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하나만>
文字香, 書卷氣
<서장>
★ 우리나라 4대 명필
- 신라 김생, 고려 탄연, 조선 안평대군, 조선 김정희
★ 입고출신(入古出新) : 옛것을 생각하며 새로운 지식을 배양하라.
★ [담연재시고] 서문에서 (당대 시인 신석희)
"추사는 본디 시와 문장의 대가였으나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됨으로써 그것이 가려지게 되었다."
★ 조선 3대 다성(茶聖) : 정약용, 초의스님, 김정희
<1장. 월성위 집안의 봉사손>
- 출생 ~ 24세. 1786~1809
★ 1786년(정조 10) 충청도 예산 용궁리에서 출생
- 예산 용궁리에 추사 고택 복원.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저택.
- 추사 고택에는 고조 할아버지 김흥경의 묘소(추사가 심은 백송, 천연기념물 106호)와 증조 할아버지 김한신의 묘소와 화순옹주의 정려문(남편 월성위가 죽자 14일을 굶어 따라 죽음. 조선 역사 최초의 열녀)이 있음
★ 경주 김씨
-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순조 때 수렴청정)가 추사의 12촌 대고모
- 정순왕후의 오빠 김구주, 사촌오빠 김관주 등은 추사의 할아버지인 김이주와 같은 항렬 10촌 지간
★ 추사의 출생 설화
- <완당 김공 소전>에는 어머니 유씨가 회임한 지 24개월 만에 추사를 낳았다고 한다. 홍한주의 [지수염필]을 보면 추사의 아우인 명희는 18개월, 막냇동생 상희는 12개월에 낳았다고 해서, 어머니의 회임 기간이 비정상임을 알 수 있다.
★ 입춘첩 신화
- 여섯 살 때 추사가 쓴 '입춘대길' 글을 보고 북학파의 대가였던 초정 박제가(1750~1805)가 추사를 가르치겠다고 함. 박제가는 추사의 스승이었음.
"이 아이는 앞으로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만하니 제가 가르쳐서 성취시키겠습니다."
- 번암 체재공 :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 스승 박제가
- 박제가는 스승이기는 해도 서출이었기 때문에 대갓집 자제인 추사를 매우 정중히 대했음이 박제가가 추사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남
- 박제가는 연경을 네 차례 다녀왔고, [북학의]의 저자이기도 함. 추사에게 연경의 발달한 문물과 학자들의 학예 활동을 알려주고 꿈을 키우게 함.
- 1801년(추사 16세)에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감
- 1805년(추사 20세)에 세상을 떠남
★ 연경에 갈 기회
- 추사는 1809년 24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됨
- 1809년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선임되어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갈 기회를 얻음
- 동지사 : 해마다 달력을 받으러 가는 역행(曆行)과 함께 동지를 전후하여 정례적으로 중국에 가던 외교사절
- 자제군관 : 정사, 부사, 서장관 등 고급 외교관으로 하여금 그 직급에 따라 아들, 동생, 조카 중 한 명을 데리고 가서 외국 견문을 익히게 하는 제도
<2장. 감격의 연경 60일>
- 24~25세. 1809~1810
★ 후지쓰가 지카시
- 청조 고증학 연구의 제일인자로 추사를 꼽음
- 아들 후지쓰가 아키나오는 부친이 남긴 추사 관련 유물과 책을 과천 문화원에 기증 (추사 박물관)
★ 규장각 사검서
-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 고염무 [일지록]
- '실사구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고증학을 일으킨 청조학의 개조. 1695년에 [일지록]을 펴냄.
