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서(隷書)

2016. 1. 26. 08:56글씨쓰기



      

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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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개념용어
분야 예술·체육/서예

요약 한자 서체의 하나.

[내용]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진(秦)나라의 국가통일기에 걸쳐, 그때까지의 공식서체였던 전서(篆書)의 자획을 간략화하고, 일상적으로 쓰기에 편리한 서체로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예서는 소전[小篆:진(秦)의 이사(李斯)가 대전(大篆)과 주문(籒文)을 정리하여 놓은 서체]에서 2분(分)은 변하고 8분(分)을 남겨 놓았다 하여 이것을 팔분(八分)이라고도 하며 또 고예(古隷)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 명칭과 자체(字體)에 많은 이설이 있는데, 각가(各家)의 저작을 통하여 명칭 및 출처와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예서진대(晉代) 화가인 위항(衛恒) “예서란 전의 빠른 것(隷書 篆之捷也)”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전서가 너무 번잡하여 그것을 간첩(簡捷)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또 송대(宋代) 화가인 서개(徐鍇) ≪설문해자≫ 서(序)에 의하면 진시황 때 사람 정막(程邈)이 대전을 성개(省改)하였다 하므로, 예서는 소전과 동시에 이루어진 가장 빠른 것임을 알 수 있다.

   ② 고예:≪서경잡기 西京雜記≫에는 두릉(杜陵)의 추호(秋胡)가 상서(尙書)에 능통하며 고예를 잘 썼다고 하고, 고예는 정막이 옥중에서 대전을 변화시켜 만든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고예진예(秦隷)와 거의 동종(同種)의 자체이나 후대에 명칭이 달라졌을 뿐이며, 이 자체의 특징은 ‘불위체세(不爲體勢)’라는 점에서 한대의 예식자체(隷識字體), 즉 파책조법(波磔挑法)이 없는 한예(漢隷)가 그것이다.

   ③ 진예:오구연(吾丘衍)≪학고편 學古編≫ “진예는 체세(體勢)는 갖추지 않았으나 한의 관지(款識)의 전자(篆字)와 가깝다.”고 하였다.

   ④ 팔분:한대 채옹(蔡邕)의 딸인 채염(蔡琰), 장회관(張懷瓘)·오구연 등의 설에 의하면, 팔분은 소전 이후이고 한예 이전의 자체라고 하므로, 진예고예가 곧 팔분을 말하는 것이다.

   ⑤ 한예:후한(後漢) 비각(碑刻)파책이 있는 서체를 한예라 한다고 하였다.

   ⑥ 초예(草隷)·예초(隷草):진서(晉書) ≪신밀전 辛謐傳≫ “밀(謐)은 학문이 해박하고 글을 잘 하여 초예를 잘 썼으니 당시의 해법(楷法)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또 북위(北魏)의 서예가 왕음(王愔) “차중(次仲)이 비로소 파세(波勢)를 띠어 건초(建初) 연간에 예초로 해법을 이루었으니 자방(字方) 팔분으로 말하기를 모범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초예·예초는 일체(一體)의 것으로 예서의 초솔(草率)한 맛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⑦ 해서(楷書):장회관“팔분은 본래 해서를 이름이니, 해서란 법(法)이요, 식(式)이요, 모(模)라.”하였다.

   ⑧ 진정(眞正):장회관≪육체서론 六體書論≫“예서는 정막이 만들었으니 자(字)가 모두 진정하여 또한 진서(眞書)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당육전 唐六典≫에 예서는 후세의 해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석경(唐代石經) 및 약간의 비갈(碑碣)은 조법(挑法)의 예서로 썼으되 이것을 소위 팔분이라 하였으니 일반으로 말하는 당예(唐隷)이다. 또 당인(唐人)의 전적(典籍)이나 공문(公文)은 자연히 후세에 말하는 당해(唐楷)로 서사(書寫)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서와 팔분 및 고예·해서의 명칭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역대 서체의 명칭 변천과 현존하는 역대 서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서고예(혹 진예)분예(分隷, 또는 한예)의 2종이다. 고예는 전서의 빠른 것으로 그 체는 방편(方扁)하며 파세(波勢)가 없고 진대(秦代)에 이미 있었으며 서한(西漢) 때에 통용하였다. 분예는 이를 이어서, 즉 고예가 변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결체(結體)는 거의 같으나 파세를 더하여 동한(東漢) 때에 성행하였다.

또 예서의 명칭은 당대(唐代)에 이르도록 연용(沿用)되었으며 그 체화(體畫)가 동한으로부터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점(點)과 탁(啄)과 조(挑)와 적(趯)을 더하여 분예 이후의 주요 서체를 이루었다. 이 체를 당대에는 그대로 예서라 명칭하였으나 현재에는 해서(楷書), 또는 진서(眞書)·정서(正書)라 칭한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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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한국의 미 6-서예-』(임창순감수, 중앙일보사, 1981)
  • 『中國書法大辭典』(香港 書譜出版社, 1984)





예서

다른 표기 언어 隸書

       


요약 한자 서체의 하나.

   전서를 간략화한 것으로 좌서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중국 진(秦)의 시황제(始皇帝) 때 옥리였던 정막이 옥에 종사하는 사무원들의 문서가 번잡한 것을 줄이기 위해 대전을 개선하여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예서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한다. 그러나 소전과 마찬가지로 진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며, 한대(漢代)에 전서를 대신해 공식문자로 통용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서와 팔분·고예·해서의 명칭이 혼용되고 있으나, 예서고예분예가 중심이다. 고예, 즉 진예는 전서를 빠르게 쓴 것으로 진대에 시작되어 전한 때 통용되었는데 파책(삐침)이 없는 소박한 서체가 특징이며 한대의 관지자체와 유사하다. 분예, 즉 한예는 고예가 변한 것으로 고예의 글자체와 거의 같으나 파책이 발달된 것이 특징이다.


   후한시대에 완전한 형태가 이루어져 널리 통용되었고, 특히 비각에 많이 사용되었다. 위진시대 이후에는 차츰 파책이 약해지고, 여기에 점(點)·탁(啄)·도(挑)·적(趯)을 더하여 더욱 유연하고 매끄러운 서체로 변형되었는데 이것을 해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말기 완당 김정희의 독특한 예서와 이광사의 예서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서예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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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隸書)의 기원과 발생| ♥ 예서교실---------♥

우천 | 조회 58 |추천 0 | 2005.07.17. 18:05


★ 예서(隸書)의 기원과 발생

   고문자(古文字)들과는 다른 차원의 획기적으로 새로운 한자의 자형(字形)이 성립된 예서(隸書)는 진(秦)나라의 군현제(郡縣制) 실시라는 정치적인 배경이 이끌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정적 실용성이 중시되어 보다 빠르고 쉽게 문자를 쓰기 위해 고안되었던 것입니다. 상형(象形)의 회화적 요소를 벗어버리고 문자의 기호적 요소가 완성되어 현대 한자의 출발점으로도 볼 수 있는 예서(隸書)의 전형을 살펴봅니다.

 
주가 멸망하고 천하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이를 통일한 자가 바로 진의 시황제였다. 그는 비록 폭정으로 유명하였으나, 문자통일의 업적을 지나칠 수는 없다. 바로 전서를 가리키나 이는 실용적이지 못해, 실제로는 간소하게 한 약체가 사용되어 왔다. 이것이 예서의 발생이라 할 수 있겠다.

 

 奏(주)의 始皇帝(시황제)때에 程邈(정막)이라는 사람이 죄를 짓고 옥중에 있기를 십 년, 그 동안에 小篆의 번잡한 곡선의 문자를 직선문자로 고치고 書寫(서사)에 편리한 새로운 書體三千字를 창조하여 제왕에 헌상하였던 바, 제왕은 이것을 상하여 사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문자를 古隸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이어서 그 진실성에는 의문이 있다. 古隸에 있어서도 어느 한 시기를 區劃해서 완성한 것이 아니고, 자연 발생적인 것을 程邈(정막)이 정리 마무리한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예서의 명칭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小篆에 예속해서 생긴 것으로 新書體의 文字라는 의미에서 이 명칭이 생긴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古隸가 생겨 얼마 안되어서, 王次仲(왕차중)이 八分書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파책이다. 파책이라고 하는 것은 한 획에 큰 변화를 주어 波狀曲線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예서로 유명한 서적은 예기비, 서협송, 장천비, 조전비가 있다.



