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8. 22:56ㆍ카테고리 없음
실제 유물로 본 활과 화살
■ 활의 실제 유물과 필자의 추정복원도 - 발굴된 고구려의 각궁은 조선시대의 향각궁과 유사
1933년에 평양의 영화9년명 전축분 (서기 353년 축조)에서 활의 실물 유물을 발굴한 적이 있다. 물론, 1600년 전의 활이니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것은 아니고 뼈조각 형태로 나왔다. 남아있는 뼈조각을 감정한 결과, 뼈조각의 재료는 소의 갈비뼈로 만든 것이었다. 남아있는 뼈의 형태로 보아 이중만곡형 만궁으로 추정되었다. 길이는 약 80cm 정도의 단궁임이 확인되었다. 복원한다면 전체적으로는 무용총 수렵화에 나오는 활과 유사한 모양이 될 것으로 짐작되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무덤의 양식이 전축분이고, 진(晉)나라의 연호가 사용된 것을 볼 때 순수한 고구려인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고구려에 망명한 중국계 인물의 무덤이거나, 고구려에 복속된 낙랑지역의 토착계 주민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위 왼쪽의 그림은 실제 출토된 뼈조각의 모습이다. 모두 6조각인데 1,2,3,4번은 대략 40cm 정도의 굽은 뼈조각이고, 5번과 6번은 짧고 굵으며 곧은 20cm 정도의 뼈조각이다. 이 고분을 발굴한 조선총독부의 보고서(소화7년도 고적조사보고 제1책, 조선총독부, 1933)에 따르면 이것이 하나의 활이 아니라 3개의 뼈로 구성된 두개의 활로 생각하고 있다. 즉, 가늘고 굽은 뼈 두개를 양쪽에 놓고, 그 사이에 굵고 직선의 뼈를 덧댄 형태의 활이라는 것이다.
위의 그림은 고고학자들의 의견을 참조하고, 일반적인 각궁의 모양을 고려하여 필자가 그래픽으로 재배치해 본 것이다. 위 왼쪽 그림의 뼈조각 중에 비교적 모양이 완전한 3,4,5번 뼈조각을 사용하여 3번과 4번을 양쪽 끝에 5번을 가운데에 배치하였다. (혹 굵은 쪽이 활고자쪽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단 홈이 있는 쪽을 활고자로 생각하고 복원했으나, 활고자 쪽이 굵다는 것은 특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긴 뼈가 반대방향으로 배치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여하간 복원도는 위 뼈조각 그림 보다는 좀 더 활에 가깝게 보일 것이다. 3,4,5번이 결합하는 부분에는 금속이나 섬유로 된 끈으로 감고 자연접착제를 이용해 튼튼하게 결합시켰을 것이다.
이 활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각궁과 똑같은 제조방식을 가진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각궁은 대나무로 활채(활의 기본 몸통)를 만들고, 뽕나무로 활고자(활의 양쪽 끝에 꺽인 부분)를 붙인 다음, 여기에 다시 활채에 물소뿔을 가늘게 덧대고, 다시 참나무로 활채 가운데에 대림목을 만들어 붙이고, 마지막으로 소힘줄을 전체에 얇게 덧댄다. 그런데, 이 활은 조선시대의 물소뿔을 붙인 부분 보다도 훨씬 많이 뼈조각을 사용하고 있다. 이 골제 활도 상당 부분에 나무나 소힘줄을 덧데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고 해도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각궁과는 제조방식이 다소 다르다. 예를들어 복원도에서 5번 뼈 조각은 조선시대의 활이라면 참나무 대림목을 붙일 자리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각궁에서 사용하는 뿔조각은 일반적으로 하나로 되어 있으며 그림에서 처럼 3개의 뼈조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런 여러 개의 뼈조각으로 만드는 방식과 유사한 형태의 각궁이 조선시대에도 존재하기는 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각궁에 쓰는 물소뿔은 국산이 아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국산재료만으로 만드는 저렴한 각궁이 있었는데 이런 각궁을 향각궁(鄕角弓)이라고 한다. 향각궁의 경우 국산 소뿔을 쓰는데, 국산 소뿔은 짧아서 하나의 뿔로 활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세개의 뿔을 이어서 활을 만드는데 이 때문에 삼각궁(三角弓)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국궁 장인인 권영구씨에 따르면 이런 삼각궁은 물소뿔을 수입하기 힘들 때인 1950년대에도 제조되었다고 한다. (정진명 저, 한국의 활쏘기, 학민사,1999 p88, p106 참조) 즉, 영화9년명 전축분에서 출토된 이 골제 활은 소뿔이 아니고 소 갈비뼈를 사용했다는 점이 다를 뿐 세개의 뼈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향각궁이나 삼각궁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 활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도 일반적인 각궁이 아닌 향각궁의 실물은 아직 보지 못한 상태이므로, 이 고구려 골제 활이 향각궁과 동일한 활이라고 단정하지는 못하겠다. 현재로서는 출토된 실물 유물이 하나 뿐이므로, 고구려 활이 모두 이 활과 똑 같은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뼈조각과 똑 같은 모양의 뼈조각으로 만든 활이 에스키모족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에스키모족의 활도 세개의 뼈로 되어 있으며, 가늘고 긴 두개의 뼈 + 짧고 굵고 곧은 뼈까지도 완전히 똑같다. 이 활은 완전한 합성궁이 아니며 뼈 조각 세개를 끈으로 단순히 고정시킨 것이다. 어쩌면, 고구려 골제 활은 이 에스키모 활과 같은 방식의 활일지도 모른다.