- 1778년 이덕무가 연경에서 이 책을 보고 감격
★ 실학
- 성리학의 공리공론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한 줄기였음
- 실학은 유형원, 이익,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경세치용, 이용후생의 대단히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으로, 중국과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학분의 신경향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상적 기류가 청나라에서도 똑같이 일어나 고증학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 홍대용
: 1765년 연행 때부터 한중 문화 교류를 열게 되는 계기를 마련
: 지전설 주장
: 충청도 수촌에 사설 천문대라 할 농수각 세움
: 연행 때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만나 교유 시작
: [을병연행록] [회우록] [담헌연기] 등을 통해 박지원과 그의 제자 박제가, 이덕무, 서상수, 유득공 등이 북학파를 형성하는 길을 열어놓음
- 연행
: 박제가, 이덕무 1778년
: 박지원 1780년
: 박제가, 유득공 1790년
: 박제가 1790년
: 박제가 1801년
★ [사고전서] 편찬
- 1773년(건륭 38)부터 10년간 361명의 석학을 동원하여 총 3만 6,000책을 4질 제작하여 네 곳의 서고에 보관
- [사고전서] 편찬 목적은 금서를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증유의 학술사업이 되어 전국의 학자들이 연경에 모여 학술을 번창시킴
- 박제가와 친했던 기윤은 편찬의 총책임자였고, 추사의 스승이 된 옹방강도 이 편찬 사업의 담당자였음
★ 추사의 연행
- 1809년 2달 (24세 때)
- 조강(29세)과의 만남이 교유의 시작 (스승 박제가와 교유했던 기윤과 나빙은 타계 후)
- 조강, 서송을 통해 스승 담계 옹방강(1733~1818, 78세)과 운대 완원(1764~1849, 46세)을 만남
- 완원과의 만남으로 완당이라는 아호 사용
- 옹방강의 석묵서루 : 희귀 금석문과 진적으로 가득하여 수장품이 8만 점
- 조강, 이정원, 서송, 주학년 등 친구와 선배도 많이 사귐
<3장. 학예의 연찬>
- 25~34세. 1810~1819
★ 완당바람
- 자하 신위, 이재 권돈인, 동리 김경연, 황산 김유근, 운석 조인영, 육교 이조묵, 산천 김명희 등은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
- 우선 이상적, 추재 조수삼, 대산 오창렬, 소당 김석준, 역매 오경석 등 역관들은 추사의 제자가 되어 연경 학계와의 교류를 이어줌
- 우봉 조희룡, 소치 허련, 고람 전기 등 중인 출신 서화가들에게 문인적 이상이 담긴 글씨와 그림을 지도
-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한 학풍과 예술사조가 생겨남
★ 추사의 학예 연찬
- 주로 옹방강과 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짐
- 옹방강의 편지에 추사가 써넣은 '실사구시' 풀이글
사실 밝힘 책에 있고 覈實在書
이치 따짐 마음속에. 窮理在心
고금을 고증하니 攷古證今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山海崇深
- 섭지선과의 교유
: 옹방강 문하에서 금석학의 제일인자로 꼽힌 섭지선
: 추사를 좋아했던 헌종이 기거하던 창덕궁 낙선재에 옹방가 글씨의 주련과 섭지선이 쓴 현판이 걸려 있음
★ 북한산 순수비 (99쪽)
- 추사는 과거시험 동방인 조인영과 함께 북한산 순수비를 조사함
- 1816년 7월 한여름, 31세의 추사는 벗 동리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올라 무학대사 전설이 있는 비를 탁본함. (전설의 내용은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오리라'. 무학대사가 한양도읍 터를 물색하기 위해 북한산에 올라오니 한 비석에 이렇게 써 있어 놀랐다는 전설)
- 추사는 그 전설의 비를 다시 더 정림하게 탁본할 필요를 느껴 이듬해 6월, 조인영과 함께 탁본기술자까지 데리고 가서 탁본해 68자를 읽어냄. 거듭 조사하던 추사는 놀랍게도 이 비가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알게됨.
- 추사는 감격적 발견을 기념하여 비석 측면에 자신이 두 차례 다녀간 사실을 이렇게 새겨놓았음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오다. 정축년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아 있는 글자 68개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 실사구시
- [한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
★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
- 1818년 33세의 추사는 장년의 최고 명작이자 생애 최대의 대작이라 할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을 쓴다.