● 隸書의 정의

   예서의 명칭에 대한 이해는 예서가 형성된 배경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설로는 법가(法家)를 바탕으로 철권통치를 행했던 진(秦)나라였기에 강한 형벌(刑罰)의 행사로 노역(勞役)의 죄수들이 많아 이 죄수들을 관리하는 형리(刑吏)들이 간편하고 쉬운 행정 문서를 다루기 위해 고안했다고 해서 '노예 예[隸]'자를 쓴 예서(隸書)라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문자의 흐름은 진(秦)나라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이어 한(漢)나라 초기까지는 예서의 체제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한(漢) 무제대(武帝代)에 예서가 국가의 공식 문자로 정착되고 유학(儒學)이 국교(國敎)가 된 이후 경전(經傳)의 해석을 둘러싼 왕성한 학문적 발전과 함께 서체 역시 큰 진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 무제의 앞 경제(景帝) 때 산동(山東) 지방 곡부(曲阜)의 공자(孔子)의 고택(古宅)을 개축하다가 벽 속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경전(經傳)에 대한 해석으로 훈고학(訓 學)이 발전하는데, 이 벽 속에서 발견된 경전에 기록된 문자는 한대(漢代)의 예서보다 훨씬 이전의 서체였기에 이를 고문경서(古文經書)라 하고 당시 사용되던 경서를 금문경서(今文經書)라 합니다. 서체뿐만 아니라 경전 해석 연구에도 큰 의의를 둘 수 있는데, 기원후 100년경에 완성된 허신(許愼)의《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이 고문경서의 서체를 고문(古文)이라 제시하면서 기본 소전(小篆) 자형과 함께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국《설문해자》는 당시 규격화되어 가는 서체[예서]로 인해 정확한 한자의 연원을 밝히려는 의도와 경전의 바른 해석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 隸書의 특징

   진나라의 소전(小篆)은 이전의 갑골문(甲骨文)이나 금문(金文)에 비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한자의 개념을 제시한 서체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문자 자체로 보면 획이 둥글고 자형의 성분들을 그대로 살린 다소 불편하고 복잡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용적 방향으로 의미전달에 큰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쉽고 빨리 쓸 수 있는 형태로 간략하게 된 것입니다.

 
곡선의 둥근 자형으로 인해 아직 회화적 요소가 남아 있던 소전의 자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직선의 기호적 성격을 지닌 서체를 만들어 전체적인 자형이 사각형 모양으로 되는 전형을 이루게 됩니다. 현대의 한자에서 둥근 원형 모양의 획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예서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획기적인 변화는 한자들마다 각기 복잡한 모양의 서체를 유사한 모양이면 공통의 모양으로 간략화 시켜 실용성을 더한 것인데, 이 부분은 후대에 한자의 자형만으로 의미를 이해하는데 다소 부적절하거나 난해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결국 소전(小篆)과 같은 고문자(古文字)의 자형이 한자의 자원을 이해하는 중요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서를 배우는데 우선 중요한 점은, 예서라는 서체가 다른 서체, 즉 예서보다 오래된 전서나, 예서보다 새로운 해서, 행서, 초서와 서체상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이점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붓을 들면, 소위 隸意(예의)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서 다워지지가 않는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 둘 일은, 지금부터 말하는 예서라는 낱말의 뜻은, 古隸(고예)라는 예서의 고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八分(팔분)이라는 예서의 비교적 새로운 형식, 곧 조전비를 포함한 후한 시대의 하고 많은 예서 전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설명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우선은 예서의 특징을 하나하나 밝혀보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예서체와 다른 서체를 비교 검토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것이다.



●隸書의 가치

   상형적 회화요소의 고대문자 틀을 벗고 왕성한 새로운 문자의 규격을 이루게 된 예서의 출현은 이후 한자 자형의 전형을 제시하게 됩니다. 문자의 틀이 완성되어 급속도의 서체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예서의 가치는 이후 서예(書藝)라는 개념까지 도출하게 됩니다. 실제 이후에 등장한 서체의 규범이라고 하는 해서(楷書)의 자형도 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면 이미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0년 전에 한자 자형의 전형은 예서에서 모두 갖추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은은한 고풍(古風)의 예술미(藝術美)를 느낄 수 있는 서체로 현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서체로 전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 예서의 기본구조

   예서의 기본 구조를 보면 한 획에 '波勢(파세)'라는 리듬이 흐르고 있는데, 파세는 예서의 가장 기본적인 특색이다. 파세란 한 획에 큰 변화를 주어 波狀曲線(파상곡선)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하거나 또는 물결이 한번 치솟았다가 미끄러져 내리는 듯한 필체를 말한다.

 전서는 몽땅 몰아서 전서라고는 하지만 전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굉장히 종류가 많아서 좀 지나치게 막연한 표현이기는 하나, 이 경우의 전서라는 호칭의 초점을 전서의 가장 새로운 형태인 小篆(소전)에 맞추기로 한다.

그 소전과 예서를 우선 형태상으로 비교해보면 소전은 그 자형이 아주 길다. 그와 대조적으로 예서는 일반적으로 아주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전서는 생김새가 길므로 세로로 내리쓴 획이 강조되고 과장되기 쉽다. 그래서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눈에 잘 띈다. 그에 비해 예서는 납작하므로 가로로 건너 그은 획이 눈에 띄기 쉽다. 즉 옆으로 길게 선이 뻗어 나가 있는 것이다.

 선과 선 사이 즉 分間(분간)의 경우도 전서일 때는 세로획과 세로획의 내려 그은 간격이 필연적으로 긴밀한 반면, 예서일 때는 가로로 건너 그은 획이 이에 해당하므로 가로획간이 아주 긴밀하다. 획의 조합을 보면 전서의 경우 키가 커서 세로로 길 뿐 아니라,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대개 수직이고 가로획은 수평으로 되어있다. 이점은 예서도 같아서

세로는 수직, 가로는 수평이다. 즉 형태상의 특징으로서 길고 납작한 차이는 나지만 자획상의 균형법은 두 서체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자형법은 左右相稱이라 하여 옛 서체에서는 字劃構成上(자획구성상)의 기본이 되어 있었다. 이상이 형태상으로 본 예서와 전서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이다.


   다음으로 예서와 해서를 비교해 보자. 해서의 경우 자형은 거의 네모가 반듯한 정방형에 가깝고 특히 길거나 납작하지 않다. 그러나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점은, 해서의 가로 긋는 획이 오른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세로획이 수직인 점은 예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지만, 오른쪽 어깨가 치켜진 가로획은 해서의 특징이며 그것이 예서와 전혀 다른 점일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예서와 전서에 공통되는 좌우상칭의 조립법이 해서에는 통하지 않고, 나아가서는 그 필법까지도 전혀 다르게 진전하게 된 것이다. 전서와 예서는 수직 수명이라는 기본 원칙하에 다같이 좌우상칭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필법도 그리 다르지가 않다.

 즉, 전서가 붓을 곧추 세우고 힘의 중심이 線劃(선획)의 중심을 통과하게 쓰는 서법, 즉 중복으로 쓰여 졌는데 이것은 거의 그대로 예서에서도 통용된다. 단지 특수한 예로서 전서에는 없는, 예서의 '波(파)'라고 불리는 부분등에 가끔 그 중봉이 흐트러져서 측필이 되어가는 기미가 엿보이는데, 그것이 해서의 파임의 경우가 되면 측필의 특징이 한결 더 뚜렷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보면 예서가 전서와 해서의 중간서체라는 사실이 더 명확히 드러나는 셈이다.

