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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근현대 서예 및 미술계에 미친 영향

보허 步虛 2017. 4. 12. 00:18


추사 김정희가 근현대 서예 및 미술계에 미친 영향 추사 김정희-자료 / 서예 + 미술 + 디자인                                          

2009.08.25. 08:24

         http://blog.naver.com/peaceofmind8/110067723936

                                                                


추사 정희가 근현대 서예 및 미술계에 미친 영향

김종헌, Book Master @ <Peace of Mind>

 

   필자가 졸저 <추사를 넘어>의 원고를 쓰던 2006년은 추사 김정희가 태어난지 220, 서거한지 150년이 되던 해이다. 이 해에 <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 <추사 문자반야전>, <추사 150주기 기념전>, <추사글씨 귀향전> 등 추사를 재조명하는 기획전들이 연이어 열리고 추사 붐이 일었다.

 

 

 

 <추사를 넘어> 책 표지

 

   그러나 필자는 한글세대들이 서예예술과 김정희의 추사체에 대한 이해와 감상의 능력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한글세대들이 서예에 눈뜨고 서예 감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책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을 중심에 두고 한 권 쓰고 싶었다. 필자 자신이 직업적인 전문 서예가가 아니고 학창과 직장생활 틈틈이 서예를 즐기고 애호한 비전문가임으로 일반인들에게 서예읽기의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쉽고 평이한 책을 쓰고자 하였다.

 

   추사는 살았던 당대에 이미 한중일 삼국의 서예계에서 높이 평가를 받았고, 추사체는 청나라 시대의 서학書學의 성과와 서예를 대표하는 서체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150년이 지난 지금 중국에서는 추사와 추사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도 늘 궁금하였다. 마침 나의 은사되시는 소지도인昭志道人 강창원姜昌元 선생께서 미국 L.A.로부터 <중국서법中國書法/Chinese Calligraphy> 2006 6월호를 보내 주셨다. 놀랍게도 중국 서예 전문지도 추사 선생의 150주기를 맞아 무려 16쪽에 걸쳐 다음과 같은 논문과 자료, 도판을 실은 기념특집을 만들었다.

 

<韓國 金正喜>

<宗師 - 独创 紀念韓國聖金正喜> 沈鵬

<韓國 金正喜題跋>

<韓國 金正喜作品>

 

   그들은 추사를 서성書聖으로 부르며 추사의 <臨雁足灯铭轴>과 묵란도 <山上蘭花>에 이어 <청대서가작품선>으로 등석여鄧石如, 조지겸趙之謙, 이병수伊秉綬, 오창석吳昌碩의 작품을 나란히 실었다. 그리고 두 쪽에 펼쳐진 목차 아래 쪽에도 추사의 행서 <書員嶠筆訣后>를 싣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근현대 서예계 및 미술계에 미친 영향을 알아봄에 있어 근대 서예계에 미친 영향은 1980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에서 발간한 <간송문화 19  서예V 추사서파>에 실린 최완수 선생의 <추사서파고秋史書派考>를 기초로 하였다. 이어 현대 서예계와 미술계에 미친 영향에 관하여는 필자가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종합하는 가운데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생각을 정리하였음을 밝힌다.

 

   한국서예의 근, 현대 구획문제는 일반적으로 근대서예를 19세기 초 근대적 자각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자하 신위와 추사 김정희 시대로부터 광복 전까지 100여 년으로 보고 있다. 현대서예는 해방 후 1945년 소전 손재형의 주도로 조선서화동연회를 조직하고 '서예書藝'라는 명칭의 사용을 주창한 때를 그 기점으로 삼았다.

 

1. 추사가 등장하기까지의 조선 서단의 변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나오기 전까지의 한국 서예계는 늘 중국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중국에서의 서체의 변화와 유행에 발 맞추어 뒤따라 가는 형편이었다. 고려말~조선왕조 시대에는 원元의 조정朝廷으로부터 애호를 받던 조맹부趙孟頫(1254~1322)의 연미화려姸媚華麗하고 섬세예리纖細銳利한 세련미洗練味를 특징으로 하는 송설체松雪體가 만연하였다. 시서화詩書畵에 두루 뛰어났던 조맹부의 송설체는 문예일치文藝一致 사상에 공명하였던 조선조 성리학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1419~1464)은 송설체의 진수를 이은 대가라 하겠다.

 

   그러나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의 조선성리학으로의 발달과 토착화의 영향은 조선 나름의 독자적인 서체를 개발코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560)의 석봉체는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 서예계를 풍미하였다. 이런 가운데 옥동玉洞 이서李(1662~1723) 등이 중심이 되어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출현이 이루어 진다. 이서가 지은 <필결筆訣>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예이론서로서 송설체를 탈피하여 진대晉代의 왕희지체王羲之體로 거슬러 올라갈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과 같은 대가가 출현하고 백하의 제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로 이어진다. 원교 이광사는 <서결書訣>을 지어 왕희지체의 연원이 되는 북비北碑 즉 한위漢魏의 비석에 새겨진 글씨를 배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론과 주장은 바로 금석학金石學의 연구를 서예의 기본으로 삼았던 추사 김정희 일파의 서예론과 일치하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말폐末廢가 드러나면서 새로운 치국이념이 요망되고 학예學藝를 겸비한 정조正祖의 우문정책右文政策에 힘입어 규장각奎章閣의 신진재사들을 중심으로 북학파北學派가 형성된다. 이들은 청조淸朝 고증학考證學의 예술지향적인 학예일치사상學藝一致思想의 경향을 받아들여 금석학金石學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금석학은 중국의 명말明末 무렵부터 고증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으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송명의 성리학이 지나치게 철학적 사변으로 흘러 말폐末廢를 드러내며 치세능력을 상실하자 이를 비판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고증학이 대두되었다. 이때 고증의 기초가 되는 금석학도 함께 발달하게 되었다. 강희康熙. 건륭乾隆을 거치면서 금석학은 다만 경사고증經史考證이나 문자연구의 보조적 역할을 넘어 금석자료 자체가 갖는 예술성과 역사성을 규명하는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금석학의 발전은 서체와 서풍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18세기 후반 옹방강翁方綱(1733~1818)을 위시한 일군一群의 학자이자 서예가들에 의하여 그 학문적 토대와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서체들의 개발이 시작된다. 이들은 종전의 시서화의 일치의 문예일치文藝一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학예일치學藝一致를 주장하였다.

