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디나비아의 역사 / 주광수 님

2013. 6. 27. 12:10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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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스웨덴.덴마크 野外歷史博物館, 편자 스기모도 히사쓰구,
발행인 장재국, 1986
스칸디나비아, 라이프 세계의 국가, 발행인 장재국, 1987
北유럽史, 卞光洙저, 2000
야후백과
동아원색세계백과사전
   
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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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18일부터 7월 2일까지 러시아의 모스크바, 쎙 뻬쩨르
부르그를 거쳐 스칸디나비아諸國을 돌아보았다. 서울고등학교 총
동문 산우회 白壽會 주관이었다.
   
스칸디나비아 특히 놀웨이의 자연은 驚異스러움 자체였다. 뿐만
아니라 스칸디나비아諸國은 작금의 性의 개방을 주도함으로서 남
녀평등을 이루었으며, 개인 소득이 세계에서 최상위를 차지하며,
사회보장제도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하여 국민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나라다. 그들도 그들대로 사회보장제도의 보편화에서 오는
경쟁력의 약화 등 문제점을 내포하고는 있지만 세계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국가라는 데는 아마도 異見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여 그처럼 잘사는 국가, 국민이 되었을까? 그들
이 잘 살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나는 항시 그것이 궁금하던 차
에 덴마크, 코펜하겐의 어느 관광 가이드의 설명에서 그 실머리
를 찾을 수 있었다. 지도자를 잘 맞났기 때문이란다. 그녀가 말하
는 덴마크의 지도자는 그룬트비, 달가스, 안델센, 키에르케골이었
다.
  
그룬트비(Grundtvig, Nikolai Frederik Severin, 1783-1872)
........................................................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출생. 코펜하겐대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
교사로 있으면서 《북구 신화(北歐神話) Nordens mythologi》
(1808)를 써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영국으로 여행하여
영국 국민의 자유와 실제 생활에 깊은 감명을 느끼게 되면서 라틴
적, 인문주의적 학교교육을 청소년들의 생명을 위축시키는 '죽음
의 교육'이라고 공격하고, 일하는 국민을 위한 '생활학교'를 주장
하여, 이를 즉각 설립하라고 나라에 호소하였다.
     
조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예부터 전하는 민족정신과 그리스도
교를 바탕으로 하여 국민부흥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특히 1864
년의 패전 후 그의 제창으로 전국에 설립된 국민대학(국민고등학
교라고도 한다)에서 교육을 받은 농촌 청년은 패전에 잇따른 농업
위기를 극복하여 세계적 농업국, 평화적인 문화국가 건설의 기초
를 이룩하였다.
        
그룬트비는 시인이며 종교가일뿐만 아니라 역사가였다. 현재 국부
(國父)로서 존경을 받고 있으며, 저서로는 전집 10권이 있다.
       
안데르센(Andersen, Hans Christian, 1805-1875) 
.............................................         
덴마크의 퓨네 섬의 작은 마을 어촌인 오덴세에서 구두 고치는 가
난한 아버지와 남의 집에서 빨래를 해주는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
다. 안델센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여서 매일 밤 술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는 어린 안델센을 깨워놓고 옛날 이야기를 밤새도록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책읽기를 좋아했고 진보된
생각의 소유자였으며 안델센에게 라 퐁텐느의 우화시와 '아리비안
나이트'를 읽어 주었다.
                     
1816년 부친이 사망하고 안델센은 '아보르와 에르비르'란 시극을
쓴다. 1818년에는 빈민 학교에 입학하고 어머니는 재혼을 한다.
안델센은 양복점에서 일도 도왔으나 맞지 않았고 무용수나 배우,
가수가 소원이었던 그는 1820년 왕립극장 부설 무용 교습소에 등
록 하기도 한다. 1822년 문법 학교에 입학하였고, 1826년 헤루실
게르란 학교에 전입하여 '임종하는 아들'을 발표한다. 1828년에
'아마게르 섬에의 도보여행'을 출판하여 호평을 받는다. 1833년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다. 1835년 소설 '즉흥시인'과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를 발표한다. 이 작품에서 고아가 된 안토니오를 키
우는 가난한 할머니를 통하여 자신의 엄마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었다. 1837년에 유명한 '인어공주'를 발표하고 1840년에는 '그림
없는 그림책'을 쓴다. 이 작품 속의 가난한 화가는 안델센 자신을
나타낸 것이며 코펜하겐의 다락방에서 지낸 시절이 이 속에 나타
나 있다. 1843년 '성냥팔이 소녀'를 발표한다. 이 작품 속 할머니
는 자기 할머니를 의미하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그리워하며 썼
다고 한다. 1871년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고 정신병에 시달리다
1875년 8월 4일 운명하게 된다.
           
동화작가로 알려진 안델센은 덴마크에서는 대시인으로 알려져 있
다. 그는 시인으로 많은 활동을 했으며 그의 동화는 이 시에서 피
어난 꽃이라고 볼 수 있다. 쓰라린 실연의 아픔을 안고 평생을 독
신으로 지내며 여행을 즐긴 안델센은 1875년 친구의 별장에서 쓸
쓸히 죽어갔지만 그의 아름다운 동화들은 전세계에서 사랑받고 있
다.
               
키르케고르(Kierkegaard, S ren Aabye, 1813-1855)
...............................................              
덴마크의 철학자. 코펜하겐 출생. 아버지는 비천한 신분에서 입신
한 모직물 상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교인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하녀에서 후처가 된 여인이었다.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비범한 정신적 재능은 특출하였으며 이것이
특이한 교육으로 배양되어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중(辨證)
의 재능이 되었다. 소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그리스도교의 엄한
수련을 받았고, 청년시절에는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
구하였다.
                  
