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글씨의 흐름 (조선시대의 글씨-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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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글씨 후기
이광사(李匡師, 1705-1777) 호는 원교(員嶠)이다. 윤순에게 글씨를 배웠다. 행서와 초서에서 왕법을 바탕으로 미불풍을 가미하여 활달한 자가풍을 이루었다. 추사는 이광사를 지나치게 폄하했지만 꼭 그러한 것은 아니다. 64세 때 『서결(書訣)』2편을 지었다. 전편에는 글씨에 대한 이론과 서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배우는 사람이 범하기 쉬운 오류를 교정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자신의 미진함을 고백하였다 후편에는 옛 서론에서 논한 것을 취합하여 논평을 하였으며 자신의 미진했던 점을 보완하였다.
신위(申緯, 1769-1845) 호는 자하(紫霞)이다. 일찍이 주청사(奏請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벼슬은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시서화 삼절로 이름 높다. 일반적인 평가는 시가 으뜸이고 다음은 그림 그리고 글씨라고 한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등 300에 가까운 것을 사용하였다.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고 이후 제주도와 북청에서 10년간 귀향 살았다. 일찍이 박제가(朴齊家)에게 사사하였다. 24세 때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 당시 청의 학자이며 서가인 옹방강과 완원을 만났다. 이로부터 학문과 예술방면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에도 그곳 서가들로부터 자료를 전해 받았고 또한 우리나라의 탁본을 보내는 등 서신왕래를 통하여 안목을 넓혀나갔다. 그의 글씨는 예서에 특히 뛰어났으며 초서는 남긴 것이 없다. 해서와 행서에도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평자들은 그의 글씨를 기(奇)와 괴(怪)로 평한다. 지금도 일각에서는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아무튼 김정희의 성취는 우리나라 서예사상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림도 잘하여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에서 그의 문기(文氣)를 접할 수 있다.
해외간찰 청유(淸儒) 왕맹자(汪孟慈)에게 답한 글
참고 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 .인터넷 사전, 월간지 묵가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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