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한화(竹窓閑話)

2015. 7. 23. 22:07잡주머니

 

 

 

 

 

      

 古典香氣 (53)

 

 

죽창한화(竹窓閑話)

 

 

찬성(贊成) 이덕형(李德泂) 저

 

 

退溪先生舊宅。在於京中西小門洞。庭有老檜長數十丈。兵火之後都下喬木蕩然無餘。獨此樹猶存。蒼翠磨空遠近瞻望。辛亥春忽然摧折。人咸怪訝。其夏鄭仁弘嗾朴汝樑朴乾甲輩。上疏詆毀退溪無所不至。士林齊憤。八方儒生坌集闕下。投疏伸雪。豈非斯文之大不幸。折檜之變於是始驗矣。

 

 

찬성(贊成) 이덕형(李德泂) 저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옛집은 서울 서소문동(西小門洞)에 있었다. 뜰에 늙은 노송나무가 있는데 길이가 수십 길이나 되었다. 난리를 치른 뒤에 서울 안에 있던 큰 나무들이 남은 것 없이 다 없어졌건만, 유독 이 나무만은 그대로 있어 푸른빛이 하늘에 닿으므로 원근에서 모두 쳐다볼 수 있었다. 이 나무가 신해년(1611, 광해군 3) 봄에 갑자기 꺾여지자 사람들이 모두 괴상히 여겼다. 그해 여름에 정인홍(鄭仁弘)이 박여량(朴汝樑)ㆍ박건갑(朴乾甲) 등을 시켜서 소를 올려 퇴계를 헐뜯어 못하는 짓이 없었다. 그러자 사림들이 모두 분하게 여기고, 8도의 유생들이 모두 대전 아래에 모여들어 소를 올려 그 원한을 풀려 했으니, 이 어찌 사문(斯文)의 큰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노송나무가 꺾인 변고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징험된 것이다.

 

 

舊例成均館每年人日。及他節日試製儒生。政府館閣堂上齊會。皆踞椅子。諸生入庭行拜。盧蘇齋守愼爲知館事。始議於參考大臣曰拜下乃臣見君之禮也。首善之地待儒生不可如是太慢。今宜令儒生行揖。諸宰下椅子立受。以視優禮待士之意。左右皆曰可。至今遂成定規。

 

   예(例)에 성균관에서는 해마다 인일(人日)이나 다른 절일(節日)에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는데, 이때 정부(政府)ㆍ관각(館閣)의 당상들이 모두 모여 의자에 걸터앉으면 모든 유생들은 뜰에서 절을 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지관사(知館事)가 되고서, 비로소 참고관(參考官)인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 뜰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뵙는 예법인데, 본보기가 되는 곳에서 유생을 이렇게 만홀하게 대접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유생은 읍(揖)을 하고 모든 재상들은 의자 앞에 서서 받아서, 선비를 우대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했다. 이 말에 모든 사람들도 옳다고 하여, 이것이 지금까지 정한 법이 되었다.

 

 

 

韓山文獻書院旣成。諸生以稼牧父子。坐次相聯爲疑。來問於在京子孫。余問諸宿儒皆不能定。就問於李相公恒福。相公曰吳紀亮之子騭。父子爲中書令。每朝會。賜以雲母屛隔坐。今以障子隔坐爲當。遂如相公之言設障定坐。相公風儀俊偉。淸白尙節又能文章。廢朝時以直言遠謫。卒於荒裔。國人傷之

 

  한산(韓山)문헌서원(文獻書院)이 이루어지자, 모든 유생들은 가정(稼亭)ㆍ목은(牧隱) 부자의 좌차(坐次)가 서로 나란히 있는 것을 의심해서 서울에 사는 자손들에게 물어왔다. 나는 여러 늙은 선비들에게 물었으나 모두 이를 결정짓지 못하므로, 상공 이항복(李恒福)에게 물으니, 상공은 말하기를,

 

오기량(吳紀亮)아들 즐(騭)이 부자가 모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는데, 조회 때마다 임금이 운모병(雲母屛)을 주어서 떨어져 앉도록 했으니, 지금도 장자(障子)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이오.”

 

하므로, 드디어 상공의 말과 같이 장자를 놓고 앉도록 하였다. 상공은 풍채가 준위(俊偉)하고, 청백(淸白)하여 절개를 숭상했으며 또 문장에 능했다. 폐조(廢朝) 때에 바른 말을 하다가 멀리 귀양가서 변방에서 졸하니, 백성들이 모두 마음 아파 하였다.

 

 

 

明廟朝。趙參贊彥秀以特進入侍經筵。上問功夫二字何義。左右皆不能對。趙公進曰功女功也。夫田夫也。言士之勤學。如女之勤紡績農夫之力稼穡也。上嘉納。宣廟初日三開筵。柳眉菴希春以副學常進講。上雅重眉菴之博學。顧問亹亹日仄不倦。嘗講詩傳碩鼠篇。上曰鼠乃賤惡之物。何以居六甲之首。眉菴曰鼠之前足四爪。後足五爪。陰陽相半無如此物。故取夜半陰盡陽生之義。以子爲十二時之首矣。上深異之。宣廟朝。余聘君申公湛。以副學入侍經筵。講畢。上因論歷代名筆曰近觀雪菴兵衛森筆法最勁。雪菴未知何許人。左右或以僧對。聘君曰雪菴李溥光之別號。與趙孟頫一時元朝人也。上又問宮軆何義。左右皆不知。聘君又對曰陳后主時。江總作文華美。宮中效之。故曰宮軆。梁之徐樆亦爲宮軆。聘君歸語子弟曰今之文官皆不讀書。甚至不知宮軆。良可歎也。

 

  명묘(明廟) 때, 참찬 조언수(趙彦秀)가 특진관으로 경연에 들어가 모셨다. 상이 묻기를,

 

“공부(功夫)라는 두 자의 뜻이 무엇이오?”

 

하니, 좌우 사람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때 조공(趙公)이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공(功)은 여공(女功)이요, 부(夫)는 전부(田夫)입니다. 이 말은 선비가 부지런히 배우는 것은 마치 여자가 길쌈을 부지런히 하고 농부가 농사를 힘써 하는 것과 같이 하라는 뜻이옵니다.”

 

하니, 상은 이 말을 아름답게 여겼다.

선묘(宣廟) 초년에는 하루에 세 번 경연을 열었다. 이때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이 부제학으로서 항상 경연에 나가 강(講)을 올렸다. 상은 본래부터 미암의 배운 것이 많은 것을 소중히 여겼던 터이므로, 그를 돌아보고 묻기를 열심히 하여 해가 기울어도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시경(詩經)》 석서편(碩鼠篇)을 강하는데, 상이 묻기를,

 

“쥐는 천하고 보기 싫은 물건인데 어찌해서 육갑(六甲)의 첫 머리에 두는 것인가?”

 

했다. 미암이 대답하기를,

 

“쥐는 앞발에 발톱이 네 개이고, 뒷발에 발톱이 다섯 개입니다. 그래서 음양이 상반(相半)되기가 이 물건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밤중에 음이 다하고 양이 생기는 뜻을 취해서 이 자(子)로 12시의 첫머리를 삼는 것입니다.”

 

했다. 상은 이 말을 듣고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선묘조(宣廟朝)에 우리 장인인 신공(申公) 담(湛)이 부제학으로서 경연에 입시했는데, 강이 끝나자, 상은 역대의 명필(名筆)들은 논하다가 이르기를,

 

“요새 보니 설암(雪菴) 병위삼(兵衛森)의 필법이 가장 힘찬데 설암은 어떤 사람인가?”

 

했다. 좌우 신하들은 혹 중이라고 대답했으나 장인은 말하기를,

 

설암이부광(李溥光)별호(別號)로 조맹부(趙孟頫)와 한 시대 사람으로 원(元) 나라 사람입니다.”

 

했다. 상은 또,

 

“궁체(宮體)란 무슨 뜻인가?”

 

하니, 장인이 또 대답하기를,

 

진(陳) 나라 후주(后主) 때 강총(江總)이란 사람이 글씨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써서, 이것을 궁중에서 본받아 썼기 때문에 궁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양(梁) 나라 서이(徐樆)도 역시 궁체를 썼습니다.”

 

하였다. 장인은 집에 돌아가서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문관들이 모두 글을 읽지 않아서 심지어 궁체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陳先生郁。能文屢魁場屋。文與賦爲士子程式。謄書傳誦者頗多。嘗受學於慕齋金先生。學問操行爲儕流所推重。銓官以其落魄科第。除授童蒙敎官。訓誨諸生必先孝悌。學者雲集。余亦往受漢書。先生嘗稱慕齋。天資英悟聰睿過人。理學高明文章典雅。又鑑識如神。見人製述。心知其窮達壽夭十不一失。誘掖後學誠意交孚。晦齋退溪兩先生皆謁先生。始知嚮學之方。其衛道闡學之功亦大矣。但擧止任眞不修邊幅。望之初似迂疎。及其承誨溫溫如玉。言論和平如坐春風。易簀之後。士論皆欲陳疏從祀文廟。或者以先生平日殖貨爲歉。其議遂寢。陳先生終於監縣。

 

  진욱(陳郁) 선생은 글을 잘해서, 여러 번 과장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그 문(文)과 부(賦)는 선비들의 글짓는 정식(程式)이 되어 베껴다가 외는 자가 꽤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김모재(金慕齋) 선생에게 글을 배워서 학문과 조행(操行)이 당시 동류들의 추앙을 받았으므로, 전관(銓官)은 그가 과거에 떨어졌다 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였다. 그는 여러 유생들을 가르치는데 반드시 효도와 우애를 먼저 하니, 배우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나도 역시 가서 《한서(漢書)》를 배웠었다. 선생은 항상 모재(慕齋)를 일컬어, ‘천품이 영특하고 밝으며, 총명과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고, 또 이학(理學)이 고명하며 문장이 전아하다’고 했다. 또 모재는 감식(鑑識)이 신과 같아서, 남이 지은 글을 보면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의 궁달(窮達)과 수요(壽夭)까지도 아는데, 이것은 열에서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 후학을 이끌어 가르치되 성의를 다했으므로 회재(晦齋)ㆍ퇴계(退溪) 두 선생도 모두 선생을 뵙고 비로소 학문하는 방도를 알았다고 하니, 그 도를 보호하고 학문을 밝힌 공로가 또한 크다 하겠다. 다만 행동을 너무 천진스럽게 하고, 꾸미는 것에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쳐다보면 처음에는 어둡고 소홀한 것 같지만 가르침을 받아보면 따뜻하기가 옥과 같고, 언론이 화평하여 마치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선생이 돌아간 뒤에 선비들의 의논이 ‘문묘에 종사하도록 소를 올리자.’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선생이 평소에 재산을 불린 것이 흠이 된다.’고 하여 그 의논이 중지되었다. 진선생의 벼슬은 현감에서 그쳤다.

 

 

 

○申瀞文忠公叔舟之子也。年未三十已躋宰列。嘗以吏曹參判錄佐理正勳。應受功臣奴婢准數已出。聞高靈縣有寺奴父子。富冠一道。欲爲圖出。計無奈何。遂僞造御寶發文督現。事覺下獄。成廟每念叔舟之勳勞。欲貰其死。嘗於行幸之際駐輦禁府前路。命召申瀞於駕前。諄諄下敎曰。汝以大勳臣之子。今抵死罪。予甚惻然。汝若吐實悔過。則今卽放汝以酬汝父之勳勞。申瀞早貴性且驕傲。辭色憤慢一向牢諱。成廟曰執迷之人也。命還下獄。令禁府讞議。判府事姜希孟等啓曰申瀞身爲宰相僞造御寶。在法當死。成廟卽允。申瀞之家在吾洞中。因其子孫嘗聞僞造。家人所爲。瀞實不知。後余以同知春秋。得見實錄史臣論曰叔舟功存社稷。死肉未冷。子瀞不得其死。惜哉。子孫之言似不虛矣。

宋枰亦吾洞人也。嘗爲造紙別提。畜一醫女。以咨文紙一張造給翦帽。有臺官曾眷其女。因嫌彈論。遂以贓罪下獄。枰性亢。不勝悻怒曰。雖死。何以受此刑杖。乃伏辜。遂錄贓案。子孫禁錮。曾孫福堅登文科。不通顯路。低徊冗班。以通禮陞堂上。高孫鐻始爲注書兩司。以寺正終。宋枰錄案後三年。成廟臨筵問左右曰宋枰必棄其女。左右對曰聞今尙率畜。成廟默然。蓋宋枰以一張紙。身陷大罪流汙子孫。成廟嘗惻然欲原其罪而下問。枰猶不悛。可謂蠱喪惑志者也。祖宗朝嚴於贓法。觀申瀞宋枰。而可想成廟欽恤之仁。至今令人起感。足爲東方聖德之主矣。

 

 

신정(申瀞)문충공(文忠公) 숙주(叔舟)의 아들인데, 나이 30도 되기 전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일찍이 이조 참판(李朝參判)으로서 좌리정훈(佐理正勳)에 기록되어 공신이 받아야 할 노비는 정수대로 이미 다 받았다. 고령현(高靈縣)에 사노(寺奴) 부자(父子)가 살고 있는데 한 도(道)에서 제일 부자라는 것을 듣고 그들을 차지하려고 계획을 하다가 어찌할 방법이 없자, 드디어 어보(御寶)를 위조해서 공문(公文)을 내어 독촉하다가 일이 탄로되어 옥에 갇혔다. 성묘(成廟)는 매양 신숙주의 공로를 생각해서 그의 죽음을 면하게 해주려고 했다. 어느 날 밖에 거둥하다가, 금부(禁府)의 앞길에서 연(輦)을 멈추고 신정을 명하여 앞에 불러오게 하여 순순하게 하교하기를,

 

“네가 대훈신의 아들로서 지금 사형을 받게 되었으니 내가 몹시 측은하게 여긴다. 네가 만일 진실을 말하고 잘못을 뉘우친다면 지금이라도 너를 석방하여 네 아버지의 훈로에 보답하려 한다.”

 

했다. 그러나 신정은 어려서부터 귀하게만 자라서 성질이 교만했다. 얼굴에 오히려 분한 기색을 띠고 한결같이 숨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묘(成廟)는 이르기를,

 

“미련하게 고집이 있는 사람이로군!”

 

하고, 도로 하옥시키도록 명하고 금부(禁府)로 하여금 그의 죄상을 의논하게 했다. 이때 판부사 강희맹(姜希孟) 등이 아뢰기를,

 

“신정은 몸이 재상에 있으면서 어보를 위조했으니, 법에 비추어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하니, 성묘는 즉시 이를 윤허하였다.

신정의 집이 우리 마을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 자손들에게 ‘어보를 위조한 것은 그의 집사람이 한 일이요, 신정은 실상 모르는 일이다.’라는 내용을 들었다. 그 뒤에 나는 동지춘추(同知春秋)로서 실록의 사신론(史臣論)을 보았는데, 거기에,

 

신숙주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었는데, 그 시체가 식기도 전에 그 아들 신성이 제명대로 죽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이로 보아 그 자손들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닐 듯하였다.

 

송평(宋枰)은 역시 우리 마을 사람이다. 일찍이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로 있을 때 의녀(醫女) 하나를 첩으로 두었다. 그는 자문지(咨文紙)한 장 으로 전모(剪帽)만들어서 그 여인에게 주었다. 대관(臺官) 중에 그 여인을 데리고 살던 자가 있었는데, 그 혐의로 송평을 탄핵하여 장죄(贓罪)로써 하옥시켰다. 송평은 본래 성질이 굳셌다. 발끈 성을 내어 말하기를,

 

“내 비록 죽을지언정 어찌 이 형장(刑杖)을 받는단 말이냐?”

 

하고, 이에 죄를 받고 말았으므로, 드디어 장안(贓案)에 기록되어 그 자손이 금고(禁錮)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증손 송복견(宋福堅)이 문과에 올랐으나 청현(淸顯)한 벼슬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시원치 않은 반열로만 돌다가 통례(通禮)로서 당상관에 올랐으며, 현손 송거(宋鐻)가 비로소 주서(注書)와 양사(兩司)가 되었으나, 겨우 시정(寺正)으로 그치고 말았다.

송평이 녹안(錄案)된 지 3년 후 성묘(成廟)가 경연에 납시어 좌우에게 묻기를,

 

“송평은 필경 그 계집을 버렸겠지?”

 

하니, 좌우가 대답하기를,

 

“지금도 오히려 집에 데리고 있다고 합니다.”

 

했다. 이 말을 듣고 성묘는 아무 말도 없었다. 대개 송평은 종이 한 장 때문에 몸이 큰 죄에 빠지고 그 오명을 자손에게까지 전해지게 하였다. 성묘가 일찍이 그 죄를 용서해 주고자 하여 이렇게 물었건만, 송평은 오히려 뉘우치지 않았으니, 계집에게 혹해서 그 본 마음까지 잃은 자라 할 수 있다. 조종조(祖宗朝)에서 장법(贓法)을 제일 엄하게 다스렸으니, 이것은 신정과 송평의 일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묘의 신하를 가엾게 여기는 그 어진 마음은 지금까지 사람을 감동하게 하니, 이야말로 동방에서 성덕을 갖춘 임금이라 할 만하다.

 

 

 

余爲黃海監司時。有一文官堂上。權勢赫然貪饕無厭。嘗防納黃州司宰濟用等監貢物元定價木五十同。而兵使鄭沆欲爲媚悅。加徵五同輸送于其家。其人無意備納。兩監催文絡繹於監營。監司捉致色吏每加刑訊。本州送人於其家催納。則輒以官威囚禁。不敢開口者。幾至三年。鄭沆遞歸。兵使權餘慶繼來。亦承風旨不敢可否。判官愼守乙多備土物。滿載一駄折簡哀乞。則盡納其物。而亦不修答。守乙逢人輒說。其人聞而惡之。嗾臺諫駁去。餘慶更徵五十同之木於民間。時方窮夏。怨讟朋興。余嘗憤其爲人。癸亥反正初余又爲忠淸監司。其人奪占民田。洪州天安牙山溫陽等地。廣設屯田多至六處。積穀累千。時朝廷行文列邑毀撤私屯。所入接之徒一時逃散。穀物牛畜沒入官家。聖化維新。公論方張。其人父子分配絶徼。又出逆口。父子幷繫牢獄。家產蕩然。甲第三區受其廉價。盡賣權貴之家。久乃得免還發配所。大翁沒於謫所。今雖放還。流離湖右窮悴僅存。天道神明。足爲貪婪者之戒也。

 

내가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있을 때, 당상 문관 하나가 권세가 혁혁하였는데, 재물을 탐함이 한량이 없었다. 그리하여 황주(黃州)에서 사재(司宰)ㆍ제용감(濟用監)에 드리는 공물을 방납(防納)하자면, 원래 정가는 면포 50동(同)이었는데, 병사(兵使) 정항(鄭沆)이 잘 보이기 위해서 여기에 5동을 더 받아서 그 당상 문관의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갖춰 납입할 생각을 하지 않으므로 두 감(監)에서는 글을 보내어 감영(監營)에 계속 재촉했다. 그래서 감사(監司)가 색리(色吏)를 잡아다가 형신(刑訊)을 가하고, 본주(本州)에서는 사람을 그 집에 보내서 바치기를 재촉하면, 관청의 위엄으로써 가두기 때문에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채 3년이 지났다. 정항(鄭沆)이 벼슬이 바뀌어 돌아가자, 병사(兵使) 권여경(權餘慶)이 후임으로 왔는데, 그 역시 당상 문관의 풍지(風旨)를 받아서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했다. 판관(判官) 신수을(愼守乙)이 토산물을 많이 갖추어서 한 바리를 가득 실어 보내면서 편지로 애걸했다. 그러나 그 물건만 모두 받아들이고서 역시 회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수을은 사람을 만나는 대로 그 이야기를 하니, 당상 문관은 이 말을 듣고 미워하여 대간(臺諫)을 시켜 공박하여 제거하게 했다. 권여경이 다시 면포 50동을 민간에서 거두어들이니, 그때는 마침 메마른 여름철이어서 원망과 비방이 떼지어 일어났다.

 

나는 항상 그 사람됨을 분하게 여겨 왔었다. 계해년(1623, 인조 1) 반정(反正) 초기에 나는 또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 그 사람은 백성의 밭을 빼앗아 점령하여 홍주(洪州)ㆍ천안(天安)ㆍ아산(牙山)ㆍ온양(溫陽) 등지에 넓게 둔전(屯田)을 여섯 곳이나 만들어 쌓은 곡식이 수 천석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여러 고을에 공문을 돌려 개인 소유의 둔전을 없애게 하니, 그곳에 들어살던 무리들은 일시에 도망해 흩어지고 곡식과 소는 관청에서 몰수해 들였다. 성스러운 교화가 더욱 새로워지고 공정한 의논이 바야흐로 널리 펴져, 그 사람 부자는 각각 먼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또 역적의 구초(口招)에서 그들의 말이 나와서 부자가 모두 잡혀 옥에 갇히고 가산은 모두 없어져서 좋은 집 세 채가 헐값으로 권세 있는 집에 다 팔렸다. 오래된 뒤에 겨우 풀려났으나 도로 배소(配所)에 가게 되어 그 아비는 적소(謫所)에서 죽었다. 지금은 비록 방환(放還)되었으나 호서(湖西) 지방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궁하고 파리한 모습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재물 탐하는 자를 족히 경계한다고 하겠다.

 

 

李謹者亦同閈人也。家世閥閱。其始也乃一肉塊。而僅辨面目。毛髮遍身狀如猪兒。父母驚怪初欲不擧。裹置園中樹下。呱呱而啼。羣鴉來集。父母憐之更爲收養。旣成人。長不滿三尺。頭髮委地。鬚髥盈尺。行步蹣跚。手足生毛。眞侏儒之尤者也。人見之莫不駭異。謹自知病人。見人輒匿不出門外。學於家庭。聰明絶倫。掩卷輒誦。經傳史記無不精通。能文善寫。最長於詩。又善歌嘯。蓋天性然也。門族黃長溪廷彧。聞奇來見。初甚駭怪。試以口呼製詩。應聲卽對作句甚佳。長溪大加稱歎曰有此奇才。而稟形殊異。豈不可惜。遂勸父母使之婚娶。壬辰倭變。謹避亂於廣州墓山。猝遇羣倭。見而大驚。以爲怪獸。却立不敢近。熟視乃捉相與笑玩。以爲奇貨。舁致於倭酋。倭酋亦驚怪不辨人獸。或以食物投之。或以鞭箠笞之。以試啼喫。謹素堅悍。略無怖色。倭酋尤異之。有一老倭來見曰這物何不速殺。此乃朝鮮能射片箭者流。羣倭齊憤拔劍欲斬。倭酋力止。夜則以竹籠貯謹。以防逃逸。又招解占僧。倭使筮之。僧倭擲珓作卦曰所獲非熊非虎。此乃文王得呂尙之兆。無乃得異耶。倭酋大喜。待謹尤誠。倭酋所陣。乃漢江濟川亭也。時當七月之望。月色如畫江波似練。夜氣悽悽。蛩音咽咽。秋聲四起。謹獨坐無寐。百感生中。於籠裡劃然長嘯。其聲寥喨。使人凄悲。羣倭驚起無不垂涕。倭酋來聞不勝思鄕去國之念。涕下沾襟。始開籠出謹曰何等怪物。有此奇特。向者神僧之占果不虛矣。謹自念生爲人世之異物。死作賊異之俘魂。人生到此。萬事何關。爲今之計莫如僥倖得脫。復見偏母也。遂放意言笑。倭酋以酒勸飮。謹酒戶亦寬。傾壺痛飮。酒酣長歌。歌本楚詞。一陣感泣。歌竟起舞。左旋右廻。搖頭轉目。手拍足蹈。百態俱呈。羣倭又拍掌大笑。舞畢。謹泫然流涕失聲悲哭。視者皆泣。倭酋問曰爾何悲泣。謹索筆書示曰八十老母相離已久。不知死生。是以哭之。倭酋惻然感歎。見其筆蹟。嘖嘖稱善。因言於衆曰此物殊甚怪異。今觀所爲亦非尋常。若置陣中必作妖孼。反貽後悔。置之無益。殺之不忍。不如放送。羣倭曰諾。遂言於謹曰汝今思歸。從汝所願。謹姑試其意曰今者道路梗塞。欲往何歸。願留陣中。倭酋曰第言之。謹曰欲往江華。倭酋搜出陣中被虜我國人四五名。以短舠多備糗糧。載送江華。旣至聞外四寸朴慶新。爲海州牧使。因往投焉。其母乃牧伯之三寸叔母。故來在邑衙遂與相會。噫侏儒乃天地間一病物。而能以賤技得脫賊藪。獲見老母。又年近七十而逝。子孫亦多豈非天也或有見人病孱愚庸。必笑侮之。殊不知禍福倚伏不可以人事預度。李謹之事吁亦異哉。朴監司慶新常言之。

 

    이근(李謹)이란 자도 역시 나와 한 고향 사람으로 대대로 문벌이 좋은 집안이다. 처음 날 때 몸뚱이 하나가 겨우 면목(面目)을 갖추었을 뿐으로 털이 온 몸을 덮어 마치 돼지 새끼와도 같았다. 부모들이 놀라고 괴상히 여겨 처음에는 키우지 않으려고 포대기에 싸서 동산 가운데 나무 밑에 두었더니, 어린애의 우는 소리를 듣고 까마귀떼가 모여 들었다. 부모는 이를 불쌍히 여겨 다시 거두어 길렀는데, 성인이 되었는데도 키가 석자를 넘지 못하고 머리털이 땅까지 내려오고 수염이 한 자나 되었다. 걸음걸이는 휘청휘청하고 손발에도 모두 털투성이어서 참으로 난장이 중에도 난장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근 자신도 자기가 병자인 줄을 알고 사람만 보면 문득 숨고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집에서 글을 배우는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책을 덮고서도 줄줄 외어, 경전(經傳)이나 사기(史記)에 정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글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는데 그 중에서도 시에 가장 능했다.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고 휘파람을 잘 불었으니 대개 그의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문족(門族)인 장계(長溪) 황정욱(黃廷彧)이 기이하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보았다. 처음에는 몹시 해괴하게 여겨 입으로 불러 시를 짓는 것을 시험해 보았다. 그는 운자를 내기가 무섭게 바로 시를 짓는데 그 대구(對句)가 몹시 아름다웠다. 장계는 크게 칭찬하기를,

 

“이런 기이한 재주가 있는데 타고난 형상이 남과 다르니, 어찌 아까운 일이 아니랴?”

 

하고, 드디어 그의 부모에게 권하여 장가들이게 했다.

임진왜란 때 이근은 광주(廣州)에 있는 선산 근처로 피난했다. 거기에서 졸지에 여러 왜적을 만났다. 왜적들은 그를 보고 크게 놀라 괴상한 짐승이라 생각하고 우뚝 서서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보고 난 뒤에 잡아 가지고 서로 웃고 놀리더니 기화(奇貨)라고 여겨 마주 들고 그들의 추장에게 갔다. 왜추(倭酋)도 역시 놀라고 괴상히 여겨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별하지 못하여 혹은 먹을 것을 던지기도 하고 혹은 회초리로 때리기도 하여 우는가, 먹는가를 시험했다. 그러나 이근은 본래 뜻이 굳고 용기가 있어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으므로 왜추는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어떤 늙은 왜인 하나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저 물건을 왜 빨리 죽이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조선에서 편전(片箭)을 쏘는 것들이다.”

 

하니, 모든 왜인들이 모두 분이 나서 칼을 빼어 베이려 하자, 왜추는 힘써 말리고 밤이면 죽롱(竹籠)에 넣어서 도망가는 것을 막았다. 또 점치는 중을 불러다가 그를 두고 점을 치라고 했다. 이때 왜승(倭僧)이 옥 산통(算筒)을 던져서 괘를 지어 말하기를,

 

“사로잡은 것은 곰도 아니요 범도 아니며, 이것은 바로 문왕(文王)여상(呂尙)을 얻을 징조이니, 어찌 기이한 물건을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왜추는 크게 기뻐하여 조심하여 더욱 정성껏 대접하였다.왜추가 진을 친 곳은 바로 한강 제천정(濟川亭)이었다. 이때는 마침 7월 보름이어서 달빛이 대낮과 같았고 강의 물결은 마치 마전한 베처럼 잔잔했다. 밤 기운은 쓸쓸하고 벌레 소리는 찍찍거리는데 가을 소리는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근은 홀로 앉아 잠이 들지 않아 백 가지 생각이 가슴 속에서 일어나므로 죽롱 속에서 길게 휘파람을 부니 그 소리가 처량하여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모든 왜병들은 놀라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왜추도 이 소리를 듣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나라 떠나온 생각을 이기지 못해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그러자 비로소 죽롱을 열고 이근을 내놓으면서도 말하기를,

 

“무슨 괴물이 이렇게 기이한 재주가 있느냐! 저번에 신승(神僧)이 점친 것이 헛말이 아니로구나.”

하였다. 이근 스스로의 생각에, ‘내가 나면서는 이 세상의 이상한 물건이 되었고 죽어서는 적에게 잡혀가는 혼이 되겠으니, 사람이 이 지경이 되어 만 가지 일에 무엇을 관계하겠는가. 지금의 방법으로는 내가 요행히 이곳을 벗어나서 혼자 계신 어머님을 뵙는 것 뿐이다.’고 여겼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말하며 웃어대니, 왜추가 술을 주면서 마시라고 권했다. 이근은 주량도 또한 커서 병을 기울여 마음껏 마시고 술이 취하자 길게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초사(楚辭)는데, 온 진중의 모든 왜병들이 모두 감동해서 울었다. 노래가 끝나자 이근은 일어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로 돌면서 머리를 흔들고 눈망울을 굴리고 손벽을 치고 발을 구르는 등 백 가지 모양을 다하니, 모든 왜인들도 또 손벽을 치며 크게 웃었다. 춤이 끝나자 이근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목놓아 슬피 우니, 이것을 본 자들도 모두 울었다. 왜추는 묻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피 우느냐?”

했다. 이근은 붓과 종이를 달라고 해서 써서 보이기를,

 

“80세가 되신 늙은 어머니와 헤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으므로 그래서 우는 것이오.”

하니, 왜추도 이 말을 듣고 가엾게 여기며 감탄했다. 그리고 그의 필적을 보더니 혀를 차면서 칭찬하기를 마지 않으면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물건이 몹시 괴이하고 이상하더니 이제 그가 하는 짓을 보니 또한 심상치가 않다. 이 물건을 만일 진중에 둔다면 반드시 요망스러운 일이 생겨서 도리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다. 잡아 두어봐야 유익할 것이 없고 죽이자니 차마 그럴 수도 없으니 차라리 놓아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 말을 듣고 모든 왜병들도 그 말이 옳다고 했다. 그래서 왜추는 이근에게 말하기를,

 

“네가 지금 집에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있으니 네 소원대로 해주겠다.”

했다. 그러나 이근은 왜추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고 말하기를,

 

“지금 길이 막혔으니 내가 가고 싶지만 어디로 가겠소? 이 진중에 있게 해주시오.”

하니, 왜추는,

 

“하여튼 말해 보라.”

하므로 이근은,

 

“강화(江華)로 가고 싶소.”

하니, 왜추는 진중에 잡혀와 있는 우리나라 사람 4ㆍ5명을 불러내어 조그만 배 한 척에 양식을 많이 준비해 주면서 강화로 보내주었다. 강화에 와서 들으니, 그의 외사촌 박경신(朴慶新)이 해주 목사(海州牧使)가 되었다고 하므로 이근은 바로 해주로 찾아갔다. 이근의 어머니는 목사의 삼촌 숙모이기 때문에 해주 관사에 와 있었다. 그래서 모자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아! 난장이는 천지간의 한 불구자인데 그 천한 재주를 가지고 적의 소굴을 벗어나서 늙은 어머니를 만나볼 수가 있었고, 또 나이가 70에 가깝도록 살다가 죽었으며 자손도 또한 많았으니, 어찌 하늘이 시킨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혹 남이 병이 있고 유약하고 어리석고 용렬한 것을 보면 반드시 비웃고 업신여기는데, 사람의 화복의 순환이란 사람의 일을 가지고 미리 짐작할 수가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이근의 일이 아! 또한 기이하지 않은가? 감사 박경신이 항상 이 말을 들려 주었다.

 

 

 

李憲平公封。牧隱之曾孫也。有文名。性嚴毅。人莫敢干以私。爲刑曹判書。接獄之際。用法頗峻。以此冤死者亦多。同宗土亭李公之菡常言。憲平身歿之後。于今百有餘年。其子孫微弱僅免流丐。豈非峻刑之報也。爲刑官者。不可不愼。余再爲刑判每思土亭之言。瞿然愓편001 慮。豈非一助也。

 

 

   헌평공(憲平公) 이봉(李封)목은(牧隱)의 증손인데 글을 잘하여 이름이 있었고 그 성질이 엄격하고 굳세어서 사람들이 감히 사정(私情)을 가지고 청탁하지 못하였다. 그가 형조 판서가 되어 옥사를 다스릴 적에 법을 몹시 엄하게 써서 억울하게 죽은 자가 또한 많았다. 동종(同宗)인 토정(土亭) 이공 지함(李公之菡)이 항상 말하기를,

 

“헌평공이 돌아간 지 지금 백여 년이 되는데도 그 자손이 미약해서 겨우 비렁뱅이만을 면하고 있음은 어찌 형옥(刑獄)을 엄하게 다스린 응보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형관(刑官)이 된 자는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나는 두 번 형조 판서가 되었지만, 매양 토정의 말을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깊이 생각하곤 했다. 이것이 어찌 한 가지 도움이 아니겠는가?

 

 

吾宗李公之蕃之茂之菡。皆同胞兄弟也。長與季。才行夙成聲名籍甚。長公與退溪友善。頗有蓬麻之益。季公理學通達。學者稱爲土亭先生。兄弟俱解地理。及其母喪。長公謂其季曰韓山先墓山勢低微。嘗以卑濕爲慮。可於此時擇地移葬。遂遍踏湖右諸山。閱數月靡定。登洪州之烏鼠山。四望傍邑山形水勢。歎曰不料名山近在吾鄕。蓋公兄弟常往來保寧也因看焉。其地主山連亘十餘里。或聳或伏如馬奔馳。勢若走入海中。臨海卽止斗起千仞。又蜿蜒流注。結於野中。成一小岡。形如臥牛。前臨大洋浩渺無際。又有一島峯巒峭峻。正當其前。是名高巒也。或云前朝萬戶堡云。長公登眺欣然始定宅兆。暮宿山下漁村。翌朝主嫗問於長公曰客從何處來。夜夢有白髮老翁狀貌奇異。泣而言曰汝家來客。將奪吾家。長公聞而心竊喜之。謂必山靈也。將葬謂其弟土亭。葬後己亥年。吾兄弟皆得貴子。但汝子不淑。是可恨也。己亥長公果生男。卽鵝溪李相公山海。其仲氏又生判書山甫。土亭生男。聰明才藝絶卓其中。年纔二十而歿。其詩篇傳誦湖西。李相公德馨鵝溪之壻也。又信風水之說。一日余適往拜。相公方與相地僧聖智。同坐談山。余問曰地理渺茫何可信也。相公曰旣有天文豈無地理。但世無具眼特未知之耳。吾曾觀婦家先世高巒山論。數十年後其應如神。不可謂全無明驗也。世之崇信風水實權輿於李家矣。長公終於寺正。仲氏早世。季土亭卒官牙山縣監。

 

   우리 일가에 이공 지번(李公之蕃)ㆍ지무(之茂)ㆍ지함(之菡)은 모두 동복 형제간이었다. 맏이와 막내는 재주와 행실이 일찍이 뛰어났고 명성이 더욱 자자했다. 맏이는 퇴계와 가까이 사귀어서 자못 봉마(蓬麻)의 유익함이 있었고, 막내는 이학(理學)에 통달하여 학자들이 모두 그를 토정 선생(土亭先生)이라고 불렀다. 이들 형제는 모두 지리(地理)를 알았는데, 그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맏형이 그 막내아우에게 말하기를,

 

“한산(韓山)에 계신 선묘(先墓)는 산세가 낮고 미약해서 항상 비습(卑濕)한 것이 걱정되니 이번에 딴 곳을 골라서 옮겨 모시도록 하자.”

 

했다. 이리하여 형제는 호서(湖西)의 여러 산을 두루 돌아 보았는데, 여러 달이 지나도록 결정짓지 못하였다. 어느날 홍주(洪州) 오서산(烏鼠山)에 올라, 사방으로 근처 고을의 산 모양과 물 형세를 바라다 보고 탄식하기를,

 

“이런 명산이 우리 고을 가까이에 있는 줄을 몰랐구나.”

 

했다. 이는 공의 형제가 항상 보령(保寧)을 왕래했기 때문에 이곳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은 주산(主山)에서 10여 리를 뻗어 내리는 동안 혹은 우뚝 솟기도 하고 혹은 낮기도 하여 마치 말이 빨리 달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형세가 꼭 바닷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듯하다가 바다에 다다라서는 멈추어 천 길이나 되게 우뚝 솟았다. 또다시 산세는 구불구불 흘러 내려가다가 들 복판에서 맺혀져서 조그만 언덕을 이루어 모양이 마치 누워 있는 소와 같았다. 앞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서 넓게 끝이 없고 또 온 섬의 봉우리가 뾰죽뾰죽 바로 그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고만(高巒)이라고 부르는데, 혹은 고려 때 만호보(萬戶堡)라 불리기도 했다. 맏이가 여기에 올라가 보고 기뻐하여 비로소 묘자리를 정하고 저물어서 산밑에 있는 어촌에서 잤다. 그 이튿날 주인 할멈이 맏이에게 묻기를,

 

“손님은 어디서 오셨소? 어젯밤 꿈에 머리털이 하얀 늙은이가 모양도 기이하게 생겼는데 울면서 말하기를, ‘너희 집에 온 손이 장차 내 집을 뺏으려고 한다.’ 합디다.”

 

고 말했다. 맏이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필경 산신령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례를 모시려 할 때, 그 아우 토정에게 이르기를,

 

“장례를 모시고 난 뒤 기해년에는 우리 3형제가 모두 귀한 자식을 얻을 것인데 다만 너의 아들이 불행하겠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고 했다. 그 뒤 기해년에 맏이는 과연 아들을 낳았으니, 이 분이 바로 아계(鵝溪) 이 상공 산해(李相公山海)이고 그 가운데 분도 또 판서(判書) 산보(山甫)를 낳았다. 그리고 토정의 아들도 낳았는데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그 중에서도 뛰어났는데, 나이 겨우 2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편(詩篇)이 호서지방에서 전해지면서 외워지고 있다.

이 상공 덕형(李相公德馨)은 곧 아계(鵝溪)의 사위인데 그도 또 풍수설을 믿었다. 어느날 내가 마침 가서 뵈었더니, 상공(相公)은 바야흐로 지리를 잘 보는 승려 성지(聖智)와 함께 앉아서 산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묻기를,

 

“지리(地理)란 묘연한 것이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공은 말하기를,

 

“이미 천문(天文)이 있는데 어찌 지리가 없겠소? 다만 세상에 안목을 갖춘 지가 없어서 알지 못할 뿐이지요. 내가 일찍이 처가쪽 선대의 고만산론(高巒山論)을 보았는데 수십 년 뒤에 귀신같이 맞으니, 전혀 맞지 않는다고만 할 수는 없소.”

 

하였으니, 세상에서 풍수(風水)를 숭상하고 믿게 된 것은 실상 이씨(李氏)의 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맏이는 시정(寺正)의 벼슬을 하다 돌아갔고, 가운데 분은 일찍 돌아갔으며, 막내분 토정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관에서 돌아갔다.

 

 

 

李鵝溪山海始生。土亭聞啼聲。言於伯氏李正曰此兒奇異須善保養。吾門其自此復興乎。五歲始寫屛風。運筆如神。字畫宛如龍蛇騰走。目爲神童聲名藉藉。一時公卿無不來觀。嘗以墨汁塗足掌印於紙末。以表少兒之跡。人家至今傳玩。年十三魁忠淸右道鄕試。其賦乃滿招損也。辭意老成。識者已知其文章手段。年纔弱冠登第。久典文衡屢爲銓長。位至領議政。勳封府院君。有淸名。

 

아계 이산해가 처음 났을 적에 토정이 그 우는 소리를 듣고 그의 맏형 이시정(李寺正)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이하니 잘 기르도록 하십시오. 우리 집이 이제부터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했다. 다섯 살이 되자 처음 병풍 글씨를 쓰는데 붓 움직이는 것이 신과 같고 글자 획이 완연히 용과 뱀이 달려가는 것 같았으므로 신동이라고 명성이 자자하여 당시의 공경(公卿)들이 와서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먹물을 발바닥에 칠하고 종이 끝에 찍어 어린 아이의 발자국임을 표시했는데, 인가에서 지금도 전해오면서 보고 있다.