1837년경 그가 스스로 '대지진(大地震)'이라고 부른 심각한 체험
을 하였다. 그 내용은 아버지가 소년시절에 유틀란트의 광야에서
너무나 허기지고 추운 나머지 하나님을 저주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바로 자기 자신이 결혼 전에 아이를 밴 어머니의 아들이라
는 것 등을 안 사실로 죄의식이 심화되었고, 인생을 보는 눈과
그리스도교를 보는 눈에 근본적인 변혁이 생겼다. 한편, 37년 당
시 14세의 소녀 레기네 올센을 알게 되자, 곧 사랑의 포로가 되어
약혼까지 하였으나, 애정의 상극과 내면의 죄의식 때문에 41년 가
을에 약혼을 파기하였다. 이 때에 체험한 정신적인 갈등이 훗날
미적 저작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한때 베를린에 나가 당시 명성
을 떨치던 철학자 F.W.셸링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돈 죠반니'
'파우스트' 등 많은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하다가 이듬해인 42년에
귀국하여 저술을 시작하였다.
              
그의 활동은 활발하여 43-46년의 짧은 기간에 '이것이냐 저것이
냐' (43) '반복'(43) '공포와 전율'(43) '불안의 개념'(44) '인생
행로의 여러 단계'(45) 등과 같은 이른바 미적 저작과 '철학적 단
편'(44) '철학적 단편을 위한 결말의 비학문적 후서'(46) 등의 철
학적 저작을 모두 익명으로 출판하였고, 이 밖에도 그리스도교에
관한 많은 교화적인 강화를 발표하였다. 그 후 저술에 싫증이 난
그는 시골의 목사가 되어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어하였다. 그러
나 이 때에 풍자신문 '코르사르'에 그의 작품과 인물에 대하여 오
해에 찬 비평이 실려, 그것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논쟁하는 사이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새로운 정신 활동과 저술을 향한 의
욕이 용솟음쳤다. 그는 신문의 무책임한 비평과 세간의 비웃음에
도 굴복하지 않고, 한편에서는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엄하게 비판하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
자(單獨者)로서의 신(神)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49) '그리스도교의 수련'(50) 가운데에서 추
구하였다. 그는 기성 그리스도교와 교회까지도 비판하였으며 '순
간' 등의 팸플릿을 통한 공격은 매우 격렬하였다. 그런 와중인 55
년 10월 갑자기 노상에서 졸도한 후 다음달 병원에서 죽었다.
                 
달가스(Dalgas, Enriko Mylius 1828∼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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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덴마크로 이주한 프랑스계 이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55년 북유틀란트 비보르 군사용 도로부설대의 중위로 임관되어
1856년 대위, 1860년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1864년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두 공국의 귀속문제를 둘러싸고 일
어난 프로이센과의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패하여 실의에 빠져
있던 덴마크 국민들에게 용기와 의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그는
1866년 오르후스에서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 함께 히스협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유틀란트의 히스지대 개간에 착수
하였다.
            
그는 비보르에서 근무하는 동안 유틀란트의 토양을 연구하고 이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때의 지식이 히스지대의 개
간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히스협회 회원들의 열성에 감동한 덴마
크 국민들이 그들의 작업에 자발작으로 참여하여 황무지에 나무심
기를 거듭한 끝에 거친 땅을 옥토로 바꾸어 놓았고, 국민들도 실
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들은 왕도 아니고 정치가가 아니었다. 이들은 종교가, 사상가,
철학가, 역사가, 문인이었으며 나무를 심은 사람이었다. 그룬트비
는 스칸디나비인들에게 스스로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워주
었으며 죽은 교육이 아닌 참교육에 눈을 뜨게 하였다. 달가스는
황무지인 국토에 나무를 심게함으로써 국토를 윤택하게 하였을 뿐
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안델센은 어
린이들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꿈을 갖게하여 주었으며 키에르케
고르는 신앙심과 철학에 현실성을 부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참다
운 개혁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모두 함께 잘사는
나라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덴마크에만 국한되는 것
이 아니고 스칸디나비아제국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사실일 것
이다.
                   
스칸디나비아 제국(諸國)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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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 제국(諸國)이라고 하면 대체로 스웨덴,노르웨이, 덴
마크, 아이슬란드를 가리키고 때에 따라 핀란드가 포함되나, 스칸
디나비아 반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스웨덴과 노르웨이만을 포함
한다. 북위 55∼71°에 있기 때문에 여름에는 해가 길어 백야(白
夜)현상을 볼 수 있으나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는 곳도 있다.
             
노르웨이 (Norway) 
위치 : 스칸디나비아 반도 서부
면적 : 32만 3758㎢
인구 : 451만 6000명(2001)
인구밀도 : 13.9명/㎢(2001)
수도 : 오슬로
정체 : 입헌군주제
공용어 : 노르웨이어
통화 : 크로네
환율 : 8.87 크로네 = 1달러(2001.9)
1인당 국민총생산 : 3만 3470달러(1999)
                 
스웨덴 (Sweden) 
위치 :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남부  
면적 : 44만 9964㎢
인구 : 888만 8000명(2001)
인구밀도 : 19.8명/㎢(2001)
수도 : 스톡홀름
정체 : 입헌군주제
공용어 : 스웨덴어
통화 : 스웨덴마르크
환율 : 8.17 SEK = 1달러(1999.10)
1인당 국민총생산 : 2만 6750달러(1999)
             
덴마크 (Denmark) 
위치 : 유럽의 유틀란트 반도
면적 : 4만 3094㎢
인구 : 535만 8000명(2001)
인구밀도 : 124.3명/㎢(2001)
수도 : 코펜하겐
정체 : 입헌군주제
공용어 : 덴마크어     
통화 : 덴마크 크로네(Dkr)
환율 : 8.17 덴마크 크로네=1달러(2001.9)
1인당 국민총생산 : 3만 2050달러(1999)    
                    
핀란드 (Finland) 
위치 : 북유럽 발트해연안
면적 : 33만 8145㎢
인구 : 518만 5000명(2001)
인구밀도 : 17명/㎢(2000)
수도 : 헬싱키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핀란드어, 스웨덴어
통화 : 마르카(Fmk)
환율 : Fmk 6.53 = 1달러(2001.9)
1인당 국민총생산 : 2만 4730달러(1999)
나라꽃 : 은방울꽃
          
上古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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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약 200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 사이에  4차례에 걸쳐서
빙하기가 있었다. 마지막 빙하기는 약 7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중 북부유럽은 모두 빙하로 쌓여있었다. 약
B.C. 8000년경에 스칸디나비아에도 빙하가 후퇴한 지대가 생겨 사
람들이 살 수 있게 되었다. 빙하의 후퇴가 진행됨에 따라 초목이
무성한 원시림이 생겼고, 그 곳에 서식하는 동물의 종류도 증가하 
였다. 그런 것들을 찾는 사람의 무리는 이 북쪽 땅에 줄을 이었다.
             
