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닢의 나뭇잎에 얽힌 옛일, 제6집 < 한사발의 다탕으로 피어나는 인정> / [CCTV] 6집기록편

2015. 5. 23. 20:38차 이야기

 

차, 한닢의 나뭇잎에 얽힌 옛일,  제6집 < 한사발의 다탕으로 피어나는 인정>

 

복건성 복주(福洲) 말리화차(자스민차) 착향기술 : 4분08초 부터 ~

ㅡ 말리화차 공예 전승인 : 진성충(陳成忠)

 

대만자본 복건성 천복다업 ㅡ 장천복(張天福 1910 ~ ) 노회장 : 17분 18초 부터~

 

사천성 아미산 죽엽청 제다법 : 28분 10초 부터 ~

죽엽청 제다 사부(師傅) : 이종명(李宗明) 촬영당시 91세 

 

[CCTV] [720P] 六集纪录片 《茶,一片树叶的故事》 第六集 一碗茶汤见人情

 

 

 

   앞서 5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의 중국 CCTV <차,한닢의 나뭇잎에 얽힌 옛일> 6집기록편을 

게재하는 연유는 중국차를 좋아해서라기 보다, 아래의 <삼국시대에서 차의 약사(略史)>에서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차의 가야 전래설(AD.48년)로부터 거의 이천년의 유구한 세월이 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 나타난 차의 피폐기 처럼 아직 고려 때 보다도 못한

차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고 또한 부끄럽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들어 차농가에서 국산차의 생산비 상승에 따른 판매부진 영향과 차애호가들의 열정으로

손수 차를 만들어 차를 즐기는 분들이 차츰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차,한닢의 나뭇잎에 얽힌 옛일> 6개편 영상에서 중국명차에 대한 제다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지는 않지만,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명차에 대한 제다과정이

개략적이나마 소개되고 있음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진다.

 

   19세기에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은화를 중국차를 수입하느라 거의 소모한 대영제국은

차값으로 지불된 은괴들을 회수하기 위하여 청나라와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의 최고급 차산지들과 조건이 비슷한 인도의 히말라야 산간에서

차를 재배하는 대안을 강구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좋은 차나무의 건강한 표본과 수천 톨의 씨앗, 뛰어난 중국차 생산자들의

수백 년 묵은 지식을 입수해야” 했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했고,

결국 “식물 채집자·원예사와 도둑·스파이를 겸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로버트 포천(1812~1880)을

채용해 훔쳐내는 방법을 쓰게 된다.

 

동인도회사는 품질 좋은 중국 차를 구하기 위해 그에게, 오직 ‘좋은 차를 수집한다’는 조건으로

‘오늘날 가치로 5만5천 달러에 해당하는 연봉’과 ‘그가 수집하는

 다른 모든 초목 즉, 관상식물·잔디·씨앗·묘목·꽃·과일·양치식물·구근(球根)에 대한 재산권을 준다’는

파격적 조건을 내걸었다.

 

포천은 처음에는 숱한 어려움을 겪는다. 어렵사리 묘목과 씨앗을 구해 인도로 보내지만

최초 선적분의 3% 밖에 살려내지 못하는 실패를 맛본다

   포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중국 차 중에서도 최고급 대홍포(大紅袍) 산지인

우이(武易)산의 사찰에 찾아가 머물면서, “성실한 기록 보존자”였던 승려들 덕분에

차나무를 가꾸고 ‘차 한 잔을 준비하는 간단한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관찰하고

상세하게 기록하였고, 여기에서 익힌 차나무 재배와 제다비법

인도로 가져가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홍차생산에 활용한다.(법보신문 기사 자료)

 

   대기업이 영위하는 농원과 제다공장을 제외하고 내 차생산농가나 제다업자들은 시설 규모가 영세하여

영국이 식민지인 인도나 스리랑카에서 대규모 차생산 단지와 제다공장을 확보한

전례 처럼 할 수는 없겠지만, 소규모 제다인들이나 차애호가들이 중국 명차의 제다과정을

겉보기 나마 보고 익힐 수 있는 방편이 될 수도 있다는 크게 어리석은 생각에 이를 게재합니다.


