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五代). 고굉중(顧闳中)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

2016. 1. 4. 02:37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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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五代)  고굉중(顧闳中)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

 

10:34, July 17, 2014

 

 

 

오대(五代). 고굉중(顧闳中)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

 

 

 

 

오대(五代) 고굉중(顧闳中)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

견본(绢本), 세로 28.7cm, 가로 335cm , 베이징 고궁박물관

 

 

 

 

 

    [인민망 한국어판 7월 17일]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 베이징 고궁박물관원에 소장되어 있다. 견본(绢本), 세로 28.7cm, 가로 335cm이다. 오대((五代)) 대화가 고굉중(顧闳中)의 작품으로 긴 두루마리를 연결한 방식으로 남당(南唐) 대신 한희재(韓熙載)집의 연회 장면을 묘사해 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곡선, 화려한 색감, 인물들을 살아있는 듯 생동감 있게 그려내 널리 해외까지 유명하다. 오늘날 현존하는 오대(五代)시기 인물화 중 가장 걸출한 대표작이다.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는 전체 길이가 3m로 총 5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화면은 병풍으로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첫 번째 부분은 한희재(韓熙載)가 연회에서 손님들과 비파를 뜯으며 노래하는 여인의 모습을 감상하는 장면인데 한희재(韓熙載)와 손님들이 정신을 집중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두 번째 부분은 한희재(韓熙載)가 춤추는 기녀를 위해 직접 북을 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모든 손님들이 마치 아름다운 북 소리에 도취된 듯 감탄하는 눈빛으로 한희재(韓熙載)가 북 치는 동작을 주시하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연회 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면으로 한희재(韓熙載)가 침상에 앉아서 손을 씻으면서 시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네 번째 부분은 한희재(韓熙載)가 음악을 즐기는 장면이다. 한희재(韓熙載)가 책상다리를 하고 의자에 앉아 한 시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 하다. 악기를 연주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나머지 시녀 5명은 한 줄로 앉아 있지만 각자가 다른 동작을 하고 취하고 있는데 활기가 전혀 없다. 다섯 번째 부분은 한희재 책상다리의 손님들과 무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 작품은 개인의 사생활을 묘사한 데 그치지 않고 그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 거작엔 40여 명의 각기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몽타주처럼 중복되어 개개인의 다양한 표정과 성격들을 자연스럽게 묘사해주고 있다.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는 생활적인 측면에서 당시 통치계급의 생활상을 생동감 있게 반영하고 있다. (번역: 김명희)

 

 

 

 

 

 

오대(五代) 고굉중(顧闳中)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 , 부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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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굉중

다른 표기 언어 Ku Hungchung , 顧中


    요약 중국 오대(五代) 남당(南唐:937~975)의 화가.

       (병). Gu Hongzhong. (웨). Ku Hungchung.


       강남 사람으로 중주·후주 때 화원대조를 지냈고,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명작 〈한희재야연도 韓熙載夜宴圖〉는 남당의 중서시랑이었던 한희재가 벌인 야간 연회의 환락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한희재는 정치에 대한 포부와 수완이 있었고 문학과 서예에 재주가 있어 이름을 날렸던 사람으로 석진 때 화를 피해 북방에서 남방으로 옮겨왔다.


       그림은 음악을 듣고, 춤을 감상하고, 쉬고, 다시 연주하고, 남녀가 희롱하는 5단계로 연결되어 있다. 묘사가 매우 정교하고 세밀하며 필법은 완벽하고 힘이 있다. 중간 중간에 붓의 방향이 바뀌며, 채색이 아름답고 다양하다. 특히 여러 번 반복되어 그려진 주인의 표정과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오대 송초의 인물초상화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그림에 나타난 옷차림·그릇·등불·병풍 및 음악연주와 무용의 자태도 역시 역사적으로 큰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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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세기 파파라치 : 고굉중(顧閎中)의 <한희재 야연도>

                                                                           15.02.24 0 0


     