나이 13세에 충청우도(忠淸右道)의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뽑혔으니, 그때 지은 글이 〈만초손부(滿招損賦)〉였다. 글 뜻이 노숙해서 글을 아는 자는 이미 그 문장의 수단을 알 수 있었다. 나이 겨우 약관에 과거에 올라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고 여러 번 이조 판서가 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공훈으로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맑은 명성이 있었다.

 

 

余高祖議政公。嘗夢李良景公種善。來言曰吾家毀撤已久不庇風雨。在世惟公能造我家。公勿忘焉。高祖覺而怪訝。良景之宗孫乃韓城君李秩。故招來言以夢事。韓城曰燕山朝李贊成坡。以廢妃之故。身被極刑。良景以贊成之祖。夷其墳。而子孫微弱。且墓在韓山。故尙未改造必以此也。高祖尤驚異之。遂遣親子弟。而脩築墳塋。良景於議政公。高祖行也。其捐館。距其時已九十餘年。觀於此。人之精魄久而不泯。墳墓爲死者之宅明矣。爲子孫者。不可以遠祖而慢忽。墳墓崩頹亦不可不修築矣。良景公牧隱之子也。 高祖諱惟淸

 

   나의 고조 의정공(議政公)이 일찍이 꿈을 꾸니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이 와서 말하기를,

 

“내 집이 헐린 지 이미 오래되어서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 공만이 내 집을 지어줄 만하니 공은 잊지 말도록 하라.”

 

하므로, 고조는 놀라 깨어서 괴이하게 여겼다. 양경공의 종손은 한성군(韓城君) 이질(李秩)이었으므로 그를 불러다가 꿈 이야기를 했더니, 한성군이 말하기를,

 

연산조(燕山朝) 때 찬성(贊成) 이파(李坡)가 폐비 사건으로 극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양경공은 찬성의 조부이기 때문에 그 무덤을 헐어버렸으나 자손이 미약하고, 또 묘가 한산(韓山)에 있게 때문에 아직 고치지 못했으니 필경 이 때문일 것입니다.”

 

했다. 고조는 이 말을 듣고 더욱 이상히 여겨 드디어 친 자제들을 보내어 봉분을 고쳐 쌓았다. 양경공은 의정공에게 고조 항렬이 되니, 그가 돌아간 지가 그때 이미 90여 년이 되었다. 이런 일로 보면 사람의 정백(精魄)이 오래 되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과 또 무덤은 죽은 사람의 집이 되는 것이 분명하니, 자손된 자는 먼 조상이라고 해서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요, 무덤이 무너진 것도 고쳐 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양경공 목은(牧隱)의 아들이다. 내 고조의 휘는 유청(惟淸)이다.

 

 

我國陰陽皆主五行。其來久矣。子平始於金司諫泂。星曜始於庶孼宋祀連。泂取友。必以命途通顯者加厚。人以此物色其窮達。嘗以事繫獄援引李芑。芑憤詈泂曰汝何以援我。泂曰我以無妄被囚。到此窮極百思無計。吾儕友中。推汝命最好。必爲政丞久享富貴。欲賴汝洪福。是以援引矣。芑反大喜。果蒙全釋。宋祀連以安政丞瑭門孼。出入其家最親。祀連知安門必敗渠運方通。遂取政丞夫人之喪弔客冊。指爲逆黨詣闕上變。安家四父子一時被誅。祀連以告變陞堂上。食祿四十餘年老死牖下。後雖安氏子孫。堀墓鞭屍。無補於當時赤族之禍矣。世之好卜者。亦可以知戒矣。

 

우리 나라 음양(陰陽)은 모두 오행(五行)을 주장하여 온 지가 오래되었다. 자평(子平)사간(司諫) 김형(金泂)에게서 시작되었고 성요(星曜)는 서얼(庶孼)인 송사련(宋祀連)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형은 친구를 사귀는데 반드시 그 명도(命途)가 통달하게 될 것을 물색하였다. 그는 한 번은 무슨 일로 해서 옥에 갇히었는데, 이기(李芑)를 끌고 들어갔다. 그러자 기는 분하게 여겨 김형을 꾸짖기를,

 

“네가 어찌해서 나를 끌어댔느냐?”

 

하니, 김형이 말하기를,

 

“내가 잘못한 일도 없이 잡혀왔는데, 이러한 몹시 궁한 때를 당하여 백 가지로 생각하나 계교가 없어, 우리 친구들 중의 명수(命數)를 점쳐보니, 네가 가장 좋아서 반드시 정승이 되어 오랫동안 부귀를 누리겠기에, 너의 큰 복을 힘입으려고 끌어넣은 것이다.”

 

하였다. 이기는 도리어 크게 기뻐하더니 과연 모두 석방되었다.

송사련은 정승 안당(安瑭) 서매(庶妹)소생이므로 안씨의 집에 출입하고 가장 친하게 지냈다. 송사련은 안씨의 집이 반드시 망하고 자기 운수는 바야흐로 형통할 것을 알고, 드디어 안정승의 부인 초상 대 조객록(弔客錄)을 가져다가 역당(逆黨)이라고 지목하여 대궐에 들어가 고변(告變)했다. 이리하여 안씨의 집 4부자는 일시에 죽음을 당하고 송사련은 고변한 공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올라 나라의 녹(祿)을 40여 년간 먹다가 늙어서 자기 집에서 죽었다. 그 뒤에 비록 안씨 자손들이 그의 무덤을 파고 시체에 매질을 했지만, 당시에 일족(一族)이 모두 죽은 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상의 점 잘 치는 자도 또한 경계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萬曆辛卯。設耆老宴於掌樂院。政院以祖宗朝故事援例入啓。特賜一等妓樂。遣中使承旨宣醞。時則金政丞貴榮沈政丞守慶姜知事暹宋同知贊睦右尹詹李大成墍。余聘君申參判湛。預會作軸侈慶。沈相題詩。聘君常言。耆老宴乃東方盛擧。器具饌品無與爲比。余曾聞之矣。後二十五年乙卯。又設耆老宴於掌樂院。賜樂宣醞一如故事。余以都承旨。與中使承命往參。時則領議政奇自獻。以時相押宴。非耆老也。韓判樞孝純盧判樞稷尹參贊承吉李判書準李知事時彥在坐。帟幕屛簇之具燈燭綵花之盛。妓樂之張饌品之豐。眩曜人目。殆非人世事也。諸老皆累朝耆老。蒼顏白髮。犀金輝映。簪花厭帽。酒闌相與翩躚起舞。聲樂轟天。臨罷子弟扶醉。蓮炬導前。歌管擁後。觀者嘖嘖皆謂神仙。又後二十歲乙亥。余以官忝一品。年且到希。得參斯會。平生夢寐之所不到。不勝瞿然。時則鄭政丞昌衍年八十五。吳政丞允謙年七十七。李政丞廷龜年七十二。尹政丞昉年七十三。金政丞尙容年七十五。鄭判樞光績年八十六。李判書弘胄。朴判書鼎賢。朴參贊東善年皆七十四。李同知尙吉以年八十陞資。余年七十。是歲吳李兩相捐館。翌年丙子李韓平君慶全年七十。宋同知馹以年八十一陞資亦參。幷十一員。古未嘗有也。平時則從二品文宰皆參。而恒未滿七八人。亂後以正二品文宰得參。而每至十餘員。抑平時宰秩之稀貴耶。亂後人多享壽而然耶。未可知也。然亦豈非一代之盛事也哉。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 24)장악원(掌樂院)에서 기로연(耆老宴)을 열었다. 이때 정원(政院)에서는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가 있다 하여 예에 의하여 상께 아뢰어서 특별히 1등 기악(妓樂)을 내리도록 했다. 이에 중사승지(中使承旨)를 시켜 술을 내렸다. 이때 정승 김귀영(金貴榮)ㆍ정승 심수경(沈守慶)ㆍ지사(知事) 강섬(姜暹)ㆍ동지 송찬(宋贊)ㆍ우윤 목첨(睦詹)ㆍ대사성 이기(李墍)와 우리 장인 참판 신담(申湛)이 미리 모여서 시축(詩軸)을 만들어 경사를 도왔고 심정승이 시를 썼다. 장인이 항상 말하기를,

 

“기로연(耆老宴)이란 우리 동방의 성대한 행사로서 그 기구나 음식이 여기에 비교할 것이 없다.”

 

고 하는 것을 내가 일찍이 들은 바 있었다.

 

그 뒤 25년 만인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또 장악원에서 기로연을 열었는데, 역시 기악(妓樂)과 술을 내리기를 한결같이 고사에 의하여 했다. 나는 이때 도승지로서 중사(中使)와 함께 명령을 받고 가서 참여했었다. 이때에는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당시 정승으로서 잔치를 주재했으나 그는 기로(耆老)가 아니었다. 판추 한효순(韓孝純)ㆍ판추 노직(盧稷)ㆍ참찬 윤승길(尹承吉)ㆍ판서 이준(李準)ㆍ지사 이시언(李時彦)이 자리에 있었다. 휘장과 장막ㆍ병풍ㆍ족자 같은 기구나, 등촉(燈燭)과 채화(綵花) 따위의 화려한 것이나, 기악(妓樂)이 차려진 것이나, 음식의 풍부한 것이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여 자못 이 인간 세상의 일 같지가 않았다. 모든 노인들은 모두 여러 조정의 기로들로서, 쇠한 얼굴에 센 머리털을 날리고 서대(犀帶)와 금대(金帶)가 휘황하게 빛나고 머리에 꽂은 꽃은 모자를 눌렀는데, 술이 얼큰하자 서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니 음악 소리가 하늘에 울렸다. 잔치가 파하자 자제들이 부축해서 돌아가는데 연거(蓮炬)로서 앞을 인도하고, 노래와 관악이 뒤를 옹위하고 갔다. 이것을 보는 자는 칭찬해 마지 않으면서 모두 신선이라고 일컬었다.그 뒤 20년인 을해년(1635, 인조 13)에 나는 벼슬이 1품에 오르고 나이도 도한 70에 이르러서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평생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것이라서 놀라움을 이기지 못했다. 이때에 정승 정창연(鄭昌衍)은 나이 85세이고 정승 오윤겸(吳允謙)은 77세, 정승 이정귀(李廷龜)는 72세, 정승 윤방(尹昉)은 73세, 정승 김상용(金尙容)은 75세, 판중추부사 정광적(鄭光績)은 86세, 판서 이홍주(李弘冑)ㆍ판서 박정현(朴鼎賢)ㆍ참찬 박동선(朴東善)은 모두 74세였고, 동지 이상길(李尙吉)은 나이 80에 가자(加資)되고 나는 나이 70이었다. 이해에 오윤겸ㆍ이정거 두 정승은 돌아갔으나 이듬해 병자년에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은 나이 70, 동지 송일(宋馹)은 나이 81로서 가자되어 역시 여기에 참여하여 도합 11명이었으니, 옛날에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평시에는 종2품의 문관 재상이 모두 참석해도 항상 7ㆍ8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난리 후로는 정2품 문관 재상만 참석하게 했는데도 항상 10여 명이 되었으니, 평시에는 재상의 직급이 드물었단 말인가. 아니면 난리 후에 오래 사는 이가 많아서 그런 것인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어찌 일대의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朴參判彝敍字錫吾。忠厚善良。篤於朋友。與余最親。己未冬余以黃海監司遞來。翌日早朝錫吾來見。坐語良久。適盲人池億千又來。錫吾曰此盲善卜。欲見久矣。以小紙書給五條曰令須問之。余略敍寒暄。卽以錫吾五條問之。池肓曰來辛酉年不吉。余又問曰所謂不吉乃尋常厄患耶。池盲曰以卜書推之似是大厄。余甚無聊。錫吾察余色辭。始親問曰此吾命也。辛酉當有死亡之患耶。池盲素老神。旋答曰更思之。辛酉有吉星來救。當有膝下之痛。七十五六歲運盡云云。錫吾更不問而起去。余又問之。則曰辛酉必有橫死之厄。似難免矣。錫吾果於庚申秋赴京。以奴胡陷遼路梗。由水路出來。辛酉五月。渰海而沒。池盲之言果驗矣。後甲子余以奏請使由水路赴京。祭錫吾於海邊。乙丑四月竣事回到登州。登船之夜夢錫吾以壺酒來餞。慇懃敍話宛如平日。覺來不勝感愴。舟行六日少無風波之險。來泊我國地方。豈非錫吾之靈默佑而然也。平生相厚之義無間幽明。嗚呼悲哉。錫吾弱冠登第。官至吏曹參判。方有重望。人皆以公輔期之。至於渰死。不幸之尤甚。而以錫吾之賢。而乃至於此。豈非命也。嗚呼悲哉。其胤今爲參判。良可慰也。

 

   참판 박이서(朴彝敍)의 자는 석오(錫吾)로, 충후하고 선량하고 친구와 독실히 지냈는데 나와 가장 친하였다. 기미년(1619, 광해군 11) 겨울에 내가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있다가 벼슬이 바뀌어 돌아오니, 그 이튿날 석오가 찾아왔다. 그와 한참 동안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마침 맹인 지억천(池億千)이 또 왔다. 석오는 말하기를,

 

“이 맹인이 점을 잘 친다기에 내가 보고자 한 지가 오래일세.”

 

하고는, 조그만 종이에 다섯 가지 조목을 써서 주면서 나더러 물어 보라는 것이다. 나는 대강 인사를 끝내고 나서 곧 석오가 써 준 다섯 가지 조목을 물어보니, 지맹인(池盲人)은 말하기를,

 

“오는 신유년이 불길합니다.”

 

했다. 나는 또 묻기를,

 

“소위 불길하다는 것은 심상한 액환(厄患)인가?”

 

했더니, 지맹인은,

 

“점괘로 보면 큰 화액일 듯합니다.”

 

했다. 나는 듣고 몹시 무료했다. 석오는 나의 얼굴빛을 살펴보더니 비로소 자기가 친히 묻기를,

 

“이것은 바로 나의 운수요. 그런데 신유년에는 마땅히 죽을 운수란 말이요?”

 

하니, 지맹인은 본래 노신(老神)한 사람이라, 얼른 대답하기를,

 

“다시 생각해 보니 신유년에는 길성(吉星)이 구해주어서 슬하에 슬픈 일이 있겠고 75ㆍ76세에 명이 다하겠습니다……”

 

했다. 석오는 다시 더 묻지 않고 일어나 가버렸다. 그가 간 뒤에 내가 또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신유년에 반드시 횡사할 액운이 있는데, 아마 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석오는 과연 경신년 가을에 중국 서울에 가는데, 오랑캐가 요동(遼東) 길을 막는 바람에 수로로 가다가, 신유년 5월에 바다에 빠져서 죽었으니, 지맹인의 말이 과연 맞았다. 그 뒤 갑자년, 내가 주청사(奏請使)로서 수로로 중국 서울을 가다가 바닷가에서 석오를 제사지냈다. 을축년에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 등주(登州)에 이르러 배를 탔는데, 그날밤 꿈에 석오가 술병을 가지고 와서 나를 전송하면서, 은근히 정회를 말하는 것이 완전히 평시와 같았다. 꿈에서 깨고 나니 서글픔을 이기지 못했다. 배를 타고 6일 동안이나 오는데, 조금도 풍파가 없이 편하게 우리 나라 땅에 닿았으니, 어찌 이것이 석오의 영혼이 도와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평생에 서로 좋게 지내던 의리가 이승과 저승의 간격이 없었으니, 아! 슬픈 일이다. 석오는 나이 15세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고 바야흐로 중한 인망(人望)이 있어 남들이 모두 공보(公輔)의 자격으로 기약했는데, 물에 빠져 죽는 데 이르렀으니, 이보다 불행한 일이 있겠는가. 석오의 어진 인품으로도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아! 슬픈 일이다. 그 아들 박노(朴魯)가 지금 참판이 되었으니 진실로 위로가 된다.

 

 

 

河景淸系出寒微。性堅悍尙氣。遇事果敢。不避人言。與故佐郞宋耇爲洞中童稚友。宋公之祖爲安州牧使。景淸隨往宋耇。因讀書寧邊山寺。寺本關西巨刹。居僧最多。寧邊有鄕吏。財累鉅萬而無子。大設無遮會冀生男子。道內僧尼傍邑男女。聞風爭赴塡咽不絶。將事之前夕盛陳諸具。景淸時以總角隱於佛榻之下。夜深人絶。景淸持刀潛入。剝割佛面剔出眼睛。晏然歸臥。雖宋耇亦不之知也。夜旣向半。施主及諸僧。沐浴更衣奔走執事。鍾響梵音聲震山谷。燈燭輝煌炯如白晝。仰見佛像。剝破無形。耳目口鼻渾成一穴。兀然空立乃一土塊也。羣髡相顧大驚。至有垂涕者。施主夫妻失聲痛哭。罔知攸措。老僧相謂曰。此乃山門大變。是佛必變化而然也。雖然施主許多財物空費可惜。遂撤去舊佛。易置他佛而設行。景淸與宋耇。同處安州十有餘朔。一不開口。到京始言。其隱忍如此。景淸受業於朴訓導洲。笏面大書顧諟天之明命。韋帶革囊張拱奉笏。繩趨尺步行過巿里。人皆聚觀。羣兒指笑。恬不動色。終日掩戶讀書不輟。中乙酉司馬。景淸氣質强確。又能耐久。篤志力學。人皆以遠大期之。亂離爲關西訓導。縱酒喜色遂至蕩佚。盡棄舊學。業武登科。官至碧團僉使。罷官流寓於安州地。所居草廠失火燒死。余與景淸。同居比隣。自少相切。不幸抱才不售。死於非命。可勝惜哉。或者以不得令終。爲毀佛之報云。豈其然乎。未可知也。

 

   하경청(河景淸)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성질이 굳고 기개를 숭상하여 일을 당하면 과감하고 남의 말을 피하지 않았다. 고 좌랑 송구(宋耈)와 한 동네에서 어린시절부터 친구였는데, 송공(宋公)의 조부가 안주 목사(安州牧使)가 되었을 때 하경청은 송구를 따라서 영변(寧邊)에 있는 절로 글을 읽으러 갔다. 이 절은 원래 관서(關西)의 거찰(巨刹)이어서 중이 가장 많이 있었다. 영변에 향리(鄕吏) 하나가 있는데 재산은 수 만금이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크게 무차회(無遮會)를 열고 아들 낳기를 빌었다. 이때 도내의 중들이나 이웃 고을의 남녀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어서 많은 사람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 법회가 있던 전날 밤 모든 제구를 성하게 갖추어 놓았는데, 하경청은 이때 총각으로 불탑(佛榻) 밑에 숨어 있었다. 밤이 깊고 인적은 끊어지자, 하경청은 칼을 가지고 숨어 들어가서 부처의 얼굴을 긁고 눈동자를 빼낸 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 누웠다. 송구로서도 역시 이것은 알 리가 없었다. 밤중이 되자, 시주하는 사람과 모든 중들은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고서 일을 보느라고 분주했다. 종소리와 범패(梵唄) 소리는 산골짜기를 진동하고 등촉(燈燭)은 휘황하여 대낮과 같았다. 그러나 불상을 우러러 보니 얼굴이 망가져 형용이 없고 이목구비는 다 한 구멍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는데, 한 덩어리 흙이었다. 모든 중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크게 놀라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시주한 사람의 내외는 목을 놓아 통곡하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늙은 중은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절의 큰 변이다. 이것은 부처가 필경 변화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했다. 비록 그러나 시주한 사람은 허다한 재물을 헛되이 소비한 것이 아까워서 드디어 옛 부처를 철거한 다음, 딴 부처와 바꾸어 놓고 무차회를 열었다. 하경청송구와 10여 개월을 안주(安州)에 함께 있었지만, 한번도 입을 열지 않다가 서울에 이르러 비로소 말을 했으니, 그 참고 견디는 것이 이와 같았다.

하경청은 훈도(訓導) 박주(朴洲)에게 공부를 했다. 홀(笏)의 표면에 큰 글씨로 고시천지명명(顧諟天之明命)이라고 쓴 다음, 가죽 띠와 가죽 주머니에 팔짱을 펴서 홀을 받들고 조심조심 걸어서 저자 거리로 지나가니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구경했고, 여러 아이들은 손으로 가리키면서 웃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얼굴빛을 변치 않고 종일토록 문을 닫고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을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하경청은 기질이 굳세고 또 참을성이 있었으며 뜻을 독실하게 갖고 힘써 배웠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원대한 희망이 있다고 기대했다. 난리 때에 관서훈도(關西訓導)가 되었으나 술을 많이 마시고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드디어 방탕하고 말았다. 그래서 전에 배우던 것을 모두 버리고 무관(武官)의 일을 익혀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벽단 첨사(碧團僉使)에 이르렀다. 그러나 파직당하고 안주(安州) 땅으로 가서 붙어 살더니 그 집의 풀가리에 불이 나서 타죽었다.

나는 하경청과 함께 이웃하여 살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그는 불행히 재주를 가지고도 쓰이지 못하고 비명에 죽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그가 제명에 죽지 못한 것은 부처를 헌 응보이다.”

 

고 하지만, 어찌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國朝賢臣碩輔道德名儒。代不乏人。此所以文治似優於麗朝。武略不及於三國遠矣。將帥則元無著者。其中金宗瑞之開拓六鎭。尹弼商之駈逐建幾足以揚國威靈。而比諸古之名將。此特兒戱耳。但二人皆英傑。易地則其功業未可量也。權慄之幸州大捷。李舜臣之閑山鏖戰。功冠當時。實爲中興根柢。垂諸靑史。無愧古人。郭再右奮義起兵坐守嶺南。洪季男獨提孤軍保全湖右。其功不細。此外雖有伐叛討逆功存社稷者。皆是域中之事。不可混議於將帥之列矣。余嘗與張玉城晩。語及我國名將。張公曰二百年來未曾有能禦大敵者。蓋國家不知儲養將才之道。當此危亂武人之資級。不以戰功陞遷。而其剝割軍民措備兵粮者。超資越級。及其爵秩尊貴。志欲已滿。則顧惜身命之外他何可望。目今國勢日弱。將帥無人。職此之由也。張公乃元勳宿將必有高識。其言豈偶然哉。

 

    국조(國朝)에는 보필을 잘한 어진 신하와 도덕이 있는 선비들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문치(文治)는 고려조보다 나았던 것 같으나, 무략(武略)은 삼국시대만 훨씬 못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장수는 원래 이름난 사람이 없는데, 그 중에 김종서(金宗瑞)가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윤필상(尹弼商)이 건주위(建州衛)를 몰아낸 일이 족히 국위를 드날렸다고 하겠으나 이것도 옛날의 명장에 비교한다면 어린 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은 모두 영결들이니 처지를 바꾸어 태어났다면 그 공업을 측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크게 이긴 것이나,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에서 힘껏 싸운 것은 당시에 그 공이 으뜸으로서 실로 중흥의 근본이 되었으니, 이름이 청사(靑史)에 드리워도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곽재우(郭再祐)는 의리에 분발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영남(嶺南)을 지켰고, 홍계남(洪季男)은 혼자서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호서(湖西)를 보전했으니, 그 공이 적지 않다. 이 밖에도 비록 반군을 치고 역적을 토벌해서 국가에 공이 있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모두 지역 안의 일들이므로 장수의 반열에 놓고 함께 의논할 수가 없다. 내가 일찍이 옥성(玉城) 장만(張晩)과 함께 우리나라 명장을 이야기 했는데, 장공이 말하기를,

 

“2백 년 이래로 일찍이 큰 적을 막아낸 자가 없다. 이것은 대개 국가에서 장수 재목을 기르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태하고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 무관(武官)의 자급을 전쟁으로 인한 공로로 따져서 올려 주지 않고, 군민(軍民)을 못살게 굴면서까지 군량을 모아 저축한 자를 등급을 뛰어넘어 가자시키니, 마침내 벼슬과 자급이 높아져서 뜻과 욕심이 이미 만족하고 보면, 자기 몸과 목숨을 돌아다 보고 아끼는 이외에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지금 나라의 형세가 날로 약해지건만 장수의 적격자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했다. 장공은 원훈(元勳)의 늙은 장수이니 반드시 높은 식견이 있을 것이니, 그 말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前輩文章。非文章之士。則不敢尙論雅矣。余以新及第投刺崔簡易岦。簡易曰牧隱子孫文官繼出。其遺風餘韻尙有存者。雖後裔末葉。血脈流通。甚可異也。近觀牧隱文集碑銘墓誌。冠絶古今。東國文章當以牧隱爲首。爲子孫者。何必費功於韓柳。讀牧隱集可也。其推仰之意敻出尋常。其子東望在傍曰。李相國文章與牧隱孰愈。簡易曰湖陰常言。李奎報祖江賦最勝。然何能當牧隱哉。慵齋成公俔。亦以牧隱爲首。及余入玉堂。宣宗大王學問高明。臨筵有問多不能對。尋常惶恐。周易大學衍義等書。時方進講其未解處付標。每質疑於尹海平根壽。海平曰聞君家有牧隱全集。未可借我暫見耶。卽覓送後。又就問周易。海平曰許天使國。求觀我國文集。奇高峯大升。以李相國牧隱佔畢四佳等集投進。許天使遍閱諸集卽爲捲退。獨取牧隱集吟咏不釋。請於遠接使臨還賫去。及歸中國。因通使洪純彥。又請累秩。是知牧隱文章爲東方巨擘云。頃年倭使玄方之來。亦請牧隱集而去。倭國亦知文章之高妙而然耶。抑曾聞中國文人之言。而求索耶。未可知也。黃洪憲天使時。宣祖於經筵。問東國文章何人爲首。蘇齋栗谷皆以牧隱爲對云

 

   전배들의 문장은 실로 문장을 하는 선비가 아니고서는 본래 이것을 감히 의논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새로 과거에 급제하여 간이(簡易) 최립(崔岦)에게 인사를 갔더니, 간이는 말하기를,

 

목은의 자손은 문관이 연이어 나와서 그 유풍 여운(遺風餘韻)이 오히려 남아 있다. 그리하여 비록 그 자손의 말엽(末葉)까지도 혈맥이 흘러내리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요새 《목은문집(牧隱文集)》 중의 비명(碑銘)과 묘지(墓誌)를 보면 고금에 뛰어나니, 우리나라 문장은 마땅히 목은으로 첫째를 삼아야 할 것이다. 그 자손된 자들은 하필 중국의 한유(韓愈)의 문장이나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읽느라고 공력을 허비해야 하겠는가. 《목은집(牧隱集)》을 읽는 것이 좋다.”

 

했다. 그가 목은을 추앙하는 뜻이 보통과는 아주 다르니, 그 아들 동망(東望)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이상국(李相國)의 문장은 목은과 더불어 어느 쪽이 낫습니까?”

 

하자, 간이는 말하기를,

 

호음(湖陰)이 항상 말하기를, ‘이규보의 〈조강부(祖江賦)〉가 가장 좋다.’고 했지만 어지 목은을 당하겠느냐?”

 

하였다.

 

 

 

 余先祖稼亭母夫人。元封遼陽縣君。墓在韓山。世傳高僧無學所觀。地理頗勝。後裔有無識者。嘗聞韓山李姓世多名公鉅卿。實由此墳發福。其父死。穿其墓傍而入葬。宛若雙墳。觀者駭異。當其破土之日。香爐忽躍浮空。其高數丈。擲倒於十步之外。役夫猶且悚懼。其人頑然不動。及其題主。鴟又攫筆而飛去。會葬諸人莫不驚愕。其人始大恐。三年之內兄弟繼殞。至今子孫死亡殆盡。在京子孫後乃聞知。欲呈狀發掘。其人衰服遠來。自陳妄作。卽欲遷葬。而措備棺灰綿力未及。哭泣哀乞姑緩遷期。京族果信其言。亦憐窮迫。遷延未果矣。今按益齋所撰墓誌。夫人卒逝距今三百餘年。而精靈未泯。驚動禍福若是其昭著。其他冥佑之事推此可知矣。地理之說不可謂茫昧無稽也。且地家有云。葬近祖傍殃及子孫者。觀此益驗。不可不愼也。

 

  내 선조 가정(稼亭)어머님은, 원(元)에서 요양현군(遼陽縣君)에 봉해졌는데, 묘가 한산(韓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승 무학(無學)이 본자리로서 지리(地理)가 꽤 좋다.’고 했다. 후손 중에 무식한 자 하나가, 일찍이 한산 이씨(韓山李氏)가 대대로 명공 거경(名公鉅卿)이 많은 것은 실로 이 무덤이 복을 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듣고서, 그 아비가 죽자 그 묘 곁을 파고 장사를 지내서 완연히 쌍분(雙墳)처럼 되니, 보는 자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파토(破土)하던 날에 향로(香爐)가 갑자기 뛰어 하늘로 높이 두어 길이나 뜨다가 무덤 10보 밖에 떨어지니 일하던 사람들도 모두 송구하게 여겼는데, 그 사람은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제주(題主)할 때에 또 솔개가 붓을 빼앗아 물고 날아가니 장례에 참례한 사람들이 모두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제야 그 사람도 비로소 크게 두려워했는데, 3년 안에 형제가 계속하여 죽고 지금에도 그 자손들은 거의 죽어 없어졌다. 서울에 살던 부인의 자손들이 뒤에서야 이 사실을 들어 알고서 관청에 글을 올려 묘를 파려고 하자, 그 사람이 최복(衰服)을 입고 멀리 와서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말하고, 곧 옮겨 장사지내려 하는데, 관(棺)이나 석회를 준비하기에 힘이 겨워 아직 못하고 있으니 기일을 늦추어 달라고 울며 애걸했다. 서울 일가들은 그 사람의 말을 믿고, 또한 그가 궁박한 것을 불쌍히 여겨 날짜를 연기해주고 일을 끝내지 못했다. 지금 익재(益齋)가 지은 묘지(墓誌)를 보면, 부인이 졸(卒)하신 지가 지금 3백여 년이 되었는데도 그 정령(精靈)이 없어지지 않아 경동시키고 화복을 내리는 것이 이처럼 현저하니, 그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 주는 일들은 이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지리설(地理說)은 허망하여 믿을 수 없다고만은 할 수가 없다. 또 지가(地家)의 말에,​

 

“가까운 조상의 곁에 장사지내면 재앙이 자손에게 미친다.”

 

했는데, 그 말이 이 일을 보면 더욱 맞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余爲全羅監司。巡到潭陽。時府使今判樞鄭公光績。謂余曰本府十里外。有故判書宋公亭子。號爲俛仰。景致頗勝。幸襜帷暫臨。以辦淸遊。翌日鄭公先往候焉。余亦繼至。亭臨絶岸隱映於蒼松翠竹之間。眼界曠遠。山川風景果爲道內名區。余與府伯登臨設酌。帶月而還。宋公諱純。風流豪邁爲一代名卿。所著無等諸曲至今傳唱。辭甚淸婉。弱冠登第歷敭淸顯。年至引退。優遊桑梓。享淸福者垂二十載。年八十九而卒。登第周甲之日。監司宋公麟壽。爲製賜花大設慶席。妓樂倡優百戱俱呈。酒闌坐客勸一揷花。以侈餘慶。白髮蒼顏頭戴賜花。嘆曰不料今日復行少年時事。因泫然泣下。滿座感泣觀者嘖嘖。至今一道以爲盛事。且公生存時言于子孫曰吾百年後。每年秋夕必有此亭設祭。子孫奉行。壬辰兵火鞠爲灰燼。尹公孝全爲府使。登眺古址瓦礫崩堆。愴然謂宋家子孫曰天作勝地。不可久使荒廢。我當助費。諸君協力亟建斯亭。及其農歇。尹公備給材瓦調發役夫。翼然飛閣不日重建。亭旣成適當秋夕。復設祭於亭上。隣人夢宋公乘藍輿向亭。宛若平日云。豈不異哉。

 

  내가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되어서 담양(潭陽)에 순찰차 갔었다. 이때 부사(府使)였던 지금의 판중추부사 정공 광적(鄭公光績)이 나에게 이르기를,

 

“본부(本府) 10리 밖에, 고인이 된 판서 송공(宋公)의 정자가 있는데 정자 이름은 면앙(俛仰)이라고 합니다. 경치가 자못 뛰어나니 행차를 잠시 멈추신다면 맑은 놀이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했다. 이튿날 정공(鄭公)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나도 뒤이어 그곳에 도착했다. 정자는 절벽에 임해 있는데, 푸른 소나무와 대숲 사이로 은은히 보이며, 안계(眼界)가 넓고 멀어서 산천의 풍경이 과연 도내에서 명승지로 꼽힐만 하였다. 나는 부사(府使)와 함께 여기에 올라 술자리를 베풀고 놀다가 달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송공의 휘는 순(純)으로서 풍류가 호매(毫邁)하여 한 시대의 명경(名卿)이었다. 그가 지은 〈무등제곡(無等諸曲)〉은 지금까지 전해지며 불리고 있는데, 가사가 몹시 청완(淸婉)하다. 약관에 과거에 올라 여러 청현(淸顯)의 벼슬을 거치다가, 나이가 많아지자 이를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한가히 지냈다. 맑은 복을 누린 지가 20년이 되었고 나이 89세에 졸했다. 과거에 급제한 지 주갑(周甲)이 되던 날, 감사 송공 인수(宋公麟壽)가 그를 위하여 어사화(御賜花)를 만들어 크게 경하하는 자리를 베풀고 기악(妓樂)과 창우(倡優) 등 온갖 놀이를 모두 올렸다. 술이 취하자 좌중의 손들이 고에게 어사화를 한 번 꽂아 남은 경사를 장식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공은 흰 머리 쇠한 얼굴로 머리에 어사화를 이고서 탄식하기를,

 

“오늘날 다시 소년 시절의 일을 해볼 줄 누가 알았으랴?”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자리에 가득하던 손들이 모두 감격해서 울고, 보는 이들은 모두 크게 칭찬하였다. 지금까지도 이 일을 한 도(道)의 성사(盛事)로 친다.

또 공은 살아 있을 때 그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해마다 추석에는 반드시 이 정자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하여, 자손들이 이를 받들어 행했는데, 임진년 난리에 불에 타서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윤공 효전(尹公孝全)이 부사(府使)가 되어, 그 옛터에 올라가 기왓장이 무너져 쌓여 있음을 보고, 슬픈 빛으로 송씨 집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하늘이 준 승지(勝地)를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둘 수가 없다. 여러분들은 힘을 합하여 급히 이 정자를 세우도록 하라.”

 

했다. 농사철이 지나자, 윤공은 재목과 기와를 마련해 주고 인부까지 내어주어 날라갈 듯한 정자가 며칠이 되지 않아 다시 세워졌다. 정자가 이미 준공되니, 마침 추석이어서 다시 정자 위에 제사를 지냈다.

그 이웃에 사는 사람이 꿈을 꾸니, ‘송공이 남여(藍輿)를 타고 정자로 향해 가는 것이 완연히 평시와 같았다.’고 하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洪判書可臣爲扶餘縣監時。始建書院。以百濟忠臣成忠階伯興首。高麗正言李存吾爲奉安。將祭之夜。洪公夢四人來致謝意。頗有感喜之色。覺來異之。有書生姓金者。以執事宿於齋舍。是夜又夢四人相繼入門。揖讓升堂。此事西厓柳相公書院記。詳言之。院號義烈。至今爲一鄕士子藏修之地。成忠諸人事在三國。距今千有餘載。李公存吾亦過二百年所。而精靈感應。所謂如水在地者不虛矣

 

   판서 홍가신(洪可臣)이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서원(書院)을 세워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ㆍ계백(階伯)ㆍ흥수(興首)와 고려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 등을 여기에 봉안했다. 제사 지내는 날 밤에 홍공(洪公)이 꿈을 꾸니, 이들 네 사람이 와서 감사한 뜻을 표하면서 자못 감격하고 기뻐하는 빛이 있어 보이므로, 꿈에서 깨자 이상히 여겼다. 그리고 김(金)씨 성을 가진 서생(書生)이 집사(執事)로서 재사(齋舍)에서 자는데, 이날 밤에 또 꿈에 네 사람이 서로 계속해 문으로 들어오더니 읍양(揖讓)을 하고 마루로 올라갔다 한다. 이 일은 서애(西厓) 유상공(柳相公)〈서원기(書院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서원(書院)의 이름은 의열(義烈)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온 시골 선비들의 공부하는 곳이 되고 있다. 성충(成忠) 등의 일은 삼국 시절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이나 되었으며, 이공 존오(李公存吾)도 역시 2백 년이나 지났는데, 그 정령(精靈)이 감응을 하니, 이른바 ‘물이 땅에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다.​

 

 

余避亂流寓於鎭安。乃亂山長谷之中村落稀少。比隣有老翁生於弘治丁巳。是歲癸巳年九十有七。有子一人老除校生者。年七十三。父子同居。孫男四人與一奴一婢。力田僅繼朝夕。白髮兩老。每於樹陰之下對坐博奕。觀者以爲畫圖中人。一鄕以父子年高家行純備。陳狀于縣官復其戶役。其父尤爲精强聰明不衰。但食噎不下。日三食粥能盡一椀。余聞而奇之。一日往見。起居便健。眉毛甚長。眼光炯炯。容貌淸癯。英彩尙存。實非塵土間人。眞所謂地上仙也。余不勝驚嘆。仍問翁曰能記少時事乎。翁發言隨答。語音琅鏘。少無艱澁。因言我年七歲屬于軍保。十三始上番京中。時燕山荒淫。日事遊觀。仰觀天顏。潔白少髥。身長而眼有赤暈。其行幸箭橋也。我以役軍隨往。設木柵於華陽亭前。各邑預置雌馬數百頭於柵內。及其御坐。群妓滿前。却退侍臣。馬官駈入雄馬數百於是柵。以觀交接。羣馬踶嚙相逐。聲震山谷。其秋反正云。

 

   내가 난리를 피해서 진안(鎭安) 에 가서 임시로 있었다. 이곳은 험준한 산과 기다란 골짜기 속이라서 촌락이 드물었다. 이웃에 늙은이 하나가 있는데 그는 홍치(弘治) 정사년(1497, 연산군 3)에 났으니 이해가 계사년(1593, 선조 26)이고 보면 나이가 97세였으며, 아들 하나가 있어 늘그막에 교생(校生)을 제수받았는데, 그 나이는 73세였다. 이들 부자가 한집에서 사는데, 손자 넷, 남자 종 하나, 계집 종 하나와 함께 힘써 농사지어서 겨우 조석을 이어 가고 있었다. 머리가 하얀 두 늙은이가 항상 나무 그늘 밑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니 보는 사람들은 그들을 그림 속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온 고을 사람들이 그들 부자가 나이가 많고 집안의 행실이 순수하게 갖추어졌다 하여 현관(縣官)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여 부역을 면하게 했다. 그 아비는 더욱 건강하고 총명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는데, 다만 음식이 잘 소화되지 않아서 하루 세 끼 죽 한 사발씩을 다 먹는다. 나는 이 소문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어느날 가서 보았더니, 기거 동작이 강건하고 눈썹이 몹시 길고 눈빛이 빛났으며, 용모는 맑고 파리했지만 영특한 풍채가 오히려 남아 있었으니, 실로 속세의 사람의 아니요, 참으로 이른바 지상선(地上仙)이었다. 나는 놀랍고도 감탄해 마지않으며 그 늙은이에게 묻기를,늙은이에게 묻기를,

 

“젊은 시절의 일을 기억할 수 있소?”

 

하니, 늙은이는 입을 열어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목소리가 쟁쟁하고 조금도 떠듬거리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7세에 군보(軍保)에 소속되어 13세 때 비로소 서울에서 번(番)을 들었는데, 그때는 연산군(燕山君)이 방탕해서 날마다 노는 것만 일삼았습니다. 연산의 얼굴을 쳐다보니 빛은 희고 수염은 적으며, 키는 크고 눈에는 붉은 기운에 있었습니다. 연산이 전교(箭橋)에 거둥할 때 나는 역군(役軍)으로 따라갔는데, 화양정(華陽亭)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읍에 예치했던 암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에 가둔 다음, 연산이 정자에 자리를 잡으니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했고 시신(侍臣)들을 물리쳤습니다. 이에 마관(馬官)이 숫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으로 몰아넣어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습니다. 그해 가을에 반정(反正)이 일어났습니다.”