해서는 가로획을 우상방으로 치켜 긋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관계로, 다른 획의 용필법도 측필이 되기 마련이며 波(파)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예서와 아주 비슷하면서도 힘을 주는 법이 달라, 이런데서 예서와 해서의 용필법이 서로 다른 특징을 볼 수가 있다. 더구나 꺾이는 부분에 이르면 이 특징이 더욱 명확해져서, 예서는 중봉, 해서는 측필이 원칙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 예서의 종류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秦隸(진예)古隸(고예)漢隸(한예) 八分(팔분)이 바로 그것이며, 그 차이는 波法(파법)에 있다.

◆가. 고예 : 篆(전)이 隸(예)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특징을 나타내는데, 小篆(소전)보다 곡선이 적고 획이 간결하지만, 소전처럼 좌우대칭이며 팔분처럼 편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전처럼 장방형도 아니다.

◆나. 팔분 : 고예를 미화하기 위하여 횡힉의 종부를 누르고 힘차게 삐치는 것이 波(파)인데, 이것이 있는 것을 팔분이라고 한다. 八字分背라고도 하는데 팔자처럼 좌우로 삐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팔분은 전한 무렵부터 사용되었으며, 그 말엽부터 후한에 걸쳐 성행하여 숱한 석각이 건립되어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 漢隸(한예)의 종류

   예서를 배울 때 첫째 한예에서 그 자료를 얻어야 한다. 한예의 원탁을 입수 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만, 근래에 와서는 사진판 또는 체본용 법첩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이 나와있기 때문에 그다지 불편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러한 한예는 보통 3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流麗形(유려형): 예기비, 을영비, 사신비, 조전비

方整形(방정형): 북해상경군비, 장천비

奇古形(기고형): 서협송, 하승비

※작성시대별로 나열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乙瑛碑 (永興元年,153)

2) 禮器碑 (永壽二年,155)

3) 鄭固碑 (延熹元年,158)

4) 封龍山頌 (延熹7年,164)

5) 孔宙碑 (延熹8年,165)

6) 史晨碑 (建寧2年,16
※ 이중 예서로 유명한 書跡(서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기비(禮器碑)

   전체의 이름은 [노상한칙조공묘예기비(魯相韓勅造孔廟禮器碑)]로 漢나라 영수2년(156년)에 세워졌으며, 서기156년에 출토되었는데 曲阜(곡부)의 공자무덤 내부에 있다.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서법이 가늘면서도 강하고 웅건하며 단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표일한 맛이 있고, 용필은 방필과 원필을 겸하였기 때문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맛이 있으면서도 두텁다. 자체는 납작한 것, 장방형, 아래위가 긴 것 등이 어우러져 있고, 필획이 수경하며 파책이 잘 발달되어 있다. 특히 비음(碑陰)과 비측(碑側)에 씌어진 글씨는 더욱 방자하면서도 기이하여 역대 한예의 모범이 되었다.

예기비가 건립된 후한시대는 중국 서예사상 가장 建碑가 성행한 시대였다. 淸代의 금석학자인 翁方綱(옹방강)은 '한의 예서는 예기비로서 제일로 친다'고 단언하였다. 예기비는 . 자체는 옆으로 길고, 필획이 瘦勁(수경)하여 힘있고 波(파)이한데, 한비이나 여러 가지 體勢(체세)가 나타나므로 여러사람이 나누어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비중 가장 근엄하고 가장 품위있는 글씨로서, 精妙(정묘). 有神(유신)하고 評正(평정)하며, 獲(획)이 생동하는 것 같다. 예기비 문자의 비범함에 대해서 明代의 郭宗昌(곽종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자획의 훌륭함은 붓으로 쓴 것도 아니고 손으로 쓴 것도 아니다. 우아하기로는 그 이상의 것은 없다.이것은 바로 신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보통 인간이 쓴 것이 아니다." 라고. 예기비는 비의 측면에 글자가 있고, 모든 기술적이 면을 종합하여 완성된 최고의 걸작으로, 무궁한 획의 변화는 가없는 맛을 주며 강조된 파책에 예기비의 특징이 있고 ,종획에서 중후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방정, 준엄한 느낌을 준다.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의 수도 많아 습자본으로 알맞다.



◆사신비(史晨碑)

   사신비는 하나이나 양면에 글을 새겼기 때문에 이를 또한 [사신전후비(史晨前後碑)]라고도 한다. [전비]는 169년에 썼으며, [후비]는 168년에 썼으나 모두가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史晨碑는 魯國의 相인 史晨이 孔廟의 제사를 성대히 행하였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刻한 것이다.

前碑라는 것은 중앙정부의 尙書에게 올린 상소문을 刻한 것으로 거기에 공자를 찬양한 銘文을 썼다. 이 前碑의 碑陰에 後碑가 刻되어 있어 묘제를 성대히 행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史晨碑를 "魯相史晨饗孔廟碑"로 표현하기도 한다. 前碑는 17행, 1행 36자, 後碑는 14행, 1행 36자로 刻되어있다.

   이 碑의 서법은 八分隷 가운데 있어 비교적 담백하며 순탄한 것이다. 따라서 특히 힘 준데도 없고 平淡한 것이나 그러면서도 波法이 지극히 충실하여 조금도 위태스러운 데가 없는 결구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 조용한 氣味를 풍겨 호홉이 긴 자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말하자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같은 느낌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奇도 폼도 없다는 것이 현대인에게 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漢隷의 여러 것을 배워가는 中, 史晨의 평담한 맛에 자연히 마음이 끌릴 것이다.

공자묘에 있으며, 자체는 납작하며 파책은 수렴되어 있다. 결체는 아름답고 긴밀하면서도 법도가 삼엄하다. 예법이 가장 정중하게 내재된 비로서 범본이며, 청나라 전예의 중흥조인 등석여가 이 사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을영비(乙瑛碑)

   乙瑛碑는 영흥원년(서기 153년)에 세워진 것으로 곡부의 공자묘에 있으며 18행 매행 40자로 되어있다. 내용은 공자묘에 百石卒史를 둔 유래와 당시의 상소문의 형식을 나타내어 문헌상으로도 중요하고 乙瑛은 雄古를 나타낸다.

 전체의 이름은 [노상을영치공묘백석졸사비(魯相乙瑛置功廟百錫卒史碑)로, 서법이 단정하고 근엄한 가운데 질탕하고 붓을 꺾어서 누른 필치가 드러나며, 용필은 방필과 원필을 결합시켜 굵고 가는 획을 서로 섞었으며, 파책의 꼬리 부분은 항상 크게 삐쳐서 응축되면서도 표일하고 웅건하면서도 소박한 맛을 나게 하였다.


   乙瑛碑는 八分隷法의 정통으로 꼽혀 가장 특색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건대 우선 結構가 튼튼하여 규모가 크게 보인다. 一見平凡한 姿態이지만 실제로 붓을 잡고 임서하여 보면 그 波法에 있어서도 힘이 들어있고 소박함을 풍기면서도 내실한 맛이 있어 孔宙碑와 같이 화려하지 않다. 또 一字와 같은 橫書의 서법에 있어서도 충분히 붓을 沈潛시켜 輕浮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충실한 力感이 넘친다.


   또 大字에 있어서는 좌우의 비낌에서 좌측 비낌은 말단까지 힘이 있고 그 힘을 그대로 우측비낌까지 移行시켜 좌우의 균형미를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다. 대체로 보아 이 碑의 점획은 豊하나 鈍重하게 보이지 않는다. 결구도 橫長한 形으로는 돼있지만 그것이 曺全碑같이 심하지 않으므로 流媚하게 흐르지 않는다. 말하자면 건강한 느낌을 풍긴다. 字形크기도 이 碑만큼 적당한 것이 없다.




◆조전비(曹全碑)

    예서의 用筆結體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 중 첫째가는 것이 조전비이다. 전체의 이름은 [합양령조전비(哈陽嶺曹全碑)]로, 서기 185년에 세워졌으나 명나라 때, 처음으로 출토되어 현재는 서안의 비림에 있다. 글씨는 수려하면서도 골력이 있고, 용필은 화창하여 마치 행운유수와 같으며, 풍신(風神)이 뛰어난 작품이다. 결체는 납작하며, 필획이 섬세하며 파책이 날아 춤추는 듯한데 그 염미(姸美)함은 어느 것도 따르지 못한다. 한예 중에서 원필의 아름다움을 갖운 전형적인 작품이다.