어떤 민족이 언제, 어디에서 이 극북지방에 첫발을 들여놓았는지
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돌과 뼈와 뿔로 도끼, 화살촉, 낚시, 작
살 등을 만들어 수렵과 어로생활을 영위하였다. 수렵의 마술을 믿
었던 흔적도 남아있다.
                 
약 B.C. 3000년경부터, 필시 인도.유럽 민족일 터이지만 이 땅에
밀려들어와 정착을 하였다. 그들은 수렵과 어로의 단일 사회 구조
를 서서히 변혁하여 분화된 사회구조를 만들어 나갔다. 그 속에는
농경민과 말을 벗삼고 손에 투부(鬪斧; 船型斧)를 휴대한 유목민
이 있었다. 이와 같은 부족의 도래로, 북유럽은 산업혁명에 필적
할 만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약 B.C. 1500년경에는 선주민(先住民)인 수렵민, 어로민과 잇달아
도래한 여러 부족과의 사이에 혼교(混交)가 이루어지고, 돌 대신
청동으로 이기(利器)가 만들어졌다. 청동기시대의 도래이다. 북유
럽은 우선 중부 유럽에서 청동 문화를 배웠고, 약 B.C. 1000년을 
경계로하여 구청동기시대에 소용돌이 무늬 장식, 신청동기 시대에
파상(波狀)띠 무늬 장식이 유행할 만큼 독자적이고도,  훌륭한 예
술을 창조하였다. 청동 원료를 수입하는 교환 물자로는 '호박'을
사용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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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B.C. 400년경이 되면 철기시대로 들어갔으나 전대(前代)와는
전혀 다른 기후로 변화하여, 차갑고 습윤하며, 해가 별로 비추지
않는 나날이 찾아왔다.
         
BC 2세기-BC 1세기에 이들 여러 스칸디나비아 부족들은 이동을 개
시하여 동남쪽으로는 멀리 흑해(黑海) 연안에, 서남쪽으로는 라인
강(江) 유역까지 퍼져 나가서 북(北)게르만(덴마크인, 노르만인
등), 서(西)게르만(앵글인, 아라만인, 색슨인, 프랑크인 등), 동
(東)게르만(동고트인, 서고트인, 반달인, 부르군트인 등)의 세 그
룹으로 갈라졌다.
           
게르만족이 처음으로 로마인과 접촉한 것은 BC 2세기 말 남(南)갈
리아와 북이탈리아에 침입하였다가 격멸되었을 때인데, 그 뒤에도
로마의 갈리아원정군과 가끔 충돌하였다. 375년 동게르만의 고트
족(族)이 아시아에서 침입해온 훈족의 압박을 받아 이동을 개시함
으로써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이 전개되어, 게르만왕국이 각지에 세
워졌다.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 에스파냐의 서고트왕국, 이탈리
아의 동고트왕국, 남프랑스의 부르군트왕국, 북프랑스의 프랑크왕
국, 영국의 앵글로색슨왕국 등이 그것인데, 원주지인 발트해(海)
연안에 남아 있던 북게르만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의 3왕국
을 세웠다.
           
바이킹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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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들은 북유럽의 엄동을 견디어 내기 위하여 견고하고 오래가
는 집이 필요하였다. 겨울 동안 들어가서 지낼 수 있는 항구적인
집이 필요했다. 노르웨이의 집터를 보면 집은 좁고 길쭉했으며,
벽은 큰 돌로 쌓았고, 지붕은 벽 안쪽에서 땅 속에 묻은 두 줄의
기둥으로 받친 목조 건물이었는데, 바닥의 중앙에는 난방과 조명
을 위한 화덕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집은 조부와 아들 부부와 그 자녀들로 구성된 조부 가
족과 가축도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근처에는 방목장(放牧場),
그 주위에는 양식을 생산하는 밭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공유
재산으로 해서 가장 아래 일족을 형성하는 것이다. 성원은 개인적
존재라기 보다는 일족적 존재였다. 피살자의 일족은 보상금 또는 
복수를 요구할 수 있었고, 만약 거부하면 살해자 일족 중의 한 사
람을 죽였다. 이와 같은 자급자위의 경제적 단위로서 고르드(Gord,
농장 가옥)가 만들어졌다.
            
옛 북유럽인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갈철광에서 철을 제련하였다.
철기를 생산하게 되자 경작과 개간을 용이하게되었고, 효율도 높
아졌다. 로마 제국의 탄생으로 남쪽 여러 나라들과의 통상이 재개
되었다.
            
철기의 이용과 남쪽 나라들과의 접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무렵부터 북유럽은 새로운 번영기를 맞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르
드가 차례로 생기게 되엇으며, 최초의 고르드는 새로운 고르드의
중심이 되엇으며, 일족의 촌락이 탄생되었다.
           
농민은 외적을 방위하기 위해 군사 조직과 요새를 만들었고, 위법
사태에 대해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칼 대신 법의 심판에 따르는
민회(民會)를 조직하였으며, 신들을 받들어 모셨다.
               