 

 

當時宰相歷歷指名。盡知賢否。己卯乙巳之事慨然興嘆。無不詳知。其多聞强記。雖識理達學之士有所不及。余甚怪訝。問翁識字否。曰兒時甚聰。一日盡學千字。皆以爲奇童。不幸爲嫌人所訴。早定軍役。後乃學讀小學史畧等書。問翁有何修鍊能享壽考。翁曰生長山谷。所食只粟飯菜根。雖有疾病不知服藥。自至於老而不死。莫知其故也。其子在傍曰。非但老父年高。本縣及隣邑。年至九十者。比比有之。有一校生之母今年百二歲矣。翌年春翁化去。是知深山食淡之人多享高壽。蜀之靑城是已。余自聞翁言不覺瞿然。當其上番之日。乃渺渺廝役一卒耳。豈知胷中涇渭分明。遇某宰則曰賢。遇某官則曰邪。天理所在。公心自發。所謂民俱爾瞻至愚而神者也。可不懼哉。

 

하였다. 노인은 당시 재상들의 이름을 일일이 지적하여 누가 어질고 누가 그른 것을 모두 아는 것이었다. 기묘년과 을사년의 일에 대해서는 개연히 탄식하면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의 많이 듣고 잘 기억하는 것은 비록 이치를 알고 학문에 통달한 선비라도 따라갈 수 없었다. 나는 몹시 괴이하고 의아하게 여겨,

 

“노인은 글자를 아시오?”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어렸을 대에는 몹시 총명해서 하루에 천자문을 모두 배웠지요. 그래서 남들은 모두 기동(奇童)이라고 하였는데, 불행히도 남의 시기를 받아 관청에 고소를 당하여 일찍이 군역(軍役)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뒤에는 겨우《소학(小學)》ㆍ《사략(史略)》등의 책만 읽었을 뿐입니다.”

 

했다. 나는 다시 묻기를,

 

했다. 나는 다시 묻기를,

 

“노인은 무슨 수련을 해서 이렇게 수(壽)를 누리셨소?”

 

했더니, 노인은 말하기를,

 

“산골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먹는 것이란 오직 조밥과 나물 뿌리뿐이요. 아무리 병이 있어도 약을 먹을 줄 몰랐는데 저절로 늙어도 죽지 않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아들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우리 아버님만 연세가 높을 뿐만이 아니라, 이 고을과 이웃 읍에는 나이 90세가 된 자가 흔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한 교생(校生)의 어머니 한 분은 지금 나이 1백 2세입니다.”

 

했다. 그 이듬해에 그 아버지 되는 노인이 죽었다. 이로써 나는 깊은 산속에서 담백한 것을 먹는 사람이 높은 수를 누리는 자가 많다는 것을 알았으니, 촉(蜀) 땅의 청성(靑城)이 바로 이러한 곳이다. 나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놀라워했다. 그가 번(番)을 들 때에는 말을 기르거나 땔나무를 하던 한 졸병이었을 뿐인데, 어찌 경위(涇渭)를 가슴속으로 분명히 구별하여 어떤 재상은 어질다 하고 어떤 관리는 간사하다고 하는가? 천리가 있는 곳에는 공변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니, 이야말로 이른바, ‘백성들이 모두 너를 쳐다본다.’ ‘백성들은 지극히 어리석은 듯싶어도 신(神)과 같다.’는 것이다.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明廟朝。大司憲趙士秀與沈相連源。同入經筵。趙公啓曰領相沈連源。營造妾家極其宏侈。至施丹雘極爲未便。沈相拜謝曰。趙士秀之言正中臣失。明廟慰諭。及其退出。沈相笑謂趙公曰。微公之言。吾過益重矣。還家盡洗其丹靑。時論韙之。宣祖御經筵。領相盧守愼。與修撰金誠一入侍。金公啓曰。領相盧守愼受人貂皮長衣。豈意盧守愼有如此事也。盧相避席竢罪曰。金誠一之言是矣。臣母老而多病。每於冬節不能耐寒。果求貂衣於族人邊帥處。以給老母矣。宣祖兩美曰大臣臺諫俱得體面。予甚嘉焉。盧相素與金公相切。自此益加敬重。此乃祖宗朝美事。今之大臣臺諫。得如沈盧兩相之謝過。趙金二公之直截。豈非國家之福也

 

   명묘조(明廟朝) 대사헌 조사수(趙士秀) 정승 심연원(沈連源)이 함께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조공(趙公)이 아뢰기를,

 

“영상(領相) 심연원이 첩의 집을 몹시 크고 사치스럽게 짓고 심지어 단청(丹靑)까지 칠했으니 몹시 온당치 못하옵니다.”

 

하니, 심정승이 절하고 사과하기를,

 

“조사수의 말이 참으로 신의 실수를 바로 맞추었습니다.”

 

했다. 그래서 명묘(明廟)는 그를 위로해 타일렀다. 그들이 경연에서 물러 나오자 심정승이 조공에게 이르기를,

 

“공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 과오가 더 클 뻔했소.”

 

하고 집에 돌아가 그 단청했던 것을 모두 지워버리니, 그 당시 의논이 모두 위대하게 여겼다.

선조(宣祖)가 경연에 납시었는데 영상 노수신(盧守愼)수찬 김성일(金誠一)이 함께 입시하였다. 김공이 아뢰기를,

 

“영상 노수신이 남에게 초피(貂皮) 장의(長衣)를 받았사오니, 어찌 노수신에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하니, 노상(盧相)이 자리를 피하여 죄를 기다리면서 말하기를,

 

김성일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어미가 늙고 병이 많아서 매양 겨울이면 추위를 참지 못하옵기에, 과연 초피 장의를 변방에서 장수 노릇하는 일가 사람에게서 구해다가 늙은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했다. 선조는 두 사람을 모두 칭찬하면서,

 

“대신과 대간이 모두 체면을 얻었으니 나는 몹시 가상히 여기오.”

하였다. 노정승은 본래부터 김공과 서로 친했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로 더 공경하고 소중히 여겼다. 이것은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지금의 대신과 대간도 심연원ㆍ노수신 두 정승이 사과한 것과 조사수ㆍ김성일 두 공이 직절(直截)한 것과 같이 한다면 어찌 국가의 복이 아니겠는가.​

 

 

尹生者。駙馬之孫宰相之壻。豪富甲於一時。生長綺紈不讀一行書。性驕傲愚妄。不識人間有窮困事。日以賭博酒色自娛。所與交皆無賴驍悖之徒。又酷好花卉。若聞人家有奇花異禽。不論價直輕重。必貿而來。隣有書生。曾見尹家有內賜資治綱目。尋常欲得。計無所出。適其婦翁爲湖右邑宰。得倭躑躅一盆而來。生以爲此乃奇貨。可得尹家資治。是時雖號爲名家。此花甚稀。及其春末。繁花滿枝猩紅照映。招生見之。生不勝驚異曰。此花吾欲得久矣。君今何處得來。請以某物相換。其人紿曰吾亦傾財新得。愛玩未衰。何可與人。生曰吾有市井富奴。擇其年少者一口。未可相換耶。其人已知尹生之大欲。乃曰君我之間何計價物之相稱。但聞君家有資治綱目。此冊雖甚不關。吾欲敎子。以此相換何如。生大喜。遂送全秩取花而去。

 

 

    윤생(尹生)이란 자는 부마(駙馬)의 손자요 재상의 사위로서 권세와 부가 당시에 제일이었다. 귀한 집에서 자라고도 글 한 줄도 읽지 않았으며 성질이 교만하고 어리석어서 인간에게 곤궁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날마다 도박과 주색으로 스스로 즐기고, 함께 사귀는 자는 모두 무뢰하고 사납고 패역스러운 무리들이었다. 또 몹시 화초를 좋아해서 만일 남의 집에 기이한 꽃이나 이상한 새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가격의 많고 적은 것을 가릴 것 없이 반드시 사 왔다.

이웃집의 서생 하나가 일찍이 윤씨 집에 궁에서 내려준 《자치강목(資治綱目)》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얻고 싶었으나 꾀가 나지 않았다. 마침 그의 장인이 호서(湖西)의 고을 원이 되어 왜철쭉 화분 하나를 얻어가지고 왔다. 그래서 서생은 이것을 기화(奇貨)로 삼아 윤씨 집의 《자치강목》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아무리 이름 있는 집이라도 이 꽃은 몹시 드물었고, 늦은 봄이 되자 수많은 꽃이 가지에 가득하여 붉은 빛이 만발하였다. 이에 윤생을 불러다가 보이니, 윤생은 몹시 놀라고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이 꽃은 내가 얻으려 한 지가 오래인데, 그대는 이것을 어디에서 구해왔소? 청컨대 어느 물건이고 줄 테니 서로 바꾸도록 합시다.”

 

했다. 그러나 서생은 거짓으로,

 

“나도 역시 전재산을 기울여 새로 얻어서 사랑하고 아끼지를 마지않는데 어떻게 남에게 준단 말이오?”

 

하니, 윤생은 또 말하기를,

 

“내게 시정(市井)의 부자 종이 있는데 그 중에서 나이 적은 자 한 사람을 골라서 서로 바꾸지 않으려오?”

 

하였다. 서생은 이미 윤생이 크게 욕심내는 것을 알고 이에 말하기를,

 

“그대와 나 사이에 어찌 물건 값을 가지고 따지겠소? 다만 들으니 그대 집에 《자치강목》이 있다는데, 이 책이 비록 귀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자식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니, 이 물건과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윤생이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책 전질을 가지고 와서 꽃을 가지고 갔다.

 

 

置於庭除頗有悻得之色。又有一人得馴養鹿兒。盛籠而來。生約以綿布三端。其人曰有宰相家以靑銅火爐欲買。吾嫌其體小而不爲。況此木端乎。佯若還爲持去。生出給大爐以換。其人卽負而走。其愚妄多類此。奴婢田畓盡買於倡物之服飾。器皿書冊蕩然於花禽之換貿。家計大敗。室如懸磬。始賣鷺梁名亭。纔過一年又賣城南甲第。終至賃屋而居。猶以勳臣嫡長。入番受祿。僅僅資活。破衣草笠徒步遠近。當時歷數敗家之子。必以尹生爲首。余之聘家與尹生比隣。備聞其事。故略敍梗槪。以爲世家子弟恃富不學者之戒。

 

    그리고 그 꽃을 뜰가에 놓아두고 자못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었다.

또 한 사람이 잘 길들인 새끼 사슴 한 마리를 조롱에 담아 가지고 왔다. 윤생은 면포 (綿布) 세 단을 주고 바꾸자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말하기를,​

 

“어떤 재상의 집에서 청동화로를 주고 사자는 것도 나는 그것이 적다고 해서 팔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런 면포를 받고 팔겠는가?”

 

하면서 도로 가지고 가려는 척을 하니, 이에 윤생은 큰 화로를 내주고 바꿨다. 그 사람은 곧장 짊어지고 달아나 버렸으니 그의 어리석고 망령된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이리하여 노비와 전답으로는 모두 광대놀이하는 복식(服飾)을 사고, 그릇이나 책은 꽃과 짐승과 바꾸느라고 모두 없애버렸다. 집 재산은 다 없어지고 방안은 텅 비자 이에 비로소 노량(鷺粱)에 있는 이름난 정자를 팔아서 겨우 1년을 지내고 또 성 남쪽에 있는 좋은 집을 팔았으며, 마침내는 집을 빌어서 살게까지 되었다. 그래도 오히려 훈신(勳臣)의 종손이라 해서 번(番)을 들고 녹(祿)을 받아 근근히 살아 나가면서 해진 옷에 초립(草笠)을 쓰고 원근길을 걸어다녔다. 당시에 패가(敗家)한 집 자식들을 두루 헤아려 보더라도 반드시 윤생이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내 처가가 윤생의 집과 이웃이라서 그 일을 자세히 들었기 때문에 그 대강을 여기에 적어서 세가(世家) 자제들이 부만 믿고 배우지 않는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는 바이다.​

 

 

有一文官爲黃海監司。時靑丹驛有名馬。步驟超凡。性甚馴良。雖尺童亦能牽制。嘗置於監營。有吏部郞者。以權家之子勢焰方熾。監司下來時約以相換。未久使奴牽送所騎果下。欲易神駿。人皆憤嘆。牽出其馬將付來奴。馬忽奮躍亂噬其奴。橫行踶踐。其奴仆地數日殞絶。監司大怒。使馬主將牽送吏部郞家。是夜馬又奔逸莫知去處。有驛卒路遇奔馬。乃靑丹名馬也。追之不及來告于監司。卽發一邑之軍。使之追捕。馬奔入首陽山中。人或近前。飛騰峻崖超越絶壑。軍卒望見而已。束手空返。竟不得相換而去。後旬餘馬還本驛。人咸異之。稱以神馬。監司又於六月之望。招集隣近守令傍邑諸妓。大設流頭會。

 

    어느 문관 하나가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되었다. 이때 청단역(靑丹驛)에 명마가 있는데, 걸음이 보통 말보다 뛰어났고 성질은 몹시 온순하여 비록 어린 아이라도 역시 이를 끌고 제어할 수 있었으며, 항상 감영(監營)에 두었다. 이때 이조 낭관이 있었는데 권세 있는 집안의 아들로서 세력의 불꽃이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감사(監司)가 내려올 때 말을 서로 바꾸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얼마 있다가 종을 시켜서 자기가 타는 과하마(果下馬)를 끌어 보내어 좋은 말로 바꾸려 하니, 사람들은 모두 분하게 여기고 개탄하였다. 그 말을 끌어 내다가 온 종에게 주려 하니, 말은 갑자기 펄쩍 뛰면서 그 종을 마구 물고 이리저리 차고 밝아 그 종은 땅에 자빠져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그래서 감사(監司)는 크게 노하여 말 주인을 시켜서 이조 낭관의 집으로 끌어다 주었다. 그러나 이날 밤에 말은 또 뛰어 도망하여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역졸(驛卒)이 길에서 뛰는 말을 만났는데 보니 바로 청단의 명마였다. 따라가도 잡을 수가 없어서 감사에게 와서 보고했다. 그래서 감사는 곧 온 고을 군사를 풀어 쫓아가 잡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말은 도망하여 수양산(首陽山)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람이 혹시 가까이 가면 언덕으로 뛰어오르고 절벽을 뛰어 넘으므로 군졸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 속수무책이어서 그대로 돌아왔다. 그래서 마침내 바꾸지 못하고 가 버렸다. 그 뒤 10여일이 지난 뒤에 말은 청단역(靑丹驛)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모두 이상히 여겨 신마(神馬)라고 불렀다.

 

감사는 또 6월 보름에 가까운 이웃의 수령과 옆 고을의 기생들을 불러서 크게 유두회(流頭會)를 열었다.

 

 

翌日早朝以溫白元滾於燒酒。選出妓生之肥健者十餘人。皆飮以累器。不飮者强飮之。駈入於一房之中。牢鎖其戶。時方溽暑。熱氣蒸鬱。揮汗如雨。小頃羣妓腹中斗覺雷鳴。五內如飜。一時洞泄。蒼皇罔措急脫衣裳。或帖而背負。或捲而頭戴。皆倚壁蹲坐任其放洩。彼此急注左右相射。穢汁交流腰下沈沒。終日空腸泄瀉不止。氣力漸盡。相與枕藉於積糞之中。怨呼聲徹。惡臭盈室。人不敢近。監司與守令窺見拍手大笑。日暮始放出。皆沾體塗足。形如鬼物。羞愧不敢擧顏。只自涕泣矣。此特其監司之戱謔餘事耳。他何足道。癸亥反正。監司被罪云。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온백원(溫白元)을 소주에 타서 기생 중에 살찌고 튼튼한 자 10여 명을 골라 모두 여러 그릇을 먹이는데 먹지 않는 자는 억지로 먹였다. 그리고 한 방 속에 몰아 넣고 그 문을 굳게 잠갔다. 이때는 한창 몹시 무더운 때로서 더운 기운이 찌는 듯 답답하고 땀이 비오듯 흘렀다. 조금 있더니 모든 기생들의 뱃속에서는 천둥 소리가 나면서 오장이 뒤집히는 듯하더니 일시에 설사가 났다. 기생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급히 옷을 벗어서 혹은 개켜서 등에 지기도 하고 혹은 말아서 머리에 이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 벽을 의지하여 쪼그리고 앉아서 설사가 나오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피차에 급히 쏟느라고 좌우에서 설사 줄기가 서로 쏘아 더러운 물이 이리저리 흘러서 허리 밑까지 빠지게 되었다. 또 종일토록 빈 창자에서 쉬지 않고 설사를 하고 보니 기운이 점점 다해져서 서로 베고 똥 속에 누워서 원망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 나오고, 고약한 냄새는 방에 가득하여 사람이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이때 감사는 수령과 함께 이것을 엿보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날이 저물어 비로소 내놓으니, 모두 똥이 몸에 묻고 발에 묻어서 모양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 울 뿐이었다. 이것은 다만 그 감사의 희학(戱謔)에 있어 여사일 뿐이니, 그 밖의 것이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계해년(1623, 인조 1)에 반정(反正)이 일어나자 그 감사는 죄를 받았다고 한다.

 

石擎日。乃嶺南文官也。性癡直。自少力學。日以百字爲限。必讀千遍而後已。如是者十餘年。四書三經無一字遺漏。首尾貫徹。丁丁於心目中。果登明經科。積仕爲典籍。嘗兼中學敎授。一日曉頭所騎馬放逸。擎日倉皇驚起。誤着其妾之紫芝長衣。頭戴寢帽。躬自追逐。馬走入於中學。擎日旣至中學。日已盡曙。進退狼狽。彷徨於門外。學吏偶見乃石敎授也。大驚曰進賜何以至此。白日路邊瞻視有駭。請少的家。待其冠服之來奉還本宅矣。擎日以長衣寢帽脫袴跣足。慙愧不自勝。俛首低顏只自唯唯。俄頃之間觀者如堵。指爲狂夫。吏取來冠服而送之。學儒聞之。寫以爲圖。一時傳播作爲笑窩。以此遂至坎軻云。

 

    석경일(石擎日)은 영남 문관이다. 성질이 어리석고 곧아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는데 날마다 백 글자를 한정하고 반드시 천 번을 읽은 뒤에 그만두었다. 이렇게 10여 년을 하고 보니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어서 마음과 눈 속에 또렷또렷하였는데, 과연 그는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다가 전적(典籍)이 되었다. 일찍이 중학 교수(中學敎授)를 겸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 새벽 그가 타는 말이 놓여서 달아났다. 석경일은 황급히 놀라 일어나느라고, 잘못 첩의 자주빛 장의(長衣)를 입고 머리에는 침모(寢帽)를 쓴 채 몸소 쫓아갔다. 말은 달려서 중학(中學) 속으로 들어갔다. 경일이 중학에 이르자 날이 이미 새고 말았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어 문밖에서 방황하고 있었는데, 학리(學吏)가 우연히 보니 바로 석교수(石敎授)였다.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나으리께서는 어찌해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밝은 날 길가에서 남보기에 해괴하오니 잠시 소인의 집에서 관복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본댁으로 돌아가시도록 하시지요.”

 

했다. 석경일은 장의와 치모 바람에 바지도 벗고 맨발이었으므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머리를 수그리고 얼굴을 떨어뜨린 채 오직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금새 구경꾼이 늘어서서 그를 가리켜 광부(狂夫)라고 했다. 아전이 관복을 가져다가 데리고 갔다. 학유(學儒)가 이것을 듣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일시에 전파되어 웃음거리를 삼았다. 이 일 때문에 그는 결국 불우하게 세상을 마쳤다.​

 

 

 

李生大醇。庶孼也。精通經學多識禮文。知名一時爲童蒙訓導。訓誨諸生。多有成就立朝之人。亂後流寓衿川地。窮不能自存。有大臣素知李生有經術。憐其窮困。還付訓導。使之受祿資活。李生入京。僑寓於崇禮門內。遠近冠童受業者頗多。李生依平時訓蒙之規。誦其所讀不能者施罰。考其到次早來者先敎。嚴其課程序其年齒。學徒大怒曰某乃庶孼。吾何以坐於其下。吾雖後來渠何敢學於我先。挾勢使氣每相歐打。作一戰鬪之場。李生不勝其苦。少加警責。則必對面致辱。一日李生來余告別。余甚怪訝問其所以。李生曰吾自六七歲受業於先生長者。今已六十餘歲矣。未見如今日之風敎也。口尙乳臭。已分朋黨。不識一字。先評時政。一有路上長喝之聲。必爭先出見曰宰相某也。某人之黨其人大姦也。又出見曰某官也。某人之黨其人賢者也。非其黨類。則雖高官大爵。無不擧名慢罵。且不分貴賤皆服綺羅。時風世道極可寒心。若此不變。國家寧有長久之道乎。吾爲斗祿久留於京。必蒙大禍。以此決意下去矣。是壬戌冬。翌年國步重新。人皆服其先見之明。後二年李生捐世。近觀士習之不美。每想李生之慨嘆。識者之見可謂遠矣。

 

    이생 대순(李生大醇)은 서얼(庶孽)이다.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예문(禮文)을 많이 알아 한 시대에 이름이 알려져, 동몽훈도(童蒙訓導)가 되었다. 그는 여러 학생을 가르쳐서 성취시켜 조정에 선 사람도 많았는데, 난리 뒤에 금천(衿川) 땅에 임시로 사는데 곤궁하여 자기 힘으로는 살 수가 없었다. 어느 대신이 본래 이생(李生)이 경술(經術)이 있는 것을 알고 그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 도로 훈도를 시켜서 녹을 받고 생활하게 해 주었다. 이생이 서울로 와서 숭례문(崇禮門) 안에 임시로 사는데 원근에서 관동(冠童)들이 공부하러 오는 자가 꽤 많았다. 이생은 평시의 훈몽(訓蒙)하는 법에 의하여 읽은 책을 외게 하고 외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었다. 그리고 도착한 순서를 따져 먼저 온 자는 먼저 가르치는 등 그 과정을 엄하게 하고 모두 연치를 따지게 하였다. 그러자 학도들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아무개는 서얼인데 내가 어찌 그의 밑에 앉는단 말인가? 또 내가 비록 뒤에 왔지만 제가 어찌 나보다 먼저 배운단 말인가?”

 

하여 세력을 믿고 기를 부려 매양 서로 구타하므로 한 싸움터가 되어버렸다. 이생은 그 괴로움을 이길 수가 없어 조금 경계하고 책하면 반드시 대면하고 욕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이생은 나에게 와서 작별을 고했다. 나는 몹시 괴이하고 의아해서 그 까닭을 물으니, 이생은 말하기를,

 

“내가 6ㆍ7세 때부터 선생장자(先生長者)에게 수업하기 시작하여 이제 이미 60여세가 되었습니다만, 요즘과 같은 풍교(風敎)는 본 일이 없습니다. 입에서 아직 젖비린내가 나는 자들이 벌써 붕당(朋黨)을 가르고 글자 하나도 모르면서 먼저 시정(時政)부터 비평하여, 길거리에서 벽제(辟除)의 소리가 나면 반드시 앞을 다투어 나가 보고서 말하기를, ‘저것은 재상 아무개인데, 저 사람은 아무개의 당(黨)으로 사람이 크게 간사하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나가 보고서 말하기를, ‘모 벼슬에 있는 사람인데 아무의 당(黨)으로 그 사람은 어진 사람이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와 같은 당류(黨類)가 아니면 아무리 고관 대작이라도 모두 이름을 불러 욕을 합니다. 또 그들은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비단옷을 입으니, 시대의 풍교와 세도(世道)가 몹시 한심스럽습니다. 만일 이러한 세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어찌 장구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조그만 녹을 위해서 서울에 오래 머물다가는 반드시 큰 화를 당할 것이므로, 뜻을 결단하여 내려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가 임술년(1622, 광해군 14) 겨울이었다. 이듬해에 국운이 거듭 새로워지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그 뒤 2년 후에 이생은 세상을 떠났다. 요새도 선비들의 습관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보면 매양 이생이 탄식하던 일이 생각난다. 식자의 보는 것이 가이 원대하다 하겠다.

 

 

萬曆戊子年間。余聘君久爲吏曹參議。嘗見座目官案。除大臣原任外。自從一品至正二品僅十五六人。文官嘉善未滿二十人。祖宗朝愼重名器。故宰相稀貴如此。宣廟問大臣曰。近日銓曹六卿擬望。常患乏人。誰可爲六卿者。大臣以吏曹參判鄭大年爲薦。陞拜判尹。鄭公時年已七十。且平時居相位者。皆至十餘年。或過十五六年。尹公思翼爲工判十年。任公說爲判尹。首尾二十年。宋公贊爲工曹參判七年。其他久居職位者。難以枚擧。知事同知僅存一二員。餘皆未差。所以然者。太平無事。非有特命陞秩。則無賞加橫遷之路故也。若有特命。則雖時望方重者。兩司必論執踰月乃已。亂後此規亦無矣。惟吏兵曹判書。兩都目後必許遞改。豈非權柄不可久授也。至癸未東西分黨後。始有三度之外加由之命。流來成憲。自此大壞。三度加由實衰世之事也。武班資憲。則絶無而僅有。

 

   만력(萬曆) 무자(1588, 선조 21) 연간에 내 장인 오랫 동안 이조 참의로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일찍이 관리들의 석차를 적은 문서를 보았는데, 대신과 원임을 제하고서는 종1품부터 정2품까지 겨우 15ㆍ16인이었으며, 문관으로는 가선(嘉善)도 20명을 넘지 못했다. 조종조(祖宗朝)에는 명기(名器)를 신중히 여겼기 때문에 재상들이 이같이 드물었던 것이다. 선묘(宣廟)가 대신들에게 묻기를,

 

“요사이 이조에서 육경(六卿)의 의망(擬望)에 항상 인재가 없어서 걱정을 하는데 누가 육경이 될 만하오?”

 

하니, 대신들은 이조 참판 정대년(鄭大年)을 천거해서 승진시켜 판윤(判尹)으로 삼게 했다. 정공(鄭公)은 그때 나이 이미 70세였다. 또 평시에 정승 지위에 있던 것이 모두 10여 년씩이었으며, 혹은 15ㆍ16년을 넘기도 했다. 온공 사익(尹公思翼)은 공조 판서 10년을 있었고, 임공 열(壬公說)은 판윤으로 전후 20년이나 있었으며, 송공 찬(宋公贊)은 공조 참판으로 7년 동안 있었다. 그밖에 오랫동안 직위에 있던 자를 이루 다 들어 말할 수가 없다. 지사(知事)ㆍ동지(同知)도 겨우 한 두 명 있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차임되지 못하였으니, 그렇게 된 까닭은 태평하고 일이 없어서 특명(特命)으로 계급을 올리는 일이 아니면 상으로 가자를 더하고 함부로 특진하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특명이 있다면 비록 당시에 인망(人望)이 무거운 자라고 할지라도 양사(兩司)가 반드시 논집(論執)하여 달을 넘기고야 마는 터였다. 난리 뒤에는 이 법도 역시 없어지고, 오직 이조나 병조 판서만이 두 도목(都目) 정사만을 치른 뒤에는 반드시 체직하도록 허락했으니, 어찌 권력을 오랫동안 잡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계미년(1583, 선조 16) 동서(東西)가 분당된 후에 비로소 세 번 이외에 말미를 더 주는 명령이 생겨서 전해 내려오던 성헌(成憲)이 이로부터 크게 무너졌으니, 실로 세 번 이외에 더 말미를 주는 것은 쇠세(衰世)의 일이다. 그리고 무반(武班)으로 자헌(資憲) 계자는 아주 없다시피 하여서 선묘조(宣廟朝) 때 변협(邊協)이 공조 판서가 되고, 곽흘(郭屹)은 지사(知事)가 되었을 뿐, 이 두사람 밖에는 듣지를 못했다. 곽흘은 초헌(軺軒)을 탔다 해서 논죄를 당했으니 공의(公議)의 엄한 것이 역시 이와 같았다.

 

 

宣廟朝。邊協爲工判。郭屹爲知事。此兩人外無聞。郭屹乘軺被論。公議之嚴亦如此。許草堂曄斯文宿德。李參議海壽夙著雅望。皆在通政之列幾至三十年。許公年近七十。以慶尙監司陞資。沒於任所。李公終不得爲嘉善以沒。雖係命途之窮通。而亦由陞遷之不易也。今則家家金玉。此實亂世官方淆亂之致。大將軍告身。纔易一醉不幸近之。

 

초당(草堂) 허엽(許曄)은 사문(斯文)의 숙덕(宿德)이요, 참의 이해수(李海壽)는 일찍부터 맑은 인망이 나타났는데도, 모두 통정(通政)의 반열에 있은 지 거의 30년이 되어, 허공(許公)은 나이 70세에 가까와서야 경상감사(慶尙監司)로서 자급이 올라 임소에서 죽었으며, 이공(李公)은 끝내 가선(嘉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것은 비록 명도(命途)의 궁하고 통한 데에 달렸다 하겠지만, 역시 승진(昇進)하고 옮겨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는 집집에 금관자와 옥관자가 있으니, 이는 실로 난세의 관방(官方)이 문란하기 때문이다. 대장군(大將軍)의 고신(告身)도 겨우 술 한 번 취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과 불행히도 비슷하다.

 

余外家先祖閔知事諱大生。以門蔭爲郡守。每日昏後拜北斗祝曰。願生賢子孫。果生一女適韓公明澮。韓公生二女。一爲睿宗王妃。一爲成宗王妃。兩殿隨時寒燠。手製公衣服以賜。佳辰令節各賜宴需。遣中官宣醞。常時御供珍羞分送絡繹。韓公以一代元勳方爲首相。公之兩子亦以門蔭。皆爲大邑時宰。公畏其盛滿。退老於南陽。賜衣賜宴一如在京時。中官往來項背相望。公年八十後每於生日。成廟輒加一資。遂至崇政知中樞。年逾九十而沒。此事俱載公神道碑。公忠厚謹愼。與物無競。奉祭祀克謹。至誠所在天又感焉。生前享無涯之福。至今子孫繁盛。豈非積善之報也。

 

   내 외가의 선조 민지사(閔知事)의 휘는 대생(大生)인데, 문음(門蔭)으로 군수를 했다. 그는 날이 어두워질때면 북두성에게 축원하기를,

 

“원컨대 어진 자손을 낳게 해 주십시오.”

 

했다. 과연 한 딸을 낳았는데 한공 명회(韓公明澮)에게 시집갔고, 한공(韓公)이 두 딸을 낳았는데, 하나는 예종(睿宗)의 왕비 되었으며, 하나는 성종(成宗)의 왕비가 되었다. 두 왕비는 춥고 따뜻한 때에 따라서 손수 공(公)의 옷을 지어 보냈으며, 아름다운 명절이나 좋은 절기에는 각각 잔치할 음식을 보냈다. 또 중관(中官)을 시켜서 술을 내렸으며 평상시에 어공(御供)하는 음식도 계속하여 나누어 보냈다. 한공은 한 대(代)의 원훈(元勳)으로서 바야흐로 수상(首相)이 되었고, 공의 두 아들도 역시 문음(門蔭)으로 모두 큰 고을의 시재(時宰)가 되었다. 공은 너무 지나치게 높아진 것을 두려워하여 남양(南陽)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옷을 내리고 잔치를 내려 서울에 있을 때와 똑같았으므로 왕래하는 중관(中官)들이 앞 뒤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공은 나이 80부터 생일이 될 때마다 성묘(成廟)가 문득 한 자급씩 올려주어 드디어는 숭정(崇政)으로 지중추(知中樞)에 이르렀다. 나이 90세가 넘어 죽으니 이 사실이 모두 신도비(神道碑)에 실려 있다. 공은 충후하고 근신하여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제사 받들기를 몹시 삼가하였다. 그 지성이 있는 바에 하늘도 또 감동해서 그 생전에 끝이 없는 복을 누렸고, 지금까지 자손이 번성하니 어찌 착한 일을 쌓은 보답이 아니겠는가?​

 

 

   李韓城君秩。以門蔭官至府使。性至孝。每於祖先忌祭家廟享祀。初獻祝曰子孫。貧寒恐無以繼祭祀。願賜默佑使子孫榮貴。公之孫李墍李增。從孫李山海李山甫。一時顯敭門戶赫然。公以勳臣嫡長年踰八十。老職封君。安享而沒。此亦門中傳說之事。故竝記之。

萬曆己亥。大司憲洪汝諄因緣宮腋。氣勢張甚。恣行彈駁。頗有傾危士林之漸。朝廷患之。三司因公論劾之。論劾累月始允削黜矣。汝諄陰嗾不逞之徒。假托草野公論。連日投疏。上心已疑其分朋相軋。讒間隨之。汝諄蒙敍還朝。黨援益熾。反攻前日彈劾之人。斥逐殆盡。執義金藎國。司諫宋馹。掌令崔東立。持平朴慶業。校理朴彝敍。吏曹正郞李必亨。吏曹佐郞南以恭。竝削黜。獨校理柳希奮以戚里得免。慶暹以掌令。余以校理。李必榮以修撰。皆除拜未久。旣罷還敍。幷補外。慶得靈光。余除礪山。李爲豐基。後數年時論稍定。余三人得通淸路。金藎國等。九年後戊申始敍。是歲汝諄謫死海島中。于今四十年怳如隔世事。存者只五人。少年時事想來瞿然。其時有人。以被譴儕輩命運。問於卜者咸忠獻。咸卜曰皆宰相之命。前途極遠。但其中一人壽限不足。十一人中九人皆至宰列。一人爲通政守監司。是亦宰相也。獨李正郞必亨蒙敍遽殞。年三十八。咸盲之言果驗。可謂神卜矣。

 

   한성군(韓城君) 이질(李秩)은 문음으로 벼슬이 부사(府使)에 올랐다. 성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매양 조상의 기제(忌祭)에나 가묘(家廟)에 제사지낼 때에는 초헌(初獻)에 축원하기를,

 

“자손이 빈한하면 제사를 계속할 수가 없을 듯하오니, 원컨대 말없이 도와 주시어 자손으로 하여금 영화롭고 귀히 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공의 손자 이기(李墍)ㆍ이증(李增)과 종손 이산해(李山海)ㆍ이산보(李山甫) 등이 일시에 출세를 하여 문호가 빛났다. 공은 훈신의 종손으로서 나이 80이 넘어 노직(老職)으로 군(君)에 봉해져 편안히 살다가 죽었다. 이 역시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이기에 아울러 여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만력(萬曆) 기해년(1599, 선조 32)에 대사헌 홍여순(洪汝諄)이 궁중과 인연이 있어 기세를 몹시 부리고 맘대로 탄핵과 공박을 하여 자못 사림을 기울어뜨리고 위태롭게 할 조짐이 보이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근심하다가 삼사(三司)가 공론을 인하여 그를 탄핵했다. 탄핵을 논의한 지 여러 달 만에 비로소 윤허를 얻어 그를 삭직하여 내쫓았다. 홍여순은 은밀히 옳지 못한 무리들을 사주하여 초야(草野)의 공론이라고 가탁해서 날마다 소를 올렸다. 상의 마음이 이미 붕당(朋黨)을 나누어 서로 알력하고 참소와 이간이 따르는 것을 의심하던 터이라서, 홍여순이 용서를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그는 당(黨)의 응원이 더욱 세력을 얻게 되자 도리어 전일에 탄핵한 사람을 공박하여 모두 배척하고 쫓아 버렸다. 이리하여 집의 김신국(金藎國)ㆍ사간 송일(宋馹)ㆍ장령 최동립(崔東立)ㆍ지평 박경업(朴慶業)ㆍ교리 박이서(朴彝敍)ㆍ이조 정랑 이필형(李必亨)ㆍ이조 좌랑 남이공(南以恭) 등이 모두 사직되어 내쫓겼는데, 그 중 유독 교리 유희분(柳希奮)만이 척리(戚里)이므로 면할 수 있었다. 경섬(慶暹)은 장령(掌令)으로, 나는 교리로, 이필영(李必榮)은 수찬으로 모두 벼슬을 제수받은 지 오래지 않아서 파직되었다가 도로 서용되어 모두 외직으로 나갔다. 이때 경섬은 영광(靈光)으로, 나는 여산(礪山)으로, 이필영은 풍기(豐基)로 나갔다. 그 뒤 몇 해를 지나 시론(時論)이 차차 정해지자, 우리 세 사람은 무두 통청(通淸)의 길을 얻고, 김신국 등은 9년 후 무신년에 비로소 서용되었는데, 이해에 홍여순은 귀양가서 섬 안에서 죽었다. 그런 지가 지금 40년 인데 마치 저 세상 일과 같아서 살아 남은 자가 겨우 5인 밖에 없으니, 젊은 시절의 일을 생각하면 실로 두렵기만 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견책받은 사람들의 운명을 점장이 함충헌(咸忠獻)에게 물었더니, 함씨 점장이는 말하기를,​

 

 

天啓甲子。余以奏請使越海赴京。副使吳公䎘。書狀官洪公翼漢也。吳公多才頗解卜說。皇都名卜及善相人。無不招來。一日吳公與白髮老人偕來余處。是相者也。見余相良久曰失志人也。余怪問曰何以知之。相者曰眉間有滯氣以是知之。時乃反正初也。余卽拜忠淸監司。入爲漢城判尹。實無失志之意。而相者乃言未可知也。因謂余曰歸國必有構害。當有落職之事。然非久還職矣。余又問曰余獨其然乎。且越海無事耶。相者曰三位皆然。而水路萬萬無虞。且吳公帶去軍官者。狀貌豐偉長身美鬚髥。吳公使更着華衣以視之。相者便曰商也。吳公紿曰此乃武進士官至三品。屢經舟師將領之任。熟諳候風行舟之事。故帶來矣。相者曰詤也。面背俱有勞心射利之相。遠行圖利者矣。吳公驚嘆。其人居於市井一生防納。其遠行射利之說不虛矣。凡相法有面背俱看之規。昔蒯徹之說是也。吾等還朝。果以員役落後。有一臺官素與吳公不相能。乘時論劾拿囚一日。竝坐削職。一如相者之言。後又聞之。相者謂吳公。官纔侍郞壽亦不長云。吳公官至通政年四十四而沒。嗚呼惜哉。相者可謂神妙矣。

 

   “모두 재상이 될 운수이며, 전도는 매우 멉니다. 다만 그 중 한 사람은 수(壽)가 부족하나 11명 중에 9명은 모두 재상의 반열에 오를 것이요, 한 사람은 통정(通政)으로 수감사(守監司)가 될 것이니, 이 역시 재상입니다.”

 

했다. 그런데 유독 정랑 이필형(李必亨)만이 서용되고 갑자기 죽으니 그때 나이 38세였다. 함씨 맹인의 말이 과연 맞았으니, 신묘한 점괘라 이를 만하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 2)에 나는 주청사(奏請使)로서 바다를 건너 중국 서울에 갔다. 이때 부사(副使)는 오공숙(吳公䎘)이요, 서장관(書狀官)은 홍공 익한(洪公翼漢)이었다. 오공(吳公)은 재주가 많아서 꽤 복설(卜說)을 터득했다. 그래서 중국 서울에 있는 이름난 점장이나 상(相)을 잘 보는 사람은 불러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오공은 어느 백발 노인과 함께 내 처소에 왔다. 이 사람은 상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상을 한참 보더니 말하기를,

 

“뜻을 잃은 사람입니다.”

 

했다. 나는 괴이히 여겨,

 

“어떻게 아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눈썹 사이에 막힌 기운이 있어서, 이것으로 아옵니다.”

 

했다. 이때는 바로 반정(反正)한 초기였다. 나는 그때 즉시 충청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가 들어와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었으니, 사실은 뜻을 잃을 까닭이 없는데, 상보는 자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본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남에게 해를 이어서 낙직(落職)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복직할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또 그에게 묻기를,

 

“나만 혼자 그렇겠소? 또 바다를 건너는데는 아무 일도 없겠소?”

 

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세 분이 다 그렇겠소. 하지만 바닷길에는 아무런 일도 없겠습니다.”

 

하였다. 또 오공이 데리고 간 군관 중에 얼굴이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수염이 잘난 자가 있었다. 오공은 그 사람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 가지고 그에게 뵈었다. 상보는 자는 문득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장사꾼이오.”

 

했다. 오공은 거짓말하기를,

 

“이는 무과에 급제한 진사로 벼슬이 3품에 이르고 여러 번 수군(水軍)의 장령(將領)을 지낸 사람으로서 순풍을 기다리고 배를 운행하는 일을 하는 일에 익숙하기에 데리고 온 사람이요.”