       어느 늦은 밤, 정치거물의 대저택에서는 연회가 한창이다. 군주의 밀명을 받고 연회에 참석한 젊은 두 화원은 비지땀을 흘린다. 얌전히 궁정에서 그림만 그리던 젊은이들은 연회의 분위기를 북돋우는 아가씨들의 차림새만큼이나 화려하고 문란한 밤에 정신이 팔릴게 뻔하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연회장의 구석구석을 머릿속에 담는다. 풀어헤친 앞섶들, 맨다리에 휘감겨있는 한희재와 무리들, 어지럽혀진 침상, 거나하게 차려진 술상, 간드러진 음악소리, 비싼 가구들, 아련히 맡아지는 묘한 향내까지.

     

       왜 우리의 군주는 방탕한 밤의 주인을 곁에 두려고 하는가? 젊은 화가는 곳곳을 살피던 중 붉게 취해 어린 아가씨들의 시중을 받던 거물과 눈이 마주친다. 화가는 연회장을 뛰쳐나가고, 거물은 껄껄껄 웃다가 시종에게 손짓한다. 연회를 가장한 길고 길었던 연극은 그렇게 끝났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냐고? 단 하나의 그림으로 중국미술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고굉중(顧閎中)<한희재 야연도> 속 숨겨진 이야기다. 이 그림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마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상황묘사와 세밀한 표현, 그리고 화려한 색채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단순히 ‘잘’ 그렸기 때문이 아니다. <한희재 야연도>는 그저 그런 중국회화가 아니다. 현대로 치자면, 대통령의 밀명을 받은 젊은 공무원의 파파라치 컷이다.

     

    - <한희재 야연도 (韓熙載 夜宴圖)>고굉중, 오대 남당, 10세기 후반, 북경 고궁박물관, 출처 : http://gchfg.com/index.php?c=product&id=356

     

     

       긴 두루마리 표현과 실내 기물로 묘사한 ‘귀족의 생활풍속화’는 중국 전통의 회화법칙을 따른다. 인물은 하늘하늘한 실선으로 가냘프고 여리여리한 당대의 미인상을 나타낸다. 여기까지는 전의 회화와 같은 노선을 걷고 있으나 고굉중(顧閎中)은 혁신을 꾀했다. 바로 '사실성'이다. 사진으로 찍은 듯한 세밀한 표현은 당대 삶의 리얼리티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림의 제작의도가 '기록' 이었기에 묘사는 더 강조됐다. 주인공인 한희재(韩熙载)는 그림의 가장 중심에 놓여 5개의 장면에서 등장한다.


     

    - <한희재 야연도> 부분, 침상 장면. 맨 좌측에 근엄하게 앉아있는 인물이 바로 한희재다.출처 : http://www.nlc.gov.cn 

     

    - 높은 모자를 쓰고 앉은 한희재의 뒤쪽에 보이는 침상에는 분명 누군가가 있다! 출처 :http://tweets.seraph.me

     

      <한희재 야연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암시' 다. 언뜻 보기에 그림은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방탕함과 문란함이 존재한다. 풀어헤친 한희재의 옷이나 흐트러진 침상, 벽 뒤에서 반쯤 몸을 내밀고 비밀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기녀의 모습은 충분히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작품이 명작으로 여태까지 남은 것 역시 사람들의 비밀스런 내면을 자극한 ‘암시’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스캔들은 항상 화젯거리 아니던가.