이웃하는 촌락들은 공통적인 관습으로 자연적으로 연결되어 국가
를 창건하게 되었고 소왕(小王)이나 수령은 전쟁과 민회, 제사에
있어서 농민을 지도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전사
(戰士)와 친위병을 거느리고 판도를 확대하기 위하여 침략으로 토
지와 전리품을 얻으려는 자도 나타났다. 이때부터 이들을 바이킹
이라 불렀다. 바이킹들은 동으로, 서로, 혹은 유럽 대륙 연변으로
배를 몰아 식민(植民)하는 자도 있었고, 귀국하는 자도 있었다.
                  
그 어원은 고국땅인 스칸디나비아에서 덴마크에 걸쳐 많이 있는
vik(峽江)에서 유래한 말로 '협강에서 온 자'란 뜻이다. vig(전투),
wik(성채화된 숙영지), viking(해적) 등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 이 무렵에 그들이 각지에 진출한 원인
은 인구증가에 의한 토지의 협소화 때문이며, 한랭하고 메마른 땅
에서 온난하고 비옥한 땅을 얻기 위하여 감행한 제2의 민족대이동
이라 할 수 있다.
                
'793년 6월 8일은 피와 불로 기록된 날이었다.'라고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기록하고 있다. 노르웨이인이 영국의 수도원을 공격한
이날을 계기로 바이킹 시대의 불길은 올랐고, 그 기세는 단숨에
북유럽 전토를 삼켜버렸다.
                   
바이킹은 잉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스코트랜드 서부의 제도),
아일랜드 그리고 웨일즈의 마을과 수도원을 약탈하였다. 바이킹은
독일, 북해 연안의 저지대 지역 그리고 북부 프랑스 해안을 휩쓸
며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다. 심지어는 센강 상류까지 올라가 파리
에 불을 질렀다. 약탈할 만한 재물이 있으면 빼앗고 그럴 만한 것
이 없는 가난한 곳에서는 대신 노예를 잡아갔다. 저항하는 자는
무더기로 학살당했다.
          
처음에 이런 약탈행위를 시작한 하수인들은 노르웨이의 표르드에
서 온 농민들과 오늘날의 덴마크 해안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봄의 
파종기에서 가을 수확기가 오는 동안의 여름에는 그들은 농사를
여자들에게 맡기고 부와 남자로서의 영과을 손에 넣기 위해 원정
길에 나섰다. 이 북유럽해적들은 이 계절적 약탈 원정을 '바이킹
하러 간다'고 말했다.
             
당시의 노르만족은 씨족제(氏族制)사회가 해체되고 계급사회로 이
행하여 국가형성기에 이르는 과도기로서, 부족 간의 항쟁으로 뜻
을 이루지 못한 족장(族長)이 부족민을 인솔하여 해외로 신천지를
찾아 진출한 경우가 많았다. 일찍부터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그들
에게 전쟁과 모험, 전리품의 갈망 등은 해외진출을 더욱 촉진하였
다.
               
무자비한 침입, 싸움, 약탈 등으로 '해적 민족'으로서 각지의 공
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해적행위는 민족이동뿐 아니라 전투,
정복, 탐험, 식민, 교역 등 다양한 활동을 초래하였다.
                    
바이킹은 덴마크계(系), 노르웨이계, 스웨덴계로 크게 나뉘는데,
앞의 2계통은 주로 서유럽에서, 그리고 후자는 주로 동유럽에서
활동하였으나 서로가 뒤섞여서 활동한 경우도 많았다. 원정 초기
에는 농한기인 여름에 출발하여 바다가 거칠어지는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왔으며, 족장에게 인솔된 전사(戰士)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9세기 중엽부터는 행동의 범위가 넓어져, 하구(河口) 등
에서 숙영을 하면서 겨울을 지내고 거기서부터 내륙으로 침입하는
정복적 성격을 띠었다. 토지를 점령하고 정착하는 단계가 되자 가
족을 데리고 왔는데, 그때 농민, 상인, 직인(職人) 등도 가담하여
식민적 성격이 강해졌으며, 원주민과의 융합, 동화, 그리스도교에
의 개종 등이 진척되었다. 덴마크에서는 1000년경, 노르웨이에서
는 50년 늦게, 스웨덴은 100년이나 늦게 그리스도교에의 개종이
이루어졌다.
                
그사이 그들 중에는 현지의 왕 등에게 용병(傭兵)으로서 일하면서
스스로 소공국(小公國)을 건설하기도 하고, 나아가 각지에 건설한  
기지를 연결하는 무역을 하기도 한는 등 활동이 다양하였다.
           
바이킹은 상인과 해적으로서 활동하여 라인강과 엘베강을 따라 약
탈하였으며 프랑크를 위협하였다. 또 일부는 발트해 동부에서 러
시아로 들어가 나라를 세우고, 하천을 따라 멀리 콘스탄티노플까
지 도달하여 교역하였으며, 또 일부는 지중해의 남프랑스와 남이
탈리아에 정착하였다. 바이킹의 활동은 11세기 중엽에 막을 내렸
다. 
              
中世史, 近代史
--------------
덴마크
......
덴마크 왕국에 대해서는 초기 바이킹시대인 800년경, 즉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재위 768∼814) 때 그 최초의 기록이 나타난다.
덴마크의 고드프레드왕은 카를 대제의 북방진출을 저지하고, 다시
그의 아들 헤밍왕은 811년 조약을 체결하여 아이더강(江)을 프랑
크왕국과의 경계로 설정하였다. 그 경계선은 그 뒤 일시적인 침범
을 받은 적은 있으나 1864년까지 지속되었다.
              
헤밍왕이 죽은 뒤 왕국이 해체되었다가 10세기에 북(北)유틀란트
의 예링에서 일어난 하랄왕에 의해 재통일하였다. 하랄왕은 960년
경 국민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그의 아들 스벤(스웨인) 1세
는 1013년 잉글랜드를 정복하였다. 스벤의 아들 크누드(카누트)
대왕(재위 1014∼1035)은 덴마크와 잉글랜드 및 노르웨이의 왕위
를 겸하는 대왕국을 창건하였다.
                  
