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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 김생

보허 步虛 2019. 2. 1. 03:52

 

 

  김생은 통일신라시대 서예가이다. 고려시대 문인들에 의해 해동제일의 서예가로 평가받았으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는 그를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미 그의 친필이 귀해서 이광사의 《원교서결》에서 아주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글씨를 엿볼 수 있는 필적으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이 비문 글씨들은 954년(고려 광종 5)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글씨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구양순류의 단정하며 아름답고 고운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붓놀림으로 김생만의 개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서첩으로는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 《선우추김생서법첩(鮮于樞金生書法帖)》이 전하며, 그밖에 《해동명적(海東名蹟)》 《대동서법(大東書法)》에 몇 점이 실려 있다. 특히 그의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는 자유분방하며 힘이 넘치는 작품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중인 《선우추김생서법첩》은 원나라 서예가 선우추와 김생의 친필을 조선 중종 때 모사해 새긴 뒤 찍어낸 것이다. 이 서첩에 실린 김생 글씨는 《전유암산가서》 《보덕사(報德寺)》의 2점뿐이지만 신품으로 불린 그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김생의 글씨체는 왕희지체를 기본으로 중국 육조 시대의 필의(筆意)와 당대(唐代) 저수량의 서풍에서 취한 것이 많다.
한 획을 긋는 데에도 굵기가 단조롭지 않아 반드시 변화를 일으키며, 선은 곡직(曲直)의 미묘한 운율을 구사하였다. 결구(結構)에 있어서는 음양향배(陰陽向背)의 묘를 느낄 수 있게 하여 과거 어떤 사람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서법을 창안하였다.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     부분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     부분

 

 

 

   이 비석의 정식 이름은 태사자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朗空大師白月栖韻塔碑로 통일신라의 국사였던 낭공대사를 기리는 비석이다.

     이 비석의 글씨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서예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집자集字란 특정한 한사람의 글씨를 뽑아서 한 작품의 글씨처럼 연결하는 것을 말하는데, 옛날부터 문장을 돋보이게 하거나 높이 기리기 위해 명필들의 글씨를 집자하여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서예 신품사현神品四賢의 한 사람인 김생은 '해동海東의 서성書聖', '신라의 왕희지'로 추앙받는 명필이지만, 오늘날 그의 글씨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비석은 김생의 글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김생은 왕희지의 글씨를 바탕으로 자신의 글씨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 비석 역시 힘찬 필치의 김생 글씨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에 대해, 옆면에는 절터에 버려져 있던 비를 옮긴 사유9원래 비석에 없던 글씨를 나중에 새겨 넣은) 그리고 뒷면에는 낭공대사께서 입적하셨을 당시에 세상이 어지러워 비석을 세우지 못하다가 고려 통일 후 광종 임금 때에 비로소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비석 건립과 관련된 내용 및 관계 인물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田遊巖山家序  /   탁본

 

 

 

 

 

낭공대사비의 행방 (김생 글씨集字) 

 

[인용자료]

 

낭공대사碑 역마살 끼었나
신라 명필 金生의 글씨 기록된 문화재 불구 이리저리 유랑생활
<주간 동아> 2000년 8월 10일자
 
비(碑)의 궤적을 찾아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무더위가 맹위를 떨친 지난 7월27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청량산의 한 자락을 붙들고 앉은 이 골짜기 마을엔 그러나 신라 명필 김생(金生·711∼791)의 글씨를 집자해 만들었다는 비의 흔적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신라시대 고찰로 조선 중기에 이르기 전 일찍이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 태자사 절터. 이곳에 있었다는 낭공대사비 대신 기자를 맞은 것은 비신(비의 몸체)이 달아난 채 남아 있는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와 이수(이首·용이 새겨진 비석 덮개돌). 수년간 손대지 않은 듯한 퇴락한 비닐하우스와 지난 93년 폐교된 태자초등학교의 낡은 건물 사이로 숨겨지다시피 놓인 이 석조물들은 한눈에 보아도 1000년의 풍상을 겪었음직한 것들이었다.

 

‘이 석조물은 신라 말기 왕사(王師)인 낭공대사의 백월서운탑비의 귀부와 이수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제작 연대는 확인 못함… (중략) …우리나라 금석학상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 안동시청이 석조물 옆에 세워둔 안내표지판은 이 귀부와 이수가 ‘경북도 문화재자료 68호’란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표지판 내용대로라면 이 귀부와 이수는 낭공대사비의 부속물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청량산 일대 김생 유적을 답사하고 있는 대구의 금석문연구가 이봉호씨(67)는 “이 귀부와 이수는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낭공대사비의 것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이씨의 말은 사실일까. 그렇다면 낭공대사비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의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박물관 창고서 14년째 햇빛 못 봐

  

낭공대사비의 기구한 유전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식 명칭이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인 이 비는 원래 신라시대 명필로 ‘해동의 서성(書聖)’으로 불리며 중국 송나라의 최고 명필 왕희지와 비견되던 김생의 글씨들을 고려 광종 때인 954년 승려 단목(端目)이 집자해 새긴 비석. 명승이자 신라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이기도 했던 낭공대사(832∼916)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에 남겨진 낭공대사비의 운명은 순탄치 않다. 건립 당시 경북 봉화군 태자리(일제강점기에 안동 땅으로 편입됐다)의 태자사에 세워져 있던 이 비는 조선 중종 때인 1509년 당시 영주군수 이항(李沆)에 의해 영주군청 정자인 자민루(字民樓) 앞으로 옮겨져 400여년을 보낸 것으로 비의 측면에 기록돼 있다.

 

제자리를 잃은 낭공대사비의 수난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이 비를 총독부 박물관이 있던 경복궁으로 옮긴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놓여 있던 이 비는 다시 1986년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의해 구 중앙청 건물로 이전해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 창고로 옮겨진 후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다.

 

7월28일 기자는 낭공대사비의 현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신광섭 유물관리부장(49)은 “낭공대사비 비신은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안전하게 보관, 관리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포장이 씌워져 있다는 이유로 사진촬영은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의 도록을 보여줬다. 도록엔 가운데가 절단된 낭공대사비의 사진이 있었다. 인수 당시의 상태 그대로라는 것이 박물관측의 답변.

 

중앙박물관엔 현재 12만여점의 소장유물 중 5000여점만 상설 전시되고 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유물은 특별전시 계획이 없는 한 낭공대사비처럼 수년간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낭공대사비는 아직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가치는 매우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김생 글씨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 신품(神品)으로 불릴 만큼 출중해 낭공대사비는 김생의 글씨를 연구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 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 유물관리부 학예연구사 조용중씨(40)는 “우리나라 비석 문화는 세계적으로도 수준이 높지만 수장고 내에 있는 전체 비석 수는 10점도 안 될 만큼 희소하다”고 말했다.

 

제자리를 떠나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낭공대사비엔 몇 가지 의문이 따른다.

 

총독부는 왜 낭공대사비를 서울로 옮겼을까. 조씨는 박물관에 남아 있는 각종 자료를 통해 낭공대사비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고 했다. 그가 제시한 박물관 유물관리 카드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1919년 6월11일 누군가로부터 이 비를 당시 돈 100원에 사들여 경복궁 정원에 세운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구입했는지, 왜 구입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또 여러 금석학 문헌에서 밝히고 있는 ‘1918년’이란 비석 이전 시기도 1년이나 차이가 난다.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박물관측이 낭공대사비에 대해 아는 사실은 이 비가 191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진 이후 1959년에도 여전히 경복궁 정원에 있었고 1986년에 비로소 박물관 창고로 직행했다는 것 정도다.

 

다행히 낭공대사비는 조만간 ‘세상빛’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측은 2003년 말 준공 목표로 서울 용산에 건립 중인 새 중앙박물관이 완성되면 낭공대사비를 일반에 공개할 전시계획을 잡아두고 있다는 것. 17년여에 걸친 ‘지하 유배생활(?)’을 끝내게 되는 셈이다.

 

이젠 귀부와 이수를 찾아보자. 박물관측은 “낭공대사비의 귀부와 이수는 원래부터 사라지고 없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현재 안동에 있는 귀부와 이수는 무엇인가. 안동시의 추측대로 낭공대사비의 것일까.

  

2003년 말 일반 공개 추진

 

아쉽게도 중앙박물관측은 물론 대다수 학자들의 관심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 석조물의 명예관리인인 태자리 주민 김점수씨(53)는 “일부 대학생이나 서예 동호인들의 현장 답사는 간간이 이어지고 있으나 전문 학자들이 찾아온 적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점에 의문을 품어온 금석문연구가 이봉호씨는 이미 2년 전 귀부와 이수의 치수를 재보았다. 이씨의 실측 결과에 따르면 이 귀부와 이수에 맞는 비신의 크기(높이는 알 수 없다)는 폭 85cm, 두께 14.5cm. 중앙박물관측이 밝힌 낭공대사비의 실측 결과인 비신 높이 208.5cm, 폭 102cm, 두께 26cm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비석이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도대체 태자사터에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는 어떤 비석의 것일까. 그리고 그 비석은 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안동시 문화재계 관계자는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래 태자사터엔 낭공대사비와 함께 통진대사(通眞大師)비라는 비석이 하나 더 있었던 것으로 돼 있다”며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의 주인이 통진대사비가 아닐까 추정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장유물 중 통진대사비라는 것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중앙박물관측은 “해당유물 자체는 물론 그에 관한 기록조차 전혀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결국 언제인지 모르지만 귀한 비석 하나가 일찌감치 사라져버렸다는 얘기다.

 

어쨌든 같은 절터에 나란히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비석의 엇갈린 운명은 오랜 우리 문화재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하다. 혹 우리의 유물 조사연구가 너무 크고 화려한 유물들에만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두 비신의 크기 차가 확연한데도 아직 일부 문헌에서는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가 낭공대사비의 것이라고 단정짓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결국 잃어버린 낭공대사비의 귀부와 이수를 찾는 일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의 주인인 또 다른 비석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일도 과제로 남는다. 문화재는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정신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 원래는 경복 봉화군 하남면 태자리의 태자사에 있던 것이었으나, 조선시대에 경복 영주군 영주면 휴천리 '영주군청'의 '자민루'로 옮겨졌던 것을 다시 1918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세운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의 모습이다. 왼쪽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진열 전시되던 때의 모습이고, 가운데는 <조선금석고>에 수록된 비석의 탁본자료이며, 오른쪽은 낭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로 알려진 경북 문화재자료 제68호인 '태자사지귀부및이수'(경북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1082)의 모습이다. 그런데 위에서 소개한 인용자료에 보면, 이 귀부및이수의 크기는 낭공대사탑비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사실이 확인되어, 엄밀하게 낭공대사탑비와 한몸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용해설]

 

이 비석의 존재와 행로에 대해서는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에 관해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요약하자면 원래 경북 봉화군 하남면 태자리에 있던 이 비석은 조선시대 중종 때인 1509년 당시 영주군수 이항(李沆)에 의해 경북 영주군 영천면 휴천리의 영주군청 '자민루(字民樓)'로 옮겨졌던 것을, 1917년 여름 무렵에 그 존재가 다시 드러나 조선총독부가 이를 총독부박물관으로 다시 옮겨갔는데, 이때가 1918년이었다. (중종 시절에 '자민루'로 옮겨진 사실은 비석의 측면에 관련내용에 새겨져 있으므로,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이 비석이 총독부로 옮겨진 때는 대개 1919년이라고 적고 있는 자료들도 적지 않은데, 이는 총독부박물관 시절에 작성된 수장품카드에 바로 '1919년 6월 11일'이라는 표시가 들어있는 데서 빚어진 오해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수장품카드의 작성을 지칭하는 것일 뿐 유물의 반입일자를 뜻하는 것이 아님은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이 부분은 아래의 목록에서도 보듯이, 진열품번호#본관 6751부터 #본관 6754에 해당하는 박물관수장품카드에 모두 '1919년 6월 11일'이라는 날짜가 표기된 것으로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진열품번호#본관 6751 철부(개태사 철확)

진열품번호#본관 6752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

진열품번호#본관 6753 경천사탑

진열품번호#본관 6754 태자사지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이 가운데 봉림사 진경대사탑비는 1919년 3월에 옮겨온 것이 확실하며, 나머지는 1918년에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으로 확인되는 것이지만, 이 유물들이 동일한 날짜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그걸 잘 말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건 유물반입일자가 아니라 (한꺼번에 작성된) 카드정리일자라는 얘기이다.

