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차변증설(黃茶辨證說)
황차변증설(黃茶辨證說) - 1.글을 열면서 제다 문화사
2010.03.03.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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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차변증설(黃茶辨證說)
박희준 (한국발효차연구소 소장)
1. 글을 열면서
2. 황차의 개념
3. 황차의 유입
4. 한국적 황차의 탄생
5. 글을 마치며
1.글을 열면서
우리나라 차문화사의 출발은 자생설과 중국차의 전래설로 크게 나뉘어진다. 그가운데 우리나라 차문화의 맹아기라고 할 삼국시대에는 기록은 주로 불교의 전래와 함께 차가 전해졌다는 신화와 민담이 주를 이루어 가야문화권의 허황옥(許黃玉), 백제문화권의 연기조사(緣起祖師) 차전래설로 두 축을 이룬다. 통일신라시대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종자를 가져와(828년)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는 것은, 가야차문화의 중심에 있는 허황옥의 신화가 살아있는 경남 하동군의 칠불암과 백제시대 연기조사의 차전래설이 전하여오는 전남 구례군의 화엄사가 있는 지리산이라는 지정학적 교집합이 이루어 진 곳이란 사실과 함께 즉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 모두 지리산을 차생산의 적지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차나무가 외부로부터 도입되기 전부터 이 땅에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닐까? 현지답사를 통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차나무라는 명칭보다는 오히려 ‘작설’, ‘작설나무’, 그리고 ‘잭설’, ‘잭살’ ‘작살’, 또는 ‘약나무’, ‘개동백’이라는 이름이 차나무라는 명칭보다 폭 넓게 사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차나무 전래와 수용적 배경에 자생적 배경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이규보가 화개다소(花開茶所)에서 생산된 차의 이름을 유다(孺茶)로 이름한 것이나, 초의선사가 기록한 칠불선원에서 마신 발효차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지리산이 차엽의 생산과 함께 차가공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이 지역에서 통용되는 잭살, 또는 작살은 작설(雀舌) 즉 어린 차싹으로 만들어진 차라는 말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시간을 걸쳐 작설이 차나무와 찻잎을 통칭하는 명사로 이미 수용된 것이다.
즉 지리산은 우리나라 차문화의 씨앗이 움튼 곳이다.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자라는 조엽수립대의 연평균 강수량 1300mm, 연평균 기온 12℃의 차나무 성장의 양호한 기후대를 이루고 있다.
그런 가운데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등장하는 황차(黃茶)는 우리나라 차문화 중흥의 핵심에 있었던 차이다. 그것은 중국 황차와 보이차의 유입속에 우리차문화에 던져진 도전과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응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덕리(李德履)의 <기다(紀茶)>,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각다고(搉茶考)>는 조선차문화가 그동안 중국차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중국으로 차를 수출하는 역발상하는 제다기지의 설립과 제다법의 혁신을 통한 제품을 생산하여 응전하는 모습을 생산현장에서 보여준다.
그곳은 해남과 강진이었다.
즉 우리차의 재발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재발견은 죽로차(竹露茶), 죽전차(竹田茶)라는 생산지의 생태 환경적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장흥의 보림차(寶林茶)라는 이름으로 특정생산지역의 이름으로 발전한다. 또한 그동안 작설 이라하여 일찍 따서 만들어야 하는 전통차의 아성에 농번기를 지난 비교적 늦은 시기(즉 입하 이후, 양력 5월 5일 이후)에도 차를 만들 수 있는 반음반양(半陰半陽)의 환경에서 자라는 죽로차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한다.
여기서 확산된 것이 곡성, 장성, 김해, 밀양 등지로 펴져나가면서 작설에 이은 죽로차가 조선차의 대명사로 새로운 자리메김을 하게 된다. 즉 18세기 말 중국에서 유입된 황차는 조선차문화에 새로운 활력소 주어서 조선의 죽로차라는 새로운 명품을 탄생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20세기 우리 차문화는 일본강점기에 녹차(綠茶)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당시 녹차라는 말은 중국에서도 널리 통용되지 않던 용어인데, 홍차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중국과 영국의 차에 대한 보다 새로운 개념의 일본차, 중국차보다 보다 더 푸르게 생산하는 제다기술의 혁신으로 차라는 보편명사에 ‘녹차’라는 새로운 상품명을 붙힌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차는 중국차문화의 유입속에 조선시대에는 작설이라는 이름으로 보편화되었다가 19세기 죽로차란 한국의 독자적인 브랜드가 성립하였지만, 그것을 다듬을 시간도 없이 녹차라는 새개념을 가진 일본에 편입되면서 우리 차문화는 정체성의 위기에 빠진다.
18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간의 한국차문화의 흐름은 오늘의 시대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중국차의 유입은 청나라로 사신을 갔던 연행사절단(燕行使節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절강성에서 생산된 중저가의 황차를 실은 배가 난파하면서 보급된 중국차는 조선의 백성들이 30년 동안 마셔도 다 마시지 못할 정도의 차가 유통되었고, 곧이어 중국의 보이차 태풍이 몰아치면서 조선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일본강점기의 녹차는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꽃피어나던 차문화를 고사시키는 위기상황으로 몰아갔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차문화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문화계의 차인들과 차상들이 중국에서 직접들고 들어오는 차와 한미 F.T.A. 와 한중일 자유무역협정이 체결 되기도 전 저가의 중국차는 이미 우리 티백시장과 음료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새롭게 몰아치고 있는 보이차 열풍은 차가 골동품화하는 기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또한 우리 대표적인 차생산라인이 일본의 증청녹차(蒸靑綠茶)설비를 도입하면서 우리차의 원형성이 흔들리고 있다. 즉 차에 관한 문헌적 정보와 지식은 중국을 통해 유입되고, 우리가 생산해서 마시는 차는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기계와 제다기술을 습득하여 제품을 생산하여, 소비자들에게 정보와 제품의 괴리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이와 같은 괴리현상은 소비자가 제품을 외면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우리차를 불신하는 풍조까지 만연하고 있다.
이에 우리 조상들이 외래 차문화의 태풍속에서 우리 차문화를 전승발전 시킨 역사를 황차를 중심으로 해석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황차는 오늘날 발효차의 대명사로 쓰여지는 ‘황차’와는 다르다.
요사이 잘못 쓰여지고 있는 ‘황차’라는 용어는 우리차문화의 현대적 정립시기에 문헌해석의 오류를
통해 빚어진 혼란에서 비롯한 것인데, 이제 그 도를 지나쳐 우리 차문화의 원형성 마저 훼손하고 있다. 더군다나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황차에 대한 용어남용이 이제 싹트기 시작하는 차학의 기초적인 뿌리마저 흔들고 있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출처] 황차변증설(黃茶辨證說) - 1.글을 열면서|작성자 algacha
2. 황차의 개념
황차는 육대다류(六大茶類)의 하나이다. 황차는 민황(悶黃 열로 띄우기)제법으로 만들어진 차인데 그 제다법은 녹차와 흡사하다. 즉 녹차의 제다공정에서 열처리의 미숙으로 생긴 찻잎이 녹색을 잃으면서 누렇게 변하는데, 그때 쓰고 떫은 맛이 단 맛으로 바뀌는 현상을 보다 체계화 시켜 새로운 제다법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김명배 선생은 황차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황차는 살청(열처리),비비기(유념), 첫 번째 말리기(初烘), 옹량(雍凉), 두 번째 말리기(再烘), 민황(悶黃) 등의 후발효법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빙허각 이씨(1759-1824) 부인이 남긴 <규합총서>의 염색법>에도 약대빛 물들이는 염료로써 황차가 적혀있다. 민황(悶黃)이란 찻잎 속 물의 열작용에 의해서 가벼운 발효를 촉진시킴으로써 카페인(茶素)의 대량감소를 시키는 공정이다. 황차의 특색인 황탕황엽(黃湯黃葉)은 민황의 공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중국에서 이 황차가 시작된 것은 명나라시대인데, 조선에서는 임진전쟁이 한참이던 그 시절 허차서(許次序)는 <다소(茶疏)>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다.