- 1971년 대적광전 보수 때 대들보에서 발견되어, 원본은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이를 그대로 베낀 부본과 보수 과정을 쓴 글은 본래 자리에 넣어둠.
- 추사 해서체의 최고 명작이자 기준작
<4장. 출세와 가화>
- 34~45세. 1819~1830
★ 부친 김노경의 2차 연행
- 1822년. 추사 나이 37세 때 김노경은 동지정사가 되어 2차 연행. 동생 명희가 자제군관으로 동행.
- 오숭량, 등전밀 등과 교유

평양성 고구려 성벽 刻字 탁본, 오경석 탁본, 개인 소장
한문은 '기유(축)년 삼월입일 자차하향 동십이리 물성(구, 하)소형 배?(수)백두 비절의'
번역은 '기유(己酉)년 (혹은 기축(己丑)년) 3월 21일 여기서부터 아래로 동쪽을 향해 12리를
물성(구, 혹은 하)소형(物省小兄) 배?(수)백두가 지휘감독하여 쌓다'이다.

평양성 고구려 성벽돌 刻字,
가로 36cm 세로 18cm 두께 9cm 보물 642호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평양성 고구려 성벽돌 刻字 해석 , 중국학자 유희해의 글로 추정.

평양성 고구려 성벽돌 刻字 해석 , 오경석의 글과 인장

평양성 고구려 성벽 刻字 탁본 해석,
유희해의 <海東金石苑>에서 인용함.
★ 고구려 성벽(평양성) 각자 탁본
- 1829년 대홍수로 평양성이 무너졌을 때 성벽 돌에서 흐릿하게 남은 글자가 발견됨. 추사는 그 탁본을 얻어 연경의 유희해에게 보내 함께 고증했는데, 흐릿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 글씨를 고구려 장수왕 때인 기유년(469)이라고 해석함. 이는 훗날 병술(446)이라 새겨진 각자가 나옴으로써 기축년(449)으로 정정되었지만 금석에 대한 추사의 열정을 보여줌.
- 이 기축명 평양성벽 돌은 오경석이 입수하여 그의 아들 오세창이 소장해왔는데 지금은 이화여대 박물관에 있음
★ 추사와 다산
- 부친 김노경이 평안감사로 임명(1828)되어 평양에 머물던 추사는 중국에서 돌아오는 사신에게 수선화를 얻어 유배에서 풀려나 남양주 여유당에 있던 다산에게 보냄
- "늦가을에 벗 김정희가 향각(평양)에서 수선화 한 그루를 부쳐왔는데 그 화분이 고려자기였다."
여유당전서 권 18
- 추사가 다산 정약용에게 배움을 구하며 자신의 학문세계를 넓혀갔다는 사실은 [완당선생전집]에 실린 다산에게 보년 편지에도 나타남. 추사 집안은 노론의 골수이고 다산은 남인의 간판 격인데 두 석학이 당색을 뛰어넘어 이렇게 학문을 나눔.
<5장.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
- 45~55세. 1830~1840
★ 경전 연구의 평실정상
- 왕희손이 [황청경해]에 관한 글 한 편을 지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완원은 그 글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다.
"학해당에서 [황청경해]의 판각이 이미 완성되어 관찰사 하수서가 서문을 써서 내게 보내며 바로잡아주길 청하므로 약간 첨삭하면서 그 마지막 구절에 '더욱 평실정상(平實精詳)함을 본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 평실정상, '평이하고 실질적이며 정밀하고 상세하게'하는 것이 경전 해설의 요체라는 것이다.
★ 유희해의 [해동금석원]
- 추사를 중심으로 한 경학, 금석학, 고증학의 교류는 청에서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문물 역시 청으로 전해졌고 거기에 감동받은 청나라 학예인들은 또 그 나름의 업적을 낳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희해가 펴낸 [해동금석원](전8권)이다.