 

   이런 대세에 힘입어 조선에서도 동국진체가 약 100여년 진행된 18세기 말엽부터는 중국 청조淸朝에서 전개된 새로운 학문인 고증학考證學에 바탕을 둔 북학파北學派가 득세를 하게 된다. 북학파의 실사구시와 고증학적 태도는 조선 서예계에 있어서도 옛 서체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 연구하는 금석학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런 새로운 청조의 학풍을 선봉에 서서 받아들인 사람이 추사의 스승이 되는 박제가朴齊家(1750~1805)이다.

 

   추사 김정희는 이런 금석학과 학예일치 사상이 난만한 가운데 이들의 학문적 성과가 서예 예술에의 이입이 전개되고 있는 과정에 나타났다. 추사는 1809년 생부 김로경金魯敬(1766~1837)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연행燕行하는 기회에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시종侍從하여 가서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과 학연을 맺고 그들의 학문적 성과를 배워 얻고 당대 서예계의 흐름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이미 조선의 서예전통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추사는 연경의 학자들로부터 체계화된 서예이론을 단기간에 흡수 소화할 수 있었다.

 

   이후 추사는 옹방강 문징명文徵明(1470~1559)동기창董其昌(1555~1636) 조맹부趙孟頫(1254~1322) 미불米芾 (1051~1107)과 소식蘇軾(1036~1101) 구양순歐陽詢(557~641) 과 우세남虞世南(558~638)을 거슬러 올라가며 공부하였다. 추사는 북비와 남첩 계열의 서체들을 두루 섭렵한 끝에 다시 더 올라가 한예漢隸의 묘리를 터득하였다. 이어 한예에 바탕을 두고 여러 서체의 장점을 녹아내어 겸비한 추사체를 쓰게 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추사체는 청나라 학자들과 서예가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그때까지 아무도 이루어 내지 못하였던 서예사상의 일대 새로운 경지였다. 따라서 한중의 많은 서예가들이 이후 추사를 추종하였다.

 

2. 추사서파의 성립

 

   청조 고증학의 발전은 예술지향적인 학예일치사상으로 발전되어 자연히 예술가적인 천품을 타고난 학자의 출현이 절실히 요망되었다. 정조正祖의 문예정책이 지향하는 바도 이러하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과 기대 속에 추사 김정희가 출현하였다. 추사는 청조고증학파가 추구하였던 학예일치의 이상적 경지의 글씨를 씀으로써 서예를 한층 격조 높은 순수예술로 승화시켰다. 사람들이 추사의 글씨를 높이 평가하며 따라 쓰게 되니 이른바 추사서파가 형성된다. 최완수 선생은 <추사서파고>에서 추사서파의 작가들로 출생 년대를 기준으로 다음에 열거된 14명을 들고 그들의 약전略傳과 대표작을 소개하고 있다.

 


신위申緯 (1769~1845) 호號 자하紫霞 추사보다 17세 연상으로 시서화에 두루 뛰어나 삼절의 칭을 들다. 청의 옹방강과 교유, 추사와 동맥을 이루다.



조광진曺匡振 (1772~1840) 호 눌인訥人. 처음 이원교를 배우고 후에 안진경의 법수를 얻었는데 전예금석기가 있었다. 추사는 눌인의 글씨를 창아기발蒼雅奇拔 괴위정특怪偉挺特하다고 평하다. 행초는 청의 유석암劉石庵 용墉과 유사하고 지예指隸는 수옥水屋 장도악張道渥과 비슷하였으며 고법임모古法臨模에 뛰어났다.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한 그의 서맥은 조희룡趙熙龍 (1797~1859), 양기훈楊基薰 (1843~ ?), 김규진金圭鎭 (1868~1933)으로 이어짐.

 


권돈인權敦仁 (1783~1859) 호 이재彛齋,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여차석노인如此石老人. 필법이 추사에 핍진逼眞하였으며 특히 소해小楷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김유근金逌根 (1785~1840) 호 황산黃山. 신자하, 권이재, 추사와 더불어 서화로 교유. 특히 화석畵石이 뛰어나고 묵죽墨竹에도 능하였다. 필법에 금석기가 있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자 원춘元春. 호 추사, 완당阮堂. 경주인. 유당酉堂 노경魯敬 자. 관 참판. 청의 옹방강, 완원의 학맥을 이은 북학파의 거벽巨擘으로 고증학을 대성. 금석학, 경학, 문자학, 사학, 지리학, 천문학 등에 두루 정통하다. 특히 서법은 조선의 전통서법을 익힌 위에 옹방강학파의 서론을 바탕으로 동기창으로부터 차례로 소급溯及하여 한예에 이르는 수련과정을 거친 다음 예서를 기본으로 하고 제체諸體의 특장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추사체를 이루다. 추사체가 일세를 풍미風靡하여 추사학파의 중심인물이 되다.