내 생각에는 저 산 속의 제다법은 좋지 않다. 차를 솥에서 큰 섶나무 불로 덖어냄으로써 차는 솥에서 꺼내기도 전에 잎이 타고 마르니 어찌 그것을 참고 쓸 수가 있겠는가? 아울러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통에 뜨거울 때 곧바로 저장을 한다. 비록 초록빛 가지나 자주빛 자순이라 하더라도 이내 시들어 말라서 누렇게 되고 만다. 이런 차는 식사 뒤에나 간신히 제공될 만하니, 어찌 차겨루기를 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가마솥덖음차가 변형되면서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통에 뜨거울 때 곧바로 저장을 한다’는 황차의 민황(悶黃)개념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에서 시작된 단차(團茶 덩이차)에서 산차(散茶 잎차)로 변화하는 그 극점에 해당하는 데, 증청녹차(蒸靑綠茶)와 부초녹차(釜炒綠茶)의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 <중국명차산지(中國名茶産志>에서 황차를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황차의 특성은 황엽황탕이며, 향기가 맑고 맛이 순해 입을 상쾌하게 한다. 황차의 제다법은 녹차의 제다법과 비슷하지만 차를 덖는 과정에서 퇴방(퇴방), 민황의 공정이 추가된다. ---황차는 찻잎의 종류에 따라 황아차(黃芽茶), 황소차(黃小茶), 황대차(黃大茶)로 나뉜다.
즉 민황의 제작공정이 황차의 가장 중요한 제작공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황차의 대명사라고 할 군산은침차(群山銀針茶)의 제작공정을 통해 황차의 제작공정을 알아보자. 황차는 살청(殺靑 익혀 숨죽이기)과 초홍(初烘 처음 말리기)의 온도가 녹차에 비해 비교적 낮다. 살청 또한 가볍고 빨리 진행하여 차싹의 백호가 떨어지는 것을 막는다. 또한 덩이를 지어 발효를 시키는 기술이 황차의 품질을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황차를 만들 때는 두 차례 피지로 차를 싸서 길게는 60시간에 걸쳐 발효를 시킨다. 그렇게 된 황차는 맛이 달고 부드러우며 상쾌하고 밝은 등황색의 차빛을 낸다. 황차는 만드는 공정은 크게 다음과 같은 8개의 공정으로 나뉜다. 졸저 <차한잔>에 소개한 공정을 조금 정리하여 다음과 같다. 살청을 과거에는 푸른빛 죽이기란 직역을 하였지만, 이 글에서는 ‘익혀 숨죽이기’란 용어로 대체한다.
1)익혀 숨죽이기 솥의 온도는 100℃로 하여 80℃로 맞춘다. 솥에 넣는 차의 양은 약 300g으로 한다. 차를 덖을 때는 차를 뒤적여 가볍게 빨리 뒤집어 준다. 힘을 무리하게 하면, 찻잎이 마찰을 하여 백호가 떨어지고 색이 어두워진다. 약 5분쯤 지나면 차싹이 부드러워지면서 차에서 처음 향기가 나기 시작한다. 이때가 살청이 충분히 된 시기이다. 이 과정을 지나면 수분 함량이 31-32%정도 줄어든다.
2)식히기 살청이 끝나면 넓고 얇은 대바구니에 차싹을 널어 아래 위로 키질을 하듯 여러 차례 흔들어수증기를 4-5분 정도 제거한다.
3)처음 말리기 처음 말리는 온도는 약 50-60℃로 약 25분 정도 말리면서 4-5차례 뒤척여 준다. 처음 말릴 때 수분이 많으면 차의 향기가 떨어지고 색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수분이 적으면 발효되는 시간이 늦어지고 찻잎이 초록색이 되어 황차의 독특한 색이 나오지 않게 된다.
4)두번째 식히기 온도를 낮추어 실행하는데 차싹의 수분이 고르게 가게 한다.
5)처음싸서 발효시키기 1.8-2.4kg의 차를 한 덩이로 하여 두겹의 피지를 싸서 발효상자에 속에 넣는다. 이렇게 40-48시간 동안 두면 차가 발효를 한다. 차를 피지에 싼 다음에는 점점 온도를 높혀서 24시간 정도 지나면 온도를 30℃에 맞춘다. 이때 가운데 있는 차는 바깥으로 바깥에 있는 차는 안으로 넣어서 온도가 균일하게 한다. 이 공정이 제대로 되었을 때 차싹이 노란 빛을 내고 황차 특유의 빛이 난다. 발효가 충분히 되지 않으면 잎이 어두운 녹색을 띈다.
6)다시 말리기 수분을 중발시켜서 발효가 되는 것을 막는다. 온도가 약 50℃ 이하로 하여 말리면서 10-15분마다 한번씩 뒤적여 준다. 이 과정을 지나면 약 80%이상 마른 찻잎이 된다.
7)다시 싸서 발효시키기 처음 발효할 때 모자란 발효정도를 맞추기 위해 하는 과정이다. 두장의 피지로 차를 싸서 발효상자 속에 약 24시간 동안 넣어두면 향기가 짙어지고 빛깔도 황색이 된다.
8)말리기 솥의 온도가 50-55℃로 하여 솥에 한 근의 차를 넣고 말린다. 함수율 약 5%정도가 되면 그친다. 이 방법은 가마솥으로 덖어지는 차로 만들어진 황차에 적용된다. 황유(黃儒)의 <품다요록(品茶要錄 1075년)>에 보면 증제차의 경우 찻잎색이 황색이 되는 것과 그것에 의한 탕색과 맛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찔 때 혹 익지 않으면 비록 가려진 싹이라 할지라도 손실이 크다. 그 색은 푸르지만 쉽게 어두운 색이 되고, 복숭아 씨앗 맛이 나는 것은 익히지 못한 것의 병폐이다. 오로지 잘 익힌 차만이 단내가 난다. 차싹을 질 때 김이 나는 것으로 감을 잡는데, 눈으로 살핌에 있어 근면하지 않을 수 없다. 살피건데 색이 노래져서 밤의 속 껍질처럼 하얀 줄무늬가 많은 것은 지나치게 익힌 병폐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익힌 것은 덜 익힌 것보다는 단내가 좋다. 그런 고로 채군모가 색을 논할 때 청백색을 띈 것이 황백색을 띈 것보다 낫다고 하였지만, 나는 맛을 논함에 있어 황백색을 띈 것 청백색을 띈 것보다 낫다. - 황유의 <품다요록>에서
이 기록을 통하여 떡차 전통의 증제차가 명청(明淸)대로 넘어 오면서 푸른 빛을 추구하는 경향이 점점 노란 빛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잇다. 즉 색상보다는 달고 부드러운 맛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 까다로운 증청제다(蒸靑製茶)의 속성에서 제대로 익히지 못할 바에는 조금 지나치게 익혀서 탕색 보다는 맛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비단 중국의 황차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황차 발전의 한 요인으로 등장한다. [출처] 황차변증설(黃茶辨證說) - 2. 황차의 개념|작성자 algacha |
황차변증설(黃茶辨證說) - 3.황차의 유입 제다 문화사
2010.03.0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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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황차의 유입
우리나라에 황차가 유입된 시기는 임진난 이후의 시기로 보여진다. 1644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김육의 <유원총보(類苑叢譜)>에서 조춘황차(早春黃茶)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때 황차는 이른 봄에 딴 찻잎으로 만든 황차를 말한다.