크누드가 죽자 곧 그 대왕국은 분열되고, 덴마크는 다시 스칸디나
비아의 한 세력으로 전락하였으나, 크누드의 조카 스벤 2세에 의
해 로마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신(新)덴마크 왕국이 건설되
었다. 스벤 2세가 죽은 뒤 한때 앵글로색슨의 세력하에 있던 덴마
크교회는 다시 함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갔다가 1104년경 룬드를
대주교구(大主敎區)로 한 독자의 국교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134년 이후, 다시 교회와 국가의 분열 및 국내분쟁이 지속되다가,
1157년 발데마르 1세(재위 1157∼1182)가 일어나서 국내를 통일하
고 발데마르 왕조를 일으켰다. 발데마르 1세는 군사력을 재편성하
여 독일에 대항하고 발트해의 슬라브 세력과 싸웠는데, 그때 슬라
브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셸란섬에 구축한 성새(城塞)가 오늘날의
코펜하겐의 기원이 되었다.
                            
발데마르 2세(재위 1202∼41) 때 정치적·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
으나, 그가 죽자 다시 왕, 교회, 귀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서 왕
권이 약화되고, 또 같은 시대에 발트해(海)의 지배 및 슐레스비히
의 영유를 둘러싸고 스웨덴, 노르웨이, 한자동맹 세력과의 항쟁이
지속되어 왕국의 약체화를 가져왔다. 발데마르 4세가 죽은 뒤, 발
데마르의 딸 마르그레테와 그녀의 남편, 즉 노르웨이왕이자 스웨
덴 왕위계승자인 호콘 6세의 아들인 올라프 2세(재위 1375∼87)가
왕위에 오르자 마르그레테가 섭정(攝政)이 되어 실질적인 통치권
을 행사해오다가 호콘 6세, 올라프 2세의 사후(死後) 1387년 덴마
크 및 노르웨이의 군주로 승인받았다. 마르그레테는 다시 1389년
스웨덴왕을 겸하였다. 이와 같은 동군연합(同君聯合) 형태의 3왕
국의 통합은 1397년의 이른바 칼마르동맹(The Kalmar Union)에 의
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1448년 덴마크의 왕조는 올덴부르크가
(家)로 바뀌었으나 칼마르동맹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특히 크라스
티안 2세(재위 1513∼1523)는 1520년 스웨덴에 침입하여 독립운동
지도자 스투레 일파의 학살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스웨덴은 다시 봉기하여 독립을 이룩하고, 1523년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덴마크의 종교개혁은 크리스티안 3세(재위
1534∼1559)에 의해 추진되어 루터파의 신교가 받아들여졌으며,
한편 그 무렵에 노르웨이는 자치운동이 완전히 봉쇄당한 채 사실
상 덴마크의 속국이 되었다. 프레데릭 2세(재위 1559∼1588) 때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뤼벡 사이에 '북방 7년전쟁'이 일어났
고, 크리스티안 4세(재위 1588∼1648) 때는 2차에 걸친 스웨덴과
의 싸움으로 국토의 손실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1660년 프
레데릭 3세(재위 1648∼70)는 귀족세력과 대립하는 도시(都市)
부르주아 및 루터파 성직자와 결합하여 왕위의 세습제를 승인받
고, 1665년에는 국왕의 절대주권을 승인받아 절대군주제(絶對君
主制)를 확립하였다.
                         
1788년 농노제(農奴制)가 폐지되고, 1797년 자유무역의 원칙에 입
각한 관세법이 성립되어 덴마크의 경제가 활력을 얻었다. 나폴레
옹 전쟁에서 영국함대의 공격을 받고 나폴레옹 편에 서게 된 덴마
크는 영국, 러시아, 스웨덴 등 동맹국과 싸운 끝에, 1814년의 킬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고 4세기에 걸친 노르웨
이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1842년에는 입헌적 대의정치(立憲的
代議政治)를 주장하는 국민자유당이 결성되었다. 1849년 프레데릭
7세(재위 1848∼1863)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전제정치를
포기하고, 자유헌법을 성립시켜서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다.
                      
1864년에는 1460년 이래 동군연합(同君聯合)의 형태로 덴마크에
속해 있던 유틀란트 남부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두 공국(公國)
의 영유를 요구하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싸워서 패한 뒤 그
것을 할양하였다. 그 동안에 후사(後嗣)가 없는 프레데릭 7세의
뒤를 이어 글뤽스부르흐가(家)의 크리스티안 9세(재위 1863∼
1906)가 왕위에 올라 현(現) 왕조를 열었다.
             
덴마크는 그 뒤부터 내정의 안정을 이룩하여, 국민의 역량을 농목
업 및 해운업을 주축으로 하는 경제발전에 집중시켜왔으며, 20세
기 초부터는 사회복지제도도 정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중립을 지키는데 성공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중립선언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침입을 받았으나, 전쟁피해는 비교적 적었다.
한편, 본래 노르웨이령이었다가 덴마크에 속하게 된 아이슬란드는
전쟁 중인 1944년 6월 동군연합을 해소하고 독립하였다. 전후에는
중립정책의 전통을 깨고 1949년 NATO에 참가하는 한편 미국에 그
린란드의 기지를 제공하고 있다.
                   
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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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 거주한 인종은 북부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었으나, 대부
분은 유동적이었다. 그 후 500년경에 그 일파인 고트인이 남부의
쇼넨 지방에 정착하고, 600년경 같은 스비아인이 중부의 웁살라
부근에 정착하였는데, 이 두 민족이 후일 융합함으로써 스웨덴인
이 형성되었다. 정착 당시의 그들은 소규모의 부족국가를 형성하
였으며, 조선과 항해에 뛰어나 발트해상에서 활약하였다. 그들의
해상활동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9∼11세기, 소위 바이킹(또는 노
르만)의 시대였다.
           