 


 김명희金命喜 (1788~ ? ) 호 산천山泉. 추사중씨仲氏. 순조純祖 경오진사庚午進士 관 영유현령永柔縣令. 순조임오純祖壬午 (1822) 부 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연행. 북경에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지은 유희해劉喜海를 비롯한 제명류와 교유. 추사체를 좇아 쓰다. 소해는 추사와 핍진逼眞.


김상희金相喜 (1794~ ? ) 호 금미琴眉 혹은 금미琴麋. 추사계씨季氏. 추사체를 좇아 쓰다.

 

조희룡趙熙龍 (1797~1859) 호 우봉又峰 호산壺山. 관 오위장五衛將. 시서화에 두루 능하다. 필법은 추사를 배워 방불하나 사란寫蘭이 끝내 화법일로畵法一路에만 그쳐 서권기書卷氣가 없다는 추사의 평을 듣다. 매화에 화벽畵癖이 있어 일화가 많다.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이라는 자서전적 저술과 미천한 계층 출신의 인물 가운데 학문·문장·서화·의술·점술에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한 《호산외사壺山外史》라는 열전적列傳的 저술을 남겨, 조선 후기 회화사와 중인문화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매화를 많이 그려 조선후기 묵매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대표작은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이상적李尙迪 (1804~1865 1891?) 호 우선藕船. 서법과 금석학통을 추사로부터 이어받다.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12번이나 청에 드나들며 옹방강, 오곤량吳崑梁, 유희해劉喜海 등과 교유하였다. 추사와 청 석학들과의 학예교류에 큰 몫을 하다. 추사 제주적거시에 청의 신간서적을 계속 보내는 등 극진히 시봉. 그는 세한도歲寒圖》를 연경燕京에 가지고 가 청나라의 문사 16명의 제찬題贊을 받아오기도 하였다. <예당금석과안록>을 쓴 추사의 금석학은 우선 이상적, <삼한금석록>을 쓴 역매 오경석, <근역서화징>을 쓴 위창 오세창으로 이어졌다.

 

방희용方羲鏞 (1805~ ? ) 호 난석蘭石. 서화에 모두 뛰어나다. 서는 추사를 배워 한예를 즐겨쓰고 지예에도 능하였다. 한예비25첩을 수무手撫하여 <예원율체隸源律逮> 5권을 이루다.

 

 신헌申櫶 ((1810~1888) 호 위당威堂. 추사의 수제자로 시서에 추사의 적전嫡傳을 이어받다. 예서에 뛰어나다.

 

이하응李昰應 (1820~1898) 호 석파石坡. 영조현손英祖玄孫. 고종사친高宗私親. 초수흥선군初授興宣君, 진봉대원군進封大院君. 추봉대원왕追封大院王. 추사문인. 서는 추사체를 방불하게 구사하였도 난을 전사하여 추사로부터 우리나라에사 제일이라는 평을 듣다. 예자隸字와 사란寫蘭이 쌍미雙美를 이루다.

 

 

전기田琦 (1825~1854) 호 고람古藍·두당杜堂. 추사문인. 전예해행 및 시화에 모두 뛰어나 추사의 사랑을 받았으나 30세에 요절. 화격은 고아담박하고 시는 청월절속. 글씨는 추사체를 배워 썼으나 고경고졸한 풍운에 미달. 추사파秋史派 가운데 사의적寫意的 문인화의 경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구사했던 인물로 촉망 받았다.

 

김석준金奭準 (1831~1915) 호 소당小棠. 묵지도인墨指道人. 이상적 문인門人으로 금석, , 화에 능하여 안진경체와 북조北朝 예법을 잘쓰고 지두서指頭書에도 뛰어나다.

 

 

  최완수 선생이 열거한 위의 서예가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근대의 서예가들이 직간접으로 추사의 영향을 받았고 추사 서풍의 글씨를 따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이들도 추사서파에 넣을 수 있겠다.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9~1892) : 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그림을 배워 문인화文人畵를 터득하였으며, 조선 후기 화단에 남종화풍을 뿌리내린 추사파의 대표적 화가이다. 화제畵題에 흔히 추사체를 썼다.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 조선 말기 개화사상가·서화가·금석학자. 중인中人 출신으로 역관이 되어 청淸나라를 왕래하면서 양반가의 자제들에게도 개화사상을 고취하였다. 금석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편찬하기도 했으며, 국내외의 희귀한 서화를 방대하게 수집하였고, 예서隸書와 전서篆書 및 매화 그림에 능하였다. 저서로 《삼한금석록》 외에 《삼한방비록三韓訪碑錄》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양요기록洋擾記錄》 등이 있다.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 완당의 유배지까지 印을 찍어 보내어 가르침을 받았다. 완당은 오규일을 전각의 후계자로 지목하여 모든 것을 다 전수하고자 하였다. 추사묵란秋史墨蘭의 최고 걸작 <불이선란不二禪蘭>오소산견이호탈가소吳小山見而豪奪可笑라고 쓴 발문을 통하여도 추사의 소산의 깊은 사제의 관계를 읽을 수 있다.

 

   그밖에 추사의 전각예술의 영향을 받은 문도門徒로는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 (18321914), 해관海觀 유한익劉漢翼 (18441923), 청운菁雲 강진희姜璡熙 (18511919),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성제惺齊 김태석金台錫 (18751952) 등의 손을 거치면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석불石佛 정기호鄭基浩, 석봉 石峰 고봉주高鳳柱,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 회정懷亭 정문경鄭文卿, 청사晴斯 안광석安光碩이르기까지 지속된 것이다.