즉 오늘날의 황아차(黃芽茶)를 소개하고 있어 오늘날의 군산은침과 같은 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차문화사에 충격을 던져준 사건은 1762년 영조 11월에 중국 절강성에서 표류한 청나라 난파선에서 실려 있던 황차였다.
만이 말하였다. “고군산에 표류한 사람들의 복물(짐)이 많기는 300태(짐)에 이르러 운반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봉한이 말하였다. “호조에 일러 산원을 보내고, 값을 깍아서 주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동도가 말하였다. “호남백성들에게 300태 복물을 운반시키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상께서 존겸에게 글로서 명하기를 “이제 고군산 표류인들의 짐을 만약 운반해 온다면 300태가 된다고 하는데, 이때 그것을 본도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쓰게 하여야 할까?
탁지종장들이 맡은 곳에서 서울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 하여라 ”하고 분부하시며 전교를 내렸다.
만이 말하였다. “지도 표류인들은 수로로 돌아가기를 원하는데 그들 소원대로 보내는 것은 어떠합니까?”
상께서 말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봉한이 말하였다. "공평하게 많은 사람을 먹이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상께서 말하였다. "유언술을 보내어 먹이게 하는 것이 좋겠다."
만이 말하였다. "혼궁역서 30건은 어떻게 합니까?"
상께서 말씀하였다. "혜빈궁에 들이면 좋겠다."
상께서 말하였다. "황차 잎이 올라오면 반드시 경매를 하도록 하여라."
봉한이 말하였다. “비록 백성들이 아니라도 신들이 사도록 하겠습니다."
상께서 말하였다. "술은 없드냐? 중관에게 소금을 술 대신 먹이도록 하여라."
봉한이 말하였다. "근간에 차로서 술을 대신 하는데, 제례를 치를 때 사용합니다."
晩曰, 古群山漂人卜物, 多至於三百駄, 難以輸運云矣。
鳳漢曰, 令戶曹遣算員, 折價代給則似好矣。
東度曰, 不可使湖南之民, 運來三百駄卜物矣。
上命存謙書曰, 今聞古群山漂人卜物, 其若運來, 將至三百駄云,
此時豈用本道之民? 令度支從長區處, 自京代給事, 分付。
出傳敎 晩曰, 智島漂人, 願以水路回還云, 從所願入送, 何如?
上曰, 依爲之。鳳漢曰, 公然食許多人, 誠難矣。
上曰, 使兪彦述食之, 好矣。晩曰, 魂宮曆書三十件, 何以爲之乎?
上曰, 入于惠嬪宮, 可也。鳳漢曰, 方有政稟矣。
上曰, 再明日爲之。出傳敎
上曰, 黃茶葉上來, 則必爭買之矣。
鳳漢曰, 雖非百姓, 臣等亦欲買之矣。
上曰, 無酒故耶? 中官有以食鹽, 代飮酒者矣。
鳳漢曰, 近間以茶代酒, 而祭時用之矣。
<승정원일기> 영조 38년 임오 11월 7일 1762년 乾隆(淸/高宗) 27년
1762년 고군산(古郡山 오늘날의 충남 군산시 고군산열도)에 청나라의 표류선에 황차가 실려온 것을 적고 있는 이 <승정원일기>의 내용은, 300태(駄)의 황차가 몰고온 후기 조선차문화사의 태풍의 핵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에 앞서 지도에 표한인이 온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지도에 온 표한인의 배에 실려있던 황차는 승정원일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군산에 표류해온 표한인들에 대한 처리문제에 있어 백성의 노고를 줄이고자 하고,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과 처리하는 방법에서 오늘날의 경매에 해당하는 ‘쟁매(爭買)’ 방식을 구상하는 등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하던 여러 모습들을 함께 알 수 있다. 그리고 홍봉한이 근간에 차로서 술대신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 차례와 제의문화에서 차의 부활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나타나는 황차 기록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난파선에 가득 실려 있었던 것은 조선의 위정자들이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녹색황금인 황차이다. 그 배에 실려 있던 황차는 조선의 차시장에서 한 세대 동안 유통되게 할 정도의 양이었다. 어떤 수요가 있어 이와 같은 상선이 등장하는가에 대한 조사를 통해, 중국변방의 이민족들이 이 황차의 그 실수요자이고, 차와 말을 바꾸는 다마무역을 통해 청나라가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선지식인들에게 비쳐진 것이었다. 이당시의 모습을 이덕리(李德履)의 <기다(記茶)>에서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에서 차가 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고사촬요(故事撮要)』 등에 실려 있는 것은 다만 열 곳 백 곳 중에 하나일 뿐이다.
우리나라 풍습이 비록 작설을 사용하여 약에 넣기는 해도, 대부분 차와 작설이 본래 같은 물건인 줄은 모른다.
때문에 예전부터 차를 채취하거나 차를 마시는 자가 없었다.
혹 호사가가 중국 시장에서 사가지고 올망정, 가까이 나라 안에서 취할 줄은 알지 못한다.
경진년(1760년, 영조 36)에 배편으로 차가 오자, 온 나라가 비로소 차의 생김새를 알게 되었다.
10년간 실컷 먹고, 떨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또한 따서 쓸 줄은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차는 또한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못됨이 분명하다.
비록 물건을 죄다 취한다 해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는 없을 것이다.
배로 서북 지역에 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운반하여, 차를 은과 바꾸면 주제(朱提)와 종촉(鍾燭) 같은 양질의 은이 물길로 잇달아 들어와 지역마다 배당될 수 있다.
차를 말과 바꾼다면 기주(冀州) 북쪽 지방의 준마와 양마가 바깥 관문에 가득하고 교외 목장에 넘쳐날 수가 있다. 차를 비단과 맞바꾸면 서촉(西蜀) 지방에서 짠 고운 비단을 사녀(士女)들이 나들이옷으로 걸치고, 깃발의 천도 바꿀 수가 있다.
나라의 재정이 조금 나아지면 백성의 힘도 절로 펴질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럴진대 앞서 황량한 들판 구석진 땅에서 절로 피고 지는 평범한 초목을 얻어서 나라에 보탬이 되고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庚辰舶茶之來, 一國始識茶面. 十年爛用, 告乏已久, 亦不知採用, 則茶之於東人,
其亦沒緊要之物, 不足爲有無, 明矣. 雖盡物取之, 無榷利之嫌. 舟輸西北開市處,
以之換銀, 則朱提鍾燭, 可以軼川流而配地部矣. 以之換馬, 則冀北之駿良駃騠,
可以充外閑而溢郊牧矣. 以之換錦段, 則西蜀之織成綺羅, 可以袨士女而變㫌幟矣.
國用稍優, 而民力自紓, 更不消言. 則向所云得於荒原隙地, 自開自落之閑草木,
而可以裨國家裕民生者, 殆非過言.
여기서 우리는 경진(1760)년과 그 다음에 임오(1762)년에 걸쳐 2차례에 황차를 실은 배가 표류해 들어온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덕리가 기록한 것은 1760년의 사실인데, 그때 비로소 온 나라가 차라는 것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우리가 만들고 있던 차와 청나라가 만들고 있던 차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설과 차가 한 종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도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던 것과, 말과 비단으로 바꿀 수 있는 차가 우리나라에도 있음에도 호사가들이 차를 연경에서 사오고 있는 현실과 함께 나라를 부강하게 할 차업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호되게 꾸짖고 있다.
이 이덕리의 <기다>에 나오는 경진년의 배에 실은 차(舶茶)의 기사는 <승정원일기>의 영조 36년 12월 신안군 자안도(당시 나주목 소관)에 표류하였던 기사와 일치한다. 이덕리의 이 기록과 앞서 살펴본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살펴볼 때, 1760년에 자안도, 1762년에 고군산에 황차선이 2차례에 걸쳐 각각 표류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황차에 대하여 박제가(朴齊家)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차를 실은 배 한척이 남해에 표류하였는데 그 때 실린 황차가 나라에서 10여년을 쓰고도 아직 남아 있다.
