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高麗國:918-1393) 35대 국왕 이성계(李成桂)실록(1392년 7월 17일 - 7월 18일)

2014. 10. 28. 21:55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려국(高麗國:918-1393) 35대 국왕 
이성계(李成桂)실록(1392년 7월 17일 - 7월 18일)  조선국 태조 이단 실록

2014/10/2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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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高麗國:918-1393) 35대 국왕 이성계(李成桂)실록(1392년 7월 17일 - 7월 18일)

     

 

 

http://blog.naver.com/msk7613     김민수 님의 글 중에서 ....

 

 

 

1392년 7월 17일 고려국(高麗國:918-1393) 35대 국왕 이성계(李成桂)가 수창궁(壽昌宮)에서 고려국(918-1393) 35대 왕위에 올랐다이보다 먼저 이 달 12일에 고려국(高麗國) 34대 국왕 공양왕(恭讓王:1389-1392)이 장차 이성계의 사제(私第)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이성계와 더불어 동맹(同盟)하려고 하여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시중(侍中배극렴(裵克廉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기를 지금 공양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남은(南誾)이 드디어 문하 평리(門下 評理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그 당시에 왕이 거처하던 궁전인 시좌궁(時坐宮)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하면서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가니백관(百官)이 전국새(傳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13(임진)에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을미)에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김사형(金士衡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남은(南誾장사길(張思吉정총(鄭摠김인찬(金仁贊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조견(趙狷박포(朴苞조영규(趙英珪조반(趙胖조온(趙溫조기(趙琦홍길민(洪吉旼유경(劉敬정용수(鄭龍壽장담(張湛안경공(安景恭김균(金稛류원정(柳爰廷이직(李稷이근(李懃오사충(吳思忠이서(李舒조영무(趙英茂이백유(李伯由이부(李敷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심효생(沈孝生고여(高呂장지화(張至和함부림(咸傅霖한상경(韓尙敬황거정(黃居正임언충(任彦忠장사정(張思靖민여익(閔汝翼등 대소 신료(大小 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邸宅)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대사헌(大司憲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얼굴빛에 나타내고머리를 기울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남은이 이를 쳐서 죽이고자 하니 말하기를, “의리상 죽일 수 없다.” 하면서 힘써 이를 말리었다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이성계와 강비(康妃)를 알현하고물에 만 밥을 먹는데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가버렸다이성계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해 질 무렵에 이르러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위에 놓으니이성계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이성계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배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기를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社稷)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고려국(高麗國)은 시조(始祖)인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건국(建國)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5백 년이 되었는데, 31대 국왕 공민왕(恭愍王:1351~1374)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그 때에 권신(權臣)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자기의 총행(寵幸)을 견고히 하고자 하여거짓으로 요망스런 요승(妖僧신돈(辛旽)의 아들 우()를 공민왕의 후사(後嗣)라 일컬어 왕위를 도둑질해 있은 지가 15년이 되었으니왕씨(王氏)의 제사(祭祀)는 이미 폐()해졌던 것입니다()가 곧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며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이 맨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천자(天子)의 국경을 범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사를 돌이키니()는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두려워하여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이에 이색(李穡조민수(曹敏修등이 신우(辛禑)의 처부(妻父)인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그 아들 창()을 도와 왕으로 세웠으니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두 번이나 폐()해졌습니다이 것은 하늘이 왕위(王位)로써 공()에게 명한 시기이었는데도공은 겸손하고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아니하고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했으니거의 사직(社稷)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일에 신우(辛禑)의 악()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인데그 무리 이색·우현보(禹玄寶등은 미혹됨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신우(辛禑)를 맞아 그 왕위를 회복할 것을 모의하다가 간사한 죄상이 드러나니 그 죄를 모면하려고 하여 그 무리 윤이(尹彝이초(李初등을 몰래 보내어 중국에 도망해 들어가서, ‘고려국이 이미 배반했다.’고 거짓으로 호소하고는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장차 고려국을 소탕하고자 하였으니그 계책이 과연 행해졌다면 사직(社稷)은 장차 폐허(廢墟)에 이르고 백성도 또한 멸망에 가까울 것입니다이 것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간관(諫官)과 헌사(憲司)가 소()를 번갈아 올려 계청(啓請)하기를, ‘이색·우현보 등이 사직(社稷)에 죄를 얻고 백성에게 화()를 끼쳤으므로써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습니다.’ 하여 글이 수십 번 올라갔는데, 고려국(高麗國) 34대 국왕 공양왕(恭讓王:1389-1392)인 정창군(定昌君)은 인아(姻婭)의 관계라는 이유로써 법을 굽혀 두호(斗護)하여 언관(言官)을 곤장을 쳐서 쫓으니이로 말미암아 간사한 무리들이 중앙과 지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더욱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김종연(金宗衍)은 도피 중에 있으면서 당()을 결성하여 난리를 꾀하고김조부(金兆府등은 안에 있으면서 그 변()에 응하기를 도모하여화란(禍亂)의 일어남이 날마다 발생하여 그치지 않았는데정창군(定昌君)은 사직(社稷)과 백성을 위하는 큰 계책을 돌보지 아니하고 사사의 은혜를 베풀어 인망(人望)을 수습하고자 하여다만 법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모두 용서해 주고 곡진히 더 탁용(擢用)하였으니서경(書經)의 이른바, ‘달아난 죄수를 수용하는 괴수가 되어 물고기가 연못에 모이듯짐승이 숲에 모이듯 한다.’는 것입니다도와서 왕을 세울 계책을 결정한 것으로써 말한다면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으며대의(大義)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킨 것으로써 말한다면 덕택이 백성에게 가해졌는데도이에 좌우에 있는 부인(婦人)과 환자(宦者)의 참소를 지나치게 듣고서 반드시 죽을 곳에 두려고 하고사람들이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모두 죄를 주니참소하고 아첨한 무리들이 뜻대로 되고충성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기()가 꺾여져서정치와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그 수족(手足)을 둘 데가 없었습니다.하늘이 견책(譴責)하는 뜻을 알려서성상(星象)이 여러 번 변하고 재앙의 징조인 요얼(妖孽)이 번갈아 일어나니정창군(定昌君)도 스스로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백성의 마음이 이미 떠나가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음을 물어 알고 물러나와 사제(私第)로 갔습니다다만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지극히 중대하므로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하였다. 