이당怡堂 조면호趙冕鎬 (1803 ~ 1887)

위당威堂 신헌申櫶 (1810 ~ 1888) : 호는 위당威堂. 무관가문의 집안내력을 지녔고 실학자 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수학했다.

만향제晩香齊 남상길南相吉 (1820 ~ 1869) : 조선 말기의 천문역법학자.

추당秋堂 서상우徐相雨 (1831 ~ 1903 ) :

표정杓庭 민태호閔台鎬 (1834 ~ 1884)

 

 

3. 추사를 넘지 못하고 추종과 모방에만 그친 추사서파의 한계

 

   추사체는 전 서예사를 통하여 면면이 이어온 전통과 고전을 집대성한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추사서파의 많은 제자들은 추사체를 쫓아 쓰긴 하였으나 추사가 이룬 경지에는 도저히 못 미치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한계와 이유가 있다 하겠다.

 

   첫째, 추사는 분명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글씨를 썼다. 즉 일반 사대부와는 달리 독자적인 서예예술론을 연구하며 작품활동을 병행한 것이다. 따라서 서예론의 바탕 없이 법첩과 작품들을 임서를 통하여 배우고 모방에만 그친 추종자들의 글씨와는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의 서예가 ‘진상운晋尙韻 당상법唐尙法 송상의宋尙意 원명상태元明尙態’라는 논리를 인정할 때, 이를 청나라에 적용해보면 청나라 사람은 학學을 숭상하였다. 청나라 사람들이 지향한 글씨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이며 개성으로서의 괴怪, 즉 고전에 입각한 근대정신의 감성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어느 누구도 청대의 서예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청나라 시대의 서예가들 중에서 입고가 강한 이는 출신出新이 약했고, 출신出新이 강한 이는 입고入古가 약해 진정한 입고출신의 개성적인 글씨의 경지를 개척한 서예가가 없었다. 조선의 추사 김정희만이 완벽한 입고출신의 서예가였다 하겠다. 추사 서파의 서예가들은 추사의 모방에 그쳤을 뿐 추사 이후 다시 입고출신하여 추사를 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둘째, 추사는 글씨를 배우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끊임없이 한 단계 한 단계 더 높은 학문과 예술의 경지에 눈떠 가면서 서체의 변화를 가져왔다.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학예연구사는 추사체의 형성과정을 크게 (1) 첩주帖主 시기, (2) 첩주비종帖主碑從 시기, (3) 비주첩종碑主帖從 시기, (4) 비첩혼융碑帖混融 시기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안진경을 통하여 기초와 돈후敦厚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동기창의 태소동파, 미불의 의이옹, 구양순의 법왕희지의 신운神韻한예북비漢隸北碑의 금석기와 고졸古拙정판교의 괴 이어지는 공부를 통하여 중국 전통서법을 거슬러 오르며 두루 익히고 소화하였다. 추사서파 서예가의 대부분은 추사의 서예 공부의 전과정과 변모를 따라잡아 공부하지는 못하였다. 즉 추사체의 어떤 일면만을 배우고 따랐을 뿐이다.

 

   셋째, 추사의 글씨가 손끝에서 나오지 않고 학예일치, 시서화일치의 경지에 있음이다. 직제자들은 추사 김정희를 직접 만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나, 추사체의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로 가득찬 추사의 학문과 정신을 완전히 체득하지는 못하였다. 추사체의 진면목은 추사의 유불선儒彿仙을 아우르는 폭 넓고 깊은 학문과 첩帖과 비碑의 융합을 통한 예술적 체험의 자기화自己化다. 즉 추사는 중국의 전형화된 전통의 글씨를 넘어 모든 서체의 장점들을 종합한 다음 자신의 개성을 불어넣어 추사체라는 창조적 서예예술의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였다. 추사체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여러 서체의 장점들을 한 데 섞고 독특한 장법과 공간 구성을 통하여 창조된 것이다. 이는 왕희지 이래 주로 중국인들에 의해 추구되고 이어져 온 서법書法 미학이 당시 한 중 일 3국을 통틀어 추사에 이르러 대단원을 이루고 또한 극복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넷째, 추사체의 독특함과 기괴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성 때문에 결국 추사 당시에만 유파가 형성되었을 뿐, 사후에 지속적인 계승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즉 추사체는 서예 역사상 가장 뛰어난 독창성과 예술성을 지닌 글씨로 추사 당대를 뛰어넘어 현대적 감각까지도 넘치는 글씨이기는 하나, 전범典範이 되는 표준적인 글씨가 아니다. 바로 이 점이 추사체의 생명이자 한계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추사가 말년에 이룬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서는 기교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교를 감추고 졸拙함을 존중하고 있다. 추사체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예술적 경지는 노자老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 의 ‘졸拙’이며 ‘괴怪’와 ‘졸拙’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추사가 이룬 ‘괴怪’는 작위적이고 의식적인 ‘괴怪’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개성, 즉 ‘허화虛和’의 경지이다. 추사서파의 많은 제자들은 추사의 이런 불계공졸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추사체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추사의 두 차래에 걸친 귀양을 포함하여 굴곡 많은 삶의 과정이 있다. 추사서파의 어느 누구도 추사와 같이 격렬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서예를 통하여 위로 받고 극복하는 <붓에 살고 붓에 죽은> 절대적 체험의 삶을 살지는 못하였다 하겠다.