黃茶一船 漂到南海 通國用之十餘年 至今猶有存者
<<북학의(北學議)>>의 <通江南浙江商舶議>에서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고군산에 표류하였던 황차선 보다 자안도에 표류하였던 황차선에 실린 차가 조선사회에 던져준 충격이 더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 1태(駄)는 말에 실는 짐의 단위인데, 군산에 표류해온 황차가 300태라고 하면 300마리의 말에게 한가득 실린 차이다. 그 양 또한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차마고도(茶馬古道)의 나귀들이 20kg의 차를 실어 날랐던 것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6톤 정도의 양이 된다. 그것이 두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 졌다면 제법 상당한 양의 차가 유통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차의 소비는 왕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먼저 <승정원일기>와 <일성록(日省錄)>에 나타난 왕실의 황차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상께서 말하였다. 황차를 마시면 어떨까? 봉한이 말하였다.
여항에서는 많이들 쓰고 약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께 올리는 약으로서는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것을 가볍게 올릴 수는 없습니다 .
상께서 말하였다. 그렇다.
上曰, 黃茶欲試服, 何如? 鳳漢曰, 閭巷試用多有效, 而御藥, 不可以未詳根本者, 輕易進用矣。
上曰, 然矣.
<승정원일기> 영조 46년 1770년 乾隆(淸/高宗) 35년
황차선에 실려 황차가 들어오고 난 지 8년-10년 뒤에 민간에서는 이미 민간에서는 황차를 음료보다는 약으로서 체용을 하고 있었지만, 왕실에서는 그 효능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다시 10년이 지나지 않아 정조시대에 황차는 왕실에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명선이 말하였다. “환후가 어제 보다 나으시니 경축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말하였다. “밤에 오직 3차례를 보았는데 체기 아직 남아 있어 답답하구나”
명선이 말하였다. 황차를 시시로 드시면 체기를 해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命善曰患候比昨有差勝之勢云不勝慶幸
予曰夜間度數只三次而滯氣尙存可悶
命善曰黃茶時時進御則亦可爲消滯之道矣
<일성록> 정조 2년 1778년 윤6월 24일
관주가 말하였다. 바람기운이 차가운데 성체는 어떠 하신지요?
나는 말하였다. 체기가 있어 복통이 있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다.
관주가 말하였다. 체기의 기갈은 상세히 들어본 뒤에 탕제를 정할 수 있는다.
내가 말하였다. 체기는 그렇게 심한 것이 아니어서 탕제 짓는 것을 정할 것이 못되오.
약원에서 황차를 달여서 들이면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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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柱曰風氣過涼聖體若何
予曰微有滯氣腹痛亦有之然不大段矣
觀柱曰滯氣之緊歇詳細承聞然後可以議定湯劑矣
予曰滯意不至甚緊不必議定湯劑自藥院 黃茶只爲煎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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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순조 3년 1803년 8월 2일)
용보가 말하였다. 염증징후의 긴갈을 상세히 들어본 뒤에 탕제를 지어야 겠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혹 체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서용보가 말하였다, 오늘도 역시 황차를 달여서 들이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龍輔曰痰候緊歇詳聞然後可以議定當劑
予曰或滯或否矣
龍輔曰今日亦當黃茶煎入矣予可之
<일성록> 순조 3년(1803년 11월 30일)
내가 명령을 하여 의관이 들어와서 진맥을 하게 하였다.
이유감이 진맥을 하고 말하기를 맥은 좌3부는 평활하여 평상시와 같은데 우3부는 비교적 높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수일간 감기기운이 있는데 비록 대단한 체기는 아닌 듯 하지만 있구나.
탕제를 지을 논의를 하지 말고 차를 마시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이유감이 말하였다. 비록 밖으로 드러나는 두통 한열이 없다고 하더라도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두통은 없다. 감기 또한 병까지는 이르러지 않았지만 아침에 가끔 가래가 생긴다.
청차 황차 외에 어떠한 차를 마시는 것이 좋을까?
의관 박전이 진맥을 하고 말한다 우관이 평상시 보다 조금 느려서 체기가 있는 듯 합니다.
내가 말하였다. 차를 마시는 것으로 정하여라.
당이 말하였다. 의관 조종협이 역시 와서 진맥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그러라고 하였다.
종협이 진맥을 하고 말하였다. 맥의 징후는 좌3부는 평상시와 같이 부드럽고 분명한데,
우변 3부는 좌 3부에 비하여 조금 높습니다.
대체적으로 좌우맥의 부드럽고 분명한 것은 평상시와 같았는데, 지금은 우측이 높습니다.
유감이 말하였다. 맥에 막힌 것과 부드러운 것 체기가 있기 때문 인듯합니다.
차를 마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오늘만은 차를 올리면 마시겠다.
유감이 말하였다. 내일 다시 진맥을 하여 차를 계속 마실 것인지 말 것인지 정하겠습니다.
予命醫官入診 李惟鑑診候訖奏曰 脈候左三部平滑如常 而右三部稍高矣
予曰 數日間感候則 雖不大段滯氣 似有之 湯劑不必議定 而茶飮或可試之乎
惟鑑曰 雖無外氣頭疼寒熱之候 或有之乎
予曰 頭疼則無之 感氣亦不至作痛 而痰嗽朝或有之 靑茶黃茶之屬外 有何茶飮之 可試者乎
醫官朴烇診候訖奏曰 脈候右關比常時稍滑 似有痰滯矣
予曰 茶飮議定也 溏曰 醫官趙宗協 亦爲來待使之入診 似好矣 予可之
宗協診候訖奏曰 脈候左三部 滑實如常 右邊三部 比左邊稍高矣
大扺左右滑實 卽平常之候 而今則右高矣
惟鑑曰 脈體帶滑 似是痰滯 茶飮好矣
予曰 只於今日進茶飮乎
惟鑑曰 明日更爲診候 然後當議定 繼進與否矣
<일성록>순조 4년(1804년 4월 15일)
혜경궁에 가미양위탕 한 첩을 지어 올리고 향귤음 한첩을 달여서 들이라고 하다.
향귤음은 전에 넣던 지각(탱자열매)을 제거하고 황차 1전 5분을 더하고
곽향과 귤피 5분을 감하다.
惠慶宮進服加味養胃湯一貼及香橘飮一貼命煎入
香橘飮前方中去枳殼加黃茶一錢五分藿香 橘皮減五分
<일성록>순조 12년 (1812년 8월 18일)
이와 같이 황차선이 들어온지 30-40년이 지나자 황차는 왕실에서 체기를 내리는 가장 대표적인 차로 자리를 잡는다. 그렇다면 사대부와 민간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을까?
다행히 우리는 황윤석(黃胤錫 1738~1791년)의 <이재난고(頤齋亂藁)>를 통하여 그 편모를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기록 속에서 황차의 음다방법과 약리작용, 황차의 판매가격등을 알 수 있기에, 황차선에 실려온 황차가 어떻게 왕실 밖에서 유통되었는지 알 수 있다.
저녁에 돌아오니 경승서가 왔다.
초저녁부터 와서 이야기를 하다가 닭이 울 때 까지 한 뒤 잠을 자다.
이날 태인이 온제의 편지답장을 나에게 보내왔다.
또 나에게 가래기침(咳嗽)이 있기에 황차 두 봉지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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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 진 뒤 황차 반첩을 달여서 먹자 가래기침이 조금 안정이 된다, 밤이 되어 다시 달여 마시다.