 

아래의 기록에서 보듯이, 태자사 낭공대사탑비는 1918년에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정 7년에 있어서 조선", <조선휘보> 1919년 1월호

- 금석유물의 수집

1)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 경북 영주군 영주면)

2) 석가철상(釋迦鐵像, 충남 서산군 해미면)

3) 경천사탑(敬天寺塔, 원 경기 개성군 광덕면)

 

"대정칠년도 고적조사성적", <조선휘보> 1919년 8월호

- 본년도 박물관 취기 완료유물

1) 영주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榮州 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 전년도중 운반에 착수했으나 본년도에 들어와 박물관에 도착함) 

2)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 寶月凌空塔碑)

3) 논산 개태사지 철부(論山 開泰寺址 鐵釜)

 

그리고 박물관 수장품 카드에 보면, "가격 100원정"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바 이를 두고 "누군가로부터 그 가격에 사들인 것"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오해이다. 이건 구입비용이라기보다는 비석의 운반비를 포함한 제반반입비용의 의미가 강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절터에 흩어진 유물을 가져오는 댓가로 관련자에게 일정 금액을 준 사례도 없지 않지만, 초기 수장품카드에 기록된 (흔히 유물구입가격으로 오해되는) 금액표시는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부대비용'의 뜻으로 표시한 것으로 보면 틀림없다. 이는 유물반입경로가 확실한 다른 반입유물의 수장품카드에 표시된 기재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참고 삼아, 낭공대사탑비의 존재가 조선총독부에 처음 포착된 당시의 신문자료를 아래에 덧붙여 둔다.

 

 

[자료 1]

 

김생(金生)의 서(書)로 성(成)한 고비(古碑)

봉화 태자사의 백월서운탑을 발견

조선고적조사회 위원장 오다 간지로(小田幹治郞)씨 담(談)

<매일신보> 1917년 10월 12일자

 

오랫동안 그 거처를 잃어서 고적을 상고하는 사람의 애석히 여기던 백월서운(白月栖雲)의 비석도 다행히 두어달 전에 경상북도

 

▲ <매일신보> 1917년 10월 12일자에 수록된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관련 기사이다. 여기에 나온 내용을 보면, 경북 영주로 옮겨졌던 이 비석은 "두어달 전에" 발견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영주에서 발견되어 그 비문을 박인 것도 두, 세 장이 고적조사회에 와 있으며 이 비것은 일간 총독부박물관에 가져오기로 되었더라. 이 비석에 새긴 글씨는 조선에서 가장 오래인 명필로 그 이름이 높은 신라 김생(金生)의 글씨를 모다 새긴 것인데 고려 숙종시대에 송나라로부터 건너왔던 사신을 따라 송나라에 들어갔던 학사 홍관(洪灌)이가 김생의 쓴 흘림글씨 한 권을 그때의

 

명필문장에게 보였더니 모두 다 조선사람의 글씨라고 믿는 이가 없고 지나 고금에 제일명필인 왕희지의 필적이 아닌가 한고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 할 지경이라. 그런데 이 사람의 필적은 애석히 지금에 전하는 바이 없고 다만 이 태자사(太子寺)의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에 김생의 글자를 모아 새긴 것이 하나 남아 있을 뿐인 고로 실로 극히 귀중한 비석이라.

  

    이 비석도 김생이 쓴 것은 아니니 김생과 낭공대사는 시대로 매우 틀리고 석단목(釋端目)이라는 사람이 김생의 글씨를 주어 모아서 돌에 새긴 것이라. 이 백월서운의 비라는 것은 지금부터 구백육십삼 년전 신라말년의 도승으로 그 이름이 높던 낭공대사의 사리를 묻은 경상북도 봉화군 태자산 태자사 사리탑의 비문으로 그 비문을 최인곤(崔仁滾, 최인연의 잘못)이라는 사람이 지어서

 

   이것을 새길 때에 글자의 서체를 여러가지로 선택한 결과 서목이가 조선명칠 중에 제일이라 일컫는 김생이 끼친 글씨를 모아서 비로소 이 탑비가 이룬 것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최근에 간행된 '조선휘보'에 설명할 터인데 하여간에 조선의 옛일을 상고하는데 가장 유익한 자료가 되는 것은 분명히 말하기에 기탄치 아니하노라. 김생이라는 사람은 기록에 '탄생한 지방을 알지 못한다' 하여

 

  어느 지방의 태생인지 알 수 없으나 신라 성덕왕 십년 임술에 탄생하였으며 다른 재주는 닦지 않고 전혀 글씨에 진력하여 나이 팔십이 넘어서 오히려 붓을 잡아 쉬지 아니하며 예서, 행서, 초서가 모두 신묘한 지경에 들었다 하였는데, 이 글씨를 모은 귀중한 비석이 어떻게 하여 봉화로부터 (지금의 영주군 영천면)에 옮겨가서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깊이 묻혀 있었는가 하면,한번 김생에 이름이 송나라에 물린 뒤로는 지나에 사신이 올 때마다 이 비문을 박아 달라고 청구하는 고로 중종 4년에 봉화군사 이완(李浣)이가 군내의 유지자 권현손(權賢孫)과 상의하고 가만히 봉화의 동현 마당으로 옮겨다가 다시 영천으로 가져온 거신데 가석한 일은 비의 대가리와 받침이 깨여졌으나 비문은 전부가 분명하다. (비의 길이가 육척 구촌이오, 폭이 삼척 이촌이오, 두께가 팔촌 오푼이오, 비문이 이천 오백 칠십 삼 자인데, 여기 게재한 사진은 비문 박인 것의 일부분을 사진으로 박은 것이라.)

 

 

[자료 2]

 

귀중(貴重)한 김생(金生)의 서(書)

그 진필은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

'백월서운의 탑비에 대하여' ......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씨 담(談)

<매일신보> 1917년 10월 13일자

 

조선의 서성 김생(書聖 金生)의 필적을 엿볼 수 있는 백월서운(白月栖雲)의 비명은 지금까지 묘연히 그 그림자가 감추어 허다 세월에 그 거처를 알지 못하였더니 이번에 홀연히 세상에 나타났다는 일은 실로 서화를 연구하는 사람을 위하여 경사로운 일이라 유래로 이 백월서운의 탑비는 돌의 높이가 여석 자 여섯 치, 폭이 세자 세치에 글씨가 서른 한 줄, 한 줄에 여든 석자, 한 자의 크기가 사방 팔푼되는 행서인데 본래 경상북도의 석남사(石南寺)에 있던 것으로 신라 신덕왕(神德王)의 육년에 최인곤(崔仁滾, 최인연의 잘못)이가 글을 지어 석단목(釋端目)이가 김생의 글씨를 모아 석비에 새긴 것이라.

 

   김생이란 사람은 앞에도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의 서성이라 함을 불구하고 그 필적이 세상에 남아서 그 신령한 유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실로 이 비문 뿐이오 또 경상북도 경주 남산 산록에 있었다 하던 창림사(昌林寺)의 비도 또한 김생의 글씨이었으나 그 비는 이조의 중엽에 없어져 버렸다 전하는데 조자앙(趙子昻)은 이 비문에 박인 것을 보고 실로 왕희지의 글씨도 이에 밋지 못하겠다고 칭찬을 마지 않았다 함안 보아도 김생의 글씨가 얼마나 귀중함을 알 수가 있다. 백월서운의 비는 앞에도 말한 것과 같이 김생의 죽은 뒤 백년 가량이나 지나서 석단목이가 그의 끼친 글씨를 모아서 새긴 것인데 세상에서 혹시 그 비의 자체가 저윽이 빡빡한 곳이 있는 고로 김생 시의 글씨는 아닌 듯하다고 비평을 하는 말도 있었으나 이것은 돌에 새긴 까닭으로 얼마쯤 획이 빡빡하여진 일도 있을 걸이라.

 

   이 백월서운의 탑이 세상에 유명하여진 뒤로 항상 구경오는 사람이 많은데 그 중에는 고관대작의 사람도 오는 까닭에 그 지방백원은 응접이 고로워서 가만히 땅속에 묻어 버려서 거처를 읽었더니 그 뒤에 어떤 촌민이 외양간 속에서 파내어서 얼마동안 세상에 나타났다가 그 뒤에 또한 거처를 잃은 뒤로 금일가지 이르렀으며 다만 비문 박인 조화로 겨우 김생의 면목을 엿볼 수가 있을 뿐이더니 다시 그 원비가 세상에 발견된 것은 실로 이 위에 다시 없을 좋은 참고품을 얻은 세음이라.

 

   대체 김생이란 사람은 그 성명을 자세히 알 수 없도록 미천한 출신으로 삼국사기 등에도 '김생의 부모가 미천하여 유래를 알 수 없다......' 고 기록하였으며 신라 원성왕 시대의 사람으로 팔십 이상이나 여섯 임군의 세상에 살아 있었음은 삼국사기 등에 의지하여 추찰할 수가 있으며 또 정동기(鄭東驥)의 주영편(晝永篇)에는 '新羅金生之書寺刹中往往石黑質金字經, (?)良爲金生書, 多胃稱不可信, 或言金生名玖, 未知出可書 ......'라 하였으며 또 어떠한 책에는 김생의 자는 지서(知瑞)라 하엿으나 지서를 김생의 자라는 것은 아미 최인곤의 관명중에 지서서원(知瑞書院)이라는 글자가 있는 비문을 잘못 해석한 것인 줄로 믿는다.

 

  하여간 김생의 진필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하여도 좋으며 세상에서는 왕왕히 김생의 글씨라 일컫는 경문조각을 팔러 다니는 자가 있으나 모두 믿을 수가 없으며 그 진필은 김생의 생시에도 오히려 극히 드물었던 듯이 생각되노라. 김생의 필적은 금일에는 백월서운의 탑비와 및 영화석각(永和石刻)에 나타나 있을 뿐이오 이 백월서운의 비와 영화석각은 김생의 필적을 엿볼 수 잇게 세상에 남아 있는 다만 두 개 보배인데 이제 백월서운의 원비가 발견되었다 함은 옛일을 상고하는 자료로 조선의 귀중한 보배를 얻었다고 이르지 아니할 수 없다.

 

 

 

 

 

김생(金生)에 대하여

 

   711년(성덕왕 10)∼791년. 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생은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행서·초서가 모두 입신의 경지였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홍관(洪灌)이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폭을 내보이자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하며 놀라워하였다.”고 한다.

 

   그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 현재 경복궁에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이 비의 비문 글씨는 고려 954년(광종 5)에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행서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구양수 류(類)의 단정하고 미려한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운필로 서가(書家)의 개성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

 

 

 

왼쪽의 글씨가 경복궁碑 글씨(탁본)다

 

 

    중국에 왕희지가 있다면 한국엔 김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왕희지가 이전 시대의 전서·예서를 토대로 위(魏)·진(晉) 이래 서법(書法)을 세웠다면,

김생은 통일신라 이전의 삼국 글씨를 토대로 왕희지의 서법과 당나라 서법까지 하나로 녹여

우리나라 글씨의 법(法)을 일으켰다.

 

    海東書聖(바다건너 동쪽의 글씨 성인), 筆神이라 불린다.

그 이후 고려의 탄연(坦然), 조선의 안평대군·한석봉·김정희 같은 명필이 등장,

한국 서예는 중국 서예와 같고도 다른 궤적을 걸어왔다.

소개하는 글씨 이미지는 전시회에 진열된 글씨와는 상관없이 자료파일에서 옮겨온 것이다.

