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1. 14:51ㆍ차 이야기
'다산 유적지'에서 인간 정약용을 생각해 본다. 자유로이 글쓰기
《「다산 유적지」에서 인간 정약용을 생각해 본다》
「다산 유적지」가 있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는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과 그의 묘소, 사당(문도관), 그리고 다산 문화관, 기념관, 실학 박물관 등이 있다. 다산 문화관과 기념관에는 다산이 저술한 '목민심서', '경학집' 등 232권과 '일표이서'를 포함한 '경세학서(經世學書)' 138권에 시(詩)문집과 기타 저술을 포함한 문집 260권을 합하여 총 492권 중 총 58종, 308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전시관 밖에는 그가 설계, 고안해 수원 화성 성곽 등의 축성에 사용했던 거중기 실물 모형과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려 실학정신과 효심으로 건설한 신도시였던 화성의 원행을 위해 용산과 노량진 사이의 한강을 건너던 배다리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다산 유적지는 처음 조성할 무렵부터 몇 차례 다녀오기는 했지만 어제(7/13) 오랫만에 다시 찾아봤다.
유적지에는 인근 연밭의 여름 꽃인 연꽃도 볼 겸 아이들에게 다산의 업적과 실학사상, 그리고 그의 삶의 흔적들을 살펴보며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시키려는 듯한 부모들과 학생들의 발길이 더위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있어 보기 좋았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예천군수와 호조좌랑을 지낸 아버지 정재원(丁載遠)과 고산 '윤선도'家의 공재 '윤두서(서화가)'의 손녀인 어머니 숙인(淑人) 해남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송보(頌甫)이고 호는 사암(俟菴), 열수(冽水), 자하도인(紫霞道人)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세례명은 '안드레아'( 어떤 자료에는 '요한')이다.
1762년(영조38년) 음력 6월 18일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마현)에서 태어난 다산 정약용은 22세 때 (1783년)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 갔고 여러차례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이 즈음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여 많은 경비를 절약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된다. '서양의 사악한 종교인 천주교를 접했다'는 이유로 다산은 포항 장기로, 셋째형 약종(세례명;아오스딩)은 옥사하고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하자 다시 서울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은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는 수확기였다. 그의 500여권에 달하는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57세가 되던해 가을 유배지에서 해배되어 고향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 보완하고 미완으로 남아 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흠흠신서」,「아언각비」등의 저술을 내 놓았다. 회갑을 맞이하여서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 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며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다산이 천주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형인 약전과 약종이 천주교인인데다가 한국천주교를 처음 들여온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세례명;베드로)이 다산의 매형이다. 또한 한국천주교의 초기 역사를 만들어낸 황사영, 홍재영, 이벽, 정상철 등이 사위나 조카 관계이다. 다산으로서는 비켜갈 수 없는 인연들이다. 29세 때 갑진년(1784년) 4월 큰 형수의 제사에 참석하고 서울로 오던 두미협(斗尾峽;현, 팔당댐)의 배위에서 다산과 사돈 관계였던 광암(曠菴) 이벽(李檗)으로 부터 처음 천주교를 접하였다. 이 후 한 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성균관에서 학업에 정진하느라 곧 손을 떼었다. 다산은 천주교 신앙과 서양 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기도 하였으나 갖은 시련과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다산은 강진에서 처음 4년간 살던 주막집의 이름을 '네가지를 마땅히 해야할 집"이란 뜻으로 '사의제(四宜齊)'라 불렀다, 사의(四宜)는 '생각은 마땅이 맑아야 하고, 용모는 단정해야 하며, 언어는 과묵해야 하고, 행동은 조심해야 한다'라는 의미를 말한다.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나 마재마을 고향으로 귀향해서는 생가의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짓고 사색과 저술활동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때로는 어릴 때부터 자주 오르던 인근 운길산의 수종사에 올라 사색을 하며 여러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다산은 수종사와 관련하여 이렇게 회고 하기도 했다. "내가 옛날 더벅머리 아이 적에 처음으로 수종사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그 후에 다시 찾은 것은 독서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늘 몇 몇 사람과 함께였지만 쓸쓸하고 적막하게 지내다 돌아 왔다." 다산은 수종사에서 과거 공부도 했다. 14세 때는 '수종사에 노닐며(游水鐘寺)"라는 제목의 시를 21세 때는 '봄날 수종사에 노닐며(春日游水鐘寺)'라는 시를 남기는 등 여러편의 시를 지었으며 유배지에서 쓴 글에도 수종사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생가인 '여유당(輿猶堂)'의 '여유'는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말로 '여혜약동섭천 유혜약외사린'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에서 따온 것으로서 '겨울에 개울을 건너 듯, 사방을 두려워하 듯 조심히, 두려워 하며 처신하라' 는 뜻이다. 여(與)는 의심 많은 동물, 유(猶)는 겁이 많은 원숭이를 가르키기도 한다. 이것은 다산 자신과 가족, 주위 사람 모두에게 한 말이다. 정적들의 질투와 모함을 받아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그의 처세관을 함축한 단어가 '여유'였다.