夕歸 則景升書至 初昏來見因話 直至鷄鳴 乃宿 是日 泰仁 作溫弟答書付余
又以余咳嗽之故 出黃茶二封贈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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昏後 服黃茶煎湯半貼 咳嗽稍安 而夜復作
十三日丁未
출전:頤齋亂藁
어제 저녁 설사를 하여 고생이 심하였다. 아랫사람에게 생강과 귤피 황차 맑은 꿀을 사오게 하였다.
달여서 두 차례를 마시자 배가 조금 안정이 된다.
밤이 되어도 역시 설사증세가 없다. 이렇게 이어서 평안하니 다행이다.
昨夕 以泄瀉苦證 命吏輩買生薑 橘皮 黃茶 淸蜜水 煎服二次 腹部少安
夜亦姑無泄證 繼此得安則幸矣
十六日甲午
- 頤齋亂藁
저녁에 황차를 사서 문생 덕연이 앓고 있는 곳으로 보내려고 하였다.
듣자니 병세가 조금 덜하다고 한다. 아마도 길을 나섰다가 찬기운에 감기가 든 것일 것이다.
夕間始買黃茶 送于文生德演病所 聞其病勢稍減蓋路憊寒感也
二十四日壬申
출전:頤齋亂藁
또 식당동의 문생 덕연을 방문하였다. 이 사람은 큰 병이 들어서 불쌍하다.
그래서 문안을 하면서 약을 사다가 주려고 하였지만, 황차를 얻지 못하여 먼저 소엽을 보냈다.
又訪文生德演於食堂洞 此君亦大病可憐 故往問 因爲買藥贈之 而黃茶未得 先送蘇葉
二十三日辛未
출전:頤齋亂藁
고직이 이세형이 생강을 사가지고 왔고 황차 한 봉지를 서명응가에서 얻었다. 세형이 서명응가의
고직이이기 때문이다. 즉시 탕약을 다려서 뜨겁게 마셨다.
庫直李世亨 以買薑 又得黃茶一封于徐台命膺家 世亨其家廳直故也 卽時煎湯藥納 乘熱服
十三日丙辰
출전:頤齋亂藁
고직이에게 황차와 생강을 찾아서 탕을 달이게 하다.
가슴에 쌓였던 기운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예방하는 뜻이다.
나는 날씨가 찬데 옷을 얇게 입고 장중의 찬곳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었고,
시장기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하여 얻은 돈으로 들어온 배 4개를 응경과 같이 먹었다.
이 찬 것이 배로 들어가 냉병을 만든 것이 아닐까 두렵다.
令庫直 覓得黃茶幷薑煎湯 將以發胸膈積氣以防成痢之本耳 盖余天寒衣薄
頃於場中 久坐冷處 又無療飢者 適使令得金者 追入供生梨四介
與應卿分吃 恐此物以冷入腹 因成冷病耳
十二日乙卯
출전:頤齋亂藁
오후에 가슴에 염증이 엉겨서 통증이 오고 오한이 들다.
급하게 황차잎과 생강을 사서 달여서 마시고 따뜻한 온들에서 조리를 하다.
是午 始有胸隔痰氣凝結成痛 强赴直中 亟買黃茶葉及生薑煎服 更令煖炕調理
二十二日癸巳
출전:頤齋亂藁
황차잎 두 첩을 사다. 값은 1전 1분이다. 다려서 마시고 땀을 내다.
아침에 밥을 먹을 수 없다.
買黃茶葉二貼 價一錢一分 煎服取汗 朝不能飯
二十五日壬辰
출전:頤齋亂藁
차서(茶書)에 또 편갑(片甲)이란 것이 있는데 이른 봄에 딴 황차다.
차실은 배가 오자 온 나라 사람들이 황차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창과 가지가 이미 자라, 결코 이른 봄에 딴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표류해온 사람들이 과연 그 이름을 그와 같이 전했는지는 모르겠다.
흑산도에서 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정유년(1777, 정조 1) 겨울에 바다로 표류해온 사람이 아차(兒茶) 나무를 가리켜 황차라고 했다고 말했다.
아차는 서울 지방에서 이른바 황매(黃梅)라고 하는 것이다.
황매는 꽃이 노란데, 진달래보다 먼저 핀다.
잎은 삼각형으로 산(山)자 모양처럼 세 줄기의 잎이 달렸다. 모두 생강 맛이 난다.
산골 사람들이 산에 들어가면 쌈을 싸서 배불리 먹는다.
각 고을에서는 그 여린 가지를 따서 달여 손님을 대접한다.
그 가지를 꺾어 취함은 두 줌쯤 되는 것을 주재료로 한다.
차에 섞어 달여 마시면 감기나 상한(傷寒) 및 이름 모를 질병으로 며칠 된 것도
땀이 나면서 반드시 신통한 효과가 있다.
어찌 또한 일종의 별다른 차이겠는가?
茶書文有片甲者, 早春黃茶. 而舶茶之來, 擧國稱以黃茶. 然其槍枝已長,
決非早春採者. 未知當時漂來人, 果傳其名如此否也. 有自黑山來者,
言丁酉冬漂海人指兒茶樹, 謂之黃茶云. 而兒茶者, 圻內所謂黃梅也. 黃梅花黃,
先杜鵑發. 葉有三角如山字形, 有三筋莖葉. 皆帶薑味. 峽人之入山也, 包飽以食.
各邑取其嫩枝煎烹, 以待使客. 且其枝截取, 二握爲主材. 和茶煎服,
則感氣傷寒及無名之疾, 彌留數日者, 無不發汗神效. 豈亦一種別茶耶.
----이덕리의 <기다>에서. 정민 역
여기서 편갑이란 표현 속에서 갑옷의 이미지를 연상하면 두툼하고 튼실한 군산은침의 차일 가능성이 보이다. 즉 1644년 김육의 <유원총보>에 나오는 ‘조춘황차’의 기록을 이덕리 또한 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를 타고 온 황차가 ‘조춘황다’ 즉 ‘황아차’가 아니라, 기와 창이 이미 다자란 ‘황대차’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황차 사건을 주관하였던 사람은 서지수(徐志修1714-1768)이다. 이 서지수가 속한 달성서씨(達城徐氏) 문중을 중심으로 황차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서지수와 같은 가문의 서명응의 집에서 황차를 구했다는 사실은, 황차를 쟁매를 할 때 서명응가에서도 차를 구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황차의 효능에 대해 많은 이해를 가지고 있던 그의 형제인 서명선은 영조에게 황차를 권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서명응과 그의 아들인 서호수 서지수의 형제로 또 서지수의 아들인 서유구, 서유구의 형제인 서유본의 아내인 빙허각의 이씨로 이어지는 이 가문과 얽힌 황차 관련 기록은 우리차문화사에 황차가 끼친 충격이 어떻게 흡수되었는 가를 보여준다.
그 이후 조선의 연행사절단의 눈에도 중국의 황차가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1802년의 <계산기정(薊山紀程)>에는 중국의 요동과 심양에서 주로 황차를 마신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있다.
차에는 갖가지 종류가 있어 그 이름은 하나만이 아니다.
용정차(龍井茶) 같은 것이 상품인데, 오직 항주(杭州)에 1묘(畝)의 밭이 있어 씨를 받는다.
또 은창차(銀鎗茶)ㆍ송라(松蘿)ㆍ벽라춘차(碧蘿春茶)ㆍ기창(旗鎗)ㆍ식이(式彛)ㆍ대엽(大葉)ㆍ향편(香片)ㆍ상담(湘潭)ㆍ노군미(老君眉)ㆍ감람차(橄欖茶)ㆍ보이차(普洱茶)ㆍ백호차(白毫茶)ㆍ청차(靑茶)ㆍ황차(黃茶) 따위가 이것이다.
