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조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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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BC18-AD28 |
| 업 적 : |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돕게 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라 함.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는데,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마침내 비류가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이 올 때 즐거이 따라왔다 하여 나중에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夫余)를 성씨로 사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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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조왕묘 : | 경기도..광주 남한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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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루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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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28-77 |
| 업 적 : | 서기 33년에 남부 주군을 시켜 벼농사를 짓게 함. 63년에 지금의 청주인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영토를 넓히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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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루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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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77-128 |
| 업 적 : | 『삼국사기』의 기루왕 치세에 대한 내용에는 천문이변, 지진, 큰 가뭄, 태풍, 기상이변 등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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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루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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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128-166 |
| 업 적 : | 재위 5년인 해(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음. 155년에 신라의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하다 들켜 도망오자 신라왕이 돌려달라 청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아 신라와 충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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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고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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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166-214 |
| 업 적 : | 재위 23년인 188년에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 다음해에 신라군과 구양(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서 싸우다가 패배. 또한 190년에는 신라의 서쪽 국경지대에 있는 원산향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을 공격한 뒤, 추격해 오는 신라군을 와산(지금의 충청북도 보은)에 서 크게 격파, 204년에는 신라의 요차성(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을 함락시키고 성주 설부(薛夫)를 전사시킴.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210년에 적현(赤峴), 사도(沙道) 두 성을 쌓고 동부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함. 214년에 북부출신 진과에게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하게 하여 이를 빼앗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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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수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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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214-234 |
| 업 적 : | 전해 내려오는 자료가 거의 없음. 백제의 제6대왕으로 귀수왕(貴須王)이라고도 한다. 214년부터 234년까지 재위. 키가 7척에 풍채가 빼어나 비범했다고 하며, 온조계(溫祚系) 왕족 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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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반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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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234 |
| 업 적 : | 전해 내려오는 자료가 거의 없음. 생몰년은 알려지지 않으며 다만 백제의 제7대왕이라는 것만 알려진다. 아버지는 구수왕으로 234년에 즉위하였지만, 곧 폐위된 것으로 전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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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이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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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234-286 |
| 업 적 : | 중앙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남쪽 평야지대에 논을 개간하여 농업생산을 독려. 또한, 마한과 연합하여 대방군을 공격하였고 그 결과 마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가게 됨. 영역확대에도 크게 주력하여 북으로 패하(浿河 ; 오늘날의 예성강), 남으로 웅천(熊川 ; 오늘날의 안성ㆍ성환), 서쪽으로 대해(大海 ; 오늘날의 서해), 동쪽으로 주양(오늘날의 춘천)에 이르는 영역을 확보. 서진(西晉)과 교섭을 강화하여 사신을 파견하고 아들 책계왕(責稽王)을 대방왕녀와 혼인시켜 중국 군현과 우호관계를 갖기 위해 노력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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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계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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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286-298 |
| 업 적 : |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대방태수가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 이를 도왔고, 그 결과 고구려와 관계 악화. 그래서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쌓음. 중국의 서진이 '8왕의 난(291~306)'을 거치고, 5호의 침입으로 혼란한 상태가 되자 백제가 중국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백제와 중국 군현과의 관계가 악화. 즉위 13년인 298년에 중국 군현과 맥인(貊人)들의 연합공격을 받아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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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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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298-304 |
| 업 적 : | 낙랑 등 한군현 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펼침. 그리하여 304년(분서왕 7)에는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격하여 차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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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류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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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304-344 |