 

4. 추사 김정희가 현대 서예계에 미친 영향

 

   근대가 현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서구화의 바람이 불자 사대부들의 등용문이었던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 더불어 사대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통적인 시서화에 대한 미의식도 서서히 해체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국권이 상실되고 서양문물의 도입이 본격화되면서 전동적 서화의 개념은 서구적 미술로 바꾸었고, 서와 화가 분리되는 현상이 진전되었다. 선비의 글씨와 문인 사대부의 여기로서의 문인화의 시대가 끝나 가고 있는 것이다. 대신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따라 서예와 회화가 분리되면서 직업적 전문 서예가와 화가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아울러 선전鮮展, 국전國展과 같은 본격적인 공모전公募展 제도가 도입되고 개인전 등이 활발해 지면서 전업 서예가가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 현대 서예의 기점을 1945년 광복을 시점으로 본 다면 한국현대 서예는 국전國展 - 대한민국 미술대전이 시작된 1949년부터 그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잡을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국전이 시작되고 끝난 1949 ~ 1981년 사이에 활동하였던 현대의 서예가들에 추사 김정희가 미친 영향을 다루고자 한다. 그 이후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는 서예가들의 활동과 작품에 관하여는 아직 객관적 평가를 내리기에 이른 감도 있고, 서예계 자체가 분열되어 백가쟁명百家爭鳴식 혼란기에 빠져있는 까닭에 서예계 자체의 정화와 안정이 이루어진 다음에 다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해마다 치러지던 국전은 당시로서는 매우 권위 있는 등용문이었다. 국전은 현재의 각종 서예대전의 모태로서 서예가들에게 등단의 기회를 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으나 점차 그 의미가 퇴색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파벌적 심사결과에 따른 말 많고 문제 많던 국전은 해마다 반복되던 시비로 그 운영이1982년부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거쳐 1989년부터 한국미술협회에 이관되고 이름도 바뀌었다. 가장 말썽이 많던 서예부분은 그나마 한국미술협회로부터도 외면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 각종 민간의 협회전 및 동인전 등이 난립하면서 때때로 심사의 엄정함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서예계 전체를 불신하게 만드는 사태를 야기하였다. 이런 와중에 서예계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소전 손재형과 검여 유희강이다. 그리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서예가들 중에서 가장 추사를 흠모하고 연구하며 매진하고 있는 대표적 작가로 송천 정하건이 있다.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 ~ 1981)

   소전 손재형은 추사 이래의 대가로 추앙 받을 정도로 우리나라 현대 서예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소위 국전 <예파藝派>의 선두주자로 고전적인 서체에서 벋어나 회화적 요소가 풍부한 소전체를 만들어 썼다. 그는 광복 전 1924(당시 22)부터 1931년까지 매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1회 조선서도전에서 특선하는 등 나이 30전후에 특선을 마쳤다. 광복 후 국전이 시작되면서부터는 9회 연속하여 심사에 참여하였다. 그 후에도 국전 고문을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장, 국전 운영위원장, 예총회장, 대한민국예술원회원(1954~1981) 등을 지낸 40년간 선전이나 국전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때가 없었다.

   해방을 맞으면서 소전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를 서예書藝로 바꿔 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서를 현대적인 예술개념으로 승화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1945년 조선서화 동연회同硏會를 창립 선전이 없어진 문화적 공백기를 메웠으며 그것이 국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가 주도한 <예파藝派>는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에 입각하여 회화성이 강한 예술서藝術書를 지향하였다. 왕희지 이래의 중국의 전통서예의 답습과 임서에 치중하는 사대적 묵수주의에 반하여 새로운 현대적 조형성에 착안하였다. 소전이 이끈 예파는 추사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창신>에 더 뜻을 두었다 하겠다.

 

   소전은 일찍 조부 玉田으로부터 안진경 해서를 익힌 후, 양정고보에 입학하여 당시 교장이었던 석정 안종원에게서 전서와 초서를 배우고, 성당惺堂 김돈희 金敦熙로부터 황산곡과 예서를, 오세창에게는 전각과 서화 감정을 배웠다. 소전은 시·서·화에 두루 능하였으며 추사 이후의 제일인자로서 한국 현대서예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소전은 장년기 이후 전서에 바탕을 두고 원숙하고 원만한 자획을 구사하고 무리 없는 구성을 통하여 문기가 넘치고 시각적 회화적 요소가 뛰어난 <소전체>를 이루었다. 특히 그는 한글 전서를 창안하여 국한문 혼용체의 <소전체>를 완성하였다. 그의 소전체 특히 국한문 혼용의 소전체는 추사의 입고출신의 정신에서 나온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 창조적 기량을 마음껏 발휘한 글씨라 하겠다. 소전이 서예계 및 예술계에 남긴 공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뛰어난 창의력과 실험정신으로 몇 가지 서체를 한데 모아 새로운 조형을 추구하여 창조적이고 개성이 넘치는 글씨를 썼다. 특히 궁체, 판본체에 의존해 오던 우리 한글 서예를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조형 한글 서체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둘째,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등 많은 제자 서예가를 배출하였다.

