마당은 너무나 넓었나 보다. 만세루와 대웅보전 사이에는 연등이 걸리고, 오층석탑이 뾰족하게 섰다.



 선운사 절집 마당 한가운데 있는 만세루
 선운사 절집 마당 한가운데 있는 만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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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 팔상전에서 내려다본 선운사 풍경. 바로 앞 맏배지붕이 대웅보전이다.

 선운사 팔상전에서 내려다본 선운사 풍경. 바로 앞 맞배지붕이 대웅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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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가 전쟁 중에 보전되었던 사연은

도솔산 선운사는 유서 깊은 절집이다.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수차례 중창을 거쳐 오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다고 한다. 지금의 절집은 광해군 때 다시 중건되었다.

대웅보전은 옛날 건물 그대로다. 웅장하다. 부처를 세 분이나 모셨다. 건물 형태도 맞배지붕으로 깔끔한 느낌이다. 부처 뒤에 있는 후불벽화가 아름답다. 연한 녹색기운이 퍼지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영산전과 팔상전도 옛 모습 그대로다.

어! 한국전쟁 중에 용케도 살아남았네? 나중에 절집을 나오다가 발견한 비석에서 그 답을 알았다.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가지 못한 인민군들이 선운사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국군은 당시 고창경찰서 반암출장소 소장 김재한 경사에게 선운사를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대웅보전에 모셔진 부처. 후불벽화가 아름답다.
 대웅보전에 모셔진 부처. 후불벽화가 아름답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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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김재환 경사는 "공비들의 토벌은 시간문제이나 선운사 소각은 역사와 문화유산 모두를 잃는 것이니 소각작전만은 철회해 달라.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역사 앞에 죄를 짓는 명령에는 응할 수 없다. 지역 치안의 책임은 경찰에 있으니 내 관할은 내가 책임지고 지키겠다"고 완강히 거절하여 국군의 소각작전을 포기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선운사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감들이 노랗게 익어간다.


사람 가는 길과 차 가는 길이 분리되어 있는 도솔암 가는 길

선운사를 나와 도솔암으로 길을 잡는다. 도솔암 가는 길은 아직 푸릇푸릇 싱그럽다. 나무에는 '질마재길'이라는 리본이 걸렸다. 도솔천을 따라가는 길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도솔천 주변으로 나무들은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 어떤 나무는 뿌리 밑이 들린 것도 있다. 그러면서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나무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도솔천 물은 검다. 도솔천 물이 검은 이유를 설명한 안내판들이 있다. 아마 산속 물이 왜 이리 오염됐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안내문 설명에 의하면 참나무과의 낙엽 등에 함유된 '타닌' 성분으로 인해 검게 보인다고 한다.



 도솔암 가는 길. 아직은 싱그런 숲길이다.
 도솔암 가는 길. 아직은 싱그런 숲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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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천 물빛이 검다. 천 옆으로 자라는 나무들은 뿌리를 드러내 놓고 있다.
 도솔천 물빛이 검다. 천 옆으로 자라는 나무들은 뿌리를 드러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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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 가는 길.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도솔암 가는 길.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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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 가는 길은 사람이 가는 길과 차가 가는 길로 나뉘어 있다. 도솔천을 사이에 두고 사람길과 찻길을 만들었다. 한적한 오솔길을 걷고 싶다면 사람길로, 차를 피하는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편안하게 걷고 싶다면 찻길을 걸어가면 된다.

도솔암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다. 선운사에서 도솔암까지 3.2㎞나 된다. 길은 편안하지만 걷는 거리가 길다 보니 조금 힘도 든다. 가는 길에 하늘로 부채를 펼친 모양의 웅장한 소나무인 '장사송'과 진흥왕이 말년을 보냈다는 '진흥굴'도 지난다.

붉은 빛 신비로운 도솔암 마애불

평탄한 길이 끝나고 가파르게 오르더니 도솔암이 나온다. 도솔암은 건물이 세 채가 있다. 극락보전을 가운데 두고 동암과 서암이 날개를 펼치듯 자리잡고 있다. 절집 마루에 앉아 쉬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맑다.



 도솔암 마애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불이다.
 도솔암 마애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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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 바로 뒤로 마애불이 있다. 불상의 높이가 15.6m나 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불이다. 이 마애불에는 화순 운주사의 와불만큼이나 신비한 이야기가 있다. 마애불 가슴에는 감실이 있는데, 감실 안에는 비결이 있다고 전해져 왔다.

조선말에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비결을 얻고자 감실을 열었는데 그 안에 있는 책에는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고 쓰여 있어 놀라서 다시 넣어놓았다고 한다. 19세기 말 동학의 접주 손화중이 감실을 열고 비결을 가져갔다고도 전해온다. 마애불은 붉은 빛이 돈다. 그래서 더욱 신비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신선이 거처했을 것 같은 도솔천 내원궁

   마애불 주위로 단풍나무가 아직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나한전이 있고 그 앞에 부서진 삼층석탑을 다시 세워 놓았다. 이곳에 삼층석탑을 세웠을 정도면 예전에 상당한 규모의 절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나한전 옆으로 도솔천내원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은 가파르게 빙 돌아서 마애불 뒤로 오른다.



 도솔암 나한전 앞 삼층석탑
 도솔암 나한전 앞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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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도솔천 내원궁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도솔천 내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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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나라에는 도솔천이라는 천상의 세계가 있는데 그 곳에 내원궁과 외원궁이 있다고 한다. 외원궁에는 하늘나라의 일반 중생들이 살고, 내원궁는 미륵보살이 있는 곳이다. 그럼 이곳은 미륵세상인 셈이다. 내원궁으로 오르는 계단은 무척 가파르다. 한참을 올라 계단에 다 오를 즈음 펼쳐진 풍경에 너무나 놀란다. 높은 바위 틈에 작은 절집이 있다. 아! 이런 곳에 절집을 만들어 놓다니.

건물 안에는 지장보살을 모셔 놓았다. 작은 마당에서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도 있다. 내원궁 난간에 서니 선운산 기암 풍경들이 펼쳐진다. 나무들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풍경이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옛날 이곳이 거처하는 스님들은 신선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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