     

    - 연회에 초대된 손님들 역시 고굉중의 파파라치 샷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출처 :  http://www.daoon.com

     

     

        그렇다면 <한희재 야연도>는 어떤 속사정을 가졌을까? 한희재는 본래 북쪽의 산동성 출신으로 강남으로 내려와 남당 조정의 신임을 받으며 관료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남당(南唐, 937~975)의 새로운 군주 이욱(李煜)은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한번 사는 인생 화려하게 살아보자!!'는 아티스트적인 성정을 맘껏 발휘했다. 흥청망청의 끝은 결국 나라에 위기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욱은 북쪽 사정에 밝은 한희재를 재상으로 등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저물어가는 남당의 정세를 간파한 한희재는 그동안 남당의 조정에서 받은 신임과 애정을 모두 내려놓고 대저택 안으로 숨어버린다. 굳이 나서서 패색이 짙은 체스 판의 킹이 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한희재가 정말로 방탕한 인물인지, 아니면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욱은 두 명의 젊은 궁정화원을 스파이로 보낸다. 주문구와 고굉중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다른 손님의 초대장을 들고 손님으로 가장해 화려한 연회장으로 숨어든다.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기로 유명했던 고굉중은 젊은이 (고굉중과 한희재의 나이차가 대략 30살이니 한희재에게는 고굉중이 치기어린 애송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라면 누구나 가졌을(그것도 공무원!)투철한 애국심으로 한희재의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향락을 목격한다. 그리고 돌아와 <한희재 야연도>를 그려낸다.

     

       그 당시 고굉중의 기분은 서태지-이지아 스캔들을 터뜨린 스포츠신문 기자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자신이 한희재 연출-한희재 각본 연극의 가장 훌륭한 관객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연출자가 원하는 대로 관람해주고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리뷰까지 남겨줬으니 반평생이 넘도록 정치판에 몸담았던 늙은 여우 한희재는 고굉중에게 꽤나 고마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곧 송나라가 등장해 이욱도, 한희재도 모두 잊혀졌지만 고굉중의 파파라치 샷 <한희재 야연도>만이 중국 미술사에 길이 남았다.

     

    - <라오 리의 야연도 Night Revels of Lao Li> 왕칭송 (王庆松), 120x960cm, 2000, 출처 : http://www.wangqingsong.com

     

     

       2000년,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작가 왕칭송(王庆松, 1966~)이 다시 한 번 <한희재 야연도>를 재창조했다. 왕칭송은 무정부주의자로 끊임없이 중국 역사에서 지식인의 사회적인 위치와 운명을 돌이켜보는 작업을 진행했다. 왕칭송은 과거와 현재의 지식인의 심정을 대조시키기 위해 <한희재 야연도>를 패러디한 <라오 리의 야연도>를 만들었다. 작가는 아름답고 화려한 남당의 지식인이었던 한희재가 현실에 맞서 싸우지 않고 조용히 대저택에 숨어 부패한 사회를 바라만 보며 방임의 자세를 보였다고 평가한다. ‘현실을 마주하는 자세’에서 인간의 변하지 않는 모습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은 결국 평행선상에 존재한다.

     

       이 그림이 그려진 의도는 어찌 보면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굉중의 탁월한 표현력으로 <한희재야연도>는 이야기 자체가 전설이 되고 보는 이들에게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하는 명작이 됐다. 또한 작품 내의 디테일한 가구, 식기도구, 악기 표현은 중국회화사뿐 아니라 공예사 및 음악, 무용을 연구하는 데 당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다. 또한, 인간내면의 가장 솔직한 모습을 직시하고 그것을 스스럼없이 표현했다는 점에서 진화하는 인류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기에 <한희재 야연도>는 명작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리라.

     


    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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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29> 고굉중 '한희재야연도': 탐미적 향락 속에 뜻을 숨기다

    향락에 젖은 연회, 그 뒤에 숨은 관음증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10-27 19:01:10
    •  |  본지 20면

       

    중국 5대10국시대 남당의 화가 고굉중이 그린 '한희재야연도' 중

    첫째 장면과 둘째 장면(오른쪽부터).