 

 

이성계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나는 실로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하면서마침내 응답하지 아니하였다대소 신료(大小 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이 날에 이르러 이성계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이성계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임금이 앉는 자리를 피하고 기둥 안 영내(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6(六曹)의 판서(判書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하였다이에 명하여 고려국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 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드디어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

     

  

잠저(潛邸)에 있을 때꿈에 신인(神人)이 금자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말하기를, “시중(侍中경복흥(慶復興)은 청렴하기는 하나 이미 늙었으며도통(都統최영(崔瑩)은 강직하기는 하나 조금 고지식하니이 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룰 사람은 공()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하였다그 뒤에 어떤 사람이 문 밖에 이르러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 것을 지리산(智異山바위 속에서 얻었습니다.”하는데그 글에 ()인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3한국(三韓國:고례백제신라)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 하고, “배자(裵字)인 비의(非衣) ·조자(趙字)인 주초(走肖) ·정자(鄭字)인 삼전 삼읍(三奠三邑)” 등의 말이 있었다사람을 시켜 맞이해 들어오게 하니 이미 가버렸으므로이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다고려의 서운관(書雲觀)에 간직한 비기(秘記)에 건목득자(建木得子)’의 설()이 있고,또 왕씨(王氏)가 멸망하고 이씨(李氏)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는데고려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숨겨지고 발포(發布)되지 않았더니이 때에 이르러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또 조명(早明)이란 말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뜻을 깨닫지 못했더니, 1년 뒤에 국호(國號)를 조선이라 한 뒤에야 조명(早明)이 곧 조선(朝鮮)을 이른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의주(宜州)에 큰 나무가 있는데 말라 썩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개국(開國)하기 1년 전에 다시 가지가 나고 무성하니그 때 사람들이 개국의 징조라고 말하였다.

     

  

또 이성계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일찍이 시중(侍中경복흥(慶復興)의 사제(私第)에 갔더니경복흥이 영접해 들이고 그 아내로 하여금 나와 보게 하면서 존경하는 뜻이 매우 지극했으며또 그 자손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어리석은 자손을 공()께서 장차 비호(庇護)해야 될 것이오니공은 행여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하며매양 이성계를 대접하면서 반드시 특별히 높이었다이성계가 혹시 정토(征討)로 인하여 밖에 나가면경복흥은 매양 고하기를, “동한(東韓)의 사직(社稷)을 장차 장악(掌握)할 것이니 전쟁의 괴로움을 꺼리지 말고 능히 나라를 지키는 공을 이루게 하시오.”하였다일찍이 운명(運命)을 점치는 상명사(相命師혜징(惠澄)이 사사로이 그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사람들의 운명(運命)을 관찰한 것이 많았으나 이성계(李成桂)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하였다친한 사람이 묻기를, “타고난 운명이 비록 좋더라도 벼슬이 총재(冢宰)에 그칠 뿐이다.”하니혜징이 말하기를, “총재(冢宰)라면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내가 관찰한 것은 군장(君長)의 운명이니그가 왕씨(王氏)를 대신하여 반드시 일어나겠지!”하였다3(三軍)이 한성(漢城땅에서 사냥하는데 잠저(潛邸)에 있을 때 또한 갔었다노루 한 마리가 나오므로 달려가서 쏘아 화살 한 개에 죽이니여러 왕씨(王氏) 10여 인이 높은 언덕에 모여 서서 이를 보고는 몹시 놀라서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씨(李氏)가 장차 일어날 것이라고 많이 말하고 있는데이 사람이 아닌가?”하고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시중(侍中이인임(李仁任)을 그 사제(私第)에 가서 보았는데,이미 나가고 난 뒤에 이인임이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국가가 장차는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돌아갈 것이다.”하였다.