 

  셋째, <세한도>를 찾아 오고 석파랑을 옮겨 짓는 등 우리 전통문화 보존에 힘썼다. 소전은 당호堂號를 <존추사실尊秋史室>로 붙일만큼 추사를 흠모하고 추사예술의 계승발전에 힘썼다. 그는 <세한도>를 찾아 오고, <승설암도勝雪庵圖>를 그리기도 하였다. 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사랑채를 사들여 옮겨 짓고 같은 곳에 옥전장과 문옥루 등은 그가 지은 효자동 집을 옮겨 우리전통문화의 보존에 힘썼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제4대 민의원 의원과 제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예총회장, 예술원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

   소전이 예파 서예가를 대표한다면 검여는 그 대칭점에 섰던 법파法派 서예가의 대표격이라 하겠다. 법파도 예파와 마찬가지로 추사의 <법고창신>의 정신을 이어가려 하였으나, 창신에 앞서 보다 든든한 법고의 고전적 바탕과 기량을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검여 유희강은 1938~1946년 중국에 머물며 베이징의 동방문화학회와 상해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와 서예, 금석학 등을 배웠다. 광복 후 그는 고향 인천으로 돌아와 서예가로 다시 태어난다. 검여는 1953년 제2회 국전에 서양화 <염念>과 서예 <고시古詩>를 처음으로 출품하여 양 부문에 입선하고, 이어 1954년 제3회 국전에도 서양화와 서예 작품을 동시에 출품하였으나, 서예 작품 <독서운생벽讀書雲生壁>만이 입선하였다. 이후 검여는 서예에만 매진한다. 1958년까지 계속 4회에 걸쳐 특선을 차지함으로써 1958년에는 추천 작가로 올라서게 되었고, 1959년에는 국전 심사위원으로 국전 초대 작가가 되었다.

 

   검여 서예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예의 회화성>이다. 그는 육조풍의 행서를 중심으로 한 그의 글씨가 무르익어 가고 나름의 서체가 형성되어가자 그의 예술적 지향점과 목표를 추사체의 연구와 발전에 두게 된다. 그는 서법에 의한 필획보다 결구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한편 1967년부터 1년 여 월전 장우성 화백과 교유하면서 사군자를 비롯한 동양화 기법을 습득하는 한편 추사의 서화 양면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검여는 스스로 별호를 소완재蘇阮齋라 칭하고 고담枯淡하고 기준奇峻하며 둔중鈍重한 서풍으로 추사를 넘고자 하였다. 그는 추사와 마찬가지로 위비魏碑를 중심한 북비의 비학파의 글씨를 수용 발전시켰으며, 마지막으로 추사를 비롯한 중국명가들의 글씨를 두루 공부하였다. 육조 해서의 강한 골기와 갈필의 금석기가 회화적 조형감각이 결부된 검여의 글씨는 그 맥에 있어 추사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추사가 사군자를 비롯 문인화에 빼어났던 점에 비추어 검여는 남종화와 서양화를 통하여 서예로 들어간 까닭에 그의 글씨도 장법과 포치의 조형성이 뛰어났다.

 

   검여 유희강은 1967년 월간 <사상계>지에 <완당론阮堂論>을 발표하면서 추사를 본받아 법고창신에 힘썼다. 검여에게 있어 그의 앞에 우뚝 솟은 추사야말로 그가 극복해야 될 거봉이고 추사 예술의 비법을 탐구한다는 것은 한국서예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되고, 아울러 자기 예술의 완성을 위한 유일한 길이며 돌파구라고 생각하였다. 고법古法의 원칙에서 출발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낸 추사야말로 검여가 가야 할 서예예술의 길을 보여 주었다. 검여도 추사처럼 가장 우리 문화와 체질에 맞는 서체를 개발하여 추사와 같이 앞서 간 서예가들의 기예와 정신 위에 자기의 개성을 담은 서체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1969년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서예가로서는 생명과도 같은 오른손이 마비되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꺼지지 않는 예술혼과 추사 김정희의 예술과 학문세계에 대한 연구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추사가 두 차례에 걸친 11년의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서예로써 자신의 불운을 극복하였듯 검여는 이후 그의 불편한 몸과 예술적 고뇌를 8년간 스스로 개척한 좌수서左手書로써 극복하였다.

 

   재차 찾아온 뇌출혈로 인하여 검여 유희강의 서예는 미완의 예술로 끝났다. 그러나 검여의 예술은 글씨와 그림의 장르를 넘어 새로운 종합을 향하고 있었다. , , , , , 대자서, 갑골문, 종정문 등의 글씨와 사군자, 문인화, 유화, 선조추상을 비롯 그의 계축묵희와 각종 제발題跋 작품들은 검여가 동서양의 글씨와 그림을 넘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자 노력하였던 증명한다.

   또한 오른쪽 신체를 쓰지 못하는 시련을 예술로 이겨낸 그의 작품들은 칼같이 날카롭고(검여劍如), 돌처럼 단단하고(석여石如), 박처럼 둥글둥글(표여瓢如)한 글씨를 쓰고자 하였던 나름의 독특한 획질劃質과 결구結構, 장법章法의 검여체劍如體를 이뤘다. 그의 금석기 넘치는 강렬한 필력으로 쓴 원만한 글씨는 동서양을 넘나든 그의 조형성과 함께 끊임없는 연구와 탐색의 결과이다. 