 

했다. 그러나 상보는 자는 말하기를,

 

“거짓말입니다. 얼굴과 등에 모두 애써 이익을 얻으려는 상이 있으니, 이는 멀리 다니면서 이익을 얻으려고 꾀하는 자입니다.”

 

했다. 오공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감탄하였다. 그 사람은 시정(市井)에 살아서 일생동안 방납(防納)에 종사했으니, 그가 멀리 다니면서 이익을 얻었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었다. 대체로 상보는 법에 얼굴과 등을 함께 보는 법이 있으니, 옛날 괴철(蒯徹)의 말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들이 조정에 돌아오자, 과연 원역(員役)을 뒤에 떨어뜨렸다는 것으로 대관(臺官) 중에 평소에 오공과 사이 좋지 않은 자가 때를 타서 그를 탄핵하여 하루 동안 구금되고 여기에 연좌되어 삭직당했으니, 한결같이 상보는 자의 말대로 되었다. 뒤에 또 들으니 상보는 자가 오공에게 이르기를,

 

“벼슬은 겨우 시랑(侍郞)에 그칠 것이요, 수(壽)도 또한 길지 못하겠다.”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오공은 벼슬이 통정(通政)에 이르렀고 나이 44세에 죽었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상보는 자는 가위 신묘하다 가겠다.​

 

 

廢朝時營建始於乙卯。余爲全羅監司。今春城君南公以雄。以伐木敬差官下來。邊山莞島等處材木。皆以謂舡運京。民力不至大段。至己未年間。其役極爲浩大。余又爲黃海監司。纔到境上。都監催文積如丘山。莫適所從。時則以堂上官稱以督運使。以今李知事尙吉爲之。駐箚道內已經一朞。專管舡隻督發材木等物。大槪海西一道壤地偏小。而物產甚夥。材木產於長山串。白土產於海州。靑土產於殷栗。燔朱紅產於平山。堗石產於首陽山。長淵之炭載寧之鐵。取之不竭。營建百具。一皆倚辦。且近舡路。爲民生莫大之弊。水陸轉運之苦百倍於他道。材木丹靑鐵炭各有主管。或稱別將或稱郞廳。廚供不貲。雖運定各邑。亦不支吾。各發夫馬鞭扑狼藉。又有金純者。起自賤孼。帶以調度之號。巧作名目。徵斂民間。不遺錙銖。刑罪慘酷。又都監官員。無恥之輩。乘時射利。恣行防納。十倍其價。內外交侵。一道民生如在沸鼎之中。曷喪之嘆方極。天聽自民。宗社默佑。世道安得不變也哉。

 

    폐조(廢朝) 대궐 세우는 일을묘년(1615, 광해군 7)부터 시작했다. 내가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있을 때 지금의 춘성군(春城君) 남공 이웅(南公以雄)이 벌목 경차관(伐木敬差官)으로 내려왔다. 변산(邊山)ㆍ완도(莞島) 등지에 있는 재목을 모두 ‘배로 서울에 운반하므로 백성의 힘은 그다지 대단치 않다.’고 하였는데, 기미년간에 이르러 그 역사가 몹시 커졌다. 내가 또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되어 겨우 도경계에 이르니, 도감(都監)의 재촉하는 문서가 산같이 쌓여 어찌할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이때는 당상관을 독운사(督運使)라고 일컬었는데, 지금의 지사(知事) 이상길(李尙吉)이 독운사가 되어 도내에 와서 머문 지가 이미 1년이 지났었다. 그는 오로지 선척을 관리하고 재목 등 물건을 독려하여 출하하고 있었다. 대개 황해도는 땅은 비좁지만 물산은 몹시 많아서, 재목은 장산관(長山串)에서 나고, 백토(白土)는 해주(海州)에서 나고, 청토(靑土)는 은율(殷栗)에서 나고, 번주홍(燔朱紅)은 평산(平山)에서 나고, 돌석(堗石)은 수양산(首陽山)에서 나고, 장연(長淵)의 숯과 재령(載寧)의 쇠 등,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아서 집짓는 백가지 자료를 한결같이 모두 판비해 낼 수 있었다. 또 이곳은 선로(船路)가 가까와서 민생에 막대한 폐가 되었다. 그리하여 수로와 육로로 운반하는 고역이 다른 도보다 백배나 되었다. 재목과 단청과 철과 숯은 각각 주관하는 사람이 있어 혹은 별장(別將)이라 하고 혹은 낭청(郞廳)이라고 일컫는데, 그들의 음식 제공만도 셀 수 없이 많아, 비록 각 읍에서 운반해 와도 역시 지탱할 수가 없어, 각각 인부와 말을 내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가 낭자하였다. 또 김순(金純)이란 자가 있었는데, 천얼(賤孼) 출신이었다. 그는 조도(調度)의 칭호를 띠고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민간에게 재물을 거두어들이기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기지 않았으며, 형벌을 참혹하게 베풀었다. 또 도감(都監)의 관원 중 부끄러움이 없는 무리들은 때를 타서 이익을 노려 마음대로 방납(防納)을 했는데, 그 값이 10배나 되었다. 이렇게 안팎이 서로 침탈하니 온 도의 민생이 마치 물 끓는 솥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이 나라가 언제 망하는냐는 탄식이 한창 극에 달했다. 하늘이 듣는 것은 백성이 듣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종묘와 사직이 말없이 도와주니, 세도(世道)가 어찌 변하지 않을 수 있으랴?

 

 

 

全羅兵營自前設於康津。亂後廟堂以形勢非便。移設於長興。以兵使吳廷邦兼府使。以金汝純爲判官。汝純素愚妄。自以文官。恥爲武人下官。常懷憤惋。適有兵營移設之擧。長興人民頗甚怨苦。汝純欲乘時倖免。乃謀於一二品官曰。本邑新設營鎭。創開無窮之弊。盍於此際圖所以還移之策乎。皆曰惟城主處分。汝純曰吾欲通於當路宰臣。不可無人情。以是爲慮耳。品官等又曰弊邑雖甚殘薄。當拮据以副盛念。遂通諭一邑。收合木綿十餘同汝純以其中房載送於京中。多貿銀子。中房乃賤隷也。顧無先容之地。隣居張太伯者。以販藥爲業。時纔經亂離。藥物絶貴。士夫家凡有疾病。必於太伯處求用。且爲人滑稽。又善言語。名公鉅卿無不親近。中房以其計言於太伯。太伯喜曰從我所言。事無不成。但不可以空手爲之。中房以銀子多給太伯任其所爲。太伯言於備局諸宰。則皆以爲大鎭纔移。不可輕改。必須本道監兵使狀啓。然後可以處置。太伯計無奈何。又言于憲府多官。則或可或不可。時余爲司諫。太伯來言於余曰全羅兵營新設長興。邑人不勝其苦。儒生十餘人上來。將呈狀于備局兩司。而今幸本院大諫未差。善處之責在於進賜。幸念一邑民生垂惠焉

 

   전라도의 병영은 전부터 강진(康津)에 설치했는데, 난리 후에 조정에서 형세가 불편하다고 해서 장흥(長興)으로 옮겼다. 그리고 병사(兵使) 오정방(吳廷邦)으로 부사(府使)를 겸하게 하고, 김여순(金汝純)으로 판관을 삼았다. 김여순은 본래 어리석고 망령되어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문관이 무인의 밑에 있기가 부끄럽다고 하여, 항상 분한 마음을 품었었다. 이런 때에 마침 병영을 옮겨 설치하는 일이 있었는데, 장흥의 인민들이 자못 몹시 원망하고 괴로워했다. 그래서 김여순은 이런 때를 타서 요행히 자기의 분을 풀려고 생각했다. 이에 한 두 품관에게 의논하기를,

 

“본읍에 새로 병영을 만든다니, 끝없는 폐단을 만드는 것이다. 어찌 이 이회에 이것을 도로 옮기는 방도를 도모하지 않는가?”

 

했다. 그래서 모두들,

 

“성주(城主)의 처분대로 하소서.”

 

하니, 김여순은 말하기를,

 

“내가 요로를 담당한 재상들에게 통하려고 하는데 인정(人情)이 없을 수가 없어서 이를 근심하는 것이오.”

 

했다. 그러자 품관들이 또 말하기를,

 

“우리 고을이 비록 메마르지만 마땅히 재물을 모아서 성주의 장하신 뜻에 맞도록 하겠습니다.”

 

 

余曰大臣熟講已定。本院勢難論啓。無已則上言可矣。以此言送。翌日諫院之坐。果有儒生十餘人聚于本院門外。完席旣罷。招入等狀儒生。余題其狀辭曰移營邊上。乃莫重擧措也。不可以一邑厭苦。輕改廟堂規畫。汝等猥濫極矣。竝與儒生而黜送。自此太伯絶不更來於余家。余以病辭遞。文礪代余爲司諫。余又爲執義。齊坐之日。掌令蔡衡。欲以鎭安縣監梁嶷爲越署。左右問其故。蔡曰頃日長興儒生來接於梁家。多有敎誘之事。所聞不美也。僚員力救乃出。蔡猶有歉然之色。持平姜籀公退還家。其妻以紙裹之物示之曰。張太伯者來納。姜大驚。卽招太伯怒叱。而還給曰此後永不來吾家。翌日姜言於儕輩中欲爲避嫌。人皆勸止未果也。是冬一大官因嫌素惡姜籀。嗾臺諫論劾前日長興人行賂兩司之事。掌令蔡衡南晫。前掌令元虎智。持平姜籀。司諫文礪。判官金汝純張太伯中房等。皆下獄。南晫元虎智金汝純久乃蒙放。蔡衡姜籀囚繫三年。累受刑訊。文礪張太伯皆死獄中。張太伯每於受刑之際。極言蔡姜之曖昧。抵死不絶於口。宣廟嚴治贓獄。而久乃知其冤枉。特命全釋。蔡姜兩人窮天極地之冤。天日洞燭。而以此終身廢棄。人或嗤點。豈不冤哉。豈非命也。蔡姜獄起之後。洞友柳時行。余司諫時正言也。同參是坐。來謝於余曰。張太伯吾亦相知。每以移營之事來言。吾亦心知其非。而不敢斥絶。若非當日公之快斷。一院同僚幾乎難免。幸哉幸哉。柳公俱以其事。告于其叔父柳府院根。余以執義往參政府。方物封裹。柳公以禮判亦參。見余於挾室諸宰大會處。言余曰向聞家姪之言。執義處置長興呈狀極爲明快。余嘗深服。爲因語諸宰一如柳時行之言。坐中嘖嘖。當初余之退黜。實出於偶然。而到今思之。不覺竦然。是亦天也。

萬曆戊戌余爲正言。同僚以林川郡守鄭天卿。當此亂離。大作衙廨。孑遺殘民不勝其苦。以此論罷矣。是秋余以修撰爲本道御史。行到林川。新經兵火。邑居蕩然。館余於山谷間小屋。距舊郡五里許。其傍乃郡守衙廨也。余嘗流寓於韓山。與林接境。其處避亂士子相從已久。鄭大諫弘翼。韓正謙時在布衣。相繼來見。韓生素善調戱。謂余曰聞君曾爲臺諫。頗有直截之風。吾今致賀。余曰何事耶。韓生曰前郡守鄭天卿居官至簡。且以富人家在不遠。輸運其家之穀以供衙料。秋毫不犯。一邑蒙惠。以草屋數間成造之故。被駁而去。君等直截可知矣。余笑曰臺諫只憑風聞而論劾。此乃流寓士子。與豪强土民所惡之致。臺諫何與焉。韓亦大笑。余因問其所以然者。韓生曰兵火中一邑灰燼。而惟此村瓦家頗有餘存者。故僅設客舍衙廨。而顧無郡守坐起處。斫取傍近土民墓山材木。以造草舍。所謂衙東軒也。墳山主人。以蔭官時仕在京者。造謗囑一臺官而駁罷。一邑之人莫不痛憤矣。翌朝余出歷他邑。適由邑衙之前路。試觀衙軒新造草屋。幷與前楹而三間也。余不勝駭憤。蓋末世人心不淑。忿起纖毫。必生陰陷之計。以若干材木斫取之故。幺麽一蔭官搆罷善治之地主。豈不寒心哉。風聞之不足信如此。余其後屢爲臺諫。每思林川之草屋。彈駁之際必自愼重。豈非一助也哉。

沈政丞守慶。祭儀喪制務從簡約。爲子孫久遠計。祭儀則固簡便矣。至於永葬不用石灰。三年几筵不設朝夕上食。只設朔望祭。墓祭只行寒食秋夕。而不行正朝端午等事。未知於情禮何如也。葬用石灰。禮文所在。隨力所及用之多寡可矣。至於全然不用。有歉於人子送終大禮。不設上食。則喪三年都無一事。亦乖於事死如存之義。四時墓祭雖非古禮。但禮宜從厚。自三國以來已成風俗。是日貴賤墳塋無不設祭。而獨故山先隴香火寂寥。幽明之間不能無憾。正朝端午如栗谷擊蒙祭儀。只設酒果猶勝於全廢也。沈相乃一代元老。必有意見。而恐非子孫永守之良規也。

余高祖議政公。爲黃海監司時。尹相仁鏡爲都事。高祖到界尹公行迎命之禮。高祖見其風度凝遠。視瞻不凡。深知器重。待之殊禮。且以尹公母夫人年老窮居。以封餘珍羞。連續優送。尹公心常感激。時海州牧使文官有才望者。歇看尹公。乘醉面侮曰。使相有何所見。待都事至誠。尹公曰吾亦不知。時稱長者之言。高祖瓜滿還朝。未幾爲吏曹參判。力薦尹公始通顯路。尹公事高祖。平生執子弟之禮。輿望日重。歷敭臺閣十餘年間。驟陞宰列。嘗爲京畿監司。其時海牧又爲廣州牧使。低徊舊秩。心甚忸怩。謂人曰李政丞眞聖人也。何以知尹公之遠到。蓋高祖時爲政丞也。高祖捐館。尹公已躋六卿。極力護喪。每於諱日。脩物助祭。終身不怠。高祖子孫視同一家。凡有干請。非大段難行之事。則無不曲從。其視末世背恩忘德者。豈可同日語哉。尹公天性至孝。又能睦族。頗有時望。嘗以領相兼管內局。中廟大漸之時。進御藥物。必齋宿親自監劑。人以謂誠孝所推云。及卒謚孝成。然乙巳忠順之對。得罪公論。勳爵竝削云。

嘗見蘭亭小記。唐太宗欲得羲之眞筆。聞有南州僧深藏不出。特遣御史以秘計得來。以。天子之威求一小紙書於山僧。乃一縣官事。而寧以計得。不以威脅者。必以筆蹟乃翰墨之具。山僧亦方外之人。故萬機之暇作文戱筆眞盛德事也。若後世。則山僧豈敢藏秘。必有懷璧之災矣。松都人韓濩之子若弟。得藏其筆蹟者。皆爲一二府官所奪取。隻字片紙無復保存。其子每對人悲憤。可勝嘆哉。

皇明永樂間。御史陳鉞奉使琉球國。海中遇颶風幾不得全。陳鉞於舟中禱於海神曰。倘蒙神庥。得完皇命。當歸報天子爲神立廟。世世享祀矣。禱訖風浪漸息。竣事還朝。具奏於天子。特命立廟南海。春秋致享。鉞乃小官也。皇上卽納其言。建廟揭號。今之天妃娘娘廟是也。聖天子恢弘之量體下之仁。可謂敻出千古矣。嘉靖中。有一村民生女甚艶美。其父上書曰臣女絶美。願納宮中以備下陳。皇上卽令入宮。至有天生淑女之詔。皇朝諫臣專尙節義。而無一人進言者。雖是欠事。其規模宏大可想矣。

萬曆乙巳宣祖臨朝講。特進官戶曹參判申湜啓曰我國諸道產銀處甚多。當此國儲蕩竭之日。許民採取。官家收稅。則公私兩便。國用亦足矣。上曰產銀處甚多乎。申曰他處不知矣。畿內楊州地亦有產銀處。時方採取矣。余以司諫入侍。啓曰嘗聞我國名山無不產銀。而自三國至于今日。採取者只端川銀。則他處亦多銀穴之言未可信矣。且前朝末。中國責以銀貢。鄭夢周奉使入奏。僅得蠲減代以土物。必以進獻難繼故也。但銀乃至寶之物。天生有用。藏置可惜。若有產銀處。則許民採用實爲便益。翌日政院以無發落取稟。備忘記。鑿開混沌混沌死。鑿開銀穴人心死。

萬曆癸卯秋。余以兼輔德入直春坊。夜夢登滿月臺。帳幕周遭似有軍馬馳騁之事。覺來依然未知何祥。所謂滿月臺平生足跡所不到。每想故都風物。思欲一遊以償宿願久矣。夢兆如此。方切喜幸。後數日銓曹適因備局公事。當差出各道巡按御史。余以老親方在畿甸。且有奇夢。求於銓官。圖差京畿御史矣。宣廟還下望單曰李某乃春坊長官不可出送。以他人改差。余心甚缺然。以前日之夢爲一場戱劇矣。翌年甲辰春。余承特命爲開城府試才御史。前日之夢始驗矣。余以副應敎方兼輔德。前有改差之命。後蒙特遣之敎。數月之間天心逈異如是。一動一靜有數存焉。因竊思之。前日改差必以漏洩天機。參以人事。爲造物者所忌。後之特命。自無機心。以驗前夢矣。士大夫功名去就。當一聽於天而已。不可以私意經營進取明矣。

余族人金縣監家在仁王山下。景致絶勝。庭畔有薔薇樹。一庭照耀。金公賞玩。仍憑几睡熟。忽有黃衣丈夫來揖於前曰。我托在尊家已經累世。保護門戶憂樂共之。今者主人之子無禮頗甚。每以穢水溷我面目。汙辱備至。我欲禍之。爲主人不忍爲也。幸嚴敎禁止。言訖入於薔薇樹下。金公覺而驚異。心自思量莫能料得。還倚几而臥。俄見金公妾子年長者忽到花前立而溲溺。年少氣盛高放於花枝之上。餘洒點滴花頭盡偃。金公頓覺其夢始驗。招妾兒痛叱之。呼婢汲水親自洒花。洗其汙汁凈掃花下。金公素能詩。因作一絶以謝云。余常奇之。又聞有申姓人。作南中邑倅。其衙軒有小池。池中有小島。島上有老梅。古査屈曲如龍蛇形。奇狀天成。邑倅之孫年少好事者。嫌其僻在隱處。移栽東軒之庭。其發掘也。根蟠一島旣深且遠。用十夫之力。毀島幾盡艱苦拔出。其夜申生夢。白頭翁來言曰。我安居故土幾至百年。汝一朝無故破我室屋。傷我膚體。使我失所將至枯死。汝亦不久於世。怒氣滿面而去。申生始悔已無及矣。其梅果枯死。未久申生繼殞。吁亦異哉。薔薇叢花也。梅亦弱木也。尙有精靈。是知凡物久則必有神矣。看花種樹者。宜愼之哉。

我國公道惟在於科擧。壬辰兵亂後。世道大變。法綱解弛。有一二試官行私場屋。作爲權輿。其弊漸至滋蔓。至廢朝時極焉。大防一潰。廉恥都喪。甚於攫金。實由權奸當國。久秉文衡。屢主試院。欲廣植私黨以張己勢。凡大小取人科場。必預出書題。使門客族屬之乳臭子弟。前期借述。作俑於車天輅。濫觴於李再榮。又有關西李進者。頗善科文。出入宰相家受厚償製給。登科者亦多。又於式年講經。亦預出七大文。使之熟講無不高參。東國科擧始設於高麗光宗朝。距今五六百年。公道之熄滅。莫甚於曩日。瞻聆所曁。無不震駭。國言藉藉。人心土崩。林下窮經之儒。一生文藻之士。皆捲卷廢擧。憤世高蹈。其翺翔臺閣布列淸顯者。盡是蔑學無恥之輩。卵育於權奸。承望其風旨屢起大獄。神人共憤。竟至倫彝幾斁義理晦塞。宗社之危僅如綴旒。倘微反正之擧。幾爲禽獸之域矣。大利所在其弊難防。至今遺習尙存。可勝嘆哉。李再榮府尹選之妾子。能文尤長於四六。登魁科。官至通政郡守。

反正後罪人李進。亦囚繫受刑。久乃得釋。 李進後登文科 舊例新及第被選於槐院。夜則投刺於本院博士以下官。晝則鎖於長房。使不得出入。號爲新鬼。侵困百端。日暮始放。又使回刺。如是者。浹旬日。不恭則笞家僮加日數日。有先生名宦之人往請。則或除刺或減日。亦古風也。徐公益。與李相國元翼。同榜及第。方在長房之中。李鵝溪與徐益。爲一家之人。循舊例往見。則徐公素豪放。謂鵝溪曰此間有絶等蒙倛。幸一奇觀。仍招出李公曰此物是也。李公素淸羸。破帽鬼服勞悴已極。鵝溪鑑識甚高。一見知其爲國器。傾許頗深。徐益幷與鵞溪而侮弄之。後徐公低徊外郡。李公雅望籍甚。已爲吏判。朝夕將入相。徐公每嘆曰塵埃中識人難矣。李公位至領議政。勳封府院君。爲國家倚重者。垂三十年卒。年八十八。徐公官至義州牧使。年纔五十而歿。夙抱高才。其輕世傲物如此。

韓山崇文洞有李上舍居焉。牧隱之曾孫也。隱德不仕。性醇謹好施與。鄕黨稱爲長者。嘗有丐僧到門。破衲千結容貌奇古。上舍卽給數斗粟。僧喜謝膜拜。徘徊顧瞻若有所思。上舍怪而問曰汝嫌其粟少乎。抑有所言乎。僧曰當此秋穫。丐僧之來過上舍之門者。不知其幾。上舍必優給粮物。此乃施恩於不報之地。必有餘慶。貧道稍解地理。是以周覽本宅地形。以謝厚貺。仍曰上舍有貴子。前頭庚子爲司馬。壬子爲及第。多享壽福。然此宅終爲異姓人所居。後亦有庚子壬子發福。功名富貴略與相同者矣。且上舍後裔冠冕連綿。幸爲善克終。言訖飄然而去。莫知所向。上舍之子曰允蕃。庚子司馬壬子文科。歷敭華顯屢典州牧。官至嘉善大司諫。年八十餘而卒。後其宅歸於上舍之次子參奉允秀。參奉無子。以外孫申聘君爲繼聘君生於是宅。亦爲庚子司馬壬子及第。官至參判。享年七十七。名位與李大諫略同。其僧之言一一皆驗。豈不異哉。大諫之孫某登第。官至寺正。寺正之孫李判書顯英。判書之胤參議基祚。皆方有重名爲一時名卿。賢大夫積善之報。可謂如合符節。此必天誘異僧。使積德者。有所觀感而益勵也。 寺正名希伯

金南窓諱玄成。牧使彥謙之子也。世居高陽。業儒固窮。牧使天性至孝。鄕隣稱慕。早中司馬。其未釋褐也。慈親在京病逝。牧使奉櫬歸葬於故山。行到新院。喪車輪折。牧使罔知所爲。置櫬於路傍只自呼哭。行路悲傷。近村居民聞奇爭來赴役。權厝於路上高燥處。牧使窮甚勢不能卽移先隴。親自負土以造塋域。時本郡有國陵修改之事。地官以奉審過去者。馬上顧謂曰今此新墳。誰人來看。眞吉地也。牧使聞言。卽追拜於馬前。備陳情事。言淚俱下。地官惻然感動。因周覽山形曰龍虎太近明堂俠隘。雖非大地。山勢遠來自成格局。精脈凝聚。當有金榜貴客。連二代繼出矣。又問喪主姓名族系。牧使悉陳無隱。地官嘆曰然則喪主必誠孝人也。吾自結髮爲地官。經過此路不知其幾。曾不料十步之內有此佳兆也。此實天意。非人力所可容爲。愼勿遷移。牧使如其言遂永窆焉。三年後牧使卽登第。歷守大邑皆有聲績。享年八十。子南窓亦占高科。二代榮貴之言果驗。又南窓孝友出天。筆蹟逼松雪體。公私碑碣屛簇皆出其手。又能詩。接待華使多有唱酬。屢典州府。洗手奉職廉聲著世。性疏雅不閑吏事。不事鞭扑。澹然鈴齋終日吟哦。好事者。爲之語曰南窓愛民如子。闔境怨咨。秋毫不犯。官庫板蕩。一時傳笑。經學高明。訓誨後進多有名人。操守甚正。廢后廷請一不進參。以此閑廢累年。杜門謝客。以書史自娛。官至同知敦寧府事亦年踰八十而卒。余嘗受業。其捐館也經紀初喪。數間草廠只書冊一箱朝衣數件而已。其淸修苦節無愧古人。位不滿德。惜哉。

余爲忠淸監司巡到韓山。有先祖稼亭牧隱麟齋賜額書院。忠州有陰崖書院。鎭川有文學書院。一道之內同宗書院在於三處。豈非吾門之大幸也。麟齋諱種學。牧隱之子也。官至密直寶文閣提學。麗朝革命之際首先死義。盧蘇齋集。盡節前朝畢命改社者是也。陰崖諱耔。麟齋之孫。官至參贊謚文懿。事在己卯錄。李文學諱畬。麟齋之後也。天性至孝理學高明。仁廟在東宮時。爲講官最久。輔益弘多。若遷官。則仁廟必啓請仍存。待以師禮。年僅四十而沒。事蹟俱在柳眉巖行錄。且東方巨室。冠冕接武勳業茂著者。世固多有。而至於連五代建院尊奉。饗以俎豆。爲士子矜式者。吾韓山李姓外無聞。是以李鰲城相國牧隱書院記。世言韓山多君子。信乎斯言。眞實錄也。曺南冥嘗曰眞黃花對僞淵明。與顯陵松柏夢中靑之詩。祖孫節義前後一揆云。此雖不係於書院。亦吾門義烈。足以激千古之感慨也。故幷錄之。 眞黃花牧隱詩。松柏夢中靑李塏詩

申相國欽。號象村。天姿英敏。高材間世。年纔十餘。文名已振。時有宋君眉老頗解東坡。又有能詩聲。世之學東坡者皆歸焉。常聚學徒試詩賦。年少才名之士聞風爭赴。有同黌序戰藝之場。公時年十四亦預其中。容貌玉雪。擧止端雅。人皆起敬。不以童丱待之。方其製述也。分明別類。吟詩咏賦詞鋒正鬧。公靜坐一隅。不持一卷書。不觀他人之作。日旣方中。獨自展紙。書賦旣訖。連寫詩篇。淊편002淊편003 傑製。筆不暫停。兩篇俱成。詞氣老蒼。滿庭多士咸來聚觀。嘖嘖稱嘆曰此必眞仙降世間。寧有此等奇才乎。皆閣筆斂手氣色摧阻。莫敢相衡也。宋君讀來不覺擊節曰文章手段已成。非吾所敢下手。必稱天才竟置魁。欲招公見之。則公已還家。蓋厭其稱譽也。公與余同庚。始識面於宋公家。後同直玉堂。言及當時試製之事。相與敍舊。公年二十中司馬一等。二十一登第。淸名雅望朝野倚重。年僅四十。已躋六卿。嘗典文衡。位至領議政。享年六十三謚文貞。一生淸白。秉心忠亮。世稱賢相。有集行于世。

李延平貴。字玉汝。奇偉不凡。氣節磊落。敢言無忌。不拘小節。嘗與李漢陰相國德馨。朴公慶新尹君暹。爲同閈學伴。相會一處。問命途於卜者李麟命。麟命曰李公爲第一。漢陰次之。其餘亦登第。而皆是平平之命也。李公不屑屑於擧子業。故才名最下。朴公慶新年最少氣最銳。忽驚起拍掌大笑曰以玉汝爲首乎。何物麟命汝卜休矣。後漢陰位至領相。年僅五十三而卒。朴公爲嘉善監司。年踰六十。尹公以弘文應敎。年纔四十歿於戰陣。李公登第累陞至嘉善。協翊景運爲靖社元勳。歷判兩銓位至府院君。際會風雲功名赫然。年七十七而卒。二子封君一子爲通政。子孫繁衍簪組盈門。眞希世之大命也。延平每言朴公之事而笑之。又朴公楗。氣質醇厚。風儀朴古。擧心任眞。今韓平君李公慶全。少豪俊文名藉甚。與一時才名之士柳克新金時獻白振民諸人。任俠玩世。調笑朴公。使不得支堪。朴公常鬱鬱。困悴亦不相較。適泮宮試製。朴公入格。鵝溪相國時爲太學士。始見朴公。歸語其胤韓平曰。朴楗必爲宰相。壽福亦遠。諸年少輩聞之侵侮尤劇。後柳白兩人皆早世。金公爲參判年五十而歿。朴公官至判書策勳封君。恩眷日隆。氣勢張甚。享年亦年七十。蓋延平豐功偉烈忠直氣槩。非朴公所可企及。而其混於塵埃。人所不識則一也。識者曰人之賦命初不以才貌區別。有才者。不必期敭。貌寢者。亦享壽位。天道杳茫不可以常情預度。恃才傲物宜愼之哉。

鄭參判協字和伯。議政彥信之子也。天性仁厚。局量弘遠。平生無疾言遽色。待人接物都是一段和氣。幼時嘗見路上丐者。寒凍幾死。卽脫綈袍以給。友人正字崔仁範捐世。窮無以爲措。以其嚴府軺軒所藉虎皮賻之。以助買棺。亦麥舟之義也。壬辰倭亂。率家屬避亂到一津頭。舟人索高價。艤舟彼岸。有士族流離者。奉老親屯聚江邊。終日不得渡。公見之惻然。招舟子卽解行橐盡給衣服。又代給士族者之舟直。先渡士族後始濟家屬。舟人義之。欲還其直。公不受。其士族邈然曾不相識。又不知代給舟價。舟人言之始乃驚歎。不覺感泣而去。其恤患之義濟物之仁。天品自然。少無作爲。尤所難及也。又能文尤長於詞賦。爲乙酉司馬魁。又魁庭試。以直赴登第。卽選授弘文正字。歷敭華顯。屢拜三司長官。與余交分有素。丙午余丁外憂於金浦地。公極力經紀初喪。以訖襄葬。一家病患周旋藥餌。盡心救護。隔江四十里之地再度來見。結髮交誼終始不衰。其宿德重望藉甚一時。人皆以公輔期之。官至吏曹參判。卒患風病。欲便調養。退居於果川農舍竟不救。年僅五十一。朝野莫不驚悼。行路爲之垂涕。仁而不壽位不滿德。嗚呼惜哉。公有一子。名世美。登第亦歷華貫。嗜酒成病。甲子余以奏請使越海赴京。鄭君世美。時以長淵府使來餞於鳳山。酒病已痼。形容換脫。余竊憂之。戒酒慇懃。臨發長淵追到于十里之外。執余手揮淚而別。翌年夏余回還。來到定州。始聞長淵已逝。余却肉悲傷者累月。今聞長淵之子登第。是知善人其必有後。天道可謂不昧矣。 世美子攸

世宗大王在潛邸時。與諸大君王子會宴于濟川亭。時適有科擧。遠方士子連絡渡江。彌滿於渡口。世宗望見一儒士。於稠衆中使人指示曰彼其色衣某樣人。汝往招來。其人果承招來謁。世宗待以賓禮問其姓名居住。對曰玄錫圭。家在嶺南某邑。世宗錫語繾綣。設盛具以饋。其人跋涉遠路。衣冠藍縷形容瘦悴。滿坐無不怪訝。世宗顧謂左右曰此間有處子者乎。孝寧大君訝信聖明。對曰孫兒瑞原君有處子方求婚矣。世宗曰欲得佳婿無踰此人。孝寧曰門戶似不相敵。世宗曰自古英雄豪傑之士多出於草野。若是士家子決意定婚。後瑞原審問之。其人乃嶺南巨儒。才名方振。遂納爲壻。玄公後登第歷敭淸顯。爲時名卿官至參贊。世宗於百步之外偶一望見。能知達人貴客。大聖人識見敻出尋常萬萬矣。孝寧乃余外先祖。而李贊成直彥。孝寧直孫。故每言此事。而嘆異之。

鄭相國昌衍。素剛正。其爲掌令也。弘文校理許銘。新結國婚。氣勢方熾。其子㬚性行狂悖。日與無賴之徒縱酒挾娼。打傷人物貽害閭閻。國人苦之。鄭相發吏捕之重加刑訊。亂類散落。都下帖息。至今聞鄭公之風者。莫不嘆服。近來有勢家之子。橫行白晝。殺越人命。㥘辱朝紳。狂縱之行十倍於許㬚。而爲臺官者。皆畏縮無一人發言。法綱廢墮。風俗日敗。世道安得不至於此。良可嘆也。

自古賢邪迭進。治亂相乘。此乃有國之常事也。我朝百年以前雖不敢知。而中古以來。權奸之擅弄威福。戕殺士類者。不爲不多。而及其勢力摧殘。或於身歿已久。始得追論。如己卯之衮貞。乙巳之芑元衡是已。至於梁贊成淵之爲大憲。奇判尹大恒之爲副學也。當金安老李樑。方在其位氣焰張甚。乃敢抗論誅竄。風節凜烈。至今稱快。又有朴大憲應男。獨持風采。振肅頹綱。有古直臣風矣。一自朝家分黨之後。臺閣索然。其所論劾。只一邊異己之人。人心不服公議幾熄。所可幸者。追崇入廟士論崢嶸。三司言事之官相繼斥逐。猶未悛悔。餘論未息。足以見祖宗培養士氣。而國脈之扶持者。亦以此也。嗚呼可尙矣。

歷代賢臣碩輔不爲不多。而漢唐只稱蕭曹丙魏房杜姚宋。於宋但有韓范富馬。皆享國三四百年。而代各四人而止。則相業之難尙矣。我朝前有黃翼成喜。許文敬稠。後有鄭文翼光弼。李忠正浚慶。翼成德量宏深。文敬天資正直。身逢聖主。措世太平。文翼當北門之變。牢裾泣諫。救護士類。忠正際危疑之日。定策迎聖。奠安國步。功名事業前後一揆。竝稱賢相不亦宜乎。至於宣祖大王在位最多。壬辰寇難。千古所無。重恢舊業。再造邦域。實出於事大至誠。而共値艱危。宣力克復。協成中興之績。如柳公成龍之儒雅。李公元翼之忠亮。李公德馨之重望。李公恒福之碩德。當儷美於黃許諸人而無讓矣。其他文章德業鎭物礪俗。允愜具瞻之望者。代不乏人。而其間臧否必有後世之公論矣。古人云。願爲良臣不爲忠臣者。良以此也。

朴同知慶業。挹翠軒誾之孫也。性忼慨偏執。始爲正言也。吏曹判書李公墍之子。爲通津縣監。治邑無形。人莫敢誰何。朴公卽爲劾罷。又崔公瓘。方出入三司。時名甚盛。其父爲龍岡縣令。一境怨苦亦未有發言者。朴公又駁之。皆人所難爲也。朝野拭目。直聲大振。其後屢爲臺諫。稍有不愜於公議者。不避權貴。奮然論劾。一月罷斥幾至十二三人。臺閣風生。人皆側目。以此積怨已久。訾毀旋起。遂至蹇滯。屢典州郡頗有治聲。而樹敵旣廣。動輒得謗。連被臺評。人以爲喜駁之報云。蓋朴公以孤跡。不量時勢。徑情直行。其不遇於世坎軻不振。勢所然也。其劾吏判之子。論崔公之父。雖古之鯁直爲名者。蔑以加焉。與末世居言責。而畏首畏尾者。不可同年而語矣。此乃朴公之長處也。

○丁酉之亂。余自湖右移寓於金浦弊庄。其五里許有趙君憲先墓。嘗聞故老之言。辛卯秋趙君來省墳塋。連日痛哭。鄕隣親舊有來見者。趙君必噫噓長嘆稱以永訣。人皆怪訝。問其所以。趙君曰明年必有兵亂。地無南北。人皆死亡。此後相見爲難故也。時昇平二百年。人不知兵革。始聞趙君之言無不驚駭。指以怪妄或有避去者。又往見邑宰言國家當被兵禍。縣令李調惡其妖誕。待之落莫。趙君頗怏怏。有老儒趙安賢者。趙君之族叔也。年高有行。趙君常敬事之。從容謂趙君曰聞君席藁持斧。上疏闕下。多有嗤點者。今胡妄言。驚動鄕人。須更詳量。趙君奮然曰吾仰觀天象。明年兵亂自東方。開闢以來未有之大變。願叔勿以吾言爲妄。預爲避亂之計。趙生不敢復言。翌年夏果海寇長駈。八路鼎沸。萬姓塗炭。廟社丘墟。乘輿播越。一如趙君之言。豈不異哉。趙君始釋褐爲校書正字。入直香室。慈殿有供佛事。使趙君封香以進。趙君曰此室之香只用宗社。及祀典所載。佛事之香。臣雖萬殞。不敢封進。中官往復再三。終始牢拒。慈殿竟不用。聲名由此始振。聞者欽歎。趙君慷慨。博覽羣書。又精解天文。目見時事日非朋黨益熾。瀝血陳疏前後屢千言。言甚剴切。觸忤當路。時人目爲怪鬼。擯之不用。低徊於鄕學提督之任。後趙君退居於報恩。以訓誨諸生爲己任。門徒甚盛。壬辰之亂。奮義起兵。遠近聞趙君之倡義。爭先應募。旬月之間多至數千人。遮截於湖南賊路。多有斬殺。轉鬪至錦山。爲賊所敗而死。一軍聞趙君之沒。爭相赴死。時稱田橫之客。朝廷嘉之。贈以參判。兩湖門生裒財伐石。請於尹文貞根壽。豎豐碑於戰亡處。乙卯余爲全羅監司。操文往祭。趙君抱才不售。雖與世抹摋。値時大亂。能建卓異之節。不亦韙哉。然齎志空歿。惜哉。

古人以父子嬉戱爲不祥。眞格言也。朴判書忠元之子啓賢。亦爲判書。皆以一時名卿。父子相戱。至樂融融。朴公年七十。子判書先逝。朴公痛傷沈痼。數年後繼卒。鄭監司孝成之子百昌。亦爲京畿監司。每相調戱。諧笑怡悅。子監司先歿。鄭公時年七十六。悲哀喪性。今爲廢疾之人。雖係命道之脩短。亦由天道惡盈。造物多猜也。洪政丞彥弼之子政丞暹。時爲判書。洪公家法嚴正。判書非着表衣。則不敢入謁。賓客之來。政丞若不預。則使判書接待。布衣儉素言貌謙遜。初見之人不知爲判書。後乃聞之不覺驚嘆。判書嘗乘軺軒。大夫人喜深。言於政丞。政丞瞿然。卽招判書嚴責曰。吾方居相位。汝今又判書。恒懼盛滿。汝何敢晏然乘軺。非一家之福也。因使判書乘軺周匝於庭中。判書惶恐。更不敢乘軺。其謹愼如此。政丞享年七十四謚文僖。配享仁宗廟庭。判書常兼大提學三爲領相。卒年八十二。文獻傳家世稱賢相。是知父子之間孝敬爲先。冠冕之家謙謹爲主。爲人子者。不可不愼也。

 

   옛 예(例)에 성균관에서는 해마다 인일(人日)이나 다른 절일(節日)에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는데, 이때 정부(政府)ㆍ관각(館閣)의 당상들이 모두 모여 의자에 걸터앉으면 모든 유생들은 뜰에서 절을 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지관사(知館事)가 되고서, 비로소 참고관(參考官)인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뜰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뵙는 예법인데, 본보기가 되는 곳에서 유생을 이렇게 만홀하게 대접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유생은 읍(揖)을 하고 모든 재상들은 의자 앞에 서서 받아서, 선비를 우대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했다. 이 말에 모든 사람들도 옳다고 하여, 이것이 지금까지 정한 법이 되었다.

한산(韓山)은 문헌서원(文獻書院)이 이루어지자, 모든 유생들은 가정(稼亭)ㆍ목은(牧隱) 부자의 좌차(坐次)가 서로 나란히 있는 것을 의심해서 서울에 사는 자손들에게 물어왔다. 나는 여러 늙은 선비들에게 물었으나 모두 이를 결정짓지 못하므로, 상공 이항복(李恒福)에게 물으니, 상공은 말하기를,

 

“오기량(吳紀亮)과 아들 즐(騭)이 부자가 모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는데, 조회 때마다 임금이 운모병(雲母屛)을 주어서 떨어져 앉도록 했으니, 지금도 장자(障子)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이오.”

