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주에 소를 타고 /수주 변영로

2013. 6. 26. 09:13카테고리 없음

 

 

 

 

백주(白晝)에 소를 타고

 

                                                                   변영로(1897 ~ 1961)

 

 

 

 


   역시 혜화동 우거에서 지낼 때였다.

어느 날 바카스의 후예들인지 유영(劉怜)의 직손들인지는 몰라도 주도의 명인들인

*공초, 성재, 횡보 3주선(酒仙)이 내방하였다.

설사 주인이 불주객(不酒客)이라 하더라도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별 도리가 없었을 것은 거의 상식문제인데,

주인이랍시는 나 역시 술 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후되지 않는 처지로 그야말로 불가무일배주(不可無一杯酒)였다.

 

 허나 딱한 노릇은 네 사람의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삼 원,

그때 수삼 원이면 보통 주객인 경우에는 3,4인이 해갈은 함 즉하였으나

우리들 무리 4인에 한하여서는 그런 금액쯤은 유불여무(有不如無)였다.

나는 아무리 하여도 별로 시원한 책략이 없어 궁하면 통한다는 원리와는 다르다 해도

 하나의 악지혜(기실은 악은 없지만)를 안출하였다. 동네의 아무개 집 사동 하나를 불러다가

몇 자 적어 화동 납작집에 있는 동아일보사로 보냈다.

 

 당시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장은 고(故) *고하였는데 편지 사연은 물을 것도 없이 술값 때문이었다.

좋은 기고를 하여 줄 터이니 50원만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이를 보내 놓고도 거절을 당하든지 하면 어쩌나 마음이 여간 조이지 않았다.

10분, 20분, 30분, 한 시간, 참으로 지리한 시간의 경과였다.

마침내 보냈던 아이가 손에 답장을 들고 오는데 무리 4인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것 같이 한군데로 집중되었다.

직각도 직각이지만 봉투 모양만 보아도 빈 것은 아니었다.

급하게 뜯어보니 바라던 대로, 아니 소청대로의 50원, 우화(寓話)중의 업오리 금알 낳듯 하였다.

 

 이제부터 이 50원을 어떻게 유효적절하게 쓰느냐는 공론이었다.

그때만 해도 50원이면 거금이라 아무리 우리 넷이 술을 잘 먹는데도

선술집에 가서는 도저히 비진(費盡)시킬 수 없었던 반면에,

낮부터 요정에를 가서 서둘다가는 안심이 안 될 정도였다.

끝끝내 지혜(선악간에)의 공급자는 나로서 나는 야유를 제의하였다.

일기도 좋고 하니 술 말이나 사고 고기 근이나 사가지고 지척인 사발정 약수터(성균관 뒤)로 가자 하니

일동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명륜동에 있는 통신 중학관(고 미상희군이 경영하던)으로 가서

그곳 하인 어서방을 불러내어 이리저리하라. 만사를 유루(遺漏)없이 분부하였다.

우리는 참으로 하늘에나 오를 듯 유쾌하였다. 우아하게 경사진 잔디밭 위에 둘러앉았는데 어서방은 술심부름,

안주 장만에 혼자서 바빴다. 술은 소주였는데 우선 한 말을 올려다 놓고 안주는 별 것 없이 남비에 고기를 끓였다.

 참으로 그날에 한하여서는 쾌음, 호음하였다.

객담, 고담, 농담, 치담, 문학담을 순서 없이 지껄이며 권커니 잣커니 마셨다.

 

 

 이야기도 길고 술도 길었다. 이러한 복스런 시간이 길이 계속되기를 빌며 마셨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고금 무류의 대기록을 우리 4인으로 하여 만들게 할 천의랄까,

하여간 국면이 일변되는 사태가 의외에 발생하였다.

그때까지는 쪽빛같이 푸르고 맑던 하늘에 난데없는 검은 구름 한 장이 떠돌더니,

그 구름장이 삽시간에 커지고 퍼져 온 하늘을 덮으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유연작운(油然作雲), 체연하우(滯然下雨) 바로 그대로였다.

 

 처음에 우리는 비를 피하여 볼 생각도 하였지만 인가 하나 없는 한데이고,

비는 호세 있게 내리어 속수무책으로 살이 보일 지경으로 흠뻑 맞았다.

우리는 비록 쪼루루 비두루마기를 하였을망정 그때의 산중취우(山中驟雨)의 그 장경은 필설난기(筆舌難記)였다.

우리 4인은 불기이동(不期而同)으로 만세를 고참하였다.

 

 그 끝에 공초 선지식(善知識)이 공초식 발언을 하였다. 참으로 기상천외의 발언이었던 바,

 다름 아니라 우리의 옷을 모조리 찢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옷이란 워낙 대자연과 인간 두 사이의 이간지물(離間之物)인 이상, 몸에 걸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 듯도 한 말이었다. 공초는 주저주저하는 나머지 3인에게 시범을 보여주듯이 먼저 옷을 찢어 버렸다.