- 이 책은 진흥왕 순수비, 평백제비, 성덕대왕신종 명문, 무장사비 단편 등 우리나라 고비, 고종의 금석 탁본 중 유명하고 오래된 것은 거의 다 망라한 기념비적 편찬이다.
★ 황초령비 재발견 시말기
- 북한 국보 황초령비도 추사와 관련
- 친구 권돈인이 1832년, 추사 나이 47세 때 함경감사로 나가게 되어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봐달라고 부탁함
- 추사는 그의 대표적인 논고인 <진흥2비고>에서 북한산비와 황초령비 비문을 상세히 고증했다.
-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탁본 (190쪽)
: 1938년 다산 박영철이 북경 유리창 고서점에서 구입해 오자 위창 오세창은 이 탁본의 내력을 아래쪽 여백에 적어놓았다. 조선과 청나라 금석 교류의 징표가 되는 유물이다.
★ 옹방강과 유용의 입고출신(入古出新)
- 연암 박지원이 주장한 법고창신(法古創新)도 같은 맥락
- 입고출신의 정신에서 새로운 글씨를 추구한 이들이 '건륭 4대가'로 꼽히는 옹, 유, 양, 왕이었다.
: 담계 옹방강 (1733~1818), 석암 유용 (1719~1805), 산주 양동서 (1723~1815), 몽루 왕문치 (1730~1802)
★ 완원의 <북비납첩론>
- [평서첩]을 쓴 청나라 서예가 양헌은 중국 2천년 서예사를 단 13글자로 요약함
진나라는 운을 숭상하고 晉尙韻
당나라는 법을 숭상하고 唐尙法
송나라는 의를 숭상하고 宋尙意
원나라, 명나라는 태를 숭상했다 元明尙態
: 진나라 왕희지 시대 글씨에는 신운(神韻)이 감돌고, 당나라 구양순 시대 글씨에는 법도가 있고, 송나라 소동파 시대 글씨에는 작가의 의취가 있고, 원나라 조맹부와 명나라 동기창 시대 글씨는 자태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 청나라 초기의 글씨는 명나라 말기 동기창 시대의 아름다운 글씨를 모방하는 데 급급하여 새로운 창조를 이루지 못했다. ... 이 답답함을 돌파한 것이 양주팔괴라는 개성적인 서화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개성이 십인십색으로, 강유위가 [광예주쌍집]에서 말했듯이 '변화를 구하려고만 했지 진정한 변화의 의미를 몰라서 괴이한 데로 빠지고 말았다.' ... 그러다 고증학의 정신에 입각해 고비를 연구하는 금석학이 크게 일어나고 급기야 완원의 <북비남첩론>까지 나오며 입고출신의 글씨를 지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금석학에 기초한 입고출신, 그것이 바로 추사체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員嶠 李匡師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

員嶠 李匡師 '지리산 천은사' 水體 편액
★ 추사의 [원교필결] 비판
- 추사는 <북비남첩론>에 입각하여 당시 조선 서예계를 지배하고 있던 원교 이광사를 호되게 비판함
- 원교 이광사 (1705~1777)
: 서예의 명가 출신으로 종고조부 이경석, 증조부 이정영, 부친 이진검 등이 모두 명필
: 양명학을 받아들인 진보적인 학자였으며 인품도 높았고 명필로 이름을 얻음
: 1755년 '나주 벽서 사건'으로 큰아버지 이진유가 처형될 때 원교도 연좌되어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신지도로 이배되어 22년간 귀양살이 하다가 세상을 떠남
: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목숨만은 빼앗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부르짖어 영조가 귀양보내는 걸로 마무리함
: 귀양살이 동안 정말 많은 글씨를 썼으며, 해남 대흥사, 구례 천은사 등 전라도 일대 사찰의 현판에 그의 글씨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 추사는 원교가 죽고 9년이나 지나 뒤에 태어난 인물. 추사 역시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북비남첩론을 주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추사는 역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고 원교에게 잘못한 것이 많았다.