10세기경부터 부족국가 대립이 부족연합으로 바뀌고 통일국왕이
출현하였으며, 1060년에는 스탠킬 왕가가 일어났다. 그러나 왕위
는 선거제로 약체(弱體)였으며 부족대립이 뿌리깊게 남아 이름만
통일국가이고 실질적으로는 부족의 자립성이 강한 연방국가였다.
부족연합시대, 즉 11∼12세기에는 그리스도교의 교화가 많이 진
행되었다.
                    
바이킹의 활동 완료와 때를 전후하여 발트해 연안에 독일 도시가
생겨났으며, 독일 상인들이 활발한 상업활동을 벌이고 스웨덴까지
진출하였다. 스웨덴에도 도시가 생겼으나 독일 상인의 활동에 압
도되어 그들에게 상업특권이 쥐어지고 스웨덴 도시는 독일 상인의
거류지역, 물자집산지에 지나지 않았다. 발트해상의 활동에서 선
구자인 스웨덴인은 독일인에게 그 지위를 넘겨주었으며, 그 경향
은 한자동맹의 성립 후에 더욱 현저해졌다. 
            
12, 13세기경 유럽에는 한자(Hansa)라고 불리는 편력상인(遍歷商
人)들의 단체가 많이 있었는데, 14세기 중반에 이르자 그들 사이
에서 ‘독일한자’ 또는 ‘한자동맹’이라는 도시동맹(都市同盟)
이 성장하였다.
           
스웨덴에서는 스탠킬 왕가 후에 스베르케르 왕가를 거쳐 13세기
중엽에는 폴쿵 왕가가 일어났으며, 이 왕가 시대에 왕권 중심의
국가통일이 크게 진행되었다. 스웨덴을 한 국가로 볼 수 있는 것
은 이 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동시에 덴마크, 노
르웨이 국가통일의 시대이기도 했으며, 북유럽 3국은 왕가 사이의
통혼으로 관계가 복잡해지고 마침내 통합국가를 형성하였다. 즉,
덴마크 겸 노르웨이 여왕인 마르그레테는 1397년에 스웨덴왕을 폐
하여 3국을 통합하였으며, 스웨덴은 덴마크왕에게 복종하였다.
          
이 통합은 3개국이 한 군주의 지배에 복종하는 동군연합(同君聯合)
으로 칼마르 동맹(同盟)이라 부르며, 1523년까지 126년간 계속되었
다. 그러나 이 통합왕권에 대한 스웨덴의 반항은 계속되었다.
             
16세기 초 스웨덴의 귀족인 구스타브 바사(바사는 영지의 이름)가
일어나 농민군을 거느렸으며, 한자동맹의 원조를 얻어 덴마크 왕
권을 추방하였다. 그는 1523년에 의회의 추대를  받아 국왕 구스
타브 1세가 되고 바사 왕가를 세웠으며, 칼마르 동맹은 무너져 스
웨덴은 독립하였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구스타브 1세는 이를 스웨덴에 도입하고 교회개혁을 촉진하였으며,
1529년에 의회는 루터파(派) 신교를 채택하였다.
             
바사 왕가시대는 스웨덴의 발전기였으며, 17세기에 들어와서 '북
방의 사자' 구스타브 아돌프(구스타브 2세)의 등장으로 스웨덴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의 목표는 발트해를 바이킹 시대처럼 스웨
덴의 호수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그는 러시아와 싸워
이기고, 1621년 폴란드를 격파하였고, 이어 독일 30년전쟁에는 신
교도의 챔피언으로서 독일 신교도의 요청에 따라 출전하였는데,
각지에서 구교군과 싸워 승리하였으며, 1632년 뤼첸에서 발렌슈타
인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나 승전하였다. 이리하여 스웨덴은 많은
땅을 얻었다.
            
구스타브 아돌프는 내정면에서도 서유럽 국가를 본떠 국정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내각제도의 정비와 교육제도의 쇄신, 산업장려 등
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스웨덴은 근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
으며, 국제적으로도 북유럽의 소국에서 일류국가로 약진하였다.
구스타브 아돌프를 이은 여왕 크리스티나는 이색적인 군주로 학문
과 예술을 좋아하고 학자 그로티우스, 데카르트 등과 교유하였다.
또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고 남장(男裝)을 즐겼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퇴위한 후에는 로마에 살면서 자유분망한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이 여왕의 퇴위로 바사 왕국은 단절되었다. 바사 왕가 시
대는 승전에 빛나는 영광의 시대였으나, 반면 오랜 대외전쟁으로
재정이 악화되고 백성이 지친 것도 사실이다.
                      
크리스티나 여왕이 퇴위한 후 40년간은 스웨덴으로서는 휴양기에
해당하는데, 1697년에 군사의 재능을 타고난 칼 12세가 출현하자
스웨덴은 다시 국제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칼 12세는 20년
치세 중 대부분을 싸움터에서 보낸 군인왕으로 러시아·폴란드
연합군과 싸워(북방전쟁) 러시아에 진격해 들어갔으나 1709년 폴
타바에서 러시아의 표트르 1세와 싸워 패배하고, 그 후 덴마크·
프로이센과도 싸워 패퇴하였으며, 발트해변의 해외영토를 대부분
상실하였다. 칼 12세의 군사적 천재를 가지고도 발흥하는 러시아·
프로이센의 힘 앞에는 어쩔 수 없었으며, 북유럽의 강국은 또 다
시 옛날의 소국이 되었다.
                
스웨덴의 국민은 칼 12세의 전제정치에 대한 불만이 그의 죽음과
함께 고조되어 국왕 프레데리크 1세는 즉위 조건으로 국민이 요구
한 새 헌법을 1723년에 발포하였다. 이에 따라 왕권은 제한되고
의회는 강력한 존재가 되었으나, 입헌정치의 노선은 처음에 충분
한 안정을 얻지 못하였으며, 정당간의 다툼으로 정치가 종종 무질
서에 빠지고 외교정책은 혼란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스웨덴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과 7년전쟁에 무의미하게
참전하고, 그 결과 많은 영토를 잃었다. 또 나폴레옹 전쟁 때에도
처음의 반나폴레옹의 입장에서 전환하여 러시아와 싸워 핀란드를
잃었으며, 그 후에는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프랑스 장군
베르나도테를 황태자로 맞아들였다. 1809년 그는 칼 요한이라 칭
하여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반나폴레옹의 태도를 취해 활약하였
으며, 1814년에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얻어내고, 1818년 왕위
에 올라 칼 14세라 칭하였다. 그가 현 스웨덴 왕조의 시조이다.
           
