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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 유홍준

보허 步虛 2018. 10. 5. 03:43



추사~혜곡

[추사 김정희]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 유홍준

프로파일청년 2018. 9. 13. 10:31

<딱 하나만>
文字香, 書卷氣


<서장>

★ 우리나라 4대 명필
- 신라 김생, 고려 탄연, 조선 안평대군, 조선 김정희

입고출신(入古出新) : 옛것을 생각하며 새로운 지식을 배양하라.

 [담연재시고] 서문에서 (당대 시인 신석희)
"추사는 본디 시와 문장의 대가였으나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됨으로써 그것이 가려지게 되었다."

조선 3대 다성(茶聖) : 정약용, 초의스님, 김정희


<1장. 월성위 집안의 봉사손>
-  출생 ~ 24세. 1786~1809

1786년(정조 10) 충청도 예산 용궁리에서 출생
- 예산 용궁리에 추사 고택 복원.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저택.
- 추사 고택에는 고조 할아버지 김흥경의 묘소(추사가 심은 백송, 천연기념물 106호)증조 할아버지 김한신의 묘소와 화순옹주의 정려문(남편 월성위가 죽자 14일을 굶어 따라 죽음. 조선 역사 최초의 열녀)이 있음

경주 김씨
-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순조 때 수렴청정)가 추사의 12촌 대고모
- 정순왕후의 오빠 김구주, 사촌오빠 김관주 등은 추사의 할아버지인 김이주와 같은 항렬 10촌 지간

추사의 출생 설화
- <완당 김공 소전>에는 어머니 유씨가 회임한 지 24개월 만에 추사를 낳았다고 한다. 홍한주[지수염필]을 보면 추사의 아우인 명희는 18개월, 막냇동생 상희는 12개월에 낳았다고 해서, 어머니의 회임 기간이 비정상임을 알 수 있다.

입춘첩 신화
- 여섯 살 때 추사가 쓴 '입춘대길' 글을 보고 북학파의 대가였던 초정 박제가(1750~1805)가 추사를 가르치겠다고 함. 박제가는 추사의 스승이었음.
   "이 아이는 앞으로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만하니 제가 가르쳐서 성취시키겠습니다."
- 번암 체재공 :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스승 박제가
- 박제가는 스승이기는 해도 서출이었기 때문에 대갓집 자제인 추사를 매우 정중히 대했음이 박제가가 추사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남
- 박제가는 연경을 네 차례 다녀왔고, [북학의]의 저자이기도 함. 추사에게 연경의 발달한 문물과 학자들의 학예 활동을 알려주고 꿈을 키우게 함.
- 1801년(추사 16세)에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감
- 1805년(추사 20세)에 세상을 떠남

연경에 갈 기회
- 추사는 1809년 24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됨
- 1809년 아버지 김노경동지부사로 선임되어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갈 기회를 얻음
- 동지사 : 해마다 달력을 받으러 가는 역행(曆行)과 함께 동지를 전후하여 정례적으로 중국에 가던 외교사절
- 자제군관 : 정사, 부사, 서장관 등 고급 외교관으로 하여금 그 직급에 따라 아들, 동생, 조카 중 한 명을 데리고 가서 외국 견문을 익히게 하는 제도


<2장. 감격의 연경 60일>
- 24~25세. 1809~1810

후지쓰가 지카시
- 청조 고증학 연구의 제일인자로 추를 꼽음
- 아들 후지쓰가 아키나오는 부친이 남긴 추사 관련 유물과 책을 과천 문화원에 기증 (추사 박물관) 

규장각 사검서
-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고염무 [일지록]
- '실사구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고증학을 일으킨 청조학의 개조. 1695년에 [일지록]을 펴냄.
- 1778년 이덕무가 연경에서 이 책을 보고 감격

실학
- 성리학의 공리공론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한 줄기였음
- 실학은 유형원, 이익,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경세치용, 이용후생의 대단히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으로, 중국과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학분의 신경향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상적 기류가 청나라에서도 똑같이 일어나 고증학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 홍대용
: 1765년 연행 때부터 한중 문화 교류를 열게 되는 계기를 마련
: 지전설 주장
: 충청도 수촌에 사설 천문대라 할 농수각 세움
: 연행 때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만나 교유 시작
: [을병연행록] [회우록] [담헌연기] 등을 통해 박지원과 그의 제자 박제가, 이덕무, 서상수, 유득공 등이 북학파를 형성하는 길을 열어놓음
- 연행
: 박제가, 이덕무 1778년
: 박지원 1780년
: 박제가, 유득공 1790년
: 박제가 1790년
: 박제가 1801년

[사고전서] 편찬
- 1773년(건륭 38)부터 10년간 361명의 석학을 동원하여 총 3만 6,000책을 4질 제작하여 네 곳의 서고에 보관
- [사고전서] 편찬 목적은 금서를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증유의 학술사업이 되어 전국의 학자들이 연경에 모여 학술을 번창시킴
- 박제가와 친했던 기윤은 편찬의 총책임자였고, 추사의 스승이 된 옹방강도 이 편찬 사업의 담당자였음

★ 추사의 연행
- 1809년 2달 (24세 때)
- 조강(29세)과의 만남이 교유의 시작 (스승 박제가와 교유했던 기윤나빙은 타계 후)
- 조강, 서송을 통해 스승 담계 옹방강(1733~1818, 78세)과 운대 완원(1764~1849, 46세)을 만남
- 완원과의 만남으로 완당이라는 아호 사용
- 옹방강석묵서루 : 희귀 금석문과 진적으로 가득하여 수장품이 8만 점
- 조강, 이정원, 서송, 주학년 등 친구와 선배도 많이 사귐


<3장. 학예의 연찬>
- 25~34세. 1810~1819

완당바람
- 자하 신위, 이재 권돈인, 동리 김경연, 황산 김유근, 운석 조인영, 육교 이조묵, 산천 김명희 등은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
- 우선 이상적, 추재 조수삼, 대산 오창렬, 소당 김석준, 역매 오경석 등 역관들은 추사의 제자가 되어 연경 학계와의 교류를 이어줌
- 우봉 조희룡, 소치 허련, 고람 전기 등 중인 출신 서화가들에게 문인적 이상이 담긴 글씨와 그림을 지도
-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한 학풍과 예술사조가 생겨남

추사의 학예 연찬
- 주로 옹방강과 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짐
- 옹방강의 편지에 추사가 써넣은 '실사구시' 풀이글


사실 밝힘 책에 있고               覈實在書 
이치 따짐 마음속에.               窮理在心
고금을 고증하니                     攷古證今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山海崇深


- 섭지선과의 교유
: 옹방강 문하에서 금석학의 제일인자로 꼽힌 섭지선
: 추사를 좋아했던 헌종이 기거하던 창덕궁 낙선재에 옹방가 글씨의 주련과 섭지선이 쓴 현판이 걸려 있음

★ 북한산 순수비 (99쪽)
- 추사는 과거시험 동방인 조인영과 함께 북한산 순수비를 조사함
- 1816년 7월 한여름, 31세의 추사는 벗 동리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올라 무학대사 전설이 있는 비를 탁본함. (전설의 내용은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오리라'. 무학대사가 한양도읍 터를 물색하기 위해 북한산에 올라오니 한 비석에 이렇게 써 있어 놀랐다는 전설)
-  추사는 그 전설의 비를 다시 더 정림하게 탁본할 필요를 느껴 이듬해 6월, 조인영과 함께 탁본기술자까지 데리고 가서 탁본해 68자를 읽어냄. 거듭 조사하던 추사는 놀랍게도 이 비가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알게됨.
- 추사는 감격적 발견을 기념하여 비석 측면에 자신이 두 차례 다녀간 사실을 이렇게 새겨놓았음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오다. 정축년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아 있는 글자 68개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실사구시
- [한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
- 1818년 33세의 추사는 장년의 최고 명작이자 생애 최대의 대작이라 할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을 쓴다.
- 1971년 대적광전 보수 때 대들보에서 발견되어, 원본은 해인사 성보박물관 보관하고 이를 그대로 베낀 부본과 보수 과정을 쓴 글은 본래 자리에 넣어둠.
- 추사 해서체의 최고 명작이자 기준작