 

 

 

 

 

 

<송하빈객귀월>의 부분

 

 

 

丈人峰(장인봉) 집자

 

 

 

 

 

 

靑凉山  &  金生

 

 

                                                 정민호 청량산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생굴                                                      김생암터

1

 

 

 

 

 


 

 

 

 

 

     청량산에는 김생과 관련한 유적이 전한다. 경일봉 아래에 자리한 김생굴과  그 앞의

  김생암터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청량지]의 기록이다.

 

      김생굴은 경일봉 아래에 있다. 천장(千丈)이나 되는 철벽에 암굴(巖窟)이

      아하여 여러칸의 집을 지을 수 이따. 굴 위로는 비폭의 발을 드리운 듯 하다.

      옛에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김생이 일찍이 이곳에 은거하였따. 김생은 신라

      사으로 재산에서 태어나서 이 산에 들어와 글씨를 배우고 필명을 천하에 떨

      쳤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김생은 재산에서 태어나 경일봉 아래에 있는 천길 낭

 떠러지의 바위굴에 작은 암자를 짓고 글씨공부를 해서 필명을 천하에 떨쳤

 다고 한다.이와 같은 사실은 청량산을 소재로 작성된 유산기(遊山記)에서도

 자주 거론된다. 특히 퇴계의 문인으로 청량산을 유람한 권호문(權好文)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서도 김생은 재산(才山)에서 출생하여 청량산 경일봉아래

  에 위치한 굴에서 글씨공부를 하여 일가를 이루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재산은 현재 청량산 입구와 동북쪽으로 연접해 있는 봉화군의 면소재지 중 하나이 

  다. 그러나 『청량지(淸凉志)』와 권호문의 「유산록」에서는 김생의 재산

 생설의 근거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이들이 청량산

 에 그의 유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당시 이 지역에 전해지고

 있었던 전설을 차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렇다 치더

 라도 근거가 될 수 있는 사실 여부는 그의 출생을 언급하고 있는 기록을 통

 해 그 가능성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생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찾아 볼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김생은 집안이 한미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고 기록되

 어있다. 이는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의 성은 김씨요, 이

 름은 생으로 표기한 예는 여러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생'은 이른바 '선생'이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존칭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접미사

 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80평생을 글씨공부에 매진하여 한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실은 글씨하나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 그는 서성(書聖)으로 불려졌으며, 존칭의 함축된 '생'으로 부르게 

 되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언급된 바와같이 집안이 한미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

 는점, 그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점 등은 왕경인(王京人) 즉 경주사람이

 아니라 외경인(外京人)이였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 당시 신라사회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수도였던 왕경에는 왕족인

 성골과 진골, 삼한시대의 부족장이 6두품으로 편제되어 거주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김생은 경주가 아닌 지방출신이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사

 실은 그가 청량산 인근인 재산에서 태어나서 청량산 경일봉의 굴에서 수도

 했을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조선전기 때 학자였던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청량산에 관한

 기록중 가장앞선 것으로 보이는 칠언고시 한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구

 중 김생의 행적을 언급한 부분이 보인다. 이 시에 따르면 산중에 김생이 수

 도하던 굴이있는데, 김생이 여기에서 천여 축의 불경을 써 내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시는 고려시대에 쓰여 진 작품으로 당시 정명국사(靜明國師)였던

 천인(天因)이라는 스님이 치원암 주지가 산중고사에 대한 시 한 수를 요청

 하기에 이에 화답하여 지은 것이다. 이 시는 비록 치원암 주지에게 들은 이

 야기를 토대로 쓴 작품이지만 김생이 활약하던 시대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고

 려시대에도 김생의 청량산 수도설이 회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다. 그리고 '바위 뿌리에서 흐르는 먹은 언제나 벼루에 떨어졌고,천

 제는 약을 내려 눈을 밝게 하였다'라는 구절은 김생이 암굴에서 글씨에 정

 진하여 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김생의 청량산 수도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청량산 외에도 그

 부근에 남아있다. 바로 청량산 인근인 안동의 문필봉(文筆峯)에 그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문필봉은 현재 안동시 남선면 갈라산의 한 봉우리이다.

 청량산과 안동은 지척지간이다. 고려시대부터 청량산은 안동땅에 소속되어

 있었고, 근대까지 그 영역은 안동이었다. 김생이 안동의 문필봉에서 글씨공

 부를 했다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문필봉이란 이름은 김생의 수도로 인해 얻어진 이름이

 라 한다. 이 사실은 김생의 수도설의 근거를 더욱 구체화해준다. 말하자면

 김생이 청량산과 그 인근에서도 족적을 남긴 것으로 미루어 권호문이 언급

 한 것처럼 김생은 재산에서 태어나서 청량산 경일봉과 인근 안동 문필봉 등

 지에서 글씨공부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글씨를 집자해서 세운 탑비가 청량산 인근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 또

 한 김생의 청량산 수도설을 더욱 명확히 해준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청량산

 과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속에 태자사라는 큰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찰에 통일신라시대 신덕왕(神德王)과 효공왕(孝恭王)의 왕사(王師)였던

 낭공대사(郎空大師)의 행적을 기록한 비가 세워졌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

 운탑비(太子寺郎空大師白月栖雲塔碑)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비는 낭공대사

 의 문인이자 나말려초(羅末麗初)의 대문장가였던 최인연(崔仁연)이 짓고 승

 려 단목(端目)이 김생 씨를 집자하여 고려광종 5년(954)에 낭공대사의 문인

 이자 문하법손인 순백(純白)스님에 의해 세워졌다. 비신의 높이는 218cm,두

 께 25.5cm이며, 글자는 자경 2~3cm, 자수는 대략 3,500자 정도로 장중한 멋

 을 풍긴다. 비의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행력이 적혀있고, 뒷면 음기(陰記)에

 는 新羅國故石南寺國師碑後記를 집자해 놓았다. 비의 측면은 조선중기 때

 방각(旁刻)된 것인데,기문(記文)에는 영주군수 이항이 1509년에 비를 영주

 군 자민루로 옮기게 된 경위와 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내가 젊었을 때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에서 김생의 필적을 보고 그 용이날고

      호랑이가 누워있는 듯한 그 형세를 사랑하였으나, 세상에 전하는 것이 많지 못한

      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다가 내가 영천(榮川)군수로 오게되자 이웃고을 봉화현

      (奉化縣)에 어떤 비가 홀로 옛 절터에 남아 있는데 그것이 김생의 글씨라는 말을 들

      었다. 나는 그 세상에 드문 지극한 보배가 풀숲 사이에 매몰되어 수습하여 보존할

      사람이 없이, 들판의 소가 받아 대고 목동들이 부싯돌로 사용할까 모두 염려되었다

      드디어 고을 사람 전참봉(前參奉)권현손(權賢孫)과 함께 의논하여 이것을 옮겨서

      자민루(字民樓)아래에 안치하고 난간을 둘러치고 자물쇠를 단단히 잠그고는 만약

      탑본(榻本)하는 사람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하게 아였으니, 그 함부로 건드리며 침

      범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김생의 필적이 세상에 널

      리 전하게 되어서 양반 호사가들이 앞을 다투어 구경하게 되었다. 아! 천백 년 동안

      으슥한 골짜기에 버려진 돌이 하루아침에 큰 집에 들려 들어와 세상의 보배가 되었

      으니, 대저 물건이 나타나고 숨어 있는것도 또한 그 운수가 있는 것인가 보다! 내가

      비록 재능이 부족하여 창려(昌黎)같은 박아(博雅)함에는 미치지 못하나, 이 물건이

      감상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인즉 진실로 기산(岐山)의 석고(石鼓)와 다름이 없으

      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정덕(正德)4년(중종 4,1509)가을 8월에 군수

      낙서(洛西)이항(李沆)이 기록하고 박눌(朴訥)이 썼다.

 

 

     이 비는 김생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위의 내용

  에서 알 수 있듯이 이항이 이 비를 발견하기 전에는 김생의 필적을 보려면 법첩에 의

  존 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항이 비를 자신이 부임한 영천군의 자민루로 옮겨와 난

  간을 두르고 출입문을 만들어 보호하게 되면서 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호사가들이 다투어 완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동안 법첩이 간행될

  때마다 재집자(再集字)하여 간행될 정도로 더욱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같이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비가 청량산 인근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김

  생이 청량산에서 수도했다는 설화의 역사적 신빙성을 뒷받침 해주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실제로 청량산에는 김생이 쓴 글씨가 많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산에 연대사가 있고, 연대사에 신라 때 김생이 쓴 불경이 많다. 근래에 한 선비

        가 절에서 독서를 하다가 몰래 한 권을 훔쳐 집에 가지고 갔다가 염병에 걸려

        죽으니 그 족인(族人)이 이를 두려워하여 즉시 절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연대사에 김생이 쓴 금은자 불경 40여권이 지금 불전에 보관되어 있다.

 

     위의 사실은 이중환이 편찬한 『택리지(擇里志)』와 이세택이 1771년에 편찬한

 『청량지』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두 책은 조선후기에 편찬된 것들이다. 이 사실은

  그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후기까지 김생의 글씨가 청량산에 있었음을 시사

  해주고 있다. 태자사가 김생이 수도한 청량산과 지척지간에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

  면, 집자는 더욱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낭공대사는 석남사에서 입

  적했다. 그런데 태자사에 낭공대사비를 세웠다는 사실 또한 글씨를 집자한 주인공

  인 단목스님이 김생 글씨가 많이 남아 있던 청량산 인근인 태자사에 머물며 적어도

  그 스승이었던 낭공대사의 비를 집자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2

     이상으로 현재 전하는 기록들을 통해 청량산과 김생의 연관성을 구명해 보았다.

 위의 사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삼국사기』김생조에 언급된 출생에 관한

 사실을 통해 볼 때, 그는 경주가 아닌 지방출신으로 판명되었다. 『청량지』와 『동

 국여지승람』, 「유산기」의 기록에서 그는 청량산부근인 재산에서 출생하여 청량

 산 경일봉과 안동의 문필봉에서 글씨공부에 매진하여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의 글씨를 집자한 비가 청량산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태자사에

 세워진 것으로 미루어 그의 청량산 수도설을 입증할 수 있었고, 그의 글씨가 입신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청량산수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청량산 수도 이후 그의 행방은 경주일대와 충청도 일대에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경주 석굴 속에 들어가 나뭇잎을 따서 글자를 쓰고 40여 년 동안 나오지 않고 수도하

 글씨가 신묘한 경지를 통하였다고 하며, 경주에서 대로원(大魯院) 3자 편액과

백률석당기(栢栗寺 石幢記), 창림사비(昌林寺碑)를 썼다고 한다.

 

   이 사실은 경주에서  그의 행적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청량산에서 수도한

후 그의 실력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자 당시 수도였던 경주에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

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주에서 활약한 시기는 그의 전성기로

평가된다.