 

 

 

삼국시대에서 차의 약사(略史)

 

高 句 麗 (고 구 려)

337년- 冬壽의 고구려 벽화(안악 3호분) 중에 찻잔을 올리는 장면

ㅡ 서기(A.D) 372年 - 檀2705年 - 고구려에 佛敎傳來 (僧-順道)
ㅡ 391년- 향과 茶器 있었다.

옛 무덤에서 고급 團茶로 여겨지는 錢茶 발견 됨

 

 百 濟 (백 제)

ㅡ 285년 - 왕인 渡日-유교 경전 전달

ㅡ 346-375 近肖古王 (13代王) 보성군의 전신인 伏忽郡이 馬韓에서 백제로 편입
  복홀군의 행정 소재지 주변에는 지금도 차나무가 분포되어 있다.

ㅡ 384 - 檀 2717 -百 濟- 佛敎傳來 -나주 불회사 創建 -茶 나무,마라난타,영광 불갑사
  4세기 이전에 茶를 마셨을 것
ㅡ 405-420 전지왕( 18代王) 일본에 인질로서 9년 세월 보내-이때 차와 차도구
사용하고 보급하였을 것

ㅡ A.D 501- 523 무령왕(25대왕)과 왕비 합장된 능에서 생전에 차를 마시던
  '동탁은잔'이 출토되었다

ㅡ 538 - 百濟 聖王 16年 - 日本 宣化 3年 - 倭(일본)에 佛敎를 傳함
ㅡ 600-641년 무왕(30대왕)이 창건한 미륵사지에서 여러종류의 찻잔,돌화덕 등이 발견됨
ㅡ ? - ? 왕인 - 일본 東大寺를 창건하고 주변에 차나무 심었다

 

駕 洛 (가 락) ; 가 야

42 - 199년 - 수로왕 - 가락국 시조, 차를 좋아해서 제사에 차를 올림
ㅡ A.D 48 년 (음력 5월) - 駕洛國 김수로왕비 허황후(許黃玉)가 인도(阿踰陀國 공주)
   에서 올때 茶나무 종자 가져 옴 (13세기 三國遺事 기록)
   김해 백월산의 죽로차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 옴

新 羅 (신 라)
ㅡ 514-540 法興王 (23代王) 화랑들 산천 오가며 차생활, 義湘大師는 차공양
ㅡ 527 - 법흥왕 - 불교 공인 (이차돈의 순교)
ㅡ 540 - 575 眞興王은 팔관회를 운영하면서 차생활 즐김
ㅡ 562 - 花 郞(영랑,술랑,남랑,안상) - 國仙들로 이들이 차를 찧어 달여(토산차)
  마시던 茶泉,돌솥,돌절구 등이 강릉의 寒松亭 남아 있다

ㅡ 600년대 김지장은 차 종자 휴대하고 중국 安徽省 靑陽縣 九華山에 심었다.
ㅡ 622 - 일본에 불상과 금탑을 보냄

ㅡ 632-647 新羅 - <三國史記>에 37代 善德王 때부터 茶 있었다 함
  (三國遺史)에 煎茶(엽차), (월일록)에는 點茶(말차)라고 적힘
  신라인들은 일정한 의식과 관계없이 생활 속에서 차를 즐겼다
  國仙이던 화랑들은 山川景槪를 유람하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가운데
  차생활(茶遊會) 잊지 않았다.

ㅡ 643 - 자장율사 통도사에 심음
ㅡ 645 - 황룡사 9층탑 건립
ㅡ 661 - 681 文武王(30대)때- 종묘의 시제음식으로 떡, 과일, 차를 내놓음(삼국유사)

ㅡ 635 - 원효방 (茶泉)

 

ㅡ 월명사의 다습
무상스님

ㅡ 681-692 신문왕 - 설총으로부터 690년 花王戒(화왕계)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음
  ? - ? 설총 - 신문왕에게 임금은 차와 술로 정신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내용을 전함

ㅡ 729 - 지장 김교각 스님 중국 구화산 화성사, 노호동에 茶나무를 심다
ㅡ 742-765 <三國遺事>卷第2에 忠談大師가 新羅의 景德王께 茶 달여 進上했다
ㅡ 745 - ? 忠談大師 - 僧侶花郞, 陸羽와 同時代 茶人, 안민가
   신라차의 개조, 헌다의식을 실천한 선각자, 매년 3월 3일(삼짇날)과
   9월 9일(중구날)에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바쳤다
ㅡ 751 - 김대성의 불국사 창건(석굴암 벽면 보살상 손에 보발)