 

하므로, 드디어 상공의 말과 같이 장자를 놓고 앉도록 하였다. 상공은 풍채가 준위(俊偉)하고, 청백(淸白)하여 절개를 숭상했으며 또 문장에 능했다. 폐조(廢朝) 때에 바른 말을 하다가 멀리 귀양가서 변방에서 졸하니, 백성들이 모두 마음 아파 하였다.

명묘(明廟) 때, 참찬 조언수(趙彦秀)가 특진관으로 경연에 들어가 모셨다. 상이 묻기를,

 

“공부(功夫)라는 두 자의 뜻이 무엇이오?”

 

하니, 좌우 사람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때 조공(趙公)이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공(功)은 여공(女功)이요, 부(夫)는 전부(田夫)입니다. 이 말은 선비가 부지런히 배우는 것은 마치 여자가 길쌈을 부지런히 하고 농부가 농사를 힘써 하는 것과 같이 하라는 뜻이옵니다.”

 

하니, 상은 이 말을 아름답게 여겼다.

선묘(宣廟) 초년에는 하루에 세 번 경연을 열었다. 이때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이 부제학으로서 항상 경연에 나가 강(講)을 올렸다. 상은 본래부터 미암의 배운 것이 많은 것을 소중히 여겼던 터이므로, 그를 돌아보고 묻기를 열심히 하여 해가 기울어도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시경(詩經)》 석서편(碩鼠篇)을 강하는데, 상이 묻기를,

 

“쥐는 천하고 보기 싫은 물건인데 어찌해서 육갑(六甲)의 첫 머리에 두는 것인가?”

 

했다. 미암이 대답하기를,

 

“쥐는 앞발에 발톱이 네 개이고, 뒷발에 발톱이 다섯 개입니다. 그래서 음양이 상반(相半)되기가 이 물건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밤중에 음이 다하고 양이 생기는 뜻을 취해서 이 자(子)로 12시의 첫머리를 삼는 것입니다.”

 

했다. 상은 이 말을 듣고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선묘조(宣廟朝)에 우리 장인인 신공(申公) 담(湛)이 부제학으로서 경연에 입시했는데, 강이 끝나자, 상은 역대의 명필(名筆)들은 논하다가 이르기를,

 

“요새 보니 설암(雪菴) 병위삼(兵衛森)의 필법이 가장 힘찬데 설암은 어떤 사람인가?”

 

했다. 좌우 신하들은 혹 중이라고 대답했으나 장인은 말하기를,

 

“설암은 이부광(李溥光)의 별호(別號)로 조맹부(趙孟頫)와 한 시대 사람으로 원(元) 나라 사람입니다.”

 

했다. 상은 또,

 

“궁체(宮體)란 무슨 뜻인가?”

 

하니, 장인이 또 대답하기를,

 

“진(陳) 나라 후주(后主) 때 강총(江總)이란 사람이 글씨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써서, 이것을 궁중에서 본받아 썼기 때문에 궁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양(梁) 나라 서이(徐樆)도 역시 궁체를 썼습니다.”

 

하였다. 장인은 집에 돌아가서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문관들이 모두 글을 읽지 않아서 심지어 궁체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진욱(陳郁) 선생은 글을 잘해서, 여러 번 과장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그 문(文)과 부(賦)는 선비들의 글짓는 정식(程式)이 되어 베껴다가 외는 자가 꽤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김모재(金慕齋) 선생에게 글을 배워서 학문과 조행(操行)이 당시 동류들의 추앙을 받았으므로, 전관(銓官)은 그가 과거에 떨어졌다 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였다. 그는 여러 유생들을 가르치는데 반드시 효도와 우애를 먼저 하니, 배우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나도 역시 가서 《한서(漢書)》를 배웠었다. 선생은 항상 모재(慕齋)를 일컬어, ‘천품이 영특하고 밝으며, 총명과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고, 또 이학(理學)이 고명하며 문장이 전아하다’고 했다. 또 모재는 감식(鑑識)이 신과 같아서, 남이 지은 글을 보면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의 궁달(窮達)과 수요(壽夭)까지도 아는데, 이것은 열에서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 후학을 이끌어 가르치되 성의를 다했으므로 회재(晦齋)ㆍ퇴계(退溪) 두 선생도 모두 선생을 뵙고 비로소 학문하는 방도를 알았다고 하니, 그 도를 보호하고 학문을 밝힌 공로가 또한 크다 하겠다. 다만 행동을 너무 천진스럽게 하고, 꾸미는 것에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쳐다보면 처음에는 어둡고 소홀한 것 같지만 가르침을 받아보면 따뜻하기가 옥과 같고, 언론이 화평하여 마치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선생이 돌아간 뒤에 선비들의 의논이 ‘문묘에 종사하도록 소를 올리자.’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선생이 평소에 재산을 불린 것이 흠이 된다.’고 하여 그 의논이 중지되었다. 진선생의 벼슬은 현감에서 그쳤다.

○ 신정(申瀞)은 문충공(文忠公) 숙주(叔舟)의 아들인데, 나이 30도 되기 전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일찍이 이조 참판(李朝參判)으로서 좌리정훈(佐理正勳)에 기록되어 공신이 받아야 할 노비는 정수대로 이미 다 받았다. 고령현(高靈縣)에 사노(寺奴) 부자(父子)가 살고 있는데 한 도(道)에서 제일 부자라는 것을 듣고 그들을 차지하려고 계획을 하다가 어찌할 방법이 없자, 드디어 어보(御寶)를 위조해서 공문(公文)을 내어 독촉하다가 일이 탄로되어 옥에 갇혔다. 성묘(成廟)는 매양 신숙주의 공로를 생각해서 그의 죽음을 면하게 해주려고 했다. 어느 날 밖에 거둥하다가, 금부(禁府)의 앞길에서 연(輦)을 멈추고 신정을 명하여 앞에 불러오게 하여 순순하게 하교하기를,

 

“네가 대훈신의 아들로서 지금 사형을 받게 되었으니 내가 몹시 측은하게 여긴다. 네가 만일 진실을 말하고 잘못을 뉘우친다면 지금이라도 너를 석방하여 네 아버지의 훈로에 보답하려 한다.”

 

했다. 그러나 신정은 어려서부터 귀하게만 자라서 성질이 교만했다. 얼굴에 오히려 분한 기색을 띠고 한결같이 숨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묘(成廟)는 이르기를,

 

“미련하게 고집이 있는 사람이로군!”

 

하고, 도로 하옥시키도록 명하고 금부(禁府)로 하여금 그의 죄상을 의논하게 했다. 이때 판부사 강희맹(姜希孟) 등이 아뢰기를,

 

“신정은 몸이 재상에 있으면서 어보를 위조했으니, 법에 비추어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하니, 성묘는 즉시 이를 윤허하였다.

신정의 집이 우리 마을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 자손들에게 ‘어보를 위조한 것은 그의 집사람이 한 일이요, 신정은 실상 모르는 일이다.’라는 내용을 들었다. 그 뒤에 나는 동지춘추(同知春秋)로서 실록의 사신론(史臣論)을 보았는데, 거기에,

 

“신숙주는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었는데, 그 시체가 식기도 전에 그 아들 신성이 제명대로 죽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이로 보아 그 자손들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닐 듯하였다.

송평(宋枰)은 역시 우리 마을 사람이다. 일찍이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로 있을 때 의녀(醫女) 하나를 첩으로 두었다. 그는 자문지(咨文紙)한 장 으로 전모(剪帽)만들어서 그 여인에게 주었다. 대관(臺官) 중에 그 여인을 데리고 살던 자가 있었는데, 그 혐의로 송평을 탄핵하여 장죄(贓罪)로써 하옥시켰다. 송평은 본래 성질이 굳셌다. 발끈 성을 내어 말하기를,

 

“내 비록 죽을지언정 어찌 이 형장(刑杖)을 받는단 말이냐?”

 

하고, 이에 죄를 받고 말았으므로, 드디어 장안(贓案)에 기록되어 그 자손이 금고(禁錮)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증손 송복견(宋福堅)이 문과에 올랐으나 청현(淸顯)한 벼슬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시원치 않은 반열로만 돌다가 통례(通禮)로서 당상관에 올랐으며, 현손 송거(宋鐻)가 비로소 주서(注書)와 양사(兩司)가 되었으나, 겨우 시정(寺正)으로 그치고 말았다.

송평이 녹안(錄案)된 지 3년 후 성묘(成廟)가 경연에 납시어 좌우에게 묻기를,

 

“송평은 필경 그 계집을 버렸겠지?”

 

하니, 좌우가 대답하기를,

 

“지금도 오히려 집에 데리고 있다고 합니다.”

 

했다. 이 말을 듣고 성묘는 아무 말도 없었다. 대개 송평은 종이 한 장 때문에 몸이 큰 죄에 빠지고 그 오명을 자손에게까지 전해지게 하였다. 성묘가 일찍이 그 죄를 용서해 주고자 하여 이렇게 물었건만, 송평은 오히려 뉘우치지 않았으니, 계집에게 혹해서 그 본 마음까지 잃은 자라 할 수 있다. 조종조(祖宗朝)에서 장법(贓法)을 제일 엄하게 다스렸으니, 이것은 신정과 송평의 일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묘의 신하를 가엾게 여기는 그 어진 마음은 지금까지 사람을 감동하게 하니, 이야말로 동방에서 성덕을 갖춘 임금이라 할 만하다.

내가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있을 때, 당상 문관 하나가 권세가 혁혁하였는데, 재물을 탐함이 한량이 없었다. 그리하여 황주(黃州)에서 사재(司宰)ㆍ제용감(濟用監)에 드리는 공물을 방납(防納)하자면, 원래 정가는 면포 50동(同)이었는데, 병사(兵使) 정항(鄭沆)이 잘 보이기 위해서 여기에 5동을 더 받아서 그 당상 문관의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갖춰 납입할 생각을 하지 않으므로 두 감(監)에서는 글을 보내어 감영(監營)에 계속 재촉했다. 그래서 감사(監司)가 색리(色吏)를 잡아다가 형신(刑訊)을 가하고, 본주(本州)에서는 사람을 그 집에 보내서 바치기를 재촉하면, 관청의 위엄으로써 가두기 때문에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채 3년이 지났다. 정항(鄭沆)이 벼슬이 바뀌어 돌아가자, 병사(兵使) 권여경(權餘慶)이 후임으로 왔는데, 그 역시 당상 문관의 풍지(風旨)를 받아서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했다. 판관(判官) 신수을(愼守乙)이 토산물을 많이 갖추어서 한 바리를 가득 실어 보내면서 편지로 애걸했다. 그러나 그 물건만 모두 받아들이고서 역시 회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수을은 사람을 만나는 대로 그 이야기를 하니, 당상 문관은 이 말을 듣고 미워하여 대간(臺諫)을 시켜 공박하여 제거하게 했다. 권여경이 다시 면포 50동을 민간에서 거두어들이니, 그때는 마침 메마른 여름철이어서 원망과 비방이 떼지어 일어났다.

나는 항상 그 사람됨을 분하게 여겨 왔었다. 계해년(1623, 인조 1) 반정(反正) 초기에 나는 또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 그 사람은 백성의 밭을 빼앗아 점령하여 홍주(洪州)ㆍ천안(天安)ㆍ아산(牙山)ㆍ온양(溫陽) 등지에 넓게 둔전(屯田)을 여섯 곳이나 만들어 쌓은 곡식이 수 천 석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여러 고을에 공문을 돌려 개인 소유의 둔전을 없애게 하니, 그곳에 들어살던 무리들은 일시에 도망해 흩어지고 곡식과 소는 관청에서 몰수해 들였다. 성스러운 교화가 더욱 새로워지고 공정한 의논이 바야흐로 널리 펴져, 그 사람 부자는 각각 먼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또 역적의 구초(口招)에서 그들의 말이 나와서 부자가 모두 잡혀 옥에 갇히고 가산은 모두 없어져서 좋은 집 세 채가 헐값으로 권세 있는 집에 다 팔렸다. 오래된 뒤에 겨우 풀려났으나 도로 배소(配所)에 가게 되어 그 아비는 적소(謫所)에서 죽었다. 지금은 비록 방환(放還)되었으나 호서(湖西) 지방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궁하고 파리한 모습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재물 탐하는 자를 족히 경계한다고 하겠다.

이근(李謹)이란 자도 역시 나와 한 고향 사람으로 대대로 문벌이 좋은 집안이다. 처음 날 때 몸뚱이 하나가 겨우 면목(面目)을 갖추었을 뿐으로 털이 온 몸을 덮어 마치 돼지 새끼와도 같았다. 부모들이 놀라고 괴상히 여겨 처음에는 키우지 않으려고 포대기에 싸서 동산 가운데 나무 밑에 두었더니, 어린애의 우는 소리를 듣고 까마귀떼가 모여 들었다. 부모는 이를 불쌍히 여겨 다시 거두어 길렀는데, 성인이 되었는데도 키가 석자를 넘지 못하고 머리털이 땅까지 내려오고 수염이 한 자나 되었다. 걸음걸이는 휘청휘청하고 손발에도 모두 털투성이어서 참으로 난장이 중에도 난장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근 자신도 자기가 병자인 줄을 알고 사람만 보면 문득 숨고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집에서 글을 배우는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책을 덮고서도 줄줄 외어, 경전(經傳)이나 사기(史記)에 정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글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는데 그 중에서도 시에 가장 능했다.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고 휘파람을 잘 불었으니 대개 그의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문족(門族)인 장계(長溪) 황정욱(黃廷彧)이 기이하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보았다. 처음에는 몹시 해괴하게 여겨 입으로 불러 시를 짓는 것을 시험해 보았다. 그는 운자를 내기가 무섭게 바로 시를 짓는데 그 대구(對句)가 몹시 아름다웠다. 장계는 크게 칭찬하기를,

 

“이런 기이한 재주가 있는데 타고난 형상이 남과 다르니, 어찌 아까운 일이 아니랴?”

 

하고, 드디어 그의 부모에게 권하여 장가들이게 했다.

임진왜란 때 이근은 광주(廣州)에 있는 선산 근처로 피난했다. 거기에서 졸지에 여러 왜적을 만났다. 왜적들은 그를 보고 크게 놀라 괴상한 짐승이라 생각하고 우뚝 서서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보고 난 뒤에 잡아 가지고 서로 웃고 놀리더니 기화(奇貨)라고 여겨 마주 들고 그들의 추장에게 갔다. 왜추(倭酋)도 역시 놀라고 괴상히 여겨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별하지 못하여 혹은 먹을 것을 던지기도 하고 혹은 회초리로 때리기도 하여 우는가, 먹는가를 시험했다. 그러나 이근은 본래 뜻이 굳고 용기가 있어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으므로 왜추는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어떤 늙은 왜인 하나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저 물건을 왜 빨리 죽이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조선에서 편전(片箭)을 쏘는 것들이다.”

 

하니, 모든 왜인들이 모두 분이 나서 칼을 빼어 베이려 하자, 왜추는 힘써 말리고 밤이면 죽롱(竹籠)에 넣어서 도망가는 것을 막았다. 또 점치는 중을 불러다가 그를 두고 점을 치라고 했다. 이때 왜승(倭僧)이 옥 산통(算筒)을 던져서 괘를 지어 말하기를,

 

“사로잡은 것은 곰도 아니요 범도 아니며, 이것은 바로 문왕(文王)이 여상(呂尙)을 얻을 징조이니, 어찌 기이한 물건을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왜추는 크게 기뻐하여 조심하여 더욱 정성껏 대접하였다.

왜추가 진을 친 곳은 바로 한강 제천정(濟川亭)이었다. 이때는 마침 7월 보름이어서 달빛이 대낮과 같았고 강의 물결은 마치 마전한 베처럼 잔잔했다. 밤 기운은 쓸쓸하고 벌레 소리는 찍찍거리는데 가을 소리는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근은 홀로 앉아 잠이 들지 않아 백 가지 생각이 가슴 속에서 일어나므로 죽롱 속에서 길게 휘파람을 부니 그 소리가 처량하여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모든 왜병들은 놀라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왜추도 이 소리를 듣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나라 떠나온 생각을 이기지 못해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그러자 비로소 죽롱을 열고 이근을 내놓으면서도 말하기를,

 

“무슨 괴물이 이렇게 기이한 재주가 있느냐! 저번에 신승(神僧)이 점친 것이 헛말이 아니로구나.”

하였다. 이근은 스스로의 생각에, ‘내가 나면서는 이 세상의 이상한 물건이 되었고 죽어서는 적에게 잡혀가는 혼이 되겠으니, 사람이 이 지경이 되어 만 가지 일에 무엇을 관계하겠는가. 지금의 방법으로는 내가 요행히 이곳을 벗어나서 혼자 계신 어머님을 뵙는 것 뿐이다.’고 여겼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말하며 웃어대니, 왜추가 술을 주면서 마시라고 권했다. 이근은 주량도 또한 커서 병을 기울여 마음껏 마시고 술이 취하자 길게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초사(楚辭)는데, 온 진중의 모든 왜병들이 모두 감동해서 울었다. 노래가 끝나자 이근은 일어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로 돌면서 머리를 흔들고 눈망울을 굴리고 손벽을 치고 발을 구르는 등 백 가지 모양을 다하니, 모든 왜인들도 또 손벽을 치며 크게 웃었다. 춤이 끝나자 이근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목놓아 슬피 우니, 이것을 본 자들도 모두 울었다. 왜추는 묻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피 우느냐?”

했다. 이근은 붓과 종이를 달라고 해서 써서 보이기를,

 

“80세가 되신 늙은 어머니와 헤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으므로 그래서 우는 것이오.”

하니, 왜추도 이 말을 듣고 가엾게 여기며 감탄했다. 그리고 그의 필적을 보더니 혀를 차면서 칭찬하기를 마지 않으면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물건이 몹시 괴이하고 이상하더니 이제 그가 하는 짓을 보니 또한 심상치가 않다. 이 물건을 만일 진중에 둔다면 반드시 요망스러운 일이 생겨서 도리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다. 잡아 두어봐야 유익할 것이 없고 죽이자니 차마 그럴 수도 없으니 차라리 놓아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 말을 듣고 모든 왜병들도 그 말이 옳다고 했다. 그래서 왜추는 이근에게 말하기를,

 

“네가 지금 집에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있으니 네 소원대로 해주겠다.”

했다. 그러나 이근은 왜추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고 말하기를,

 

“지금 길이 막혔으니 내가 가고 싶지만 어디로 가겠소? 이 진중에 있게 해주시오.”

하니, 왜추는,

 

“하여튼 말해 보라.”

하므로 이근은,

 

“강화(江華)로 가고 싶소.”

하니, 왜추는 진중에 잡혀와 있는 우리나라 사람 4ㆍ5명을 불러내어 조그만 배 한 척에 양식을 많이 준비해 주면서 강화로 보내주었다. 강화에 와서 들으니, 그의 외사촌 박경신(朴慶新)이 해주 목사(海州牧使)가 되었다고 하므로 이근은 바로 해주로 찾아갔다. 이근의 어머니는 목사의 삼촌 숙모이기 때문에 해주 관사에 와 있었다. 그래서 모자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아! 난장이는 천지간의 한 불구자인데 그 천한 재주를 가지고 적의 소굴을 벗어나서 늙은 어머니를 만나볼 수가 있었고, 또 나이가 70에 가깝도록 살다가 죽었으며 자손도 또한 많았으니, 어찌 하늘이 시킨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혹 남이 병이 있고 유약하고 어리석고 용렬한 것을 보면 반드시 비웃고 업신여기는데, 사람의 화복의 순환이란 사람의 일을 가지고 미리 짐작할 수가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이근의 일이 아! 또한 기이하지 않은가? 감사 박경신이 항상 이 말을 들려 주었다.

헌평공(憲平公) 이봉(李封)은 목은(牧隱)의 증손인데 글을 잘하여 이름이 있었고 그 성질이 엄격하고 굳세어서 사람들이 감히 사정(私情)을 가지고 청탁하지 못하였다. 그가 형조 판서가 되어 옥사를 다스릴 적에 법을 몹시 엄하게 써서 억울하게 죽은 자가 또한 많았다. 동종(同宗)인 토정(土亭) 이공 지함(李公之菡)이 항상 말하기를,

 

“헌평공이 돌아간 지 지금 백여 년이 되는데도 그 자손이 미약해서 겨우 비렁뱅이만을 면하고 있음은 어찌 형옥(刑獄)을 엄하게 다스린 응보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형관(刑官)이 된 자는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나는 두 번 형조 판서가 되었지만, 매양 토정의 말을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깊이 생각하곤 했다. 이것이 어찌 한 가지 도움이 아니겠는가?

우리 일가에 이공 지번(李公之蕃)ㆍ지무(之茂)ㆍ지함(之菡)은 모두 동복 형제간이었다. 맏이와 막내는 재주와 행실이 일찍이 뛰어났고 명성이 더욱 자자했다. 맏이는 퇴계와 가까이 사귀어서 자못 봉마(蓬麻)의 유익함이 있었고, 막내는 이학(理學)에 통달하여 학자들이 모두 그를 토정 선생(土亭先生)이라고 불렀다. 이들 형제는 모두 지리(地理)를 알았는데, 그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맏형이 그 막내아우에게 말하기를,

 

“한산(韓山)에 계신 선묘(先墓)는 산세가 낮고 미약해서 항상 비습(卑濕)한 것이 걱정되니 이번에 딴 곳을 골라서 옮겨 모시도록 하자.”

했다. 이리하여 형제는 호서(湖西)의 여러 산을 두루 돌아 보았는데, 여러 달이 지나도록 결정짓지 못하였다. 어느날 홍주(洪州) 오서산(烏鼠山)에 올라, 사방으로 근처 고을의 산 모양과 물 형세를 바라다 보고 탄식하기를,

 

“이런 명산이 우리 고을 가까이에 있는 줄을 몰랐구나.”

했다. 이는 공의 형제가 항상 보령(保寧)을 왕래했기 때문에 이곳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은 주산(主山)에서 10여 리를 뻗어 내리는 동안 혹은 우뚝 솟기도 하고 혹은 낮기도 하여 마치 말이 빨리 달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형세가 꼭 바닷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듯하다가 바다에 다다라서는 멈추어 천 길이나 되게 우뚝 솟았다. 또다시 산세는 구불구불 흘러 내려가다가 들 복판에서 맺혀져서 조그만 언덕을 이루어 모양이 마치 누워 있는 소와 같았다. 앞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서 넓게 끝이 없고 또 온 섬의 봉우리가 뾰죽뾰죽 바로 그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고만(高巒)이라고 부르는데, 혹은 고려 때 만호보(萬戶堡)라 불리기도 했다. 맏이가 여기에 올라가 보고 기뻐하여 비로소 묘자리를 정하고 저물어서 산밑에 있는 어촌에서 잤다. 그 이튿날 주인 할멈이 맏이에게 묻기를,

 

“손님은 어디서 오셨소? 어젯밤 꿈에 머리털이 하얀 늙은이가 모양도 기이하게 생겼는데 울면서 말하기를, ‘너희 집에 온 손이 장차 내 집을 뺏으려고 한다.’ 합디다.”

고 말했다. 맏이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필경 산신령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례를 모시려 할 때, 그 아우 토정에게 이르기를,

 

“장례를 모시고 난 뒤 기해년에는 우리 3형제가 모두 귀한 자식을 얻을 것인데 다만 너의 아들이 불행하겠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고 했다. 그 뒤 기해년에 맏이는 과연 아들을 낳았으니, 이 분이 바로 아계(鵝溪) 이 상공 산해(李相公山海)이고 그 가운데 분도 또 판서(判書) 산보(山甫)를 낳았다. 그리고 토정의 아들도 낳았는데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그 중에서도 뛰어났는데, 나이 겨우 2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편(詩篇)이 호서지방에서 전해지면서 외워지고 있다.

이 상공 덕형(李相公德馨)은 곧 아계(鵝溪)의 사위인데 그도 또 풍수설을 믿었다. 어느날 내가 마침 가서 뵈었더니, 상공(相公)은 바야흐로 지리를 잘 보는 승려 성지(聖智)와 함께 앉아서 산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묻기를,

 

“지리(地理)란 묘연한 것이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공은 말하기를,

 

“이미 천문(天文)이 있는데 어찌 지리가 없겠소? 다만 세상에 안목을 갖춘 지가 없어서 알지 못할 뿐이지요. 내가 일찍이 처가쪽 선대의 고만산론(高巒山論)을 보았는데 수십 년 뒤에 귀신같이 맞으니, 전혀 맞지 않는다고만 할 수는 없소.”

하였으니, 세상에서 풍수(風水)를 숭상하고 믿게 된 것은 실상 이씨(李氏)의 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맏이는 시정(寺正)의 벼슬을 하다 돌아갔고, 가운데 분은 일찍 돌아갔으며, 막내분 토정은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관에서 돌아갔다.

아계 이산해가 처음 났을 적에 토정이 그 우는 소리를 듣고 그의 맏형 이시정(李寺正)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이하니 잘 기르도록 하십시오. 우리 집이 이제부터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했다. 다섯 살이 되자 처음 병풍 글씨를 쓰는데 붓 움직이는 것이 신과 같고 글자 획이 완연히 용과 뱀이 달려가는 것 같았으므로 신동이라고 명성이 자자하여 당시의 공경(公卿)들이 와서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먹물을 발바닥에 칠하고 종이 끝에 찍어 어린 아이의 발자국임을 표시했는데, 인가에서 지금도 전해오면서 보고 있다.

나이 13세에 충청우도(忠淸右道)의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뽑혔으니, 그때 지은 글이 〈만초손부(滿招損賦)〉였다. 글 뜻이 노숙해서 글을 아는 자는 이미 그 문장의 수단을 알 수 있었다. 나이 겨우 약관에 과거에 올라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고 여러 번 이조 판서가 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공훈으로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맑은 명성이 있었다.

나의 고조 의정공(議政公)이 일찍이 꿈을 꾸니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이 와서 말하기를,

 

“내 집이 헐린 지 이미 오래되어서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 공만이 내 집을 지어줄 만하니 공은 잊지 말도록 하라.”

하므로, 고조는 놀라 깨어서 괴이하게 여겼다. 양경공의 종손은 한성군(韓城君) 이질(李秩)이었으므로 그를 불러다가 꿈 이야기를 했더니, 한성군이 말하기를,

 

“연산조(燕山朝) 때 찬성(贊成) 이파(李坡)가 폐비 사건으로 극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양경공은 찬성의 조부이기 때문에 그 무덤을 헐어버렸으나 자손이 미약하고, 또 묘가 한산(韓山)에 있게 때문에 아직 고치지 못했으니 필경 이 때문일 것입니다.”

했다. 고조는 이 말을 듣고 더욱 이상히 여겨 드디어 친 자제들을 보내어 봉분을 고쳐 쌓았다. 양경공은 의정공에게 고조 항렬이 되니, 그가 돌아간 지가 그때 이미 90여 년이 되었다. 이런 일로 보면 사람의 정백(精魄)이 오래 되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과 또 무덤은 죽은 사람의 집이 되는 것이 분명하니, 자손된 자는 먼 조상이라고 해서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요, 무덤이 무너진 것도 고쳐 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양경공은 목은(牧隱)의 아들이다. 내 고조의 휘는 유청(惟淸)이다.

우리 나라 음양(陰陽)은 모두 오행(五行)을 주장하여 온 지가 오래되었다. 자평(子平)은 사간(司諫) 김형(金泂)에게서 시작되었고 성요(星曜)는 서얼(庶孼)인 송사련(宋祀連)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형은 친구를 사귀는데 반드시 그 명도(命途)가 통달하게 될 것을 물색하였다. 그는 한 번은 무슨 일로 해서 옥에 갇히었는데, 이기(李芑)를 끌고 들어갔다. 그러자 기는 분하게 여겨 김형을 꾸짖기를,

 

“네가 어찌해서 나를 끌어댔느냐?”

하니, 김형이 말하기를,

 

“내가 잘못한 일도 없이 잡혀왔는데, 이러한 몹시 궁한 때를 당하여 백 가지로 생각하나 계교가 없어, 우리 친구들 중의 명수(命數)를 점쳐보니, 네가 가장 좋아서 반드시 정승이 되어 오랫동안 부귀를 누리겠기에, 너의 큰 복을 힘입으려고 끌어넣은 것이다.”

하였다. 이기는 도리어 크게 기뻐하더니 과연 모두 석방되었다.

송사련은 정승 안당(安瑭) 서매(庶妹)의 소생이므로 안씨의 집에 출입하고 가장 친하게 지냈다. 송사련은 안씨의 집이 반드시 망하고 자기 운수는 바야흐로 형통할 것을 알고, 드디어 안정승의 부인 초상 대 조객록(弔客錄)을 가져다가 역당(逆黨)이라고 지목하여 대궐에 들어가 고변(告變)했다. 이리하여 안씨의 집 4부자는 일시에 죽음을 당하고 송사련은 고변한 공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올라 나라의 녹(祿)을 40여 년간 먹다가 늙어서 자기 집에서 죽었다. 그 뒤에 비록 안씨 자손들이 그의 무덤을 파고 시체에 매질을 했지만, 당시에 일족(一族)이 모두 죽은 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상의 점 잘 치는 자도 또한 경계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 24)에 장악원(掌樂院)에서 기로연(耆老宴)을 열었다. 이때 정원(政院)에서는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가 있다 하여 예에 의하여 상께 아뢰어서 특별히 1등 기악(妓樂)을 내리도록 했다. 이에 중사승지(中使承旨)를 시켜 술을 내렸다. 이때 정승 김귀영(金貴榮)ㆍ정승 심수경(沈守慶)ㆍ지사(知事) 강섬(姜暹)ㆍ동지 송찬(宋贊)ㆍ우윤 목첨(睦詹)ㆍ대사성 이기(李墍)와 우리 장인 참판 신담(申湛)이 미리 모여서 시축(詩軸)을 만들어 경사를 도왔고 심정승이 시를 썼다. 장인이 항상 말하기를,

 

“기로연(耆老宴)이란 우리 동방의 성대한 행사로서 그 기구나 음식이 여기에 비교할 것이 없다.”

 

고 하는 것을 내가 일찍이 들은 바 있었다.

그 뒤 25년 만인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또 장악원에서 기로연을 열었는데, 역시 기악(妓樂)과 술을 내리기를 한결같이 고사에 의하여 했다. 나는 이때 도승지로서 중사(中使)와 함께 명령을 받고 가서 참여했었다. 이때에는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당시 정승으로서 잔치를 주재했으나 그는 기로(耆老)가 아니었다. 판추 한효순(韓孝純)ㆍ판추 노직(盧稷)ㆍ참찬 윤승길(尹承吉)ㆍ판서 이준(李準)ㆍ지사 이시언(李時彦)이 자리에 있었다. 휘장과 장막ㆍ병풍ㆍ족자 같은 기구나, 등촉(燈燭)과 채화(綵花) 따위의 화려한 것이나, 기악(妓樂)이 차려진 것이나, 음식의 풍부한 것이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여 자못 이 인간 세상의 일 같지가 않았다. 모든 노인들은 모두 여러 조정의 기로들로서, 쇠한 얼굴에 센 머리털을 날리고 서대(犀帶)와 금대(金帶)가 휘황하게 빛나고 머리에 꽂은 꽃은 모자를 눌렀는데, 술이 얼큰하자 서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니 음악 소리가 하늘에 울렸다. 잔치가 파하자 자제들이 부축해서 돌아가는데 연거(蓮炬)로서 앞을 인도하고, 노래와 관악이 뒤를 옹위하고 갔다. 이것을 보는 자는 칭찬해 마지 않으면서 모두 신선이라고 일컬었다.

 

 

그 뒤 20년인 을해년(1635, 인조 13)에 나는 벼슬이 1품에 오르고 나이도 도한 70에 이르러서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평생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것이라서 놀라움을 이기지 못했다. 이때에 정승 정창연(鄭昌衍)은 나이 85세이고 정승 오윤겸(吳允謙)은 77세, 정승 이정귀(李廷龜)는 72세, 정승 윤방(尹昉)은 73세, 정승 김상용(金尙容)은 75세, 판중추부사 정광적(鄭光績)은 86세, 판서 이홍주(李弘冑)ㆍ판서 박정현(朴鼎賢)ㆍ참찬 박동선(朴東善)은 모두 74세였고, 동지 이상길(李尙吉)은 나이 80에 가자(加資)되고 나는 나이 70이었다. 이해에 오윤겸ㆍ이정거 두 정승은 돌아갔으나 이듬해 병자년에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은 나이 70, 동지 송일(宋馹)은 나이 81로서 가자되어 역시 여기에 참여하여 도합 11명이었으니, 옛날에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평시에는 종2품의 문관 재상이 모두 참석해도 항상 7ㆍ8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난리 후로는 정2품 문관 재상만 참석하게 했는데도 항상 10여 명이 되었으니, 평시에는 재상의 직급이 드물었단 말인가. 아니면 난리 후에 오래 사는 이가 많아서 그런 것인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어찌 일대의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참판 박이서(朴彝敍)의 자는 석오(錫吾)로, 충후하고 선량하고 친구와 독실히 지냈는데 나와 가장 친하였다. 기미년(1619, 광해군 11) 겨울에 내가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있다가 벼슬이 바뀌어 돌아오니, 그 이튿날 석오가 찾아왔다. 그와 한참 동안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마침 맹인 지억천(池億千)이 또 왔다. 석오는 말하기를,

 

“이 맹인이 점을 잘 친다기에 내가 보고자 한 지가 오래일세.”

 

하고는, 조그만 종이에 다섯 가지 조목을 써서 주면서 나더러 물어 보라는 것이다. 나는 대강 인사를 끝내고 나서 곧 석오가 써 준 다섯 가지 조목을 물어보니, 지맹인(池盲人)은 말하기를,

 

“오는 신유년이 불길합니다.”

 

했다. 나는 또 묻기를,

 

“소위 불길하다는 것은 심상한 액환(厄患)인가?”

 

했더니, 지맹인은,

 

“점괘로 보면 큰 화액일 듯합니다.”

 

했다. 나는 듣고 몹시 무료했다. 석오는 나의 얼굴빛을 살펴보더니 비로소 자기가 친히 묻기를,

 

“이것은 바로 나의 운수요. 그런데 신유년에는 마땅히 죽을 운수란 말이요?”

 

하니, 지맹인은 본래 노신(老神)한 사람이라, 얼른 대답하기를,

 

“다시 생각해 보니 신유년에는 길성(吉星)이 구해주어서 슬하에 슬픈 일이 있겠고 75ㆍ76세에 명이 다하겠습니다……”

 

했다. 석오는 다시 더 묻지 않고 일어나 가버렸다. 그가 간 뒤에 내가 또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신유년에 반드시 횡사할 액운이 있는데, 아마 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석오는 과연 경신년 가을에 중국 서울에 가는데, 오랑캐가 요동(遼東) 길을 막는 바람에 수로로 가다가, 신유년 5월에 바다에 빠져서 죽었으니, 지맹인의 말이 과연 맞았다. 그 뒤 갑자년, 내가 주청사(奏請使)로서 수로로 중국 서울을 가다가 바닷가에서 석오를 제사지냈다. 을축년에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 등주(登州)에 이르러 배를 탔는데, 그날밤 꿈에 석오가 술병을 가지고 와서 나를 전송하면서, 은근히 정회를 말하는 것이 완전히 평시와 같았다. 꿈에서 깨고 나니 서글픔을 이기지 못했다. 배를 타고 6일 동안이나 오는데, 조금도 풍파가 없이 편하게 우리 나라 땅에 닿았으니, 어찌 이것이 석오의 영혼이 도와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평생에 서로 좋게 지내던 의리가 이승과 저승의 간격이 없었으니, 아! 슬픈 일이다. 석오는 나이 15세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고 바야흐로 중한 인망(人望)이 있어 남들이 모두 공보(公輔)의 자격으로 기약했는데, 물에 빠져 죽는 데 이르렀으니, 이보다 불행한 일이 있겠는가. 석오의 어진 인품으로도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아! 슬픈 일이다. 그 아들 박노(朴魯)가 지금 참판이 되었으니 진실로 위로가 된다.

하경청(河景淸)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성질이 굳고 기개를 숭상하여 일을 당하면 과감하고 남의 말을 피하지 않았다. 고 좌랑 송구(宋耈)와 한 동네에서 어린시절부터 친구였는데, 송공(宋公)의 조부가 안주 목사(安州牧使)가 되었을 때 하경청은 송구를 따라서 영변(寧邊)에 있는 절로 글을 읽으러 갔다. 이 절은 원래 관서(關西)의 거찰(巨刹)이어서 중이 가장 많이 있었다. 영변에 향리(鄕吏) 하나가 있는데 재산은 수 만금이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크게 무차회(無遮會)를 열고 아들 낳기를 빌었다. 이때 도내의 중들이나 이웃 고을의 남녀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어서 많은 사람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 법회가 있던 전날 밤 모든 제구를 성하게 갖추어 놓았는데, 하경청은 이때 총각으로 불탑(佛榻) 밑에 숨어 있었다. 밤이 깊고 인적은 끊어지자, 하경청은 칼을 가지고 숨어 들어가서 부처의 얼굴을 긁고 눈동자를 빼낸 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 누웠다. 송구로서도 역시 이것은 알 리가 없었다. 밤중이 되자, 시주하는 사람과 모든 중들은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고서 일을 보느라고 분주했다. 종소리와 범패(梵唄) 소리는 산골짜기를 진동하고 등촉(燈燭)은 휘황하여 대낮과 같았다. 그러나 불상을 우러러 보니 얼굴이 망가져 형용이 없고 이목구비는 다 한 구멍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는데, 한 덩어리 흙이었다. 모든 중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크게 놀라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시주한 사람의 내외는 목을 놓아 통곡하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늙은 중은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절의 큰 변이다. 이것은 부처가 필경 변화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했다. 비록 그러나 시주한 사람은 허다한 재물을 헛되이 소비한 것이 아까워서 드디어 옛 부처를 철거한 다음, 딴 부처와 바꾸어 놓고 무차회를 열었다. 하경청은 송구와 10여 개월을 안주(安州)에 함께 있었지만, 한번도 입을 열지 않다가 서울에 이르러 비로소 말을 했으니, 그 참고 견디는 것이 이와 같았다.

하경청은 훈도(訓導) 박주(朴洲)에게 공부를 했다. 홀(笏)의 표면에 큰 글씨로 고시천지명명(顧諟天之明命)이라고 쓴 다음, 가죽 띠와 가죽 주머니에 팔짱을 펴서 홀을 받들고 조심조심 걸어서 저자 거리로 지나가니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구경했고, 여러 아이들은 손으로 가리키면서 웃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얼굴빛을 변치 않고 종일토록 문을 닫고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을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하경청은 기질이 굳세고 또 참을성이 있었으며 뜻을 독실하게 갖고 힘써 배웠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원대한 희망이 있다고 기대했다. 난리 때에 관서훈도(關西訓導)가 되었으나 술을 많이 마시고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드디어 방탕하고 말았다. 그래서 전에 배우던 것을 모두 버리고 무관(武官)의 일을 익혀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벽단 첨사(碧團僉使)에 이르렀다. 그러나 파직당하고 안주(安州) 땅으로 가서 붙어 살더니 그 집의 풀가리에 불이 나서 타죽었다.

나는 하경청과 함께 이웃하여 살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그는 불행히 재주를 가지고도 쓰이지 못하고 비명에 죽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그가 제명에 죽지 못한 것은 부처를 헌 응보이다.”