   明代에 세워졌으며, 서기 185년에 哈陽에서 출토되었다. 결체는 역시 옆으로 납작하고, 필획이 섬세하여 파가 飛舞(비무)하며, 柔美(유미)하면서도 麗(려)한 풍격을 顯露(현로)하고 싶다. 全然(전연) 풍화작용을 받지 않았고, 刻法(각법)이 대단히 정밀했기 때문에 진책을 보는 것과 같이 필로를 잘 알 수 있으며, 木簡(목간)은 요컨대 일상의 용건을 충족하는 문서가 많다. 조전비의 서법은 삼백년을 지배하는 법칙을 그림을 그리듯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眞蹟(진적)이 아니라는 흠은 면치 못한다. 그래서 木簡(나무판 글씨)을 되돌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비에 새겨진 글씨는 字劃(자획)이 完好(완호)하고 형태가 매우 아름다울 뿐 아니라 筆力(필력)이 경건하다.


◆장천비(張遷碑)

   장천비는 조전비와 더불어 後漢時代의 最後를 장식하는 일품이다. 전체의 이름은 [곡성장탕음령장군표송(谷城長蕩陰令張君標頌)]이며, 서기 186년에 무염에 세워졌으며 명말에 출토되었는데, 현재는 태안의 대묘(岱廟)에 있다. 서법이 순박하고 두터우면서도 강하고, 아름다우며 방정하면서도 변화가 많다. 비음은 특히 감미로워 한예의 웅건한 방필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자체는 정방형에 가까우며 필획도 평정(平正)하다.

  그 字體(자체)는 방형이고, 필획이 평정하여 파세를 극히 收斂(수렴)하였으며, 高長(고장)한 字(자)들이 많은 편이다. 장천비는 소박성을 잃지 않는, 점과 획, 다부진 方形(방형)의 구성, 거기에 너무 표정을 나타내지 않으려 하는 듯한 원시적인 풍모에 일층 매력을 느끼게 한다.

   장천비는 다른 漢碑에 비하여 어딘가 굳세고 투박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장천비의 독특한 맛이다. 한편, 파세를 가지지 않게 한 가로획 등은 세태의 변화를 부여하지 않고 긋는다. 그것이 도리어 효과적으로 소박한 맛을 내고 있다. 요컨대 기교를 부리지 않고 運筆한 것이 현대적인 우리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건강하고 남성적인 서법으로 일관해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장천비는 전서이면서 다분히 예서적이다. 따라서 전서와 같은 圓味나 건강을 나타내지 않고 펑퍼짐하고 자연스럽게 문자를 배합하고 있다.



◆서협송

   서기 71년 甘肅(감숙) 成縣(성현)의 摩崖(마애)上에 새겼다. 한비에서는 대체로 글쓴 이를 밝히지 않지만, 이것은 비의 끝에 '仇靖(구정)'이라는 글쓴 이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자체는 方整(방정)하고 問架(문가)가 평온하며 大字(대자)이나, 결체에서 긴밀을 잃지 않았는데 필세가 온후하여 순박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예기비의 정술된 결체나 팔분예법의 아름다움은 없지만, 소박하고 야성미가 많고 결체는 널찍하고 퍽 힘찬 書(서)이다. 漢隸(한예)중 刻(각)이 아주 잘 되고 용필도 명쾌하여 예서 입문서로 적당하다. 사물에 동하지 않고 유유한 모습에 이상한 매력이 있다



◆석문송

   이것은 後漢(후한) 제일의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소박한 서풍을 가지며 예기비, 조전비와는 반대로 예서의 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孔宙碑

   예서의 옆으로 뻗는 필세는 자형까지를 퍼지게 하고있다. 이 작품은 그 극단에 가까운 작품이며 그러한 세력에 쫓으면서 규격에 벗어나지 않고 옆으로 쭉쭉 뻗쳐 쓰고 있다. 이 비석은 머리부분이 둥근 圓首비석의 대표적인 것으로 머리에 무지개 모양의 홈이 패었다.

이를 暈이라 하며 漢碑에만 보이는 특유의 것으로 3-4개가 대각선으로 달리고 있다. 비석머리에 題字를 篆額이라 하며 보통 전서로 쓰여진다.



◆封龍山頌

   漢代의 예서는 온화하게 흐르는 파세 때문에 때로 여성적인 미태 같은 것을 느끼게 하지만 이 비석은 한인의 호방한 일면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큰 붓으로 여유있게 쓰고 있다.



◆張壽殘碑

   비석의 글자는 반드시 씌어진 대로 조각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개념적인 필세가 덧붙여 새겨지고 때로는 筆意를 무시해버리는 단순화가 행해지기도 한다.

이 비석에는 두 가지 다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이 왼쪽보다 조금 내려 쓴 글자가 있다. 이는 파세에 영향을 받은 한대의 예서, 그 결체의 특징으로 이와 반대로 되면 당인의 예서와 같이 해서 시대의 냄새가 풍긴다.


◆廣開土大王碑

   고구려 장수왕 2년(414년)에 세워진,동양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높이가 6미터가 넘고 넓이가 1.5미터가 넘는 자연석이다. 전면에 44행,41자,한 자의 크기는 12 평방센티미터쯤으로 1800자에 이르는 많은 문자를 새겼다.우리 민족의 서적중 最古의 것으로 중국 奉天省의 東岡碑石街元來庭에 있다.

중국식과 다른 비석의 형식도 그러하거니와 소박장엄한 古隷體의 書는 고구려인의 독립자존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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隷書・篆書

摘要

1 現代書道全書 上条信山編著 尚学図書 , 小学館 (発売) Cover Page Details NCID: BN10458408 Country Code: ja Title Language Code: jpn Text Language Code: jpn Place of publication: 東京,東京 Pages/Volumes: 199p, 図版 S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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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版源

尚学図書 , 小学館(発売), 1970

被引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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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ì shū]  

隶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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隶书,亦称汉隶[1]  ,是汉字中常见的一种庄重的字体,书写效果略微宽扁,横画长而直画短,呈长方形状,讲究“蚕头雁尾”、“一波三折”。隶书起源于秦朝,由程邈整理而成,在东汉时期达到顶峰,对后世书法有不可小觑的影响,书法界有“汉隶唐楷”之称。
 