황차는 연경(燕京) 사람 중에는 마시는 자가 없고 오직 요동과 심양(瀋陽)의 시장에서만 팔며, 또 동팔참(東八站)은 차가 귀한 곳이라, 혹 쌀을 볶아 차를 대신하니, 그것을 노미차(老味茶)라 한다.
茶有各種。其名不一。如龍井茶是上品。只杭州有一畒田取種。
又銀鎗茶,松蘿,碧蘿春茶,旗鎗,式彝,大葉,香片,湘潭,老君眉,橄欖茶,
普洱茶,白毫茶,靑茶,黃茶之屬。是也。黃茶則燕人無吸者。只賣於遼瀋市上。
又東八站茶貴處。或以炒米代之。謂之老味茶。
薊山紀程卷之五 음식
1832년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燕轅直指)>에는 중국에서 황차가 일상의 차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군산은침계열의 어린잎으로 만든 황소차 보다는 잎이 다자란 큰 잎의 황대차가 보편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차의 질도 한 가지가 아니다. 일상에 쓰는 것은 황차(黃茶)ㆍ청차(靑茶)이고, 다음은 묘편차(杳片茶)요, 가장 진귀한 것으로는 보이(普洱)인데, 가짜도 많다.
절강(浙江)에서 나는 국차(菊茶)는 맑은 향기가 매우 좋고, 악라관(鄂羅館), 회자관(回子館)에서 대접받은 차는 향미(香味)가 특이했다.
이는 서양(西洋)에서 나는 것인데 모양이 마치 회향(茴香)과 같다.
동팔참(東八站)처럼 차가 귀한 곳에서는 쌀을 볶아서 대용하기도 하는데 이를 노미차(老米茶)라고 한다.
이렇듯 황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기존의 차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이규경(李圭景)의 <도다변증설>에서는 황차가 들어오고 난 뒤에 달라진 우리나라 차문화 풍속도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연경의 차품은 참으로 성행하고 있다.
보이차가 제일이고 백호차가 제이 청차가 제삼 황차가 제사이다.
황차가 매번 우리나라로 많이 들어와서 날마다 마시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사대부가와 부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중원에서 날마다 사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나라에는 차를 마시는 기호(癖)가 없다는 것을 알겠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차 마시는 것은 신라시대에서 시작되었다.
今燕都茶品之藉藉盛行者。普洱茶爲第一。白毫茶爲第二。靑茶爲第三。黃茶爲第四。
而黃茶每多流入我東。爲日用所飮。然惟在士大夫家及富豪者所用。
而不如中原之以爲恒用也。東之無癖於茶。又可知也。然東人飮茶。亦自新羅爲始。
이규경의 《도다변증설>>에서
이와 같은 황차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조선후기의 대표적 언어사전이라고 할 1820년대 유희(1773-1837)의 <물명고(物名考)>에서는 황차를 쉔 잎(老葉)을 따서 만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유희는 <태교신기>를 쓴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1739~1821)의 아들이고, 사주당 이씨는 빙허각 이씨의 외숙모가 된다.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년~1824년)는 ‘황차로 염색을 하여 약대색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몸소 체험’하였다는 것은 황차를 염료로 쓸 정도로 비교적 흔했다는 것을 말한다.
사실 빙허각 이씨는 서유본(徐有本 1762 ~ 1822)의 아내인데, 황차에 관한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달성서씨의 문중이었기에, 그들의 가문에서 구입하였던 황차로 염색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유희의 <물명고>와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 나오는 황차는 오늘날 우리가 잘 못 쓰고 있는 산화발효차인 황차가 아니라 민황을 거친 후발효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황차변증설(黃茶辨證說) - 3.황차의 유입|작성자 algacha
황차변증설(黃茶辨證說) - 4.한국적 황차의 탄생 제다 문화사
2010.03.02. 17:18
http://blog.naver.com/algacha/101202726
4.한국적 황차의 탄생
영정조시대에 몰아닥친 중국 황차 열풍은 우리지식인들에게 차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한다. 즉 차생산을 통한 나라 재원의 확보이다. 이덕리의 <기다>에 처음 제기된 이 차산업 육성계획은 다산 정약용을 통해 보다 구체화 되고 다산이 강진을 떠난 뒤에도 사찰과 민간에 이어져서 재화를 구하는 다업이 성립한다. 그것의 발단이 바로 황차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조재삼(趙在三·1808~1866)의 <송남잡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해남에는 옛날부터 황차가 있었다.
세상에서 아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오로지 정약용 만이 알 따름이었다.
하여 이름을 정차(丁茶) 또는 남차(南茶)라고 한다.
이 기록에서 등장하는 정차(丁茶)와 남차(南茶)는 하나의 문맥으로 파악된다. 박영보(朴永輔, 1808-1972)의 <남차병서(南茶竝書)>에 등장하는 초의선사의 떡차가 바로 정차이고 남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병서에 해당하는 부분만 살펴본다.
남차는 호남과 영남 사이에서 난다. 초의 선사가 그 땅을 구름처럼 노닐었다.
다산 승지와 추사 직각과 모두 시문으로 교유함을 얻었다.
경인년(1830) 겨울에 서울 지역을 내방하며 수제차 한 포로 예물을 삼았다.
이산중이 이를 얻어 돌고 돌아 내게까지 왔다.
차가 사람과 관계됨은 금루옥대(金縷玉帶)처럼 또한 이미 많다.
맑은 자리에서 한 차례 마시고 장구(長句) 20운을 지어 선사에게 보내니,
혜안으로 바로 잡고, 아울러 화답해 주기를 구한다.
南茶湖嶺間産也. 草衣禪師, 雲遊其地,
茶山承旨及秋史閣學, 皆得以文字交焉.
庚寅冬, 來訪于京師, 以手製茶一包爲贄.
李山中得之, 轉遺及我.
茶之關人, 如金縷玉帶, 亦已多矣. 淸座一啜, 作長句二十韻, 以送禪師,
慧眼正之, 兼求郢和.
이 정차 또는 남차로 기록된 조선의 새로운 차는 이규경(李圭景 1788-?)의 <도차변증설(荼茶辨證說)>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체화된다.
교남 강진현의 만불사에서는 차가 난다.
정다산 약용이 유배를 갔을 때 찌고 말린 뒤 덩이를 지어 작은 떡을 만들었는데
이름을 만불차(萬佛茶)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가기 전 그곳에서는 과연 어떤 차문화가 형성되고 있었을까? 먼저 이야기 하여야 할 것은 두륜산 대둔사와 만덕산 백련사를 중심으로 한 사찰의 음다풍속이 있었고, 서울에서 유배를 온 사대부들의 독특한 차문화가 있었다. <기다>의 주인공인 이덕리도 그 유배온 사대부의 한 부류로 옥주 (沃州) 즉 진도에서 주로 유배생활이였다. 이번에 소개하는 조태채(趙泰采 1660년-1722년)는 이덕리 보다 먼저 진도로 유배를 온 차인이었다. 그의 ‘영다(詠茶)’ 시에 진도의 유배생활 속에서도 차생활을 즐긴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중국의 차는 송나라에서 시작하였는데
대소용단이 한가지가 아니라네
中州有茶始於宋。大小龍團非一種。
정위가 앞서고 채양이 뒤에서 다투어 공납을 하니
무이차와 양선차가 다투어 공납을 공납을 하였다네
前丁後蔡競投進。武夷陽羨爭來貢。
왕공과 오로지 지존의 나머지에 적합하였으니
귀하게 여긴것은 경장수와 같지 않을라네
王公惟合至尊餘。貴之不啻瓊漿如。
뒤에 이 물건이 천하에 두루퍼졌으니
좁쌀알갱이 같은 황금싹은 수레에 실려가고
後來此物遍天下。粟粒金芽載以車。
푸른구름같은 차향기는 방사의 주방을 감돌고
맑은 연기는 그윽한 사람의 화로에서 흩어지지 않네
碧雲長繞方士廚。淸煙不散幽人爐。
삼청궁의 아름다운 풀을 흠모할 필요없으니
구절초의 신령스런 뿌리가 어찌 이만 할까?
