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83 장초(章草) 장초는 필획이 예(隸)이고 결체는 초서에 근접한 것으로서 초서의 남상(濫觴)으로 볼 수 있다. BC 1세기에 유행되었으며 예서를 빠르게 쓰기 위해서 쓰여 졌다. 章자는 사유(史游)가 지은 급취편(急就篇)의 서체에서 이름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특징은 대체로 필세가 약동하며 연관(連貫)되어 있고 의취(意趣)를 내함한 수일(秀逸)한 풍격이다. 장초는 그 이후의 초서.행서의 발달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서체이며 서예 발전을 한 차원 높여준 계기가 되었다. 남상(濫觴) ; 술잔이 넘칠 정도의 작은 물(사물이나 일의 시초) 연관(連貫) ; 활을 쏠 때에 잇달아 과녁을 맞힘 의취(意趣) ; (=志趣) 의지(意志)와 취향(趣向) 수일(秀逸) ; 젊잖아 무게가 있고 우수함
p184 한 대(漢代)의 서가(書家) 사유(史游) 생졸은 미상이며 서한 원제(元帝 B.C 48-33) 때 사람이다. 당시 통용 문자에 운(韻)을 붙인 자서(字書)인 급취편(急就篇)을 지었다. 왕차중 (王次中) 생졸은 미상 상곡인(上谷人)이다. 양흔(羊欣)의 <<채고래능서인명(采古來能書人名)>>, 장회관의 <<서단>>에 팔분을 왕차중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지(張芝. ?-193) 백영(伯英)이며 원래 돈황인(敦煌人)인데 후에 홍농(弘農)으로 이사 하였다. 초서를 잘 써 초서의 독보(獨步)로 불리운다. 지금의 초서를 개창(開創)한 인물로 여긴다. 채옹(蔡邕 132-192) 자는 백개(伯喈)이고 건녕(建寧) 때 중랑(中郞)에 배(拜)하여 ‘중랑’이라 부른다. 홍도문(鴻都門)에서 공인(工人)이 백토(白土)를 벽을 바르는 것을 보고 착안하여 <비백서(飛白書)>를 창시하였다고 전한다. 배(拜) ; 벼슬을 받다 비백서(飛白書) ; 붓 자국에 흰 잔 줄이 나타나게 하는 것으로, 채옹이 미장이가 회칠 솔로 글자를 쓰는 것을 보고 깨우침을 얻어서, 응용하여 비백서를 창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참고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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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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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壽)
p184 서법예술 인식의 맹아(萌芽) 글씨의 예술성과 실용성을 논함에 있어서 한 대 이전의 글씨는, 기사(記事)를 위한 실용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때까지 서예에 대한 기술(記述)이 거의 없는 것과 서적에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큰 이유이다. 기록상에 보면 한 대에 와서 서법예술의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한서(漢書)>>에 원제(元帝, BC 48-33)가 사서(史書)를 능히 하였고 비파 타고 퉁소 불고 작곡하고 노래하는 것들을 기술하고 있다. 사서는 곧 예서로써 이에 능했다는 것은 정황으로 보아 자오(自娛)하였다는 것을 가히 엿볼 수 있다. 또 원제와 성제(成帝) 때에 곡영(谷永)이란 사람이 능서(能書)하여 그에게 편지를 받으면 누구나 귀중하게 보존하였다는 기록도 접할 수 있다. 후한에 더욱 진보하여 영제(靈帝 168-189) 때에 사의관(師宜官)은 대.소자를 다 잘 썼는데 주막의 벽에 글씨를 써 붙이면 관상자(觀賞者)들이 와서 술과 바꾸었다 하며 그의 제자인 양곡(梁鵠)의 글씨는 이후 조조(曹操)가 늘 장중(帳中)에 걸어놓고 감상하였다고 한다. 이렇듯이 한 대에는 서법을 예술로 여기는 인식이 싹텄고 위진을 거쳐 특히 남조에 와서는 예도(藝道)나 품격으로 보는 유풍(流風)이 보편화되었다.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인터넷 사전, 도서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