| 업 적 : | 재위 9년인 312년에 해구(解仇)를 병관좌평으로 임명해 지지기반으로 삼음. 또한, 비류왕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재위 18년(321년)에 서제인 우복(優福)을 내신좌평으로 삼아 지배 세력을 재편성. 17년(320)에 궁중에 활쏘는 대를 만들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활쏘기 연습을 하는 등 군사훈련도 강화. 한편, 비류왕대에는 신라에서 백제에 사신을 먼저 보내 화친을 맺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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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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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344-346 |
| 업 적 : | 전해 내려오는 자료가 거의 없음. 고이왕계인 분서왕의 맏아들로서 아버지 분서왕이 죽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초고왕계인 비류왕이 즉위하였다. 기록에는 계왕이 왕위를 잇지 못한 이유를 나이가 너무 어려서라고 전하고 있으나, 이는 백제 왕실 내의 세력 다툼의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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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초고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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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346-375 |
| 업 적 : | 근초고왕은 즉위와 함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여 초고왕계의 왕위계승권을 확립. 이를 위해 대내적으로는 진씨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세력으로 삼았고, 지방토족들에 대한 통제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지방통치 조직을 정비하고, 각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함. 그리고,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마한의 잔존세력을 복속하여 전라도지방 전역을 지배하고 낙동강 서쪽 유역의 가야에도 힘을 행사해 조공을 바치게 함. 북으로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시작해 태자 근구수와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의 옛 땅을 차지하는 성과를 올림. 요서지방까지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하여 요동지방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면서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삼음. 일본열도 지역으로도 세력을 뻗쳐 그 지역의 백제 계통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 고대 무역활동을 활발히 펼쳐 백제를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함. 백제문화를 해외에 전하는 데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으며, 박사 고흥을 시켜 『서기』라는 국사책을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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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구수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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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375-384 |
| 업 적 : | 근구수왕은 즉위 이후, 남하하는 고구려에 대한 공격과 수비를 적절히 구사하며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 재위 3년(377년)에 몸소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공방을 벌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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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류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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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384-385 |
| 업 적 : |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한 왕으로, 백제에서 불교가 시작됨. 다음해 2월에 한산에 불교 사찰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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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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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385-392 |
| 업 적 : | 즉위 2년인 386년 봄, 진사왕은 고구려와 말갈의 침공에 대비하여 서북부 전선(개성 북쪽 지역)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고, 진가모 등을 보내어 도곤성(都坤城)을 함락시킴. 진사왕 8년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4만 병력으로 백제 북쪽 국경의 성들을 함락시키며 몰려와 한강 북쪽의 성 10개와 서해의 요충지인 관미성 까지 고구려에 점령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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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신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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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 위 : | 392-405 |
| 업 적 :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남진하는 시기로, 즉위 직전인 392년 7월과 10월과 아신왕 5년인 396년에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백제가 거듭 패배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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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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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405-420 |
| 업 적 : |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고, 408년(전지왕 4) 상좌평(上佐平)의 직제를 처음으로 제정하고 여신(餘信)을 이에 임명하였다. 416년 동진(東晉)의 안제(安帝)로부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에 책봉되고 418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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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이신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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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420-427 |
| 업 적 : | 중국대륙의 세력과 연결하여 백제가 장악한 황해연안의 해상무역권을 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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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유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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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427-455 |
| 업 적 : |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 송나라로부터 사지절도독(使持節都督) 백제제군사(百濟諸軍事) 진동장군(辰東將軍) 백제왕 이라는 칭호를 받음. 신라에 화친 사절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음으로써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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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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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427-455 |
| 업 적 : | 쌍현성과 청목령을 강화하고 북한산성에 군대를 증강 배치하여 고구려에 맞서기 위한 준비를 꾸준히 해 나감. 탁발씨가 세운 북위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북위가 이를 거부하자 조공을 끊어 버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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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주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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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475-477 |
| 업 적 : | 한강유역 일대를 빼앗긴 직후에 즉위하여 웅진(熊津)으로 천도. 왕자로 있을 때는 부왕(父王)을 보좌하여, 최고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역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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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근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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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477-479 |