    - 中 5대10국시대 남당의 왕 이욱
    - 재상 지낸 한희재 은둔생활 염탐
    - 화가인 고굉중에게 그려오게 해

    - 다섯 장면으로 구성된 병풍그림
    - 밤잔치 모습 사실적으로 묘사
    - 흥겨움 속 텅빈 시선의 한희재 등
    - 인물들 미묘한 심리까지 담아내

       그는 왕조와 자신의 시대가 몰락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군주의 요구를 어길 수도 없지만, 하늘의 명운은 더욱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망명하기로 작정한다,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저 내면 속으로. 그것은 기이한 은둔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타락한다. 밤마다 향락의 밤잔치를 열었다. 남당시대 기인 한희재의 이야기다.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하염없는 나그네로다.

    부평초 같은 인생 꿈과 같으니

    기쁨이야 그 얼마나 되리.

    옛사람이 촛불을 잡고 밤에 놀았다 하니

    진실로 까닭이 있음이라.



       "춘야연도리원서'에서 이백의 탐미적 탄식과는 달리 촛불을 잡는 한희재의 밤잔치에는 좀 다른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당 제국이 망하고 천하에는 수많은 소국이 도처에서 아침에 섰다가 저녁에 사라지곤 하는 5대10국의 혼란이 전개된다. 남당은 남쪽에 세워진 혼란기의 마지막 소국이었다. 이미 북쪽에서는 송나라가 일어나 제국의 기틀을 닦고 있을 무렵이다. 예술 애호가로 유명한 남당의 마지막 왕 이욱은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선대의 중신을 지낸 한희재를 다시 재상으로 등용하여 국운을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다섯 장면으로 구성한 향연

       
    '한희재야연도' 가운데 넷째 장면에 나오는 한희재 초상.
       이 소식을 듣자 한희재는 방탕한 밤잔치를 열기 시작한다. 왕은 한희재의 행태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화원의 화가인 고굉중(顧閎中, 생몰연대 미상)을 시켜 한희재의 밤잔치를 몰래 염탐하고 그려오게 한다. 그리하여 그려진 희대의 명작이 긴 두루마리(335㎝)의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이다. 여기에는 이욱의 관음증도 유령처럼 서성이고 있다.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고굉중은 그 황음의 향연을 시간 흐름에 따라 다섯 장면으로 재구성하였다. 보고서(그림)는 매우 사실적이면서 고도로 암시적이다. 각 장면은 병풍에 의해 교묘하게 분절되면서 이어진다. 첫 장면에 들어가기 전, 제일 오른쪽에 살짝 드러난 침대의 어질러진 붉은 이불과 비파의 어수선함은 이 연희의 향락과 음란을 암시한다.

       첫 장면에서는 향연에 초대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실이 춤추는 듯한 유사묘(游絲描)와 강한 철선묘(鐵線描)의 생동하는 묘사로 정체를 드러낸다. 그들은 모두 왼쪽 병풍 앞에 앉아 비파를 연주하는 여인을 향해 있다. 그 여인은 교방부사 이가명의 여동생이며, 그 앞에 비스듬히 앉아 연주자를 보고 있는 사람은 이가명이다. 이가명의 바로 옆에 작은 체구의 하늘색 옷을 입은 여자는 둘째 장면에서 춤을 추게 될 무희 왕옥산이다. 그리고 오른쪽 평상에 앉아 높은 사모를 쓰고 흑포를 입은 자가 이 밤의 주인공 한희재이다. 그 뒤에 홍포를 입고 있는 자는 그의 친구 장원랑찬(수염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 환관인 듯하다)이다.

    ■한희재를 더 크게 묘사한 이유는
       등장인물의 표정과 시선, 미세한 움직임 속에 비파의 한 줄기 선율이 흘러다닌다. 그 선율은 홍포 사내의 상체를 급격히 앞으로 기울게 하고 사람들의 몸을 돌리게 하여 시선을 빨아들인다. 그런데 이가명 뒤 젊은 사내와 오른쪽 한 인물이 예외적으로 다른 방향을 본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오히려 선율에 가장 매혹된 자들이 아닐까. 그 둘만이 두 손은 가슴에 모으고 있다. 아마 그들의 가슴을 에는 애절한 선율인가 보다.