三淸瑤草不必羨。九節靈苗何足須。
내가 연경의 시장에 가서 몇광주리를 사왔으니
때때로 달여마시니 얼찌나 맑은 향기가 나는지
我於燕市得數筐。有時煎喫何淸香。
한 종지 마시니 목마름을 풀어주고
두 종지 마시나 마른 창차즐 풀어주네
一鍾能令解渴吻。二鍾能得潤枯膓。
가슴속에 가득한 편안하지 않은 기운을 내려주니
아름다운 술이라도 어찌 이 맛에 당할 손가
胸中降盡不平氣。美酒安能當此味。
만약 이상한 그 뿌리를 동쪽 우리나라로 가져오면
마땅히 인삼과 그 귀함을 다툴 것인데
若使異根移東土。宜與三稏爭其貴。
오래마신다고 나이야 늘릴 수 없을지 모르지만
자주마시면 신선과 통할것이네
久服雖不得遐齡。頻飮自可通仙靈。
남녁 내려온 이 곳에서 가장 어울리고
나의 고민을 부숴주고 나의 비린내를 씻어주네
南來惡地最相宜。破余孤悶滌余腥。
그대 담배가 담을 치료하는데 기특한 효과가 있다마소
또 율무가 장기를 다스리는 좋은 약이라고도 마소
君莫言煙草治痰有奇效。又莫言薏苡勝瘴爲良料。
나는 차노래를 지어 차의 공덕을 노래할지니
짧은 글로는 그 묘함을 다 할 수 없을 것이네
我作茶歌頌茶功。短篇不能盡其妙。
<이우당집 권지이二憂堂集卷之二> 영다(詠茶) 전문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강진과 해남의 일원에는 조태채, 이덕리,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사대부들의 차생활이 호남지방의 차문화형성 배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정차 또는 남차로 이어지는 강진과 해남의 황차는 어떤 모습이였을까? 중국 당나라 식 제다법을 그대로 전승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나라 제다법은 쪄서 찧어서 성형을 한 뒤 불에 쬐여 말리는 방법을 하고는 있지만, 조선에서는 햇빛에 말리는 방법을 채택한다. 이 방법이 정약용에 의해 구증구포(九蒸九曝) 또는 삼증삼포(三蒸三曝)의 방법으로 변형되면서 조선의 특이한 풍미를 갖춘 차로 조선차문화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떡차제다법의 완성자는 후대의 초의선사가 되고, 초의차 또는 보림차라고 불리면서 19세기 차문화의 꽃을 피운다. 1882년, 마침내 조태채가 예견한대로 인삼과 견주어 그 귀함을 다툴 조선의 차, 보림차가 영선사 김윤식(金允植 1841-1920)에 의해청나라의 관원들에게 그 품격을 자랑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떡차였다.
申刻還寓, 以土産, 送與天津海關道軍機所南局諸大員。海關道紅蔘二斤·白蔘二斤·成川紬二疋·韓山細苧二疋·砑光各色箋二十張·各樣團扇四柄·海墨二十笏·密篦二十枚·淸心丸二十個·奎章全韻一卷。
劉鄕林·王筱雲, 紅白蔘各一斤·成川紬一疋·東筆十枚, 海墨十笏, 寶林茶五十五圓·各樣團扇四柄·密篦十枚·淸心丸十箇·奎章全韻一冊。顧廷一, 紅蔘一斤·韓山苧一疋, 餘如前, 小奎韻一本 共八種。
陰晴史上 高宗 19年(西紀 1882)
十四日 東局에饌物贈呈
潘梅園來訪, 自保定, 日前還局, 南局王筱雲·牛星齋來訪, 軍機所顧廷一來訪, 許漢 (涑) 文今日亦自保省還云, 送遺土産東局諸大員。許涑文·潘梅園·文芝軒·吳薇尹, 紅白蔘各一斤·唐津絹一匹·東筆十枚·海墨十笏·寶林茶五十五圓·各樣團扇四柄·密篦十枚·淸心元十枚·奎章韻一本。
陰晴史上 高宗 19年(西紀 1882)
그러나 이 떡차가 황차와 구분되는 다른 차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의 <호남사종>에 등장하는 황차가 호남의 4가지 보물이라고 기록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작설차의 어린 잎의 기호도에서 대숲에서 자란 죽로차의 새로운 맛에 조선 사대부들이 열광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차를 여러번 찌는 과정에서 찻잎의 색이 누렇게 변한 것이기에 중국의 대중적인 차인 황대차와 같이 유사한 잎으로 만드는 죽로차에 황차라는 이름을 붙힌 것일 수도 있다.
강진(康津) 보림사(寶林寺) 대밭의 차는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이 체득하여 절의 승려에게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은 보이차(普洱茶) 못지않으며, 곡우(穀雨) 전에 채취한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이는 우전차(雨前茶)라고 해도 될 것이다. 해남(海南) 등지에 생달나무가 있다. 열매에서 기름을 취하여 응고시켜 초를 만들면 품질이 기름초[膩燭]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부녀의 유종(乳腫)을 치료하는 약으로도 쓴다. 이 또한 정열수(丁洌水)가 고안한 방법이다. 제주(濟州)에서 나는 수선화(水仙花)는 추사(秋史)가 처음 알았다. 올바른 방법으로 키우면 강남(江南)에서 나는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본토에서는 오색화(五色花)가 피지만 바다를 건너면 색이 변하고 만다. 또 황차(黃茶)를 취하는데, 연경에서 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히 괜찮다.
<임하필기> 순일편 호남사종 한국고전번역원 역
때론 죽로차로 때론 황차로 등장하는 19세기의 차문화의 현장 속에서, 오횡묵(吳宖黙1834~?)에 의한 우리차의 재발견 또한 놓칠 수 없다. 밀양에서 발견한 황차품종이다.
十七日辛亥
洪在贊座首差出官園花卉零星多空曠處是日命諸吏廣未各種裁埴成列緣
墻西北無復片隙密陽石骨山西谷寺有赤松實如櫻桃皮幹皆赤葉如柏
體如松又其衙後有黃茶品甚佳昨秋兼官時得兩種子以來今春裁種姑未見
芽仙貴之物其果受生於下界耶石醒製一說贈余雖擧夸美爲主而終以箴規之
辭寓勸勉之意故錄之
慶尙道咸安郡叢鎻錄
밀양 황차의 씨앗을 거두어 들였다는 <총쇄록>의 기록과 1896년 지도군수로 부임하면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전철황다(煎啜黃茶)>의 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차가 녹차라는 표현이 아닌 황차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쪄서 떡차로 만들어 진 것이나, 또 다른 제다법으로 즉 솥에 덖어서 만들어 지는 차에 대한 통칭이 작설차에서 황차로 전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 지도진이 군치소로 승격되던 1896년 완도도 군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지도군은 나주, 영광, 부안, 만경, 무안 등 5개 군 117개 섬으로 이루어진 16개 면이었다.