 

     또한 충주에서의 행적도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충주의 김생사지는 김생이 만년에

  두타행(頭陀行)을 닦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두타행을 닦기 위해 만년에 충주

  북진애(北津崖)에 있는 김생사(金生寺)에 머물렀다고 한다. 김생사지가 있는 곳은 현

  재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반송산 부근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토대로, 1974

  년 서원학회를 필두로 예성동우회, 충청대학 등에서는 김생사지에 대한 여러 차례의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들 조사에서 가람의 대략적인 모습이 밝혀졌는데, 가람의 형태

  는 금당지(金堂址), 강당지(講堂址), 부속건물지(附屬建物址)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

  찰 터 주변에서 통일신라에서 조선에 이르는 많은 기와가 수습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비록 하단부가 결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지만, 김생사

  가 시문(施文)된 것으로 보이는  ‘月日金□’을 좌서음각(左書陰刻)한 명문기와가 수습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절터 서쪽 강가에서는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김생이 쌓았다

  는 김생 제방이 남아 있어 충주에서 김생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김생

  사가 실존했음을 확인해 주는 동시에 김생의 충주에서의 흔적을 명확히 해주는 근거

  가 된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면 김생의 삶은 3단계로 나눠질 수 있다. 청량산에서

  수도했던 견습기, 경주에서 자신의 명성을 떨쳤을 것으로 보이는 전성기, 충주부근에

  김생사를 짓고 두타행을 닦았던 만년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김생의 출

  생지를 청량산 부근인 재산으로 가정한다면 그는 재산에서 태어나서 청량산 경일봉

  과 안동 문필봉 등지에서 글씨 수련의 과정을 겪고, 당시 수도였던 경주에서 활약하여

  세상에 그 이름을 크게 떨쳤으며, 만년에는 충주부근에 김생사를 짓고 두타행을 닦았

  음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3

     그러면 김생이 쓴 글씨의 특징은 어떠하였을까?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평가되는

  김생의 글씨에 대한 평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있어 왔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인로는

 『파한집(破閑集)』에서 김생의 필법이 신묘하여 초서도 아니고 행서도 아니며, 57종

  의 제가의 필세보다 훨씬 뛰어 났다고 하였고, 또 이규보는 자신의 저서 『동국이상국

  집(東國李相國集)』에서 우리나라 역대 명서가를 품평하면서 김생을 ‘신품제일(神品

  第一)’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생의 글씨는 왕희지 서법을 모범으로 하였으나 법

  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결구와 장법을 구사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표출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청량산과 관련한 김생 글씨의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주세붕은 자신의 「유청량산록」에서 김생의 글씨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자획은 모두 날카롭고 강해서 바라보면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는 듯 하였는데, 이

  제 이 산을 보니 바로 여기에 살면서 글씨를 공부하여 필세가 정밀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어가 서서히 무르익어 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집에서 김생의 필첩을 보았을 때는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듯 하다고 하였

 는데, 청량산에 와서 청량산의 모습을 보니 그의 필세는 청량산의 모습을 닮아 필획의

 정묘함이 신의 경지에 들었다고 여기고 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청량지』「산중고적

 조」에도 보인다. 
 
          김생이 오랫동안 산중에 머물면서 예서가 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 필획

          은 가파른 듯한 바위와 봉우리를 모아놓은 듯하다고 한다.

 

     이렇듯 김생의 글씨를 기암괴석으로 형성된 청량산의 봉우리를 닮은 것으로 묘사

  하고 있으며, 산중에 들어와 산의 모습을 보고 글씨공부를 하여 입신의 경지에 이르

  렀음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자연의 형상을 본뜬 개성적인 필치는 자연과 하나되

  는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수도처로 삼고 있었던 청량

  산 경일봉 아래에 있는 굴 속에서 자소봉과 탁필봉, 연적봉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독

  창적인 서체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는 당시 왕희지체, 구양순체가 유행하던 시기에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독특한 서법을 구사함으로써 가장 한국적인 서풍을 이끌어 냈

  으며, 그로 인해 해동서학의 종조(宗祖)로 여겨져 한국서예사의 한 획을 긋게 되었다.

  이러한 김생 서체 형성의 토대에는 바로 청량산의 넓은 품이 있었던 것이다.  
      



 

 

 

 

박대성 화백과   김  생


   

▲ 김생의 글씨에 깃든 신라의 혼과 정신을 일깨워낸 박대성화백.

 

  엑스포 타워 17층 전시실에서는 ‘김생과 박대성, 1300년의 대화’전이 열리고 있다.
한국화가 박대성화백은 올해 탄생 1300주년을 맞이하는 신라 명필 김생(金生·711∼790 이후)과 정신적 예술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 결과를 작품으로 표현해 헌정전을 열었다.

   김생은 예서 행서 초서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 불렸고 중국 왕희지(王羲之)를 능가하는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박 화백은 이번 전시에서 11점의 서화 대작을 선보인다.
‘장엄불국(莊嚴佛國)-순교 이차돈’ ‘원융무애(圓融無碍)-금강역사’ ‘진경희이(眞境希夷)-목탁과 다보탑 석가탑’, ‘현월(玄月)-분황사 달밤’ ‘청동불두’ 등. 그의 작품이 늘 그렇듯 이번 작품들도 힘이 넘치고 파격적이다.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석비 탑본도 함께 전시한다.

 

   박 화백은 김생의 서예와 목탁, 다보탑 석가탑, 금강역사, 미륵보살 등의 신라 유물과 연결했다. 그것을 통해 김생이 추구했던 신라 화엄불국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서울 예술의전당의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지금 신라의 정신으로 김생을 기릴 후학으로는 박 화백이 제격”이라고 말했다.

12월 14일부터 내년 3월 4일까지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선 ‘김생과 한국 서예’ 기획전이 열린다.

 

 

 

 

김생 탄신 1300년 기념전

 

    <문화탐방>을 시작하고 매달 한군데 이상 탐방하려던 계획은 지난 1월 강추위와 일부 참가자의 개인사정으로 부득이 한달을 쉬게되어 비록 적은 수지만 애독자(?)에게 미안한 맘 금할 길 없다.  필자는 '김생 1300주년을 기념하여 김생부터 김정희까지' 우리나라 붓글씨의 신(筆神)이라 불리는 대가들의 작품을 꼭 보아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은 있었으나 날씨는 춥고 혼자 가기는 거시기하여 미적미적하는 중에 전시기간은 계속 흘러가기에 붓글씨의 선배이자 이론가인 전옹에게 제안하여 전시 마지막 날(2월 12일 일요일)에 가기로 하였다. 마침 이런 <문화탐방>에 평소 지대한 관심을 보여온 심옹도 동참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회는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2층에서 열렸으며 전시 기간은 지난해 12월 24일 부터 올해 2월 12일 까지이다.

 

   지난 몇번에 걸친 <문화탐방>은 당일 몰아친 혹한으로 적잖이 애를 먹었으나 이번엔 그동안 춥던 날씨가 확 풀리고 햇볕도 따사로워 야외활동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쾌정한 날씨다. 전시는 우리나라 4대 명필이라는 김생부터 고려시대의 승려 탄연,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물론 조선조 4대명필에 들어가는 한석봉과 양사언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선조, 영조, 정조의 어필과 이퇴계 정약용 같은 학자, 서산대사나 화가 강세황 등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전시회 입구 정경(직접 촬영)

 

 

 

海東書聖 김생

 

   김생(金生, 711~791이후)는 통일신라시대 사람으로 비록 빈한한 집안의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빼어난 글씨로 신라는 물론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렸다. 김생을 두고 `삼국사기`는 “신라 성덕왕 10년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80이 넘었는데도 글씨 쓰기를 쉬지 않아 각체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의 명문장가 이규보는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김생을 중국의 왕희지(王羲之·307∼365)와 함께 ‘신이 내린 최고의 솜씨(神品第一)’로 극찬하였다. 김생의 작품은 비문 등에 일부 남아 있을 뿐인데, 이번 전시에는 그의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원비의 탁본,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의 미려한 행-초서체 글씨가 전시되었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탁본

 

 

           감호의 흐르는 물은 봄 되자 출렁이고, 미친 나그네가 배를 저으니 고상한 흥취도 많다’라고 시작되는 이백의

           시를 흐르는 듯한 행서·초서로 썼다. 16세기 탁본첩 『해동명적(海東名跡)』의 첫 장에 실린 작품이다

 

 

고려 승려 탄연(坦然)

 

   탄연(坦然, 1070~1159)은 안적사(安寂寺)에서 출가하여 고려 예종 1년(1106년) 때에 대사가 되고 인종 24년(1146년)에 왕사(王師)가 된다. 그는 신품사현(神品四賢)의 한 사람으로, 한국의 선문을 중흥시켰고 필법이 가장 정묘하여 홍관(洪灌)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서거정(徐居正)은 “동국의 필법에 김생이 제일이요, 탄연이 다음 간다.”라고 평하였다. 글씨는 구양순체를 본받았으며 詩에도 조예가 깊었다. 춘천의 문주원비(文株院碑), 예천의 북룡사비(北龍寺碑), 삼각산 승가굴중수비(僧伽窟重修碑) 등을 썼다. 이번 전시회에는 문주원비(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탁본 글씨가 전시되었다.

 

                           진락공중수청평산문주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1130년, 개인소장

 


안평대군(安平大君)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 1453)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가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세종의 셋째 아들로, 형 수양대군(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란에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죽임을 당한다. 그의 글씨는 매우 뛰어나 우리나라 4대 명필에 들며 그의 송설체는 훈민정음 등 당시의 서체를 주도하던 글씨체이다. 그의 몽유도원도 발문은 특히 유명하다. 이번에는  안평대군의 7언시가 전시되었다.

 

 

                                                     안평대군 7언시 (27X28cm) 개인소장

 

한석봉(韓石峰)

 

    초등학교 책에서 익히 알고 있는 석봉 한호(韓濩, 1543-1605)는 고졸하고 무게있는 글씨가 특징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도산서원 현판과 검명(劒銘)이 전시되었다.

 

                   한호(1543-1605), <도산서원> , 1572년, 도산서원운영위원회 기탁/한국국학진흥원 소장

 

 

                         한호(1543-1605), <검명劒銘> , 1604년, 『한경홍진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조, 영조, 정조

 

    나라를 잘 다스리지도 못했고 임진왜란 등에서 처신도 보잘것 없었던 선조는 조선의 왕들 중 글씨는 잘쓰기로는 정평이 나 있다. 조선왕조 최장의 재임기간을 자랑하는 영조의 어필도 다수 보였으나 아직 내공이 모자란 필자의 눈에도 글씨는 별로인 듯하였다. 반면 조선의 왕들 중 명석한 머리와 지혜를 지녔다던 두분 중의 한분인 정조의 글씨는 예술적인 것은 몰라도 참 단아하고 잘 쓴 글씨임에 틀림없다.

 

 

퇴계, 다산, 그리고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의 글씨는 생각하던대로 그들의 인품이 묻어나는 글씨체였다. 명필들 처럼 큰 글씨가 전시되지 않고 세필의 서간체가 대부분이라 아쉬움이 있었다. 서산대사의 글씨 그리고 학자이며 정치가로 그림에도 능했던 강세황의 글씨도 볼 수 있었다.

 

 

 

                  강세황 글씨-표암유체

 

 

추사 김정희

 

    너무도 잘 알려져 있고 필자도 여러번 올린 바 있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글씨 사진으로 가름한다.

 

 

 

  김정희 8폭 병풍 글씨(현장에서 직접 촬영)

 

 

그외  사진들

 

  김생 글씨

 

 

 

 

  한석봉 글씨

 

 

 

                                                                       추사 김정희 글씨

 

唯愛圖書兼古器(유애도서겸고기)

且將文字入菩提(차장문자입보리)

 

오직 그림과 글씨를 사랑하되 옛것(古器)도 아울러 하며,

또 문자(文字)를 가지고서 큰 깨달음(菩提)에 이른다

 

 

 

 

 

백련사와 김생   ㅡ  서체 감정

 

    전라남도 강진에 소재한 백련사에는 해동의 서성(書聖)이라고 일컬어지는 통일신라 김생(金生, 711~790)의 필적이 전해지고 있다. 1200여 년 전의 필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전해오는 얘기는 자못 진지하다.

 

    승려가 누 남쪽의 돌계단을 가리키며 “이 역시 신라 시대에 만든 것으로 잡석으로 쌓은 것인데 면이 깍은 것 같습니다.