       예외적인 시선은 따로 있다. 병풍 뒤에서 고개를 내민 시녀의 시선이다. 그녀는 한 대상이 아니라 상황 전체를 측량하며 엿보고 있다. 그녀는 엿보는 시선의 은유이며, 화가 고굉중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이욱의 관음증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녀의 탐욕스런 시선도 이 방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공간을 넘어서는 시선이 이곳에 숨겨져 있다. 화가는 보고서 같은 사실적인 묘사 속에서도 이 숨겨진 시선의 암시를 미묘하게 포착한다. 그 시선은 한희재의 시선이다.

       한희재는 다른 사람보다 크고 더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늘어뜨린 손은 움켜쥘 어떤 집착에서도 벗어나 버렸으며, 시선은 대상을 스치며 지나 그 너머 허공 어딘가를, 병풍 속 아득한 산수 어디쯤을 떠돈다. 우울하고도 비밀스러운 시선이다. 그는 연회의 중심이면서 가장 텅 비어 있다. 그의 정신은 어디론가 은둔해 버렸다. 고굉중은 그 텅 빈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둘째 장면은 더욱 극적이면서 모호하다. 빈 공간 속에 무희 왕옥산이 무릎과 팔과 허리를 굽혀 탄력을 축적하면서 곧 이어질 뿌림, 혹은 도약을 예비하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짝 뒤돌아보고 있다. 이 순간, 한희재는 흑포를 벗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막 북채로 북을 두드리려 한다. 이 순간, 젊은 사내는 박(拍)을 막 치려 하고, 사람들은 손뼉을 치기 직전이다. 이 순간은 움직임과 멈춤이 하나로 응축되고, 소리와 침묵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화가는 시선을 분산시키는 가구, 장식 등을 생략함으로써 춤과 북이 만들어낼 순간의 긴장감에 서사를 집중시키고 있다.

    ■사실주의 그리고 그 너머

       그러나 이 응축의 순간에서 한 걸음 비껴나 공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인물들이 있다. 홍포의 사내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한 팔을 등받이에 걸쳤는데, 그 이완되고 거만한 모습이 매우 리얼하다. 그러나 향연을 탐닉하고 있는 홍포는 붉은 북과 겹치면서 강렬하고 자극적인 향략의 밀도를 만들어낸다.

       또 한명 사내는 수수께끼 같다. 박을 치려는 사내 뒤 늙은 중을 보라. 그는 이 향락의 장면을 외면하고 있다. 윤곽선이 다른 인물보다 선명하지 못해 마치 유령처럼 보인다. 정말 유령인지 모른다. 그는 그림 전체에서 단 한 번 이 장면에서 출현했다 사라진다. 한희재와 친분이 깊었던 덕명화상으로 추정되지만, 묘한 것은 여기서 유일하게 한희재와 거의 같은 크기로 그려진 점이다. 그 화상은 실체이기보다는 어쩌면 한희재의 숨은 마음의 투영이 아닐까? 그것은 그림 속에 한희재의 정체를 숨겨놓은 고굉중의 수수께끼일지 모른다. 그 수수께끼를 왕 이욱은 간파했을까?

       향락의 밤 한가운데서 한희재의 손은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우고자 북채를 들고 있지만, 그의 우울한 눈은 저 먼 곳을 향해 망명하고 있다. 백거이는 한 시에서 "대은(大隱; 고수의 은자)은 궁정에 숨고/ 소은(小隱; 하수의 은자)은 산야에 숨는다" 하였다. 한희재는 과연 대은이었을까?

    그림은 이어서 휴식의 장면, 여러 명의 기녀가 퉁소와 피리를 연주하는 장면, 마지막 송별의 장면으로 전개된다.