<4장. 출세와 가화>
- 34~45세. 1819~1830

 부친 김노경의 2차 연행
- 1822년. 추사 나이 37세 때 김노경은 동지정사가 되어 2차 연행. 동생 명희가 자제군관으로 동행.
- 오숭량, 등전밀 등과 교유




평양성 고구려 성벽 刻字 탁본, 오경석 탁본, 개인 소장


한문은 '기유(축)년 삼월입일 자차하향 동십이리 물성(구, 하)소형 배?(수)백두 비절의'
번역은 '기유(己酉)년 (혹은 기축(己丑)년) 3월 21일 여기서부터 아래로 동쪽을 향해 12리를

물성(구, 혹은 하)소형(物省小兄) 배?(수)백두가 지휘감독하여 쌓다'이다.



평양성 고구려 성벽돌 刻字,  

가로 36cm 세로 18cm 두께 9cm 보물 642호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평양성 고구려 성벽돌 刻字 해석 ,  중국학자 유희해의 글로 추정.




평양성 고구려 성벽돌 刻字 해석 , 오경석의 글과 인장



평양성 고구려 성벽 刻字 탁본 해석,

유희해의 <海東金石苑>에서 인용함.




고구려 성벽(평양성) 각자 탁본
- 1829년 대홍수로 평양성이 무너졌을 때 성벽 돌에서 흐릿하게 남은 글자가 발견됨. 추사는 그 탁본을 얻어 연경의 유희해에게 보내 함께 고증했는데, 흐릿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 글씨를 고구려 장수왕 때인 기유년(469)이라고 해석함. 이는 훗날 병술(446)이라 새겨진 각자가 나옴으로써 기축년(449)으로 정정되었지만 금석에 대한 추사의 열정을 보여줌.
- 이 기축명 평양성벽 돌은 오경석이 입수하여 그의 아들 오세창이 소장해왔는데 지금은 이화여대 박물관있음

추사와 다산
- 부친 김노경이 평안감사로 임명(1828)되어 평양에 머물던 추사는 중국에서 돌아오는 사신에게 수선화를 얻어 유배에서 풀려나 남양주 여유당에 있던 다산에게 보냄
- "늦가을에 벗 김정희가 향각(평양)에서 수선화 한 그루를 부쳐왔는데 그 화분이 고려자기였다."
여유당전서 권 18
- 추사가 다산 정약용에게 배움을 구하며 자신의 학문세계를 넓혀갔다는 사실은 [완당선생전집]에 실린 다산에게 보년 편지에도 나타남. 추사 집안은 노론의 골수이고 다산은 남인의 간판 격인데 두 석학이 당색을 뛰어넘어 이렇게 학문을 나눔.


<5장.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
- 45~55세. 1830~1840

경전 연구의 평실정상
- 왕희손[황청경해]에 관한 글 한 편을 지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완원은 그 글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다.
   "학해당에서 [황청경해]의 판각이 이미 완성되어 관찰사 하수서가 서문을 써서 내게 보내며 바로잡아주길 청하므로 약간 첨삭하면서 그 마지막 구절에 '더욱 평실정상(平實精詳)함을 본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
평실정상, '평이하고 실질적이며 정밀하고 상세하게'하는 것이 경전 해설의 요체라는 것이다.

유희해[해동금석원]
- 추사를 중심으로 한 경학, 금석학, 고증학의 교류는 청에서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문물 역시 청으로 전해졌고 거기에 감동받은 청나라 학예인들은 또 그 나름의 업적을 낳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희해가 펴낸 [해동금석원](전8권)이다.
- 이 책은 진흥왕 순수비, 평백제비, 성덕대왕신종 명문, 무장사비 단편 우리나라 고비, 고종의 금석 탁본 중 유명하고 오래된 것은 거의 다 망라한 기념비적 편찬이다.

황초령비 재발견 시말기
- 북한 국보 황초령비도 추사와 관련
- 친구 권돈인이 1832년, 추사 나이 47세 때 함경감사로 나가게 되어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봐달라고 부탁함
- 추사는 그의 대표적인 논고인 <진흥2비고>에서 북한산비황초령비 비문상세히 고증했다.
-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탁본 (190쪽)
: 1938년 다산 박영철이 북경 유리창 고서점에서 구입해 오자 위창 오세창은 이 탁본의 내력을 아래쪽 여백에 적어놓았다. 조선과 청나라 금석 교류의 징표가 되는 유물이다.

옹방강유용
입고출신(入古出新)
- 연암 박지원주장한 법고창신(法古創新)도 같은 맥락

- 입고출신의 정신에서 새로운 글씨를 추구한 이들이 '건륭 4대가'로 꼽히는 옹, 유, 양, 왕이었다.
: 담계 옹방강 (1733~1818), 석암 유용 (1719~1805), 산주 양동서 (1723~1815), 몽루 왕문치 (1730~1802)



★ 완원의 <북비납첩론>
[평서첩]을 쓴 청나라 서예가 양헌은 중국 2천년 서예사를 단 13글자로 요약함


진나라는 운을 숭상하고                      晉尙韻
당나라는 법을 숭상하고                      唐尙法
송나라는 의를 숭상하고                      宋尙意
원나라, 명나라는 태를 숭상했다          元明尙態


: 진나라 왕희지 시대 글씨에는 신운(神韻)이 감돌고, 당나라 구양순 시대 글씨에는 법도가 있고, 송나라 소동파 시대 글씨에는 작가의 의취가 있고, 원나라 조맹부와 명나라 동기창 시대 글씨 자태가 아름답다 것이다.
- 청나라 초기의 글씨는 명나라 말기 동기창 시대의 아름다운 글씨를 모방하는 데 급급하여 새로운 창조를 이루지 못했다. ... 이 답답함을 돌파한 것이 양주팔괴라는 개성적인 서화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개성이 십인십색으로, 강유위[광예주쌍집]에서 말했듯이 '변화를 구하려고만 했지 진정한 변화의 의미를 몰라서 괴이한 데로 빠지고 말았다.' ... 그러다 고증학의 정신에 입각해 고비를 연구하는 금석학이 크게 일어나고 급기야 완원<북비남첩론>까지 나오며 입고출신의 글씨를 지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금석학에 기초한 입고출신, 그것이 바로 추사체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員嶠 李匡師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


員嶠 李匡師 '지리산 천은사' 水體 편액


추사[원교필결] 비판
- 추사는 <북비남첩론>에 입각하여 당시 조선 서예계를 지배하고 있던 원교 이광사를 호되게 비판함
- 원교 이광사 (1705~1777)
: 서예의 명가 출신으로 종고조부 이경석, 증조부 이정영, 부친 이진검 등이 모두 명필
: 양명학을 받아들인 진보적인 학자였으며 인품도 높았고 명필로 이름을 얻음
: 1755년 '나주 벽서 사건'으로 큰아버지 이진유가 처형될 때 원교도 연좌되어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신지도로 이배되어 22년간 귀양살이 하다가 세상을 떠남
: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목숨만은 빼앗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부르짖어 영조가 귀양보내는 걸로 마무리함
: 귀양살이 동안 정말 많은 글씨를 썼으며, 해남 대흥사, 구례 천은사 등 전라도 일대 사찰의 현판에 그의 글씨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 추사는 원교가 죽고 9년이나 지나 뒤에 태어난 인물. 추사 역시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북비남첩론을 주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추사는 역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고 원교에게 잘못한 것이 많았다.