다산은 자식들의 교육에도 철저해 고단한 귀양살이 중에도 학연과 학유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고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내용의 저서를 남겨야 하는지 가르쳤다. '폐족으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일 한 가지 밖에 없다'는 내용의 서찰에서 자식을 착한 길로, 독서의 길로 인도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정이 무척 진솔하다.
『너희가 부지런히 글을 읽지 않으면 나의 책을 후세에 전해주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감옥에서 문초한 기록과 사헌부의 판결문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라는 말로 자식들에게 책을 읽고 사색하라고 했다.
강진 유배 13년 째 되던 해, 부인이 시집올 때 입고온 해묵은 다홍치마 6폭을 보내왔는데, 이 헌 치마폭을 잘라 두 아들에게는 교훈의 글을 써 주고 외동딸에게는 매조도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림은 굵은 매화 가지에 참새 두 마리가 정답게 앉아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 아래에는 혼인을 축복하는 글을 썼다. 다산은 그렇게 만든 족자를 출가하는 외동딸에게 선물했다. 그림에는 애틋한 아버지의 정도 듬뿍 담았다.
둘째 아들 학유에게 부친 편지의 일부에도 부정(父情)은 드러 난다. 다산은 차(茶)와 술을 즐겼는데 술은 화기와 원기를 돕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술을 보약으로 본 그는 아들에게도 술을 마시되 곤드레가 되도록 취하지는 말도록 당부하였다.
(전략) 『참으로 술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처럼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과 혀를 적시기도 전에 직접 목구멍으로 넣는데 그래서야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지 얼굴이 붉은 귀신처럼 되고 토악질 하고 잠에 골아 떨어져 버린다면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너처럼 배우지 못하고 식견이 적은 폐족집안의 사람에게 못된 술주정뱅이라는 이름이 더해지면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후략) 자식의 술 마시는 주법까지도 신경을 썼던 것이다.
또 그는 차와 술과 관련해서 여러 글에서 "飮茶興 飮酒亡" 즉 "차를 즐겨 마시는 나라는 흥하고, 술을 즐겨 마시는 나라는 망한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이 낙향해 한가롭게 지낼 때의 일화도 유명하다.
『다산은 친지들과 정자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술이 거나해지자 "누구 누구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권세와 명예를 거머쥐었으니 분통이 터질 일" 이라고 한탄했다. 그러자 다산이 벌떡 일어나 "사람을 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벌주를 드린다" 고 하며 상대에게 술을 권했다. 얼마 지나자 또 어떤 이가 "저 말은 짐도 지지 못하면서 꼴과 콩만 축내는구나"고 혀를 끌끌 찼다. 다산은 또 일어서 "짐승에게도(말을 알아 듣기 때문에) 품평해서는 안 된다" 며 그에게 벌주를 따랐다. 그러자 함께한 사람들이 "그대의 정자에서 놀기가 참 힘들다"며 "이곳에선 입을 꿰매고 혀를 묶어야겠다." 고 핀잔을 줬다. 다산은 웃으면서 "종일토록 품평해도 화낼 줄 모르는 것이 있다."며 주변에 있는 바위를 실컷 자랑한 뒤 "입을 묶어 둘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좌중의 한 사람이 "화낼 줄 모르기 때문에 바위에 대해서 자유롭게 품평할 수 있느냐" 고 묻자 다산은 "저 바위에게 칭찬만 했지, 언제 모욕을 주거나 불손하게 말한 적 있습니까"는 말로 참된 품평은 칭찬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 일화로 이 정자는 '바위 마저도 칭찬해야 한다'는 의미의 '품석정(品石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다산은 자신의 일기에서 이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토를 달았다. "남을 품평하는 것은 참으로 쓸모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남을 평가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다산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한 토막이다.
다산의 묘는 여유당 뒤쪽 동산에 바람 잘 통하고 소나무들이 둘러 쌓인 곳에 있다. 다산은 "지관을 부르지 말고 자신이 지정한 자리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고 전한다. 다산은 고향 능내 마현리에서 부인과 혼인한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음력 2월 22일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생가 뒷 동산에 부인 남양 홍씨와 함께 합장해 묻혀있다.
다산을 생각하면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하는 물음에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다산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는데 다산의 업적이 유네스코의 이념과 일치하는 바가 인정되어 기념인물로 선정된 것이다.
시원한 바람 불고 하늘 높아 좋은 날, 전철 운길산역을 이용해 운길산 수종사와 연계하여 능내리 입구의 옛 능내역 인근의 정약종 일가의 천주교 수난의 역사 현장인 '마재성지(천주교 능내교회)'와 함께 '다산 유적지'를 돌아보는 성지 순례길을 걸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2014.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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