★ 추사의 제자들
- 양반 출신 제자
: 이당 조면호, 동암 심희순, 위당 신헌, 유재 남병길, 자기 강위, 석파 이하응
- 역관 제자
: 우선 이상적, 역매 오경석(1831~1879), 소당 김석준
: 추사 중년부터 제자였던 이는 이상적뿐이며, 오경석과 김석준은 추사의 과천시절에도 20대의 젊은이였다. 특기할 사항은 추사의 양반 제자와 역관 제자 중에는 유장환, 민태호, 남병길, 가우이, 오경석 등 개항기 때 진보적 지식인으로 활동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 중인 서화가
: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소당 이재관, 소치 허련, 희원 이한철, 혜산 유숙, 학석 유재소, 북산 김수철
: 우봉과 소치를 제외하면 모두 제주 귀양 이후의 제자들이다. 결국 추사 중년의 제자는 우선 이상적, 우봉 조희룡, 소치 허련 정도이다.

<6장. 세한도를 그리며>
- 55~59세. 1840~1844
★ 유형 : 죄인을 먼 곳에 유배하여 격리 수용하는 형벌
- 가장 많이 시행된 것이 천사(遷徙), 부처(付處), 안치(安置) 세 가지임
- 천사 : 고향에서 천 리 밖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 말 그대로 고향에서 내쫓는 것.
- 부처 : 중도부처(中途付處)의 준말로 유배에 처한 죄인의 정상을 참작하여 귀양지로 가는 도중의 한 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 주로 고관에게 가해짐.
- 안치 : 본향(本鄕)안치, 주군(州郡)안치, 사장(私莊)안치, 자원처(自願處)안치, 절도(絶島)안치, 위리(圍籬)안치 등이 있음. 본향안치는 죄질이 가벼운 사람을 고향(시골)에 안치하는 것이고, 사장안치는 개인 별장에, 자원처안치는 스스로 유배지를 택하는 것이다. 주군안치는 일정한 지방(주,군,현)을 지정하여 그 안에서만 머물게 하는 것(다산 정약용, 강진). 절도안치는 멀리 떨어진 외딴섬에 안치하는 것이고, 위리안치는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서 살게 함.
★ 대둔사 현판
- 제주도 유배길에 대둔사에 들러 초의를 만나며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 버리고 자신의 글씨를 달라고 부탁.
-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대웅보전'은 이광사(해서체), '무량수각'은 추사(예서풍).
★ 추사의 산수화
-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움의 경지로 돌아가게 하라." 추사가 지향하는 문자향과 서권기. <세한도>도 거기에 서린 고아한 품격이 좋은 것이지 경물을 묘사한 필치의 능숙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 조선시대 유배형의 미덕
- 결과적으로 학자들에게 책을 읽고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
- 다산 정약용 18년, 원교 이광사 22년, 추사 9년
★ 추사의 고통과 위안
- 끊임없는 질병
- 아내의 죽음
- 제자 소치 허련의 방문, 초의스님의 방문
- 양아들 상무를 받아들임
- 독서와 서예 법첩 연구
★ 위당 신헌
- 다산과 추사의 문하에서 실사구시의 학문을 닦은 무관
- 실학자로서 박규수, 강위 같은 개화파 선비들과 교유하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을 도움
-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가 되었고, 1875년 운요호 사건 때는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에 임명되어 강화도조약을 체결함. 1882년에는 요양 중에 다시 전권대관이 되어 조미통상조약을 체결.
