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5. 20:40ㆍ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53>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③ 신흠·이수광
신흠의 시는 오늘도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지나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은 남아있고/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어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선비의 지조를 노래한 이 시는 오늘날 문화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읊조려본 시구이다. 이 시는 퇴계 이황 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은 시로 더욱 알려져 있다.
신흠은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4대 문장가로 꼽힌다. 그는 문장뿐 아니라 제자백가·음양학·잡학·주역에도 뛰어났으며, 심지어 양명학 등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 몇 안 되는 조선의 선비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는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으로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했다.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에 따라 동부승지에 오르면서 출세가도를 달려 형조참의·이조참의·예조참의·병조참의·대사간을 역임했다. 정묘호란 때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란한 공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일찍 돌아갔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동인(東人)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벼슬살이를 이어갔다.
그는 차를 즐겼으며, 차시도 많이 남겼다. 일상의 차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물씬 풍긴다.
조선의 선비들은 야외에서 가야금을 켜면서 다회(茶會)를 즐기고 시를 나누었다. 다회를 그린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군현도’. |
“한 줄기 오솔길 숲 속으로 나 있고/ 낭떠러지 위에 작은 초가 하나/ 난초를 기르려 밭 일구고/ 달을 담으려고 못을 팠네./ 대밭 바람소리 비파처럼 울리는데/ 방 안 등불 아래에서 바둑을 두네./ 산가에는 청아한 일도 많아/ 때로는 차 끓이고 시를 짓는다네.”
“처마에 빗소리 아직 남고/ 10월 추위는 견딜 만하네./ 오리 향로엔 용연향 피어오르고/ 풍로에 차는 게눈처럼 끓는다네.”
“메마른 시사(詩思)를 찻물이 적셔주고/ 아픈 다리 청려장에 의지해 걸어보네./ 헛된 세상 평생 이러할지니./ 짧은 오리, 긴 학의 다리 같은 수 없겠지.”
“강설하던 입을 적시는 것은 좋은 봄 차이고/ 경연청 잠시 물러날 때 정오의 종소리./ 지난 밤 꿈에는 좋은 일 많았네./ 맑은 물결 속에 물새들이 퍼덕였지.”
“자욱하게 덮인 서리는 누에고치 같고/ 쌀쌀한 바람은 칼처럼 매섭네./ 차 솔일랑 땅 화로에 걸어두고/ 바위의 눈을 얼음과 섞어서 차를 끓이네.”
“등잔 아래에서 바둑을 두고/ 눈 녹인 물에 차를 끓이네./ 손님이 떠난 뒤 마음잡지 못하는데/ 소나무 사이로 물 먹은 달이 비치네.”
상촌은 차시도 좋지만 4대 문장가답게 산문의 맛은 더욱 좋다. 차에 관한 서정적 에세이 ‘야언(野言)’은 그 백미이다.
“차가 익어 향기 짙을 때 손이 오면 기쁘고, 꽃이 떨어지고 새가 우는데 사람이 없으면 그윽해진다. 좋은 샘물은 맛이 없고, 좋은 물은 냄새가 없다. 좋은 밤 편안한 등불을 밝히고 차를 달인다. 모든 사물이 조용해지면 개울물 소리만 들리네. 이부자리 깔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는 것은 첫째, 즐거움이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 문을 닫고 집 안을 청소하고, 책을 펼쳐놓고 흥에 겨우면 시를 읊어보는데 오가는 사람 없어 주위가 그윽하면 둘째, 즐거움이다. 해 저무는 공산에 가는 눈발 뿌리고, 앙상한 가지 바람에 흔들리고, 추위에 우는 새소리 들려오고, 방안 화롯가에 술 익고 차 향기 풍기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야언’이라는 말 속에는 전원생활을 좋아하는 그의 마음이 서려 있다. 이때의 야(野)라는 것은 자연스럽고 순박한 마음의 표현이다. 그는 평생 초사(楚詞)를 대표하는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좋아하였으며, ‘세상 밖의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평했다. 오늘날 차인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시문은 모두 ‘상촌집(象村集)’에 집대성되어 있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정주(程朱)학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도 일컬어진다. 그는 문장과 한문학에 두루 통했던 인물이다. 그의 차시를 보노라면 조선 중후기 차 문화의 탄탄함을 볼 수 있다.
조선 중기 문화백과사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이수광은 차와 함께 실학을 연 인물로 칭송이 높다.
이수광이 국내에 처음 소개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
‘인조실록’(1628년 12월 26일자) 이수광의 졸기(卒記·인물이 사망한 뒤 기록한 평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약관의 나이(23세)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으며, ‘교유(交遊)를 일삼지 않고 전랑(銓郞)이 된 사람은 수광뿐이다.’”