■ 출토된 고구려 화살촉 도면 일람
- 01번 무경촉(無莖) - 자루 없는 화살촉
- 02번~12번 도끼날형 화살촉(부인형 , 도끼 부斧, 날 인刃)
- 16번~20번 유엽형 화살촉(버드나무 잎 모양)
- 21번~22번 능형 화살촉(다이아몬드 모양)
- 23번~24번 삼각형 화살촉
- 25번~00번 창신형 화살촉 (창날 모양)
- 26번~28번 추형 화살촉
- 29번~30번 끌모양 화살촉(착두형, 끌 착鑿, 머리 頭)
- 31번~32번 도신형 화살촉 (외날 칼 모양)
- 33번~34번 검신형 화살촉 (양날 칼 모양)
- 35번~36번 양익형 화살촉 (양쪽에 날개를 가진 모양)
- 37번~38번 삼익형 화살촉 (날개를 세개 가진 모양)
- 39번~42번 명적 (울고도리, 우는 살)
위 도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구려는 참으로 다양한 모양의 화살촉을 사용했다. 유럽이나 서남아시아 지역에 비해 동아시아 지역이 비교적 다양한 화살촉을 사용한 편이며, 특히 한국,중국,일본 등에서 독특한 모양의 화살촉을 많이 볼 수 있다. 세부적인 형식명이 너무 다양해서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듯하다. 이런 형식명은 고고학계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고고학계에서는 연대추정과 상호비교, 발전과정 분석을 위해서 이렇게 세부적이고 지엽적인 형식 분류를 중시한다. 11,12번과 30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도끼날형 화살촉과 끌모양 화살촉 중에서 잘 구별되지 않을 만큼 유사한 것들도 있으므로 이러한 고고학적인 분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 고구려 화살촉의 실제 출토 유물 사진
왼쪽의 사진은 북한 자강도 자성군 송암리에서 출토된 화살촉이다. 오른쪽의 사진은 만주 집안에서 출토된 화살촉으로 청동에 도금을 했다. 제일 왼쪽에서부터 첫째 화살촉이 전형적인 도끼날형(부인형: 도끼 부斧, 날 인刃) 화살촉의 모습이다.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른바 끌형(착형: 끌 착鑿) 화살촉이다. 가운데 사진의 화살촉은 화살을 쉽게 빼낼 수 없게 거꾸로 된 비늘(역자)이 달려 있다. 오른쪽 사진의 도금 화살촉은 유엽형 화살촉이다. 실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화살촉은 일반적인 화살촉과는 모양이 다른 특이한 화살촉이 많고 화살촉의 자루가 아주 긴 것도 있다.
