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6. 08:56ㆍ글씨쓰기
예서
다른 표기 언어 隷書
유형 | 개념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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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예술·체육/서예 |
요약 한자 서체의 하나.
[내용]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진(秦)나라의 국가통일기에 걸쳐, 그때까지의 공식서체였던 전서(篆書)의 자획을 간략화하고, 일상적으로 쓰기에 편리한 서체로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예서는 소전[小篆:진(秦)의 이사(李斯)가 대전(大篆)과 주문(籒文)을 정리하여 놓은 서체]에서 2분(分)은 변하고 8분(分)을 남겨 놓았다 하여 이것을 팔분(八分)이라고도 하며 또 고예(古隷)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 명칭과 자체(字體)에 많은 이설이 있는데, 각가(各家)의 저작을 통하여 명칭 및 출처와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예서:진대(晉代) 화가인 위항(衛恒)은 “예서란 전의 빠른 것(隷書 篆之捷也)”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전서가 너무 번잡하여 그것을 간첩(簡捷)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또 송대(宋代) 화가인 서개(徐鍇)의 ≪설문해자≫ 서(序)에 의하면 진시황 때 사람 정막(程邈)이 대전을 성개(省改)하였다 하므로, 예서는 소전과 동시에 이루어진 가장 빠른 것임을 알 수 있다.
② 고예:≪서경잡기 西京雜記≫에는 두릉(杜陵)의 추호(秋胡)가 상서(尙書)에 능통하며 고예를 잘 썼다고 하고, 고예는 정막이 옥중에서 대전을 변화시켜 만든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고예는 진예(秦隷)와 거의 동종(同種)의 자체이나 후대에 명칭이 달라졌을 뿐이며, 이 자체의 특징은 ‘불위체세(不爲體勢)’라는 점에서 한대의 예식자체(隷識字體), 즉 파책조법(波磔挑法)이 없는 한예(漢隷)가 그것이다.
③ 진예:오구연(吾丘衍)의 ≪학고편 學古編≫에 “진예는 체세(體勢)는 갖추지 않았으나 한의 관지(款識)의 전자(篆字)와 가깝다.”고 하였다.
④ 팔분:한대 채옹(蔡邕)의 딸인 채염(蔡琰), 장회관(張懷瓘)·오구연 등의 설에 의하면, 팔분은 소전 이후이고 한예 이전의 자체라고 하므로, 진예나 고예가 곧 팔분을 말하는 것이다.
⑤ 한예:후한(後漢) 비각(碑刻)에 파책이 있는 서체를 한예라 한다고 하였다.
⑥ 초예(草隷)·예초(隷草):진서(晉書) ≪신밀전 辛謐傳≫에 “밀(謐)은 학문이 해박하고 글을 잘 하여 초예를 잘 썼으니 당시의 해법(楷法)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또 북위(北魏)의 서예가 왕음(王愔)은 “차중(次仲)이 비로소 파세(波勢)를 띠어 건초(建初) 연간에 예초로 해법을 이루었으니 자방(字方) 팔분으로 말하기를 모범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초예·예초는 일체(一體)의 것으로 예서의 초솔(草率)한 맛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⑦ 해서(楷書):장회관은 “팔분은 본래 해서를 이름이니, 해서란 법(法)이요, 식(式)이요, 모(模)라.”하였다.
⑧ 진정(眞正):장회관의 ≪육체서론 六體書論≫에 “예서는 정막이 만들었으니 자(字)가 모두 진정하여 또한 진서(眞書)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당육전 唐六典≫에 예서는 후세의 해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석경(唐代石經) 및 약간의 비갈(碑碣)은 조법(挑法)의 예서로 썼으되 이것을 소위 팔분이라 하였으니 일반으로 말하는 당예(唐隷)이다. 또 당인(唐人)의 전적(典籍)이나 공문(公文)은 자연히 후세에 말하는 당해(唐楷)로 서사(書寫)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서와 팔분 및 고예·해서의 명칭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역대 서체의 명칭 변천과 현존하는 역대 서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서는 고예(혹 진예) 및 분예(分隷, 또는 한예)의 2종이다. 고예는 전서의 빠른 것으로 그 체는 방편(方扁)하며 파세(波勢)가 없고 진대(秦代)에 이미 있었으며 서한(西漢) 때에 통용하였다. 분예는 이를 이어서, 즉 고예가 변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결체(結體)는 거의 같으나 파세를 더하여 동한(東漢) 때에 성행하였다.