대개 절에 삼절(三絶)이 있다고 하는데 김생의 글씨와 서원(西院)의 동백나무가 이것(돌 계단)과 합하여 셋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 김생,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銘> 부분,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문집에 실려 있는 위 글에서 승려는 백련사의 삼절로 지금도 유명한 동백나무와 돌계단, 그리고 김생의 글씨를 꼽았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인데, 김생의 글씨가 백련사에 있다는 기록이 고려시대와 조선 초에는 보이지 않다가 조선중후기에 갑작스레 나타나기 시작하니 의아할 따름이다. 사실 조선시대에 들어서게 되면 그의 진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한 상황을 조선후기의 서예가인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 필법은 신라 김생을 근원으로 삼는다. 오늘날 그의 진적으로 전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탑본(榻本) 또한 기이하고 법이 있어 고려 이후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만덕산백련사>가 정말로 김생의 필적일까? 조선시대에는 이 현판이 과연 김생의 필적인지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어왔다.
    조선시대 주자성리학의 거목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이 편액을 본적이 있다. 때는 그가 南人과의 당쟁 속에서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1689년에 제주로 유배 가는 도중이었다. 그는 강진에 도착하였지만 바람이 거세어져 잦아들기를 기다리고자 백련사에 기거하였다. 그는 이때 만경루에 걸린 김생의 <만덕산백련사>, 안여해가 쓴 <만경루 萬景樓>, 서역문자로 된 현판을 보았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 안노생(安魯生)의 후손인 안여해(安汝諧)와 담화를 나누었고 서역문자를 해석하여 대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김생 필적에 대해서는 승려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듯하다. 현재의 기록으로는 그가 김생 필적이라는 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길이 없다. 당시는 사상 논쟁이 치열하였던 때이므로, 아마도 이 같은 옛 유물이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던 듯하다.

    한 세대가 흘러 18세기 전반에 이르게 되면 서서히 고증학적인 분위기가 일어나면서 선비들은 옛 고적이나 유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서화 평론가답게 <만덕산백련사>에 대해 정확한 감정을 하였다.

 

 

 

 ▲ 김생, <萬德山白蓮社>, 115.6×47, 강진 백련사 소재.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세상에 전하기로는 김생은 사찰의 건물에 제액(題額)을 하였지만 결구법이 백월비(白月碑)와 다르므로, 아마도 김생의 진적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필세가 맑고 굳세니 또한 신라와 고려 무렵의 명필이다.

 

    이하곤의 명확한 감정과 필적에 대한 비교 분석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실 오늘날의 미술사가들도 그의 분석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은 점은 그의 뛰어난 감식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서예 양식적으로 보면 <만덕산백련사>의 어리 숙한 짜임새와 머리 부분이 큰 자형 등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낭공대사의 일대기를 적은 <백월비>와 어느 정도 유사하지만 글씨모양이 세로로 길고 획의 모서리가 심하게 각이 지며 획이 굵다.    이하곤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같은 차이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같은 특징은 원대 설암(雪菴)의 <종춘첩(春種帖)>같은 大字 해서에서 찾을 수 있다. 설암은 중당(中唐)시대의 안진경(顔眞卿)과 북송시대의 황정견(黃庭堅)의 글씨에 바탕을 두고 독특한 大字 서풍을 일으킨 서가이다. 이 설암체는 고려 말에 유입되어 조선시대에 유행하면서 제서(題書)나 편액 글씨에 쓰여 졌다. <만덕산백련사> 역시 그 같은 영향아래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다만 제작 과정에서 당시 김생의 필적이라고 전해오던 해서를 일부 참고하여 제작되었을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객관적인 비교를 통해 편액에 대한 정확한 감정을 시도한 이하곤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당대의 서화수장가였던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만덕산백련사>를 김생의 필적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분위기는 19세기에 이르면 더더욱 강해진다. 아래의 글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806년에 쓴 시이다.

 

   문의 주련은 김생의 글씨이고 누각의 현판은 이광사가 쓴 것이니
시대가 멀어 가짜일까 의심하지만 무게 있는 그 이름 허망하지 아니하네.

 

 

 

 ▲ 설암, <春種帖>, 1296年 書, 板本 冊, 개인소장

 

 

    당대의 실학자였던 정약용마저 <만덕산백련사>가 김생의 필적이라고 하였으니, 19세기의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이후에는 많은 선비들이 별다른 의심 없이 이 편액을 김생의 필적으로 보게 된다. 이 현상은 당시 거세게 일었던 문헌고증학이라는 바람으로 인해 거의 모든 선비들이 옛 필적의 수집에 열광하던 터라, 감식과 애호를 혼동하게 된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만덕산백련사>와 관련된 옛 기록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너무 지나치면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감정에 있어서 지나친 애호는 무관심보다 해가 될 때가 있다. 감정과 애호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하며, 감정에 임하는 자는 혹리(酷吏)와 같은 눈에 차디찬 가슴을 지녀야 한다.

 
 
조선일보 : 입력 : 2008.07.25 10:31

 

문화재청 인천항국제여객터미널 문화재감정관실  김현권 감정위원

 

 

 

 

한국의 서예

 

 

고려시대에 남아있는 서예의 자료는 흔적비문 ·묘지명 ·사경 등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적다. 이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면, 전기는 거의 비석이고 후기는 비 ·묘지명 ·진적과 사경 등이 많다. 전기는 전대를 이어 해서(楷書)는 구양 순의 서풍이고 행서(行書)는 왕희지풍의 일색이며, 후기에는 특히 제25대 충렬왕 이후 조맹부의 서체가 들어와 크게 유행하여 조선 전기까지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환추(李桓樞)의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와 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碑塔:보물 361 )는 구법(歐法)인데, 근직(謹直)한 필력으로 주경하면서 금석기(金石氣)가 넘쳐 흐른다. 장단열(張端說)의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眞靜大師圓悟塔碑;보물 172)는 한국 서예사상 드물게 우세남(虞世南)의 서풍으로서 수윤(秀潤) ·근정(謹整)한 명품이며, 고려 비 중에서는 최상급이다. 채충순(蔡忠順)의 현화사비(玄化寺碑)는 골기가 통달하고 정채(精采)가 비등하다고 하나 과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거웅(金巨雄)의 거돈사승묘선사비(居頓寺勝妙禪師碑)와 민상제(閔賞濟)의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는 모두 구체로서 당당한 것들이다. 안민후(安民厚)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국보 59)는 구법이나 우()에 가까운 것으로 근엄 ·정정하며 품격 높은 일품으로 일류에 속한다. 이원부(李元符)의 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는 《금석고(金石攷)》에 “신라 ·고려 양조에 있어서 금석의 서체는 대부분 구법으로 일관한 경향이 있는데, 홀로 원부의 우법(虞法)이 있음은 실로 새벽하늘의 샛별에 비할 수 있는 진귀하고 중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단열도 있었으며 또 완전한 우법도 아니며 송나라 휘종의 수금체(瘦金體)처럼 자획(字劃)을 가늘고 길게 뽑는 독특한 필법이다. 유려하고 운필이 자재(自在)하며 청경(淸勁)한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명(書名)이 매우 뛰어난 석탄연(釋坦然)은 처음으로 안법의 해서를 썼고 왕법(王法)의 행서를 겸했으며 문수원중수기 액제(額題)와 승가사중수비(僧伽寺重修碑)를 썼는데 명실이 상부하다. 오언후(吳彦侯)의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는 구법으로 근엄 ·주경하고 단아하여 당당한 명품이다. 그 밖에 석영근(釋英僅)은 구법의 해서를 잘 썼고, 석혜소(釋慧素)도 안법을 섞은 듯한 해서를 잘 썼다. 김효인(金孝印) ·김순(金恂) 등은 구법이고, 전양고(錢良古)와 이군후(李君候)는 왕법의 행서를 잘 썼으며, 전원발(全元發)의 법주사혜정국사비(法住寺慧淨國師碑)는 전아한 해서이다. 26대 충선왕(忠宣王)은 양위한 후 연경(燕京)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당시 원()의 명사(名士)들과 교류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와 친교가 두터워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문적과 서화를 많이 들여왔으므로 이에 따라 조맹부의 서체 즉,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 고려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의 서를 풍미하였으며, 이 시기는 송설체 일색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중에서 행촌(杏村) 이암(李 灸 )은 특히 송설체를 깊이 터득하여 행서와 초서에 뛰어난 대가였다. 권중화(權仲和)의 회암사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는 예서(隸書)인 것이 이채롭다. 한수(韓脩)는 《동문선(東文選)》에서 양촌(楊村) 권근(權近)이 “유항 한문경공(한수의 호)은 지행이 높고 견식이 밝아서 일시에 사람의 모범이 되었고 서범이 절륜하여 세상이 소중하게 여기더라”라고 하였다. 그의 회암사지공대사비(檜巖寺指空大師碑) ·신륵사나옹화상석종기(神勒寺懶翁和尙石鐘記) 등은 우법(虞法)으로 아윤 청경하고 품격이 높아 고려 비 중 최상급의 명품으로 손꼽힌다. 설장수( 乾 長壽) ·설경수( 乾 慶壽) 형제는 원()나라 사람으로 원 말에 고려에 귀화한 사람으로서 송설체를 썼다. 권주(權鑄)의 신륵사대장각장경비(神勒寺大藏閣藏經碑)는 아윤 ·청아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명필로 이름 높은 김생(金生)의 글씨를 석단목(釋端目)이 집자(集字)하여 세운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낭공대사비)가 있으며 이는 왕희지체의 행서이지만 서명 높은 왕희지의 서에 비하면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 왕희지 글씨를 집자한 인각사보각국사탑비(鱗角寺普覺國師塔碑)와 직지사대장각전비(直指寺大藏閣殿碑)가 있다.

 

 

한국 서예사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온 시기에 관해서는 확실한 문헌이 없으나 대체로 B.C. 2-4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의 문자 자료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다만 전한(前漢)시대의 명문(銘文)에 새겨진 동경(銅鏡)이 평양지방에서 발견된 일 이 있고, 그후 낙랑군(樂浪郡)유물로서 와당(瓦當)이나 전(塼)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당초부터 중국의 직접적 인 영향을 받아 발전되었으며, 왕희지(王羲之),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 우세남(虞世南) 등은 많은 영향을 끼친 서가들 이다.

1. 삼국시대


가) 고구려
고구려는 중국의 문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이다.
한인(漢人)들은 낙랑(樂浪)시대부터 5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일부에서 행정을 펴고 있었고 그들이 물러간 뒤에도 육지로 연접되어 고구려는 문화교류가 아니면 무력적 공방으로 그들과의 접촉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문화예술면에 있어서도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아 들였다. 그러나 당(唐)에 의 하여 왕조(王朝)가 없어지고 문화적 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문헌으로 전해져야 할 고구려의 역사마져도 겨우 왕의 세계(世系) 를 알리는 정도에 그치고 대부분의 사료는 오히려 중국 측 자료에 의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구려 서법(書法)을 알려줄 수 있는 자료로는 예서(隸書)로 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해서(楷書)로 묵서(墨書)한 {년두루묘지(年頭婁墓誌)}와 행서인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중원비(中原碑)}와 북지(北地)에서 발굴한 고분벽서(古墳壁書) 수점이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거비(巨碑)로서 자체는 한자의 크기가 30cm에 달하며 높이 7m의 4면에 빈틈없이 꽉 차여져 있다. 이 시기는 414년으로 중국에서는 해서가 상용되고 예서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것인 년두루묘지도 해서를 쓴 것으로 보아 역시 해서를 상용하였을 것이며 왕릉에서 예서를 쓴 것은 특별히 정중과 장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예서는 파임과 삐침이 없고 고구려에서 형성된 독특한 서풍을 이룬 자체이다. 얼마 전에 발견된 중원비는 글자의 짜임 해는 능비(陵碑)와 공통된 것이 많으나 자체는 해서였고, 년두루묘(年頭婁墓)의 벽서(壁書)는 필력에 박력이 넘쳐흘러 생동함을 보여주었다. 평양석각은 성벽에 있는 것으로 행서인데 자체는 육조(六朝)의 특징을 잘 살린 힘찬 명품이다. 이는 상무적(尙武的)이고 진취적인 고구려인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나) 백제(百濟)
백제는 서법을 살펴볼 자료가 거의 없는 형편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공주 무녕왕릉의 {매지권(買地券)}과 부여지방에 서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2종 뿐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북조의 문화를 받아 들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남 조와의 접촉이 많았다. 무녕왕릉비는 순수한 남조풍을 띤 명풍이다. 그러나 사택지적비는 북조의 풍미가 있기도 하다.
이로 미루 어 백제는 남북조문화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유려하면서 기품있는 왕릉지(王陵誌)의 필치는 당시의 수준높은 문화 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밖에도, 불상명(佛像銘), 와전명(瓦塼銘) 등이 유물로 남아있다.

