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위엄 백자 쌍용준 1 - 들어가며

2015. 12. 19. 00:43도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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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왕의 위엄 백자 쌍용준 1 - 들어가며

 

 

   경기도자박물관장, 문화재위원 역임하셨던 필자 최건 선생님 새로운 칼럼을 시작합니다. 조선백자 중 두 마리의 용이 그려진 항아리 쌍룡준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들어가며

 

  조선시대에 만든 백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두 마리의 푸른 색 용 그림을 그려 넣은 용준1)이다. 쌍용준(雙龍樽) 또는 화룡준(畵龍樽)이라고도 부르는 이 항아리는 백자 규모의 최대 한계인 높이 60㎝를 육박한 크기로서 절도 있게 깎은 입과 탄력 있는 둥근 몸통과 아래로 조금씩 좁아지며 당당하게 우뚝 선 자세를 하고 있어서 말 그대로 모든 백자 그릇 가운데 으뜸이라는데 이의가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도1)

 

 



도1 <백자청화운룡문준>

조선시대 17세기 높이 60.5㎝  크리스티(2012) 옥션 


 


   용준은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통하여 버금갈만한 규모와 양감을 갖는 형태가 지속적으로 제작된 바 없다는 점에서 의미는 대단히 크다.2) 더구나 그 용준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실의 위엄과 절대성의 계승 정신 아래 일정한 방향으로 제작 되었다는 사실도 특기할만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용준 가운데 높이 60㎝ 가까운 용준은 불과 십 수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우 몸통 전면에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커다란 오조(五爪)의 용 두 마리를 회청으로 그려 넣으며, 이보다 작은 높이 40㎝ 내외의 중형 용준의 경우는 한 마리만 그려 넣는 경우가 더 많으며 석간주(石間硃)로 그린 철화(鐵畵)용준(도2)의 경우에도 높이 40㎝ 내외의 규모로 대부분 용 한 마리를 그려 넣는데, 이러한 한 마리 용을 그린 중형의 용준들은 두 마리 용을 그려 넣은 대형용준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규모도 작고 제작 전반에서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점에서 사용 주체와 용도에 따른 엄격한 위계질서가 제작 전반에 걸쳐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2 <백자철화운룡문준>

조선시대 17세기전기  높이 42.0㎝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따라서 대형 용준을 만들고 쓰는 과정은 왕실과 중앙관청은 물론 백자 제작을 전담했던 사옹원분원(司饔院分院) 백자번조소(白磁燔造所)에서도 가장 중요하며 신중하게 처리해야할 임무였다.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기록물에 등장하는 백자와 관련된 기록에서 용준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는 사실도 그러한 중요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글은 두 마리 용을 푸른색 청화 안료로 그려 넣은 쌍용준과 관련하여 기왕에 알려져 있는 기록물을 검토하고 유물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대형의 용준, 즉 쌍용준의 실체에 접근해보려는 시도로 마련하였다.3) 물론 광해군10년(1618) 사옹원 보고 내용과 같이, “난리를 통해 모두 없어졌다.”조선전기 용준실체는 짐작하기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후기로 알려진 십 수 점의 대형 쌍용준에 대해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과정도 그리 순조롭지는 않다. 오히려 조선후기에는 석간주로 그린 철화용준이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푸른색 청화용준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게 보이고 있는데, 아마도 제작지와 편년이 가능한 철화백자와 관련하여 17세기를 철화용준의 시대’ 라는 인식 아래 청화백자가 주류로 등장하는 시기를 18세기로 예단한 성급한 판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철화용준 제작이 왕실의 대의명분보다 국가행사의 편리성과 실용적 가치에 둔 임기응변적이며 예외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소위 철화용준의 17세기에도 제왕을 상징하는 청화 쌍용준 최상의 위치에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기존에 쌍룡준을 철화용준 이후 18세기로 설정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요인들에 대한 검토가 따라야 하며 새로운 관점에서 본 용준에 대한 해석이 필요할 것 같다. 물론 대형 쌍용준의 전개과정에서 기준으로 삼을만한 자료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실정에서 이 문제를 구태여 다루려 함은 조선시대 백자의 중심축으로서 雙龍樽의 의미를 재조명함으로써 백자 전반에 대한 전개과정을 긍정적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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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준’은 ‘용항아리’라고 하며 일반에서 ‘용충’이라 부른다. 용의 지위를 상징하는 발가락의 숫자에 따라 ‘오조(五爪), 사조(四爪) 용준’으로 구분되며 ‘오족용충, 삼족용충’으로 부른다. 


2) 키가 가장 큰 元代 청화백자 가운데 龍을 그린 그릇은 영국 Percival David Foundation of Chiness Art 소장의 <靑畵雲龍文‘至正11年(1351)’銘雙耳甁>(景德鎭窯)으로 높이 63.3-6㎝이다. 이 경우 키는 크지만 양감이 적고 細長한 병으로 전체적 규모까지 크다고 할 수 없다. 明代에는 官窯인 景德鎭御器廠에서 正統6年(1441)에 특별 제작한 <靑畵雲龍文壺>가 높이 75.5㎝로 가장 크다.『皇帝の磁器-新發見の景德鎭官窯-』(大阪: 東洋陶磁美術館, 1995), p.59의 사진과 해설 참조.    


3) 조선백자 용준에 관한 연구는, 정양모, 「朝鮮磁器의 龍文樣」,『韓國의 陶磁器』(문예출판사, 1990), pp. 472-478, 장기훈, 「朝鮮時代 白磁龍樽의 樣式變遷考」『미술사연구』12(미술사연구회, 1998), pp.85-122 참조. 

 

 

 

 

글 최건(전 문화재위원) 관리자
업데이트 2015.12.18 1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