★ 세한도
- 1844년 59세 때 작품
- 화제에 쓰여 있듯이 추사가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
- 이상적은 추사가 귀양살이하는 동안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드렸고, 이에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준 것.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된다'하셨는데 ...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 세한도는 실경산수화가 아니다. 대정 추사 적거지에 세한도에 나오는 집과 소나무와 똑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이다. 이 그림의 예술적 가치는 실경에 있지 않다. 실경산수로 치면 이 그림은 0점이다.
- 이 그림이 우리를 감격시키는 것은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
- 청유16가의 제찬
- 소장자의 변천 과정 (293쪽)
: 소전 손재형의 노력. 위창 오세창의 평가 - 추사 ~ 혜곡 에피소드로 활용 가능함
<7장. 수선화를 노래하다>
- 59~64세. 1844~1849
★ 불랑 패서 사건
- 1846년 6월 프랑스 군함 3척이 충청도 해역에 나타난 사건
- 추사조차도 서세동진 하던 서구 제국주의의 본질을 모르고 있었음

★ <유재> 현판
- 유재는 추사의 제자 남병길의 호
-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움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하라."
★ 박규수의 추사체 성립론
"완당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아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소동파와 미불을 따르면서 더욱 굳세고 힘차지더니 ... 드디어는 구양순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닌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했다."
★ 청명 임창순 <한국 서예사에 있어 추사의 위치>
동주 이용희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 일로향실(一爐香室)의 초의스님
- 해배 후 해남 대둔사에서 초의스님 만남
- "여보게 초의, 이 현판을 다시 달고 내 글씨를 떼어내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네." 그리하여 지금 대흥사 대웅보전엔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 구암사의 백파스님과 창암 이삼만에 대한 사과의 마음

추사 김정희 '삼십육구초당', 순천제일대학교 임옥미술관 소장.
ㅡ 칠십이구초당의 반이다.
<8장. 강상의 칠입이구초당에서>
- 64~66세. 1849~1851
★ 추사 생애의 시대구분
1. 1784~1809 (1~24세) : 출생부터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청년 수업기
2. 1809~1819 (24~34세) : 대과에 합격하기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3. 1819~1840 (34~55세) : 출세해서 관직에 있는 21년간의 중년기
4. 1840~1849 (55~64세) : 8년 3개월간의 제주 유배기
5. 1849~1856 (64~71세) : 해배 후 서거까지 8년간의 만년기
- 해배 2년 반만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어 1년간 귀양살이. 이 때문에 북청 유배까지를 추사 유배기의 연장으로 보고, 과천으로 돌아와 만년을 보내는 마지막 4년은 흔히 과천시절이라고 한다.
- 1849~1851년 (64~66세) : 해배 후 용산에 살던 2년 반의 강상시절
1851~1852년 (66~67세) : 북청에 1년간 유배된 북청 유배시절
1852~1856년 (67~71세) : 해배 후 서거까지 4년의 과천시절
★ 용산의 '강상시절'
- 추사체다운 본격적 작품은 해배 후 강상시절
- 최고 명작의 하나로 꼽히는 <잔서완석루>, 거의 신품의 경지로 평가받는 <불이선란>, 제자들이 벌인 서화경진대회의 출품작 비평서인 [예림갑을록] 등이 모두 이 시절의 소산이다.
★ 추사의 아호와 문자도장
- 추사가 사용한 아호와 낙관, 도인에 쓰인 글귀는 무려 200개가 된다. 그래서 어떤 아호로 낙관했느냐는 추사 작품의 편년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
- 추사 아호의 기본은 역시 추사와 완당이다.
★ 흔허스님과 영천 은해사 현판
- 추사의 절집 편액 중에서는 은해사 대웅전이 최고라 할 만 하다.
- '불광'은 높이 170m, 길이 150cm로 추사의 글씨 중 가장 크다.