     

  

7월 18일 비가 내리었다이보다 앞서 오랫동안 가물었는데이성계가 고려국 35대 왕위에 오르자 억수같이 비가 내리니백성의 마음이 크게 기뻐하였다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및 대소 신료(大小 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등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조반(趙胖)으로 하여금 중국 도읍에 가서 예부(禮部)에 아뢰게 하기를 청하기를 그윽이 생각하옵건대우리 고려국 공민왕이 후사(後嗣)없이 세상을 떠나자 후사(後嗣)가 없으니 역신(逆臣신돈(辛旽)의 아들 우()가 권신(權臣이인임(李仁任등에 의하여 왕으로 세워졌으나()는 곧 혼폭(昏暴)하고 광자(狂恣)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으로 향하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이 때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이성계(李成桂)가 중국의 국경을 범할 수 없다고 하면서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키니()는 이에 돕는 사람이 적은 것을 스스로 알고서두려워하여 왕위를 사양하여 아들 창()에게 물려주니나라 사람들이 공민왕의 비()안씨(安氏)의 명령을 받들어 왕씨(王氏)의 종친(宗親)인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 ()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한 지가 지금 4년이나 되었습니다()가 또한 혼미(昏迷)하여 법에 어그러져서 충성하고 정직한 사람을 소원(疏遠)하게 하고참소하고 간사한 무리를 친근(親近)하게 하여시비(是非)를 변란(變亂)시키고 훈구(勳舊)를 모함(謀陷)하며불신(佛神)에게 아첨하여 혹하고토목(土木공사를 함부로 일으켜 비용을 낭비함이 한도가 없으니백성들이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아들 석()이 어리석고 무지(無知)하여 주색(酒色)이 방종하며 여러 소인을 모아 충성하고 정직한 사람을 모해(謀害)하였으며또 그 신하 정몽주(鄭夢周등이 간사한 계책을 몰래 이루어 난()의 발단을 일으키고자 하여이에 훈신(勳臣이성계(李成桂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등을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는 요()에게 참소하고유사(有司)로 하여금 논핵(論劾)하여 해칠 것을 꾀했으나나라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망하여 정몽주를 함께 목 베었습니다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하는 요()가 그래도 허물을 고치지 아니하고 또 살육(殺戮)할 것을 꾀하므로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실로 사직(社稷)과 백성이 모두 그 해를 입을까 염려하고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고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생각하기를 이 같은 짓으로는 이 백성들을 다스리고 사직(社稷)을 받들기가 어렵다고 하여 7월 12일에 공민왕의 비(안씨(安氏)의 명령으로써 요()를 사제(私第)에 물러가 있게 하였습니다간절히 생각하옵건대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하루라도 통솔(統率)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므로종친(宗親)중에서 가려 뽑아 보니 세상의 인망(人望)에 당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오직 문하 시중(門下 侍中이성계(李成桂)는 은택(恩澤)이 백성들에게 입혔으며공로는 사직(社稷)에 있어서조정과 민간의 마음이 일찍부터 모두 진심으로 붙좇았으므로이에 온 나라의 대소 신료(大小 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군민(軍民)들이 모두 고려국 35대 국왕으로 추대하기를 원하여지밀직부사(知密直司事조반(趙胖)으로 하여금 앞서 중국 조정(朝廷)에 가서 주달(奏達)하게 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번거롭게 아뢰옴을 밝게 살펴서 여러 사람의 뜻을 굽어 따라서한 나라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다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를 설치하고 도총 중외 제군사부(都摠中外諸軍事府)를 폐지하였다백관(百官)에게 명하여 고려국의 정령(政令법제(法制)의 장점·단점과 변천되어 온 내력의 사목(事目)을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게 하였다종친(宗親)과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