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으로 가던 길목, 파주고을8월 고을학교
8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11강으로,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관문으로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84)와 황희(黃喜, 1363∼1452) 정승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임진강변의 경기도 파주(坡州)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강은 8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30분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강북 지역 참가자들을 위해 8시 일산 대화역 4번 출구(지하철 3호선)에서 한 번 더 섭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 압구정역 공영주차장(오전 7시 30분)→일산 대화역(8시)→황희 정승 유적지→반구정→화석정→황포돛배로 임진강 답사→율곡 이이 유적지→자운서원→점심식사 겸 뒤풀이→파주향교→파주삼릉→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일산→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강 답사지인 파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파주(坡州)는 본래 고조선의 땅이었다가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했습니다. 삼국시대에 최초로 파주에 자리 잡은 나라는 백제였으나 고구려와의 계속된 영토싸움으로 475년에는 파주 땅 전체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가 그 뒤 신라 진흥왕이 파주를 차지하였습니다. 고려시대의 파주 지역은 무신정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1170년(의종 24)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보현원이 바로 옛 장단군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파주는 조선시대에 지금의 명칭을 얻었습니다. 세조(1459년)는 이곳이 왕비의 친정이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그전까지 원평도호부로 불리던 곳을 ‘목(牧)’으로 승격시키고 명칭도 파주로 고쳤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13년(광해군 5) 이의신(李懿信)에 의해 교하천도론(交河遷都論, 지세가 노쇠해진 한양에서 파주의 교하로 서울을 옮기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논의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파주 지역에는 한강과 과거 칠중하(七重河)라 불렀던 임진강을 비롯하여 공릉천, 문산천, 갈곡천, 비암천 등 크고 작은 강이 많이 있습니다. 파주는 북녘의 산하를 위에 두고 구불구불 흐르는 임진강과 대한민국의 심장을 관통하여 흐르는 한강이 함께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하구(河口)에 위치해 있어 예로부터 둑과 제방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파주(坡州)는 ‘둑 위의 마을, 즉 둑과 제방이 많은 마을 또는 둑, 제방 역할을 하는 마을’이란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파주는 한양에서 가까워 임진강을 따라 각종 유통이 발달하였습니다. 그 중 고랑포와 문산포가 물류 집산지로 유명하여 조선시대에는 서민들이 한강 마포나루에서 고랑포나루까지 소금과 새우젓을 황포돛배로 실어 날랐는데 배 모양이 둥글넓적하며 선저가 평판으로 된 우리나라 특유의 한선으로 이순신 장군이 사용하였던 거북선, 판옥선과도 흡사합니다. 고속도로가 뱃길을 대신하기 전까지 임진강변은 사람들의 흥겨운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파주는 동쪽의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임진강의 하류 유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적 특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줄기는 임진강이 서남쪽으로 흐르는 만우천과 북서쪽으로 흐르는 문산천, 서쪽으로 흐르는 공릉천 등을 받아 안고 북서쪽으로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들고 서남쪽으로는 한강이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들고 서쪽에는 해안 평야가 넓게 발달되어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산줄기는 동쪽으로 감악산(紺嶽山, 675m), 노고산(老姑山, 401m)의 산줄기가 양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황룡산(135m), 명봉산(248m)의 산줄기가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남부는 한강(漢江)을 경계로 김포시와, 북부는 임진강(臨津江)을 경계로 북한의 개풍군과 접하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파평산(坡平山, 496m), 봉서산(鳳棲山, 216m), 월롱산(月籠山, 229m), 박달산(368m) 등이 남쪽으로 그 높이를 낮추어 가며 이어져 있습니다.
파주(坡州) - 둑 위의 마을
감악산(紺岳山, 675m)은 한북정맥의 한강봉과 지맥을 이루고 있고 개성의 송악산, 안양의 관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에 속하며 폭포, 계곡, 암벽 등을 고루 갖춘 명산으로서 정상에선 임진강과 개성의 송악산 등이 두루 눈에 들어오며, 반대편 봉우리인 임꺽정봉의 산세 또한 수려합니다.