★ 추사의 제자들
- 양반 출신 제자
: 이당 조면호, 동암 심희순, 위당 신헌, 유재 남병길, 자기 강위, 석파 이하응
- 역관 제자
: 우선 이상적,
역매 오경석(1831~1879), 소당 김석준
: 추사 중년부터 제자였던 이는 이상적뿐이며, 오경석과 김석준은 추사의 과천시절에도 20대의 젊은이였다. 특기할 사항은 추사의 양반 제자와 역관 제자 중에는 유장환, 민태호, 남병길, 가우이, 오경석 등 개항기 때 진보적 지식인으로 활동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 중인 서화가
: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소당 이재관, 소치 허련, 희원 이한철, 혜산 유숙, 학석 유재소, 북산 김수철
: 우봉과 소치를 제외하면 모두 제주 귀양 이후의 제자들이다. 결국 추사 중년의 제자는 우선 이상적, 우봉 조희룡, 소치 허련 정도이다.






<6장. 세한도를 그리며>
- 55~59세. 1840~1844


★ 유형 : 죄인을 먼 곳에 유배하여 격리 수용하는 형벌
- 가장 많이 시행된 것이 천사(遷徙), 부처(付處), 안치(安置) 세 가지임
- 천사 : 고향에서 천 리 밖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 말 그대로 고향에서 내쫓는 것.
- 부처 : 중도부처(中途付處)의 준말로 유배에 처한 죄인의 정상을 참작하여 귀양지로 가는 도중의 한 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 주로 고관에게 가해짐.
- 안치 : 본향(本鄕)안치, 주군(州郡)안치, 사장(私莊)안치, 자원처(自願處)안치, 절도(絶島)안치, 위리(圍籬)안치 등이 있음. 본향안치는 죄질이 가벼운 사람을 고향(시골)에 안치하는 것이고, 사장안치는 개인 별장에, 자원처안치는 스스로 유배지를 택하는 것이다. 주군안치는 일정한 지방(주,군,현)을 지정하여 그 안에서만 머물게 하는 것(다산 정약용, 강진). 절도안치는 멀리 떨어진 외딴섬에 안치하는 것이고, 위리안치는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서 살게 함.

대둔사 현판
- 제주도 유배길에 대둔사에 들러 초의를 만나며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 버리고 자신의 글씨를 달라고 부탁.
-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대웅보전'은 이광사(해서체), '무량수각'은 추사(예서풍).

★ 추사의 산수화
-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움의 경지로 돌아가게 하라." 추사가 지향하는 문자향서권기. <세한도>도 거기에 서린 고아한 품격이 좋은 것이지 경물을 묘사한 필치의 능숙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유배형의 미덕
- 결과적으로 학자들에게 책을 읽고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
- 다산 정약용 18년, 원교 이광사 22년, 추사 9년

추사의 고통과 위안
- 끊임없는 질병
- 아내의 죽음
- 제자 소치 허련의 방문, 초의스님의 방문
- 양아들 상무를 받아들임 
- 독서와 서예 법첩 연구

위당 신헌
- 다산과 추사의 문하에서 실사구시의 학문을 닦은 무관
- 실학자로서 박규수, 강위 같은 개화파 선비들과 교유하고 김정호<대동여지도> 제작을 도움
-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가 되었고, 1875년 운요호 사건 때는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에 임명되어 강화도조약을 체결함. 1882년에는 요양 중에 다시 전권대관이 되어 조미통상조약을 체결.

세한도
- 1844년 59세 때 작품
- 화제에 쓰여 있듯이 추사가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
- 이상적은 추사가 귀양살이하는 동안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드렸고, 이에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준 것.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된다'하셨는데 ...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 세한도는 실경산수화가 아니다. 대정 추사 적거지에 세한도에 나오는 집과 소나무와  똑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이다.  이 그림의 예술적 가치는 실경에 있지 않다. 실경산수로 치면 이 그림은 0점이다.
- 이 그림이 우리를 감격시키는 것은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
- 청유16가의 제찬
- 소장자의 변천 과정 (293쪽)
: 소전 손재형의 노력. 위창 오세창의 평가 - 추사 ~ 혜곡 에피소드로 활용 가능함


<7장. 수선화를 노래하다>
- 59~64세. 1844~1849

★ 불랑 패서 사건
- 1846년 6월 프랑스 군함 3척이 충청도 해역에 나타난 사건
- 추사조차도 서세동진 하던 서구 제국주의의 본질을 모르고 있었음





<유재> 현판
- 유재는 추사의 제자 남병길의 호
-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움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하라."

박규수의 추사체 성립론
   "완당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아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소동파와 미불을 따르면서 더욱 굳세고 힘차지더니 ... 드디어는 구양순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닌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했다."

청명 임창순 <한국 서예사에 있어 추사의 위치>
    동주 이용희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일로향실(一爐香室)의 초의스님
- 해배 후 해남 대둔사에서 초의스님 만남
- "여보게 초의, 이 현판을 다시 달고 내 글씨를 떼어내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네." 그리하여 지금 대흥사 대웅보전엔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구암사의 백파스님과 창암 이삼만에 대한 사과의 마음



추사 김정희 '삼십육구초당', 순천제일대학교 임옥미술관 소장.  

 ㅡ 칠십이구초당의 반이다.


<8장. 강상의 칠입이구초당에서>
- 64~66세. 1849~1851

추사 생애의 시대구분
1. 1784~1809 (1~24세) : 출생부터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청년 수업기
2. 1809~1819 (24~34세) : 대과에 합격하기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3. 1819~1840 (34~55세) : 출세해서 관직에 있는 21년간의 중년기
4. 1840~1849 (55~64세) : 8년 3개월간의 제주 유배기
5. 1849~1856 (64~71세) : 해배 후 서거까지 8년간의 만년기
- 해배 2년 반만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어 1년간 귀양살이. 이 때문에 북청 유배까지를 추사 유배기의 연장으로 보고, 과천으로 돌아와 만년을 보내는 마지막 4년은 흔히 과천시절이라고 한다.
- 1849~1851년 (64~66세) : 해배 후 용산에 살던 2년 반의 강상시절
  1851~1852년 (66~67세) : 북청에 1년간 유배된 북청 유배시절
  1852~1856년 (67~71세) : 해배 후 서거까지 4년의 과천시절

 용산의 '강상시절'
- 추사체다운 본격적 작품은 해배 후 강상시절
- 최고 명작의 하나로 꼽히는 <잔서완석루>, 거의 신품의 경지로 평가받는 <불이선란>, 제자들이 벌인 서화경진대회의 출품작 비평서인 [예림갑을록] 등이 모두 이 시절의 소산이다.

추사의 아호와 문자도장
- 추사가 사용한 아호와 낙관, 도인에 쓰인 글귀는 무려 200개가 된다. 그래서 어떤 아호로 낙관했느냐는 추사 작품의 편년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
- 추사 아호의 기본은 역시 추사와 완당이다.




 흔허스님과 영천 은해사 현판
- 추사의 절집 편액 중에서는 은해사 대웅전이 최고라 할 만 하다.
- '불광'은 높이 170m, 길이 150cm로 추사의 글씨 중 가장 크다.