이수광은 전주이씨 왕족 출신으로 태어났지만, 실력으로 입신양명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편당 짓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권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벼슬살이 44년 동안 여러 차례 변란을 겪었음에도 흠결이 없어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실록 편찬자가 평한 것으로 보아 지성과 함께 인품도 갖춘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수광의 집안이 벼슬을 하기 시작한 것은 부친인 이희검(李希儉·1516∼1579) 때부터다. 이희검은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호조·병조·형조 판서를 지냈으나 청백리로 더 유명했다. 그의 모친 유씨 부인도 세종대 청백리 정승 유관(柳寬·1346∼1433)의 후손이다.
이수광은 외가와 인연이 많다. 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동에 유관의 집이 있었다. 비만 오면 물이 새는 초가집이었다. 비가 오면 유관이 우산을 들고 비를 막았다고 하여 ‘비우당(庇雨堂·겨우 비나 피할 수 있는 집)’이라고 하였다. 유씨 부인이 유관의 후손이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이희검은 이 집에서 살았다.
이수광은 유년시절엔 외가인 ‘비우당’에서 살았다. 이수광의 호인 ‘지봉(芝峯)’은 비우당 뒷산 봉우리였다. 어린 시절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란 이수광은 16세에 초시(初試) 합격을 시작으로 20세에 진사시를 거쳐, 23세에 대망의 문과 시험에 합격했다. 벼슬길에 들어선 이후로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승문원을 시작으로 예문관·성균관·사헌부·사간원 등 요직을 거쳐 28세의 나이에 병조좌랑이 되고 문장력을 인정받아 임금의 교서를 짓는 지제교(知製敎)를 겸직하였다. 조선시대 문관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셈이다.
그는 명나라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접하였고 이때의 기록을 토대로 ‘지봉유설’을 집필하고, 서학을 국내에 소개하고 실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선조 대에는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광해군 대에는 뜻이 맞지 않았으며, 1614년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는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비우당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지봉유설’은 비우당에 은퇴한 지 1년만인 1614년(광해군 6년)에 완성된 것이다.
그는 중국에 여러 차례 다녀오는 기회를 맞았는데 이때 중국에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국내에 처음으로 가지고 와서 ‘지봉유설’을 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2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에는 천문·지리·역사·정치·경제·인물·시문·언어·복식·동식물 등 방대한 주제를 바탕으로 3435항목에 달하는 사전적 지식이 망라되어 있다. 최초의 백과사전적 저술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되지만 등장하는 이름만 2265명에 달하는 실로 방대한 책이다.
시인이나 학자나 문장가에겐 항상 역경이 그로 하여금 후세에 남는 책을 쓰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도 예외는 아니다.
“꿈에서 깨어나니 하늘엔 외기러기/ 아픈 몸에 찬 기운 세월을 느끼네./ 가을 바람엔 언제나 오동잎 날리고/ 옥 이슬은 소리없이 계화(桂花)를 적시네./ 사람들과 운수에 가려 아득한 가을/ 달빛 아래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이 가을에 내 마음 한없이 스산하여/ 한가롭게 창 앞에서 차를 달이네.”
“약(藥)화로와 차(茶)솥은 한가롭게 살려는 뜻이고/ 잎이 다 떨어진 뜰은 해 기울어 신시(申時)라네.”
“종일 닫힌 문 찾는 이 없고/ 은자의 삶은 시골 중과 같네./ 술잔 기울이고 시 읊으면 수심 없어지고/ 아플 때 차 마시면 잠마저 달아나네./ 봄비에 기왓골 울리는 소리/ 새벽바람은 힘없는 꽃을 떨어뜨리네./ 한가한 틈내서 벗을 찾지만/ 남은 쓸쓸함을 채우지 못하네.”
‘지봉유설’에는 ‘조완벽전’(趙完璧傳)이라는 개인의 전기가 실려 있다.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그는 노예생활을 하던 중 한문을 읽을 줄 안다는 이유로 일본인 무역 상인에게 팔려, 베트남 무역을 독점하던 주인의 배를 타고 조선인 최초로 베트남에 가게 된 인물이다. 그는 나중에 고국에 돌아오게 되는데 그를 통해 베트남에서 이수광의 시가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이야기인 즉 이수광은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안남(베트남) 사신 풍극관(馮克寬)을 만나 옥하관(조선 사신들의 숙소)에서 50여일간 함께 머물며 시를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이때 지은 시가 베트남에 소개되었던 것.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살았던 이수광은 조선인이 아니라 당시 세계인이었다. ‘지봉유설’에는 유럽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천주실의 이외에도 1602년에 마테오리치가 만든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가 이듬해 조선에 전해졌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있다. 둥근 구형의 지구에 5대륙을 그린 ‘곤여만국전도’는 동아시아의 세계관을 바꿔 놓은 세계지도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중국을 왕래하면서 서구의 문물을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나중에 실학으로 집대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차인들은 세계인이었다. 오늘의 차인들이 그만큼 세계인인가는 도리어 의문이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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