감악산 정상에는 ‘감악산비’라 불리는 고비(古碑)가 하나 서 있습니다. 기단부, 비신, 개석을 갖춘 화강암 석비로 자연석을 직사각형으로 잘라 표면을 손질해 글자를 새겼으나 완전히 마멸되어 글자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 ‘몰자비’라 부르기도 하고 ‘설인귀비’ ‘빗돌대왕비’ 등으로 구전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도교의 영향을 받아 원래부터 문자를 새기지 않고 세운 ‘무자비(無字碑)’라고도 합니다.
1982년 동국대학교 감악산 고비 조사단이 2차례에 걸쳐 감악산비를 조사한 결과 비가 세워진 근처에 삼국시대의 기와조각이 출토되었고 그 형태가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와 흡사하여 신라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감악산은 신라시대부터 국가의 소사(小祀)를 지냈던 명산의 하나이며, 비가 있는 곳에서 북동쪽으로 4.5㎞ 정도 지점에 있는 칠중성(七重城)은 삼국시대 이후로 한반도의 지배권 장악을 위한 각축이 벌어지던 군사적 요충지로서 진흥왕의 영토확장정책에 따라 세력이 미쳤던 곳이라는 점을 들어 제5의 진흥왕순수비일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결론을 낼만한 확실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고령산(高靈山·高嶺山, 621.8m)은 경기도 서부에서는 감악산 다음으로 높은 산으로 꾀꼬리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기슭에 천년고찰로 유명한 보광사가 있어 더욱 유명한 산입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양주목읍지(楊州牧邑誌)>에 고령산(高嶺山)과 고령산(高靈山)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어 높고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월롱산(月籠山, 229m)은 고령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산줄기에 있으면서 산정에 배가 떠나는 모양의 형국이 마치 반달과 흡사하여 월롱산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산 입구에는 용주서원과 용상사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파평산(坡平山 496m)은 임진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정상은 암릉(바위언덕)으로서 전망 역시 대단히 좋아 멀리 고대산(연천), 금학산(철원), 도봉산, 삼각산까지 조망할 수 있습니다.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에 "파평현의 읍치지역이 미라산(彌羅山)이다."라는 기록이 지도 상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문헌상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미라산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그 위치는 읍치의 북쪽 30리 지점이며, 일명 파평산이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파평산은 별칭으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미라산 아래에는 마담(馬潭)이라는 연못과 금강사(金剛寺)라는 절이 있었고 이 산의 서쪽사면에는 미타사(彌陀寺)라는 절이 남아 있어 과거의 이름이 미라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명학산(鳴鶴山, 220m)은 파평산의 남서맥인 자운산을 거쳐 내려온 산줄기에 있는 산으로 학이 깃들어 울었다 해서 명학산이라고 부릅니다. 절육신 황보인 묘를 설치한 후 애국충절 6위를 모신 월계단(月桂壇)이 있어 월계산(月桂山)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하는데, 산 입구에는 윤곤 선생 묘와 윤씨 사당이 있으며 열녀비, 공덕비, 파평윤씨 비석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박달산(朴達山, 368m)은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이웃 마을에서는 이 산이 예전에는 독수리가 많다고 해서 수리봉이라고 합니다.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 고려산 앵무봉(621.8m)이, 동북쪽으로 양주 신불산(470m)이, 북쪽으로는 감악산(675m)이, 동남쪽으로는 도봉산과 북한산이 야트막한 산 너머로 펼쳐져 있으며 임진강을 끼고 개성과 한양에 가까워 역사적인 사연을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봉서산(鳳棲山, 216m)은 파주의 진산(鎭山)으로서 고대 전설에 나오는 오동나무에 살면서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고 전해지는 봉황이 깃들어 즐기며 노래하던 곳이란 뜻으로 이름 지었다 합니다. 예로부터 문산 포구를 바라보는 군사 요충지로 산성이 있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권율(權慄)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승전을 거두고 이 산성으로 돌아와 산성을 수축하고 수비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심학산(尋學山, 194m)은 한강 하류에 있는 산으로 홍수 때 한강물이 범람하여 내려오는 물을 막았다 하여 ‘수막’ 또는 ‘물속으로 깊숙히 들어간 뫼뿌리’라고도 불렀으며 조선 숙종 때 왕이 애지중지하던 학(鶴) 두 마리가 궁궐을 도망쳐 나왔는데 이후 학들을 이 곳에서 찾았다고 해서 '학을 찾은 산, 심학(尋鶴)'으로 불리게 됐다는 얘기도 전해 옵니다. 심학산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쭉 뻗은 자유로와 한강, 김포, 관산반도를 즐길 수 있으며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는 그야말로 일품입니다.