20세기 초 스웨덴의 최대 과제는 노르웨이의 분리문제였다. 노르
웨이는 국민감정이 덴마크에 가까워 스웨덴과 완전 분리하기를 강
력히 요구하였으며, 1905년에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스웨덴 국내에서는 무력저지론도 있었으나 결국은 분리를 승인하
였으며, 이 무렵부터 스웨덴의 민주정치는 안정되어 책임내각제가
확립되고 보통선거와 비례대표제도 채택되었다.  
              
또 사회주의운동도 일어났으나 이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은 사회의
근본적 변혁보다 사회보장, 농업공동화 등을 목표로 내거는 온건
한 것이었으며, 이윽고 최대정당으로 성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에서 스웨덴은 중립을 지켰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이웃 국
가들이 모두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은 속에서도 엄정중립을 관
철하였다. 1980년대 들어 복지냐 재정재건이냐의 논쟁이 치열해졌
고, 1982년 양자택일을 내건 총선에서 복지국가유지(노동기금정책)
를 주장한 사회민주노동당이 승리하였다.
        
사회민주노동당은 공산당의 협력을 얻어 사회당을 결성하고 팔메
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1986년 2월 팔메 총리가 피살됨에 따
라 칼손 부총리가 총리직을 승계하였다. 1988년 9월 총선에서도
사회민주노동당-공산당 연합이 재집권하였으나 1991년 10월 총선
에서는 사회복지 예산의 감축과 경제활성화를 주장하는 보수당의
승리로 칼 빌트가 총리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비사회주의 연정
(聯政)이 출범하였으며, 사회복지예산의 대폭 삭감 및 증세(增稅)
를 주내용으로 하는 5년간의 재정계획이 새롭게 시도되었다. 이를
두고 스웨덴식 복지모델의 포기라는 논란이 일었다.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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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는 북방문화권 중에서도 국가통일이 가장 뒤진 나라로서,
노르웨이인(人)의 조상인 노르드인은 8세기 말까지 남부에서 소국
분열(小國分裂)의 상태에 있었다.
               
9세기에 들어서자 노르드인에 의한 해외진출이 급격히 활발해져서,
아일랜드에서는 반세기에 걸친 노르드인의 지배가 이루어졌다. 그
무렵 노르웨이 본토에서도 뒤늦게 통일국가 형성이 진척되어, 860
년에 즉위한 하랄 미발왕(美髮王:harald Fairhair)이 노르웨이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고 872년에 통일 왕국을 세웠는데, 그것이 노
르게 왕국, 즉 노르웨이 왕국의 기원이다.
            
하랄왕에 패한 왕족·귀족들은 부하를 이끌고 아이슬란드를 비롯
하여 셰틀랜드·오크니·헤브리디스 제도 등지에 정착지를 구하고,
그린란드·북아메리카 등지로 이주한 자도 있었다. 9세기 이래 노
르드인은 바이킹으로서 에스파냐 남부로 진출하고, 다시 11세기
초에는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섬에 노르만국(國)을 건설하여
자주 비잔틴을 습격하였다.
         
10세기 이후 노르웨이왕국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지속되어
다시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으나, 마그누스 1세(재위 1035∼1047)
때는 한때 덴마크왕을 겸하는 세력을 가졌다. 노르웨이가 그리스
도교화(化)한 것도 그 무렵이다.
            
12-13세기의 60년에 걸쳐 노르웨이는 헤브리디스제도 ·오크니제
도 ·셰틀랜드제도 ·아이슬란드 등을 영토로 하여 종주권(宗主
權)을 확립하였으나 국내에서는 대립항쟁이 그치지 않았고, 왕권
(王權)이 쇠퇴하여, 1282∼1285년의 한자동맹의 경제봉쇄로 인해
경제적으로는 한자동맹에 굴복하였다.
       
14세기 후반, 노르웨이왕 호콘 6세가 덴마크 왕녀와 결혼한 뒤
덴마크의 세력이 노르웨이에 미쳐, 1397년 스웨덴을 포함한 3국에
의해 칼마르동맹(Union of Kalmar)이 성립되었다. 덴마크왕이 다
른 두 나라 왕을 겸하는 국가연합인 칼마르 동맹은 그후 120여 년
간 지속되다가 1523년에 스웨덴이 독립함으로써 와해되었으나, 덴
마크 왕에 의한 노르웨이의 지배는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나폴레옹전쟁 때 덴마크가 나폴레옹 편에 가담했기 때문에 나폴레
옹 몰락 후 1814년의 킬조약에 의해 노르웨이는 다시 동군 연맹
(同君聯盟)이라는 형태로 스웨덴의 지배에 들게 되어, 스웨덴 왕
카를 14세(재위 1818∼1844:본래 프랑스 군인인 베르나도트)가
노르웨이 왕이 되었다. 카를 14세가 통치하였으나, 노르웨이는 노
르웨이인이 제정한 헌법 밑에서 19세기를 통해 급속한 민주화의
진척을 보였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이에 따른 민족주의의 앙양으로, 노르웨이에서
의 스웨덴왕 군주권(君主權)은 명목화되어 갔으며, 1905년에 노르
웨이는 국민투표에 의해 일방적으로 동군연맹을 해체하고 완전 독
립하여 덴마크 왕통(王統)의 호콘 7세를 국왕으로 받아들였다. 노
르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중립유지에 성공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스 독일군의 침략을 받았다.
             