ㅡ 756 - 경덕왕(?-765) 23年 - 삼월 삼짇날 귀정문 루상에서 충담사와 차회를 열었다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대사의 일화에 차에 관해 실림
   월명사에게 차도구 일습을 선물함
ㅡ 774 - 진감국사 대공탑비(최치원, 漢茗)
ㅡ 778 - 묘련사 석지조 안축, 김극기 ,이곡, 이제현, 서거정 등의 기록

ㅡ 804 - 중국 육우 사망
ㅡ 824 - 장흥 寶林寺 창건되어 九山禪門의 중심 역할함
  후일 장흥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13개소의 茶素 가진 고장이 됨

ㅡ 828年 12月- 興德王 3年 遣唐使 金大廉이 茶種子(小葉種)를 가져와 地異山에 심음

 

ㅡ 828 - 장보고(?-846)- 청해진(완도) 대사 -군사 1만을 이끌고 수비- 대唐무역과
  서남해 제해권 장악, 산동반도에 신라방을 설치하고 차생활 즐김
ㅡ 857 - 860 - 헌안왕 -무염국사,보조선사께 차를 예물 보냄
ㅡ 857 - 慧昭 眞鑑禪師(774-850 碑(국보 47호)-쌍계사 전신 830년 玉泉寺 창건
  唐에서 茶種子 가져와 雙谿寺 주변에 심었다 함
  진감선사는 떡차를 가루내지 않고 그대로 돌솥에 달여 마심
ㅡ 후기신라 대학자 孤雲 崔致遠(857-894- ?)이 비문 짓고 씀-(869-885)당나라 
  유학,강소성 율수현(茶 生産地)에서 현위 벼슬-이 때 부모님께 茶와 藥을 보내왔다.

  그 후 茶詩를 남김, 898년(孝恭王 2년) 가야산에 隱居
ㅡ 801-888 무염국사-평소에 차 즐겨 마셨으므로, 입적 후에도 신라왕이 차와
  향을 예물로 보내줌

 


高 麗 (고 려)

ㅡ 918 - 高 麗 건 국 ; 후삼국 통일
  관회, 북조사신맞이 다례, 연등회 등
의 행사 때 반드시 茶禮를 행함

ㅡ 931 - 太祖 14年 - [高麗史 卷2 太祖世家]에 太祖가 軍民들에게 茶,僧尼에게는
  茶香을 下賜 했다 - 경순왕에게 차를 선물
ㅡ 934 - 太祖 17年 - 이무렵 부터 王室을 中心한 四禮와 各種行禮, 上元 燃燈會儀
  仲冬 八關會儀 등 반드시 茶房이 集禮를 主官하여 茶禮를 行하거나
   米,麵,茶,茶香,茶藥 등을 賻儀로 下賜했다
ㅡ 982 - 광종 - 공덕제를 위해 왕이 차를 맷돌에 갊 - 千秋節에 다례를 행함

 

ㅡ 1038 - 거란의 요청으로 뇌원차 보냄

 

ㅡ 936-1392 - 高麗時代 - 飮茶 茶文化 全盛時期

  <高麗史>-(禮府)에 98종의 儀式中 茶를 내는 儀式이 11번 나온다
  곳곳에 茶房이 있었고 여기에서는 차 뿐만 아니라 酒菓가 함께 나왔다
  귀족급 僧侶生活, 민간음다도 상당수 보편화됨
  궁정에 茶房이란 관청에서 차를 다룸, 茶店, 茶所, 茶村


      당시 경상도에 6개 茶區, 전라도에 28개 茶區등 모두 35개 茶産地
   당시 名茶는 孺茶, 龍團勝雪, 雀舌茶, 紫筍茶, 靈芽茶, 露芽茶, 腦原茶, 香茶, 蠟面 등 
   또한 王室은 지리산 화개동(河東郡)에 茶園을 설치했다. 속칭 "花開茶所"-孺茶 生産

 

 

ㅡ 다음 블로그 <지리산의 블로그> "韓- 中 - 日 三國의 茶文化 歷史 資料"에서 발췌 ......                http://blog.daum.net/lsh7821/5936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