       
       고굉중은 귀족들의 은밀한 방 안을 폭로한다. 그 속의 향락적 삶과 문화를 유려한 선과 색채를 통해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고 있다. 그 사실주의는 이어지는 송 왕조에서 활짝 꽃필 것이다. 그러나 진정 고굉중의 탁월한 점은 사실의 형태 너머로 떠도는 인물의 미묘한 심리를 암시적으로 포착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510..   국제신문











































































































































     [스크랩]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 문인화, 고서화              

    이보 | 조회 79 |추천 0 | 2009.04.10. 21:42



    <<한희재야연도>>



     



     



     



     



     

     

       <<한희재야연도>>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물화 걸작중의 하나이다. 그림은 한희재의 집안에서 거행된 밤 연회때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은 병풍이나 벽등으로 칸을 나눈 다음에 음악듣는 장면, 춤을 구경하는 장면, 휴식하는 장면, 헤어지는 장면등 관련되면서도 서로 독립된 5개의 장면을 담고 있고, 모두 46명의 다른 인물의 형상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 한희재는 그림의 가장 중심에 놓여 있고, 5개의 장면마다 반복하여 출현한다. 그런데, 5개의 장면에서마다 표정이나 동작은 모두 다르다. 다른 인물의 묘사도 매우 세세하고 정교하며, 그들의 서로 다른 신분지위와 성격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인물 외에도 가구, 식기도구, 악기등의 사물도 잘 그려 중국회화사 및 공예미술사 및 음악, 무도등의 면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그림을 그린 배경에 대하여는 두가지 전설이 있다.

     

       하나의 전설은 5대10국 때 북방에 한희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학문이 뛰어나고 시서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한희재는 부친에 사건이 생겨, 연루될 것을 두려워하여 강남으로 도망쳤으며, 이후 강남에 거주하며 남당에서 관직을 받아서 살았다. 한희재는 생활이 호화방탕하였으며, 처첩을 40여명을 두었다. 그런데, 그의 녹봉으로는 40명의 처첩을 먹여살릴 수가 없어져서, 처첩들이 하나 둘 분가해나갔다. 나중에는 스스로도 매우 궁핍해져서, 거지복장을 하고, 분가하여 독립한 처첩들 집을 찾아가서 밥을 얻어먹곤 하였는데, 본인은 이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한희재가 중간에 관직에서 쫓겨났는데, 남당의 황제인 이후주(李後主)는 다시 등용할 생각을 가졌다. 한희재의 평판이 나빠 조정에서 논란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평소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궁중화가인 고굉중()을 시켜 그려오게 하였다. 이 때 고굉중이 밤에 연회를 베풀며 즐기고 있는 한희재의 모습을 그린 것이 <<한희재야연도>>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전설은 당시에 남북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북방의 후주는 시시때때로 남침을 하곤 하여, 남당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후주 이욱은 북쪽에 화해를 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부방어를 강화하였는데, 북방에서 남으로 내려온 관리들에 대하여 의심을 하고 경계를 하였다. 한희재는 북방에서 남방으로 건너와 관리로 지내고 있었는데, 본인은 정치적인 야심은 전혀 없었고, 그저 북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남쪽에 내려온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아무런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어, 스스로 취생몽사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이후주가 안심하도록 하였다. 고굉중이 그가 밤에 즐기는 모습을 담은 <<한희재야연도>>를 그려 이후주에게 보여주자, 이후주는 안심하였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이후 궁중에서 계속 전해지다가, 마지막 황제 부의가 이 그림을 장춘의 만주국 황궁에 걸어두었는데, 1945년이후에 그림이 민간으로 유출되었다. 오래지 않아, 그림은 다시 북경에 나타났다. 이 때 중국근대의 유명한 화가인 장대천(張大千)은 마침 청왕부집이 매물로 나와서 이를 사기 위해 계약금까지 지불한 상태였는데, 북경 옥지산방(玉池山房)에서 <<한희재야연도>>를 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 소윤중(蕭允中)을 데리고 바로 옥지산방으로 달려간다. 옥지산방의 주인인 마제천(馬霽天)은 장대천과 그 제자가 오는 것을 보고는 바로 맞이해서, 조심스럽게 <<한희재야연도>>를 보여준다. 장대천은 즉석에서 구매하기로 결정하고, 마제천은 가격으로 황금500냥을 불렀고, 장대천은 즉석에서 응락한다.