도라산(都羅山, 156m)은 신라의 패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집니다. 경순왕이 개성을 찾아와 항복을 하니 고려 태조는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유화관을 하사하였으나 낙랑공주는 비운을 맞게 된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자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그곳에 머물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永守庵)이라 이름을 지었답니다.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도라산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조 개창 이후 도라산 마루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군인들을 주둔시켰으며 국난시에는 봉화로 송도와 파주 봉수대를 거쳐 한양으로 소식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마침내 다달았다” - 임진강(臨津江)의 유래
파주의 큰 물줄기는 임진강(臨津江)입니다. 임진강은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황해북도 판문군과 경기도 파주시 사이에서 한강으로 유입되어 서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옛날에는 더덜나루(다달나루)라 하였는데, ‘임(臨)’은 ‘더덜’ 즉 ‘다닫다’라는 뜻이며 ‘진(津)’은 ‘나루’라는 뜻으로 ‘마침내 다달았다.’라는 뜻을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임진강은 고구려 때는 표로하(瓢瀘河)로 불렸습니다. 그 후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조 개국 당시 공양왕이 송도에서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시고 몰래 빠져나와 고랑포에서 돛배를 타고 상류로 도망가다 구미연(龜尾淵)에 이르러 배가 파산해 신주와 배는 강물에 가라앉고 왕은 구사일생으로 강 언덕으로 기어 나왔으나 후에 원주 지방으로 도망가다 결국 간성에서 피살되었답니다. 이때부터 이곳에서 신주를 빠뜨렸다고 신지강(神智江) 또는 구미연(龜尾淵), 구연(仇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의주로 몽진을 떠났다가 1593년 환도하면서 이 강에 당도하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순국한 병사들의 넋을 달래고자 나루터 강변 모래사장에 제물을 차려놓고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그때 선조가 이 강을 지키고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용감한 충신들의 명복을 기원하고 통곡하며 하는 말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이 나루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 하였다고 하여 조선 초기부터 불려오던 신지강(神智江)을 버리고 임진강(臨津江)으로 달리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임진강의 길이는 254㎞이고 유역 면적은 8,118㎢로서 북한에서 9번째로 넓은 유역 면적을 갖고 있습니다. 한강의 제1지류로서 강원도 북부를 흐르면서 고미탄천(古味呑川)과 평안천(平安川)을 합류하고, 경기도 연천에서 철원, 평강 등을 흘러온 한탄강(漢灘江)과 합류하여 고랑포를 지나 문산 일대의 저평지를 흐르는 문산천과 합치고 하구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듭니다. 하류 쪽의 중심지인 금촌은 토지가 비옥할 뿐 아니라 농산물이 풍부하고 소하천(小河川)들이 많이 발달하여 소규모의 주운(舟運, 배로 화물을 나름)도 가능하며 국토가 분단되기 이전까지는 고랑포까지 배가 다녔고 소형 선박은 안협(安峽)까지 운항할 수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임진강 유역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적인 격전지로서, 임진강을 칠중하(七重河)라 불렀고 연천에는 고구려 칠중현(七重縣)의 치소(治所)인 칠중성(七重城)이 있었으며 고구려 광개토왕은 임진강에서 백제군을 대파시킨 일이 있고, 신라 진흥왕은 임진강의 남쪽을 점령하여 고구려와 경계한 적이 있었고 신라가 당나라와 더불어 고구려를 정복하였을 때에는 칠중성(積城, 지금의 파주시 적성면) 부근에서 임진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격하기도 했습니다.
임진강변에 있는 장단석벽(長湍石壁)은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예로부터 시인묵객이 많이 찾던 곳으로 하류 쪽에는 동파적벽(東坡赤壁)과 화장사, 심복사, 경순왕릉 등의 유적이 있습니다. 강의 중상류 쪽에는 한국전쟁의 격전지로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으나, 문인폭(文人瀑), 연취암(蓮醉巖), 용추(龍楸), 문인석(文人石) 등의 명승고적이 도처에 많이 남았고, 강의 곳곳에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으며 판문점과 임진각은 남북 분단의 상징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임진강변에는 파주 출신의 고관대작들이 낙향하여 소요(逍遙)하던 정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화석정(花石亭)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정자로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볼 수 있으며 난간에 기대어 보면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입니다.