★ 유산 정학연과의 만남과 <보정산방>
- 추사의 현판 글씨 중 디자인 감각이 가장 잘 살아있는 명품. '보정산방'이란 '정약용을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 이라는 뜻이로 강진 다산초당에 있음
★ 문자향과 서권기
"예서 쓰는 법은 가슴속에 청고고아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청고고아한 뜻은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들어 있지 않으면 능히 팔뚝과 손끝에 발현되지 않는다." ...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기본이며 그것이 예서를 쓰는 신결이다.
- 전집 권7, 잡저, 상우에게 써서 보이다
★ 수련
"하늘이 총명을 주는 것은 귀천이나 상하나 남북에 한정되어 있지 아니하니 오직 확충하여 모질게 정채를 쏟아나가면 구천구백구십구 분은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나머지 일 분이 인력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니 끝까지 노력해야만 하는 거라네."
- 전집 권4, 오경석에게, 제1신
★ 추사와 석파 이하응
- 남연군과 추사가 이종사촌지간, 석파에게 추사는 5촌 아저씨 (34세 차이)
- 석파는 생활이 곤궁한 추사에게 여러 물품을 보냄.
★ 진종의 조천 문제
- 영조 다음 왕은 정조였지만, 사도세자의 형이 진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왕통으로 따지면 진종은 철종의 5대조가 되고 가통으로 따지면 4대조가 된다. 이로써 '진종의 위패를 조천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생겨났던 것이다.
- 헌종의 대통을 은언군(사도세자의 작은 아들)의 손자인 원범(철종)으로 잇게 되면서 왕통과 왕가의 가통에 생긴 혼선
- 안동 김씨 세력과 반 안동 김씨 세력간의 예송 논쟁에서 밀리면서 추사는 북청으로 다시 유배
<9장. 북청의 찬 하늘 아래>
- 66~67세. 1851~1852
★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 침계 윤정현이 함경감사로 있는 동안 황초령비를 다시 한번 찾아보게 함. 20년 전(1832년, 47세 때) 권돈인이 함경감사로 부임해갔을 때 황초령비를 찾아보게 하여 마침내 비석 조각을 발견하여 그 탁본을 얻어보고 <진흥2비고>를 저술한 바 있다. 그러나 권돈인은 당시 이 비를 추사의 뜻대로 보존하지 못했다.
- 윤정현은 이 비를 다시 찾아내 원위치인 황초령 고갯마루까지 오리지는 못하고 황초령 아래 중령진까지 옮겨 세우고 거기에 비각을 지어 보호하도록 조치했다. ... 추사는 황초령비의 글씨체와 어울리는, 금석기 흥건히 넘치는 예서체 글을 써주며 현판으로 만들어 달게 했다. 저 유명한 <진흥북수고경>이다.
<10장.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 67~71세. 1852~1856
★ 석파 이하응의 난초 그림에 대한 평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 분까지 이렀다 해도 나머지 일 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 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석파가 ... 더 나아갈 것은 다만 이 일 분의 공이다."
- 전집 권6, 석파 난권에 쓰다
★ 一讀 二好色 三飮酒
- 첫째는 독서, 둘째는 여자, 셋째는 술
- 추사의 과천시절 자작시
한평생 마음 잡아 지니던 힘도 平生操持力
한 생각의 잘못을 대적 못 하리. 不敵一念非
지나온 세상살이 30년 동안 閱世三十年
배움이 복인 줄을 이제 알았네. 方知學爲福
★ [산림경제]
-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수많은 즐거움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손자와 노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추사는 불행하게도 어린 손자와 놀 기회가 없었다.
★ 역매 오경석과 위창 오세창 (497쪽)
- 미술사가로서 추사의 안목은 역매 오경석(1831~79)에게 전수되었다. 오경석은 우선 이상적의 제자로, 1846년 16세 때 역과에 합겨하여 23세 때인 1853년 처음 연경에 통역관으로 따라간 뒤, 4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6년간 무려 13차례나 중국에 다녀왔다. 추사가 과천에 있을 때 오경석은 겨우 20대 초반이었다. 오경석은 중인이지만 추사는 그의 영민함을 알아보고 곧 제자로 삼은 듯, 그에게 서화, 금석의 감정을 가르친 자취가 과천 곳곳에 남아 있다.