 

   우리나라의 서예가 중국 서예의 전통과 속기俗氣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근대에 와서 추사 김정희가 비로서 새 경지를 개척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소전 손재형과 검여 유희강이 추사의 뒤를 따라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검여는 우리나라 전통 서예의 마지막 세대의 선두주자였다고 하겠다. 2006년 그의 서거 30주년을 맞아 그의 서예예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여러 사업이 있었다. 그의 전시대에 걸친 작품이 망라된 특별전과 함께 세미나가 열리고 그에 관한 저술 <불굴의 예술혼 검여 유희강>이 출판되고 여러 연구논문이 발표되었다. 그의 사후 30년 만에 비로서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연구가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평가작업과 연구는 서예계 전반의 발전을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송천松泉 정하건鄭夏建 (1935 ~ 현재)

 

   송천 정하건은 해방 이후에 등단한 한글세대의 서예가이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갈물 이철경 선생으로부터 한글서예를 배워 고등학교 시절 국전을 통하여 서예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검여 유희강에게 한문서예를 배우고 홍진표 선생, 임창순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는 그의 호를 <사검재史劍齋>라 지을만큼 추사와 검여의 서풍과 예술정신을 따르고자 한다. 그가 스승 검여가 발병을 하여 서실을 나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과감히 공직을 버리고 흐트러지는 제자들과 서실을 지키기 위하여 <검여서실>로 나간 이야기는 서예계의 가화佳話이다. 송천 정하건은 검여 유희강을 이어 추사 김정희의 입고출신의 노력을 이어가고자 하는 현역 서예가이다.

 

   송천은 추사를 닮아 청경한-맑고 굳센 글씨쓰기를 지향하여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나는 그가 건강한 몸으로 끊임없이 계속 노력한다면 언젠가 추사의 경지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이 시대 마지막 서예가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추사의 글씨와 그림에서 보아온 강인한 필선에 주목하는 가운데 나름의 온화하고 원만한 기운을 살린 필선을 쓰고자 한다. 그가 추사와 검여가 펼친 공간적 구성과 포치에 보다 더 다가가고 나름의 새로운 조형성을 찾아 낸다면 그도 추사에 이어 새로운 서예의 경지를 개척할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앞으로의 한글 세대들을 위하여 국한문 혼용 내지 한글서예를 통하여도 그의 서예가 새로운 활로를 찾기를 기대한다. 또한 그 나름의 필선을 살린 문인화의 세계를 통하여도 추사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를 고대한다.




5. 추사 김정희가 현대 미술계에 미친 영향

 

   서예와 문인화는 추사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분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추사 이후 많은 다른 분야의 미술가들이 추사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들 미술가들은 추사가 하였던 것처럼 늘 새로운 시대의 감각과 호흡과 감정이 느껴지는 새로운 미학의 이론과 인식, 표현 양식과 기법을 발견하려고 노력한 작가들이다. 앞으로도 추사의 영향은 여러 분야에서 계속될 것으로 믿는다. 추사가 우리나라 현대 미술가들에게 미친 영향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추사 김정희가 우리나라 현대 미술계에 미친 영향은 앞으로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할 분야라 생각한다.

 


동양화가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  (19041989)

 

   고암 이응로는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한국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고암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으로부터 전통적이며 고답적인 사군자화와 산수화를 배웠지만 시대의 변천에 맞춰 화풍과 화법을 여러 차래 바꾸었다. 마지막 20여 년간은 극단적으로 추상적인 문자화文字畵와 서예적 필선을 살린 군중화群衆畵를 그렸다. 85년간을 살면서 많은 작품을 그린 그도 추사와 같이 실험정신에 강하여 끊임없이 변신하고 쉼 없이 먹과 색의 세계를 탐구하였다.

 

   고암 이응로의 디자인화된 문자추상은 동양의 서예 전통과 서양적 조형 구축의 방법이 어우러져, 민족성과 세계성, 전통성과 현대성,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원적 가치를 한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의 <인간> 시리즈에서는 자유롭게 춤추고 생동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서화적 필선으로 잘 표현되어 사람 하나하나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소중하다는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들려준다. 최근 불란서에서 고암에게 사사를 받은 재불 여류화가 장혜자 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고암선생과 본인이 가장 많이 본받고자 한 예술가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었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조각가 우성又誠 김종영金鍾瑛(1915-1982)

   한국 현대조각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 받는 김종영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창조적 통찰을 바탕으로 순수조형의 본질을 기하학적이고 단순 명쾌한 형태로 구현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는 자기의 예술이 추사의 조형세계에서 나왔다고 고백한 바 있다. 추사 김정희의 고졸한 미의식에 심취했던 그는 추사와 세잔을 치밀하게 비교하면서 내가 추사를 세잔과 비교한 것은 그의 글씨를 대할 때마다 큐비즘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추사의 글씨는 투철한 조형성과 아울러 입체적 구조력을 갖고 있고 동양사람으로는 드물게 보이는 적극성을 띠고 있다. 세잔의 화면에는 유려한 리듬을 볼 수 없다. 그의 회화는 그렸다기보다는 축조했다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리고 견고한 구성과 중후한 재질감에 있어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이러한 세잔의 예술은 추사에게도 통하는 점이 많다.

 

   김종영은 선비적 기질의 차분함과 아울러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 충실한 내향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기본에 충실한 그의 작가적 면모는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드로잉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과묵한 성품과 자신에 충실 하려는 태도는 자연 밖으로 향하기 보다는, 은둔에 가까운 생활방식을 낳게 하였다. 그가 특히 유배생활 속에서 참다운 예술을 꽃피운 추사 김정희를 흠모했다는 것도 그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과 깊게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추사와 김종영을 관계 지우는 것 가운데 또 하나는 서예다. 김종영은 드로잉에 못지 않게 많은 서예작품도 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선비적 기질을 지녔다 함은 단순한 그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서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선비들이 지녔던 교양으로서 서화를 체득하고 있음에서 이다.

