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 1,2층 추녀

창덕궁 인정전 내부가구

창덕궁 인정전 옥좌

창덕궁 인정전 전경

창덕궁 인정전 처마 및 현판

창덕궁 인정전 측면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 내부옥좌
인정전 마당의 숨은
장치들
옛날 방화수통, 드므
왕의 즉위식은 인정문에서
열렸다.(수화포함)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1부, 왕의 즉위식은
인정문에서 열렸다

조선 왕가의 안식처,
창덕궁

창덕궁 달빛기행
창덕궁 인정전
| 종 목 |
국보 제225호 |
| 명 칭 |
창덕궁 인정전 (昌德宮 仁政殿) |
|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
| 수량/면적 |
1동 |
| 지정(등록)일 |
1985.01.08 |
|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와룡동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
| 시 대 |
조선시대 |
|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
| 관리자(관리단체) |
창덕궁 |
창덕궁 인정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다
‘인정(仁政)’은 ‘어진정치’라는 뜻이며,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法殿)이 된다. 법전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이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 순조 3년(1803)에 일어난 화재로 인한 재건, 그리고 철종 8년(1857년)에 보수공사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부른다.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문무관으로 각각 18품계를 새겼다. 그러나 정(正)4품부터는 종(從)을 함께 포함시켰으므로 정1품에서 시작하여
정9품으로 끝나며 각각 동, 서로 12개씩 있다.
정조 때 조정의 위계질서가 문란해졌다고하여 신하의 품계에 따른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인데, 3품 이상을 당상관(堂上官)이라하고, 3품 이하를 당하관(堂下官)이라 한다.
품계석에 맞추어 동편에는 문관, 서편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서는데, 문관은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반, 무관은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반이라 하였으며 이를 합쳐서 조선시대의 상류 계급인
양반이 된다. 문무관은 임금님을 향해 바라보는게 아니라 문관은 무관을, 무관은 문관을 서로 마주보며 종렬로 서게되는데 임금님께 절을 하라고
“배(拜)-”하는 구령이 떨어지면 홀을 든채 국궁배례하며 서있는 채로 마주보며 절을 하고, 이것을 ‘곡배(曲拜)’라고 부른다.
●
인정전의 내부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로 5대궁 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887년 경복궁이다.
-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창덕궁인정전
[ 昌德宮仁政殿 ]
창덕궁 인정전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각.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건물. 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으로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의장이 잘 갖추어져 있다.
| 이칭별칭 | 인정전 |
|---|
| 유형 | 유적 |
|---|
| 시대 | 조선 |
|---|
| 성격 | 전각 |
|---|
| 규모(면적) | 정면 5칸, 측면 4칸 |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
|---|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제225호 |
|---|
| 문화재 지정일 | 1985년 1월 8일 |
|---|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각.
내용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다포계(多包계) 팔작지붕건물. 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의장(意匠)이 잘 갖추어져 있다.
창덕궁은 오랫동안 조선왕조의 법궁(法宮) 구실을 하였으므로, 조정의 각종 의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이 이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인정전의 전면에 행랑으로 둘러싸인 전정(前庭)이 있어 이곳에 품계석(品階石)이 마련되었으며, 남쪽에 인정문이 있다. 왕세자나 세자빈의 책봉이 있을 때, 또는 대왕대비의 주갑(周甲 : 환갑) 등 경사가 있을 때 왕은 인정전에 나아가 축하를 받았다.
1405년(태종 5)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졌으나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1804년(순조 4)에 현재의 건물이 재건되었다. 창건 당초에는 정면 3칸의 작은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세종·단종 때 개영(改營)이 있었다.
이 때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재건되었으며, 다시 1803년(순조 3)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에 중건되고, 1842년(헌종 8)에 수리가 있었다.
기단 중앙의 계단 가운데 판석(板石)에는 구름 사이로 두 마리의 봉황이 새겨져 궁실(宮室)의 격식을 나타내고 있다. 12척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는 벽체 없이 사분합의 문짝과 광창을 설치하였다.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는 내사출목, 외삼출목으로 조선 후기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외부는 3제공에 모두 끝이 날카롭게 위로 솟은 쇠서를 만들고, 내부는 살미첨차가 모두 한데 모여 둥글둥글하게 장식된 운궁(雲宮)이 되어 내목도리나 보를 받고 있다.
중층건물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터져 고주 위로는 대량을 걸고 고주 밖으로는 퇴량을 걸어 사방에 툇간을 만들었으며, 대량의 위치에 우물천장을 드리웠다. 천장 중앙에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넣었다.
후면 고주 사이에 용상(龍床)을 설치한 어좌(御座)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오봉산일월도 五峰山日月圖>의 병풍을 쳤다. 어좌 위에는 천장에서 달아낸 보개천장을 두었는데, 정교하고 섬세한 가공이 돋보인다.
중층지붕의 각 마루에는 회반죽을 바르고 취두(鷲頭 : 매 머리모양의 장식)·용두(龍頭)·잡상(雜像)을 두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용마루 양성 부분에는 다섯 개의 이화문장(李花紋章)을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을 새긴 것이다.
인정전은 한말에 내부시설 일부를 개조하고 전등을 가설하였다. 내부 바닥은 본래 전(磚)이 깔려 있었던 것을 서양식의 쪽나무로 바꾸었으며, 창도 내부에 서양식의 들어서 여는 창을 내고 커튼을 드리웠다. 또한, 궁내에 전기를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어 여러 개의 전등을 가설하였다. 이들 새로운 시설은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장식하였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세 정전 중 하나로, 건축적으로는 규모가 근정전보다는 조금 작고 건립연대는 명정전보다 뒤떨어져 중간 위치에 있다고 하겠으나, 조선왕조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던 점에서는 다른 정전과는 다른 큰 의미를 가진다. 이 건물이 역사와 함께 변화되어 왔음은 내부에 꾸며진 한말의 서양식 시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궁궐지』
-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
- 『조선조왕궁중요건축물지정조사서』(문화재관리국, 1984)
관련이미지

