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글씨의 흐름 (조선시대의 글씨-초기)
참고 도판 Re:우리나라 글씨의 흐름 (조선시대의 글씨-초기)우리들의 이야기
초 기 초기에는 고려 말에 유행하였던 조맹부의 송설체가 쓰여 졌고 세종 때에 사자관(寫字官)의 모범으로 왕희지체를 삼게 하면서 송설체와 왕희지법이 병행되어졌다. 이시기의 대표적인 서가로는 이영서(李永瑞).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강희안(姜希顔). 김시습(金時習). 김구(金絿). 황기로(黃耆老). 양사언(楊士彦) 등이다.
안평대군 (安平大君, 1418-1453) 이름은 瑢이며 호는 청지(淸之), 또는 비해당(匪澥堂)이다. 시문서화에 모두 능하였다. 세종대왕의 셋째아들로 36세에 사사((賜死)되었다. 대군은 ‘인서구로(人書俱老)’란 단어를 무색하게 할 만큼 30代에 명필의 경지를 일구어냈다. 대군의 글씨는 명인(明人) 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명에서 사신으로 왔던 예겸(倪兼)과 사마순(司馬恂)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보고 조맹부보다 뛰어나다 하면서 수 십 점을 얻어 갔다는 것이 신숙주의 수기(手記)에 나타나며 두 사신이 상찬한 시가 『黃華集』에 실려 있다.
사사((賜死) ; 극형에 처할 죄인을 대우(待遇)하는 뜻으로, 임금이 독약을 내려 자결하게 한 일 인서구로(人書俱老) ; 사람과 글씨는 함께 늙는다. ? 상찬(賞讚) ; =찬상(讚賞) 아름답게 여기어 칭찬(稱讚)함
글씨 중에 대표적인 것은 자신의 꿈을 안견에게 명하여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발문이다. 치밀한 결구와 유연한 필세, 글씨에 넘쳐흐르는 운치 등은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지금 이 작품은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에 소장되어 있다.
강희안(姜希顔) 호는 인제(仁齊) 벼슬은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글씨는 왕희지와 조맹부를 익혀 득력하였다. 활자 을해자(乙亥字)는 그의 글씨이다.
김구 (金絿, 1488-1534) 자는 대유(大柔)이며 호는 자암(自庵)이다.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권 1에 “그는 문장이 기걸(奇杰)”하였고 필력이 경건(勁健)하였다. 왕희지를 즐겨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또한 인수방(仁壽坊)에서 생활하여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고 하였다". 김구는 원교 이광사가 이르는 조선조 전기의 4대가(안평대군. 김구. 양사언. 한석봉)의 한사람이다. 특히 연면초(連綿草)에 뛰어나 이후 황기로와 같이 이후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부제학(副提學) ; 조선시대에 둔 홍문관의 정삼품 당상관 벼슬 연면초(連綿草) ; 초서를 쓸 때에 거의 다 이어지게 쓰는 것
황기로 (黃耆老, 1521-1575이후) 호는 고산(孤山)이다. 13세에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매학정(梅學亭)을 짓고 피세(避世)하였다. 젊은 나이에 외부세계와 단절된 것은 당시 조부가 성균관시절 익명의 투서사건과 부친이 조광조를 처단할 것을 주장한 사건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선비사회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등 치욕을 겪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글씨는 마치 광초로 유명한 당의 장욱이나 희소와 같은 태도로 술로부터 취흥을 얻어 쓴 필치의 것이다. 황기로의 광초는 이후 조선의 선비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양사언(楊士彦, 1517-1584) 호는 봉래(蓬萊)이다. 벼슬은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해동호보(海東號譜)』에 보면 “공은 풍골이 속되지 않고 필법이 기고(奇古)하였으며 또한 청아(淸雅)하였다.”고 하였다. 금강산 만폭동 앞면에 초서대자<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同天)> 8자가 전하는데 그 웅건하고 기존한 필세는 만이천봉과 무게를 다툰다는 평이 있다. 그의 글씨는 연면초(連綿草) 또는 광초(狂草)에 가까운 초서에 능하였다. 황기로와 함께 초성이라고 불렀다.
<<서예통론>> 선주선 저, 원광대학교출판국 , 인터넷 사전. 묵가 2008 11월호 도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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