유산 정학연과의 만남과 <보정산방>
- 추사의 현판 글씨 중 디자인 감각이 가장 잘 살아있는 명품. '보정산방'이란 '정약용을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 이라는 뜻이로 강진 다산초당에 있음

문자향과 서권기
   "예서 쓰는 법은 가슴속에 청고고아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청고고아한 뜻은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들어 있지 않으면 능히 팔뚝과 손끝에 발현되지 않는다." ...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기본이며 그것이 예서를 쓰는 신결이다.
- 전집 권7, 잡저, 상우에게 써서 보이다

수련
   "하늘이 총명을 주는 것은 귀천이나 상하나 남북에 한정되어 있지 아니하니 오직 확충하여 모질게 정채를 쏟아나가면 구천구백구십구 분은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나머지 일 분이 인력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니 끝까지 노력해야만 하는 거라네."
- 전집 권4, 오경석에게, 제1신

추사와 석파 이하응
- 남연군과 추사가 이종사촌지간, 석파에게 추사는 5촌 아저씨 (34세 차이)
- 석파는 생활이 곤궁한 추사에게 여러 물품을 보냄.

진종의 조천 문제
- 영조 다음 왕은 정조였지만, 사도세자의 형이 진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왕통으로 따지면 진종은 철종의 5대조가 되고 가통으로 따지면 4대조가 된다. 이로써 '진종의 위패를 조천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생겨났던 것이다.
- 헌종의 대통을 은언군(사도세자의 작은 아들)의 손자인 원범(철종)으로 잇게 되면서 왕통과 왕가의 가통에 생긴 혼선
- 안동 김씨 세력과 반 안동 김씨 세력간의 예송 논쟁에서 밀리면서 추사는 북청으로 다시 유배


<9장. 북청의 찬 하늘 아래>
- 66~67세. 1851~1852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 침계 윤정현함경감사로 있는 동안 황초령비를 다시 한번 찾아보게 함. 20년 전(1832년, 47세 때) 권돈인함경감사로 부임해갔을 때 황초령비를 찾아보게 하여 마침내 비석 조각을 발견하여 그 탁본을 얻어보고 <진흥2비고>를 저술한 바 있다. 그러나 권돈인은 당시 이 비를 추사의 뜻대로 보존하지 못했다.
- 윤정현은 이 비를 다시 찾아내 원위치인 황초령 고갯마루까지 오리지는 못하고 황초령 아래 중령진까지 옮겨 세우고 거기에 비각을 지어 보호하도록 조치했다. ... 추사는 황초령비의 글씨체와 어울리는, 금석기 흥건히 넘치는 예서체 글을 써주며 현판으로 만들어 달게 했다. 저 유명한 <진흥북수고경>이다.


<10장.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 67~71세. 1852~1856

★ 석파 이하응의 난초 그림에 대한 평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 분까지 이렀다 해도 나머지 일 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 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석파가 ... 더 나아갈 것은 다만 이 일 분의 공이다."
- 전집 권6, 석파 난권에 쓰다

一讀 二好色 三飮酒
- 첫째는 독서, 둘째는 여자, 셋째는 술
- 추사의 과천시절 자작시
한평생 마음 잡아 지니던 힘도          平生操持力
한 생각의 잘못을 대적 못 하리.        不敵一念非
지나온 세상살이 30년 동안              閱世三十年
배움이 복인 줄을 이제 알았네.         方知學爲福

[산림경제]
-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수많은 즐거움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손자와 노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추사는 불행하게도 어린 손자와 놀 기회가 없었다.

역매 오경석과 위창 오세창 (497쪽)
- 미술사가로서 추사의 안목은 역매 오경석(1831~79)에게 전수되었다. 오경석은 우선 이상적의 제자로, 1846년 16세 때 역과에 합겨하여 23세 때인 1853년 처음 연경에 통역관으로 따라간 뒤, 4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6년간 무려 13차례나 중국에 다녀왔다. 추사가 과천에 있을 때 오경석은 겨우 20대 초반이었다. 오경석은 중인이지만 추사는 그의 영민함을 알아보고 곧 제자로 삼은 듯, 그에게 서화, 금석의 감정을 가르친 자취가 과천 곳곳에 남아 있다.
- 훗날 오경석은 개화운동을 펼치는 틈틈이 연구한 금석 관계 자료를 모아 [삼한금석록]을 펴냈다. 그의 개화사상은 김옥균, 유길준 등 양반 자제들에게 전해졌고, 서화 연구는 아들 위창 오세창(1864~1953)에게 전수됐다.
- 위창은 미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육당 최남선이 쓴 <기미독립선언서>를 마지막으로 감수할 정도로 권위 있는 구학문의 마지막 선비였다. 그때 위창은 육강의 초고를 검토하던 중 그 유명한 "무릇 기하(幾何)이며" 시리즈 가운데 "아(我) 생존권이 박탈됨이 무릇 기하이며"라는 구절을 보고 "박탈은 능동태이므로 피동태로 쓸 때는 박상(剝喪)으로 해야 한다"고 하고 육당에게 일갈하기를 "요즘 젊은 애들은 한문을 잘 몰라서 큰일"이라 했다고 한다.
- 위창의 서화사 연구는 한국미술사 불후의 고전인 [근역서화징](1928)으로 맺어졌다. 위창은 또 간송 전형필 선생의 고서화를 감정해주어 오늘날 간송컬렉션이 빛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위창은 결국 아버지 역매를 통하여 추사의 금강안을 이어받은 셈이다.
- 정조경은 금석과 서화에 능한 학자였다. 전각가로 유명한 정정로의 아들인 그는 가학을 이어받아 [오군금석목] 같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그는 추사의 제자인 오경석과 가까이 지냈다.

노과 시절의 괴(怪), 졸(拙), 허(虛)
- 과천시절 추사는 지금 남아 있는 것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글씨를 썼음
- 추사의 예술은 과천에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음
- '불계공졸' :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
- 노자 '대교약졸(大巧若拙)' :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

★ 山崇海深  遊天戱海 (산숭해심 유천희해)
- 높이 42cm, 길이 420cm로 은해사의 '불광' 현판을 제외하면 현존 추사 작품 중 가장 크다
- <산숭해심>과 <유천희해>는 본래 한 작품이던 것인데, 1957년 3월 대한고미술협회가 주관한 경매전에서 <산숭해심>은 애호가인 심상준이 55만 환에, <유천희해>는 소전 손재형이 121만 환에 낙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숭해심>은 낙관이 없어서 반값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오랫동안 이산가족이 되었다가 뒤에 두 점 모두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게 되면서 다시 상봉했다.

동양 서예사에서 추사체의 위치
- 조선 4대 명필 : 안평대군,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
- 청나라는 학(學)을 숭상했다. 그들은 고전을 배우고 익히면서 개성을 창출할 것을 지향했다.
- 청나라 대표적인 서예가는 정섭, 유용, 등석여, 이병수. 하지만 중국 땅에서 살지 않았을 뿐 청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는 추사 김정희다.
- 진나라 : 왕희지, 왕헌지
  당나라 : 구양순, 저수량
  송나라 : 소동파, 미불
  원나라 : 조맹부
  명나라 : 동기창
  청나라 : 추사 김정희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 전집 권4, 오규일에게, 제2신

<대팽고회>
- 1940년 무렵 경매에 출품. 간송 전형필은 일본인 수집가와 경쟁이 붙었는데, 당초 100원이 예정가였지만 일본인이 300원으로 올리자 아예 1,000원을 불러 낙찰 받음 (당시 쌀 한 섬에 3원)

봉은사 <판전>
- '칠십일과병중작'이라고 낙관
- 추사의 절필(絶筆)


<종장.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추사 김정희의 인간상
"내 글씨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나는 칠십 평생에 벼 열 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 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 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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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37 - 추사의 별호(別號) | 추사 김정희