 
다) 신라(新羅)
신라가 본격적으로 중국와 왕래를 시작한 것은 6세기 초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비교적 많은 유적이 금석문(金石文)에 남 아 있다. 율주에 있는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있는 암벽 하부의 마애기(磨崖記)는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인데 법 흥왕 때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진흥왕 때 세운 창녕척경비(昌寧拓境碑)와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3 군데의 순수비(巡狩碑) 가 있으며 진평왕 때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최근에 발견된 단양 적성비가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순수비로서 이 비는 신라에서 한문화를 받아들인 이후 법에 맞는 글자 글씨로 작성된 최초의 작품이다. 문장이 병려체(騈儷體)의 형식을 사용하면서 도 전중건엄(典重健嚴)하여 왕가의 품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였고 글씨도 육조풍을 띠고 있다.
신라의 서법은 자유분방하게 운필 한 가운데에도 장중하면서 유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신라 특유의 유연하고 견인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시대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고구려는 웅건강용(雄健剛勇), 백제는 우아유려(優雅流麗), 신라는 전중질실(典重質實)함을 알 수 있다.

2. 통일 신라 시대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을 전후하여 신라와 당에 의해 망하고 신라가 통일된 왕조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당의 문화 를 받아들이면서 학술, 문화, 정치, 제도 등 모든 분야에서 당의 색채를 띠었다. 또한 당으로 유학을 가는 승려, 관료의 자제들 도 많았으며 그 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 시기에는 서법(書法)도 발달하여 많은 유적을 남겼다. 남 북조시대는 자체가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였기 때문에 그 서풍(書風)이 자유분방하며 고박(古朴)한 맛이 짙어 예술적인 풍격은 매우 높지만 자획(字劃)과 결구(結構)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초의 명가들에 해법( 楷法)의 규범이 정립되었고 서가들이 개성있는 독자적 서풍을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서적으로는 최근에 발견된 사본화엄경(寫本華嚴經)과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전해오는 고문서가 있을 뿐이다. 금석문(金石文)은 상당수가 남아있다. 초기에는 대체로 남북조시대부터 내려오는 왕희지체가 주축을 이루었고 뒤에는 당의 구양 순체를 많이 썼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가로서 제일로 꼽을 수 있는 김생(金生)은 당시 서적(書蹟)으로 남은 것이 없다. 고려 초 기에 와서 그의 글씨를 집각(集刻)한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가 김생의 글씨로 유일한 금석인데, 그의 서법의 전형은 왕희지에서 나왔다 할 것이나, 왕의 글씨는 온화한데 비하여 김생은 그 전서가 유동미(流動美)와 여율감(旅律感)이 생동하는 변화를 여러모 로 살려서 한 획을 긋는 데에도 굴곡과 거세(巨細)를 달리하였다.
또한 자의 결구(結構)에 있어서도 상호조응(相互照應), 음양향 배(陰陽向背)의 묘를 마음껏 섭취하는 등 그의 천재적 예술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말 신품의 세계를 독점하고 있다. 김생의 글씨는 낭공비 이외에 법첩으로 전하는 전유(田遊), 엄산가서(嚴山家序), 당시첩(唐詩帖) 등이 전한다.
말기의 최치원(崔致遠)은 시문(詩文)에서 뿐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도 한 시기를 대표하는 명가(名家)이다. 그의 자선자서(自選自書)인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는 구양순(歐陽詢)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의 도인법사비(道因法師碑)와 비슷한 신품이다.
통일 신라시대는 비록 고려시대에 비하여 양적으로 미치지 못할지라도 격에 있어서는 단연 우리 서예사상 결정에 달한 시기라 할 수 있겠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과거제도가 당에서 도입되었다.
제술(製述)과 명경(明鏡)이라는 두 개의 과(科)를 두었는데 제술(製述)은 시(詩), 부(賦) 등 문학작품으로 응시하는 것이지만 글씨도 따라서 선을 보이게 되므로 서학(書學)의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상황이 었고 이외에 잡과(雜科)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서업(書業)이라는 서사전문직(書寫專門職)이 있어 설문(說文), 오경(五經), 자양( 字樣)의 기본과목 외에 진서(眞書), 행서(行書), 전서(篆書)의 실기과목이 있어서 그야말로 서예의 발전과 보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진적은 극히 드물어 금석(金石)은 비갈(碑喝)과 묘지(墓誌) 등이 많이 남아있다. 이 시대의 서법은 당 초기 대가의 필법을 주로 따랐으며 특히 구양순체(歐陽詢體)가 많았다.
구양순체는 자획이 방정건엄(方正健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데 순간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짐을 용인하지 않는 율법적(律法的)인 서법이므로, 특히 구체(歐體)가 많이 쓰인 듯하다. 고려시대의 명가로는 구족달(具足達), 한윤(韓允), 민상제(閔賞濟), 안민후(安民厚), 임현(林顯), 오언후(吳彦候) 등이 있고 우 세남(虞世南)에 능한 이로서 이원부(李元符), 장단설(張端說) 등이 있으며 이 외에 김원(金遠), 채충순(蔡忠順) 등이 있다.
고려시대 중엽에 이르러 탄연(坦然)(1070 1159)이라는 대서가(大書家)가 출현했다. 탄연은 고승인 동시에 명필가인데 그의 법명 은 대감(大鑑)이고 속명은 손씨이다. 일찌기 유학의 경전에 통하였고 불법에 들어가서 뒤에 왕사(王師)까지 되었다.그는 고승이 었지만 서예로서 그 이름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그의 글씨로는 문수원비(文殊院碑)가 있는데 행서로서 왕희지의 성교서(聖敎書) 와 일맥상통하는데가 있으면서 일면 당대 이후로 전승되어 온 사경풍(寫經風)의 필법(筆法)이 합하여 새로운 일체(一體)를 형성 한다. 그의 서는 유려하면서도 강철같이 굳센 골(骨)이 있다고 하여 김생과 더불어 신품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무렵의 서가로 승혜소(僧慧素)가 있는데 그는 당대로 부터 전해져 온 사경(寫經)에 바탕을 두고 세해(細楷), 대자(大字)에 모두 뛰어났는데 대표적 작품으로서 영통사(靈通寺) 대각국사비음기(大覺國師碑陰記)가 있다.
고려시대 후반 무신난이 일어난 뒤에는 정권이 무인(武人)의 손에 넘어 갔고 문인들은 도피하거나 무인에 붙어사는 처지로 전락 되었다. 그리하여 전반적인 문화, 예술은 퇴보하게 되었고 글씨도 마찬가지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고려말기 원나라와의 밀접한 관계가 생기면서 활발한 교류가 전개되었다.
충선왕은 원의 북경에 만권당(萬券堂)을 지어놓고 있을 때 당시 서가중 최고인 조맹 부와의 교류가 많아서 당시 왕을 따라 원에 간 문인들은 조의 서체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군해(李君孩), 이제현(李齊賢) 같 은 이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말기의 서가로는 예서에 능한 권중화(權仲和), 한수(韓脩) 등이 있었으나 초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려 시대에는 비갈(碑喝)외에도 경판(經板), 사경(寫經)등이 적지 않은데 특히 묘지(墓誌)는 200여점을 헤아리고 있다. 연대로 는 초기에서부터 말기에 이르기 까지 400여년에 걸친 모든 것이 나타나 있어 더욱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묘지(墓誌)들은 일반 비석과는 달리 자유스럽게 행필하여 친말감을 갖게 하고 서체도 다양할 뿐 더러 공굴(工掘)의 차도 심하고 정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시대에 따른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커다란 가치가 있다.

4. 조선시대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는 문화적인 면에서 고려의 말기적 폐단을 척결하고 학자를 우우(優遇)하고 문치(文治)를 국시(國是)로 하여 서(書)의 왕성한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서(書)는 고려시대의 서풍을 이어받아 조맹부의 서풍이 풍미하 였다. 조맹부는 원나라의 서예가로 호를 송설(松雪)이라 하여 그의 서체를 송설체라 하였다. 이는 충선왕때에 직접적으로 그에게 서 배워온 관계도 있고 그의 진적(眞蹟)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그대로 교본이 되었고 법첩(法帖)으로 간각(刊刻)한 것도 적지 않 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정도전, 권근, 황희, 맹사성 등이 있으나 이중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었다. 안평대군은 고려의 계승과 유습(遺習)을 새로운 기운(氣運)으로 쇄신하려는 기세와 고유한 민족기질을 농후케 하려 는데 집중하고 계속적으로 서(書)의 연원을 탐구하는 한편, 진수(眞粹)를 체득하여 구현하려 하였따. 또한 안평대군은 서(書)에 만 능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통달하여 시에도 능하였으며 박식(博識)은 고금에 통철(通徹)하고 도덕과 도량과 풍채에 뛰어났으 며, 사리에 통하여 많은 이의 존경과 귀감이 되었다.
중기에 이르게 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서예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먼저 송설체의 쇠퇴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송설체가 균정미(均整美)에 치중한 결과, 힘이 유약하고 여러 가지 자형(字樣)이 판에 박은 듯이 변화가 없기 때문이 다. 그리고 왜란 동안에 많은 힘을 입었던 명나라의 서풍이 많이 받아들여지게 됨에 따라 문징명, 동기창, 축지산 등의 서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유학의 복고사상에 따라 왕희지의 서법으로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 왕희지의 법첩으로 전하는 것은 모두 위작이거나 몇 차례의 모필을 겪은 것이어서 진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기의 서법이 현저하게 쇠퇴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석봉(石峰) 한호(韓濩)를 들 수 있다. 한석봉은 왕희지의 글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 공을 쌓아 능 숙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서품(書品)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 다듬는데 그쳤다. 이것이 그대로 궁궐의 서사정 식(書寫程式)을 이루어 중국에서 말하는 천록체(千祿體)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영향은 오랫동안 후대에 미쳐서 석봉체를 본받은 사람의 수가 많았고 서법이 쇠퇴하게 되었다.
후기의 서(書)를 알아보면 영조 이후에 일어난 자아각성으로 문예부흥적 기운이 농후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의 서(書)는 한국 서예의 원천으로서 또 그 방향과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백하(白下), 윤순(尹淳)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각체에 능하였고 특히 행서에서는 각 서예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서 스스로 일가 (一家)를 이루었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국의 신진 학자들은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그 곳 학자들과 지식을 교환하는 가운데 많은 지식을 넓 혔다. 서법에 있어서도 청나라의 새로운 사조들을 많이 받아들여 올바른 서법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청대의 학술은 다양하 였으나 주축을 이룬 것은 고증학이었다. 이 때문에 금석학이 발달되었고 전서와 예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특히 비(碑)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졌다. 당시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완원(阮元), 김정희(金正喜), 신위(申緯)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김정희 는 그의 독특한 서체로 이름이 높았다.