남은 사람들도 천질이 그다지 비겁치는 아니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대취한 네 과한(稞漢)들이 광가난무(狂歌亂無)하였다.

 

서양에 Bacch-analian orgy란 말이 있으나 아무리 광조(狂躁)한 주연이라 해도

이에 비하여서는 불급(不及)이 원의(遠矣)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언덕 아래 소나무 그루에 소 몇 필이 매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번에는 누구의 발언이거나 제의였던지 이제 와서 기억이 미상하나 우리는 소를 잡아타자는데 일치하였다.

옛날에 영척(甯戚)이나 소를 탔다고 하지만 그까짓 영척이란 놈이 다 무엇이냐.

그 따위 것도 소를 탔는데 우린들 못 탈 바 어디 있느냐는 것이 곧 논리이자 동시에 성세(聲勢)였다.

 하여간 우리는 몸에 일사불착(一絲不着:옷을 입지 않음)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타고 유유히 비탈길을 내리고 똘몰(소나기로 해서 갑자기 생긴)을 건너고

공자 모신 성균관을 지나서 큰 거리까지 진출하였다가

큰 봉변 끝에 장도(壯圖-시중까지 오려던 일)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공초(空超) : 오상순

성제(誠齋) : 이관구

횡보(橫步) : 염상섭

고하(古下) : 송진우

 

 

 

변영로. 시인·수필가. 호는 수주(). 신시()의 선구자였고 수필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작품에 시집 《조선의 마음》, 수필집 《명정 40년》 따위가 있다.

 

 

 


    위의 수필은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간행된 변영로(卞榮魯)의 수필집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에 수록된 글로

변영로의 솔직한 심정과 풍자ㆍ해학ㆍ기지를 엿볼 수 있다.

<명정사십년 무류실태기(酩酊四十年 無類失態記)>라고도 한다. 책머리에는 박종화(朴鍾和)의 '서(序)'와

작자의 자서(自序)로 ‘서설(序說)'이 있고 수록작품 72편을 4부로 나누어 실었다.

 제1부 '명정사십년'에는 '등옹도주' '부자대작' '가두진출의 무성과' '졸한무예보래' 등 48편,

제2부 '명정낙수초'에는 '기인고사대불필절' '교실내에 로이드극' 등 4편,

제3부 '남표'에는 '현대출애급판' '한양아 잘 있거라' '하나의 전화' '부공부수'와 '기외' 등 10편,

제4부 '명정남빈'에는 '서언'을 위시하여 '계엄주의 범람' '하고방 순례' '명정의 피날리' 등 10편이 각각 실려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수필들은 대부분 1949∼1950년에 걸쳐서 [신천지]에 연재된 <명정사십년 무류실태기>와

 6ㆍ25전쟁 때 부산 피난시절 [민주신보]에 연재된 <남표>를 중심으로 하여 엮은 것으로,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와 함께 술에 관한 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로 꼽히고 있다.

우리나라 주당(酒黨)들에게는 이 방면의 포복절도할 쾌저(快著), 명저이다.

다른 문인들의 소소한 음주기(飮酒記)를 더러 읽어보았지만 모두 이 두 명저에는 몇 걸음 양보를 해야 한다.

 

     이 수필은 대주가(大酒家)로 불린 작자가 40년간 술에 취해서 살아온 무류실태기로서 풍자적이며 해학적이고

기지 넘치는 필치로 그 시대상을 고발하고 있다.

남들은 30∼40년 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대성질호(大聲疾呼)하는 판에

자신은 "호리건곤(壺裏乾坤)에 부침(浮沈)한 것을 생각할 때

자괴자탄(自愧自嘆)을 금할 수 없다"고 변영로는 '자서(自序)'에서 말하고 있다.

곧 그의 반생(半生)은 비극성을 띤 희극 일관으로 경쾌주탈(輕快酒脫)하게 저지른 범과가

기백기천으로 헤아릴 길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영로가 이렇게 술에 취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을 소설가 박종화는

"세상 됨됨이가 옥 같은 수주(樹州: 변영로의 호)로 하여금

술을 마시지 아니치 못하게 한 것이 우리 겨레의 운명이었으며,

난초 같은 자질이 그릇 시대를 만났으니 주정하는 난초가 되지 않고는 못 배겨내었던 때문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명정기에 주정이 없다 하면 평자 자신이 숙취중(宿醉中)이란 말을 들을 것이다.

광태라고 부를 만한 실행(失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작폐(作弊)의 주정이 아니다.

더러 결정적 실수가 있었다 해도 웃을 수 있는 실수다.

 

 

     경음(鯨飮, 고래같이 마심)하는 거인(巨人)의 실태(失態)라서

트로이의 영웅들이 총동원해서 이루는 전쟁기를 연상시킨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한 것처럼 웃을 수 있는 실태에 험구(險口,험담)를 늘어놓을 수 없다.

희극의 주인공이 늘 사랑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작폐가 없으면 깨끗한 주정이다.

거기다 웃음마저 곁들였으니 금상첨화의 술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