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4. 02:55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o 외국인들의 시각에서 바라 본 한국의 역사▨―·· 그때그시절 자료
주은래(저우라이언,周恩來)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痢), 금족(金族)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본토 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 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또한 중국에는 베트남을 정벌한 두 영웅 즉 마원과 복파(伏波) 장군이 있다. 베트남의 두 재녀(才女)는 용감하게 항거하다 실패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는데, 장군은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나는 베트남에 갔을 때 두 재녀의 사당에 헌화하면서 마원을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마원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고학자들이 문물과 비석같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적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 2,3천년에 걸친 관계를 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 될 것이다. 주은래(저우라이언,周恩來)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중에서
서량지(徐亮之) 교수는《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 10월 초판) 에서 이렇게 썼다. “4,000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曆法)은 사실 동이(東夷)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史記, 五帝本紀).
“4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대만학자 노간(勞幹)은 중국문화론집(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에서 “우리들은 동방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후대에 와서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어 쓴 것이다.”
俄們常常把 東方的人稱爲東夷 而夷字和人字是通用的仁字和人字也是出於一源 那魔漢語中 ‘人’的稱謂 支於還有出於東方的可能…. 假若夷人先成文化的先進 夷人先用了‘人’字作爲全人類的名類 西方候起的部族 可能再爲借用的(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 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シロコゴルフ)는《중국사》에서 "주전 3,000년경 동이족(東夷族)은 이미 황하 양자강(揚子江)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고 하였다.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중칭(重慶)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함께 피난 온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찬에 초대했었다고 한다. 이때 장 총통은 자기 고향이 옛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장 총통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지적 입장에서 이런 역사인식을 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김구 주석은 충격과 함께 자괴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뒷날 술회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가 중국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김구 주석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고 한다. 장개석의 고향은 양자강(揚子江) 남쪽 절강성(浙江省)이므로 옛 백제는 양자강 이남지역까지 지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운초 계연수선생은 스승이자 항일운동 동지인 조선 말 실학자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가 일본에 나라가 병탄된 것에 비분강개하여 1909년 절식(絶食) 자진한 후 계연수는 만주로 건너갔다. 만주 관전현은 독립운동가와 열사들이 수시로 모여 강론과 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1911년 계연수선생은 그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 했다. 만주 관전현은 독립운동가와 열사들이 수시로 모여 강론과 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운초 계연수선생은 항일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천마산대, 서로군정서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57세 때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목과 팔,다리가 다섯 토막으로 잘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당시 압록강에 처참하게 버려진 그의 시신이 수습되는 광경을 지켜본 14세 소년이 훗날 환단고기를 널리 대중화 시킨 이유립(1907~1986)선생이다.
관용의 나라 프랑스의 경우 4년간 나치에 협력한 반민족자 100만명을 체포하여 1만명의 넘는 사람을 즉결처형하였다.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고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호의호식하며 살던 친독에 있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단한명의 친일파도 처형당하지 않고 친일파가 그대로 기득권을 유지하며 친미파가 되었고, 그들은 반공을 외치며 민족주의자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때문에 어떤 사학자는‘우리나라는 친일청산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일파에 의해 민족주의자들이 청산당했다’라고 말한다.
이병도와 같은 식민사학자들도 해방과 더불어 추방은 커녕 서울대 사학과 초대교수가 되고, 60년도에는 문교부장관까지 한다. 주류 학계를 장악하게된 그들에게 우리나라는 70년간 역사 교육을 그들의 손에 맡겨 왔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병도같은 식민 사학자가 우리나라 학계의 주류가 되었을까?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독립운동을 하던 대부분 의식있는 사람들은 정식적인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일제에 편승한 친일파는 제도권안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2년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은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한국인 정치가를 물색했고, 그 적임자는 이승만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던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 등은 강력한 민족주의자로 미국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반면 이승만은 친미주의자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지지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게 된다. 해방직후 친일파 숙청의 건의가 거세게 들어오고 반민족 행위자 특별 처벌법을 만들어 반민특위를 만들었지만, 이승만 대통령 직권으로 테러를 하며 1년만에 유야무야 없던 일로 해버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백남운 같은 사회경제학자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사학의 거목들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 역사학계를 독차지한다. 그러한 이병도도 죽기 직전인 1989년에는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닌 실존했던 조상이라고 기고를 하게 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7년부터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 10억 원을 상납해 ‘고대 한국(Early Korea) 프로젝트’ 사업을 실시했다. 한국 고대사를 6권의 영문 서적으로 간행해 외국인들에게 한국 고대사를 홍보하겠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2013년 12월에 발간한 『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한국 고대사 속의 한사군)』와 2010년에 발간한 『The Samhan period in Korean History(한국사 속의 삼한시기)』는 조선총독부가 환생해서 발간했거나 일본의 아베 내각, 또는 중국 국무원 소속 기관에서 간행했다면 명실상부하다고 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해서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 『진서(晋書)』 등 한사군에 대해 쓰고 있는 중국의 고대 역사서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일관되게 지금의 북경 부근 하북성 일대로 표기하고 있지만 동북아역사재단은 아무런 사료적 근거도 없이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그대로 추종한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버젓이 중국 동북공정의 근거 자료를 만들어 주고, 일본의 조선강점을 정당화 시켜주는 매국·매사행위를 한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중국이 북한의 위기 상황을 이용해 북한 강역을 중국영토로 편입시킨 후 북한은 원래 중국 땅이라고 억지 주장하는 것을 넘어 강제 점유해도 대한민국은 반박할 수 없게 된다.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이 그렇게 서술하지 않았냐고 말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환생해서 발간했거나 일본의 아베 내각, 또는 중국 국무원 소속 기관에서 간행 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 동북아역사재단이 스스로 간행 한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책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버젓이 간행했기에 많은 이들이 동북아역사재단의 매국 · 매사행위를 감사해 달라고 감사원에 요청한 것이다.
http://cafe.daum.net/endolpins/16vI/2423
- 다음 카페 < 전원과 귀농이 있는 엔돌핀 마을> 세요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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