 

   추사는 사대적事大的이란 비난을 들을 정도로 과감하게 청대의 새로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고증학과 금석학 등의 신학문을 수용한 위에 조선의 전통 문화를 종합적으로 융합시켜 추사체를 이루었다. 우성 김종영도 대담하게 서구예술의 새로운 경향을 수용한 끝에 한국 현대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두 예술가의 새로운 문명의 수용을 통한 전통 문화의 발전적 해체와 극복에 관하여도 주목하여 연구할 과제이다.

 

동양화가 산정山丁 서세옥徐世鈺 (1929~ )

   서울미대 재학시절 소전 손재형으로부터 서예를 배워 문자와 도상 그리고 점과 선에 의한 순수추상을 추구해 왔다. 필묵의 서체적 재해석을 통한 현대문인화형식의 서예정신으로 동양화의 새로운 가능성과 경지를 열어 보였다. 그의 필묵작업은 디자인화된 이응로의 <문자추상>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림 쪽보다는 서예 쪽으로 더 경도되어 있다. 그는 서예의 정신과 필획과 발묵의 기법과 여백의 미를 현대적 문인화의 형식으로 재해석하고 구성하였다. 그의 그림은 서예가 가진 간결 명쾌한 특성을 유감없이 잘 드러내고 있다. 서예예술에 관한 깊은 이해와 기법의 체득體得이 없이는 불가능한 서예적 추상의 회화적 작업이라 하겠다. 산정은 추상기호로서의 서예적 문자를 서예가 가진 간결 명쾌한 특성을 유감없이 살려 화선지의 무한공간에 잘 회화적으로 펼쳐주고 있다.


서양화가 이우환李禹煥 (1936~ )

   점과 선, 그리고 여백의 화가인 이우환은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추사 김정희의 서예 작품들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는 추사의 글씨는 언제 봐도 감탄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글씨가 꿈틀꿈틀 살아있지요. 기교가 없어진 곳에 붓의 움직임만 남아있는 것이 예술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한국문화가 도달한 한 극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우환은 ‘모노크롬으로 현대미술의 새 장르를 개척했지만 점과 획으로 갈 데까지 간 이 작가의 작품은 서예를 하지 않고는 절대 나올 수 없다’고 강변을 거듭한다. 그는 "내가 그것(점点)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며 그 당시 시골을 떠돌아 다니는 환쟁이가 우리 집에 놀러 오곤 했다. 그 사람으로부터 서예와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우주 만물은 점에서 시작하여 점으로 돌아간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잔뜩 들었다. "고 회고한다.

 

   이우환은 최소한의 표현 요소인 점과 선만으로 그린다. 추상이나 구상의 모든 조형예술은 해체하면 점·선·면으로 환원된다. 서예의 모든 서체의 글씨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필획의 글씨들도 해체하면 점點과 획劃으로 환원된다. 이와 같이 점과 획은 서예는 물론 다른 모든 조형예술의 공통요소이다. 단지 그림은 덧칠이 허용되지만 서예의 점획은 절대 한번 이상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예의 일회성一回性인데, 서예가 여타 조형예술과 다른 점이다. 즉 일필휘지하는 가운데 순식간에 단 일회에 걸쳐 필획을 구사하는 것이 서예의 요체이다.




   위에서 살펴본 현대의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추사 김정희의 전통 서예세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심취한 일은 흥미로운 일면이다. 어쩌면 그들은 현대 서양미술의 작가이기에 앞서 추사와 같은 조선조 선비의 의식과 전통을 타고나 지녔다 하겠다. 그들은 현대적 조형미술의 첨단의 길을 가면서도 언제나 전통에 대해 깊은 성찰과 추사의 예술정신과 삶에 깊은 감동을 받은 듯하다. 추사의 선비정신, 시서화 삼절과 학예일치의 경지에 다다른 예술가로서의 이상적인 삶이 같은 예술의 길을 걷고 있는 서양미술의 작가들에게도 많은 시사가 있었을 것이다.

 

   추사는 그의 문인화에서 서화동원書畵同源 서화불분론書畵不分論을 내세우며 극단적 감필로 대상의 본질을 압축하여 표현하는 이른바 일격화풍逸格畵風을 구현했다. 그는 한자는 상형문자에서 나왔고 상형문자는 곧 그림이며, 따라서 한자는 극도의 추상화라는 인식 아래 문자의 회화성에 큰 관심을 보였다. 즉 글씨는 그림처럼 쓰고 그림은 글씨처럼 그리라고 설파한 것이다. 추사에 있어 글씨는 기호에 그치는 게 아니라 회화로서의 공간감을 갖고 있는 사실에 착안하여 가장 회화적이며 아름다운 서체인 추사체를 쓸 수 있었다. 그의 그림이 많지 않으나 모두 빼어난 작품만이 있을 뿐이며 제자 중에는 많은 화가가 있었던 점도 이런 까닭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사의 서화관은 오늘 현대의 미술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직간접으로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추사가 보인 절제된 필선과 절실한 가운데 그린 필의에 주목하고 배우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추사의 작품에서 보이는 전인적인 전인격적인 향기,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따라 배우고자 하였을 것이다.

 

   나는 추사가 한국 근, 현대 서예계와 미술계에 미친 영향은 앞으로 보다 많고 관심을 갖고 깊이 연구하여야 할 분야라고 생각한다. 특히 침체에 빠진 서예계는 추사 김정희를 뛰어 넘는 훌륭한 서예가가 출현하여 추사가 강조한 법고창신의 정신을 잘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갈 때 진정 일반 감상자들로부터 사랑 받는 서예로 거듭 날 수 있다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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