창덕궁 인정전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각.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 국보225호. 창덕궁의 정전으로 조정의 각종 의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을 치루며 오랫동안 조선왕조의 법궁의 구실을 하였다. 인정전의 전면에 품계석이 마련된 전정이 있으며, 남쪽에 인정문이 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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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창덕궁 인정전
[ 昌德宮 仁政殿 ]
- 창덕궁의 정전(正殿).

창덕궁 인정전
| 지정종목 | 국보 |
|---|
| 지정번호 | 국보 제225호 |
|---|
| 지정일 | 1985년 01월 08일 |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
|---|
| 시대 | 조선 |
|---|
| 종류/분류 | 궁전 |
|---|
| 크기 | 정면 5칸, 측면 4칸 |
|---|
태종 이방원이 거처할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을 건립하면서 1405년에 완공되었다. 태종 때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으나 1418년에 규모가 큰 건물로 고쳐지었다. 인정전(仁政殿)은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되었고 선조 때 복구공사가 시작되어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던 1607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이후 인정전은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행하였고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창덕궁은 여러차례 화재로 시달렸는데 1803년 선정전에서 불이나 인정전까지 전소되고 말았다. 이듬해 1804년(순조 4) 다시 건립되었다. 인정전의 앞 마당에는 박석(薄石)을 깔았고 품계석을 설치하여 조선왕조의 법전으로 역할했다. 건물의 방향은 남향이고 인정문과 함께 회랑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형성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重層) 팔작지붕 다포(多包)집이며 순조 때 용마루에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배꽃문양 다섯개를 새겼다. 기단(基壇)은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과 좌우 측면에 석계(石階)를 설치하고 바닥면에는 전석(塼石)을 깔았다. 상하층으로 된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았고 상하층 월대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돌계단 난간에는 8마리의 석수(石獸)를 새겼고, 가운데 계단에는 답도(踏道)를 설치하여 봉황을 새겼다.
기둥은 배흘림이 없는 원주(圓柱)이고,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과 4개의 우고주(隅高柱)를 세워 중층가구법(重層架構法)을 따랐다. 두공(枓栱)은 밖이 3출목(三出目)이고 안이 4출목인 다출목으로 전개되었으며, 기둥머리의 안초공(按草工)으로부터 살미와 첨차(檐 遮)의 세부수법이 조선 말기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가구(架構)는 외중층(外重層) 내통층(內通層) 수법이고, 고주(高柱) 몸에 퇴량(退樑)을 끼워서 2층평주(二層平柱)를 받게 하였으며 우고주(隅高柱)가 2층 우주가 되게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인데 각 마루에는 양성(兩城)하여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올려 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이 건물은 가구의 짜임새와 외관이 견실하면서 운치와 미려를 겸하여 흥선대원군이 근정전(勤政殿)을 재건할 때 이 건물을 규범으로 하였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 위키디피아 자료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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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昌德宮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창덕궁 인정전은 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은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에 복구되었다. 이후 순조 3년 선정전 서행각에서 난 화재로 다시 소실되고, 이듬해에 중건된 후, 철종 7년 해체·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 앞뜰의 품계석은 정조 6년에 설치된 것이다. 인정전 좌·우로는 동행각 36칸과 서행각 38칸이 딸려 있다.
인정전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조금 가다가 동쪽으로 꺾이며 난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 마당으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꺾여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을 지나면 나타난다. 인정전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사방을 둘러친 행각들이 꽉 찬 듯한 공간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행각과 조응하며 커 보인다.
참고자료[편집]
본 문서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지식공유 프로젝트를 통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저작물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昌德宫 창덕궁 인정전 일원