從心所欲 2018.08.10 12:47

        



   우리는 늘 ‘추사 김정희’로 기억하고 ‘추사 김정희’로 부른다. 그러나 김정희의 호가 ‘추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30세 이후에는 오히려 추사보다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더 즐겨 썼다. 뿐만 아니라 김정희는 항상 그때의 상황, 그때의 심정, 그때의 서정에 따라 새로 아호를 짓고 그것을 관지1로 나타내곤 했다. 강상시절쓴 호만 하더라도 노호(鷺湖), 묘호(泖湖), 삼묘(三泖), 삼호(三湖) 등이 있다. 김정희가 그런 식으로 사용한 아호, 관지, 도인(圖印)에 씌어있는 글귀는 무려 200개가 넘는다. 혹자는 이를 두고 추사의 멋이라고 하고 또 혹자는 일종의 변덕이라고 비웃지만, 역시 추사만이 가질 수 있었던 ‘怪’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자신의 거처나 글과 연관지어 예당(禮堂), 시암(詩庵), 실사구시재(實事求是齋), 소봉래학인(小蓬萊學人),  불교와의 인연을 나타낸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정선(靜禪), 불노(佛奴), 비불선비(非佛仙非), 청나라 학자들과의 만남으로 얻은 보담재(寶覃齋), 완당(阮堂), 차와의 인연을 나타내는 승련(勝蓮), 승설도인(勝雪道人), 고다노인(苦茶老人) 등은 대략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는 편이다.


   김정희의 아호와 도장 중에 나가산인(那伽山人)이 있다. 유명한 <雲外夢中>첩에도 나가산인으로 관지를 넣었다. 이는 예산의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 자락에 가야산이 있고, 또 추사가 33세 때 경상감사를 지내던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해인사에 갔다가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이후 그는 가야산(伽倻山)을 뒤집어 나가산인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신미(神味)넘치는 호를 만들어낸 것이다.

추사는 불교이론에도 밝아 당대의 화엄종장인 백파와 일대 논쟁 벌였었다. 그래서 그를 해동(海東) 유마거사(維摩居士)라 일컬었다. 아마도 추사는 가끔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듣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에서 연유한 듯 추사가 사용한 아호 중에는 병거사(病居士), 백반거사(白飯居士)라는 호도 있다. 아마도 유마거사로 불리는데 대한 반발이었는지도 모른다.


   추사는 때로 동해서생(東海書生), 동해유생(東海儒生), 동이지인(東夷之人) 등으로 자신을 낮추다가도 과감히 동해둔사(東海遁士), 동해제일통유(東海第一通儒)라 쓰기도 했고, 경주 김씨를 돌려서 고계림인(古鷄林人)이라고도 했으며 나중엔 그저 ‘과천 사는 늙은이’란 뜻으로 평범하고 담백하게 노과(老果)라고도 했다.

믉고 수염이 많이 나면서 ‘늙을 노(老)’자와 ‘구레나룻 염(髥)’자, ‘늙은이 옹(翁)’, ‘늙은이 수(叟)’를 종횡으로 혼합하여 노완(老阮), 나수(那叟), 나옹(那翁), 노파(老坡), 염완(髥阮), 노사(老史) 등을 사용하는가 하면 70세 때는 과천에 산다고 과칠십(果七十)이라고 하더니 이듬해에는 71세된 과천 사람이라는 뜻으로(七十一果)라고 했다. 평범함에서 특수성을 끌어내는 경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허허로움일 것이다.





[추사가 사용했던 인장(印章)들]2


   그런가 하면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삼십육구초당(三十六鷗草堂)이라는 특이한 이름도 있다. 풀이를 해봤자 ‘72마리 백구가 날아드는 초당’ ‘36마리 백구가 날아드는 초당’ 이상의 뜻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왜 72마리이고 36마리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홍현주「지수염필(智水拈筆)」3에서 그 사정을 소상히 밝혔다.


   “추사가 근년에 잠시 용산 강상살 때 그 편액을 정자에 달기를 ‘칠십이구정(七十二鷗亭)이라고 하였다.

이를 본 사람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어찌하여 72마리의 백구입니까?‘라고 하였더니 추사가 웃으면서 대답하기옛사람이 사물이 많음을 가리킬 때 대개 72라고 했다는 것이다. 관중제나라 환공과 마주하여 선문답을 할 운운정정72처(云云亭亭七十二處)로 대답했고, 위나라 무제는 의심하여 말하기를 72라 했고, 한나라 고조왼팔이었던 흑자 또한 72를 말하였으니, 이는 다 많다는 말이지 바로 그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제 내가 강상에 있자 하니 많은 백구가 날아드는 것을 보게 되어 나 또한 72구로 정자의 이름을 삼으려고 한다.

어찌 괴하다고 하겠는가! 추사의 말에는 참으로 판연(判然)한 데가 있다.”


   추사의 아호에는 이처럼 깊은 의미와 내력이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웃음이 절로 나는 유머 감각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뛰어난 은유와 상징으로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주기도 한다. ‘삼식육구초당’이 바로 그런 경우다. 36은 72의 반을 의미하는데 이는 강상에 날아드는 백구가 그때는 잠시 반 정도 적게 날아들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칠십이구초당’ 이라고 사인하려다 반으로 줄여 ‘삼십육구’라 한 것일 수도 있다. 추사에게는 그런 기발함과 유머가 많았다.



[김정희 <三十六鷗草堂>, 31.0 x 131.0cm, 순천제일대학 임옥미술관]



   추사는 글자에서 소리만 남기고 뜻을 뒤집어 전혀 다른 아호를 만든 것도 있다. 노호(老湖)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이는 바로 노호(鷺湖)를 고쳐 부른 것이다. 추사노호(鷺湖)시절 1849년에 황간 관아로 보낸 편지 중에는 봉투에 ‘물가에 사는 늙은이는 아직도 병(病)중’이라는 의미의 ‘노호유병(老湖留病)’이라고 쓴 것이 있는데 누가 이 아호만 보고 추사 편지인 줄 알 수 있었을까?

추사의 아호 중에는 아직도 그 정확한 내력이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상당수 있다. 석감(石敢), 단파(檀波), 고우산인(古嵎山人)......그 가운데 상하삼천년 종횡십만리(上下三千年 縱橫十萬里)라는 것도 있다. 이에 대해 역시 홍현주「지수염필」에 그 내력을 적어놓았다.


   “추사는 평소에 스스로 호를 많이 지었다. 어릴 때 일찍이 그 거실에 ‘上下三千年 縱橫十萬里之室’이라고 편액을 달았는데 나는 항상 그 말을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훗날 어느 글을 보는데 조맹부가 이미 말을 사용하였고 또한 청나라 염약거황종희의 제문을 쓰면서 말하기를 ‘상하오백년종횡일만리로 박학하고 정밀한 학자를 세 사람 들 수 있으니 한 분은 고정림 처사이고 한 분은 우산 전종백이며 또 한 분은 황종희 선생이다’라고 했다. 대체로 추사의 편액에서 취한 것은 이런 뜻이다.”


