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 천전리 각석 원명입니다.원명1 外

2015. 7. 19. 05:38우리 역사 바로알기

 

 

 

 

 

      

울주 천전리 각석 원명입니다.원명1

http://nautes3.egloos.com/496941

 

 

 




<<원문>>
1. 乙巳(年)
2. 沙喙部葛
3. 文王覓<覔>遊[耒]來始淂見谷( )
4. 之古谷无名谷善石淂造書
5. 以下爲名[誓]書石谷字作之
6. 幷遊友妹麗德光妙於史
7. 鄒<安>郎王<三, 主>之
8. 食<原>多煞作功人尒利夫智奈麻
9. 悉淂斯智大舍帝智作食人
10. 榮知智壹吉干支妻居知尸奚夫人
11. 眞宍智沙干支妻阿兮牟弘夫人
12. 作書人慕尒智大舍帝智

*참고
: 앞에 글자를 다르게 읽는 글자.
(?) : 여백인 경우와 추측
[?] : 해석자에 따라 추가하는 글자
숫자 : 그림의 줄 번호


전체적으로 약간 사선을 그리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추정하고 있는 글자는 많이 판독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사진으로 굉장히 크게 찍었는데도 거의 확인되지 않는 글자가 몇몇 있었고, 판독문에는 나와 있으나 알아보기 힘든 글자도 있었습니다.

<참고자료 : 주보돈, 금석문과 신라사, 지식산업사 ;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nautes3.egloos.com/496941   好古!!!!!!!!!!!!!!!

 

 

 

 

천전리 각석, 서석으로 명칭 변경 제기
손인식 천곡초 교사 ‘울산작가’서 주장
갈문왕이 ‘서석곡’으로 이름 붙여
국내 역사학계도 ‘서석’ 명칭 통용
일부선 “암각화 가치 사장” 반대 의견
“암각화·명문 아우르는 ‘각석’ 바람직”
9면     -->
       
2015년 01월 08일 (목) 고은정 기자 kowriter1@iusm.co.kr
   
▲ 국보 제147호 울주 천전리 각석.

 

 

 

 

 

 

 

 

 

 

 

 

 

   국보 제147호 울주 천전리 각석(蔚州 川前里 刻石)명칭을 울주 천전리 서석(蔚州 川前里 書石)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끈다. 

이미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각석(刻石)’이라는 명칭보다 ‘서석(書石)’이라는 명칭이 더 통용되고 있다.

 

   지역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손인식 씨(천곡초 교사)는 최근 발행된 ‘울산작가’ 제18호 발표한 글에서 “‘각석(刻石)’이라면 문자나 문양에 관계없이 그냥 ‘바위에 새겨진 것’이라는 통칭밖에 안 된다”며 “‘갈문왕 이곳을 ‘서석곡(書石谷)’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바위 명문의 내용은 신라시대 사람들이 이곳을 ‘서석곡’ 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서석(書石)’으로 바꾸는 게 마땅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각석(刻石)은 경직되고 단절된 느낌이지만 ‘서석(書石)’은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궁금증을 유발하고 상상력을 자극해 국보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명칭이다. 

이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의 소재도 될 수 있는 여지가 된다”고 주장했다.

천전리 각석 명문(銘文)의 원명(原銘)에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갈문왕이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이 없었으므로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서석곡’으로 이름을 삼고 글자를 지어 새겼다’는 내용이 있다.

 

 

 

▲ 울주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명문의 탁본. ‘갈문왕이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이 없었으므로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서석곡‘으로 이름을 삼고 글자를 지어 새겼다’는 내용이 있다.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전호태 교수 대곡박물관 신형석 관장도 손 작가의 의견에 동의했다.

전호태 교수는 “현재 많은 역사학자들이 대부분 논문을 쓸 때나 강의를 할 때 ‘서석’이라는 명칭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각석’을 ‘서석’으로 바꿀 필요성은 분명 있다”고 말했다.

신형석 관장도 “무엇보다 진흥왕의 아버지인 사부지 갈문왕이 붙인 이름이 서석곡이다. 문화재명칭에 지명까지 연결되면 활용이나 홍보에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명칭변경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천전리 각석을 오랜 기간 연구해 온 대구 효성 가톨릭대 강종훈 교수는 “천전리 각석은 명문(銘文)만 새겨진 게 아니기 때문에 ‘각석’을 ‘서석’이라고 바꾼다면 각석의 문양이나 세선(細線)암각화의 가치가 사장된다”면서 “옛사람이 부른 명칭이 의미가 있긴 하지만 ‘암각화(岩刻畵)’와 ‘명문(銘文)’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각석(刻石)’이라는 명칭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상목 암각화박물관장도 “명칭변경 주장은 ‘서석’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역사학자들의 바람 일뿐이다. 영어로 Petroglyph는 암각화와 각석, 모두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서석’이라는 단어를 별칭으로 쓰되 통칭개념인 ‘각석’이 더 낫다고 본다”는 의견을 냈다. 

 

   한편 국내에서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각석은 직육면체의 돌에 천체의 형상을 새겨 놓은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과 별자리를 돌에 새겨 놓은 천문도인 보물 제837호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複刻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 등이 있다. 