     

       마제천은 장대천을 믿고, 장대천에게 그림을 건네주었으며, 장대천은 그림을 갖고와서 오랫동안 살펴보고 이 그림을 절대 진품이라고 인정한다. 이 때 "집이야 나중에도 또 있지만, 이 그림은 한번 사라지면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날 바로 돈을 지급한다. 장대천은 이 그림을 손에 넣은 후 매우 아껴서 "일연루(昵宴樓)"라는 전각을 새기고, 나중에 다시 "東南西北, 只有相隨無別離(동남서북 어디를 가나, 같이 다니고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도장도 새긴다. 

     

      전재자 註    친할 닐,친할 일,아버지 사당 녜,아버지 사당 예,아교 직

       장대천은 일생동안 자신이 모은 서화는 보물로 여기고, 상대가 중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절대 팔지 않았다. 그런데 1951년 장대천이 홍콩에서 해외로 이주하기 전에 매우 놀라운 결정을 하게 된다. 즉, 자신의 수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 3가지 <<한희재야연도>>, 오대 남당 동원(董源)의 <<소상도(瀟湘圖)>>, 원나라 방종의(方從義)의 <<무이산방도도(武夷山方棹圖)>>를 아주 싼 가격으로 친구에게 팔아버린 것이다. 그가 판 가격은 시장가격에 훨씬 못미치는 싼 가격이었다. <<한희재야연도>>에 대하여 겨우 미화2만달러 만을 받는다. 일전에 북경의 왕부 한채 값이었던 황금 500냥을 주고 샀을 뿐아니라 평생 가장 아꼈던 수장품인데 이렇게 헐값에 넘긴 이유를 모두 궁금해 하였다.

     

       장대천이 이렇게 한 이유는 나중에 밝혀지게 되는데, 원래 장대천은 해외로 이주하면서 국보를 유실시켜 천고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홍콩에 있는 친구에게 헐 값에 넘기면서, 후에 그림을 중국정부에 넘기도록 요청하였던 것이었다. 이 친구는 후에 주은래의 지시를 받고 온 중국 사회문화사업관리국 국장인 정진탁(鄭振鐸)에게 장대천에게 구매했던 원가로 3개의 국보급 그림을 넘겨준다. 이로써 <<한희재야연도>>는 중국에 남아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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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희재 야연도| 한국미술사

    촌사람 | 조회 142 |추천 0 | 2009.06.04. 18:03


     



     



     



     

     





     

     





    2) 南唐人物畵

       남당의 인물화는 도석화는 거의 없고 귀족들의 유락생활을 주로 그렸다. 남당은 당이 망하자 그 유민 왕족이 남하하여 세운 나라이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탓에 귀족들은 염세적이고, 향락에 빠져서 퇴폐적인 생활에 젖어 있었다.

    남다의 인물화는 도석화 대신에 귀족의 인물화와 隱士, 高賢, 高士 등을 그렸다.

    남당 인물화의 대표적 작품은 고굉중의 ‘한희재 야연도’이다.


    一. 顧閎中

       남당의 후주 李煜(이욱) 시대의 화원화가이다. 고굉중의 일생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대표작인 ‘한희재 야연도’가 유명하다.

    남당의 왕 이욱이 정승인 한희재의 사생활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그의 사생활을 그려오라는 명령을 받고, 주문한 거와 같이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송대 초상화의 대표적인 그림이다. 두루마리 양식으로 다섯 장면이 그려져 있다. 매 장면마다 한희재가 등장함으로, 이 그림은 이야기 형식(서사구조)을 띄고 있다.

    세밀한 선과, 화려한 색채를 사용함으로, 당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송의 귀족 초상화로 연결이 되는 그림이다.