   추사는 소싯적부터 자부심이 참으로 대단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가 아호와 편액에 이렇게 깊은 내력을 담는 것도 퍽 오래된 일임을 알게 하는 일화다. 추사의 아호는 그 자체의 의미와 멋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작품의 제작 연대를 판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노호, 삼호, 묘호, 칠심이구초당주인, 삼십육구초당주인 등의 관지가 들어있는 작품은 대개는 강상시절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강상시절 이후의 것임을 추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추사의 호는 모두 343개라는 설도 있고 503개라는 설도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추사(秋史)완당(阮堂)이다. 중국으로 가기 전, 그러니까 23세 때인 1808년까지의 호(號)는 현란(玄蘭)이었다고 한다. 검고 깊으며 심오하다는 뜻을 지닌 '현(玄)'과 난초를 의미하는 '난(蘭)'이다. 그러다 1809년 중국 연경(燕京)으로 갈 때 '추사(秋史)'라는 호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秋史)라는 호를 택하게 된 동기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추(秋)'에는 추상같다, 오행(五行) 중 금(金) 등의 의미가 있고, '사(史)'에는 사관(史官), 서화가 등의 의미가 있다는 해석 정도로는 결코 수긍할 수 없는 더 깊은 뜻이 있을 것만 같은데 알 길이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관지(款識) : 원래는 고대 중국의 예기(禮器)인 청동기에 새긴 글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로부터 유래하여 글씨나 그림을 완성한 뒤 작품에 이름, 제작 장소, 연월일 등의 내용을 적은 기록을 관(款) 또는 관지(款識)라고 하며 관기(款記), 관서(款署)라고도 한다. 이러한 관지를 화면에 기입하고 도장을 찍는 행위를 ‘낙성관지(落成款識)’라 하며 흔히 줄여서 ‘낙관(落款)’이라 부른다. [본문으로]
  2. 추사의 도장(圖章)은 수십 점이 남아 있으며, 추사의 도인(圖印)을 모아 인보(印譜)로 엮은 첩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양을 담고 있는 「완당인보」는 추사의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제자이자 필장(筆匠)인 박혜백이 소장했던 것으로 무려 180개가 수록되어 있다. 「완당인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오세창「근역인수(槿域印藪)」에 추사의 도장 70개를 수록했었다. [본문으로]
  3. 홍현주(洪顯周, 1793∼1865)는 정조의 둘째딸인 숙선옹주와 혼인하였고 시인으로서 이름을 얻었다. ‘운외몽중‘첩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고금의 문물제도와 문인, 학자 등에 대한 광범위한 자신의 견문을 수필 형식으로 기록한 문집이 지수염필(智水拈筆)이다. 8권 4책으로 되어 있으며 제8권에 추사를 비롯하여 정약용(丁若鏞), 이서구(李書九) 등과 중국 청대(淸代)의 문인, 학자 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한국민족대백과에는 지수점필로 소개되고 있는데 ‘拈‘자는 ’집을 념(염)‘과 ’(무게를)달 점‘의 두 가지로 읽는데서 온 혼선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추사 김정희 37 - 추사의 별호(別號)

2018.08.10 | 블로그 > Daum블로그  blog.daum.net/gofor99/129   새소리 바람소리








타이틀


  •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우성 김종영의 조각 - 불계공졸(不計工拙)과 불각(不刻)의 시(時)·공(空)

 

전 시 명 : 불계공졸(不計工拙)과 불각(不刻)의 시(時)·공(空)
전시기간 : 2015.9.11.-2015.10.14.
전시장소 : 학고재
글 : 황정수(미술사가)


   “불계공졸(不計工拙)과 불각(不刻)의 시(時)·공(空)”이라는 철학적인 제목부터 비범한 이번 전시는 그동안에 있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우성(又誠) 김종영(金鍾瑛, 1915-1982) 두 거장과 관련된 행사 중 가장 이색적인 전시회이다. 130여년의 차이를 두고 서화와 조각이라는 매우 이질적인 분야에서 활동한 두 사람 간의 공통분모를 찾는 일이다. 일견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크게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김정희“잘 되고 못 되고를 굳이 따지지 않는다(不計工拙)”고 하였으나, 사실 그의 글씨는 완숙한 서법과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솜씨, 창조적 정신까지 더해져 조금의 빈틈도 없어 보이는 완결성을 보인다. 이에 비해 김종영의 조각은 인위적인 손질을 가능한 한 줄이고 재질의 자연스러운 속성을 남겨 인간의 창조적 개입을 가능한 줄이고자 노력한다.
이렇듯 기법 상으로는 대척점에 있는 두 사람이지만 목적하는 예술의 지향점이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예술적 성취의 과정은 유전적 요소가 있어 김정희의 예술론이 김종영의 조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서 기획된 전시이다. 그동안 현대미술의 해석을 서구이론에 맞추던 관성에서 벗어나 우리 현대 미술의 원류를 전통적인 예술정신에서 찾으려는 자생적 연구 방법의 모색이기도 하다. 



전시 전경



   이번 전시 방식은 김정희의 글씨와 김종영의 조각 중에서 서로 공통적인 요소가 있는 작품을 대조하여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기획의 출발은 김종영 조각의 근저에 김정희의 글씨 쓰는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기획자의 의도 때문이다. 기획자는 “복합성을 띠고 있는 김종영의 추상조각에 비(碑)·첩(帖)의 각체가 혼융된 김정희의 서(書)의 원리가 배태되어 있으며, 김정희와 김종영의 작품은 모두 ‘구조의 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추사와 우성은 ‘불계공졸’‘불각’의 예술정신과 철학을 화면과 입체라는 2, 3차원의 시공간에서 경영해낸 작가”라는데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전시장 초입에는 김정희 <제해붕대사영(題海鵬大師影)>김종영<작품 80-5>김종영의 드로잉 <자화상>이 전시되어 있다. 도록에만 실려 있는 김정희의 <자화상>과 대비시켜 인간의 표피적인 얼굴의 묘사를 통해 드러나는 본질적인 내면 의식을 짚어보려는 의도이다. 인생에 대한 지적인 관조가 잘 드러난다는 공통점이 있는 작품들이다.



<제해붕대사영>과 <작품 80-5>



   
김정희 <자화상>                                    김종영 <자화상>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띠는 작품은 공식적인 전시에 처음 소개되는 김정희의 글씨 <자신불(自身佛)>이다. 이 작품은 예서의 기운이 있는 해서로 쓴 것으로, 글씨의 주된 내용인 ‘자신불’은 “현세(現世)에 있는 몸이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위쪽에 ‘자신불’이라 쓴 큰 글씨는 무심한 듯 당차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깨달음을 얻은 한 사람이 우뚝이 서있는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신(身)’자의 구성은 위태한 인생길에서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무심의 경지에 이른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김정희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세파를 이기고 노년에 든 인간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하고, 김종영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인간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래쪽에 “철선아 스스로 깨쳐라, 남에게 의지하지 마라(鐵禪自供 無作他觀)”라는 화제의 울림은 ‘자신불’ 세 글자를 흔들림 없이 세워 놓은 철 조각처럼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자신불>                         <자신불>의 위 아래 부분         

            


   김정희의 <순로향(蓴鱸鄕)>은 ‘괴(怪)’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기이하게 생각하는 이른바 ‘추사체’ 중에서 비교적 편안함을 주는 글씨이다. 중국 진나라장한(張翰)이 자기 고향의 명물인 순챗국과 농어회 먹으려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이 작품은 ‘행농(杏農)’이란 서정적인 호를 가진 이에게 써준 까닭인지 쇠처럼 강한 선을 사용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아래쪽의 비교적 넓은 구성이 안정감을 주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순로향>과 김종영의 <작품 68-1>은 구성 면에서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강한 직선을 사용하여 비대칭적인 기하학적 구성을 하고 있는데, 이 작품 또한 직선의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불규칙한 면의 구성이 넉넉함을 주는 반전이 느껴진다. 김정희의 글씨와는 반대로 위쪽의 넓게 자리 잡은 면의 구성이 불안함보다는 율동감과 일탈을 보여주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으로 보인다.    