 

 

울산최초의 조간신문 울산매일

 

 

 

 

 

 

울주 천전리 각석| 역사공간

추노 | 조회 51 |추천 0 | 2013.08.09. 09:27

 

오늘은 신라 진흥왕이 천전리를 방문한 날

2013.8.9

1474년전 신라왕족들의 행차 기록인
천전리 각석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예술·공연 등 다방면에서 조명했으면

 

   
 
  ▲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  
 

   음력 7월3일 8월9일 오늘은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을 방문했던 날이다. 진흥왕은 540년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는데, 그 1년 전인 여섯 살 때 천전리 각석을 찾아왔다. 진흥왕의 이름은 심맥부지(深麥夫知)였다. 그는 539년(법흥왕 26) 7월3일(음) 어머니인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와 큰어머니이자 외조모인 법흥왕비인 부걸지비(夫乞支妃, 보도부인)와 함께 천전리 각석에 왔다. 동행자와의 촌수가 좀 복잡한 이유는 신라 왕실의 혼인 방식인 근친혼(近親婚) 때문이었다. 진흥왕의 아버지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은 법흥왕의 동생으로, 형의 딸인 지몰시혜와 혼인하여 진흥왕을 낳았다. 그래서 진흥왕에게 있어 법흥왕은 큰아버지이자 외조부가 되었다.

   울주 천전리 각석에 진흥왕이 방문했던 사실은 지금까지 좀 덜 알려져 있었다. 1970년 12월24일 천전리 각석이 공식 발견된 후, 언론에 소개될 때 화랑(花郞)유적으로 대서특필되었다. 천전리 각석 명문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화랑유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명문을 해석해 내면서 진흥왕을 비롯한 신라 왕족들의 행차 사실을 밝혀내었다. 하지만 초기에 부각된 화랑유적이란 성격을 아직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경치가 좋은 천전리 계곡은 신라 왕족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천전리 각석 명문을 보면, 신라 왕족들이 천전리 각석을 처음 방문한 것이 525년(법흥왕 12) 6월18일(음)이었다. 진흥왕의 아버지인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계곡에 왔는데, 이들은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이 없는 골짜기였다.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썼고, …서석곡이라 이름하는 글자를 지었다”고 바위면에 기록을 남겼다.

   이것을 보면, 무더운 여름날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왔던 사부지갈문왕 일행은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를 보고 그곳을 오래된 골짜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계곡을 ‘서석곡(書石谷)’이라 이름 지었다. 울산의 지명 가운데 신라 왕족이 지은 지명이 있다는 사실이 참 흥미롭다. 유래가 뚜렷한 이런 지명은 이제부터라도 적극 살려내 불리도록 했으면 한다.

   천전리 각석의 525년(을사년)에 새긴 명문은 원명(原銘)’이라 불리는데, 발견 당시에는 신라 최고(最古) 금석문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천전리 각석은 지방문화재 지정 절차를 건너뛰어, 1973년 5월 바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천전리 각석의 1위 자리는 얼마동안 유지되다가 1988년 물려주게 되는데, 경북 울진에서 524년(법흥왕 11) 건립된 비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보 제242호)에는 흥미롭게 사부지갈문왕이 법흥왕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

   요컨대 선사(先史)시대부터 특별한 장소였던 천전리 각석에는 525년 여름부터 신라 왕족들이 행차했으며, 그 방문 사실을 바위에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천전리 계곡에는 왕족뿐만 아니라, 귀족·승려·화랑 등이 즐겨 찾았다. 각석 바위면에는 말을 타고 가는 행렬과 배 그림도 있는데, 이것은 신라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천전리 각석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울산대곡박물관은 상설전시실에서 신라 왕족들의 천전리 각석 방문에 대해 소개하고 있으며, 그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7월25일에는 사부지갈문왕의 방문일인 음력 6월18일을 기념해 ‘대곡천을 방문한 신라 사부지갈문왕을 찾아서’란 행사를 기획했다. 진흥왕 방문일인 음력 7월3일을 기념해 오는 10일에는 ‘서석곡에 온 신라 왕자’ 어린이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개최한다.

   그러나 이런 작은 박물관 수준이 아니라, 좀더 큰 기념행사로 발전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진흥왕과 신라 왕족들의 울산 행차는 예술·공연분야 등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은 울산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울산 속에서 신라를 만나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작은 사실이라도 좀더 다양하게 조명해 나간다면, 그 만큼 울산 지역사는 풍성한 내용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

 

 

 

 

 

 

 

 

 

Re:울주 천전리 각석(蔚州 川前里 刻石, 국보 147호) 해설하기| 한국사울림

제주큰동산 | 조회 28 |추천 0 | 2013.01.23. 09:08

 

 

2013년 1월 8일 16:45  경북 울진군 죽변면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의

울주 천전리 암각화(바위그림) 해설하기

 

 

 

 

 

 

   사슴을 비롯한 동물들이 모여있는 그림들

   울주 천전리 암각화에서 가장 일찍 새겨진 그림들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사냥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마름모꼴과 동심원이 펼쳐져 있는 그림들

   청동기 시대에 새겨진 각종 기하학적 무늬로,

풍요와 다산을 염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표현되어 있다.

 

 

 

 

   울주천전리각석 원명(왼편)과 추명(오른편)

   울진봉평신라비가 새겨지던 신라 법흥왕대에 작성된 명문으로,

 법흥왕의 아우 사부지 갈문왕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화랑의 이름이 나오는 명문들

   신라 시대의 수많은 화랑과 낭도가 이곳을 방문하여 기념으로 새겨놓은 글들이다.

 

 

 

   기마행렬도와 돛단 배 그림

   신라 시대에 명문이 새겨질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왕족들의 행차 장면을 그린 것이다.

 

 

사진 : 울주 천전리 암각화(바위그림) 해설, 제주큰동산, 2013.01.08.16:45,

경북 울진군 죽변면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

 

 

cafe.daum.net/7jeju/9gQj/126   제주큰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