돈화문 : 창덕궁 정문 ( 보물제383호)
사적 122호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1405년 (태종 5년) 이궁(離宮)으로 조성,
조선시대 5대 궁궐중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음
이 궁궐은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는 비원(秘苑)으로 더 유명한 후원이 조성되어 있음
경복국이 임진왜란때 소실된뒤 1867년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년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昌德宫位于首儿市中心以北,
是保存最完整的朝鲜王朝王宫。
昌德宫建于1405年(太宗 5年) ,
是朝鲜王朝第三代君王太宗的别宫。
壬晨倭乱时被日本人全部烧毁。
1609年重建以后,一直被当做正宫使用。
창덕궁은 서울시 중심 이북에 위치한다.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조선시대 왕궁이다.
창덕궁은 1405년 건축되었다.
조선왕조 3대 군왕 태종의 별궁이다.<태종 1400~1418>
임진왜란때 일본인의 의하여 전부 소실 되었다.
1609년 중건 이후, 줄곧 정궁으로 삼아 사용되었다.
관내에는 인정전과 대조전이 있다.
宫内有“仁政殿“和“大造殿”,
인정전(仁政殿) 외국사신의 접견과 신하들의 조하를 받는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정전 (국보 제225호)
또한 전형적인 조선 목조건축물 낙선재、
还有典型的朝鲜木结构建筑“乐善斋“
낙선재: 원래 창경궁에 속했던 내전 건물,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족들이 해방 이후 까지 기거 했던곳
선정전 일원 宣政殿一带 ( 보물 제814호)임금의 집무실로 쓰인곳 国王处理国政的地方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희정당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곳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 할수 있다.



대조전 大造殿一带 왕비의 침전 ( 보물 제816호)
비극적 역사가 담겨 있는 침전,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1920년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大造殿是昌德宫的正式寝殿也是王妃的生活空间。




조선시기 인공조경예술의 정화 "후원"이 있다.
朝鲜时期人工造景艺术的精华“后苑”。
后苑 : 창덕궁과 창경궁의 뒤쪽 13만 5,200여 평에 조성된 조선시대 궁궐의 정원, 본래 창덕궁의 후원后苑 또는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禁苑)이라고 불렀으며, 비원(秘苑) 이라는 명칭은 일제 때 용어이다.
-
昌德宫 창덕궁

돈화문 : 창덕궁 정문 ( 보물제383호)
사적 122호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1405년 (태종 5년) 이궁(離宮)으로 조성,
조선시대 5대 궁궐중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음
이 궁궐은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는 비원(秘苑)으로 더 유명한 후원이 조성되어 있음
경복국이 임진왜란때 소실된뒤 1867년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년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昌德宫位于首儿市中心以北,
是保存最完整的朝鲜王朝王宫。
昌德宫建于1405年(太宗 5年) ,
是朝鲜王朝第三代君王太宗的别宫。
壬晨倭乱时被日本人全部烧毁。
1609年重建以后,一直被当做正宫使用。
창덕궁은 서울시 중심 이북에 위치한다.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조선시대 왕궁이다.
창덕궁은 1405년 건축되었다.
조선왕조 3대 군왕 태종의 별궁이다.<태종 1400~1418>
임진왜란때 일본인의 의하여 전부 소실 되었다.
1609년 중건 이후, 줄곧 정궁으로 삼아 사용되었다.
관내에는 인정전과 대조전이 있다.
宫内有“仁政殿“和“大造殿”,
인정전(仁政殿) 외국사신의 접견과 신하들의 조하를 받는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정전 (국보 제225호)
또한 전형적인 조선 목조건축물 낙선재、
还有典型的朝鲜木结构建筑“乐善斋“
낙선재: 원래 창경궁에 속했던 내전 건물,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족들이 해방 이후 까지 기거 했던곳
선정전 일원 宣政殿一带 ( 보물 제814호)임금의 집무실로 쓰인곳 国王处理国政的地方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희정당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곳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 할수 있다.



대조전 大造殿一带 왕비의 침전 ( 보물 제816호)
비극적 역사가 담겨 있는 침전,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1920년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大造殿是昌德宫的正式寝殿也是王妃的生活空间。




조선시기 인공조경예술의 정화 "후원"이 있다.
朝鲜时期人工造景艺术的精华“后苑”。
后苑 : 창덕궁과 창경궁의 뒤쪽 13만 5,200여 평에 조성된 조선시대 궁궐의 정원, 본래 창덕궁의 후원后苑 또는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禁苑)이라고 불렀으며, 비원(秘苑) 이라는 명칭은 일제 때 용어이다.
- http://blog.naver.com/jjong2032/40174735353 프리티 쫑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