中文名
隶书
外文名
 clerical script
起    源
秦朝
代表人物
郑簠、金农
代表作品
曹全碑》、《张迁碑
亦    称
汉隶

定义编辑

关于隶书的定义,近人吴伯陶先生一篇:《从出土秦简帛书看秦汉早期隶书》的文章中说道:“可以用这个字的本义来作解释。〈说文解字〉中解释‘隶’的意义是‘附着’,〈后汉书·冯异传〉则训为‘属’,这一意义到今天还在使用,现代汉语中就有‘隶属’一词。〈晋书·卫恒传〉、〈说文解字序〉及段注,也都认为隶书是‘佐助篆所不逮’的,所以隶书是小篆的一种辅助字体。”
其次究竟什么样子才叫隶,又有什么样的严格区别,吴伯陶先生在上述的文章中又有所分析订定,这里再节录吴文中值得考虑的几小段。吴云∶“小篆还保存了象形字的遗意,画其成物随体诘屈;隶书就更进了一步,用笔画符号破坏了象形字的结腹,成为不象形的象形字”(他有字形举例,可参阅原文)。
他又说∶“小篆和隶书实际上是两个系统,标志着汉字发展的两大阶段。小篆是象形体古文字的结束,隶书是改象形为笔画化的新文字的开始。”“我们判断某种字体是否隶书,就要首先看它是否出现有破坏篆书结构失掉象形原意之处。”
吴先生经过仔细排比研究,得出那样的科学论据来,作为学术上篆、隶的不同定名的分野,自然是很值得重视的。不过还有两个问题想要问,那就是∶一,篆书也不能够个个是象形字,一开始就有象形以外的许多字存在,因此,仅仅失掉“象形原意”似乎有些不够。我的意思是说隶的破坏古文(“象形字”是一种字体的笼统名称,事实并非个个“象形”,例子甚多,不待列举),不仅仅是破坏象形而已。二,今天看到的从湖北云梦出土的秦简和湖南长沙马王堆墓中出土的简帛书中发现其中字的结构有变篆体,也有未变。用笔有圆有带长方的,那种字当时又称之为何名?这种“半篆半隶”的字形从秦昭襄王时代开始一直到西汉初(秦云梦简到汉马王堆帛书,吴文有详述可参阅)还存在,始皇帝以前,字还未有“体”的区别,可是到汉初,肯定那种字已经归入隶体,二者合起来考虑,那么对吴先生的区别篆体之名,是否有些矛盾了呢?事实上结构之变,光讲象形不象形,定然不够全面。我估计区别问题,在当时——在字体初变时一般人肯定还不太严格的,那种“蝙蝠式”的字形,大都随着新名称而名之——也称为隶,其中稍为保留些旧结构也是可以的。因此我认为如果设身处地来推测当时的命名,和今天用学术研究来区别的命名是可以有些距离的,是无足为怪的。明确地讲,篆与隶的不同除形象变为符号以外,还有笔法变化一方面的区别,例如∶生()、上(变笔法未变结构)、之(笔法结构全变)。三字的名实异同,决非单论结构,其他相似的情况也很不少,可以类推。
西汉中期以来,隶书的脱去篆体(包括结构、笔画的写法)而独立的形式,已经完全形成。所见有代表性的例如本世纪出现于西陲流沙中的西汉宣帝五凤元年(前57)、成帝河平元年(前28)、新莽始建国天凤元年(14)的书简、乐浪汉墓出土的西汉平帝元始四年(4)、东汉明帝永平十二年(69)的漆盘上的铭文等等,不但结构全变,从字形来讲也全成方形或扁方形,笔势则长波更自然横出,和接近篆体的直垂形大大不同了。
相像的字形还能在东汉的碑刻中见到很多。最著名的如桓帝延熹八年(165)的《华山庙碑》、灵帝建宁二年(169)的《史晨碑》、中平二年(185)的(曹全碑)、又三年(186)的(张迁碑)等等,其他不再一一例举了。
同时在西汉的碑刻中也还有一些面积大都方正或个别字带长形,又仅有极短的波势的字体,其有代表性的所见如∶西汉宣帝五凤二年(前56)的《鲁孝王刻石》、东汉安帝元初四年(117)的《祀三公山碑》、顺帝永和二年(137)的《敦煌太守裴岑纪功碑》、灵帝建宁三年(170)的《郙阁颂》摩崖石刻、以至明帝永平九年(66)字形不大规则的《开通褎斜道》摩崖石刻等等。以上那些基本上已消灭篆体而形式稍有小异的“正体字”,一直流行于两汉、三国间,而且几乎独占了石刻碑志中的位置。在江苏省南京市出土了东晋谢鲲的墓志,还能见到用的仍是这样的字体。这种字体应当说都是隶,因为其形式自秦到汉,虽有些变化,但并不太大。从字形的面积上讲∶先带长方,后变方扁,有些地方还交叉互用着。长波、短波,也同样是交叉互用不分前后的。因此决不能说它是一种字体彻底变为另一种字体的新旧二体,而是一种字体在前前后后中间的个别量变罢了。

起源编辑

秦始皇在“书同文”的过程中,命令李斯创立小篆后,又采纳了程邈整理的隶书。汉朝许慎[2]  在《说文解字》记录了这段赢政统一文字后,汉朝复兴和发掘传统文字的历史:“……秦烧经书,涤荡旧典,大发吏卒,兴役戍,官狱职务繁,初为隶书,以趣约易,而古文由此绝矣”。“孝宣皇帝时,召通《仓颉》读者,张敞从受之。凉州刺史杜业,沛人爰礼,讲学大夫秦近,亦能言之。孝平皇帝时,征礼等百余人,令说文字未央廷中,以礼为小 学元士。黄门侍郎扬雄,采以作《训纂篇》。凡《仓颉》以下十四篇,凡五千三百四十字,群书所载,略存之矣……郡国亦往往于山川得鼎彝,其铭即前代之古文, 皆自相似。虽叵复见远流,其详可得略说也……盖文字者…前人所以垂后,后人所以识古。故曰:本立而道生。知天下之至赜而不可乱也”。但是也有人认为,作为官方文字的小篆书写速度较慢,而隶书化圆转为方折,提高了书写效率。例如郭沫若用「秦始皇改革文字的更大功绩,是在采用了隶书」来评价其重要性(《奴隶制时代·古代文字之辩证的发展》)。[2] 
隶书也叫“隶字”、“古书”。是在篆书基础上,为适应书写便捷的需要产生的字体。就小篆加以简化,又把小篆匀圆的线条变成平直方正的笔画,便于书写。是在监狱里创造出来的字体。分“秦隶”(也叫“古隶”)和“汉隶”(也叫“今隶”),隶书的出现,是古代文字与书法的一大变革。
隶书是汉字中常见的一种庄重的字体,书写效果略微宽扁,横画长而直画短,讲究“蚕头燕尾”、“一波三折”。它起源于秦朝,在东汉时期达到顶峰,书法界有“汉隶唐楷”之称。也有说法称隶书起源于战国时期。
隶书是相对于篆书而言的,隶书之名源于东汉。隶书的出现是中国文字的又一次大改革,使中国的书法艺术进入了一个新的境界,是汉字演变史上的一个转折点,奠定了楷书的基础。隶书结体扁平、工整、精巧。到东汉时,撇、捺、点等画美化为向上挑起,轻重顿挫富有变化,具有书法艺术美。风格也趋多样化,极具艺术欣赏的价值。
隶书相传为秦末程邈在狱中所整理,去繁就简,字形变圆为方,笔划改曲为直。改“连笔”为“断笔”,从线条向笔划,更便于书写。“隶人”不是囚犯,而指“胥吏”,即掌管文书的小官吏,所以在古代隶书被叫做“佐书”。书体同时派生出草书楷书行书各书体,为艺术奠定基础。
隶书基本是由篆书演化来的,主要将篆书圆转的笔划改为方折,因为在木简上用漆写字很难画出圆转的笔划,所以隶书的书写速度更快。

流变编辑

过去一般相信隶书[3]  之由来为“奏事繁多,篆字难成,即令隶人佐书,曰隶字”。但指出“隶”字亦有“附属”的含意,可能意旨其为篆字之衍生。

秦隶

秦始皇在“书同文”的过程中,命令李斯创立小篆后,也采纳了程邈整理的隶书。汉朝的许慎在《说文解字》记录了这段历史:“……秦烧经书,涤荡旧典,大发吏卒,兴役戍,官狱职务繁,初为隶书,以趋约易”。由于作为官方文字的小篆书写速度较慢,而隶书化圆转为方折,提高了书写效率。郭沫若用“秦始皇改革文字的更大功绩,是在采用了隶书”来评价其重要性(《奴隶制时代·古代文字之辩正的发展》)