다. 漢契書藝
한글 서예가 시작된 것은 세종대왕 28년(1446)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글을 창제한 이후이다. 한문서예가 고대 문자의 생성과 그 역사를 같이 하는 것과는 달리 한글 서예는 불과 550여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조형상, 구조상에서 한문 서예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문서예가 사물의 모양을 본따고 의미를 합성한데 반해 한글서예는 天, 地, 人 삼재에 근거를 두고 만든 상형 분자이며 동시에 표음 분자이다.
조선 시대 이래로 한글 서예는 한문 서예에 밀려 그 연구와 발전이 저조했었고 요즈음에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녀자나 글을 모르는 서민들이 쓰는 글로 생각했었고 일제의 수난기를 거친 후에도 사대사상에 밀 려 겨우 명목만을 이어왔었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동양의 전통적 문자 표현의 재료와 도구 및 방법이 급격히 변화됨에 따라 자연히 글씨 를 쓰는데 대한 인식과 가치가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 한글의 예술성과 실용성이 이원화되면서 이른바 한글서예라는 전통적 근 대미술을 배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글서예 근대화의 결정적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금세기의 전반은 일제의 침략과 6.25동란에 다른 미군정의 영향으로 인하여 전통 서예문화에 많은 왜곡과 굴절을 초래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경재적 재건과 더불어 부흥되기 시작한 서예문화는 주로 국전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통하여 급속히 발전한 반면 학교 교육에 있어서는 사실상 형식에 그쳤을 뿐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받침없이 오늘에 이르러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단적으로 공적인 교육기관이나 연구기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80년대 후반에 들어 공적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예관의 건립, 대학에서의 서예과의 신설, 그리고 사회적인 서예학술단체의 활동 은 21세기 한국서예의 확고한 위상정립은 물론 한글 서예계 발전의 획기적 요인이 될 것으로 기대 되나, 현재에는 아직 필체 및 서체의 명칭통일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이르러 내세우는 몇몇 서체명칭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1973 김응현: 정음체, 판본체, 정자, 반흘림, 진흘림
◦ 1973 김일근: 반포체, 효빈체(모방체), 궁체(남필, 여필), 잡체, 조화체
◦ 1983 박병천:
◦ *한글서체-전서체, 예서체, 해서체(정자), 행서체(반흘림), 초서체(흘림)
◦ *인쇄체-판본고체, 판본필서체, 인서체
◦ *필사체-정음체, 방한체, 궁체, 혼서체, 일반체
◦ 1979 중학 서예 : 판본체, 국한문혼서체, 궁체(정자, 흘림)
◦ 1985 윤양희 : 핀본체, 혼서체, 궁체(정자, 흘림(반흘림))
◦ 1986 김양동: 정음 고체, 언문시체(선비언필체, 궁체(정자, 흘림 진흘림))

위와 같은 분류들은 아직 분류개념 및 분류 위계도 불분명하다.
이상의 분류를 정리하여 한글 고전 자료를 분석해 보면 판본서체에도 전서, 예서, 정자, 반흘림, 흘림체가 있을 수 있고 궁중에 서도 전서체, 정자체, 반흘림, 흘림체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서체형만의 판본체와 정자 흘림체만의 궁체라는 개념이 고쳐져야 한다. 그런데 한글 고전자료에서 순수한 예서체형의 글씨는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다.
한글 서예는 크게 나누어 훈민정음의 창제와 더불어 생성된 판본체와 궁중에서 체계화되고 여성사회에서 발전시킨 궁체 그리고 가장 긴 생명력을 가지고 독특한 개성을 충분히 살려 우리 민족의 얼과 더불어 오랜 세월동안 숨쉬어온 민체등으로 구분해 생각 할 수 있다.
한글서체와 한문서체를 비교해 보면 판본체에 있어서 원필과 방필은 한문서예의 전서와 예서에 해당하고, 궁체의 정자와 흘림 은 한문서예의 해서와 행서 그리고 봉서 혹은 서찰은 초서에 해당된다.
판본체는 문자의 효용면에서 그 기능을 다했을 뿐 서예술로서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 판본은 판각된 형태이므로 각공에 의해서 판각되는 과정에서 글씨의 생명력이 상당히 저하되고 판각되기 이전의 원글씨가 지녔던 생동감이 거의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성격이 다소 상실되어 그 형태와 획이 도식적이고 단순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글서예는 판본체의 획의 묘를 살려서 쓴 고체와 궁궐안에서 쓴 궁체 그리고 (서)민체가 있다. 이중에서도 궁체는 한국적 고유미를 가장 잘 표현하고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그 조형미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궁체의 발달은 약 35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필사된 서찰과 서책의 유품에 의해 증명된다. 서찰은 주로 왕후와 상궁 그리고 궁녀들의 필적 인데, 능숙한 필치로 단아하고 자유분방하게 씌어진 것이 그 특징이다. 서책은 궁중의 내서인데 미려하고 우아하며 한결같이 고르다. 궁체가 발달된 이유는 왕실과 외척사이에 편지 왕래가 잦았기 때문에 봉서를 쓸 기회가 많았으며 또 왕후와 공주의 교양서 로 책을 많이 필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궁중의 문화가 외부로 나와서 귀족계급에 파급되었다. 그리고 한문을 모르던 여성들에게 파급되어 보존되고 닦여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궁체가 정제되어졌다.
궁체는 그 글자 구성이 한문 문자에 비해 단순한 만큼 서선내의 함축미와 글씨 짜임에 있어서 고차원의 균형미를 요구한다. 필 법에서 중봉행필을 엄수하고 붓털의 오묘한 탄력을 활용할 수 있을 때 까다로운 궁체의 균형에 틈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궁체는 너무 곡선미가 짙고 여성적이며 지나친 기교로서 미서에 이어지는 흠이 있다. 또한 서법이라는 준비된 질서 속 에 구속되어 일률적이고 개성이 없으며 그 조형성과 예술성의 격조가 낮은 느낌이 있다.

민체는 궁체와 더불어 필사본으로 되어있는 한글류의 책들에서 나타난 서체이다. 이는 서예작품으로 쓴 것이 아니고 소설, 가사 , 서간 등 읽고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이다. 글씨로 쓴 민체는 필사자, 필사연대를 간혹 밝힌 것도 있으나 대부분 명시되 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궁중 이외의 백성들에 의해서 필사되었다는 것과 조선 중기에서 말기에 간행된 것이라는 정도 밖에 추측할 수 없다.
민체의 특징은 각기 개성이 뚜렷하며 자유분방하게 서사(書寫)함으로써 우리민족의 넋과 얼이 살아 있다는 것이며, 고구려의 광 개토왕비와 울진 봉평비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우리민족의 예술성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민체의 형식은 자유롭고 구속됨이 없이 작자의 시간별로 달라지는 슬픔과 기쁨 넉넉함과 배고픔의 뜻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자신의 표현인 즉 통일성, 강조, 균형, 비례, 선, 형태, 재질감, 공간의 환영리 등의 조형성이 잘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민체는 민간에서 정립되지 않은 채 기록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체(體)'라 일컬을 만한 기준이 서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우리 나라 고유의 민화가 우리서민의 감정과 생활상을 깊숙히 반영하고 있다고는 하나, 이를 하나의 통일된 기준으로 정립된 화풍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조선 중.말기에는 서사상궁의 글씨 쓰기 교육용으로 연습교본이 있었으나 한글 글씨쓰기를 정식으로 교본화 한 것은 1910년에 한서 남궁억이 쓴 신언문체법이 최초인 것으로 알려진다.
1958봄에 갈물 이철경은 갈물 한글 서예 단체를 발족하고 가을에 제1회 갈물한글서예회 회원전을 열었는데 이는 행사 이전에 많 은 후학들에게 한글 궁체쓰기를 지도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59년에 동방연서회(이사장 김충현)가 창립되어 후진양성에 치중하는 한편 서예 특강, 학생휘호대회 등을 통하여 한글 서예 보 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글 서예에 대한 연구는 70년대에 이르러 비교적 깊게 이루어 졌으나 일부인만이 참여하는 실정적인 것인데 반해 80년대에는 많은 서가들이 다양한 형태로 한글서예 교본을 출간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알아본 한글서예에는 많은 과제가 남겨져 있다.
현대문 표기가 가로 행을 하고 있으므로 장법에 있어 가로 쓰기를 연구해 보아야 겠으며, 한글 서예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 는 그 내용이 되는 문학성(국문학)에 대한 연구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조형성(미술)에 대한 이해가 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한글서예는 자칫 조형화하기 쉬운 한문서예에 비하여 많은 과제와 함께 가능성과 장점을 갖고 있는 우리글이다.

 

 

 

 

대자 결구 84법

 

 

天覆 : 宇宙宮官 ---要上面蓋盡下面宜上淸而下濁
윗면이 아랫면을 모두 덮을 수 있어야하며 위는 맑고 가볍고 경쾌하게 하여야하고 아래는 무겁고 탁하게 해야한다. 



地載 : 直且至里 ---要下 載起上 宜上輕而下重 
아래획이 윗획을 싣고 있는 듯이 해야하고 위에는 가볍게 아래획은 무겁게 처리하여야 글씨가 어우러진다. 



讓左 : 助幼卽却 ---要左高而右低右邊須讓左邊 
왼쪽이 높고 오른쪽은 낮아야 하는데 우변은 반드시 왼편에 양보를 하는 것처럼 왼편은 크게 오른편은 작게 해야한다. 



讓右 : 晴 績峙 ---要右高而左平左邊須讓右邊 
우측은 높고 좌측은 우측과 평평하게 해야하는데 좌변이 우측에 양보를 하는 것처럼 좌측을 작게 써야하는 것이다. 



分疆 : 體輔願順 ---左右平不相讓如兩人幷立 
좌우를 고르게 하여 서로 양보하는 것이 없도록 하여 마치 두사람이 나란히 서있는 것처럼 하여야한다. 



三勻 : 謝樹衛術 ---中間正而勿偏左右致拱揖之狀 
중간은 바르면서 치우치지 말아야하며 좌우의 것들은 공손하게 읍하고 있는 모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二段 :  嚮需留 ---要分爲兩半相其長短略加饒減 
두부분으로 나뉘어지게 하여야하는데 서로 그장단을 맞추기 위하여 획이 적은 것은 크게하고 획이 많은 부분은 줄여서 작게 써야하는 것이다. 



三停 : 章意素累 ---要分爲三截量其疏密以布勻停 
세마디로 나뉘어지게 써야하는데 그 성글고 빽빽한 것을 생각하여 고르게 배치되도록 하여야한다. 



上占地步 : 雷雪普昔 ---要上面闊而 輕下面窄而 重 
윗면은 활달하게 하면서 획이 가볍게 해야하고 아랫면은 좁으면서 획을 무겁게 하여야한다. 



下占地步 : 衆界要禹 ---要下面闊而 輕上面窄而 濁 
아랫면을 활달하게 하면서 획이 가볍게 하여야하고 상면은 좁으면서 획이 탁하고 무겁게 하여야한다. 



左占地步 : 數敬劉對 ---要左邊大而 細左邊小而 粗
좌변이 크면서 획이 가늘게 하여야하고 우변은 작으면서 획이 굵어야한다. 



右占地步 : 騰施故地 ---要右寬而 瘦左邊窄而 肥 
오른쪽은 넓으면서 획이 마르고 왼쪽은 좁으면서 획이 살쪄있어야 한다. 



左右占地步 : 弼辦衍仰 ---要左右都瘦而長中間獨肥而短 
좌우가 모두 마르면서 길어야하고 중간부분만이 통통하면서 짧아야한다. 



上下占地步 : 鸞鶯 叢 ---要上下寬而稍扁中間窄而勿長
위아래가 넓으면서 조금 납짝하게 하여야하고 중간은 좁으나 길게하지 말아야한다. 



中占地步 : 蕃華衝擲 ---要中間寬大而 輕兩頭窄小而 重
중간부분을 관대하게 하면서 획을 가볍게 해야하고 위아래나 좌우는 좁으면서 획이 무거워야한다. 



俯仰勾  : 冠寇密宅 ---要上蓋窄小而勾短下腕寬大而勾長
위의 덮개는 좁고 작게하고 구<갈고리>를 짧게하고 하완은 관대하게 하면서 구를 길게 하여야한다. 



平四角 : 國固門  ---上兩角要平下兩角要齊忌挫肩垂脚
위의 양각을 평평하게 하여야하고 아래 양각은 가지런하게 하여야하는데 어깨가 뒤틀리거나 다리부분이 축늘어진 것은 좋지않다. 



開兩肩 : 南丙兩而 ---上兩肩要開下兩脚要合忌直脚却肩
위의 양어깨는 벌어지게 하여야 하고 아래 양다리는 모이도록 해야하는데 곧게 나란히 내려온 다리나 좁은 어깨를 만들면 어울리지 않는다. 



勻畵 : 壽疆 量 ---黑白點 須要均勻 
흑백점획을 모름지기 고르게 해야한다. 



錯綜 : 馨聲繁繫 ---要三部交錯均勻不致互相障碍 
세부분의 교착을 고르게 해야하는데 서로 장애가 되게 하여서는 안된다. 