| 업 적 : | 2년에 해구는 신흥세력인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함께 대두성(大豆城)에서 반란을 일으킴. 해구가 난을 일으키자 한성시대부터 귀족세력으로 자리잡았던 진씨세력이 이를 토벌한 이후로 백제는 진씨 세력을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 삼근왕은 해구의 반란이 진압된 다음해에 갑자기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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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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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479-501 |
| 업 적 : | 금강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 한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하여 한성에서 이동하여 온 귀족과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이룩. 신진세력들은 그들의 세력기반을 차츰차츰 확대해 나가 동성왕 후기에는 해씨(解氏), 진씨 등 한강유역에서 내려온 옛 귀족을 누르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고 신라의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왕비로 맞이함. 대외적으로 웅진천도 이후 고구려 수군이 서해의 해상 교통로를 막아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에 놓인 상황을 타개하고자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과 외교관계를 재개. 대내적으로 궁실을 중수하고 나성(羅城)을 축조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고 우두성(牛頭城), 사현성(沙峴城), 이산성(耳山城) 등을 축조하여 수도의 방어망을 정비. 또한, 사정성 (沙井城), 가림성(加林城) 등을 축조하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 탐라가 공납을 바치지 않차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무진주(武珍州)까지 친정.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해외경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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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령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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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501-523 |
| 업 적 : | 안정된 왕권을 확립. 왕권에 우호적인 일부 구귀족세력 중 해씨세력과 목씨세력 등용. 집권 후반기에는 인우와 사오 등 신귀족세력을 등용하여 두 귀족세력의 균형을 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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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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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523-554 |
| 업 적 : | 538년(성왕 16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면서 백제의 중흥계획을 실행에 옮김. 사비의 천도로 선왕인 무령왕대의 정치적 안정, 신진귀족세력의 도움, 성왕의 의지가 모여 이루어짐. 관등제를 정비하여 종래의 14관등제에서 16관등제로 세분화. 중앙행정부는 왕실업무를 주로 담당한 내관(內官) 12부와 국가행정업무를 주로 담당한 외관(外官) 10부로 편성된 22부제로 정비. 사비를 상부(上部)ㆍ전부(前部)ㆍ중부(中部)ㆍ하부(下部)ㆍ후부(後部)의 5부로 나눈 5부제로 정비. 지방통치제도로는 종래의 지방통치제도인 담로제를 개편하여 전국을 동방(東方)ㆍ 서방(西方)ㆍ남방(南方)ㆍ북방(北方)ㆍ중방(中方) 등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ㆍ10개의 군을 두는 방(方)ㆍ군(郡)ㆍ성(城)/현(縣)제를 실시. 성왕은 중앙과 지방의 통치제도를 개편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왕권을 강화. 대중국교류는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짐. 일본에 불교 및 백제의 선진문물을 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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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덕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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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554-598 |
| 업 적 : | 전대(前代)의 남조중심의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북조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백제의 국제적 고립을 면하고 동시에 고구려를 견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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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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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598-599 |
| 업 적 : | 재위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재위당시의 역사를 살펴보기는 매우 힘듦. 다만 위덕왕대처럼 귀족들이 정권을 좌우하는 상황이 계속된 것으로 추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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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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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599-600 |
| 업 적 : |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 백제를 진호(鎭護) 하는 5악(五岳)의 하나인 북악(北岳)에 호국사찰인 오합사(烏合寺) 를 창건하고 사비 3산(三山)의 하나인 부산(浮山)에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왕흥사(王興寺)를 창건. 불교의 계율을 널리 확대시키기 위해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림. ⇒ 그의 정책은 큰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재위 2년 만에 죽음을 맞게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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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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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600-641 |
| 업 적 : | 재위 후반기에는 익산지역을 중시하여 이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천도할 계획까지 세움.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이곳에 축조. 제석사(帝釋寺)를 창건. 동방 최대규모의 미륵사를 같은 익산에 창건. 관륵을 일본에 보내어 천문, 지리, 역본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하게 하기도 하여 일본과의 친선을 유지시켜 삼국의 항쟁에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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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자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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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 위 : | 641-660 |
| 업 적 : | 유교 정치사상을 강조하여 취약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함. 즉위 초 국내를 순무(巡撫)하고 죄수들을 재심사하여 사형수 외에 모두 방면(放免)하는 등 적극적인 민심 수습책을 펼침.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신라의 40여 개 성을 일거에 함락시키기도 함. 내부적으로는 인덕정치(仁德政治)를, 외부적으로는 전승(戰勝)을 통하여 그의 정치적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권력기반을 확대시켜나감. 재위 12년까지는 당(唐)나라와는 대체적으로 공존을 모색하고 왜와는 우호관계를 유지. 고구려와는 연화(連和)하여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함. 재위 15년에는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북쪽 변경의 30여성을 점령.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어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던 의자왕과 태자 효를 비롯하여 여러 성들도 모두 항복. 그 결과 백제는 개국한 지 678년 만에 망하고 말았으며, 소정방은 의자왕과 일행을 장안으로 압송하였으며 왕은 그곳에서 병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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