원래 화석정은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나 확인할 수는 없으며 세종 25년(1443) 율곡 이이(李珥)의 5대 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이 세운 것을 성종 9년(1478)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몽암(夢庵)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인 평천장(平泉莊,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함)의 기문(記文) 중에 보이는 ‘花石’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하며 그 후 이이(李珥)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시와 학문을 논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옵니다.
또한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한 이이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여 화석정 기둥에 기름칠을 하게 하고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며 봉투를 남겼답니다.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고 4월 그믐밤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폭풍우가 너무 심해 한치 앞을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호종하던 이항복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답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관솔이 타듯 불길이 올라 나루 근처가 대낮 같이 밝아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갈매기를 벗 삼아 - 반구정(伴鷗亭)
반구정(伴鷗亭)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명재상인 방촌(厖村) 황희(黃喜, 1363∼1452) 선생께서 1449년(세종 31)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으로, 원래는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낙하정(洛河亭)이라 하였습니다. 정자가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강안 기암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에는 널찍한 모래톱이 있고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습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선생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를 보면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갈매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30리다.”라고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습니다. 반구정이 위치한 곳 좌측의 높은 대지에 앙지대가 있으며 반구정 아래에는 황희 선생 영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지금은 위치조차 찾을 수 없지만 조선시대 영의정 관직을 지낸 거창부원군 신승선(愼承善)이 임진나루 남쪽에 건립한 정자인 내소정(來蘇亭)이 있었습니다. 조선 숙종 때 문신인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선생이 내소정에 올라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읊은 화석정의 봄[花石亭春], 장암의 낚시[場岩垂釣], 송암의 맑은 구름[松巖靑雲], 장포의 가랑비[長浦細雨], 동파역의 달[東坡玩月], 적벽의 뱃놀이[赤壁泛舟], 동원의 저녁 눈[桐園暮雪], 진사의 새벽종[津寺曉鐘])의 내소정 팔경시(來蘇亭 八景詩)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파주는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요충지여서 산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오두산성(烏頭山城)은 백제의 북방 전초기지인 관미성(關彌城)으로 추정되는 테뫼식 석성(石城)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길목에 위치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으며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서쪽으로는 북한 지역이, 남쪽으로는 김포평야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산성의 정상에 통일전망대가 들어서 있어 산성의 규모와 원형이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었고 한강과 인접해 있는 가파른 북쪽 절벽 위에 약 10여m의 성벽만이 잔존하고 있습니다. 산성 정상 부근에서 발견된 유물은 삼국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토기(土器), 백자(白磁), 기와(器瓦), 철촉(鐵鏃) 등으로, 발굴된 성과를 토대로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일부 구간을 보존, 정비하여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덕진산성(德津山城)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입니다.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내성은 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돌며 표주박 형태로 구축되어 있고 외성은 두개의 문지(門址)와 성위에 담을 낮게 쌓았던 흔적도 보이며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기와편이 다량으로 발굴되었습니다. 지형적으로 비교적 낮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임진강의 북쪽 해안이고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넓은 땅이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월롱산성은 문헌으로 존재하고 있음은 보고되었으나 구체적인 산성의 규모와 실체에 대한 조사가 없었다가 경기도박물관의 정밀 학술조사에서 이 성이 임진강과 한강 하구지역을 통제하던 초기 백제의 주성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월롱산성은 동서남북이 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의 외벽은 거의 20미터 이상 절벽인 자연지형을 이용하였고 현재 내벽의 대부분은 정연한 석축 형태를 보이지 않고 일부 석재만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문지는 동문지, 서남문지, 서북문지, 북문지가 확인되며 동문지와 북문지를 제외한 서남문지와 서북문지는 자연암반을 계단 모양으로 깎아 내면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아미성은 감악산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말단부에서 형성된 해발 260m의 봉우리 정상부에 쌓은 포곡형의 석축산성입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감악산의 줄기와 동쪽으로 마차산 줄기의 사이에 좁고 평탄한 협곡을 이루고 있어 이 협곡의 교통로를 통제하기에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으며 정상부에서는 남쪽 방면으로의 시계가 매우 양호해서 계곡을 따라 공격해오는 적을 방어하기가 매우 용이한 지점인데 달리 할미성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이래 군사적 요충지, 칠중성