疏排 : 瓜介川不 ---疎排要疎闊各 要開展 
소배는 성글고 활달하게 해야하며 각 삐침획은 펼쳐지는 듯이 하여야 한다. 



縝密 : 繼 纏  ---點 要緊縮若疏開則 散 
점획을 긴밀히게 하여야한다. 만약 벌려놓으면 흩어져보이게 된다. 



懸針 : 車申中巾 ---懸針須鋒不宜中 中 則無精神
현침은 반드시 봉이 드러나게 해야하는 것이니 중수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중수로하면 정신이 없어 보인다. 



中  : 軍年單畢 ---中 不宜懸針懸針則不穩重
중수는 현침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않으며 현침으로 하면 온중하지 않다. 



上平 : 師明牡野 ---上平是小的在左邊上面要平齊
상평은 작은 것이 좌변에 있는 것인데 상면을 평평하게 맞추어서 써야한다. 



下平 : 朝敍叔細 ---下平是小的在右邊下面要平齊 
하평은 작은 것이 우변에 있는 것인데 하면을 평평하게 맞추어서 써야한다. 



上寬 : 守可亨市 ---下面不宜過大上面要疎展
하면을 너무 크게 쓰지 말아야하며 상면은 넓고 시원하게 해야한다. 



下寬 : 春卷夫太 ---上面緊小短促下面要開展
상면을 줄여서 좁게하고 하면을 넓고 시원하게 벌려줘야한다. 



減捺 :  癸食黍 ---複捺要減少不減少則主客不分
파책이 두개이상 있게 되는 경우에는 그중에 하나는 줄여서 점이나 작은 파책으로 써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객이 분명해지지 않는다. 



減勾 : 禁  懋 ---複勾要減少不減則輕重不辨
갈고리가 두개이상 있을 경우에는 줄여서 철주처럼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중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讓橫 : 喜婁吾玄 ---橫 都要長才不像걸擔
횡획을 모두 반드시 길게 해야한다. 그래야 비로소 들려지는 모양이 되지 않는다. 



讓直 : 甲干平市 ---要直 正長而不偏短
직획을 바르고 길게 해야하니 그래야 너무 작아지지 않는다. 



橫勒 : 此七也  ---橫勒若過於放平則無筆勢
횡평이 만약 방평보다 지나치게 되면 곧 필세가 없어진다. 



均平 : 三云去不 ---長短須平均相配相齊則失威
장단이 반드시 고르게 서로 어울려야 한다. 길이를 서로 같게하면 위엄을 잃게된다. 



縱波 : 丈尺吏臾 ---縱波的波須要藏頭收尾
종파의 파책은 장두로 해야하고 수미로 해야한다. 



橫波 : 道之是足 ---橫波的波先要拓頸寬胸 
횡파의 파책은 목부분을 넓게하고 가슴부분을 시원하게 해야한다. 



縱戈 : 武成幾夷 ---縱戈的戈過彎曲則無力
종과의 과는 지나치게 구부러지게되면 힘이 없게 되는 것이다. 



橫戈 : 心思志必 ---橫戈的戈不宜挺直勾平
횡과의 과는 몸이 곧으며 구가 평평해서는 않된다. 



屈脚 : 烏馬焉爲 ---屈脚的勾要共包兩點
굴각의 구는 두개의 점을 감싸고 있도록 해야한다. 



承上 : 天文支交 ---承上的 要使叉對正中
승상의 삐침은 교차되는 부분이 정중앙에 있도록 해야한다. 



曾頭 : 曾善英羊 ---曾頭的字要上開下合
증두의 점은 위는 벌어지고 아래는 모여야한다. 



其脚 : 其具與典 ---其脚的字要上合下開
기각의 점은 위는 모이고 아래는 벌어져야한다. 



長方 : 罔周同冊 ---長方的字四面要直而寬大
장방의 글자는 사면이 곧으면서 넓고 커야한다. 



短方 : 西曲回田 ---短方的字兩肩要平開
단방의 글자는 양어깨가 평평하고 벌어져야한다. 



搭勾 : 民衣良長 ---搭勾的字要 搭否則筆勢苟且
탑구의 갈고리는 다른 갈고리보다 더욱 올려서 써야하니 그렇지 않으면 필세가 구차하여진다. 



重  : 友及反  ---重 的 宛轉勿使兩 平行
중별의 별획은 모름지기 완만하게 구부러지게 해야한다. 두개의 삐침을 나란하게 해서는 안된다. 



 點 : 采孚妥受 --- 點的點須朝向否則像 石 
찬점의 점은 반드시 조회를 받듯 아랫쪽을 향하여 모이도록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섬돌과 같이 된다. 



排點 : 無照點然 ---排點的點勿平板如布棋要貴變化
배점의 점은 평평한 판에 바둑돌을 놓는 것처럼 해서는 안된다. 변화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勾努: 菊 蜀曷 ---勾努不宜向內 內 則外難方圓
구로는 안으로 향하여 싸려고 하지 마라. 안으로 싸는 모양이 되면 밖으로 방원을 만들기 어렵다. 



勾  : 甸句勾勺 ---勾 不宜用直努直努則外難飽滿
구과에는 직노를 사용하지 마라. 노획을 곧게 하다보면 안으로 포만한 느낌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中勾 : 東束米未 ---中勾的字但求偏正生硏
중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다만 치우치고 바르게되는 것을 잘 생각하여 할것인데 갈고리가 보통의 각도처럼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綽勾 : 乎手予于 ---綽勾的字亦喜硏生偏正
작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역시 치우치고 바른 것에 대하여 잘생각하여 할 것인데 갈고리가 보통의 각도보다 조금 느슨하게 좌측방향으로 올라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伸勾 : 紫 旭勉 ---伸勾的字惟在屈伸取體
신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오직 굽어진 곳에서 몸을 취해야한다. 



屈勾 :  鳩輝  ---屈勾的字要知體力屈伸
굴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체와 힘과 굴신을 알아야 한다. 



左垂 :  幷亦弗 ---左垂的字右邊不得太長
좌수가 들어가는 글자는 우변을 너무 길게 해서는 안된다. 



右垂 : 升叔拜卯 ---右垂的字左邊須要縮短
우수가 들어가는 글자는 좌변을 짧게 해야한다. 



蓋下 : 會合金舍 ---蓋下的蓋左右要平均分
개하의 개는 좌우가 고르게 배분되어야한다. 



 下 : 琴谷呑吝 --- 下的 兩邊要平展
진하의 진은 양변이 모두 고르게 벌어져야한다. 



縱腕 : 風鳳飛氣 ---縱腕要長但 蜂腰鶴膝
종완은 길게 해야하나 봉요나 학슬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한다. 



橫腕 : 見毛尤兎 ---橫腕也要梢長亦忌蜂腰鶴膝
횡완 또한 조금 길어야하나 또한 봉요나 학슬이 되지 말아야한다. 



縱  : 尹戶居庶 ---縱 忌短 牛頭鼠尾
종별은 짧은 것을 꺼리나 우두 서미가 되는 것을 꺼린다. 



橫  : 考老省少 ---橫 喜長也 牛頭鼠尾
횡별은 길은 것이 좋으나 또한 우두 서미가 되는 것을 꺼린다. 



聯  : 參彦形  ---聯 在以下 之首對上 的胸
연별은 하별의 머리부분이 상별의 가슴부분을 대하고 있어야한다. 



散水 : 沐波池海 ---散水在以下一點之起鋒應上一點之尾
산수는 아래 한점의 기봉하는 부분이 상일점의 꼬리 부분에 상응하여한다. 



肥 : 土止山公 ---此等字宜肥然忌擁腫擁腫則顯更肥
이러한 등등의 글자는 도톰하게 써야하나 부어있는 느낌은 좋지 않다. 부어있는 느낌이 들면 살찐 것이 더욱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瘦 : 了卜才寸 ---此等字瘦瘦忌枯削枯削則形更瘦
이러한 등등의 글자는 수척하게 써야하나 수는 삐쩍마른 것을 꺼린다 삐쩍마르면 모양이 더욱 수척해보이기 때문이다. 



疏 : 上下士千 ---疎本稀排乃用豊肥碩壯
소는 본래 드문드문하게 배열하는 것이나 풍비석장함을 사용하여야한다. 



密 :  齎龜  ---密要安疎須知輕細勿宜粗重
밀은 성글게 쓰는 것이 편안한 것인데 가볍고 가늘게 써야함을 알고 두텁거나 무겁게 쓰지 않는 것이 좋다. 



堆 : 晶品 磊 ---堆重 勻注意結合的地方勿使過疎過密
퇴는 골고루 배치시키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그러나 결합하는 곳은 너무 성글거나 너무 조밀하게 하지말라. 



積 :  靈 鬱 ---繁複中取均勻整潔否則形體刺眼難看
복잡하고 중복이되는 획이 많은 경우는 고르게 정돈되고 깨끗하게 써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형체가 눈을 자극하여 보기싫게 된다. 



偏 : 入八乙己 ---偏中要能勻稱勻稱則其形勢始相安
편중이된 글자는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하니 균형이 맞아야 그자세가 비로소 편안해진다. 



圓 :  巒樂欒 ---圓是要圍滿成圓形不要露鋒芒
원은 주위가 꽉차서 원형을 이루어야하니 봉망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한다. 



斜 : 毋勿乃力 ---斜中須取方正如不能方正則形體更斜
기울어진 속에서 반듯한 것을 취해야하니 반듯하지 못하면 형체가 더욱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다. 



正 : 主王正本 ---正要四方不偏如磐石泰山之安而不搖動
정은 사방 어느 곳으로든 치우침이 없어야한다. 반석이나 태산과 같이 편안하여 동요되는 것이 없어야한다. 



重 : 哥昌呂圭 ---重的字下半要大亦不可太大上面宜梢小
중첩된 글자는 아래에 있는 것을 크게 해야하는데 너무 크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상면은 약간 작게 해야한다. 



倂 : 竹林羽弱 ---倂的字右邊要梢寬左邊要梢窄能讓
같은 모양으로 나란한 글자는 우변을 조금 더 크게 해야하는데 좌변은 약간 작으면서 양보하는 기분으로 써야한다. 



長 : 自目耳葺 ---長的字不要使短使短則變原形
긴 글자는 억지로 짧게 쓰려고 하지 마라. 짧아지면 원래의 모습이 사라진다. 



短 : 白曰工四 ---短的字不要求長求長則不成體
납짝한 글자는 길게 쓰려고 하지마라. 길게 쓰면 원래의 형체를 만들지 못하다. 



大 :   囊戇 ---大的字要 簇如 散則不能站立
큰글자는 모아서 긴밀하게 써야하니 흩어지게 되면 서있을 수도 없게 된다. 



小 :  口小工 ---小的字要豊厚莊嚴否則更形小
작은 글자는 豊厚하고 莊嚴하게 써야하니 그렇지 않으면 모양이 더욱 작아지게 된다. 



向 : 妙舒飭好 ---向的字雖相向但手足仍須廻避得當 
향세의 자형으로된 글자는 비록 서로 향세를 이루고 있더라도 수족에 해당되는 부분이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피하여서 알맞도록 해야한다. 



背 : 孔乳兆非 ---背的字雖相背而脈絡仍是貫通
背勢로된 글자는 비록 서로 배세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서로 어울어져 그맥이 관통할 수 있어야한다. 



孤 : 一二十  ---孤的字筆 忌輕浮枯瘦否則更孤
획이 별로 없는 글자는 필획이 가볍고 들뜨고 마르고 수척한 것을 꺼리나니 그렇지 않으면 더욱 외로와지게 되는 것이다. 



單 :日月弓乍 ---單的字筆 要俊麗淸長亦忌枯瘦
간단한 글자는 필획이 씩씩하고 아름다우며 맑고 길어야하는데 이것 또한 마르고 수척한 것을 꺼린다. 


*초림 김미자의 서예이론강의 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출처 : 백담 그 시절...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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