- 훗날 오경석은 개화운동을 펼치는 틈틈이 연구한 금석 관계 자료를 모아 [삼한금석록]을 펴냈다. 그의 개화사상은 김옥균, 유길준 등 양반 자제들에게 전해졌고, 서화 연구는 아들 위창 오세창(1864~1953)에게 전수됐다.
- 위창은 미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육당 최남선이 쓴 <기미독립선언서>를 마지막으로 감수할 정도로 권위 있는 구학문의 마지막 선비였다. 그때 위창은 육강의 초고를 검토하던 중 그 유명한 "무릇 기하(幾何)이며" 시리즈 가운데 "아(我) 생존권이 박탈됨이 무릇 기하이며"라는 구절을 보고 "박탈은 능동태이므로 피동태로 쓸 때는 박상(剝喪)으로 해야 한다"고 하고 육당에게 일갈하기를 "요즘 젊은 애들은 한문을 잘 몰라서 큰일"이라 했다고 한다.
- 위창의 서화사 연구는 한국미술사 불후의 고전인 [근역서화징](1928)으로 맺어졌다. 위창은 또 간송 전형필 선생의 고서화를 감정해주어 오늘날 간송컬렉션이 빛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위창은 결국 아버지 역매를 통하여 추사의 금강안을 이어받은 셈이다.
- 정조경은 금석과 서화에 능한 학자였다. 전각가로 유명한 정정로의 아들인 그는 가학을 이어받아 [오군금석목] 같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그는 추사의 제자인 오경석과 가까이 지냈다.
★ 노과 시절의 괴(怪), 졸(拙), 허(虛)
- 과천시절 추사는 지금 남아 있는 것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글씨를 썼음
- 추사의 예술은 과천에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음
- '불계공졸' :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
- 노자 '대교약졸(大巧若拙)' :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
★ 山崇海深 遊天戱海 (산숭해심 유천희해)
- 높이 42cm, 길이 420cm로 은해사의 '불광' 현판을 제외하면 현존 추사 작품 중 가장 크다
- <산숭해심>과 <유천희해>는 본래 한 작품이던 것인데, 1957년 3월 대한고미술협회가 주관한 경매전에서 <산숭해심>은 애호가인 심상준이 55만 환에, <유천희해>는 소전 손재형이 121만 환에 낙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숭해심>은 낙관이 없어서 반값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오랫동안 이산가족이 되었다가 뒤에 두 점 모두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게 되면서 다시 상봉했다.
★ 동양 서예사에서 추사체의 위치
- 조선 4대 명필 : 안평대군,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
- 청나라는 학(學)을 숭상했다. 그들은 고전을 배우고 익히면서 개성을 창출할 것을 지향했다.
- 청나라 대표적인 서예가는 정섭, 유용, 등석여, 이병수. 하지만 중국 땅에서 살지 않았을 뿐 청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는 추사 김정희다.
- 진나라 : 왕희지, 왕헌지
당나라 : 구양순, 저수량
송나라 : 소동파, 미불
원나라 : 조맹부
명나라 : 동기창
청나라 : 추사 김정희
★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 전집 권4, 오규일에게, 제2신
★ <대팽고회>
- 1940년 무렵 경매에 출품. 간송 전형필은 일본인 수집가와 경쟁이 붙었는데, 당초 100원이 예정가였지만 일본인이 300원으로 올리자 아예 1,000원을 불러 낙찰 받음 (당시 쌀 한 섬에 3원)
★ 봉은사 <판전>
- '칠십일과병중작'이라고 낙관
- 추사의 절필(絶筆)
<종장.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 추사 김정희의 인간상
"내 글씨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나는 칠십 평생에 벼 열 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 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 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