■ 고구려 화살의 복원품-무형문화재 47호 유영기씨의 작품
유영기씨는 활과 화살을 모두 만드는 장인이지만 특히 화살 만드는 장인으로 유명한 분이다. 유영기씨는 궁시장 명문가의 전통적인 장인이다. 유영기씨의 부친과 조부는 경기도 장단 지방의 화살 장인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아들까지 국궁제작을 전수하고 있다. 무형문화재급 궁시장 중에 상당수가 유영기씨 부친과 조부한테 궁시제작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전쟁기념관, 육군박물관, 마사박물관 등에 전시된 전통 화살은 거의 대부분 유영기씨가 제작한 것이다. 2000년 10월 'SBS 한국의 전통무기 특집'에서 쇠뇌 복원장면에 나온 유세현씨도 유영기의 둘째 아들이다. 여하간 전통 화살만큼은 최고의 명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철촉은 출토된 실물을 그대로 복원했고, 화살의 나머지 부분은 조선시대의 화살 제조법대로 만든 것이다. 화살대를 고구려식으로 싸리나무를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위(上上) 사진의 화살 5개는 북한의 자강도 연풍리와 송암리에서 출토된 화살촉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위에서 두번째는 전형적인 도끼날형(부인형 화살촉) 화살촉이다. 나머지는 도끼날형 화살촉 혹은 끌형(착형) 화살촉이다. 위에서 세번째의 화살촉은 화살을 빼낼 수 없게 거꾸로 된 비늘(역자)이 들어 있다. 위 사진 중에 아래(上下) 화살 3개는 각각 북한 장성리와 만주 집안에서 출토된 화살촉이다. 가운데에 있는 화살은 명적(울고도리)이며, 제일 아래의 화살은 만주 집안에서 출토된 화살로 청동에 금을 입혔다. 이 청동에 금을 입힌 화살은 의식용으로 사용한 화살이거나 국왕 내지 최고위급 귀족이 사용한 화살로 추정된다.
■ 기타 활 관련 보조장비 - 촉돌이
위 그림(上上)은 중국의 석대자산성에서 출토된 한 골제기구의 도면이다. 위 아래쪽 사진(上下)는 조선시대의 촉돌이로 각각 단국대, 경희대, 육사 박물관 소장품이다. 석대자산성은 중국의 심양 부근에 남아있는 고구려 산성이다. 도면 속의 도구는 1993년 발굴되었으며 재질은 뼈로 되어 있다. 이 발굴보고서를 소개한 국내의 한 논문(서길수, 석대자 산성을 통해서 본 고구려 산성의 특징, 1999)을 보면 이 기구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는듯 단순히 뿔모양을 한 기구란 뜻으로 '뿔꼴기구'라고 이름을 붙여놓았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무기에 관심이 많은 필자가 보기엔 한 눈에 영락없이 '촉돌이'로 보인다. 촉돌이는 화살촉을 뽑거나 조일 때 사용하는 기구이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촉돌이 중에 도면 속의 기구와 비슷하게 생긴 촉돌이가 있다. 조선시대 촉돌이의 재질도 상아 혹은 뿔로된 것을 사용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삼국시대의 촉돌이 실물이 발굴된 예가 없다. 만약, 이 골제기구가 촉돌이가 맞다면 사상 처음으로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의 촉돌이가 확인된 것이다.
5. 활의 실전 사용과 관련된 몇가지 논점들
■ 고구려 화살촉의 관통력- 판갑 전사의 죽음
아래 사진은 KBS 역사 스페셜에서 2000년 1월22일 방송한 실험 장면으로 복원한 고구려 화살촉이 가야 판갑(板甲, 일명 단갑)을 관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용한 화살촉은 뾰족한 화살촉이다. 서울 구의동에서 출토된 고구려 화살촉의 강도(탄소량 평균 0.51%)를 참조하여, 이에 준하는 초강을 사용하여 화살촉을 제조했다. 판갑은 가야 갑옷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야에서만 사용한 갑옷은 아니며 이른 시기의 신라나 백제에서도 사용한 갑옷이다. 또한, 백제나 가야의 원군, 용병, 혹은 동맹군 자격으로 한반도상에 출전했을지도 모르는 왜군들도 이러한 판갑을 주된 갑옷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아래 사진에 보이는 실험 결과는 삼국시대의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상대했을 이름모를 판갑 전사(板甲 戰士)의 죽음을 재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실험은 개인은 추진하기가 어렵고, 언론사나 공영 연구기관 정도는 되어야 실험이 가능한데, 공영방송인 KBS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한가지 아쉬운 점은 기병사격을 재연하기 위해 먼거리에서 사격하지 못하고, 가까운 거리 (5m 이내)에서 사격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원거리에서 국궁 기병사격을 잘하는 인물이 없다) 실전적인 의미가 있는 거리 (50~70m 이상)에서도 관통할 수 있는지, 근거리라면 넓적한 화살촉도 판갑을 관통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았으면하는 아쉬움이 있다.