칠중성은 삼국시대 이래로 군사적 요충지인 중성산 능선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입니다. 지금은 군 작전상 매우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많은 군사시설물이 성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영국군 1개 연대가 이곳에서 적을 방어하다가 전세에 밀려 감악산 골짜기에서 전멸했던 전적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칠중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사료적 가치의 중요성이 인정돼 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현재 산성의 규모나 형태가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히 손상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조선시대의 왕의 묘인 능은 도성으로부터 100리 밖에 해당하는 교(郊)의 위치에 안장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파주는 그 교의 위치에 있어 왕과 왕비의 능(陵)과 후궁과 세자 그리고 대군 등 왕족들의 원(園)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장릉(長陵)은 조선16대 임금인 인조(仁祖)와 그 왕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의 합장릉(合葬陵)으로 당초 문산읍 운천리 대덕골에 있었으나 1731년(영조 7년) 석물(石物) 틈에 뱀들이 집을 짓고 극성을 부려 지금의 위치로 옮겨 합장하였습니다. 장릉의 석물구조를 살펴보면 봉분 아래로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 바깥으로 돌로 난간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 혼유석(魂遊石) 2좌(座)를 배치하여 2위(位)임을 나타냈으며 상석 중앙 정면에 장명등과 양쪽에 망주석 2기를 배치하였고 그 아래로 문인석과 무인석을 각각 1쌍씩 세웠으며 봉분 주위로는 석마(石馬), 석양(石羊), 석호(石虎)를 각각 2필씩 배치하였습니다.
파주삼릉은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을 일컫는데 공릉은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능입니다. 장순왕후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딸로 1460년(세조6) 16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인성대군(人城大君)을 낳고 이듬해 1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가 1472년(성종 3)에 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공릉은 당초 왕후릉이 아닌 세자빈 묘로 조성되어 초석, 병풍석과 난간 등이 생략되었습니다. 비(碑)에는 ‘조선국장순왕후공릉(朝鮮國章順王后恭陵)’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순릉은 조선 제9대 성종(成宗)의 원비(元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능으로 공혜왕후 역시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공릉의 장순왕후와 서로 자매지간인데 1467년(세조13) 11세에 가례를 올렸고 성종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으나 성종 즉위 5년(1474년) 4월 슬하에 자식 없이 1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습니다. 순릉은 무덤 밑 둘레에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는데, 여기에 표현된 작은 기둥은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을 본받은 것으로 조선 초기 무덤에 쓰인 석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비에는 ‘조선국공혜왕후순릉(朝鮮國恭惠王后順陵)’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영릉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추존)과 그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趙氏)의 쌍릉으로 진종은 1719년(숙종 45)에 태어나 1724년 영조 즉위와 더불어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28년 춘추 10세의 나이로 돌아가 시호를 효장이라 하였고 1762년 영조는 둘째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위한 뒤 사도세자의 아들인 왕세손(훗날 正祖)을 효장의 아들로 입적시켰습니다. 효장은 정조 즉위 후 영조의 유언에 따라 진종으로 추존되었고 능호도 올려 영릉(永陵)이라 하였습니다. 효순왕후 조씨는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1727년 13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다음해에 세자의 죽음으로 홀로 되었다가 1751년 춘추 37세로 돌아가 효장세자와 함께 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능(陵)과 원(園)의 고을
소령원(昭寧園)은 조선 21대 영조(英祖)의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원소(園所)로서 숙빈 최씨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1670년(현종11)에 태어나 7세에 입궁하여 숙종의 후궁이 되었고 1694년(숙종 20)에 창덕궁에서 영조를 낳았으며 1718년(숙종 44)에 춘추 49세로 돌아가 그해 당시 양주 땅이었던 지금의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소령묘로 불렸으나 영조가 1725년(영조1)에 어머니를 위해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건립했던 육상묘(毓祥廟)가 1753년 육상궁으로 개칭되면서 소령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수길원(綏吉園)은 조선 21대 영조(英祖)의 후궁인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원소(園所)로서 정빈 이씨는 이준철(李竣哲)의 딸로 1694년(숙종 20)에 태어나 1701년 영조의 후궁이 되었고 1719년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를 낳았고 정빈 이씨는 병환으로 1721년(경종1)에 춘추 28세로 돌아가 그해에 당시 양주 땅이던 지금의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 지냈으며 훗날 효장세자는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습니다.
