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둘기 성모님 >
홍수가 났을 때, 노아는 방주 안에서 1년을 꼬박 살아야만 했습니다. 물 수위가 조금씩 낮아지는 것 같아 그는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처음엔 그냥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7일 뒤, 다시 내보냈더니 비둘기는 나뭇잎을 물고 왔습니다. 그래서 땅에서 물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7일 후, 비둘기를 날려 보냈는데 비둘기는 더 이상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고 방주 뚜껑을 열고 땅으로 내려와 그 땅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땅에 내려 하느님께 번제물을 바쳤는데, 그때 그 향내를 맡으신 하느님께서 이렇게 결심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하느님은 ‘땅’을 축복하여 멸하지 않게 하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이 짧은 이야기가 만약 ‘비둘기’가 ‘성령님’, 혹은 ‘사랑’을 가리킨다는 것을 안다면, 또 ‘물’이 인간을 뒤덮고 있는 ‘교만’, 즉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아’요 ‘죄’임을 보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상징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비둘기’는 어느 문화에서는 친근하고 순박한 사랑을 상징합니다. 비둘기들이 다른 새들보다도 더 인간에게 가까이 오고, 또 발에 편지를 매달아 날려 보내면 다른 어떤 새들보다도 충실하게 순종하여 한눈팔지 않고 그 목적지만을 향해 날아가고, 또 암컷과 수컷이 키스하듯이 부리를 비비며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충실한 사랑의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특별히 순종하는 순박하고 겸손한 모습에서 남성보다는 사랑스런 여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가서에는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 ‘나의 비둘기’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내게 문을 열어 주오, 나의 누이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여! 내 머리는 이슬로, 내 머리채는 밤이슬로 흠뻑 젖었다오.”(아가 5,2)
아가서는 바로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관계, 혹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왔음을 알아야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으로써 문 밖에 서서 당신을 맞아줄 것을 청합니다. 이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말씀이신 성자께서 성모님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시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라는 말 안에는 자신을 맞아들이면 누군가로 보내겠다는 파견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마치 노아가 비둘기를 7일에 한 번씩 파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7은 성경에서 ‘성령 칠은’과 같이, 특별히 ‘성령님’을 상징할 때 쓰이는 숫자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성령님과 같이 파견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성령께서 그 파견하시는 분을 자신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만이 아닌 파견하신 이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례 받으실 때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성령님을 받으심으로써 아버지까지 받아들이셨습니다. 땅도 노아가 파견한 비둘기를 받아들임으로써 노아를 받아들였고 노아의 축복까지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한 여인이 ‘계약의 궤’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입니다. 계약의 궤 안에는 ‘십계명 판, 만나가 든 항아리,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첫째는 우리 사랑의 모델이요 법이신 그리스도(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신 그리스도(만나=성체), 그리고 멜케체덱과 아론을 잇는 대사제로써 우리 죄를 없애주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계약의 궤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그리스도를 당신 안에 품고 파견 받는 성모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태양이 곧 하느님을 상징하는데 하느님을 입었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달을 밟고 있다는 것은 성모님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열두 개로 된 별을 면류관으로 쓰고 계시다는 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또는 열두 사도를 상징함으로써, 성모님은 사도들의 또 교회의 어머니요 여왕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용으로 상징되는 사탄이 성모님을 위협하는데도 왕이요 목자의 상징인 ‘쇠지팡이’를 지닌 당신 아드님이 도와주시지 않고 그냥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광야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야는 노아 때의 물과 같습니다. 물이 많아도 비둘기가 살 수 없지만, 물이 아예 없어도 비둘기는 살 수 없습니다. 비둘기는 ‘동산’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 광야나 홍수는 바로 하느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 세상을 상징하기도 하고 우리 마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자아와 죄가 가득하여 비둘기를 맞아들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다시 물속으로 빠져들게 된 이유는 바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자아요 마귀입니다. 자아가 강해지면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하기 때문에 죄를 짓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는 뱀으로 상징되는데 그 뱀의 말을 들으면 죄의 열매를 따먹기 때문에 비둘기가 그 마음 안에는 내려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아를 죽이고 겸손해진 땅은 비둘기를 받아들이게 되고 노아 때 하느님께서 땅을 축복하신 것처럼 그 땅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당신 어머니를 세상에 남겨놓으신 것은 누군가에게 성모님을 파견하여 그 성모님을 받아들이는 이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누구에게 당신 비둘기인 성모님을 파견하셨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바로 열두 사도로 기둥을 삼고 있는 하느님의 열두 지파인 새 예루살렘인 교회인 것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얻어 혼인잔치를 지속할 수 있게 해 주신 분이 성모님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은총이 흘러나오도록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완전한 믿음을 가지신 분이 성모님이기 때문에 성모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을 통해 오는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은총까지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광야에서 여인을 맞아주는 처소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성모님을 맞아주는 처소, 곧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모님을 세상에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성령을 성모님께 보내시는 과정은 바로 십자가에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 태어나신 성모님을 교회에 파견하시는데, 십자가 밑에 있던 요한이 곧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그렇습니다. 참다운 교회는 성모님을 맞아들인 교회입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비둘기입니다. 그 비둘기를 맞아들이는 교회는 그 비둘기를 통한 그분의 신랑을 맞아들여 그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됩니다.
그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을 받아들인 교회는 또한 성모님께로부터 파견 받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성모님 또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시는 것이지만 그 속엔 보이지 않는 성모님이 어머니로 계신 것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 때 기적을 그리스도께서 하셨지만, 그 기적이 가능하게 하신 분은 어머니 성모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명을 받아 실천하지만, 실제로 그보다 앞선 명령이 카나에서의 바로 교회에게 내리신 이 파견이신 것입니다.
파견 받는 모든 이들은 그래서 비둘기입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고 충실하게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를 받아들이는 이들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비둘기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여기서 비둘기처럼 순박하라고 하실 때는 반드시 당신께서 먼저 세상에 파견하실 성모님을 생각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또한 작은 비둘기들로써 우리의 목적지인 세상을 두루 다니며 앉을 자리를 찾아 그 안에 머물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를 맞아들이는 그 땅을 우리를 파견하신 하느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성모님은 승천하시는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작은 비둘기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