<순로향>과 <작품 68-1>


   8폭으로 구성된 <칠언시구집(七言詩句集)><작품 78-31>, 횡액 글씨 <위공식서(爲公寔書)><작품 78-4>의 대비는 두 거장의 닮은 듯 또는 다른 듯 표현 방식이 나름대로의 기품을 가지며 서로 보완하고 있는 모습이 각각 다른 분야의 예술의 절대미를 보여주는 듯하다.



<칠언시구집>과 <작품 78-31>




<위공식서>와 <작품 78-4>



   두 거장의 작품으로서는 정형의 틀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작품들인 <천기청묘(天璣淸妙), 매화동심(梅花同心)><작품 74-9>는 파격이라는 면에서 공통점을 느끼게 한다. <천기청묘, 매화동심>는 김정희의 작품으로는 획의 흔들림이 많고 글자 간의 배열 구조가 자유분방하다. <작품 74-9> 또한 ‘불각(不刻)의 각(刻)’이라 하더라도 단정한 미니멀리즘적인 요소가 있는 다른 김종영의 작품들에 비해서 ‘조각(彫刻)’의 속성이 강하고 인위적인 손길이 많다는데 그 차별점이 있는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다르지만 크게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으며, 각각 ‘불계공졸’과 ‘불각의 미’를 설명하듯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기청묘, 매화동심>과 <작품 74-9>



 이 밖에 김종영의 서예 작품 <자호삼매지실(紫壺三昧之室)>에서는 획의 구성과 결구(結構)가 김정희의 글씨를 방불케 하고, <작품 77-1>은 마치 <자호삼매지실> 중에서 ‘호(壺)’자나 ‘실(室)’자를 작품화 한 듯한 조형성을 보이고 있다. ‘서화동원(書畵同源)’이 아니라 ‘서각동원(書刻同源)’이라 할까? 김종영의 조각 작품 제작 방식이 김정희의 글씨 작법에서 출발하였다는 유전적 영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면은 김종영이 좋아했던 <장자(莊子)> '천하(天下)'편 “판천지지미(判天地之美), 석만물지리(析萬物之理)”, 곧 천지의 아름다움을 판단하고, 만물의 이치를 이해한다의식이 무르녹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종영 <자호삼매지실>




<작품 77-1>



   이 전시회에서 보이듯 김종영은 늘 추사 김정희의 미술 세계를 흠모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로 끌어들이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완당과 세잔느>란 글에서 “완당의 글씨는 투철한 조형성과 아울러 입체적 구조력을 갖고 있다”고 높게 평가하며 자신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또한 김정희가 왕희지체를 답습하는 당대의 주류에서 벗어나 고전을 탐구하고 새로운 창조적 정신을 더하여 글씨의 본질로 나아가려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은 김종영의 조각 예술이 더 높은 경지를 이루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관통하는 ‘법고창신’의 정신이 이들의 미술 바탕에 깔려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러한 의식이 미술의 내면적인 사상과 외형적인 재현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가에 대해 내심 불편함이 있는 것은 이 전시의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비록 내재적인 공통점이 있다 하더라도 외형적으로 이질적이면 닮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미술은 근본적으로 시각 예술이라는 대전제를 충족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전시의 주인공은 김종영이다. 김정희와 김종영의 130여년에 걸친 인연을 다루고 있지만 김정희의 정신이 김종영의 작품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느냐를 보는 전시이니 분명 주인공은 김종영이다. 그러므로 이 전시의 결말은 김종영의 작품이 김정희의 정신을 어떻게 받아서 새로이 조각 작품으로 ‘창신(創新)’을 해 내었는지가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김정희의 작품을 통하여 김종영의 작품을 보더라도 내적인 예술적 정신세계의 전수는 이해가 되지만, 각적 외형은 그가 공부한 조각의 선배인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나 한스 아르프(Hans Arp, 1887-1966) 등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좀 더 치밀하게 규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9.03.25 17:08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우성 김종영의 조각 - 불계공졸(不計工拙...

www.koreanart21.com/review/antiques/view?id=5278&page=1    한국미술정보개발원









[스크랩] [사는 이야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추사체| 자유 게시판

                  

철산 | 조회 107 |추천 0 | 2018.07.11. 09:45



 

 

 


1 호고연경 대련
    세련되지 않은 파격적인 짜임과 마른 듯 까칠한 필획으로 자신이 지향했던 고졸한 품격을 구현한 작품이다. 김정희의 여러 대련 필적중에서 그의 특장이 잘 드러나 있다.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書. 추사, 동아시아 예술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글. 이동국 / 예술의전당 서예부장

 

   우리는 추사를 대서예가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서예가와는 차원이 한참 다르다.
우리 시대 서예는 기예技藝 정도로 의미가 축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모든 동아시아 학예學藝 세계의 근간을 종횡으로 녹여낸 서書의 본모습이 바로 추사다.

 

추사학예의 결정, 추사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5~1856 학예 세계의 결정은 한마디로 추사체秋史體로 집약된다. 단지 글씨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추사체는 한마디로 동아시아 고전古典의 재해석 결과물이다.

 

   서예 역사에 등장하는 교과서로 친다면 모든 첩帖·비碑 혼융의 산이다.

 

   추사체운필運筆, 붓을 다루는 법과 용묵用墨, 먹을 쓰는 법에서 방원方圓, 필획의 모나고 둥근 정도과 윤갈潤渴, 먹색의 윤기와 마름의 정도의 혼융, 점획의 태세太細, 가늘고 굵기·장단長短, 길고 짧음이나 측도測度, 필획의 기울기의 대비가 심하다.

 

   결구結構, 글자의 짜임새에서도 비정형非正形 구조 특징이다.

 

   장법章法은 자간字間과 행간行間의 운필의 지속遲速, 느리고 빠름이나 글자 자체의 대소大小 대비 효과를 극도로 가져가면서도 결국에는 양 극단을 조화시킨다.

 

    서체에서는 비학碑學과 첩학帖學의 성과에 해서楷書, 행서行書는 물론 예서隸書, 전서篆書 등의 각 체를 혼융해내고 있다.


   이러한 추사체의 미학적 특질과 형성 과정을 실제 작품 분석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추사체의 결정이라 할 <가정유예첩家庭遊藝帖>의 경우다. 추사의 해배 이후 60대 말년의 작품으로 해서 중심의 각 체가 혼융된 작품이다. ‘彩’ ‘至’ ‘書’ ‘外’ ‘敬’ 등과 같이 전서와 예서 필법이 함께 구사되거나 크고 작은 필획과 글자가 대비와 조화로 경영되기도 한다.

 

   주희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 두 번째 시의 글자 조형을 보자.

 

昨夜江邊春水生    어젯밤 강변에 봄비 내려서

巨艦一毛輕          크나큰 전함도 깃털 같아라.
向來枉費推移力    애써서 밀어도 소용없더니
今日流中自在行    오늘은 물길에 저절로 가네.

 

   ‘昨’ ‘邊’ ‘巨’ ‘推’ ‘在’ 등과 같이 한 글자에서 필획의 태세 대비가 극단적인가 하면 ‘夜’ ‘江’ ‘巨’ ‘向’ ‘移’ ‘流’ ‘中’과 같이 글자 간의 대소 대비가 크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보듯 추사체는 어느 특정 서체에만 그 특징이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각 시기별 작품의 운필·용묵·결구·장법·서체 등 모든 조형의 기본요소에서 추출된다.

 

이 경우는 강상·북청 유배·과천 시절의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청리내금첩靑李來禽帖> <침계?溪> <대팽두부大烹豆腐><불이선란不二禪蘭> <산호가·비취병珊瑚架?翡翠甁> <판전板殿> 등의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다. 전예나 해행, 비학과 첩학 등 각 체의 필획과 구조적 특장이 한 작품 안에 혼융되어 하나로 나타난다.