■ 넓적한 화살촉의 용도 - 고구려의 넓적한 화살촉은 경무장한 적을 대상으로 사용한 것일까?
군사사(軍事史)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나치게 세부적인 고고학적 화살촉 분류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도끼날 형이나 끌 모양 화살촉이 많다는 점, 전반적으로 화살촉이 길다는 점은 눈여겨 볼 점이다. 위 실제 발굴품 도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도끼날형과 끌형으로 쉽게 구별할 수 없는 절충적인 형식의 화살촉도 많다. 따라서, 크게 봐서 고구려 화살촉은 화살촉이 넓적한 것과 뾰족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용도에 따라 화살촉을 다르게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① 넓적한 화살촉은 갑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경무장의 적을 상대로 한꺼번에 큰 상처를 주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따라서 갑옷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이른 시기에 주로 사용한 것이고, ② 뾰족한 화살촉은 갑옷을 관통할 수 있는 화살촉으로 갑옷이 널리 보급된 후대에 주로 사용한 화살촉이라는 것이다. 실제 KBS 역사스페셜팀의 실험결과 고구려의 뾰족한 화살촉은 거의 무적의 갑옷 처럼 보이는 가야 판갑을 관통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으나, 필자로서는 예전부터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다. 청동기 시대의 화살촉 중에는 오히려 이렇게 넓적한 화살촉은 거의 없는데 반하여, 철기시대인 고구려 화살촉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넓적한 화살촉이 존재한다. 상식적으로 삼국시대에는 청동기 시대에 비하여 갑옷 보급이 더 확대되었을텐데 어째서 고구려 시대에 넓적한 화살촉이 대량으로 출토되는 것일까?
따라서, 넓적한 화살촉이 주로 경무장의 적을 대상으로 사용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두가지 가설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는 넓적한 화살촉이 기병의 말을 상대로 사용한 화살촉이라는 가정이다. 이 경우 왜 청동기 시대 보다 삼국시대에 넓적한 화살촉이 대대적으로 유행했는지 쉽게 설명이 된다.
둘째는 거리에 따라 다른 화살촉을 사용했을 가능성이다. 몽골군의 경우에는 작고 가벼우며 먼 거리를 날아가는 화살촉(비전)과 갑옷을 뚫을 수 있는 무겁고 큰 화살촉 두 종류를 사용했다고 한다. (국방군사연구소 역, '몽골군의 전략전술', 1997 p12참조) 즉, 몽골군의 크고 넓적한 화살촉은 오히려 근거리에서 적의 중무장한 갑옷을 확실히 관통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에도 넓적한 화살촉이 반드시 경무장의 적을 대상으로 사용한 화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적의 갑옷 장착 여부에 상관없이 근거리에서 치명상을 주기 위해 사용한 화살촉일 가능성도 있다.
■ 명적 (효시, 울고도리, 우는살, 소리 화살)의 용도 - 아버지를 향해 쏘아라.
명적(鳴鏑: 울 명鳴, 우는살 적鏑)은 소리화살을 말한다. '우는살'이라고 하며, 순수한 우리말로는 '울고도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은 한자어로 효시(嚆矢 - 울릴 효嚆, 화살 시矢)라고도 한다.