파주고을은 용인고을과 함께 죽어서 묻히기를 바라는 음택지(陰宅地)로 선호하는 곳이어서 고관대작의 묘들이 많이 있습니다.
율곡 이이의 유적지는 자운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에 자운서원과 가족 묘역이 조성 되어 있으며 가족 묘역에는 율곡과 부인 곡산 노씨 묘를 비롯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율곡의 형 이선 묘, 아들 이경림 묘 등이 중심 묘역을 이루며 그 외의 가족묘 등 모두 14기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이의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며 본관은 덕수(德水),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중종 31년(1536)에 강릉 북평촌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서울 본가로 올라와 어머니로부터 학문을 배웠습니다.
명종 3년(1548) 13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으며 29세에 호조좌랑으로 관직에 나아간 이후 황해감사, 대사헌, 대제학, 호조·병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노력하였습니다. 학문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유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하였고 학문을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책으로 민생과 국가재정문제에 적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선생의 저서로는 <성리설> <성학집요> <격몽요결> 등이 있습니다.
율곡 이이 신도비는 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로서 자운서원 경내의 좌측 산기슭에 세워져 있는데 율곡이 돌아가신 지 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습니다.
교하에는 파평 윤씨 교하종중의 정정공(貞靖公) 윤번(尹璠)을 중시조로 하는 정정공파의 약 600여 기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중 중요 묘역 96기가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곳의 묘역군은 조선시대의 묘역이 한 종중에 의해 연대별로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묘역의 역사적 계기성(繼起性)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분묘의 야외박물관
특히 이곳 묘역에 조성되어 있는 묘제 및 석물, 각종 묘비 등은 조선 초기에서 후기까지의 시대별 묘제의 특징과 성격을 보여주며 또한 역사적, 미술사적, 복식사적 측면에서 상당한 가치가 인정되고 있는,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조선시대 분묘 야외박물관’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안장된 주요한 묘는 조선 초 세조대왕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부친 윤번 묘, 중종의 비 장경왕후 윤씨의 부친 윤여필(尹汝弼, 1466∼1555) 묘, 중종의 비 문정왕후 윤씨의 부친 윤지임(尹之任) 묘 등 부원군 묘역 3기를 중심으로 정승 묘역 7기, 판서 묘역 8기, 참판 묘역 30기 등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고려 후기의 명장 윤관은 고려 예종(睿宗) 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장군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으로 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습니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 2년(1107)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 하였습니다. 윤관은 문무(文武)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 6년(1111)에 돌아가자 인종 8년(1130)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묘의 소재를 모르다가 1764년(영조 40) 윤관의 구비파편(舊碑破片)이 발견된 후 영조가 봉분을 새로 조성하고 치제(致祭)하게 함으로써 윤관의 묘소임이 공인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며 청백리의 표상인 황희 선생의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長水)로서 고려 공민왕(恭愍王) 12년(1363)에 개성에서 출생하여 27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록이 되었다가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는데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성균관학관으로 왕이 직접 벼슬을 내렸습니다.
이후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조선 태종대에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고 세종대에는 20여 년 동안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의 최고 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世宗盛世)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비문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며 옆에 1945년에 다시 세운 신도비는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으며, 황희 선생 묘와 약 200m 떨어진 맞은 편 산자락에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영의정에 오른 셋째 아들인 황수신(黃守身, 1407~67)의 묘가 있습니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98)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파평 우계(牛溪) 옆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우계선생이라 불렀습니다. 성혼은 명종 6년(1551) 생원, 진사의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명종 9년에는 같은 고을의 율곡 이이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지기가 되었습니다.
퇴계 이황의 학설을 이어받아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여 이이와 선조 5년(1572)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선조 초 때부터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이이의 권유에 의해 이조참판에 특배되고 임진왜란 중에는 우참찬에 오르고 선조 27년 좌참찬에 이르렀으나 당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인 파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죽은 뒤 선조 35년 기축옥사(己丑獄死)와 관련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인조 11년(1633)에 복관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묘소의 입구 우측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김집(金集)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습니다.