또 예서의 명칭은 당대(唐代)에 이르도록 연용(沿用)되었으며 그 체화(體畫)가 동한으로부터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점(點)과 탁(啄)과 조(挑)와 적(趯)을 더하여 분예 이후의 주요 서체를 이루었다. 이 체를 당대에는 그대로 예서라 명칭하였으나 현재에는 해서(楷書), 또는 진서(眞書)·정서(正書)라 칭한다.
참고문헌
- 『한국의 미 6-서예-』(임창순감수, 중앙일보사, 1981)
- 『中國書法大辭典』(香港 書譜出版社, 1984)
예서
다른 표기 언어 隸書
요약 한자 서체의 하나.
전서를 간략화한 것으로 좌서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중국 진(秦)의 시황제(始皇帝) 때 옥리였던 정막이 옥에 종사하는 사무원들의 문서가 번잡한 것을 줄이기 위해 대전을 개선하여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예서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소전과 마찬가지로 진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며, 한대(漢代)에 전서를 대신해 공식문자로 통용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서와 팔분·고예·해서의 명칭이 혼용되고 있으나, 예서는 고예와 분예가 중심이다. 고예, 즉 진예는 전서를 빠르게 쓴 것으로 진대에 시작되어 전한 때 통용되었는데 파책(삐침)이 없는 소박한 서체가 특징이며 한대의 관지자체와 유사하다. 분예, 즉 한예는 고예가 변한 것으로 고예의 글자체와 거의 같으나 파책이 발달된 것이 특징이다.
후한시대에 완전한 형태가 이루어져 널리 통용되었고, 특히 비각에 많이 사용되었다. 위진시대 이후에는 차츰 파책이 약해지고, 여기에 점(點)·탁(啄)·도(挑)·적(趯)을 더하여 더욱 유연하고 매끄러운 서체로 변형되었는데 이것을 해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말기 완당 김정희의 독특한 예서와 이광사의 예서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서예
예서(隸書)의 기원과 발생 ♥ 예서교실---------♥
★ 예서(隸書)의 기원과 발생
奏(주)의 始皇帝(시황제)때에 程邈(정막)이라는 사람이 죄를 짓고 옥중에 있기를 십 년, 그 동안에 小篆의 번잡한 곡선의 문자를 직선문자로 고치고 書寫(서사)에 편리한 새로운 書體三千字를 창조하여 제왕에 헌상하였던 바, 제왕은 이것을 상하여 사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문자를 古隸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이어서 그 진실성에는 의문이 있다. 古隸에 있어서도 어느 한 시기를 區劃해서 완성한 것이 아니고, 자연 발생적인 것을 程邈(정막)이 정리 마무리한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예서의 명칭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小篆에 예속해서 생긴 것으로 新書體의 文字라는 의미에서 이 명칭이 생긴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古隸가 생겨 얼마 안되어서, 王次仲(왕차중)이 八分書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파책이다. 파책이라고 하는 것은 한 획에 큰 변화를 주어 波狀曲線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예서로 유명한 서적은 예기비, 서협송, 장천비, 조전비가 있다.