명적은 날아가면서 "쉬이익"이라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간다. 화살촉 중간 부분에 동그란 방울처럼 생긴 부분이 있는데 속이 비어있고 구멍이 1~6개 정도 뚫려 있다. 촉은 뼈나 청동제가 많고 철제는 잘 없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고구려 고분벽화, 특히 수렵도 자주 등장하고 고구려, 신라, 가야 고분에서 실물이 출토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명적은 전투에서 신호용 화살로 사용했던 것 같다. 효시라는 말에 무엇의 시작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공격개시 신호용으로 많이 사용한 것 같다. 혹은 적을 심리적으로 위압하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명적이 공격개시 신호용 내지 공격 방향 지정 용도로 사용된 전형적 예를 보여주는 사료가 있다. 비록 고구려의 예는 아니지만, 참고는 될 것이다. 참고로 흉노, 돌궐(투르크)족의 명적은 고구려의 명적과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史記 卷一百十 匈奴列傳 第五十
單 于 有 太 子 名 冒 頓 。 後 有 所 愛 閼 氏 , 生 少 子 , 而 單 于 欲 廢 冒 頓 而 立 少 子 , 乃 使 冒 頓 質 於 月氏 。 冒 頓 旣 質 於 月 氏 , 而 頭 曼 急 擊 月 氏 。 月 氏 欲 殺 冒 頓, 冒 頓 盜 其 善 馬 , 騎 之 亡 歸 。 頭 曼 以 爲 壯 , 令 將 萬 騎 。冒 頓 乃 作 爲 鳴 鏑 ,習 勒 其 騎 射 , 令 曰 : 「 鳴 鏑 所射 而 不 悉 射 者 , 斬 之 。 」 行 獵 鳥 獸 , 有 不 射 鳴 鏑 所 射 者, 輒 斬 之 。 已 而 冒 頓 以 鳴 鏑 自 射 其 善 馬 , 左 右 或 不 敢 射者 , 冒 頓 立 斬 不 射 善 馬 者 。 居 頃 之 , 復 以 鳴 鏑 自 射 其 愛妻 , 左 右 或 頗 恐 , 不 敢 射 , 冒 頓 又 復 斬 之 。 居 頃 之 , 冒頓 出 獵 , 以 鳴 鏑 射 單 于 善 馬 , 左 右 皆 射 之 。 於 是 冒 頓 知其 左 右 皆 可 用 。 從 其 父 單 于 頭 曼 獵 , 以 鳴 鏑 射 頭 曼 , 其左 右 亦 皆 隨 鳴 鏑 而 射 殺 單 于 頭 曼 , 遂 盡 誅 其 後 母 與 弟 及大 臣 不 聽 從 者 。 冒 頓 自 立 爲 單 于 。
사기 흉노열전
"흉노 (두만) 선우의 태자 이름은 모둔이다. 뒤에 (두만 선우가) 새로운 부인을 얻어, 어린 아들을 얻었다. 이에 (두만) 선우는 모둔을 태자에서 폐하고, 어린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이에 모둔을 월시국에 인질로 보냈다. 모둔이 월시에 인질로 가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두만 선우가 월시국을 공격했다. 이에 월시국에서 모둔을 죽이려 하자, 모둔은 좋은 말을 훔쳐타고 달아났다. 두만 선우가 이를 장하게 여겨, (모둔으로 하여금) 만명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모둔이 명적을 만들어, (병사들로 하여금) 마상 사격을 연습하게 했다. (모둔이) "명적을 쏘았는데 사격을 하지 않는 자는 처형하겠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사냥을 가서, (모둔이 ) 명적을 쏘았는데도, 활을 쏘지 않은 자는 모두 처형했다. (모둔이) 다시 자기의 좋은 말을 향해 명적을 쏘았는데, 좌우에서 감히 (모둔의) 말을 쏘지 못한 자가 있었다. (모둔은) 이에 말을 향해 활을 쏘지 않은 자들은 모두 처형했다. (모둔이) 다시 자기의 첩을 향해 쏘았는데, 주변에서 두려워하여 (애첩에게) 활을 쏘지 않은 자는 또한 모두 처형했다. 얼마후 모둔 사냥을 나갔는데, 명적으로 (두만) 선우의 말을 쏘았다. 주변에서 모두 선우의 말을 향해 활을 쏘았다. 이에 모둔이 주변 인물들이 쓸만하게 훈련되었음을 알았다. (모둔이) 그 아버지 두만선우를 따라 사냥을 갔다가, (모둔이) 두만선우를 향해 명적을 쏘았다. 좌우에서 모두 활을 쏘아 두만선우를 죽였다. (모둔이) 마침내 의붓어머니와 이복동생, 말을 듣지 않는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 5세기 이후 고구려에서 궁기병(Horse Archer)는 사라졌을까? - 발상의 전환을 강요하는 고분벽화의 미스테리
최근 중장기병론(참조: 고구려 중장기병과 Cataphracts) 을 주장하고 있는 이인철이나 여호규 같은 학자들은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주력무기는 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기병의 경우 5세기 이후 거의 전부가 창기병이며 궁기병은 거의 없었거나 있었다해도 미미한 병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고구려 고분벽화이다.