추사체의 조형 특징은 음양陰陽 대비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것을 더 세분하면 필획·결구·장법·서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작동되면서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침계>와 <불이선란>은 현판 대자 글씨이고, 난초 그림의 화제 글씨이지만 <가정유예첩>과 같은 맥락의 필법과 공간 경영이다.

 

 

2 세한도
1844년 제주도 귀양살이 때 그린 것으로 왼쪽끝에 추사가 직접 쓴 글이 있다. 사제 간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답례로 그려줬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비碑첩帖 혼융으로 제3의 서書를 제시

 

해서를 기준으로 <가정유예첩>과 30대 초반의 <이위정기以威亭記>, 제주 유배 시기의 <세한도歲寒圖> 발문, 그리고 해배이후 <추포첩秋浦帖>을 운필·점획·결구라는 측면에서 비교하면 시기별 특징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표1> 추사 글씨의 시기별 조형 특질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위정기>와 <세한도> 발문을 보면 비교적 같은 결체를 유지하면서도 운필에서는 방필과 원필의 극단적 대비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추포첩>에 가면 방원이 혼융되면서 구사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필획의 장단이나 태세의 측면에서 보면 <이위정기>는 그 대비가 심하다고 할 수 있는 추사체의 전형적인 결구 안에서도 변화가 규칙적이고 일정하다. 반면 <세한도> 발문이나 <추포첩> <가정유
예첩>에서는 극단적인 대비를 보이고 있다.


특히 말년의 이러한 경향은 행서라고 예외가 인정되지 않는다. <계첩고?帖攷> <석노시石?詩> <성담상게聖覃像偈> <산중당유객시첩山中?留客詩帖> <불이선란> <해붕대사화상찬海鵬大師畵像讚> 등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다.

3 추사 김정희 선생 초의선사 서간첩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책이다.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추사체 창출 궤적

추사체의 형성 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추사 학예 세계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추사체는 첩학과 비학의 영향 관계로 볼 때 대체로 5단계로 나뉜다.

 

제1기. 태어나서부터 24세 연행까지
추사가 가학家學과 스승을 통해 조선 중기 이래 전래 서풍과 동시대 미불 동기창 중심의 시체時體를 습용할 때이다. 생부生父인 김노경金魯敬, 1766~1838과 북학파 핵심 인물로 추사의 스승인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선배 관계라 볼 수 있는 신위申緯, 1769~1845의 경우에도 확인된다.

 

제2기. 24세부터 30대 중반까지
24세 연행燕行을 계기로 기존의 글씨에 대한 관점과 실기 능력이 완전히 바뀐 시기이다. 이 시기에 옹방강체를 중심으로 해서와 행서에서 추사체의 1차적인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또한 연행의 최대 성과인 비학, 즉 한나라 예서체 글씨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즉 한예 중심의 비학이 <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 부기?藏寺阿彌陀佛造成記碑 附記> <진흥왕순수비측면서眞興王巡狩碑側面書>에서 보듯이 32세부터 본격적으로 구사되기 시작한다.


제3기. 30대 중반부터 40대 중후반까지
이 시기의 추사 글씨를 이해하는 관건은 한글, 예서, 해서, 행서 등 서체별 변화 추이와 그것들 간의 상관관계를 밝혀내는 것이다. 특히 비학의 성과인 금석 기운의 예서 필획이 종래 첩학의 성과인 해서나 행서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가에 있다. 이 시기는 종래 첩학의 성과물에서는 보기 어려운 금석 기운의 필획 맛이 해서나 행서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추사체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한예의 금석 기운이 해행에 반영되어 점획의 굵고 가늚의 차이가 극도로 대비되면서 골기가 드러나고 있다.

 

제4기. 40대 중후반부터 60대 초반 해배 때까지 비주첩종碑主帖從 시기

추사의 제주도 유배 전부터 해배된 시기를 말한다. 추사체는 첩학과 비학의 경계나 그 혼융 정도, 즉 무쇠 몽둥이와 같은 금석기운의 획질과 결구, 그리고 서로 다른 서체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문자 구조의 창조라는 측면에서 추사체의 완숙 정도를 구분해야 한다.

 

<조자앙제현천관산제영趙子昻諸賢天冠山題詠>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옹방강 글씨의 영향에서 벗어나 직접 구양순체를 체득해내는 실증 작품이다. 여기에서도 확인되듯이 제주 유배 시절에 본격적으로 보이는 금석 기운의 방필方筆이나 종래와 다른 결구의 작품 경향은 이미 유배 이전인 40대 중후반기부터 해행은 물론 예서와 한글에서도 드러난다.

 

제5기. 63세 해배 때부터 71세 작고할 때까지 비첩혼융碑帖混融 시기
추사가 해배된 이후 작고할 때까지를 뜻한다. 강상·북청·과천 시절을 모두 포함한다. 사실상 가장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고, 그 이전 시기와는 다른 차원의 작품이 나왔다는 점에서 추사 예술의 절정기이자 완성기라고 할 수 있다.


강상 시절 64~65세
<산해숭심山海崇深> <단연죽로시옥端姸竹爐詩屋> <불이선란> <잔서완석루> <보화루寶華樓> <불광佛光> <대웅전大雄殿> <은해사銀海寺> 등

북청 유배 시절 66~67세
<침계> <석노시>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 등
과천 시절 68~71세
<사란첩寫蘭帖> <임곽유도비臨郭有道碑> <가정유예첩> <백파선사비문白坡禪師碑文> <효자금기종정려비孝子金箕鍾旌閭碑> <대팽두부><산호가·비취병> <판전> <해붕대사화상찬> 등

위 작품에서 보듯이 비학과 첩학의 성과가 점획, 결구는 물론 장법, 서체 등 모든 측면에서 혼융되고 있다. 필법筆法 묵법墨法으로는 지속·방원·윤갈의 묘가 나타나고, 조형적으로는 대소·소밀疏密·장단 등의 극단적인 음양 대비 속에서 구사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4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글씨  /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5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묵소거사 자찬 /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6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서첩 /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7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서첩 /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탈속脫俗과 무위無爲를 하나로 넘나드는 추사체
지금까지 비학과 첩학의 척도로 추사체의 미학과 형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추사체의 서예사적 가치와 의의도 생각해보았다.
추사는 다섯 단계에 걸쳐 한국과 중국 서예사에 등장하는 각종 비학과 첩학의 역대 성과물을 겸하여 소화해냈다. 그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추사체로 비첩의 특장을 하나로 혼융해냄으로써 18, 19세기 동아시아 서예사를 비첩겸수로 평정한 인물이다. 법도를 떠나지도 구속되지도 않은 말년의 추사체는 첩학파의 행·초서 리듬을 토대로 한 비학파의 전예 구조로의 완벽한 전환인데, 그 글씨의 아름다움 또한 기괴奇怪와 고졸古拙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말년의 추사는 불계공졸不計工拙, 즉 더 이상 글씨가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았고, 그 정신적인 경지 또한 탈속과 무위의 ‘성중천性中天’에서 노닐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추사에게 서書의 경지는 글씨를 쓰고, 읽고, 생각하는 행위를 넘어 이 모든 것이 예술藝術과 도道와 종교宗敎에까지 하나로 이르는 지점에서 확인된다.

 

문화재재단. 월간문화재 / 통권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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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고유시수단갈(好古有時搜斷碣) 연경류일파음시(硏經婁日罷吟詩) // 예서(隸書)

옛것을 좋아해 때로 깨어진 비석을 찾고 경전 연구로 몇일 시를 읊지 못헸네

유애도서겸고기(唯愛圖書兼古器) 차장문자입보리(且將文字入菩提) //행서(行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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