어렵게 찾아낸 허준의 묘
허준(許浚, 1537~1615)은 우리나라가 낳은 대표적인 명의, 의학자로서 한의학 중흥의 거봉이자 동양의 의성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선생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며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許論)의 서자(庶子)로 선조 7년(1574) 내의원(內醫院)에 들어간 후 혜민서(惠民署) 봉사를 거쳐 전의(典醫)로 발탁되어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습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어의(御醫)로서 왕을 의주까지 모셨으며 1604년 호성공신 3등에, 1606년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졌고 사후에 숭록대부에 올라 의인(醫人)으로는 최고의 명예를 누렸으나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파직, 유배를 당했다가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복직되었습니다.
저서로는 <동의보감>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등이 전하며 광해군 2년(1610) 16년의 연구 끝에 간행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청나라 등지에서도 간행 보급되어 조선의학 내지 동양의학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선생의 묘는 확인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 씨 등이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묘역은 약 50평의 규모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 김씨의 묘로 추정되며 이들 두 묘 위에 허준의 생모로 추정되는 묘가 한 기 더 있습니다. 발굴 당시 원비(元碑)의 마모된 비문 가운데 ‘陽平□ □聖功臣 □浚’이란 글자가 남아 있어 선생의 묘인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파주의 읍치구역은 파주와 교하 그리고 적성으로, 그곳에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파주향교(坡州鄕校)는 파주에서 최초로 건립된 향교로서 파주의 봉서산 자락에 위치하며 고려시대 충렬왕 30년(1304년)에 구 향교골에 건립되어 대성당(大成堂)이라고 불리다가 조선시대 태조 7년(1398년) 대성전을 창건하여 성현들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습니다. 대성전은 복원하지 못하고 명륜당을 비롯한 동무, 서무, 내삼문, 외삼문, 홍살문, 동재, 서재 제기고, 교직사 등을 먼저 건립하였고 50년이 지난 후 대성전을 복원하였습니다. 파주향교가 위치한 지역은 조선시대 파주목(坡州牧) 관아(官衙)가 있었던 읍치구역(邑治區域)으로 파주향교는 정원 90명의 대설위(大設位)였으며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식입니다.
교하향교(交河鄕校)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지금의 장릉 자리에 창건되었다가 영조7년(1731)에 그곳이 장릉(長陵)의 이장지로 정해져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파주 지역의 교육 및 역대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자 세워진 이 향교는 갑오개혁 이후 교육기능은 약해지고 현재는 성현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는 기능만 담당하고 있습니다.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앞에, 배향공간인 대성전이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공간 배치를 따르고 있습니다.
적성향교(積城鄕校)는 조선 전기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으로 건립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란과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70년에 복원하였습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신학제(新學制)의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현재는 봄, 가을로 석전제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향교와 서원들
자운서원(紫雲書院)은 조선 광해군(光海君) 7년(1615)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효종(孝宗)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고 숙종(肅宗) 39년에 그의 후학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2∼1695) 두 분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빈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습니다.
자운서원(紫雲書院) 묘정비(廟庭碑)는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로 자운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덕을 기리는 한편 자운서원의 건립 내력을 기록하고 있는데 비문(碑文)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예서체로 썼으며 비명(碑銘)은 김수항(金壽恒)이 썼습니다. 비문의 끝부분에 ‘숭정56년 계해(崇禎五十六年癸亥)’라는 연기로 보아 건립 연대가 숙종 9년(1683)임을 알 수 있습니다.
파산서원은 조선중기 학자인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39~1564)과 그의 아들 우계 성혼(成渾, 1535~98), 아우 절효공(節孝公) 성수종(成守琮, 1465~1579) 및 휴암(休庵) 백인걸 (白仁傑, 1497~1579)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입니다. 선조 원년에 율곡 이이, 휴암 백인걸 등 파주 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창건되었고, 효종 원년(1650)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되었던 47개 서원 중 하나로 중요시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진 것을 그 뒤 복구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타 1966년 서원 본전인 사당만 복원하였습니다.