호남의 절반은 바다로 둘러싸여서
그 풍토에 장기를 두루 만나네
湖南半是海之沿 風土頻逢匝瘴烟
늙은 나는 밤마다 위를 다스리기 어려운데
조카는 날보고 아침 죽을 줄이라고 하였네
老我太難調夜胃 阿咸云又減朝饘
그 해 누군가에게서 황차씨앗을 얻었는데
오늘 처음 진찰하자 통증이 없어졌다고 하네
當年誰得黃茶種 今日初醫白痞顚
안타깝게도 이곳 사람들은 차를 사랑할 줄 몰라
가을이 되면 전부 땔감으로 베어 낸다네
可惜居人不解愛 秋來全付斫薪邊
<총쇄록(叢鎖錄)>16권의 전철황차(煎啜黃茶) 전문
오횡묵이 황차씨앗을 거두어 직접 심고 주목하였던 밀양 황차는, 역시 조선후기에서 근대의 차문화사의 공백을 이어주는 기록을 많이 남긴 이유원에게서도 확인된다.
그윽한 대나무의 창 그늘 내 돌아오기 기다리고
洛城의 봄꿈은 희미해 진다
幽竹窓陰待我歸 洛城春夢轉依微
어떻게 한잎 청량한 맛을 오게 해
흉금을 씻고 어제까지가 글렀음을 알게 할까
何來一葉淸凉味 滌了胸襟悟昨非
그 둘(其二)
짤막한 아이가 분주히 이름난 샘을 길으니
세로 다관 가로 솥 앞뒤로 섞이고
短童奔走汲名泉 竪罐橫鐺錯後前
심양 저자와 사천의 차상자가 오히려 퇴보하니
이로 쫓아 정은 늙은이가 수명을 늘이는것을 알겠네
瀋肆川箱猶退步 從知貞老以延年
정은상공이 밀양황차를 준 것에 감사함(謝貞隱相公贈密陽黃茶)
이 글에서 貞隱相公이란 대원군 집권때인 1872년 좌상(左相)에 임명된 강노(1809~1887)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차의 명칭의 연장선에서 1929년에 간행된 <김해읍지(金海邑誌)>에 등장하는 황차 또한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산화발효차가 아닌 찐 차일 가능성과 함께, 작설이란 이름대신 그냥 황차라는 대표적 호칭으로 지리잡고 있던 시기의 작설과 죽로차를 오늘에 이어주는 과도기적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황차 금강곡에 있다. 일명 장군차라고 한다.
黃茶 在金剛谷 一名將軍茶
<김해읍지> 토산조
[출처] 황차변증설(黃茶辨證說) - 4.한국적 황차의 탄생|작성자 algacha
황차변증설(黃茶辨證說) - 5.글을 마치며 제다 문화사
2010.03.02. 16:36
http://blog.naver.com/algacha/101199645
5. 글을 마치며
황차가 ‘구증구포’ 또는 ‘삼증삼포’의 여러번 찌는 과정에서 생긴 탕색과 차엽 색상의 변화에서 생겨난 개념에 의한 것임을 여러 기록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황차란 명칭에는 중국차의 거센 도전 속에서 죽로차라는 차재배 생태환경의 변화를 통해 농번기를 피하여 비교적 늦게까지 찻잎을 수확하고 구증구포라는 제다기술의 혁신으로 새로운 차문화로 응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이덕리, 정약용, 초의선사, 다송자등의 조선사대부와 승려들의 합작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작설이라는 어린 찻잎으로 만들어지는 차에서 죽로차라는 비교적 큰 찻잎으로 늦게 까지 만들어지는 차를 수용하는 현상을 찾을 수 있었다.
조선의 차에 대한 이 새로운 개념을 성립하면서, 조선차문화의 새로운 모색을 찾아나가면서 당시 조선지식인을 사로잡았던 보이차의 열풍까지도 잠재우고 있었으며, 당시 차의 종주국이라고 할 중국에
보림떡차를 선물할 정도로 그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 해남의 황차, 정다산의 정차 또는 남차라는
새로운 개념의 차가 호남의 사찰과 사대부가와 민중들사이에서 만들어저서 한국차문화사의 일대혁신을 가져왔다.
그런데 요사이 우리 둘레에서는 이 독특하고 자랑할 만한 황차가 홍차 유형의 발효차에게 이름을 내어주고 정체불명의 차가 되고 있다. 빙허각 이씨가 염색을 하였던 황차와 다산의 일쇄차를 산화발효차로 소개하는 과오가 우리 발효차의 개념을 잡는데 혼란을 빚게 한 것으로 보인다.
즉 다산의 구증구포차가 떡차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일쇄의 개념을 위조와 건조의 동시개념으로 보았지만, 구증구포의 ‘포’가 포쇄(曝晒)의 포와 같은 개념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다산의 일쇄차가 떡차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포쇄란 말은 흔히 빨래를 한 뒤 빨래를 햇빛에 널어 말리는 ‘푸새’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구증구포와 구증구쇄가 다산 떡차의 핵심이고 우리 황차의 독특한 맛의 비밀이었다. 또한 탕색이 붉게 나는 차를 제다법의 근거하지 않고 같은 차로 분류를 하였다. 즉 산화효소에 의한 발효차와 미생물에 의한 후발효차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발효차라고 하여 혼란은 더욱 야기된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화개, 악양, 곡성, 구례, 광양 등지에서 만들어지던 홍차형 발효차에 황차라는 명칭을 부침으로써 생긴 부작용이다. 우리차의 다양한 표정을 찾는데 일조를 한 정영선 선생의 아래의 글은 20여년 우리가 외면한 우리 전통차의 명맥을 이어준 소중한 접근이지만, 제다공정에 있어 제다에 대한 오해는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정동리에 사는 정학녀(정학녀. 1985년 당시 92세)할머니와
다른 여러 할머니들이 만든 발효차이다.
찻잎을 따서 먼저 온돌방에 발효시킨 후 손으로 싹싹 비벼 그늘에 말린다.
많은 차를 비빌 때는 멍석에 비비며 대개 그날 중으로 제다를 끝낸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과 전남 곡성군 옥과면(옥과차)에도 같은 제다법이 이어져 왔으며
세차와 중차가 있다.
여기서 ‘찻잎을 따서 온돌방에서 발효’를 시킨다는 것은 한국형 가온위조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 공정을 발효라고 한 것에는 제다전문용어로서는 적당하지 않다.
그리고 ‘손으로 싹싹 비벼’는 오늘날의 유념의 공정에 해당하고, 지속적인 비비는 동작 속에서 속성
산화발효가 일어나고, ‘그늘에서 말린다’에서 발효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이 기록의 전체 공정을 살펴보면 홍차제조공정과 일치한다. 단지 홍차의 경우 충분한 발효를 촉발하기 위해 온도와 습도가 필요한데, 우리 민간의 발효차 제다법은 온도와 습도가 충분하지 못해 발효가 충분하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홍차형 발효차란 새로운 개념을 우리의 발효차에 적용시켜 본다.
이 발효차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 초의선사의 <동다송>은 우리나라 19세기 발효차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시한다. 정다산의 차에 관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초의선사가 정다산의 황차를 모를 리 없다.
칠불사 선원에서 마시는 붉은 탕색이 우러나는 차는 분명 다산의 일쇄차와는 다른 갈래의 차였다.
황차로 만들어진 떡차에 관한한 어느 정도 완성단계 있던 초의선사에게 칠불선원의 차는 낯선 차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영선 선생이 경남 하동군 악양군 정동마을에서 만들어진 발효차에 정동황차라고 이름 붙힌 이후, 이 홍차형 발효차는 2,000년대에 들어서서 황차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기 시작한다.
그 이전만 하여도 이 고장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황차라는 말을 알지 못하고 단지 ‘잭살’, ‘작살’, ‘잭설’이라는 말로 차나무와 찻잎 그리고 가공된 찻잎, 탕으로 우려낸 차탕까지 모두 한 말로 사용하였다.
이 홍차형 반발효차를 잭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 또한 적확한 표현은 아닌듯 하다. 이제부터라도 이름을 바로 잡아 우리 차의 다양한 표정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출처] 황차변증설(黃茶辨證說) - 5.글을 마치며|작성자 algac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