 

고 하지만, 어찌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국조(國朝)에는 보필을 잘한 어진 신하와 도덕이 있는 선비들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문치(文治)는 고려조보다 나았던 것 같으나, 무략(武略)은 삼국시대만 훨씬 못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장수는 원래 이름난 사람이 없는데, 그 중에 김종서(金宗瑞)가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윤필상(尹弼商)이 건주위(建州衛)를 몰아낸 일이 족히 국위를 드날렸다고 하겠으나 이것도 옛날의 명장에 비교한다면 어린 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은 모두 영결들이니 처지를 바꾸어 태어났다면 그 공업을 측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크게 이긴 것이나,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에서 힘껏 싸운 것은 당시에 그 공이 으뜸으로서 실로 중흥의 근본이 되었으니, 이름이 청사(靑史)에 드리워도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곽재우(郭再祐)는 의리에 분발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영남(嶺南)을 지켰고, 홍계남(洪季男)은 혼자서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호서(湖西)를 보전했으니, 그 공이 적지 않다. 이 밖에도 비록 반군을 치고 역적을 토벌해서 국가에 공이 있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모두 지역 안의 일들이므로 장수의 반열에 놓고 함께 의논할 수가 없다. 내가 일찍이 옥성(玉城) 장만(張晩)과 함께 우리나라 명장을 이야기 했는데, 장공이 말하기를,

 

“2백 년 이래로 일찍이 큰 적을 막아낸 자가 없다. 이것은 대개 국가에서 장수 재목을 기르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태하고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 무관(武官)의 자급을 전쟁으로 인한 공로로 따져서 올려 주지 않고, 군민(軍民)을 못살게 굴면서까지 군량을 모아 저축한 자를 등급을 뛰어넘어 가자시키니, 마침내 벼슬과 자급이 높아져서 뜻과 욕심이 이미 만족하고 보면, 자기 몸과 목숨을 돌아다 보고 아끼는 이외에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지금 나라의 형세가 날로 약해지건만 장수의 적격자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했다. 장공은 원훈(元勳)의 늙은 장수이니 반드시 높은 식견이 있을 것이니, 그 말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전배들의 문장은 실로 문장을 하는 선비가 아니고서는 본래 이것을 감히 의논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새로 과거에 급제하여 간이(簡易) 최립(崔岦)에게 인사를 갔더니, 간이는 말하기를,

 

“목은의 자손은 문관이 연이어 나와서 그 유풍 여운(遺風餘韻)이 오히려 남아 있다. 그리하여 비록 그 자손의 말엽(末葉)까지도 혈맥이 흘러내리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요새 《목은문집(牧隱文集)》 중의 비명(碑銘)과 묘지(墓誌)를 보면 고금에 뛰어나니, 우리나라 문장은 마땅히 목은으로 첫째를 삼아야 할 것이다. 그 자손된 자들은 하필 중국의 한유(韓愈)의 문장이나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읽느라고 공력을 허비해야 하겠는가. 《목은집(牧隱集)》을 읽는 것이 좋다.”

 

했다. 그가 목은을 추앙하는 뜻이 보통과는 아주 다르니, 그 아들 동망(東望)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이상국(李相國)의 문장은 목은과 더불어 어느 쪽이 낫습니까?”

 

하자, 간이는 말하기를,

 

“호음(湖陰)이 항상 말하기를, ‘이규보의 〈조강부(祖江賦)〉가 가장 좋다.’고 했지만 어지 목은을 당하겠느냐?”

 

하였다.

용재(慵齋) 성공 현(成公俔)도 또한 목은이 첫째라고 했다. 내가 옥당에 들어가자, 선조대왕(宣祖大王)은 학문이 고명하여, 경연에서 묻는 것에 많이 대답하지 못하여 항상 황공스럽게 여겼다. 《주역(周易)》과 《대학연의(大學衍義)》 등의 글을 그때 진강(進講)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알 수 없는 곳에는 표를 붙였다가 해평(海平) 윤근수(尹根壽)에게 가서 물었다. 그러자, 해평이 말하기를,

 

“자네 집에 《목은전집(牧隱全集)》이 있다니 나에게 빌려주어 잠시 읽어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즉시 책을 찾아 보내고 또 가서 《주역》을 물었다. 이때 또 해평이 말하기를,

 

“중국 사신 허국(許國)이 우리나라 문집을 보자고 하므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이상국집(李相國集)》ㆍ《목은집(牧隱集)》ㆍ《점필재집(佔畢齋集)》ㆍ《사가집(四佳集)》 등을 주었더니, 허국은 두루 여러 문장을 훑어보고 곧 모두 돌려 보냈는데, 유독 《목은집》만을 가지고서 읊조리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원접사(遠接使)에게 청해서 그가 갈 때에 가지고 갔는데, 그가 중국에 돌아가자 통사(通使) 홍순언(洪純彦)을 통해서 또다시 《목은집》 여러 질을 청했으니, 이것만으로도 목은의 문장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 않은가?”

 

했다. 지난해에 왜사(倭使) 현방(玄方)이 왔을 때에도 역시 《목은집》을 청해 가지고 갔었다. 그러면 왜국에서도 역시 문장의 고묘한 것을 알아서 그랬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일찍이 중국 문인들의 말을 듣고 와서 찾은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중국 사신 황홍헌(黃洪憲)이 왔을 때에도, 경연에서 선조(宣祖)가 묻기를,

 

“우리나라 문장은 누구를 첫째로 삼으로?”

 

하자, 소재(蘇齋)와 율곡(栗谷)이 모두 목은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내 선조 가정(稼亭)의 어머님은, 원(元)에서 요양현군(遼陽縣君)에 봉해졌는데, 묘가 한산(韓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승 무학(無學)이 본자리로서 지리(地理)가 꽤 좋다.’고 했다. 후손 중에 무식한 자 하나가, 일찍이 한산 이씨(韓山李氏)가 대대로 명공 거경(名公鉅卿)이 많은 것은 실로 이 무덤이 복을 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듣고서, 그 아비가 죽자 그 묘 곁을 파고 장사를 지내서 완연히 쌍분(雙墳)처럼 되니, 보는 자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파토(破土)하던 날에 향로(香爐)가 갑자기 뛰어 하늘로 높이 두어 길이나 뜨다가 무덤 10보 밖에 떨어지니 일하던 사람들도 모두 송구하게 여겼는데, 그 사람은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제주(題主)할 때에 또 솔개가 붓을 빼앗아 물고 날아가니 장례에 참례한 사람들이 모두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제야 그 사람도 비로소 크게 두려워했는데, 3년 안에 형제가 계속하여 죽고 지금에도 그 자손들은 거의 죽어 없어졌다. 서울에 살던 부인의 자손들이 뒤에서야 이 사실을 들어 알고서 관청에 글을 올려 묘를 파려고 하자, 그 사람이 최복(衰服)을 입고 멀리 와서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말하고, 곧 옮겨 장사지내려 하는데, 관(棺)이나 석회를 준비하기에 힘이 겨워 아직 못하고 있으니 기일을 늦추어 달라고 울며 애걸했다. 서울 일가들은 그 사람의 말을 믿고, 또한 그가 궁박한 것을 불쌍히 여겨 날짜를 연기해주고 일을 끝내지 못했다. 지금 익재(益齋)가 지은 묘지(墓誌)를 보면, 부인이 졸(卒)하신 지가 지금 3백여 년이 되었는데도 그 정령(精靈)이 없어지지 않아 경동시키고 화복을 내리는 것이 이처럼 현저하니, 그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 주는 일들은 이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지리설(地理說)은 허망하여 믿을 수 없다고만은 할 수가 없다. 또 지가(地家)의 말에,

 

“가까운 조상의 곁에 장사지내면 재앙이 자손에게 미친다.”

 

했는데, 그 말이 이 일을 보면 더욱 맞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되어서 담양(潭陽)에 순찰차 갔었다. 이때 부사(府使)였던 지금의 판중추부사 정공 광적(鄭公光績)이 나에게 이르기를,

 

“본부(本府) 10리 밖에, 고인이 된 판서 송공(宋公)의 정자가 있는데 정자 이름은 면앙(俛仰)이라고 합니다. 경치가 자못 뛰어나니 행차를 잠시 멈추신다면 맑은 놀이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했다. 이튿날 정공(鄭公)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나도 뒤이어 그곳에 도착했다. 정자는 절벽에 임해 있는데, 푸른 소나무와 대숲 사이로 은은히 보이며, 안계(眼界)가 넓고 멀어서 산천의 풍경이 과연 도내에서 명승지로 꼽힐만 하였다. 나는 부사(府使)와 함께 여기에 올라 술자리를 베풀고 놀다가 달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송공의 휘는 순(純)으로서 풍류가 호매(毫邁)하여 한 시대의 명경(名卿)이었다. 그가 지은 〈무등제곡(無等諸曲)〉은 지금까지 전해지며 불리고 있는데, 가사가 몹시 청완(淸婉)하다. 약관에 과거에 올라 여러 청현(淸顯)의 벼슬을 거치다가, 나이가 많아지자 이를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한가히 지냈다. 맑은 복을 누린 지가 20년이 되었고 나이 89세에 졸했다. 과거에 급제한 지 주갑(周甲)이 되던 날, 감사 송공 인수(宋公麟壽)가 그를 위하여 어사화(御賜花)를 만들어 크게 경하하는 자리를 베풀고 기악(妓樂)과 창우(倡優) 등 온갖 놀이를 모두 올렸다. 술이 취하자 좌중의 손들이 고에게 어사화를 한 번 꽂아 남은 경사를 장식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공은 흰 머리 쇠한 얼굴로 머리에 어사화를 이고서 탄식하기를,

 

“오늘날 다시 소년 시절의 일을 해볼 줄 누가 알았으랴?”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자리에 가득하던 손들이 모두 감격해서 울고, 보는 이들은 모두 크게 칭찬하였다. 지금까지도 이 일을 한 도(道)의 성사(盛事)로 친다.

또 공은 살아 있을 때 그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해마다 추석에는 반드시 이 정자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하여, 자손들이 이를 받들어 행했는데, 임진년 난리에 불에 타서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윤공 효전(尹公孝全)이 부사(府使)가 되어, 그 옛터에 올라가 기왓장이 무너져 쌓여 있음을 보고, 슬픈 빛으로 송씨 집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하늘이 준 승지(勝地)를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둘 수가 없다. 여러분들은 힘을 합하여 급히 이 정자를 세우도록 하라.”

 

했다. 농사철이 지나자, 윤공은 재목과 기와를 마련해 주고 인부까지 내어주어 날라갈 듯한 정자가 며칠이 되지 않아 다시 세워졌다. 정자가 이미 준공되니, 마침 추석이어서 다시 정자 위에 제사를 지냈다.

그 이웃에 사는 사람이 꿈을 꾸니, ‘송공이 남여(藍輿)를 타고 정자로 향해 가는 것이 완연히 평시와 같았다.’고 하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판서 홍가신(洪可臣)이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서원(書院)을 세워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ㆍ계백(階伯)ㆍ흥수(興首)와 고려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 등을 여기에 봉안했다. 제사 지내는 날 밤에 홍공(洪公)이 꿈을 꾸니, 이들 네 사람이 와서 감사한 뜻을 표하면서 자못 감격하고 기뻐하는 빛이 있어 보이므로, 꿈에서 깨자 이상히 여겼다. 그리고 김(金)씨 성을 가진 서생(書生)이 집사(執事)로서 재사(齋舍)에서 자는데, 이날 밤에 또 꿈에 네 사람이 서로 계속해 문으로 들어오더니 읍양(揖讓)을 하고 마루로 올라갔다 한다. 이 일은 서애(西厓) 유상공(柳相公)의 〈서원기(書院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서원(書院)의 이름은 의열(義烈)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온 시골 선비들의 공부하는 곳이 되고 있다. 성충(成忠) 등의 일은 삼국 시절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이나 되었으며, 이공 존오(李公存吾)도 역시 2백 년이나 지났는데, 그 정령(精靈)이 감응을 하니, 이른바 ‘물이 땅에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다.

내가 난리를 피해서 진안(鎭安) 에 가서 임시로 있었다. 이곳은 험준한 산과 기다란 골짜기 속이라서 촌락이 드물었다. 이웃에 늙은이 하나가 있는데 그는 홍치(弘治) 정사년(1497, 연산군 3)에 났으니 이해가 계사년(1593, 선조 26)이고 보면 나이가 97세였으며, 아들 하나가 있어 늘그막에 교생(校生)을 제수받았는데, 그 나이는 73세였다. 이들 부자가 한집에서 사는데, 손자 넷, 남자 종 하나, 계집 종 하나와 함께 힘써 농사지어서 겨우 조석을 이어 가고 있었다. 머리가 하얀 두 늙은이가 항상 나무 그늘 밑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니 보는 사람들은 그들을 그림 속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온 고을 사람들이 그들 부자가 나이가 많고 집안의 행실이 순수하게 갖추어졌다 하여 현관(縣官)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여 부역을 면하게 했다. 그 아비는 더욱 건강하고 총명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는데, 다만 음식이 잘 소화되지 않아서 하루 세 끼 죽 한 사발씩을 다 먹는다. 나는 이 소문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어느날 가서 보았더니, 기거 동작이 강건하고 눈썹이 몹시 길고 눈빛이 빛났으며, 용모는 맑고 파리했지만 영특한 풍채가 오히려 남아 있었으니, 실로 속세의 사람의 아니요, 참으로 이른바 지상선(地上仙)이었다. 나는 놀랍고도 감탄해 마지않으며 그 늙은이에게 묻기를,

 

“젊은 시절의 일을 기억할 수 있소?”

 

하니, 늙은이는 입을 열어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목소리가 쟁쟁하고 조금도 떠듬거리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7세에 군보(軍保)에 소속되어 13세 때 비로소 서울에서 번(番)을 들었는데, 그때는 연산군(燕山君)이 방탕해서 날마다 노는 것만 일삼았습니다. 연산의 얼굴을 쳐다보니 빛은 희고 수염은 적으며, 키는 크고 눈에는 붉은 기운에 있었습니다. 연산이 전교(箭橋)에 거둥할 때 나는 역군(役軍)으로 따라갔는데, 화양정(華陽亭)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읍에 예치했던 암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에 가둔 다음, 연산이 정자에 자리를 잡으니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했고 시신(侍臣)들을 물리쳤습니다. 이에 마관(馬官)이 숫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으로 몰아넣어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습니다. 그해 가을에 반정(反正)이 일어났습니다.”

 

하였다. 노인은 당시 재상들의 이름을 일일이 지적하여 누가 어질고 누가 그른 것을 모두 아는 것이었다. 기묘년과 을사년의 일에 대해서는 개연히 탄식하면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의 많이 듣고 잘 기억하는 것은 비록 이치를 알고 학문에 통달한 선비라도 따라갈 수 없었다. 나는 몹시 괴이하고 의아하게 여겨,

 

“노인은 글자를 아시오?”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어렸을 대에는 몹시 총명해서 하루에 천자문을 모두 배웠지요. 그래서 남들은 모두 기동(奇童)이라고 하였는데, 불행히도 남의 시기를 받아 관청에 고소를 당하여 일찍이 군역(軍役)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뒤에는 겨우《소학(小學)》ㆍ《사략(史略)》등의 책만 읽었을 뿐입니다.”

 

했다. 나는 다시 묻기를,

 

“노인은 무슨 수련을 해서 이렇게 수(壽)를 누리셨소?”

 

했더니, 노인은 말하기를,

 

“산골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먹는 것이란 오직 조밥과 나물 뿌리뿐이요. 아무리 병이 있어도 약을 먹을 줄 몰랐는데 저절로 늙어도 죽지 않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아들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우리 아버님만 연세가 높을 뿐만이 아니라, 이 고을과 이웃 읍에는 나이 90세가 된 자가 흔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한 교생(校生)의 어머니 한 분은 지금 나이 1백 2세입니다.”

 

했다. 그 이듬해에 그 아버지 되는 노인이 죽었다. 이로써 나는 깊은 산속에서 담백한 것을 먹는 사람이 높은 수를 누리는 자가 많다는 것을 알았으니, 촉(蜀) 땅의 청성(靑城)이 바로 이러한 곳이다. 나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놀라워했다. 그가 번(番)을 들 때에는 말을 기르거나 땔나무를 하던 한 졸병이었을 뿐인데, 어찌 경위(涇渭)를 가슴속으로 분명히 구별하여 어떤 재상은 어질다 하고 어떤 관리는 간사하다고 하는가? 천리가 있는 곳에는 공변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니, 이야말로 이른바, ‘백성들이 모두 너를 쳐다본다.’ ‘백성들은 지극히 어리석은 듯싶어도 신(神)과 같다.’는 것이다.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명묘조(明廟朝)에 대사헌 조사수(趙士秀)와 정승 심연원(沈連源)이 함께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조공(趙公)이 아뢰기를,

 

“영상(領相) 심연원이 첩의 집을 몹시 크고 사치스럽게 짓고 심지어 단청(丹靑)까지 칠했으니 몹시 온당치 못하옵니다.”

 

하니, 심정승이 절하고 사과하기를,

 

“조사수의 말이 참으로 신의 실수를 바로 맞추었습니다.”

 

했다. 그래서 명묘(明廟)는 그를 위로해 타일렀다. 그들이 경연에서 물러 나오자 심정승이 조공에게 이르기를,

 

“공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 과오가 더 클 뻔했소.”

 

하고 집에 돌아가 그 단청했던 것을 모두 지워버리니, 그 당시 의논이 모두 위대하게 여겼다.

선조(宣祖)가 경연에 납시었는데 영상 노수신(盧守愼)과 수찬 김성일(金誠一)이 함께 입시하였다. 김공이 아뢰기를,

 

“영상 노수신이 남에게 초피(貂皮) 장의(長衣)를 받았사오니, 어찌 노수신에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하니, 노상(盧相)이 자리를 피하여 죄를 기다리면서 말하기를,

 

“김성일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어미가 늙고 병이 많아서 매양 겨울이면 추위를 참지 못하옵기에, 과연 초피 장의를 변방에서 장수 노릇하는 일가 사람에게서 구해다가 늙은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했다. 선조는 두 사람을 모두 칭찬하면서,

 

“대신과 대간이 모두 체면을 얻었으니 나는 몹시 가상히 여기오.”

 

하였다. 노정승은 본래부터 김공과 서로 친했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로 더 공경하고 소중히 여겼다. 이것은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지금의 대신과 대간도 심연원ㆍ노수신 두 정승이 사과한 것과 조사수ㆍ김성일 두 공이 직절(直截)한 것과 같이 한다면 어찌 국가의 복이 아니겠는가.

윤생(尹生)이란 자는 부마(駙馬)의 손자요 재상의 사위로서 권세와 부가 당시에 제일이었다. 귀한 집에서 자라고도 글 한 줄도 읽지 않았으며 성질이 교만하고 어리석어서 인간에게 곤궁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날마다 도박과 주색으로 스스로 즐기고, 함께 사귀는 자는 모두 무뢰하고 사납고 패역스러운 무리들이었다. 또 몹시 화초를 좋아해서 만일 남의 집에 기이한 꽃이나 이상한 새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가격의 많고 적은 것을 가릴 것 없이 반드시 사 왔다.

이웃집의 서생 하나가 일찍이 윤씨 집에 궁에서 내려준 《자치강목(資治綱目)》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얻고 싶었으나 꾀가 나지 않았다. 마침 그의 장인이 호서(湖西)의 고을 원이 되어 왜철쭉 화분 하나를 얻어가지고 왔다. 그래서 서생은 이것을 기화(奇貨)로 삼아 윤씨 집의 《자치강목》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아무리 이름 있는 집이라도 이 꽃은 몹시 드물었고, 늦은 봄이 되자 수많은 꽃이 가지에 가득하여 붉은 빛이 만발하였다. 이에 윤생을 불러다가 보이니, 윤생은 몹시 놀라고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이 꽃은 내가 얻으려 한 지가 오래인데, 그대는 이것을 어디에서 구해왔소? 청컨대 어느 물건이고 줄 테니 서로 바꾸도록 합시다.”

 

했다. 그러나 서생은 거짓으로,

 

“나도 역시 전재산을 기울여 새로 얻어서 사랑하고 아끼지를 마지않는데 어떻게 남에게 준단 말이오?”

 

하니, 윤생은 또 말하기를,

 

“내게 시정(市井)의 부자 종이 있는데 그 중에서 나이 적은 자 한 사람을 골라서 서로 바꾸지 않으려오?”

 

하였다. 서생은 이미 윤생이 크게 욕심내는 것을 알고 이에 말하기를,

 

“그대와 나 사이에 어찌 물건 값을 가지고 따지겠소? 다만 들으니 그대집에 《자치강목》이 있다는데, 이 책이 비록 귀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자식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니, 이 물건과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윤생이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책 전질을 가지고 와서 꽃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 꽃을 뜰가에 놓아두고 자못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었다.

또 한 사람이 잘 길들인 새끼 사슴 한 마리를 조롱에 담아 가지고 왔다. 윤생은 면포 (綿布) 세 단을 주고 바꾸자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말하기를,

 

“어떤 재상의 집에서 청동화로를 주고 사자는 것도 나는 그것이 적다고 해서 팔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런 면포를 받고 팔겠는가?”

 

하면서 도로 가지고 가려는 척을 하니, 이에 윤생은 큰 화로를 내주고 바꿨다. 그 사람은 곧장 짊어지고 달아나 버렸으니 그의 어리석고 망령된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이리하여 노비와 전답으로는 모두 광대놀이하는 복식(服飾)을 사고, 그릇이나 책은 꽃과 짐승과 바꾸느라고 모두 없애버렸다. 집 재산은 다 없어지고 방안은 텅 비자 이에 비로소 노량(鷺粱)에 있는 이름난 정자를 팔아서 겨우 1년을 지내고 또 성 남쪽에 있는 좋은 집을 팔았으며, 마침내는 집을 빌어서 살게까지 되었다. 그래도 오히려 훈신(勳臣)의 종손이라 해서 번(番)을 들고 녹(祿)을 받아 근근히 살아 나가면서 해진 옷에 초립(草笠)을 쓰고 원근길을 걸어다녔다. 당시에 패가(敗家)한 집 자식들을 두루 헤아려 보더라도 반드시 윤생이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내 처가가 윤생의 집과 이웃이라서 그 일을 자세히 들었기 때문에 그 대강을 여기에 적어서 세가(世家) 자제들이 부만 믿고 배우지 않는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는 바이다.

어느 문관 하나가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되었다. 이때 청단역(靑丹驛)에 명마가 있는데, 걸음이 보통 말보다 뛰어났고 성질은 몹시 온순하여 비록 어린 아이라도 역시 이를 끌고 제어할 수 있었으며, 항상 감영(監營)에 두었다. 이때 이조 낭관이 있었는데 권세 있는 집안의 아들로서 세력의 불꽃이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감사(監司)가 내려올 때 말을 서로 바꾸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얼마 있다가 종을 시켜서 자기가 타는 과하마(果下馬)를 끌어 보내어 좋은 말로 바꾸려 하니, 사람들은 모두 분하게 여기고 개탄하였다. 그 말을 끌어 내다가 온 종에게 주려 하니, 말은 갑자기 펄쩍 뛰면서 그 종을 마구 물고 이리저리 차고 밝아 그 종은 땅에 자빠져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그래서 감사(監司)는 크게 노하여 말 주인을 시켜서 이조 낭관의 집으로 끌어다 주었다. 그러나 이날 밤에 말은 또 뛰어 도망하여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역졸(驛卒)이 길에서 뛰는 말을 만났는데 보니 바로 청단의 명마였다. 따라가도 잡을 수가 없어서 감사에게 와서 보고했다. 그래서 감사는 곧 온 고을 군사를 풀어 쫓아가 잡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말은 도망하여 수양산(首陽山)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람이 혹시 가까이 가면 언덕으로 뛰어오르고 절벽을 뛰어 넘으므로 군졸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 속수무책이어서 그대로 돌아왔다. 그래서 마침내 바꾸지 못하고 가 버렸다. 그 뒤 10여일이 지난 뒤에 말은 청단역(靑丹驛)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모두 이상히 여겨 신마(神馬)라고 불렀다.

감사는 또 6월 보름에 가까운 이웃의 수령과 옆 고을의 기생들을 불러서 크게 유두회(流頭會)를 열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온백원(溫白元)을 소주에 타서 기생 중에 살찌고 튼튼한 자 10여 명을 골라 모두 여러 그릇을 먹이는데 먹지 않는 자는 억지로 먹였다. 그리고 한 방 속에 몰아 넣고 그 문을 굳게 잠갔다. 이때는 한창 몹시 무더운 때로서 더운 기운이 찌는 듯 답답하고 땀이 비오듯 흘렀다. 조금 있더니 모든 기생들의 뱃속에서는 천둥 소리가 나면서 오장이 뒤집히는 듯하더니 일시에 설사가 났다. 기생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급히 옷을 벗어서 혹은 개켜서 등에 지기도 하고 혹은 말아서 머리에 이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 벽을 의지하여 쪼그리고 앉아서 설사가 나오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피차에 급히 쏟느라고 좌우에서 설사 줄기가 서로 쏘아 더러운 물이 이리저리 흘러서 허리 밑까지 빠지게 되었다. 또 종일토록 빈 창자에서 쉬지 않고 설사를 하고 보니 기운이 점점 다해져서 서로 베고 똥 속에 누워서 원망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 나오고, 고약한 냄새는 방에 가득하여 사람이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이때 감사는 수령과 함께 이것을 엿보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날이 저물어 비로소 내놓으니, 모두 똥이 몸에 묻고 발에 묻어서 모양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 울 뿐이었다. 이것은 다만 그 감사의 희학(戱謔)에 있어 여사일 뿐이니, 그 밖의 것이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계해년(1623, 인조 1)에 반정(反正)이 일어나자 그 감사는 죄를 받았다고 한다.

석경일(石擎日)은 영남 문관이다. 성질이 어리석고 곧아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는데 날마다 백 글자를 한정하고 반드시 천 번을 읽은 뒤에 그만두었다. 이렇게 10여 년을 하고 보니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어서 마음과 눈 속에 또렷또렷하였는데, 과연 그는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다가 전적(典籍)이 되었다. 일찍이 중학 교수(中學敎授)를 겸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 새벽 그가 타는 말이 놓여서 달아났다. 석경일은 황급히 놀라 일어나느라고, 잘못 첩의 자주빛 장의(長衣)를 입고 머리에는 침모(寢帽)를 쓴 채 몸소 쫓아갔다. 말은 달려서 중학(中學) 속으로 들어갔다. 경일이 중학에 이르자 날이 이미 새고 말았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어 문밖에서 방황하고 있었는데, 학리(學吏)가 우연히 보니 바로 석교수(石敎授)였다.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나으리께서는 어찌해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밝은 날 길가에서 남보기에 해괴하오니 잠시 소인의 집에서 관복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본댁으로 돌아가시도록 하시지요.”

 

했다. 석경일은 장의와 치모 바람에 바지도 벗고 맨발이었으므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머리를 수그리고 얼굴을 떨어뜨린 채 오직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금새 구경꾼이 늘어서서 그를 가리켜 광부(狂夫)라고 했다. 아전이 관복을 가져다가 데리고 갔다. 학유(學儒)가 이것을 듣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일시에 전파되어 웃음거리를 삼았다. 이 일 때문에 그는 결국 불우하게 세상을 마쳤다.

이생 대순(李生大醇)은 서얼(庶孽)이다.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예문(禮文)을 많이 알아 한 시대에 이름이 알려져, 동몽훈도(童蒙訓導)가 되었다. 그는 여러 학생을 가르쳐서 성취시켜 조정에 선 사람도 많았는데, 난리 뒤에 금천(衿川) 땅에 임시로 사는데 곤궁하여 자기 힘으로는 살 수가 없었다. 어느 대신이 본래 이생(李生)이 경술(經術)이 있는 것을 알고 그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 도로 훈도를 시켜서 녹을 받고 생활하게 해 주었다. 이생이 서울로 와서 숭례문(崇禮門) 안에 임시로 사는데 원근에서 관동(冠童)들이 공부하러 오는 자가 꽤 많았다. 이생은 평시의 훈몽(訓蒙)하는 법에 의하여 읽은 책을 외게 하고 외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었다. 그리고 도착한 순서를 따져 먼저 온 자는 먼저 가르치는 등 그 과정을 엄하게 하고 모두 연치를 따지게 하였다. 그러자 학도들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아무개는 서얼인데 내가 어찌 그의 밑에 앉는단 말인가? 또 내가 비록 뒤에 왔지만 제가 어찌 나보다 먼저 배운단 말인가?”

 

하여 세력을 믿고 기를 부려 매양 서로 구타하므로 한 싸움터가 되어버렸다. 이생은 그 괴로움을 이길 수가 없어 조금 경계하고 책하면 반드시 대면하고 욕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이생은 나에게 와서 작별을 고했다. 나는 몹시 괴이하고 의아해서 그 까닭을 물으니, 이생은 말하기를,

 

“내가 6ㆍ7세 때부터 선생장자(先生長者)에게 수업하기 시작하여 이제 이미 60여세가 되었습니다만, 요즘과 같은 풍교(風敎)는 본 일이 없습니다. 입에서 아직 젖비린내가 나는 자들이 벌써 붕당(朋黨)을 가르고 글자 하나도 모르면서 먼저 시정(時政)부터 비평하여, 길거리에서 벽제(辟除)의 소리가 나면 반드시 앞을 다투어 나가 보고서 말하기를, ‘저것은 재상 아무개인데, 저 사람은 아무개의 당(黨)으로 사람이 크게 간사하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나가 보고서 말하기를, ‘모 벼슬에 있는 사람인데 아무의 당(黨)으로 그 사람은 어진 사람이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와 같은 당류(黨類)가 아니면 아무리 고관 대작이라도 모두 이름을 불러 욕을 합니다. 또 그들은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비단옷을 입으니, 시대의 풍교와 세도(世道)가 몹시 한심스럽습니다. 만일 이러한 세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어찌 장구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조그만 녹을 위해서 서울에 오래 머물다가는 반드시 큰 화를 당할 것이므로, 뜻을 결단하여 내려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가 임술년(1622, 광해군 14) 겨울이었다. 이듬해에 국운이 거듭 새로워지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그 뒤 2년 후에 이생은 세상을 떠났다. 요새도 선비들의 습관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보면 매양 이생이 탄식하던 일이 생각난다. 식자의 보는 것이 가이 원대하다 하겠다.

만력(萬曆) 무자(1588, 선조 21) 연간에 내 장인이 오랫 동안 이조 참의로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일찍이 관리들의 석차를 적은 문서를 보았는데, 대신과 원임을 제하고서는 종1품부터 정2품까지 겨우 15ㆍ16인이었으며, 문관으로는 가선(嘉善)도 20명을 넘지 못했다. 조종조(祖宗朝)에는 명기(名器)를 신중히 여겼기 때문에 재상들이 이같이 드물었던 것이다. 선묘(宣廟)가 대신들에게 묻기를,

 

“요사이 이조에서 육경(六卿)의 의망(擬望)에 항상 인재가 없어서 걱정을 하는데 누가 육경이 될 만하오?”

 

하니, 대신들은 이조 참판 정대년(鄭大年)을 천거해서 승진시켜 판윤(判尹)으로 삼게 했다. 정공(鄭公)은 그때 나이 이미 70세였다. 또 평시에 정승 지위에 있던 것이 모두 10여 년씩이었으며, 혹은 15ㆍ16년을 넘기도 했다. 온공 사익(尹公思翼)은 공조 판서 10년을 있었고, 임공 열(壬公說)은 판윤으로 전후 20년이나 있었으며, 송공 찬(宋公贊)은 공조 참판으로 7년 동안 있었다. 그밖에 오랫동안 직위에 있던 자를 이루 다 들어 말할 수가 없다. 지사(知事)ㆍ동지(同知)도 겨우 한 두 명 있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차임되지 못하였으니, 그렇게 된 까닭은 태평하고 일이 없어서 특명(特命)으로 계급을 올리는 일이 아니면 상으로 가자를 더하고 함부로 특진하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특명이 있다면 비록 당시에 인망(人望)이 무거운 자라고 할지라도 양사(兩司)가 반드시 논집(論執)하여 달을 넘기고야 마는 터였다. 난리 뒤에는 이 법도 역시 없어지고, 오직 이조나 병조 판서만이 두 도목(都目) 정사만을 치른 뒤에는 반드시 체직하도록 허락했으니, 어찌 권력을 오랫동안 잡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계미년(1583, 선조 16) 동서(東西)가 분당된 후에 비로소 세 번 이외에 말미를 더 주는 명령이 생겨서 전해 내려오던 성헌(成憲)이 이로부터 크게 무너졌으니, 실로 세 번 이외에 더 말미를 주는 것은 쇠세(衰世)의 일이다. 그리고 무반(武班)으로 자헌(資憲) 계자는 아주 없다시피 하여서 선묘조(宣廟朝) 때 변협(邊協)이 공조 판서가 되고, 곽흘(郭屹)은 지사(知事)가 되었을 뿐, 이 두사람 밖에는 듣지를 못했다. 곽흘은 초헌(軺軒)을 탔다 해서 논죄를 당했으니 공의(公議)의 엄한 것이 역시 이와 같았다.

초당(草堂) 허엽(許曄)은 사문(斯文)의 숙덕(宿德)이요, 참의 이해수(李海壽)는 일찍부터 맑은 인망이 나타났는데도, 모두 통정(通政)의 반열에 있은 지 거의 30년이 되어, 허공(許公)은 나이 70세에 가까와서야 경상감사(慶尙監司)로서 자급이 올라 임소에서 죽었으며, 이공(李公)은 끝내 가선(嘉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것은 비록 명도(命途)의 궁하고 통한 데에 달렸다 하겠지만, 역시 승진(昇進)하고 옮겨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는 집집에 금관자와 옥관자가 있으니, 이는 실로 난세의 관방(官方)이 문란하기 때문이다. 대장군(大將軍)의 고신(告身)도 겨우 술 한 번 취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과 불행히도 비슷하다.

내 외가의 선조 민지사(閔知事)의 휘는 대생(大生)인데, 문음(門蔭)으로 군수를 했다. 그는 날이 어두워질때면 북두성에게 축원하기를,

 

“원컨대 어진 자손을 낳게 해 주십시오.”

 

했다. 과연 한 딸을 낳았는데 한공 명회(韓公明澮)에게 시집갔고, 한공(韓公)이 두 딸을 낳았는데, 하나는 예종(睿宗)의 왕비가 되었으며, 하나는 성종(成宗)의 왕비가 되었다. 두 왕비는 춥고 따뜻한 때에 따라서 손수 공(公)의 옷을 지어 보냈으며, 아름다운 명절이나 좋은 절기에는 각각 잔치할 음식을 보냈다. 또 중관(中官)을 시켜서 술을 내렸으며 평상시에 어공(御供)하는 음식도 계속하여 나누어 보냈다. 한공은 한 대(代)의 원훈(元勳)으로서 바야흐로 수상(首相)이 되었고, 공의 두 아들도 역시 문음(門蔭)으로 모두 큰 고을의 시재(時宰)가 되었다. 공은 너무 지나치게 높아진 것을 두려워하여 남양(南陽)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옷을 내리고 잔치를 내려 서울에 있을 때와 똑같았으므로 왕래하는 중관(中官)들이 앞 뒤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공은 나이 80부터 생일이 될 때마다 성묘(成廟)가 문득 한 자급씩 올려주어 드디어는 숭정(崇政)으로 지중추(知中樞)에 이르렀다. 나이 90세가 넘어 죽으니 이 사실이 모두 신도비(神道碑)에 실려 있다. 공은 충후하고 근신하여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제사 받들기를 몹시 삼가하였다. 그 지성이 있는 바에 하늘도 또 감동해서 그 생전에 끝이 없는 복을 누렸고, 지금까지 자손이 번성하니 어찌 착한 일을 쌓은 보답이 아니겠는가?

한성군(韓城君) 이질(李秩)은 문음으로 벼슬이 부사(府使)에 올랐다. 성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매양 조상의 기제(忌祭)에나 가묘(家廟)에 제사지낼 때에는 초헌(初獻)에 축원하기를,

 

“자손이 빈한하면 제사를 계속할 수가 없을 듯하오니, 원컨대 말없이 도와 주시어 자손으로 하여금 영화롭고 귀히 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공의 손자 이기(李墍)ㆍ이증(李增)과 종손 이산해(李山海)ㆍ이산보(李山甫) 등이 일시에 출세를 하여 문호가 빛났다. 공은 훈신의 종손으로서 나이 80이 넘어 노직(老職)으로 군(君)에 봉해져 편안히 살다가 죽었다. 이 역시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이기에 아울러 여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만력(萬曆) 기해년(1599, 선조 32)에 대사헌 홍여순(洪汝諄)이 궁중과 인연이 있어 기세를 몹시 부리고 맘대로 탄핵과 공박을 하여 자못 사림을 기울어뜨리고 위태롭게 할 조짐이 보이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근심하다가 삼사(三司)가 공론을 인하여 그를 탄핵했다. 탄핵을 논의한 지 여러 달 만에 비로소 윤허를 얻어 그를 삭직하여 내쫓았다. 홍여순은 은밀히 옳지 못한 무리들을 사주하여 초야(草野)의 공론이라고 가탁해서 날마다 소를 올렸다. 상의 마음이 이미 붕당(朋黨)을 나누어 서로 알력하고 참소와 이간이 따르는 것을 의심하던 터이라서, 홍여순이 용서를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그는 당(黨)의 응원이 더욱 세력을 얻게 되자 도리어 전일에 탄핵한 사람을 공박하여 모두 배척하고 쫓아 버렸다. 이리하여 집의 김신국(金藎國)ㆍ사간 송일(宋馹)ㆍ장령 최동립(崔東立)ㆍ지평 박경업(朴慶業)ㆍ교리 박이서(朴彝敍)ㆍ이조 정랑 이필형(李必亨)ㆍ이조 좌랑 남이공(南以恭) 등이 모두 사직되어 내쫓겼는데, 그 중 유독 교리 유희분(柳希奮)만이 척리(戚里)이므로 면할 수 있었다. 경섬(慶暹)은 장령(掌令)으로, 나는 교리로, 이필영(李必榮)은 수찬으로 모두 벼슬을 제수받은 지 오래지 않아서 파직되었다가 도로 서용되어 모두 외직으로 나갔다. 이때 경섬은 영광(靈光)으로, 나는 여산(礪山)으로, 이필영은 풍기(豐基)로 나갔다. 그 뒤 몇 해를 지나 시론(時論)이 차차 정해지자, 우리 세 사람은 무두 통청(通淸)의 길을 얻고, 김신국 등은 9년 후 무신년에 비로소 서용되었는데, 이해에 홍여순은 귀양가서 섬 안에서 죽었다. 그런 지가 지금 40년 인데 마치 저 세상 일과 같아서 살아 남은 자가 겨우 5인 밖에 없으니, 젊은 시절의 일을 생각하면 실로 두렵기만 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견책받은 사람들의 운명을 점장이 함충헌(咸忠獻)에게 물었더니, 함씨 점장이는 말하기를,

 

“모두 재상이 될 운수이며, 전도는 매우 멉니다. 다만 그 중 한 사람은 수(壽)가 부족하나 11명 중에 9명은 모두 재상의 반열에 오를 것이요, 한 사람은 통정(通政)으로 수감사(守監司)가 될 것이니, 이 역시 재상입니다.”

 

했다. 그런데 유독 정랑 이필형(李必亨)만이 서용되고 갑자기 죽으니 그때 나이 38세였다. 함씨 맹인의 말이 과연 맞았으니, 신묘한 점괘라 이를 만하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 2)에 나는 주청사(奏請使)로서 바다를 건너 중국 서울에 갔다. 이때 부사(副使)는 오공숙(吳公䎘)이요, 서장관(書狀官)은 홍공 익한(洪公翼漢)이었다. 오공(吳公)은 재주가 많아서 꽤 복설(卜說)을 터득했다. 그래서 중국 서울에 있는 이름난 점장이나 상(相)을 잘 보는 사람은 불러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오공은 어느 백발 노인과 함께 내 처소에 왔다. 이 사람은 상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상을 한참 보더니 말하기를,

 

“뜻을 잃은 사람입니다.”

 

했다. 나는 괴이히 여겨,

 

“어떻게 아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눈썹 사이에 막힌 기운이 있어서, 이것으로 아옵니다.”

 

했다. 이때는 바로 반정(反正)한 초기였다. 나는 그때 즉시 충청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가 들어와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었으니, 사실은 뜻을 잃을 까닭이 없는데, 상보는 자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본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남에게 해를 이어서 낙직(落職)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복직할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또 그에게 묻기를,

 

“나만 혼자 그렇겠소? 또 바다를 건너는데는 아무 일도 없겠소?”

 

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세 분이 다 그렇겠소. 하지만 바닷길에는 아무런 일도 없겠습니다.”

 

하였다. 또 오공이 데리고 간 군관 중에 얼굴이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수염이 잘난 자가 있었다. 오공은 그 사람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 가지고 그에게 뵈었다. 상보는 자는 문득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장사꾼이오.”

 

했다. 오공은 거짓말하기를,

 

“이는 무과에 급제한 진사로 벼슬이 3품에 이르고 여러 번 수군(水軍)의 장령(將領)을 지낸 사람으로서 순풍을 기다리고 배를 운행하는 일을 하는 일에 익숙하기에 데리고 온 사람이요.”

 

했다. 그러나 상보는 자는 말하기를,

 

“거짓말입니다. 얼굴과 등에 모두 애써 이익을 얻으려는 상이 있으니, 이는 멀리 다니면서 이익을 얻으려고 꾀하는 자입니다.”