용주서원(龍洲書院)은 조선 선조(宣祖) 때 유학자이며 청백리에 녹선 된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건립된 서원으로 선조 31년(1598) 백인걸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던 옛 집터에 지방 유림들이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셨습니다. 그 후 유생 정재심(鄭在心)이 사액(賜額)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철폐되었으며 그 자리에 유허비(遺墟碑)만 남아 있다가 1924년 유생들이 다시 뜻을 모아 서원을 복원하고 백인걸 선생 외에 그의 문인이었던 장포(長浦) 김행(金行), 옥천(玉川) 조감(趙堪), 낙금당(樂琴堂) 신제현(愼齊賢), 당산(堂山) 백유함(白惟咸) 등 5인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고 있습니다.
신곡서원(新谷書院)은 윤선거(尹宣擧, 1610∼69) 선생의 도학을 기리고자 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옛 교하현 금성리 공릉천이 흐르는 언덕 위에 세웠으며 숙종 21년(1695년)에 훼철된 후 복구되지 못했습니다. 그 터에는 새금초등학교가 들어섰으며 서원 건립 당시에 심었던 느티나무 한 그루만이 남아 신곡서원 터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파주고을의 전통 사찰은 다른 고을에 비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보광사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4) 왕명으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후 고려 고종 2년(1215)에 원진국사(圓眞國師)와 우왕 14년(1388)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모든 건물이 불에 탄 것을 광해군 14년(1622)에 법당과 승당을 복원하였고 현종 8년(1667)에 지간(支干), 석련(石蓮) 두 대사가 보수하였으며 다시 영조 16년(1740)에 보수가 이루어지면서 인근에 있는 영조의 사친(私親) 숙빈 최씨의 능인 소령원(昭寧園)의 기복사(祈福寺)로 삼았다고 합니다.
보광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 양식을 띠고 있으며 건물의 벽면은 정면을 제외한 세 면이 모두 판벽으로 되어 있으며 기둥 한 칸씩마다 내용이 다른 불화가 그려져 있는데 오른쪽 벽에는 코끼리를 탄 동자상과 연화보살이, 왼쪽 벽에는 신장상이, 그리고 뒷벽에는 용선(龍船), 수석도(水石圖), 연화생도(蓮花生圖)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지붕 위의 용마루 양끝에는 용머리 모양의 취두(鷲頭)가 있으나 원래 이런 취두는 조선 중기까지 주로 궁궐이나 관아의 중심 건물에 쓰이던 것으로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서울 주변의 사찰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보광사·검단사·용상사·용암사
검단사(黔丹寺)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부근의 검단산 산허리에 위치합니다. 신라 때 검단조사(黔丹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검단사조사영정(黔丹祖師影幀)> 1폭이 전해지고 있어 검단조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원사지(原寺址)로 추정되는 대지 중심지에는 별다른 건물이 없고 대지 오른쪽에 치우쳐 지금의 사찰이 겨우 잔존하고 있는데 법당인 법화전(法華殿)과 요사채만 남아 있습니다.
용상사(龍床寺)는 월롱산 남쪽 사면 중턱에 있습니다. 고려 성종 12년(993), 현종1년(1010)에 이어 현종 9년(1018)에 소배압이 거느린 40만 거란군이 개성까지 쳐들어오게 되자 현종은 민간인 차림으로 이곳 월롱산까지 피신하였고 다행히 강감찬이 귀주(龜州)에서 승리하면서 나라 안이 평정되자 현종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절을 짓게 하고는 임금이 머물렀다는 뜻으로 용상사(龍床寺)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그 뒤 덕은화주(德隱化主)가 세종 27년(1445)에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승병의 도량이 되었는데 왜군의 시체가 근처 골짜기에 가득하여 한때는 ‘무덤골’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으나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 이름이 보이고 있어 임진왜란 이후 어느 때인가 폐사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용암사(龍岩寺)는 장지산(長芝山)에 있으며, 벽제관에서 광탄으로 향하다 혜음령 고개를 넘으면 오른쪽 시야에 와 닿는 따뜻한 눈길을 느낄 수 있는데 시선을 보내는 주인공은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우뚝 솟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입니다. 고려 제13대 선종(宣宗, 1083~94) 때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을 조성한 배경과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어 약 900여 년 전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만들어진 11세기를 창건 연대로 잡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긴팔 긴바지),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11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문화유적 관람료, 황포돛배 뱃삯,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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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고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 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 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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