여러 고구려 벽화에 무기를 들고 등장하는 사람의 총수는 275명이고 이중 보병이 143명, 기병이 132명이다. 보병중에 활을 들고 있는 사람은 총 11명 (7.69%)이고, 기병 132명 중에는 60명 (45.4%)이 활을 들고 있다. 하지만, 안악3호분에 무더기로 등장하는 보병 궁수 8명을 제외하면 보병 중에 활을 든 사람은 단 3명에 불과할 뿐이고, 기병 중에 활을 소지한 60명 중에 사냥 장면에 불과한 수렵도 상의 58명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전투장면이나 행렬도만 따지자면 기병 중에 활을 소지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병종구성을 가장 잘 식별할 수 있는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 약수리 고분 벽화의 행렬도 상에는 활을 들고 있는 기병은 단 한명도 없다. (구체적인 수치는 여호규,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1999 p43~45를 주로 참조했다)
수렵도가 아닌 고분벽화 중에 활을 들고 있는 기병은 단 2명 밖에 없는데 그나마 이들도 순수한 경기병이나 전형적인 궁기병이라고 보기에는 망설여지는 장면이다. 쌍영총에는 허리에 활을 찬 기병이 등장하는데, 그나마 전혀 갑옷을 전혀 입지 않은 평상복 차림이다. (3.고분벽화의 활과 화살에 나오는 쌍영총 벽화 참조) 이 사람은 무덤 주인으로 생각되므로 일반적인 경기병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고, 무덤주인이 생전에 사냥을 나서는 장면이거나, 혹은 평상시 차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가한 모습이다. 더구나, 덕흥리 고분 행렬도에서 활을 든 기병은 엉뚱하게도 활이 아닌 쇠뇌(弩)를 들고 있어 황당한 느낌을 준다. 결국 우리는 실제 궁기병의 모습으로 생각되는 사람을 벽화상에서 단 한명도 발견할 수 없다. 창을 든 기병이 보조무기로 활을 동시에 보유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창과 칼을 동시에 휴대한 경우는 있어도 창과 활, 혹은 칼과 활을 동시에 휴대한 경우는 단 한명도 없다.
만약 고구려 고분벽화가 실제 고구려군 병종구성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생각할 경우, 특히 여러 병종을 가장 보여주는 행렬도를 기준으로 할 경우 5세기 이후 고구려에는 궁기병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고구려에서 5세기 이후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것은 오직 사냥 때 뿐이라는 황당한 결론으로 연결시킬 수 밖에 없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고구려에 중장기병이 존재했음을 인정하고, 나아가 중장기병이 상당히 실전적인 의미를 가지는 핵심병종이었음을 인정한다해도, 고구려에 궁기병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전설적 명궁 추모(주몽)가 세운 나라, 기사(騎射)에 능했다는 동천왕의 나라, 국가적인 사냥행사에서 국가인재를 선발한 나라, 맥궁과 각궁의 나라, 벽화마다 수렵도가 넘쳐나는 나라에서 궁기병이 없었다는건 넌센스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분벽화는 필자에게 "발상의 전환"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세가지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세가지 모두 필자가 생각해본 가설임)
첫째는 고구려 고분벽화가 실제 고구려 병종구성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특히 행렬도는 말그대로 의장병에 불과할 뿐 실제 병종구성 비율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둘째는 순수한 고구려인, 특히 상류층의 고구려인은 모두 중장기병 내지 창기병으로 종군하고, 경기병/궁기병은 말갈인들로 충원했을 가능성이다. (이때 말갈인은 단순히 고구려의 변방 주민 내지 평민을 의미하든, 퉁구스계의 이민족을 의미하든 상관없다) 다시 말해 중장기병은 귀족 내지 상류층, 경기병/궁기병은 평민층 내지 피지배민족에서 충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이다.
세째는 별로 진지한 가설은 아니지만, 혹시 계절에 따라 주무기에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합성궁 계열의 활은 자연접착제를 이용하기 때문에 습도와 온도가 높은 여름이 되면 활이 약해지게 된다. 이 때문에 활이 숨을 쉰다는 말도 있고, 좀 더 극단적으로는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활이 달라지기도 했다. 고구려 기병은 혹시 여름이 되면 창을 주력 무기로 싸우고, 겨울에는 활을 주력무기로 싸웠을까?
현재로서는 차라리 이런 가정들이 더 그럴듯해 보이고, 고구려에서 궁기병이 거의 없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평상시에 그렇게 말타고 활쏘기를 즐기는 고구려인이 전쟁 때만되면 오로지 창을 들고 뛰쳐나갔다고 생각하는건 더 황당한 가정이 아닐까? [상편으로 돌아가기]
- 출처 : 신재호의 군사연구
- http://www.defence.co.kr/~etica13/g-3-1-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