汉隶

西汉初期仍然沿用秦隶的风格,到新莽时期开始产生重大的变化,产生了点画的波尾的写法。到东汉时期,隶书产生了众多风格,并留下大量石刻。《张迁碑》、《曹全碑》是这一时期的代表作。
汉隶在笔画上具有波、磔(zhe)之美。所谓"波",指笔画左行如曲波,后楷书中变为撇;所谓"磔"指右行笔画的笔锋开张,形如"燕尾"的捺笔。写长横时,起笔逆 锋切入如"蚕头",中间行笔有波势俯仰,收尾有磔尾。这样,在用笔上,方、圆、藏、露诸法俱备, 笔势飞动,姿态优美。在结构上,有小篆的纵势长方,初变为正方,再变为横势扁方汉隶具有雄阔严整 而又舒展灵动的气度。 隶书对篆书的改革包括笔画和结构两个方面。隶化的方法有变圆为方。变曲为直。调正笔画断连。 省减笔画结构等等。其中以横向取势和保留毛笔书写自然状态两面点最为重要。横向取势能左右发笔,上下运动受到制约。最终形成左掠右挑的八分笔法。而毛笔的柔软性以使汉字笔画产生了粗细方圆。藏 露等各种变化。还有字距宽。行距窄也是其章法上的一大特点。
汉隶表现在帛画、漆器、画像、铀镜中精美绝伦。而在碑刻中更显其宽博的气势和独特的韵味。汉隶主要有两大存在形式:石刻与简牍。魏晋南北朝隶书大多杂以楷书笔法;唐朝隶书不乏徐浩等书家。宋元明三朝的隶书也难振汉隶雄风。直至清朝。汉隶才得以复苏。有余农、邓石如何绍基等,别有建树。
隶书的第二次高峰
魏晋以后的书法,草书行书楷书迅速形成和发展,隶书虽然没有被废弃,但变化不多而出现了一个较长的沉寂期。到了清代,在碑学复兴浪潮中隶书再度受到重视,出现了郑燮金农等著名书法家,在继承汉隶的基础上加以创新。

相关名词编辑

发展史编辑

隶书者,篆之捷也。
这是西晋·卫恒《四体书势》对隶书本体及其产生背景的经典叙述。事实上,篆之捷是指在春秋战国时期的篆书字体体系中发生结构和书写性变化(隶变),并经漫长的“隶变”过程而形成的一种新的相对独立的字体。也就是说,隶书是通过“隶变”从篆书字体中脱胎产生的。
隶变在中国书法史上是一次重大的书法文化事件。发生隶变的内在动因是为了适应当时社会发展对文字应用的要求。“隶变主要表现在两个方面:一是字形结构的变化,既是对正体篆书字形结构的改造,这种改造的主要方向是简化;二是书写方式的变化,既是改变原有正体篆书的书写方式,这种改变的主要目的是简捷流便”。字形结构的简化和书写方式的简捷流便构成了隶变过程的核心内容。在这里,字形结构的简化和书写方式的简捷流便,不光为了书写速度的提高,同时因其蕴涵着内在的书写运动态势更加符合人的生理运动轨迹,才使隶书在秦汉之交随着政治的更替最终彻底代替篆书而获得普遍应用的。
就书法而言,隶变完成了以下篆隶转换:1、摆脱篆书字型结构的凝固化束搏而走向隶书线条时空运动的抽象化表现; 2、线条由篆书委婉的弧笔变为险峻的直笔,曲折处由篆书的联绵圆转变为转折的方笔。隶变标志着汉字相形性的破坏和抽象符号的确立,使汉字由古文字体系向今文字体系转换;同时也标志着隶书的独立品格和美学特征的最终形成。
另一方面,作为人的规范意识,又必须对这种新的字体和书体加以规范。于是,就有了汉末高度规范的八分书出现。所以我们说,所谓的隶变过程,就是篆之捷所产生的新的书体继而对这种新的书体加以规范建构的过程。而作为书法,隶书的美就存在于这历时四百多年的隶变过程中。
解读隶书的美学内涵和产生背景是非常有必要的,这有助于我们对隶书本体的深层认知。通常,我们是从现存的汉碑和简牍两种载体来认识隶书的。但是,通过汉碑和简牍两种载体来认识隶书还远远不够。因为这样还无法认识隶书美学内涵的形成渊源。因此,我们要将四百多年的隶变过程置放在秦汉文化背景中去解读,探求出隶书美形成的文化和思想渊源。也只有这样,我们才算了解了一些隶书的传统。
在两汉,隶书不但通过隶变过程最终形成自己的独立品格和美学特征,同时还有着向草率和规范两极方向发展的整体趋势。一方面,隶书在过分强调书写便利的极端中逐步脱离了隶书的原本实用立场,进而在持续草化过程中因书写的运动态势不同最终形成了我们所说的章草今草;另一方面,则表现出对隶书原本书写形态的规范建构,而且这种规范建构是以形式秩序确立为前提的。因为文字的形式秩序的稳定与否,直接影响到民族文化交流的畅通和社会进步。这是历来被官方重视的重要环节。因此,随着西、东汉王权的相继确立,对现实生活中广泛流通的隶书进行规范整理也就成为必然。八分书以规范为手段,有效的克服了篆之捷隶书的随意性书写倾向,使形式秩序趋向于稳固的位置选择和有序的结构图式。加上汉代官方文人审美观念的不断容入,最终形成了八分书规范、和谐、静穆、左撇右挑的风格特征。两汉刻石存在的从西汉的质朴率真向东汉工稳规范化发展的整体趋势,也从一方面印证了官方对篆之捷隶书进行规范建构的历史进程。
然而,当今学界和书法界普遍把两汉刻石方面的逐步工稳规范的发展趋势认定为隶书走向成熟的标志了。这样做不但牵强,也为隶书的本体理论阐释带来困难。这是因为:一、八分书对隶书的改造是以美术规范化和线条装饰化为前提的。不但不具备书写的随意性与合理性,反而增加书写的难度,失去了隶书书写简捷流便的原本实用立场;二、从八分书的书写主体来看,已经由隶书的原本社会公众立场上移到了文人和官方了。我们从、《乙瑛碑》、《礼器碑》《华山碑》、《曹全碑》、《张迁碑》等刻石文本可以看到八分书已经开始具有雅化、规范化和文人化的艺术特征。这些书法文本有着一个大致相同的特征,那就是波蹀。其实这种波蹀是对篆之捷原本隶书书写的美化。飞动的线条和波蹀已经使刻石隶书脱离了隶书原本的简单和质朴,而开始具有雅化、和文人化的艺术特征,是汉代文人那种浪漫、潇洒的艺术审美精神的体现。而正是这种雅化、规范化和文人化的艺术特征,却失去了隶书在社会广泛流通的内在条件和社会基础,因而也就不应该属于原本意义上的隶书。事实上,隶书表现在刻石方面的逐步工稳规范的发展趋势,它的实质是八分书对篆之捷原本隶书实施规范和审美改造的双重结果。《熹平石经》以其高度规范的形式秩序、以及构造的共同原则和形体的共同特点,体现出八分书最大程度的稳定性品格。如果从文字学角度讲,八分书应该成为一种新的、相对独立的字体的。所以我们说,隶书从西汉的质朴率真向东汉工稳规范化发展的整体趋势并不完全是隶书走向成熟的标志,它更多的是孕育着一种新的字体的产生。八分书由于自身的本质特性和使用立场,脱离篆之捷原本隶书书写主流向更加规范的方向发展也就成为必然。《熹平石经》的书体特征和内容也佐证了八分书作为东汉规范字体的使用局限性。
所以我们说,隶书独立品格和美学特征的形成,不是东汉的高度规范和成熟,而是存在于四百多年的隶变过程中。在这四百多年的隶变过程中,有着实在太多的书法文本需要我们加以解读和认知。《张迁碑》的质朴奔放、浑厚博大,《曹全碑》典雅华美、俊秀温润,使我们看到了不同风格、不同结体和不同审美取向的东汉经典刻石文本书法。这是东汉正大的文化气象和文人认识自然征服自然的自信的书写流露。特别是《石门颂》潇洒自如的波挑,体现着文人回归大自然书写的开放情怀,加上民间工匠的契刻,又为《石门颂》置入了民间的质朴意味,铸就了《石门颂》既有原本隶书的质朴随意,又有人文情怀流露的独特艺术魅力,显示出《石门颂》不拘一格的奔放品格、以及阔大的自然气象,成为历代书家关注和借鉴的经典范本。
然而,东汉刻石所表现出的典雅、华美、庄重、整饬只是一种完整的、华丽的美。如果没有原始隶书的质朴和简淡元素灌注其中,那么这种美又是虚伪的、造作的、没有感情的。如果东汉刻石典雅、华美、庄重、整饬的基础上置入隶书原本的奔放、流畅、阔大的审美气象,那么书法就会有一种大自然的淳朴和广阔气象。而这种美才是更接近生命本真的美。因为隶变过程中的很多随意性书写看似很朴拙、很简淡、很平凡,而实际上却蕴涵着无穷的美学价值,是人的生命系统中的真实流露。
认识是继承的前提。所以,发掘两汉隶书的美学实质及其背后所含盖的文化与精神内涵是我们持续关心的内容。同时,它也应该是我们完成隶书的时代性突破和发展的前提和理论支点。
我们没必要谈所谓的创新,深入的认识隶书传统更有现实意义。只要我们认识并理解了一些隶书的传统,并完成隶书的传统和现代的纽带式连接,那么我们才有可能创造出既古典又现代的隶书作品。在这里所谓的古典就是隶书的发展延续形态,所谓的现代,就是隶书的现代审美意识和文化精神。古典——现代具有全息重演的内容,但还不完全是周俊杰先生所倡导的新古典主义。因此,我所说的古典和现代,具有把古典放在新的时空匡架进行梳理归类和时代诠释的意识。它可能是反传统的,因为我们是站在时代立场审视传统。它也可能是继承传统的,因为传统在影响着我们。
变体隶书,又叫隶变体。是当代书法流行的隶书风格,是针对传统隶书而言的书写注重变化,注重个性的书写方式。笔画不重规范,强调即兴创作。 但隶书大家范笑歌认为变体隶书要变得美才是目的,而不是越变越丑。如果大家都追求写变体隶书,那变体隶书也会出现程式化。他认为有的变体隶书只追求大感觉和大效果,在单个字和单个笔画上无法经得起推敲。往往是用大气势掩盖基本功的不足。
除了发展之外,隶书曾对魏碑楷书产生过影响,此以《张猛龙碑》为例,字上还有一些隶书精神。唐欧阳询亦受影响。颜真卿《多宝塔》也有隶书精神并逐渐被人继承。