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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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랜드는 스칸디나반도에 속해 있으나 민족적으로는 아시아 훈족
의 후예인 핀족으로 구성되어 덴마크, 스웨덴, 놀웨이의 스칸디나
비아인과는 민족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그러나 핀랜드의 국기
(國旗)에는 스칸디나비아제국의 국기와 유사하게 흰색 바탕에 청
십자(靑十字)가 그려져 있으며,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강한 유대
를 가지고 있다. 스웨덴과 옛소련이라는 2대 강국에 끼여 있어 역
사적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왔으며, 종교적으로도 국민의 대다수는
프로테스탄트로 친서구적(親西歐的) 국민감정이 강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러시아의 막강한 압력으로 부득이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
고 있다.
        
볼가강(江) 유역의 원주지를 떠나 차차 서쪽으로 진출하여 핀란드
에 정착한 핀인들에게 로마 가톨릭교가 전파된 것은 12세기였다.
핀란드는 가톨릭 교세의 확장과 동시에 스웨덴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하여 13세기에는 스웨덴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스웨
덴은 관대한 지배체제를 유지하여 핀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하였다.
따라서 지주귀족을 중심으로 민족문화가 형성되었으며, 또 종교개
혁시대에는 루터파의 프로테스탄트가 전국에 고루 보급되었다. 그
후 17세기 스웨덴의 전성기에는 핀란드 자치의회가 설치된 데 이
어 오보(현재의 투르쿠)에 핀란드대학(헬싱키대학교)이 설립되었
다.
        
이와 같이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핀란드에 침략
의 눈길을 돌린 것은 러시아였다. 여러 차례 병합을 기도하다가
북방 전쟁의 결과 체결된 1721년에 뉘스타트 조약에 따라 러시아
는 핀란드 남부의 영토였던 카렐리야 지협(地峽)을 탈취하고 나폴
레옹전쟁이 한창이던 1809년에 전국토를 병합하였다. 이에 민족주
의 정신이 발현되기 시작하여 1935년에는 민족주의 정신의 구심
(求心)으로서 50편의 시가(詩歌), 22,795행으로 이루어진 민족서
사시 《칼레발라》가 뢴로트에 의해 복원 편집되기도 하였다. 이
는 예로부터 칼레바의 나라(영웅의 나라라는 뜻), 즉 핀란드에 전
승되어온 장대한 민족서사시로 핀인(人)과 랩인의 싸움이 그 중심
을 이루며 신화적 요소와 영웅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러시아는 엄격한 지배정책을 실행, 1835년에 핀란드 의회의 입법
권을 정지시키고, 1902년에는 핀란드군(軍)을 러시아군에 편입시
키는 한편 러시아어(語)를 공용어로 정하는 등 러시아화(化) 정책
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대해 핀인(人)의 민족주의 열기가 끓어오
르기 시작했으며, 시벨리우스의 애국교향시 《핀란디아》가 만들
어진 것은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핀란디아》는 조국 핀란드의
신비스러운 자연과 가혹한 운명을 깊이 공감하는 민족의 소리로서,
민중으로 하여금 강렬한 조국애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되기까지 하였다. 1904년에는 러시아 총독 보브리코프가 암살
되고,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자 독립을 선언, 1918년에는 공
화제를 실시하여 처음으로 독립된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1920년
에는 러시아도 이를 승인하여 핀란드 공화국이 성립하였다.
          
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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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제국은 북유럽이라는 기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열악
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오늘날 인류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복지국가를 이룩하여 모든 국민이 골고루 잘사는 나라를
이루었다.
            
그들이 어려운 환경과 시기를 극복하고 이처럼 성공을 이룰 수 있
었던 것은 그들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부터 비롯되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선조의 일부는 게르만민족대이동 시기에 현재
의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등 서구 열강을 탄생시켰으며 제 2
차 민족대이동이라 불리우는 바이킹 시대에도 전유럽에 막강한 영
향력을 행사했다. 바이킹으로 기록되는 그들의 선조들은 무자비한
야만인 침략자들로 서구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룬트
비는 그들의 선조들이 용감하고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도
전자이며 개척자라는 역사관을 정립하여 스스로의 역사에 대한 자
부심을 심어주었다. 그러한 인식하에서 종교적으로나, 사상, 철학,
문학적인 면에서도 참다운 실존적 지도자들이 배양되었다. 그들과
자유스러운 논쟁과 토론을 통하여 민주주의적 접근 방법으로 인성
에 기초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함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성공을 이
루었다. 그들의 역사 인식은 여기에 끝히지 않고 콜럼버스가 미대
륙을 발견하기 이전에 바이킹들이 미대륙을 여행하였을 뿐만 아니
라 일부는 그곳에 정착하였다는 역사적 증거를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러한 역사적, 철학적,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들은 오늘날
가장 환경친화적인 기술로서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을 그대로 보전
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었다. 놀웨이의 發電
은 99% 이상이 수력이며 덴마크의 수출은 주로 기술, 실업디자인
등이다. 세계에서 최초로 풍력발전기술을 개발한 것도 덴마크이며
우리의 서해대교도 그들의 설계시술이다.
       
이제 잠시 우리도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보자. 우리는 우리 선조
들은 역사상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본 적이 없는 평화민족
으로 배워왔다. 그것이 진실로 올바른 역사 교육이었는가? 과연
우리 선조는 단지 외부로부터의 침략자들과 대항하여서만 전쟁을
하였던가? 그것은 사대사관, 식민사관의 결과가 아닌가? 우리 선
조들의 중국대륙과 일본으로의 진출의 역사적 진실을 밝혀야하는
사유를 나는 스칸디나비아제국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서 다시 한번
더 실감한다.
       
또한 나는 오늘날 우리가 총체적인 난국에 봉착하였음을 많은 사
람들이 한탄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우리도 희망적임을 말고 싶
다. 진실된 개혁을 정치가로 부터 기대할 수 없다면 우리들 스스
로 올바른 지도자들을 선택하여 따라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
역사상 많은 지도자들이 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올바른 판단
과 선택에 달려있다.
       
- 끝 -
        

 

                                                   다음 카페 <주광수의 우리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