전서는 몽땅 몰아서 전서라고는 하지만 전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굉장히 종류가 많아서 좀 지나치게 막연한 표현이기는 하나, 이 경우의 전서라는 호칭의 초점을 전서의 가장 새로운 형태인 小篆(소전)에 맞추기로 한다. 그 소전과 예서를 우선 형태상으로 비교해보면 소전은 그 자형이 아주 길다. 그와 대조적으로 예서는 일반적으로 아주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전서는 생김새가 길므로 세로로 내리쓴 획이 강조되고 과장되기 쉽다. 그래서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눈에 잘 띈다. 그에 비해 예서는 납작하므로 가로로 건너 그은 획이 눈에 띄기 쉽다. 즉 옆으로 길게 선이 뻗어 나가 있는 것이다. 선과 선 사이 즉 分間(분간)의 경우도 전서일 때는 세로획과 세로획의 내려 그은 간격이 필연적으로 긴밀한 반면, 예서일 때는 가로로 건너 그은 획이 이에 해당하므로 가로획간이 아주 긴밀하다. 획의 조합을 보면 전서의 경우 키가 커서 세로로 길 뿐 아니라,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대개 수직이고 가로획은 수평으로 되어있다. 이점은 예서도 같아서 즉, 전서가 붓을 곧추 세우고 힘의 중심이 線劃(선획)의 중심을 통과하게 쓰는 서법, 즉 중복으로 쓰여 졌는데 이것은 거의 그대로 예서에서도 통용된다. 단지 특수한 예로서 전서에는 없는, 예서의 '波(파)'라고 불리는 부분등에 가끔 그 중봉이 흐트러져서 측필이 되어가는 기미가 엿보이는데, 그것이 해서의 파임의 경우가 되면 측필의 특징이 한결 더 뚜렷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보면 예서가 전서와 해서의 중간서체라는 사실이 더 명확히 드러나는 셈이다.
한비중 가장 근엄하고 가장 품위있는 글씨로서, 精妙(정묘). 有神(유신)하고 評正(평정)하며, 獲(획)이 생동하는 것 같다. 예기비 문자의 비범함에 대해서 明代의 郭宗昌(곽종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자획의 훌륭함은 붓으로 쓴 것도 아니고 손으로 쓴 것도 아니다. 우아하기로는 그 이상의 것은 없다.이것은 바로 신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보통 인간이 쓴 것이 아니다." 라고. 예기비는 비의 측면에 글자가 있고, 모든 기술적이 면을 종합하여 완성된 최고의 걸작으로, 무궁한 획의 변화는 가없는 맛을 주며 강조된 파책에 예기비의 특징이 있고 ,종획에서 중후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방정, 준엄한 느낌을 준다.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의 수도 많아 습자본으로 알맞다.
전체의 이름은 [노상을영치공묘백석졸사비(魯相乙瑛置功廟百錫卒史碑)로, 서법이 단정하고 근엄한 가운데 질탕하고 붓을 꺾어서 누른 필치가 드러나며, 용필은 방필과 원필을 결합시켜 굵고 가는 획을 서로 섞었으며, 파책의 꼬리 부분은 항상 크게 삐쳐서 응축되면서도 표일하고 웅건하면서도 소박한 맛을 나게 하였다. 乙瑛碑는 八分隷法의 정통으로 꼽혀 가장 특색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건대 우선 結構가 튼튼하여 규모가 크게 보인다. 一見平凡한 姿態이지만 실제로 붓을 잡고 임서하여 보면 그 波法에 있어서도 힘이 들어있고 소박함을 풍기면서도 내실한 맛이 있어 孔宙碑와 같이 화려하지 않다. 또 一字와 같은 橫書의 서법에 있어서도 충분히 붓을 沈潛시켜 輕浮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충실한 力感이 넘친다. 또 大字에 있어서는 좌우의 비낌에서 좌측 비낌은 말단까지 힘이 있고 그 힘을 그대로 우측비낌까지 移行시켜 좌우의 균형미를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다. 대체로 보아 이 碑의 점획은 豊하나 鈍重하게 보이지 않는다. 결구도 橫長한 形으로는 돼있지만 그것이 曺全碑같이 심하지 않으므로 流媚하게 흐르지 않는다. 말하자면 건강한 느낌을 풍긴다. 字形크기도 이 碑만큼 적당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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隷書・篆書
摘要
1 現代書道全書 上条信山編著 尚学図書 , 小学館 (発売) Cover Page Details NCID: BN10458408 Country Code: ja Title Language Code: jpn Text Language Code: jpn Place of publication: 東京,東京 Pages/Volumes: 199p, 図版 S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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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版源
尚学図書 , 小学館(発売), 1970
被引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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