艺术价值编辑

隶书相传为秦未程邈在狱中所整理,去繁就简,字形变圆为方,笔划改曲为直,字形优美,扁而较宽。官吏,所以在古代,隶书被叫做“佐书” 。

八分隶书编辑

刘熙载《艺概·书概》曰:“隶于八分之先后同异,辨而愈晦,其失皆坐狭隶而宽分。夫隶体有古于八分者,故秦权上字为隶;.有不及八分之古者,故幢、王正书亦为隶。盖隶其通名,而八分统矣。锤可谓之铁,铁不可谓之称锤。从事隶与八分者,盎先审此。:
八分书‘分’字,有分数之分,如(书苑》所引蔡文姬论八分之言是也;有分别之分,如《说文》之解‘八’字是也。自来论八分者,不能外此两意。
《书苑》引蔡文姬言:‘割程隶字八分取二分,割李篆字二分取八分,于是为八分书。’此盖以‘分’字作分数解也。然信如割取之说,虽使八分隶二分篆,其体犹古于他隶,况篆八隶二,不俨然篆矣乎?是可知言之不出于文姬矣。
凡隶书中皆暗包篆体,欲以分数论分者,当先问程隶是几分书。虽程隶世已无传,然以汉隶逆推之,当必不如(阁帖》中所谓程邀书直是正书也。
王谙云:‘次仲始以古书方广少波势,建初中以隶草作楷法,字方八分,言有模楷。’吾邱衍《学古编》云:‘八分者,汉隶之未有挑法者也。比秦隶则易识,比汉隶则微似篆,若用篆笔作汉隶字,即得之矣。’波势与篆笔,两意难合。洪氏《释隶》言:‘汉字有八分有隶,其学中绝,不可分别。’非中绝也,汉人本无成说也。
王谙所谓‘字方八分’者,盖字比于八之分也。《说文》:‘八,别也。像分别相背之形。’此虽非为八分言之,而八分之意法具矣。
《开通褒斜道石刻》,隶之古也;《祀三公山碑》,篆之变也。《延光残碑》、(夏承碑》、吴(天发神俄碑》,差可附于八分篆二分隶之说,然必以此等为八分,则八分少矣。或日鸿都《石经》乃八分体也。
以参合篆体为八分,此后人亢而上之之言也。以有波势为八分,觉于始制八分情事差近。.
由大篆而小篆,由小篆而隶,皆是浸趋简捷,独隶之于八分不然。萧子良谓‘王次仲饰隶为八分’,‘饰’字有整伤矜严之意。
卫恒《书势》言‘隶书者篆之捷’,即继之日:‘上谷王次仲始作楷法。’楷法实即八分,而初未明言。直至叙梁鹊弟子毛宏,始云:‘今八分皆宏法。’可知前此虽有分书,终嫌字少,非出于假借,则易穷于用,至宏乃益之,使成大备耳。
卫恒言‘王次仲始作楷法’指八分也。隶书简省篆法,取便徒隶,其后从流下而忘反,俗陋日甚。譬之于乐,中声以降,五降之后不容弹。故八分者,隶之节也。八分所重在字画有常,勿使增减迁就,上乱古而下人俗,则楷法于是焉在,非徒以波势一端示别矣。
锺繇谓‘八分书为章程书’。章程,大抵以其字之合于功令而言耳。汉律以六体试学童,隶书与焉。吏民上书,字或不正,辄举幼。是知一代之书,必有章程。章程既明,则但有正体而无俗体。其实汉所谓正体,不必如秦;秦所谓正体,不必如周。后世之所谓正体,由古人观之,未必非俗体也。然俗而久,则为正矣。后世欲识汉分孰合功令,亦惟取其书占三从二而已。
小篆,秦篆也;八分,汉隶也。秦无小篆之名,汉无八分之名,名之者皆后人也。后人以摘篆为大,故小秦篆;以正书为隶,故八分汉隶耳。
书之有隶,生于篆,如音之有微,生于宫。故篆取力舜气长,隶取势险节短,盖运笔与奋笔之辨也。
隶形与篆相反,隶意却要与篆相用。以峭激蕴纤余,以倔强寓款婉,斯征品量。不然,如抚剑疾视,适足以见其无能为耳。
蔡邕作飞白,王僧虔云:‘飞白,八分之轻者。’卫恒作散隶,韦续谓‘迹同飞白’。顾曰‘飞’、曰‘白’、曰‘散’,其法不惟用之分隶。此如垂露、悬针,皆是篆法,他书亦恒用之。
分数不必用以论分,而可借以论书。汉隶既可当小篆之八分书,是小篆亦大篆之八分书,正书亦汉隶之八分书也。然正书自顾野王本《说文》以作(玉篇》,字体间有严于隶者,其分数未易定之。
未有正书之前,八分但名为隶,既有正书以后,隶不得不名八分。名八分者,所以别于今隶也。欧阳(集古录》于汉曰‘隶’,于唐曰‘八分’。论者不察其言外微旨,则讥其误也亦宜。
汉《杨震碑》隶体略与后世正书相近,若吴《衡阳太守葛府君碑》则直是正书,故评者疑之。然锤舔正书已在《葛碑》之前,繇之死在魏太和四年,其时吴犹未以长沙西部为衡阳郡也。
唐太宗御撰《王羲之传》曰:’‘善隶书,为舍今之冠。’或疑羲之未有分隶,其实自唐以前皆称楷字为隶,如东魏(大觉寺碑》题曰:‘隶书’是也。郭忠恕云:‘八分破而隶书出。’此语可引作《羲之传》注。
正书虽统称今隶,而途径有别。波碟少而钩角隐。近篆者也;波碟大而钩角显,近分者也。”
按语:汉隶是我国两汉书法艺术的象征。大致风格有工稳端庄类,如《西岳华山庙碑》、《礼器碑》、《史晨碑》、《乙瑛碑》、《韩仁铭》、《熹平石经残石》;方劲古朴类,如《张迁碑》、《鲜于磺碑》、《西狭颂》、《校官碑》;秀丽飘逸类,如《曹全碑》、《孔宙碑》、《刘熊碑》、《赵宽碑》;方劲古朴类,如《张迁碑》、《鲜于横碑》、《西狭颂》、《校官碑》;宽博厚重类,如《衡方碑》、《鲁峻碑》、《封龙山颂》;雄放态肆类,如《石门颂》、《杨淮表记》、《夏承碑》;古拙雄浑类,如《郁君开通褒料道刻石》、《装岑纪功碑》、《郁阁颂》。[4] 