    二, 周文秬

       고굉중과 동시대 인이다. 궁락도가 있다. 사녀화에 능하다.

    주방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 五代, 宋의 人物畵

       중국 회화사에서 당 이전은 인물화가 최우선이었다. 五代 이래로 산수와 화조화가 유행하고, 인물화는 전문 장인들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한다. 이로서, 오대, 송의 인물화가 당에 미치치 못하였다고 하였다. (近不及古)

       송대의 사회상이 文治에 흐르고 庶族地主와 市井 平民的 審美 意識이 변화함으로 미술사에서도 양식적인 변화가 나타난다.(近異族古)

    당 이전의 인물화는 극단적으로 공리적이고, 이상적인 정신세계를 표현하였다. 즉 규범사회의 도덕적 행위를 위주로 그렸다. 오대와 송대에 이르면 각 계층의 실제 생활과 이상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왕실, 귀족, 문인사대부의 유락 생활과 평민들의 세속적인 생활 정경을 그렸다.


       오대 시대의 도석 벽화는 인물화의 유명한 제재 중의 하나이었다. 특히 서촉과 하서회랑 지역에는 사원의 벽화를 많이 그렸다. 일시적으로 불교의 탄압이 있었지만 송 왕실에 불교에 호의적이었으므로, 大相國寺를 지어서 화가들에게 대규모의 벽화를 그리게 함으로 도석 벽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도석화 양식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당의 전통을 따르고, 엄중격식화된 양식을 따랐다. 그러나 당대의 그림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종 불교가 발전함으로 자신의 정신적이고, 영감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기법에서 완전히 벗어 났다. 기괴하고, 간솔하고, 은일적인 풍모를 그렸다. 따라서 점차 세속 생활화과 가까워지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왕실인물, 귀족, 공신들의 활동을 그린 것은 대체로 당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近不及古’라는 평을 들었다. 궁중인물화는 특히 남당(당의 귀족 세력이 집중하여 있었다.)은 문인사대부의 생활을 정조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문치적 시대의 정경을 표현한 것이다.


       市井의 평민 생활을 그린 풍속화가 북송 후기와 남송 초기에 나타났다. 기본적으로는 시대가 평화롭다는 정치선전적인 그림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귀족들의 장원 생활을 주로 그리다보니 농민의 생활 모습을 표현한 것이 일반적인 양식이었다. 그러나 송대가 되면 상업이 발달하여 도시 생활이 주요 생활 모습이 되었다. 왕의 통치 기간이 태평성세라는 선전적 그림은 자연히 그 대상이 도시민의 생활이 되었다.


       사원 벽화의 도석 인물화는 오도자 그림 양식이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線描로 粉本(초벌그림=밑그림)을 그리듯이 그렸다. 이공린과 무종원의 그림이 이 양식을 본 받았다.

    그 외에도 주방 양식의 ‘기라인물’도 그렸다.


       벽화는 옆 면을 따라서 길게 이야기 형식으로 그렸다. 이 양식이 소폭의 권축화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남송 후기가 되면 선종 불교의 영향으로 선화 양식의 감필, 발묵과, 그림자처럼 그리는 방식이 대 유행을 하였다. 말하자면 ‘得意忘象’의 종교적 체험을 표현한 것이지만, 일반민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대는 기본적으로 산수화와 화조화가 중국화의 주류를 이룬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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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화가(20) -고관중의 한희재야연도| 촌정필담

    촌정 | 조회 287 |추천 2 | 2015.08.10. 05:57








     







     


     

    11. 고굉중 - 한희재야연도

        고굉중은 강남 사람으로 남당의 화원 대조로서 인물화를 잘 그렸다.

    한희재는 북방 출신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와서 중원을 회복하려는 뜻을 가졌다. 그러나 중용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희재는 주연을 베풀면서 세월을 보냈다. 후당의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고관중 더러 연회 장면을 그려 오라고 하였다.

    고굉중의 인물화는 당나라 이래로 내려오는 전통의 기법으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