 

했다. 오공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감탄하였다. 그 사람은 시정(市井)에 살아서 일생동안 방납(防納)에 종사했으니, 그가 멀리 다니면서 이익을 얻었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었다. 대체로 상보는 법에 얼굴과 등을 함께 보는 법이 있으니, 옛날 괴철(蒯徹)의 말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들이 조정에 돌아오자, 과연 원역(員役)을 뒤에 떨어뜨렸다는 것으로 대관(臺官) 중에 평소에 오공과 사이 좋지 않은 자가 때를 타서 그를 탄핵하여 하루 동안 구금되고 여기에 연좌되어 삭직당했으니, 한결같이 상보는 자의 말대로 되었다. 뒤에 또 들으니 상보는 자가 오공에게 이르기를,

 

“벼슬은 겨우 시랑(侍郞)에 그칠 것이요, 수(壽)도 또한 길지 못하겠다.”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오공은 벼슬이 통정(通政)에 이르렀고 나이 44세에 죽었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상보는 자는 가위 신묘하다 가겠다.

폐조(廢朝) 때 대궐 세우는 일을 을묘년(1615, 광해군 7)부터 시작했다. 내가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있을 때 지금의 춘성군(春城君) 남공 이웅(南公以雄)이 벌목 경차관(伐木敬差官)으로 내려왔다. 변산(邊山)ㆍ완도(莞島) 등지에 있는 재목을 모두 ‘배로 서울에 운반하므로 백성의 힘은 그다지 대단치 않다.’고 하였는데, 기미년간에 이르러 그 역사가 몹시 커졌다. 내가 또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되어 겨우 도경계에 이르니, 도감(都監)의 재촉하는 문서가 산같이 쌓여 어찌할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이때는 당상관을 독운사(督運使)라고 일컬었는데, 지금의 지사(知事) 이상길(李尙吉)이 독운사가 되어 도내에 와서 머문 지가 이미 1년이 지났었다. 그는 오로지 선척을 관리하고 재목 등 물건을 독려하여 출하하고 있었다. 대개 황해도는 땅은 비좁지만 물산은 몹시 많아서, 재목은 장산관(長山串)에서 나고, 백토(白土)는 해주(海州)에서 나고, 청토(靑土)는 은율(殷栗)에서 나고, 번주홍(燔朱紅)은 평산(平山)에서 나고, 돌석(堗石)은 수양산(首陽山)에서 나고, 장연(長淵)의 숯과 재령(載寧)의 쇠 등,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아서 집짓는 백가지 자료를 한결같이 모두 판비해 낼 수 있었다. 또 이곳은 선로(船路)가 가까와서 민생에 막대한 폐가 되었다. 그리하여 수로와 육로로 운반하는 고역이 다른 도보다 백배나 되었다. 재목과 단청과 철과 숯은 각각 주관하는 사람이 있어 혹은 별장(別將)이라 하고 혹은 낭청(郞廳)이라고 일컫는데, 그들의 음식 제공만도 셀 수 없이 많아, 비록 각 읍에서 운반해 와도 역시 지탱할 수가 없어, 각각 인부와 말을 내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가 낭자하였다. 또 김순(金純)이란 자가 있었는데, 천얼(賤孼) 출신이었다. 그는 조도(調度)의 칭호를 띠고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민간에게 재물을 거두어들이기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기지 않았으며, 형벌을 참혹하게 베풀었다. 또 도감(都監)의 관원 중 부끄러움이 없는 무리들은 때를 타서 이익을 노려 마음대로 방납(防納)을 했는데, 그 값이 10배나 되었다. 이렇게 안팎이 서로 침탈하니 온 도의 민생이 마치 물 끓는 솥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이 나라가 언제 망하는냐는 탄식이 한창 극에 달했다. 하늘이 듣는 것은 백성이 듣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종묘와 사직이 말없이 도와주니, 세도(世道)가 어찌 변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전라도의 병영은 전부터 강진(康津)에 설치했는데, 난리 후에 조정에서 형세가 불편하다고 해서 장흥(長興)으로 옮겼다. 그리고 병사(兵使) 오정방(吳廷邦)으로 부사(府使)를 겸하게 하고, 김여순(金汝純)으로 판관을 삼았다. 김여순은 본래 어리석고 망령되어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문관이 무인의 밑에 있기가 부끄럽다고 하여, 항상 분한 마음을 품었었다. 이런 때에 마침 병영을 옮겨 설치하는 일이 있었는데, 장흥의 인민들이 자못 몹시 원망하고 괴로워했다. 그래서 김여순은 이런 때를 타서 요행히 자기의 분을 풀려고 생각했다. 이에 한 두 품관에게 의논하기를,

 

“본읍에 새로 병영을 만든다니, 끝없는 폐단을 만드는 것이다. 어찌 이 이회에 이것을 도로 옮기는 방도를 도모하지 않는가?”

 

했다. 그래서 모두들,

 

“성주(城主)의 처분대로 하소서.”

 

하니, 김여순은 말하기를,

 

“내가 요로를 담당한 재상들에게 통하려고 하는데 인정(人情)이 없을 수가 없어서 이를 근심하는 것이오.”

 

했다. 그러자 품관들이 또 말하기를,

 

“우리 고을이 비록 메마르지만 마땅히 재물을 모아서 성주의 장하신 뜻에 맞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이들은 한 고을에 통문을 돌려 목면(木棉) 10여 동(同)을 수합해 주었다. 김여순은 중방(中房)을 시켜 이것을 서울로 실어 보내서 은자(銀子)를 많이 바꾸어 오도록 했다. 중방은 곧 천예(賤隸)이므로 돌아다 봐도 몸을 용납할 곳이 없었다. 그 이웃에 사는 장태백(張太伯)이란 자는 약을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이때는 막 난리를 겪은 뒤여서 약재가 몹시 귀했다. 그리하여 사대부 집에 무슨 병이든지 있으면 반드시 이 장태백의 집에 와서 구해다가 썼다. 또 그는 사람됨이 익살스럽고 말을 잘하여 명공거경(名公鉅卿)과 모두 친근하게 지냈다. 중방은 그 계교를 장태백에게 말하니, 태백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말대로 하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빈손으로는 할 수 없다.”

 

했다. 그래서 중방은 은자를 장태백에게 많이 주면서 맘대로 하라고 했다. 장태백은 이를 비국(備局)의 여러 재상들에게 말했으나 그들은 모두 말하기를,

 

“큰 진영(鎭營)을 겨우 옮겼는데 경솔히 고칠 수가 없다. 반드시 본도의 감ㆍ병사(監兵使)의 장계가 있은 뒤에야 처리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장태백은 어찌 할 수가 없어 다시 헌부(憲府)의 여러 관원에게 말하니, 혹은 옳다 하고 혹은 그르다고 했다. 이때 나는 사간(司諫)으로 있었는데, 장태백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전라도의 병영을 새로 장흥에 설치하므로 그 고을 사람들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유생 10여 명이 올라와서 장차 비국(備局)ㆍ양사(兩司)에 글을 올리려 하는데, 지금 다행히도 본원(本院)의 대사간(大司諫)이 아직 임명이 되지 않았으니, 이것을 잘 처리하는 책임은 오직 나리에게 달려있습니다. 부디 한 고을의 민생을 생각하시어 혜택을 베푸시옵소서.”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대신들이 익히 생각해서 이미 정해진 일이니, 본원에서는 논하여 아뢰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다면 상언(上言)할 수 밖에 없다.”

 

고 말해 돌려 보냈다. 이튿날 간원(諫院)의 자리에 과연 유생이 10여 명이 본원 문밖에 모였는데, 완석(完席)이 이미 끝나자 등장(等狀)유생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내가 그 등장에 제사(題辭)하기를,

 

“변방의 병영을 옮기는 일은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므로, 한 고을의 싫고 괴로운 것 때문에 조정의 계획을 경솔히 고칠 수는 없는데, 너희들의 외람됨이 심하구나.”

 

해서 딴 유생들과 함께 내보냈다. 이로부터 태백이 다시는 내 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병으로 사직하고 문여(文礪)가 나를 대신해서 사간이 되었다. 내가 또 집의가 되어 제좌(齊坐)하던 날 장령 채형(蔡衡)이 진안 현감(鎭安縣監) 양억(梁嶷)을 월서(越署)하므로, 좌우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채형은 말하기를,

 

“지난날에 장흥의 유생들이 양억의 집에 와서 여러 가지로 꾀인 일이 있어 들리는 말이 불미스럽기 때문이오.”

 

했다. 이것을 동료들이 힘써 구해서 무사했으나 채형은 오히려 겸연쩍어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리고 지평(持平) 강주(姜籒)가 공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자, 그 아내가 종이에 싼 물건을 내 보이면서 말하기를,

 

“장태백이란 자가 와서 바친 물건이오.”

 

했다. 강주는 크게 놀라 즉시 장태백을 불러다가 성을내며 꾸짖고 그 물건을 도로 내주면서 말하기를,

 

“이 뒤로는 영원히 내 집에 오지 말라.”

 

했다. 이튿날 강주는 동료들에게 이 말을 하고 피혐하려 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중지하라고 권해서 그만두었다. 이해 겨울에 한 대관(大官)이 혐의로 인하여 평소에 강주를 미워했는데, 대간을 시켜서 전일에 장흥 사람이 양사(兩司)에 뇌물을 준 일로 해서 장령 채형과 남탁(南晫)ㆍ전 장령 원호지(元虎智)ㆍ지평 강주ㆍ사간 문여(文礪)ㆍ판관 김여순(金汝純)ㆍ중방 장태백 등을 탄핵해서 모두 옥에 가뒀다. 그 중에 남탁ㆍ원호지ㆍ김여순은 오랜 뒤에 석방되었고, 채형ㆍ강주는 갇힌 지 3년 동안에 여러 번 형벌과 심문을 받았으며, 문여와 장태백은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장태백은 형벌을 받을 때마다 채형과 강주는 애매하다고 극언하여 죽을 때까지도 그 말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선묘(宣廟)가 엄하게 장옥(贓獄)을 다스렸으나, 이윽고 그들의 원통함을 알고서 특명을 내려 모두 석방했다. 채형과 강주 두 사람의 하늘에 사무치고 땅에 닿는 원통함은 하늘이 통촉해줄 법도 하건만, 이 일로 해서 종신토록 버림을 받았으며 사람들이 비웃으며 손가락질하기도 하였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며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채형과 강주의 옥사가 일어난 뒤의 일이다. 마을 친구 유시행(柳時行)은 내가 사간으로 있을 때에 정언(正言)으로 있었다. 함께 이 자리에 참여했었는데, 와서 나에게 사례하기를,

 

“장태백은 나도 아는 사이인데 매양 병영 옮기는 일로 와서 말했으며, 나도 역시 그가 그른 것은 알았지만 감히 배척하고 끊지 못했습니다. 만일 당일에 공이 쾌히 거절하지 않았다면 한 원 (院)의 동료들이 거의 다 면치 못했을 것이니, 다행하고 다행한 일이오.”

 

했다. 또 유공(柳公)은 그 일의 시종을 그의 숙부인 부원군(府院君) 유근(柳根)에게 고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집의로서 정부의 방물(方物)을 봉과(封裹)하는 자리에 참여했을 적에 유공도 예조 판서로 역시 참여하였는데, 그는 옆 방에 여러 재상들이 모인 곳에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저번에 조카의 말을 들으니, 집의가 장흥의 정장(呈狀)을 처리한 것이 아주 명쾌했으므로 나는 항상 깊이 탄복했소.”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한결같이 유시행의 말대로 말하자, 좌중 사람들은 모두 칭찬하였다.

당초에 내가 장태백을 쫓아버린 것은 실상 우연히 한 일이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송연(竦然)해지니, 이것도 또한 천명인가보다.

만력(萬曆) 무술년(1598, 선조 37)에 내가 정언이 되었는데, 이때 동료들이 임천 군수(林川郡守) 정천경(鄭天卿)을, 이런 난리 중에 크게 관사 건물을 짓느라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백성들이 그 괴로움을 견뎌내지 못한다고 해서, 이것으로 죄를 의논하여 파직시켰다. 이해 가을, 나는 수찬(修撰)으로서 본도의 어사(御使)가 되어 임천(林川)에 당도했다. 그 곳은 새로 병화를 겪어 읍에는 집이 거의 없었다. 나는 산골짜기에 있는 조그만 집에 관사를 정했다. 이곳은 옛 군과는 5리쯤 떨어져 있었고, 그 곁은 바로 군수의 관사였다. 내가 전에 한산(韓山)에 가서 임시로 살았을 때 임천과는 바로 접경이므로 그곳에 피난와 있는 선비들과는 상종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대간 정홍익(鄭弘翼)과 한정겸(韓正謙)은 당시 포의로서 서로 연달아 와서 보았다. 한생(韓生)은 본래 장난을 좋아해서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그대가 일찍이 대간(臺諫)이 되었을 때 제법 바른 말 하는 풍도가 있었다기에 내가 지금 치하하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무슨 일을 가지고 그러오.”

 

했더니, 한생은 말하기를,

 

“전 군수 정천경(鄭天卿)은 벼슬살이를 지극히 간소하게 했으며, 또 부자 사람의 집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의 곡식을 운반해다가 관사 짓는 재료로 쓰고, 민간 물건은 조금도 범하지 않아서 한 고을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소. 그런데 초옥 두어 칸을 지었다는 일 때문에 탄핵을 받고 떠나갔다니, 그대들의 바른 말 하는 풍도를 알 수가 있겠소.”

 

하였다.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간이 그저 풍문만 듣고 탄핵을 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떠돌며 사는 선비와 호강(豪强)한 사민(士民)들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탄핵을 당한 것이지, 대간이 무슨 상관이 있겠소.”

 

하니, 한생 역시 크게 웃었다. 나는 계속하여 그렇게 된 까닭을 물으니, 한생은 말하기를,

 

“병화 속에 온 고을이 잿더미가 되었는데 오직 이 마을만이 기와집이 남아 있었소. 그렇기 때문에 겨우 객사와 관사를 마련했는데, 다만 군수가 거처할 곳이 없으므로 가까운 곳에 있는 토민(土民)의 묘지에서 재목을 베어다가 초옥을 지었던 것이 바로 아동헌(衙東軒)이었소. 그 무덤의 주인은 음관(蔭官)으로서 그때 벼슬해서 서울에 있었는데, 헐뜯는 말을 만들어서 한 대관에게 부탁하여 탄핵해서 파직시켰던 것이오. 그래서 온 고을 사람들이 통분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소.”

 

하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다른 읍을 거쳐서 마침 읍의 관사 앞 길을 지나다가 시험삼아 동헌(東軒)의 새로 지은 초옥(草屋)을 보니 앞 퇴까지 합해서 모두 3칸이었다. 나는 해괴히 여기고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대개 말세(末世)의 인심이 좋지 못하여 조그만 일에 분한 마음을 일으켜 반드시 음해할 계획을 내어, 약간의 재목을 베었다는 까닭으로 변변치 않은 한 음관(蔭官)이 잘 다스리는 지주(地主 고을 원)를 얽어 파직시켰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풍문이란 것을 족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이와 같다. 나는 그 뒤로 여러 번 대간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양 임천의 초옥 사건을 생각하여 남을 탄핵할 때에는 반드시 스스로 신중히 했으니, 어찌 한 가지 도움이 아니었겠는가?

정승 심수경(沈守慶)은 제례(祭禮)와 상제(喪制)를 모두 간략히 하도록 하여 자손들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했다. 그러나 제례는 간략히 하는 것이 좋다고 하겠으나, 심지어 장사 지내는데 석회도 쓰지 않으며 3년 동안 궤연(几筵)에 조석 상식(上食)조차 올리지 않고 오직 삭망(朔望) 제사만을 올리며, 묘제(墓祭)도 다만 한식과 추석만을 행하고 정조(正朝)와 단오(端午) 때의 제사를 올리지 않는 등의 일은 정례(情禮)에 어쩔지 알지 못하겠다. 장사 지내는데 석회를 쓰는 것은 예문(禮文)에도 있는 터이니, 힘이 미치는데 따라서 많이 쓰고 적게 쓰는 것이 옳을 것이나, 전연 쓰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의 자식으로 송종(送終)하는 큰 예법에 어긋난다 하겠으며, 상식을 올리지 않으면 3년상 동안 전혀 한 가지 일도 없는 것이니, 역시 죽은 이를 살았을 때와 같이 섬긴다는 의리에 어긋난다 하겠으며, 사시(四時)에 지내는 묘제는 비록 옛날의 예법은 아니지만, 예법은 후한 것을 좇는 것이거늘, 삼국(三國) 이후에 이미 풍속이 되어 이날 귀천을 물론하고 누구나 무덤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없는데, 자기만이 고산(故山)과 선묘(先墓)에 향화(香火)를 올리지 않는다면 유명(幽明)간에 서운한 마음이 없을 수 없다. 정조와 단오에도 율곡(栗谷)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제의(祭儀)와 같이 다만 술과 과실만 가지고 제사를 올려도 오히려 전혀 폐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심정승은 일대의 원로로서 반드시 의견이 있을 것이나, 자손으로서 영구히 지킬 좋은 법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내 고조 의정공(議政公)이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되었을 때, 윤상인경(尹相仁鏡)이 도사(都事)로 있었다. 고조가 임지(任地)의 경계에 이르자, 윤공(尹公)은 영명례(迎命禮)를 행했다. 고조는 그의 풍도(風度)가 의젓하고 보는 것이 비범한 것을 보고서 그의 그릇이 큰 것을 깊이 알고 특별한 예로 대우했다. 또 윤공의 어머니가 늙고 곤궁하게 산다고 해서 봉상(封上)하고 남은 지귀한 음식을 계속해 보내니, 윤공은 마음 속으로 항상 감격해 했다. 이때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는 문관이 재주와 인망이 있었는데, 윤공을 탐탁치 않게 보아 면대해 모욕하기를,

 

“감사(監司)는 무슨 본 바가 있길래 도사(都事)를 지성으로 대접하는 것이오?”

 

하였는데, 윤공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니, 당시에 이 말을 장자(長者)다운 말이라고 했다. 고조께서 임기가 차서 조정에 돌아오자 얼마 안 되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그래서 힘써 윤공을 천거하여 비로소 현직(顯職)에 나가기 시작했으므로, 윤공은 고조를 섬기는데 평생 동안 자제(子弟)로서의 예를 행했다. 그는 중망이 날로 무거워져서 대각(臺閣)에서 10여 년 동안 지내다가 갑자기 재신의 반열에 올랐다. 윤공이 일찍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었을 때 그때 해주 목사로 있던 사람은 또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어 옛 계급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하여 남에게 말하기를,

 

“이 정승은 참으로 성인(聖人)이더군. 어떻게 윤공이 출세할 것을 알았을까?”

 

했다. 대개 고조께서는 당시 정승이 되었던 것이다. 고조께서 돌아가시자 윤공은 이미 육경(六卿)에 올랐는데 힘을 다하여 호상(護喪)을 했다. 그리고 매번 고조의 제삿날에는 제물을 보내어 제사지내는 것을 도와 종신토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조의 자손을 한집안처럼 여겨 그다지 행하기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곡직하게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말세에 배은망덕하는 자와 비교해 볼 때 어찌 한가지로 말할 수가 있겠는가?

윤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또 일가간에 화목하여 자못 당시의 인망이 있었다. 일찍이 영상(領相)으로 내국(內局)의 도제조(都提調)를 겸하였는데, 이때 중묘(中廟)의 병환이 위독하였다. 그는 약 올리는 것을 반드시 재숙(齋宿)아면서 손수 감독하여 올리니, 사람들은 이르기를,

 

“성효(誠孝)에서 우러난 것이다.”

 

했다. 그가 졸하자 시호를 효성(孝成)이라 했는데, 을사년 충순당(忠順堂)에 입대(入對)한 일이 공론(公論)에 죄가 되어 훈작(勳爵)이 모두 삭탈당했다고 한다.

일찍이 〈난정소기(蘭亭小記)〉를 보니,

 

“당태종(唐太宗)이 왕희지(王羲之)의 진필(眞筆)을 얻고자 하는데, 남주(南州)의 중이 왕희지의 친필을 깊이 간직해 두고 내놓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어사(御使)를 보내어 비상한 계책을 써서 얻어왔다.”

 

했다. 천자의 위엄으로서 중에게서 조그만 종이쪽 하나를 구한다는 것은 한 현관(縣官)의 일일 것인데도 차라리 계교로 얻을지언정 위협해서 빼앗지는 않았다는 것은, 반드시 이 필적은 한묵(翰墨)의 도구이고, 중은 또한 방외(方外)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만기(萬機)의 여가에 글을 짓고 글씨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성덕(成德)의 일이라고 하겠다. 만일 후세 같으면 중이 어떻게 감히 이것을 비밀리에 간직할 수가 있었겠는가? 반드시 보물을 감추었다는 재앙을 입었을 것이다.

송도(松都) 사람 한호(韓濩)의 아들과 아우로서 한호의 필적을 간직한 자가 있으면, 모두 한두 부관(府官)에게 빼앗겨서 글자 하나 종이 한쪽을 보존한 자가 없다. 그래서 그 아들이 사람을 대할 때마다 슬퍼하고 분하게 여기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랴?

명나라 영락(永樂) 연간에 어사(御史) 진월(陳鉞)이 유구국(琉球國)에 사신을 가는데, 바다 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거의 온전치 못하게 되었다. 전월은 배안에서 해신(海神)에게 빌기를,

 

“다행히 신의 도움을 입어서 황제의 명령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게 되면 마땅히 돌아가서 천자께 보고하여 신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올리겠습니다.”

 

했다. 빌기를 마치자 풍랑이 점점 가라앉아서 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그는 이 사실을 천자께 아뢰어 특명으로 남해(南海)에 사당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올렸다. 진월은 곧 적은 관리인데도 천지가 그 말을 받아들여 사당을 세우고 현판까지 걸었으니, 지금의 천비낭낭묘(天妃娘娘廟)가 이것이다. 성천자(聖天子)의 넓고 큰 도량과 아랫사람에게 내린 어진 마음은 천고에 훌륭하고도 뛰어나다 이를만하다.

가정(嘉靖) 연간에 한 촌 백성이 딸을 낳았는데 몹시 곱고 아름다웠다. 그 아비가 천자께 아뢰기를,

 

“신의 딸이 몹시 아름다우니, 원컨대 궁중에 데려다가 후열(後列)에 서게 해 주시옵소서.”

 

했다. 그래서 천자는 즉시 궁중으로 데려 가고, 심지어 하늘이 낸 고운여자라는 조칙까지 있었다. 황조(皇朝)의 간신들은 오로지 절의(節義)를 숭상하므로 이 일에 말 한 마디 올린 자가 없었으니, 비록 이것은 흠된 일이지만 그 규모가 넓고 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 33)에 선조(宣祖)가 조강(朝講)에 납시었다. 이때 특진관(特進官) 호조 참판 신식(申湜)이 아뢰기를,

 

“우리나라 여러 도에서 은(銀)이 나는 곳이 많으니, 이렇게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었을 때에 백성들을 시켜 캐내게 해서 관가에서 세금을 받게 한다면 공사(公私)간에 양쪽이 다 편할 것이오며, 국가의 예산도 역시 넉넉할 것입니다.”

 

했다. 이에 상이 말하기를,

 

“은이 나는 곳이 많으냐?”

 

하니, 신식이 말하기를,

 

“딴 곳은 모르지만 경기도 안에도 양주(陽州) 땅에 또한 은이 나는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한창 은을 채취하고 있습니다.”

 

했다. 이때 나는 사간(司諫)으로 입시해서 아뢰기를,

 

“일찍이 듣자오니, 우리나라의 명산에는 은이 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오나, 삼국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채취한 것은 다만 단천(端川)의 은 뿐이고 보면, 다른 곳에도 은 구덩이가 많다는 말은 역시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또 고려 말년에 중국에서 은을 공물로 바치라고 했는데 정몽주(鄭夢周)가 사신으로 들어가 아뢰어서, 겨우 이것을 감하고 토산물로 대신하게 했다고 하오니, 이것은 반드시 진헌(進獻)할 물건을 댈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하오나 은은 지극한 보물입니다. 이것을 하늘이 낼 때에는 반드시 쓸 곳이 있어서 냈을 것이온데, 간직해 두기만 하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오니, 만일 은이 나는 곳이 있으면 백성들이 캐내서 쓰도록 하락하는 것이 편리할까 하옵니다.”

 

했다. 이튿날 정원(政院)에서 상의 결정이 없다고 해서 다시 아뢰었다. 그러자 비망기(備忘記)에,

 

“혼돈(混沌)을 파헤치자 혼돈이 죽었다. 은 구덩이를 파헤치면 사람의 마음이 죽는다.”

 

했다.

만력 계묘년(1603, 선조 36) 가을에 내가 겸보덕(謙輔德)으로서 시강원(侍講院)에 입직하였다. 그날 밤 꿈에 만월대(滿月臺)에 오르니, 장막 주변에 군마(軍馬)들이 달리는 것 같았다. 깨고 나서도 분명하였는데 그게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만월대라고 하는 곳은 내 평생에 발자취가 아예 이르지 않은 곳이지만, 언제나 옛 도읍터의 풍물(風物)을 상상하며 한 번 늘 소원을 풀고자 한 지가 오래였다. 그러던 차에 또 이런 꿈을 꾸고 보니 바야흐로 몹시 기쁘고 다행하게 여겼다. 그런 지 며칠 후에 이조(吏曹)에서 마침 비국(備局)의 공사(公事)로 인해서 각 도의 순안어사(巡按御史)를 파견시켜야 했다. 그래서 나는 늙은 어버이가 바야흐로 경기도 안에 계실 뿐 아니라, 또 이기한 꿈도 있기에 이조에 말해서 경기 어사(京畿御史)로 나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선묘(宣廟)는 올린 단자(單子)를 도로 내려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곧 시강원의 장관(長官)이니 내보낼 수가 없으니, 다른 사람으로 고쳐 보내도록 하라.”

 

하므로, 이에 나는 마음 속으로 서운하게 여겨 생각하기를, 전날의 꿈은 한바탕 장난이었구나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갑진년 봄에 내가 특명을 받고 개성부(開城府)의 시재어사(試才御史)가 되었으니, 전날의 꿈이 비로소 맞은 셈이었다. 나는 부응교(副應敎)로서 바야흐로 보덕(輔德)을 겸하게 되었으며, 먼저는 개차(改差)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뒤에는 특별히 보내라는 하교가 있어 몇 달 사이에 상의 마음이 현저하게 달라짐이 이와 같았으니,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쉬는 것에 모두 운수가 달려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생각해 보니, 전일에 개차된 것은 반드시 천기(天機)를 누설해서 인사에 참여하려 했기 때문에 조물주의 꺼림을 받았던 것이요, 뒤에 특명을 내린 것은 스스로 계교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전날의 꿈이 맞았던 것이다.

그러니 사대부의 공명(功名)가 거취(去就)는 한결같이 하늘에 맡겨졌을 뿐이요, 사사로이 경영되고 진취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내 족인(族人) 김현감(金縣監)은 집이 인왕산(仁王山) 밑에 있는데 경치가 몹시 좋고 뜰 앞에는 장미화(薔薇花) 나무가 있어 온 뜰이 환하게 비쳤다. 김공은 이것을 완상하다가 안석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갑자기 황의(黃衣)를 입은 장부 한 사람이 앞에 나와 읍하며 말하기를,

 

“내가 귀댁에 몸을 의탁한 지가 이미 여러 대가 되어 문호(門戶)를 보호하여 근심과 즐거움을 같이 해 왔는데, 이제 주인의 아들이 무례하기가 자못 심하여 매양 더러운 물을 내 얼굴에 끼얹고 온갖 더럽고 욕된 짓을 다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아들에게 화를 입힐까도 생각했지만 주인을 위해서 차마 하지 못하고 있사오니, 엄하게 가르쳐서 이렇게 못하도록 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더니, 말을 마치자 장미나무 밑으로 들어갔다.

김공은 꿈에서 깨자 놀랍고도 이상히 여겨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해도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로 안석에 기대어 누웠는데, 조금 있다가 보니 김공의 첩의 아들 중에 나이 많은 자가 갑자기 꽃나무 앞에 오더니 오줌을 누는 것이었다. 나이가 젊고 기운이 좋은 터여서 오줌 줄기가 꽃나무 가지 위까지 올라가더니 남은 방울이 꽃에 떨어져 꽃이 모두 시들어 버렸다. 김공은 그 꿈이 맞는 것을 깨닫고 첩의 아들을 불러 몹시 꾸짖은 다음, 계집종을 불러 물을 길어다가 친히 꽃에 뿌려 그 더러운 물을 씻어 주고 꽃나무 밑을 깨끗이 씻었다. 김공은 본래 시에 능했기 때문에 절구 한 수를 지어 사과했다 한다. 나는 이것을 항상 기이하게 여겼다.

또 들으니, 신씨(申氏) 성을 가진 사람이 영남 어느 고을의 원이 되었다. 그 동헌(東軒) 앞에 조그만 못이 있고 못속에 조그만 섬이 있는데, 섬 위에 늙은 매화나무 하나가 오래된 등걸이 용의 모양과 같이 천연으로 기이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고을 원에게 나이는 어리고 일을 좋아하는 손자가 있었는데, 그 매화나무가 궁벽하게 가 있는 것을 싫어하여 동헌(東軒) 뜰에 옮겨 심으려 했다. 그 나무를 캐려니 뿌리가 온 섬 속에 서리었는데, 깊고도 멀어서 10명의 인부의 힘을 들여서 섬을 거의 다 파헤치고 간신히 뽑아냈다.

그날 밤에 신생(申生)이 꿈을 꾸니 머리가 하얀 늙은이가 와서 말하기를,

 

“내가 편안히 고토(故土)에서 산 지가 거의 백년이나 되었는데, 네가 하루아침에 까닭없이 내 집을 허물고 내 몸뚱이를 상하게 하여 나로 하여금 있을 곳을 잃어 장차 말라 죽게 했으니, 너도 역시 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고, 노여운 기운이 얼굴에 가득한 채 가버렸다. 신생은 비로소 후회했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었다. 그 후 그 매화는 과연 말라 죽고 머지 않아 신생도 잇따라 죽고 말았으니, 아!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 장미는 떨기로 피는 꽃이요, 매화도 또한 약한 나무인데, 오히려 정령(精靈)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면 물건이란 오래 되면 반드시 신(神)이 있는 법이다. 꽃을 보고 나무를 심는 자들은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도(公道)는 오직 과거(科擧) 뿐이었는데, 임진년 병란이 있은 후에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고 법강(法綱)이 해이해져서 한두 시관(試官)이 과거보는 시험장에서 사정(私情)을 행한 것이 시초가 되어, 그 폐단이 점점 만연되어 폐조(廢朝) 때에 이르러 가장 심했으니, 큰 둑이 한 번 무너지자 염치가 모두 없어져서 돈에 환장한 사람보다도 심하였다. 이것은 실로 권간(權奸)이 나라 정치를 맡아 오랫동안 문형(文衡)의 자리를 차지하여 여러 번 시원(試院)을 주장하여 사당(私黨)을 넓게 심어서 자기들의 세력을 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크든 작든 사람을 뽑는 과장에는 반드시 미리 글 제목을 내가지고 문객(文客)과 일가붙이 중의 젖비린내 나는 자제들을 시켜 먼저 남에게 가서 차작(借作)을 받게 하였으니, 이는 차천로(車天輅)로부터 그릇된 예가 생겼고 이재영(李再榮)으로부터 기원되었다. 또 관서(關西)에 이진(李進)이란 자가 있어 제법 과문(科文)을 잘 지었다. 이 사람은 재상의 집에 출입하면서 많은 보수를 받고 글을 지어 주어서 과거에 급제한 자가 또한 많았다. 또 식년(式年)의 강경과(講經科)에 있어서도 역시 미리 일곱 대문(大文)의 문제를 내가지고 이것을 익히 외우게 했기 때문에 우수하게 급제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우리나라 과거는 고려 광종조(光宗朝) 때 처음 만든 것으로 지금까지 5ㆍ6백 년이 된다. 그러나 공도(公道)가 없어지기는 지난번보다 더한 때가 없었으므로 보고 듣는 바에 놀라고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어, 나라 안에 말이 시끄럽고 인심이 흙처럼 무너졌다. 그래서 시골에서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선비나 일생동안 시문을 짓던 문사들이 모두 책을 덮고 과거를 폐하고서 세태에 통분하며 은거하고 만다. 그러므로 그 대각(臺閣)에서 날뛰고 청현(淸顯)한 벼슬자리에 벌여 있는 자들이 모두 학문이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권간(權奸)의 손에서 양육되어 그 풍지(風旨)를 따라서 여러 번 신인(神人)이 공노할 큰 옥사를 일으키고 마침내는 윤리(倫理)가 거의 없어지고 의리가 막혀 버려 종묘와 자식의 위태로움이 간신히 잡아맨 기(旗)의 술과 같았으니, 만일 반정(反正)의 일이 없었다면 거의 금수의 땅이 될 뻔했다. 큰 이익이 있는 곳에는 그 폐단을 막기가 어려운 법이라, 지금까지도 남은 습관이 아직도 있으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재영(李再榮)은 부윤(府尹) 선(選)의 첩의 아들로 글을 잘했다. 더욱이 사륙문(四六文)에 능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통정(通政)으로 군수까지 하는데 이르렀다.

반정 후 죄인 이진(李進)도 역시 잡혀 갇혀서 형벌을 받다가 한참만에 석방되었다. 이진은 뒤에 문과에 급제함. 옛 규례에 새로 급제하여 괴원(槐阮)에 뽑히면, 밤에는 본원(本院)의 박사 이하의 관리에게 명함을 내어 인사를 청하고, 낮에는 장방(長房)에 갇혀서 출입을 못하게 되는데, 이것을 신귀(神鬼)라고 하여 침해와 곤욕을 여러 가지로 하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놓아 주었다. 또 회자(回刺)를 돌게 하여 이렇게 열흘 동안을 하는데, 만일 공손히 하지 않으면 그 가동(家僮)을 종아리 때리고 몇일 동안을 더하게 한다. 이런 때 선생이나 이름 있는 관리가 가서 청하면 혹은 회자를 없애거나, 혹 일수를 감해주었으니, 이것은 역시 옛 풍속이었다. 서공 익(徐公益)과 이상국 원익(李相國元翼)은 같은 방(榜)에 급제하여 바야흐로 함께 장방(長房) 안에 있었다. 이아계(李鵝溪)와 서익(徐益)은 한 집안 사람이나 옛 규례에 의하여 가서 보았는데, 서공(徐公)은 본래 호방한 사람이라 아계(鵝溪)에게 말하기를,

 

“이 속에 보기 드문 탈을 쓴 물건이 있으니 한 번 보십시오.”

 

하면서 이공을 불러 내어,

 

“이 물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였다. 이공은 본래 청수하고 파리한데다가 찢어진 모자에 귀복(鬼服)을 입고 있어 몹시도 초췌해 보였다. 그러나 아계(鵝溪)는 감식(鑑識)이 몹시 높은 터라서, 이공을 한 번 보자 그가 국가의 큰 그릇이 될 것을 알고 마음을 기울여 허여하고 자못 깊이 사귀었다. 그러나 서익은 아계까지 모욕하고 조롱했던 것이다. 그 뒤에 서공은 외군(外郡)으로 맴돌고 이 공은 맑은 인망이 몹시 자자해서 이미 이조 판서가 되어 금새 정승이 되게 되었다. 그래서 서공은 매양 탄식하기를,

 

“티끌 속에서는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다.”

 

했다. 이공은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부원군에 훈봉(勳封)되어 국가의 의중(倚重)하는 바가 된 지 30년 만에 졸하니, 나이 88세였다. 한편 서공은 벼슬이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이르고 나이도 겨우 50세에 죽었으니, 일찍이 높은 재주를 안고서 세상을 경홀히 여기고 남을 거만하게 보는 것이 이와 같았다.

한산(韓山) 숭문동(崇文洞)에 이상사(李上舍)가 살았는데, 목은(牧隱)의 증손이었다. 그는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나, 성질이 순후하고 근신하며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므로 향당에서 그를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일찍이 빌어 먹는 중이 문앞에 왔는데 다 떨어진 장삼을 천갈래로 기웠으나 용모가 기이하고 고상했다. 상사는 즉시 몇말 곡식을 주니, 중은 기뻐하여 사례하고 길이 절을 하고서는 집앞에 서성거리면서 돌아다보아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듯싶었다. 상사는 괴상히 여겨 묻기를,

 

“너는 그 곡식이 적어서 그러느냐? 그렇지 않으면 할말이 있어서 그러느냐?”

 

했다. 중은 말하기를,

 

“이 추수 때를 당해서 비렁뱅이 중이 진사댁 문앞을 지나는 자가 수없이 많을 것인데, 상사께서 번번이 이렇게 많은 양식을 주시면 이것은 받지 못할 곳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니,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소승이 지리(地理)를 조금 알기에 댁의 지형을 두루 보아서 후하게 주신 은혜에 보답할까 하옵니다.”

 

하고, 중은 계속해 말하기를,

 

“상사에게 귀한 아들이 있어 오는 경자년에 사마(司馬)가 되고 임자년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수와 복을 많이 누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댁은 마침내는 이성(異姓)의 사람이 살게 될 것인데, 뒷 사람도 역시 경자년과 임자년에 발복(發福)하여 공명과 부귀과 서로 대략 같을 것입니다. 또 진사의 자손들은 높은 벼슬에 오르는 이가 연속하고 좋게 끝을 맺을 것입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그 중은 표연히 가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상사의 아들은 윤번(允蕃)이니 경자년에 사마에 뽑히고 임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화려하고 청현(淸顯)한 벼슬을 거쳐 여러 번 주목(州牧)이 되었고, 벼슬이 가선(嘉善)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러 나이 80여 세에 졸했다. 그 집은 뒤에 상사의 둘째 아들 참봉 윤수(允秀)에게로 갔는데, 참봉이 아들이 없어서 외손인 신빙군(申聘君 빙군은 장인이란 말. 신담(申湛)은 이 책의 저자 이덕형의 장인임)으로 대를 잇게 했다. 장인이 이 집에서 났는데, 역시 경자년에 사마에 뽑히고 임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나이 77세에 졸하여 이름과 지위가 이 대사간(李大司諫)과 대략 같았다. 이리하여 그 중의 말이 하나하나 모두 맞았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랴?

대사간의 손자 모(某)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정(寺正)에 오르고 시정의 손자 판서 이현영(李顯英)과 판서의 아들 참의 기조(基祚)는 모두 중한 명성이 있어 한때의 명경(名卿)이 되었다. 어진 대부(大夫)의 착한 일을 쌓은 데 대한 보답이 부절(符節)과 같이 들어맞았다고 이를만하니, 이는 반드시 하늘이 기이한 중을 보내서 적덕하는 자로 하여금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더욱 힘쓰도록 한 것이리라. 시정(寺正)의 이름은 희백(希伯)이다.

김남창(金南窓)의 휘는 현성(玄成)이니, 목사(牧使) 언겸(彦謙)의 아들이다. 대대로 고양(高陽)에서 살았는데, 유학을 일삼고 곤궁을 견디며 살았다. 그리고 목사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그 고을에서 모두 칭찬을 하였다. 일찍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아직 벼슬을 하기 전인데 그의 어머니가 서울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이때 목사(牧使)는 관을 받들어 고산(故山)에 장사지내려고 신원(新院)에 이르자 상여 바퀴가 부러졌다. 목사는 어찌 할 줄을 몰라서 관을 길가에 놓고 울부짖고 있으니, 지나가는 행인들이 슬퍼하였다. 근처 마을에 사는 백성들이 이 기별을 듣고 다투어 와서 일을 도와 임시로 시체를 길 위 높은 곳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그러나 목사는 몹시 곤궁하여 선산(先山)에 옮겨 장사지낼 수가 없어서 스스로 흙을 져다가 영역(塋域)을 만들었다. 이때 본군(本郡)에 나라의 능(陵)을 수리하는 역사가 있었다. 지관(地官)이 명을 받들어 지세를 살피려고 지나다가 말 위에서 뒷 사람을 돌아보면서,

 

“여기 쓴 새 무덤은 누가 와서 봤는지 참으로 길지(吉地)로군!”

 

했다. 목사는 이 말을 듣고 곧 말 앞으로 쫓아가 절을 하고서 자기의 사정 이야기를 갖추 말하면서 말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지관은 측연히 감동하여 이내 두루 산세를 살펴보고서 말하기를,

 

“용호(龍虎)가 너무 가깝고 명당(明堂)이 비좁아서 비록 대지(大地)는 아니지만, 산세가 멀리 와서 스스로 격국(格局)을 이루고 또 정맥(精脈)이 어리어 여기에 모였으니, 마땅히 금방(金榜)에 붙일 귀한 사람이 2대에 계속하여 날 것입니다.”

