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영정조 시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시기 조선은 새로운 문화환경에 따른 변화 욕구가 내적으로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는 각 방면에서 다양한 에너지로 분출되어 사회 전반에 생동감 있는 활력을 불어넣었다. 영정조 시대에 대한 관심은 주체적 문화 역량 강화라는 현 시대의당면 과제와 맞물려 옛날의 거울에 오늘을 비춰보자는 바람의 한 표현일 터이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는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지은 71권 33책 분량의 방대한 저술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여기에는 저자의 다양한 지적 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당시 조선의 문화역량과 문예수준 뿐 아니라 문화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한 통로가 된다. 그는 정조가 설립한 왕립학술기관인 규장각에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일반이 구해보기 힘든 수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이 전서는 20여종의 다양한 저술로 이뤄져 있다.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처고'와 `아정유고' 외에 `예기억'과 아동용 역사교과서인 `기년아람',예절과 수신(修身)에 관한 규범을 적은 `사소절' 등이 있다. 이밖에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는 일상 견문을 통한 삶의 깨달음을 적은 경구나 일화를 기록한 향기 나는 글모음이고,`청정국지'는 일본의 역사 문화 및 풍속 언어를 기록한 일본 보고서다. 그는 두 눈이 짓물러 눈을 뜨지 못하는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독서광이었다. 스스로 '책만 읽는 멍청이'라 하여 `간서치전(看書痴傳)'을 짓기도 했다. 보고 듣고 읽은 것을 꼼꼼한 기록으로 남긴 `이목구심서'는 특히 연암 박지원이 여러 차례 빌려가 읽고는 자기 글에 수도 없이 원용했던 흥미로운 저술이다.
가을날 방안에 앉아 그림을 보고 있는데 창호지 위로 창 밖 국화의 그림자가 어리자, 엷은 먹으로 이를 그린다. 그때 호랑나비 두 마리가 국화 위에 올라앉자 나비를 마저 그리고, 참새 한 마리가 줄기에 매달리니 날아 갈까봐 재빨리 그려 넣고는 붓을 던진다. 또 이런 이야기도 실려 있다. 한 사람의 지기(知己)를 얻게 되면 그를 위해 10년 간 뽕나무를 길러, 다시 1년을 누에쳐서 실을 짜 그 실을 정성껏 오색으로 물들인다. 그런 다음 아내에게 부탁하여 오색실로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표구해서는 높은 산 맑은 물가에 가지고 가서 하루종일 말없이 마주보다가 저물 녘에야 품에 안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는 이렇듯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전서에는 수많은 시문과 편지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겨울날 냉방에서 한서를 펼쳐 이불처럼 덮고 `논어'를 병풍으로 둘러막아 얼어죽는 것을 면한 이야기며, 며칠을 굶주리다 `맹자'를 전당포에 팔아먹은 이야기 등 그의 절박한 가난과, 그럼에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삶의 훈기가 생생히 담겨 있다. 그의 많은 글은 오늘날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진실에서 우러나온 삶의 육성이 담겨있는 까닭이다.
이덕무를 비롯, 유득공 박제가 등이 중심이 된 서얼계층 문학동인 집단을 두고 '백탑시파(白塔詩派)'라고 일컫기도 한다. 백탑이란 지금의 종로3가 파고다 공원, 옛 원각사 터에 서 있던 대리석으로 된 탑을 말한다. 이들이 그 주변에 모여 살며 문학활동을 펼친데서 나온 말이다. 훗날 이들의 활동은 `백탑청연집'과 `한객건연집' 등 선집의 간행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그들은 진정(眞情)의 발로와 사실적 관찰에 바탕을 둔 신시(新詩)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 인정은 조선에서보다 중국에서 먼저 이뤄졌다.
그의 시대는 아직도 허명(虛名)만 남은 이념의 한 자락을 붙들고 관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청나라는 오랑캐니 그들을 무찔러 춘추의 대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맹목적인 `북벌'의식이 지식인의 잠재의식을 억압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 등이 이들의 외곽에 포진하면서 이른바 `북학(北學)'의 힘찬 움직임을 싹틔웠다. 바야흐로 세상은 달라지고 있었다.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식인의 참된 역할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진지한 자기 반성이 그의 저작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그의 글을 읽다가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후리후리한 키에 비쩍 마른 체격, 우멍하게 들어간 눈과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맑고도 깊은 눈빛. 달리 예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왕성한 탐구욕을 지녀 독학으로 정조의 각별한 아낌을 받았으나 서얼이었기에 품은 뜻은 높았어도 크게 쓰이지 못했다. 그의 글은 단정하면서도 정감 있고, 차가우면서도 따뜻하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처녀처럼 순진한 마음을 담은 글이라 하여 자신의 문집에 `영처고(孀處稿)'란 이름을 붙였다. 그의 다른 호인 `청장관(靑莊館)'의 `청장'은 덩치 큰 물새인 신천옹의 다른 이름이다. 이 새는 강호에 살면서 오직 제 앞을 지나가는 물고기만 잡아먹고 산다. 청장처럼 그는 곁눈질하지 않고 제 삶의 길을 앞만 보며 뚜벅뚜벅 걷다가 갔다.
그의 `청장관전서'는 진작에 민족문화추진회가 총 13책으로 국역하여 간행한 바 있어 읽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이 가운데 특히 `사소절'과 `이목구심서' `선귤당농소' 같은 저작은 복잡한 현대생활에 지친 삶을 조용히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 < egloos >의 글 중에서
<청장관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