 

하고 지관은 또 상주의 성명과 족계를 물었다. 목사는 일일이 말하고 숨기지 않자, 지관은 탄식하기를,

 

“그러면 상주는 반드시 성효(誠孝)가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장성하여 지관이 된 뒤로 이 길을 지나다닌 것이 몇 번인지 모르는데 일찍이 10보 이내에 이런 명당 자리가 있을 줄 몰랐소이다. 이것은 실로 하늘의 뜻이요, 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니 아예 옮겨 모시지 마시오.”

 

했다. 이리하여 목사는 그 말대로 드디어 영폄(永窆)하게 되었다. 3년 뒤에 목사는 곧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큰 고을에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고, 수(壽)도 80세나 살았다. 그 아들 남창(南窓)도 역시 대과에 올랐으니, 2대가 영화롭고 귀하게 되겠다는 말이 과연 맞았다.

또 남창은 효도와 우애가 천성에서 나왔고, 필적은 송설체(宋雪體)에 뛰어나서 공사(公私)간의 비석이나 묘갈ㆍ병풍ㆍ족자의 글씨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또 시에 능해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며 서로 주고 받은 글이 많다. 여러 번 주부(州府)의 목사로 나갔는데 손을 씻은 듯이 직책을 받들어서 청렴하다는 소리가 세상에 나타났다. 성품이 소탈하고 청아해서 관청의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매 때리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영재(鈴齋)에서 종일토록 글을 읊는 것이었다. 일을 좋아하는 자가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남창(南窓)이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지만 온 고을 사람들은 모두 원망하고, 추호도 범하지 않지만 관가 창고는 텅 비었다.”

 

고 하여, 일시 사람들이 모두 전해가면서 웃었다. 그는 경학에 고명해서 후진들을 가르쳐 명인들을 많이 내었다. 지조를 몹시 바르게 지켜서 폐후(廢后)의 정청(廷請)에 한 번도 나가 참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버림을 받았는데 그는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고서 서사(書史)를 가지고 스스로 즐겨했다. 벼슬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고 역시 나이 80이 넘어서 졸했다. 나는 일찍이 그에게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가 돌아가자 초상을 치렀는데, 두어 칸 초옥에 책 한 상자와 조복(朝服) 몇 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맑게 닦은 것과 곧은 절개는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는데도, 지위가 그 덕에 충족하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내가 충청감사(忠淸監司)가 되어 한산(韓山)에 순시를 나갔다. 여기에는 선조 가정(稼亭)ㆍ목은(牧隱)ㆍ인재(麟齋)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있다. 그리고 충주(忠州)에 음애서원(陰崖書院), 진천(鎭川)에 문학서원(文學書院)이 있어, 한 도 안에 동종(同宗)의 서원이 세 곳 있으니, 어찌 우리 문중의 크게 다행한 일이 아니랴? 인재(麟齋)의 휘는 종학(種學)이니 목은의 아들이다. 벼슬이 밀직 보문각 제학(密直寶文閣提學)에 이르렀고 고려조가 망할 때, 앞장서서 절의에 죽었으므로, 《노소재집(盧蘇齋集)》에,

 

“절의를 전조(前朝)에 다했고, 목숨을 개사(改社)하는데 마쳤다.”

 

한 것이 이것이다.

음애(陰崖)의 휘는 자(耔)로서 인재의 손자이다.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고 시호는 문의(文懿)인데 사적은 〈기묘록(己卯錄)〉에 있다. 이문학(李文學)의 휘는 여(畬)이니 인재의 후손으로서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이학(理學)에 고명하였다. 인묘(仁廟)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가장 오래 강관(講官)이 되어 보익한 것이 많았으므로, 벼슬을 옮기려 하면 인묘(仁廟)는 반드시 상께 청하여 머물러 있게 하고 스승의 예로 대접했다. 나이 겨우 40세에 죽었는데 사적은 모두 유미암(柳眉巖)의 행록(行錄)에 있다.

또 우리나라 큰 집안으로 높은 벼슬이 계속되고 훈업(勳業)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자는 세상이 실로 많이 있지만 대를 연달아 서원을 세워 받들어 모시고 조두(俎豆)로서 제사지내서 사자(士子)들이 본받게 한 집은 우리 한산 이성(韓山李姓) 외에는 들은 데가 없다. 이러므로 오성(鰲城) 이상국(李相國)이 〈목은서원기(牧隱書院記)〉에 말하기를,

 

“세상에서 하산에 군자가 많다고 하더니 이 말이 정말이로다.”

 

한 것이 참으로 실록(實錄)인 것이다. 조남명(曺南冥)이 일찍이 말하기를,

 

참 국화꽃이 거짓 도연명(陶淵明)을 대했구나 / 眞黃花對爲淵明

 

라는 글귀와,

 

현릉의 송백이 꿈 속에 푸르러라 / 顯陵松栢夢中靑

 

라는 글귀는, 조손(祖孫)의 절의(節義)가 전후에 똑같은 법칙이다.”

고 했다. 이 말은 비록 서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역시 우리 문중의 의열(義烈)이 족히 천고(千古)의 감개(感慨)를 격동시킬만 하기에 함께 기록하는 바이다. 진황화(眞黃花)는 목은의 시이고, 송백몽중청(松栢夢中靑)은 이개(李塏)의 시이다.

신상국 흠(申相國欽)의 호는 상촌(象村)인데,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며 세상에 어쩌다가 나는 높은 재주이어서 나이 겨우 10여 세에 글 잘한다는 이름이 이미 진동했다. 이때 송군 미로(宋君眉老)가 꽤 동파(東坡)의 글을 이해하고 또 시에 능하여 세상에서 동파를 배운다는 자는 모두 그에게로 갔다. 그는 항상 학도들을 모아 놓고 시부(詩賦)를 시험하므로 나이 젊고 재주 있는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었다. 그래서 마치 관학(官學)에서 재주를 겨뤄 보는 곳과도 같았다. 이때 공은 나이 겨우 14세로 역시 그 중에 참여했는데, 용모가 옥과 눈같고 행동이 단아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해서 어린 총각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글을 짓게 되어 분명하게 글의 종류를 구별하여 시를 읊고 부(賦)를 짓느라고 벌집처럼 자리가 어수선했다. 그러나 공은 조용히 한 구석에 앉아 한 권 책도 갖지 않고 남이 짓는 것도 보지 않았다. 날이 이미 한낮이 되자 혼자서 종이를 펴더니 부(賦)를 먼저 다 쓰고 나서 계속하여 시편(詩篇)을 썼다. 도도(滔滔)한 걸작을 잠시도 붓을 정체하지 않고 두 편을 모두 완성했는데, 문장의 기운이 노성하고도 기운차서 만좌한 많은 선비들이 모두 와 보고 혀를 차면서 칭찬하고 탄식하기를,

 

“이는 반드시 참 신선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지, 어찌 인간에게 이런 기이한 재주가 있겠느냐?”

 

하고, 모두 붓을 던지고 손을 거두면서 맥이 없는 기색으로 아무도 감히 그와 겨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송군은 이 글을 읽어 내려 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면서,

 

“문장의 수단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내가 감히 손을 댈 수가 없다. 이는 반드시 천재이다.”

 

하고는, 마침내 공의 글을 장원을 시켰다. 그리고 공을 불러 보려고 했으나 공은 이미 집으로 돌아가고 없으니, 대개 남의 칭찬 받기가 싫었던 것이다. 공은 나와 동갑이다. 처음에 송공의 집에서 얼굴을 알게 되었다. 뒤에 함께 옥당에 숙직하면서 당시 글지어 시험하던 일을 말하고 서로 옛날 회포를 풀었다. 공은 20세에 사마시(司馬試) 1등에 합격하고 21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아한 이름과 인망은 조야가 모두 의중(倚重)하였다. 나이 겨우 40세에 이미 육경(六卿)에 올랐고 일찍이 문형을 맡았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향년은 63세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일생 동안 청백(淸白)하고, 마음을 충량(忠亮)하게 가져 세상에서 어진 재상이라고 일컬었다.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연평(延平) 이귀(李貴)의 자는 옥여(玉汝)로서 기위(奇偉)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기절(氣節)이 활달하여 용감히 말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조그만 절조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찍이 한음(漢陰) 이상국 덕형(李相國德馨)ㆍ박공 경신(朴公慶新)ㆍ윤군섬(尹君暹)과 한 마을에서 글동무로 공부했다. 어느 날 한 곳에 모여 점장이 이인명(李麟命)에게 운명을 물었다. 인명은 말하기를,

 

“이공(李公)이 제일이요 한음(漢陰)이 그 다음이며, 그 나머지도 역시 과거에 급제는 하지만 모두 보통 운명들입니다.”

 

했다. 이공은 애써 과거 공부에 노력하지 않았으므로 재명(才名)이 가장 쳐졌다. 박공 경신이 나이도 가장 젊고 기세도 가장 날카로와서 이 말을 듣더니, 갑자기 놀라 일어나 손뻑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옥여(玉汝)를 제일이라고 하다니! 무슨 놈의 인명(麟命)이란 말이냐? 너는 점치는 것을 그만 두어라.”

 

했다. 뒤에 한음(漢陰)은 벼슬이 영상에 올랐으나 나이 겨우 53세에 졸했고, 박공은 가선(嘉善)으로 감사(監司)가 되어 나이 60세가 지났고, 윤공(尹公)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서 나이 겨우 40세에 전진(戰陣)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가선(嘉善)에 이르렀고 나라의 큰 운수를 도와서 정사(靖社)의 원훈(元勳)이 되었다. 그리고 양전(兩銓)의 판서를 거쳐 지위가 부원군에 이르는 등 풍운(風雲)을 잘 만나 공명(功名)이 혁연하였고 나이 77세로서 졸했다. 두 아들도 군(君)에 봉했는데 한 아들은 통정(通政)이 되었고, 자손들이 번성하여 높은 벼슬아치가 문중에 가득하였다. 참으로 세상에 드문 큰 운명이었으니, 연평(延平)이 매양 박공의 일을 말하면서 웃었다.

또 박공건(朴公楗)은 기질이 순후하고 풍의(風儀)가 질박하며 마음 쓰는 것이 참되었는데, 지금 한평군(韓平君) 이공 경전(李公慶全)은 젊어서부터 호준(豪俊)하고 문명(文名)이 몹시 자자하여 당시의 재주 있고 이름 있는 선비 유극신(柳克新)ㆍ김시헌(金時獻)ㆍ백진민(白振民)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협기(俠氣)를 부리며 세상을 조롱하고 박공을 조소하여 그로 하여금 못견디게 하였다. 박공은 항상 우울하고 괴로워하였으나 역시 그들과 서로 따지려 하지 않았다. 마침 성균관(成均館)에서 글을 시험하는데 박공이 합격한 일이 있었다. 이때 아계 상국(鵝溪相國)이 태학사(太學士)로 있었는데, 비로소 박공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그 아들 한평군(韓平君)에게 이르기를,

 

“박건은 반드시 재상이 되고 수와 복도 역시 원대할 것이다.”

 

했다. 그러나 모든 나이 젊은 동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심하게 그를 모욕하고 업신여겼다.

뒤에 유극신ㆍ백진민 두 사람은 모두 일찍 죽고, 김공(金公)은 참판이 되어 나이 50세에 죽었는데, 박공은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책훈(策勳)되어 군(君)을 봉받았으며, 상의 은혜와 사랑이 날로 두텁고 기세가 몹시 퍼졌으며, 수도 또한 70세까지 누렸다. 대겨 연평(延平)의 많은 공과 높은 의열(義烈)과 충직(忠直)한 기개는 박공이 따라갈 수가 없는 터이지만, 티끌 속에 섞여 있을 적에 남이 알아 보지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식자(識者)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운명을 타고난 것은 처음에 재주나 모양으로 구별할 수가 없다. 재주 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잘 되기를 기약할 수는 없고 모양이 못난 자로서도 역시 수와 지위를 누리는 것이니, 하늘의 도는 아득하고 멀어서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서는 미리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재주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

참판 정협(鄭協)의 자는 화백(和伯)이니 의정(義政) 언신(彦信)의 아들이다. 천성이 어질고 두터우며 국량이 크고 원대해서 평생에 덤벙대는 말이나 당황한 기색이 없었고,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하는데 있어서 일단의 한덩어리 화한 기운뿐이었다. 어렸을 때에 길거리에 비렁뱅이가 춥고 얼어서 거의 얼어 죽게 된 것을 보고 그는 곧 입었던 도포를 벗어서 주었으며, 그의 친구 정자(正字) 최인범(崔仁範)이 죽었는데 곤궁해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자, 그는 아버지의 초헌(軺軒)에 깔았던 호피를 부의(賻儀)로 주어서 관(棺)을 사게 했으니, 이것은 역시 맥주(麥舟)의 의 였다. 임진왜란에 식구들을 데리고 난리를 피하여 한 나루에 이르렀다. 뱃사람은 높은 뱃삯을 달라고 하는데, 배를 댄 저편 언덕에는 떠도는 사족(士族)이 늙은 부모를 모시고 강변에 앉아 종일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이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뱃사람을 불러 즉시 행장 속에 있는 옷을 꺼내서 모두 주고, 그 사족의 뱃삯을 대신 지불하여 먼저 그 사족을 건너보낸 뒤에 비로소 자기 식구들을 건너게 했다. 뱃사람이 이것을 의리 있게 생각하여 그 값을 도로 주려 했으나, 공은 이것을 받지 않았다. 그 사족은 전혀 서로 알지 못하는 처지이고 또 뱃삯을 대신 준 것도 모르다가 뱃사람이 말해서 비로소 놀라고 탄식하여 감읍했다고 한다.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의리와 남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이 타고난 그대로이고, 조금도 지어서 함이 없는 것을 더욱 따를 수 없는 일이었다.

또 글에 능하고 더욱이 사부(詞賦)를 잘해서 을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뽑혔고 또 정시(庭試)에 장원하여 직부(直赴)로써 과거에 급제하여 곧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제수받았고, 화려한 벼슬을 거쳐 여러 번 삼사(三司)의 장관에 배수되었다. 나와의 교분은 평소부터 두터워, 병오년(1606, 선조 39) 내가 아버님 상사를 김포(金浦)에서 당했을 때 공은 극력 초상을 처리하여 장례를 마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우리 온 집안이 병에 걸리자, 약을 주선하여 진심껏 구호하여 강을 사이에 둔 40리 길을 두 번이나 와 보는 등, 약관 때부터 맺은 교분이 끝까지 시들지 않았다. 그의 숙덕(宿德)과 중망(重望)이 한 시대에 몹시 자자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공보(公輔)로 기약했는데,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자 갑자기 풍병에 걸려 이를 고치려고 과천(果川)에 있는 농사(農舍)로 물러가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고치지 못하고 나이 겨우 51세에 졸하니, 조야(朝野)가 모두 놀라고 슬퍼했으며, 길가는 사람들까지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어진데도 수를 누리지 못하고 지위가 그 덕에 만족하지 못했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공에게 한 아들이 있으니 이름은 세미(世美)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역시 화려한 벼슬을 거쳤는데, 술을 즐겨서 병에 걸렸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내가 주청사(奏請使)로서 바다를 건너 중국 서울에 갈 때, 정군 세미(鄭君世美)는 당시 장연 부사(長淵副使)로서 봉산(鳳山)에 와서 나를 전송해 주었는데, 술병이 이미 고질이 되어 겉모습이 달라졌으므로, 나는 몹시 근심하여 은근하게 술을 삼가라고 경계했다. 떠날 때, 그는 10리 밖까지 따라 나와서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내가 돌아올 때 정주(定州)에 이르러 비로소 그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몇 달 동안을 슬퍼하고 마음 아파했다. 이제 들으니 그의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고 한다. 이것으로서 착한 사람은 반드시 뒤가 있다는 것을 알겠으며, 천도(天道)는 어둡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세미(世美)의 아들은 유(攸)이다.

세종 대왕(世宗大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여러 대군(大君)ㆍ왕자(王子)들과 함께 제천정(濟川亭)에서 잔치를 열었다. 이때 마침 과거가 있어서 먼 지방의 선비들이 연이어 강을 건너느라고 강어구가 가득 찼다. 세종은 그중 한 유생을 여러 사람 속에서 바라보고 사람을 시켜 지시하기를,

 

“저 색깔 있는 옷에 어떤 모양을 한 사람을 네가 가서 불러오너라.”

 

했다. 그 사람은 과연 부름을 받고 와서 뵈었다. 세종은 그를 빈례(賓禮)로 대접하고 그 성명과 주소를 물었다. 그는 현석규(玄錫圭)라고 하고 집은 영남(嶺南) 아무 고을에 있다고 했다. 세종은 간곡한 말을 해 주고 음식을 잘 차려서 대접했다. 이때 그 사람은 먼길을 발섭(跋涉)해 오느라고 의관이 남루하고 형용이 수척하매, 자리에 가득한 사람들은 모두 괴이히 여기고 의아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세종은 좌우를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이 좌중에 혹 처자(處子)가 있는가?”

 

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성명(聖明)을 믿으므로, 대답하기를,

 

“손아(孫兒) 서원군(瑞原君)에게 처자가 있어 바야흐로 혼인을 구하는 중입니다.”

 

했다. 세종은

 

“만일 아름다운 사위를 얻으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하니, 효령(孝寧)은,

 

“문호(門戶)가 서로 대등하지 못합니다.”

 

했다. 그러나 세종은,

 

“옛날부터 영웅이나 호걸의 선비들이 초야에서 많이 나왔으니, 이 선비집 아들과 뜻을 결정하여 정혼하도록 하라.”

 

했다. 뒤에 서원군(瑞原君)이 살펴 물어보니 그 사람은 바로 영남의 거유(巨儒)로서 재명(才名)이 한창 떨치고 있던 터였다. 드디어 맞아다가 사위를 삼았다.

현공(玄公)은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淸顯)의 요직을 거쳐 당시의 명경(名卿)이 되고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렀다. 세종이 백 보 밖에서 우연히 한 번 바라보고서 통달한 사람과 귀한 손님을 알아 봤으니, 대성인(大聖人)의 식견이란 남보다 훨씬 뛰어난 법이다. 효령(孝寧)은 바로 나의 외선조(外先祖)이고, 찬성(贊成) 이직언(李直彦)은 효령의 직손이기 때문에 매양 이 일을 말하면서 감탄하고 이상해 했었다.

정상국 창연(鄭相國昌衍)은 본래 강직하고 발랐다. 그가 장령(掌令)이 되었을 적에 홍문관 교리 허명(許銘)이 갓 국혼(國婚)을 하고 기세가 한창 등등하였다. 그 아들 철(㬚)은 성질과 행동이 제멋대로여서 날마다 무뢰배와 함께 술을 마시고 기생을 끼고 놀면서 남을 때려 상처를 입히는 등 민간 사람을 해치므로 나라 사람들이 괴롭게 여겼다. 그래서 정상(鄭相)이 아전을 내어 잡아다가 중하게 형벌과 심문을 가하니, 어지럽던 무리들이 흩어져 서울 안에 잠잠해졌으니, 지금까지도 정공(鄭公)의 풍도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래에 세력이 있는 집 자식들이 대낮에 횡행하여 남의 목숨을 해치고 조정의 진신(搢紳)들을 욕보여 광종(狂縱)한 행동이 허철(許㬚)보다도 배나 더한데 대관(臺官)이 된 자가 모두 위축되어 한 사람도 말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법과 기강이 땅에 떨어지고 풍속이 날로 망가지니, 세도(世道)가 어찌 여기에 이르지 않으랴?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예로부터 어질고 간사한 이가 번갈아 나오고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짐이 서로 엇바뀌니, 이것은 국가에 예사로 있는 일이다. 우리 나라의 백년 이전의 일은 비록 감히 알 수가 없지만, 중고(中古) 이래로 권간(權奸)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희롱하여 사류(士類)를 죽인 것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세력이 꺾이게 되거나 혹은 그 몸이 죽은 지 오래된 뒤에야 비로소 그 일을 추후해서 의논한다. 이것은 기묘년의 남곤(南袞)ㆍ심정(沈貞)과 을사년의 이기(李芑)ㆍ윤원형(尹元衡)이 바로 그렇다. 찬성(贊成) 양연(梁淵)이 대사헌이 되고 판윤(判尹) 기대항(奇大恒)이 부제학이 되었을 때, 김안로(金安老)와 이양(李樑)이 바야흐로 그러한 위치에 있어 기염을 몹시 폈는데, 감히 베이고 귀양보내기를 항론하여 풍절(風節)이 늠렬(凜烈)했으니, 지금까지도 쾌하다고 한다.

또 대사헌 박응남(朴應男)이 홀로 풍채를 유지하며 무너지는 기강을 진작시켜 옛날 곧은 신하의 풍도가 있었다. 한 번 조정이 분당(分黨)한 뒤로는 대각(臺閣)이 쓸쓸하여 그 논핵(論劾)하는 바가 다만 자기와 다른 한쪽 사람 뿐이었으므로,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공의(公議)가 거의 없어졌는데, 다행한 것은 추숭(追崇)ㆍ입묘(入廟)에 대하여 선비들의 의논이 준엄하였고, 삼사(三司)에서 일을 의논하는 관원이 서로 계속 쫓겨나면서도 오히려 후회하지 않고 남은 의논이 아직도 쉬지 않았으니, 족히 조종조(祖宗朝)에서 사기(士氣)를 배양한 것을 보겠으며 국맥(國脈)이 유지되는 것도 역시 이 까닭인 것이니, 아! 가상한 일이다.

역대로 어진 신하와 장한 보필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닌데, 한ㆍ당(漢唐) 때는 다만 소하(蕭何)ㆍ조참(曺參)ㆍ병길(丙吉)ㆍ위상(魏相)ㆍ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ㆍ요숭(姚崇)ㆍ송경(宋璟)만을 일컫고 송(宋) 나라 때는 다만 한기(韓琦)ㆍ범중엄(范仲淹)ㆍ부필(富弼)ㆍ마기(馬墍)만을 말했다. 이 나라들이 모두 3ㆍ4백 년씩이나 누리었건만 한 대에 각각 네 사람씩만을 말하고 말았으니, 보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알 만하다.

우리 나라 전기에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ㆍ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가 있었고, 후기에는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ㆍ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이 있다. 익성공은 덕량(德量)이 넓고 깊었으며, 문경공은 천품이 바르고 곧았는데 그들은 몸이 성주를 만나 태평한 세상을 이루었다. 그리고 문익공은 북문(北門)의 변을 당하여 옷소매를 잡고 울면서 간해서 사류(士類)들을 구호했고, 충정공은 위태롭고 의심나는 날을 당해서 정책(定策)하여 성군을 맞아들여 국가를 편안케 했으니, 그들의 공명과 사업은 전후가 같은 법도이므로, 모두 어진 정승이라고 일컫는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는가?

선조 대왕(宣祖大王)에 이르러서는 왕위에 계신 지 가장 오래되었지만 임진년의 왜란은 천고에 없는 난리였으니, 다시 옛 왕업(王業)을 회복하여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은 실로 사대(事大)하는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다 함께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힘을 다하여 이를 극복하고 중흥(中興)의 업적을 도와 이룬 자로서, 유공 성룡(柳公成龍)의 유아(儒雅)함과 이공 원익(李公元翼)의 충량(忠亮)함과 이공 덕형(李公德馨)의 중망(重望)과 이공 항복(李公恒福)의 석덕(碩德)이야말로 마땅히 황희ㆍ허조 등과 똑같이 아름다워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 밖에도 문장과 덕업(德業)으로 물정을 어루만지고 풍속을 다듬어서 정승의 명망에 꼭 합당한 자가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나, 그 사이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반드시 후세의 공론이 있을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양신(良臣)이 되기를 원하고 충신(忠臣)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 것이 바로 이 까닭이다.

동지(同知) 박경업(朴慶業)은 읍취헌(揖翠軒) 박은(朴誾)의 손자이다. 성품이 강개하고 고집이 세었다. 처음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이조 판서 이공 기(李公墍)의 아들이 통진 현감(通津縣監)이 되어 고을을 형편없이 다스렸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박공(朴公)이 즉시 탄핵해서 파직시켰다. 또 최공 관(崔公瓘)이 바야흐로 삼사(三司)에 출입하여 다시 이름이 몹시 성하므로, 그 아버지가 용강 현령(龍岡縣令)이 되었는데, 온 고을이 원망하고 괴로워해도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박공이 또 이를 탄핵했으니, 이것은 모두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그래서 조야가 눈을 씻고 보았고 곧다는 소문이 크게 떨쳤다. 그 뒤에 여러 번 대간(臺諫)이 되었는데 조금이라도 공의(公議)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고 분연히 탄핵했다. 그리하여 한달 동안에 파직시키고 내쫓은 것이 거의 12ㆍ13인이나 되었다. 이처럼 대각(臺閣)에서 바람이 나니 사람들은 모두 눈을 흘겼다. 이 때문에 원망을 쌓은 지가 이미 오래되니, 그를 헐뜯는 말이 일기 시작하여 드디어 벼슬길이 막혔다. 여러 번 주군(州郡)을 다스려서 제법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적을 이미 넓게 심어 놓았으므로 걸핏하면 비방을 얻게 되어 연거푸 대간의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을 논박하기를 좋아한 보복이라고 했다. 대개 박공이 외로운 종적으로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했던 것이니, 그가 세상에 불우해서 쓰이지 못하고 드날리지 못했던 것은 그 형세가 그렇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조 판서의 아들을 탄핵하고 최공(崔公)의 아버지를 논박한 것은 비록 옛날의 강직하다고 이름난 사람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말세에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머리를 움츠리고 꼬리를 사리는 자와는 함께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박공의 장점인 것이다.

○ 정유년(1597, 선조 30) 난리에 나는 호서(湖西)로부터 김포(金浦) 집으로 옮기었다. 거기서 5리쯤 되는 곳에 조군 헌(趙君憲)의 선산이 있었는데, 한 번은 고로(故老)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신묘년(1591, 선조 24) 가을에 조군이 와서 산소를 살펴보고 연일 통곡했다. 그리고 이웃 친구들이 와서 보면 조군은 반드시 길게 탄식하면서 영결(永訣)이라고 말하므로, 사람들은 모두 괴이하게 여기고 의아해서 그 까닭을 물으니, 조군은 말하기를,

 

“명년에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는데 남북을 가릴 것 없이 사람이 모두 죽을 것이니, 이 뒤로는 서로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이때는 태평한 지가 2백 년이나 되므로 사람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였는데, 조군의 말을 듣고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그를 괴망(怪妄)하다고 해서 혹은 피해가는 자까지 있었다. 그는 또 고을 원을 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국가가 마땅히 병화(兵禍)를 입을 것이오.”

 

하니, 현령 이조(李調)는 그 요망하고 허탄함을 미워하여 차갑게 대접하므로, 조군은 자못 불평스러워했다.

늙은 선비 조안현(趙安賢)이란 자가 있었는데, 조군의 족숙(族叔)이었다. 나이가 많고 행실이 있어 조군은 항상 공경하여 섬겨 왔다. 그가 조용히 조군에게 이르기를,

 

“듣자니, 그대가 거적을 깔고 도끼를 가지고서 대궐 아래에 나가 소를 올린 데 대해서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자가 많았다고 하는데, 이제 어찌 또 망령된 말을 해서 시골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동요시키는가? 모름지기 다시 생각하도록 하라.”

 

했다. 조군은 분연히 말하기를,

 

“내가 천상(天象)을 살펴보니 명년에 병란이 동쪽에서부터 일어나는데 개벽한 이후 아직까지 없는 큰 변이옵니다. 원컨대, 숙부께서는 내 말을 허망하다 하지 마시고 미리 피난할 방도를 차리십시오.”

 

하니, 이에 조생(趙生)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했다. 이듬해 여름에 과연 바다 오랑캐가 길게 몰려와 팔로(八路)가 솥에 물이 끓듯 하고 만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이 빈터가 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하는 등 한결같이 조군의 말과 같았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랴?

조군이 처음 급제하고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가 되어 향실(香室)에 입직하였는데, 이때 자전(慈殿)이 불공 드릴 일이 있어서 조군을 시켜 향을 봉하여 올리라고 했다. 그러나 조군은 말하기를,

 

“이 방에 있는 향은 다만 종사(宗社)와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오니, 불사에 쓰는 향은 신이 비록 만번 죽어도 감히 봉하여 드리지 못하겠나이다.”

 

했다. 그래서 중관(中官)이 두세 번 왕래했어도 끝내 거절하고 듣지 않으므로, 자전(慈殿)은 마침내 그 향을 쓰지 못했다. 그의 성명(聲名)이 이로부터 비로소 떨치기 시작하여 듣는 자들이 부러워하고 감탄하였다.

조군은 강개하고 여러 가지 글을 널리 보았으며, 또 천문(天文)을 정밀하게 알았다. 눈으로 세상 일이 날마다 어긋나고 붕당(朋黨)이 더욱 시끄러운 것을 보고 피어린 소를 올렸는데, 모두 수 천 마디나 되었다. 말이 몹시 급소를 찌르는 것이어서 요직을 담당한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렸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괴귀(怪鬼)라 지목하고 배척하여 쓰지 않았다. 그래서 향학(鄕學)의 제독(提督)의 소임에서 맴돌았다. 뒤에 조군은 물러가서 보은(報恩)에 살면서 모든 유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문도가 몹시 많았다.

임진년 난리에 의기를 드날려 군사를 일으키니, 원근에서 조군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앞을 다투어 와서 응모하여 한 달이 못되어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호남에서 적의 길을 막고 싸워서 죽인 것이 많았다. 다시 금산(錦山)으로 옮겨가 싸우다가 적에게 패하여 죽으니, 온 군사들이 조군이 죽었단 말을 듣고 다투어 서로 죽음에 나아갔다. 당시에 이들을 전횡(田橫)의 객이라고 일컬었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참판을 증직했고, 호서와 호남의 문생들은 재물을 모아서 돌을 캐다가 문정공(文貞公) 윤근수(尹根壽)에게 글을 청하여 싸우다 죽은 곳에 큰 비석을 세웠다.

을묘년에 내가 전라 감사가 되었을 때 제문을 지어 가지고 가서 제사를 지냈다. 조군은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도 쓰이지 못하고 비록 세상에서 잊혀졌으나, 마침 크게 어려운 때를 당하여 능히 탁월한 절개를 세웠으니 또한 장하지 않은가?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옛 사람이, ‘부자가 희롱을 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했는데, 참으로 격언(格言)이다.

판서 박충원(朴忠元)의 아들 박계현(朴啓賢)이 또한 판서가 되었다. 모두 일시의 명경(名卿)으로서 부자가 서로 희롱을 하여 지극한 즐거움이 넘쳐 흘렀다. 박공(朴公)은 나이 70세인데 아들 판서가 먼저 죽으니, 박공은 애통하고 상심하다가 병이 되어 몇 해 뒤에 뒤를 이어 죽었다.

감사 정효성(鄭孝成)의 아들 정백창(鄭百昌)이 역시 경기 감사가 되었다. 매양 서로 희롱하여 웃고 즐겼다. 아들 감사가 먼저 죽으니 정공(鄭公)은 이때 나이 76세였는데, 슬퍼하다가 실성해서 지금은 폐인이 되었다. 비록 명의 길고 짧음에 달린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천도(天道)가 성만(盛滿)함을 미워하고 조물주(造物主)가 시기가 많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정승 홍언필(洪彦弼)의 아들 정승 섬(暹)이 판서로 있을 때의 일이다. 홍공의 가법이 몹시 엄정해서 판서가 웃옷을 입지 않고는 들어가 뵙지 못했다. 손님이 왔을 때 정승이 만일 편치 않으면 판서를 시켜서 접대하게 했는데, 검소한 베옷이나 겸손한 말과 모양에 처음 보는 사람은 그가 판서임을 알지 못하다가 뒤에서야 듣고서 놀라고 감탄함을 금치 못했다. 판서가 일찍이 초헌(軺軒)을 탔더니, 그 어머니는 몹시 기뻐서 정승에게 말했다. 그러나 정승은 깜짝 놀라 곧 판서를 불러 엄하게 책망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정승의 지위에 있고 또 네가 이제 판서가 되었으니, 항상 성만(盛滿)함을 두려워하는데, 너는 어찌 감히 태연하게 초헌을 탄단 말이냐? 이것은 한 집안의 복이 아니다.”

 

하고, 인하여 판서로 하여금 초헌을 타고 뜰 가운데를 돌게 하자, 판서는 황공해서 다시는 감히 초헌을 타지 않았다 하니, 그 근신함이 이와 같았다.

정승은 수가 74세이며, 시호는 문희(文僖)인데, 인종(仁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판서는 항상 대제학을 겸하고, 세 번 영상이 되었으며, 나이 82세에 졸했다. 문헌(文獻)이 집에 전하여 세상에서 현상(賢相)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으로서 보건대, 부자간에는 효도와 공경을 우선 삼아야 하고, 벼슬한 집에서는 겸손하고 삼가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알겠으니, 자식된 자는 삼가하지 않을 수 없다.

 

 

[주D-001]운모병(雲母屛) : 운모(雲母)로 만든 병풍. 운모는 판상(板狀) 또는 편상(片狀)의 규산(珪酸) 광물로 화강암(花崗巖) 중에 많이 들어 있으며, 박리(剝離)되는 성질이 있음. 백색 흑색 두 가지가 있는데 백운모는 유리의 대용으로 전기절연체(電氣絶緣體) 등에 씀.

[주D-002]좌리정훈(佐理正勳) : 성종 2년(1471)에 왕실을 잘 보좌하고 평화를 열어주었다는 것으로써, 신숙주(申叔舟) 등 75인에게 내린 좌리공신(佐理功臣)을 말함. 여기서 정훈(正勳)이라 함은 원종공신(原從功臣)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 원(元) 공신이라는 뜻으로 쓴 것임.

[주D-003]자문지(咨文紙) : 중국과 왕복하던 문서에 쓰이던 종이인데, 그 종이가 목판처럼 몹시 두껍고 단단하여 종이의 이름이 되었음.

[주D-004]전모(剪帽) : 비올 때 여자 하인이나 아이들이 쓰던 갓의 한 가지. 대가지 테에 살을 대고 종이를 바른 뒤에 기름을 먹여 만들었는데 이것을 ‘지삿갓’이라고 함.

[주D-005]편전(片箭) : ‘아기살’을 말하는데, 짧고 작은 화살로 1천 보 이상의 거리를 날 수 있으며 날쌔고 촉이 날카로와 갑옷이나 투구를 뚫을 수 있음.

[주D-006]봉마(蓬麻) : 곧은 삼 속에서 자란 쑥은 저절로 곧게 자라게 된다는 뜻으로, 훌륭한 사우(師友)의 감화(感化)로 선량한 사람이 됨을 이름.

[주D-007]성지(聖智) :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문헌에는 ‘성지(性智)’로 되어있음.

[주D-008]자평(子平) : 사람의 사주(四柱) 보는 법을 가리킴. 송(宋) 나라 서자평(徐子平)이란 사람이 성명(星命)의 학문에 정통하여 말이 많이 적중하였으므로 후세에 그를 추앙하는 자들이 그 학술을 가리켜서 자평이라고 했음.《己瘧篇》

[주D-009]무차회(無遮會) : 불교에서 설법(說法)ㆍ공양(供養)을 하기 위한 모임의 하나로, 성범(聖凡)ㆍ도속(道俗)ㆍ귀천(貴賤)ㆍ상하(上下)의 구별이 없이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를 행하는 대법회를 말함.

[주D-010]제주(題主) : 신주(神主)에 글씨를 씀을 말함. 신주는 대개 밤나무로 두 쪽을 합쳐 만들되, 길이는 여덟치, 폭은 두 치 가량으로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나게 되었는데, 그 전면에는 ‘현고 모관 부군(顯考某官府君)’이라 쓰고, 왼쪽에 ‘효자 모 봉사(孝子某奉祀)’라고 작은 글씨로 쓴다. 그리고 함중(陷中) 뒤쪽 전면을 장방형으로 우묵하게 파낸 부분에 성명(姓名)ㆍ자호(字號)ㆍ관직(官職) 등을 씀.

[주D-011]청성(靑城) : 중국의 산 이름. 역대의 방사(方士)들이 숨어서 수도(修道)하던 곳.

[주D-012]유두회(流頭會) : 유두(음력 6월 1일)의 놀이. 신라 풍속에 유두날 나쁜 일을 떨어 버리기 위하여 흐르는 물에 머리를 씻었다고 한다. 지금은 닭ㆍ개를 잡고 수단(水團) 같은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머리도 감고 목욕도 하는 연예적인 민속놀이가 있음.

[주D-013]온백원(溫白元) : 적취(積聚)와 황달(黃疸) 등을 치료하는 한방(漢方) 환약인데, 그 약제 소에 파두(巴豆)가 들어 있어서 많이 먹으면 설사가 남.

[주D-014]방납(防納) : 납공자(納貢者)의 공물을 대신 바치고 그 대가를 납공자로부터 배징(倍徵)하던 일. 이것이 뒤에 폐단이 많아 광해군(光海君) 때부터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보게 되었음.

[주D-015]괴철(蒯徹) : 초한(楚漢) 때 사람. 한신(韓信)의 상을 보고는 “군의 얼굴을 상보니 봉후(封侯)에 지나지 못하겠고 등을 상보니 귀함이 말할 수 없다.”고 한 고사가 있음.

[주D-016]완석(完席) : 원의석(圓議席)을 이르는데, 사헌부 또는 사간원 관원들이 좌기(坐起)할 때에 쭉 둘러앉아서 좌우(左右)를 물리치고 풍헌(風憲)에 관계되는 일과 탄핵하는 일이나 배직(拜職)한 사람의 서경(署經)을 의논하는 자리를 말함.

[주D-017]등장(等狀) : 여러 사람이 연명하여 관사에 어떠한 요구를 소원하는 일을 말한다. 등장이라고 하게 된 연유는 소장의 머리에 “누구 누구 등은 아룁니다.”고 한 데서 나온 듯함.

[주D-018]제사(題辭) : 관부에서 백성이 제출한 소장(訴狀) 또는 원서(願書)에 쓰는 관부의 판결이나 지령을 이름.

[주D-019]월서(越署) : 서경(署經)에 통과되지 못함을 이름. 당하관(堂下官)을 임용할 때 이전에 피임자의 이력 등을 양사(兩司)에 내면 양사는 그를 삼사하여 결점이 없으면 서경 즉 서명하고, 결점이 있으면 서명하지 않는다.

[주D-020]충순당(忠順堂)에 입대(入對)한 일 : 명종이 즉위하던 을사년(1545) 7월에 충순당에서 열린 어전회의(御前會議)에 입대한 것을 말한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대윤(大尹) 윤임(尹任)을 몰아내기 위한 회의였다.

[주D-021]회자(回刺) : 승문원의 신진(新進)이 귀복(鬼服)을 입고서 밤에 돌아다니면서 선진(先進)을 찾아보고 사진(仕進)의 허락을 얻는 일.

[주D-022]맥주(麥舟) : 보리를 실은 배인데, 상사(喪事)를 돕는 일, 즉 부의(賻儀)를 뜻함.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아들 요부(堯夫)를 시켜 고소(姑蘇)에서 보리 5백 석을 운반해 오게 했다. 요부가 배에 보리를 싣고 단양(丹陽)에 이르렀을 적에, 범중엄의 친구 석만경(石曼卿)을 보았는데, 석만경은 돈이 없어 부모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어 그 보리를 모두 주고 빈 배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이말이 전하여 부의를 뜻하게 되었음.

[주D-023]직부(直赴) : 전강(殿講)ㆍ절일제(節日製)ㆍ통독(通讀)ㆍ외방별과(外方別科) 등에 합격한 사람이 곧 문과(文科)의 복시(覆試) 혹은 전시(殿試)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일.

[주D-024]북문(北門)의 변 : 중종 14년(1519)에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이 조광조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절차를 밟지 않고 밤중에 은밀히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열게 하고 들어가서 화를 일으킨 데서 온 말로, 기묘사화의 경로로 보아서 일컫는 말.

[주D-025]전횡(田橫)의 객(客) : 한(漢) 나라 초기에 한고조(漢高祖)가 전횡(田橫)을 불렀는데 응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 무리 5백 인이 모두 자살한 일이 있음.

 

 

[편-001]愓 : 惕

[편-002]淊 : 滔

[편-003]淊 : 滔

 

 

 

출전 용재총화慵齋叢話

출처 한국고전 번역원

 

이화월헌 2015.07.23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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