结构特点编辑

隶书是从篆书发展而来的,隶书是篆书的化繁为简,化圆为方,化弧为直。
(一)隶书的结构特点
1字形扁方左右分展
隶字一反篆字纵向取势的常态,而改以横向(左右)取势,造成字形尚扁方,笔画收缩纵向笔势而强化横向分展。
2.起笔蚕头收笔燕尾
这是隶书用笔上的典型特征,特别是隶字中的主笔横、捺画几乎都用此法。所谓“起笔蚕头”,即在起笔藏(逆)锋的用笔过程中,同时将起笔过程所形成的笔画外形写成一种近似蚕头的形状。“收笔燕尾”,即在收笔处按笔后向右上方斜向挑笔出锋。
3.化圆为方化弧为直
这是隶书简化篆书的两条基本路子。不过如果不了解篆书的圆,就不易掌握好隶书的方。因为隶笔中的直画或方折,还无不包藏着篆字的弧势,所以隶笔的直往往有明显的波动性,富于生命力。实际上隶书的笔意,是建立在笔画运动方式基础上的。
4.变画为点变连为断
我们知道篆字不用点,即使用点也只是一种浑圆点。而隶书中点已独立了出来,不再依附于画,而且点法也日益丰富,有平点、竖点、左右点、三连点(水旁)、四连点(火旁)等等。
此外,隶书还将篆字中许多一笔盘旋连绵写成的笔画断开来写,大开了书写的方便之门,后来楷书更发挥了这种方式,更允许笔与笔间出现衔接痕迹,甚至笔断意连。
5。强化提按粗细变化
写篆书时用笔的纵向提按要求不现痕迹,而隶书则有意强调提按动作,形成笔画轨迹显著的粗细、转承变化,起、行、收用笔的三过程都有了明确的体现。这与后来的楷书已很相近。[2] 

点画写法编辑

隶书点画的写法于篆书有明显的不同,篆书的点画可概括为点、直、弧3种,而发展到隶书已经具备了永字八法中的8种笔画。在用笔上,篆书多为圆笔,而隶书已有方圆并用之笔,并且笔画有了粗细变化。
隶书的点有中点、上点、左点、右点和横点的不同。中点的写法是落笔后,提笔逆锋向上,转笔回锋向右,顿笔向下,继回笔收锋于点内。隶书的点与篆书的点不同的是,已有倚侧的变化。上点的写法略同中点,只是末笔不向点内回笔收锋,而想向下渐提出锋。左点和右点及横点的写法与上点的写法相同,但起步的位置和出锋的方向各不相同。
隶书中的左下挑、右下挑的写法与左点、右点写法相似,不同处是末笔出锋较长。
隶书竖的写法于篆书相同。
隶书的横有短横和长横两种,短横起笔逆入平出,横末护尾,略似篆书。长横起笔藏锋向上逆入,继之用方笔折下转向右,使之成蚕头的起笔,继而向右行笔,笔稍涩,不可浮滑,至横的三分之二处,按笔带出一向下的波凹,继之提笔稍向上翘出锋,形成雁尾。这一运笔又称为波磔。
捺与长横的写法相似,只是笔势向右下,较横更舒展。
撇的写法,与写左下挑相同,起笔后用过笔向左下行笔,行中略增曲势,至全画三分之二以下处用力顿笔,到画的末端捻笔外旋,略提向左上,回笔收锋于线中。钩的写法有几种,这里只介绍常用的长钩的写法,出锋后不提而是用过笔向下行笔,行至竖下端再依次蹲笔、挫笔、顿笔向左画近似水平的圆弧,至弧末提笔出锋。
另外,隶书的书写还应注意以下几点。如一字中有数横相迭时,一般是最末一横写成带蚕头雁尾其余都是短横。如一字中既有长横又有长捺,一般是长捺用蚕头燕尾,长横不用,如“大”的写法就是。如横在别的笔画包围之中,横的写法也不用蚕头燕尾。就是说,蚕头燕尾在一个字中只能出现一次,否则就会影响字的美观,所以前人说“蚕无二色,燕不双飞”。

创作要点编辑

1、要取法汉碑和秦汉竹木简。所谓取法,就是认真刻苦地解读、体会,而不是浮光掠影。少看当代人的作品,看当代人的作品要看出其缺点和不足。
2、恰当把握主体的创作状态。“书写性”其实就是将书写过程和创作情绪纸面化。行笔重复,会形成惯性。由生到熟,要避熟趋生。
3、正确对待风格问题。风格是自然生成的,不能一概而论。风格面貌不强,不必耿耿于怀;已经形成风格面貌的,也不必沾沾自喜或故意回避。[5] 

隶书名家编辑

清代金石考据学的兴起,结束了“帖学”近千年的统治地位,给靡弱的书坛注入了新的活力,书法史揭开了新的篇章,进入了以篆隶为主流书体的时代。三百年的清代隶书创作,名家辈出,人才济济,是汉之后的又一高峰,其中一郑簠,金农,邓石如,伊秉绶为代表。
郑簠(1622----1693)字汝器,号谷口,江苏南京人。行医为业,终生不仕。少时便矢志研习隶书,初学明末书法家宋比玉,一学就是二十年,至中年有所悟,遂探本求源,遍习汉碑,直至晚年。为访山东,河北汉碑,倾尽家资,收藏汉碑拓片,家藏碑刻拓片有四大橱。孔尚任在<<郑谷口隶书歌>>中道:"汉碑结僻谷口翁,渡江搜访辩真实。碑亭冻雨取枕眠,抉神剔髓叹唧唧“是郑簠爱碑如痴的写照”。
郑簠广习汉碑,<<曹全>>为其基本体势与风貌。在此基础之上,又溶入行草。<<夏承碑>>与其他汉碑的某些特征,晚年形成了奔逸超纵,神采奕扬的隶书艺术风貌,以异军突起之势,竖起碑学复兴的第一面旗帜,是清代三百年隶书创作的第一个高峰。
郑簠的书风与艺术思想,对后来产生了极大影响,尤其对扬州画派的代表人物如高凤翰,金农,高翔,郑板桥的影响,更为直接。可以毫不夸张地说,郑簠的隶书创作,影响了他之后的一个世纪!
金农(1687--1764)字寿门,号冬心,平生别号甚多,达数十种,浙江杭州人,博学多才。工诗词,精鉴古,富收藏,好游历,著述丰。五十岁时入京考试,未中,遂绝意仕途。居扬州地区,卖画为生。金农以布衣雄世。无论从认识的深度和作品的气格与高度,以及学问的广度与厚度等几诸多方面都是时代的佼佼者,扬州画派各家都无法与其相比,因此,金农是扬州八家中的杰出代表,也是中国艺术史的重要人物。金农隶书风格,沉稳果敢,奇崛憨直,隐约有《华山碑》与《天发神谶碑》,《衡方碑》,《夏承碑》,郑簠的影子。这种影子又不是那么的明显与突出,这是金农的过人之处。他一方面是好古痴古之士,仿佛是生活在清代的一个汉人,另一方面,又是一个具有强烈自我意识,近乎自负与自恋情结者。二者的结合,使其作品达到了无一笔不是汉人,无一笔不是自己的境界与高度。他的超前审美与定位,时人言其怪,也是情理之中的事。杨守敬说:“冬心分隶,不受前人束缚,自辟蹊径,然以为后学师范,或堕魔道”。对于一些徒师其形,东施效颦者来说,此话确为灼见。尤其是具有强烈个性特征的作品,更是这样,但是,我们也应看到,对齐白石艺术精神与风貌产生影响的书画家中,相比八大和吴昌硕而言,金农更加深刻,秉性与金农更契合。在艺术取向方面增加一些民间艺术成分和世俗化的关照。因此,善学者夺人魂魄,庸史仅学表皮,学我者生,似我者死。这是金农艺术给后人的启示。
邓石如(1743----1805)初名琰,字石如,因避仁宗琰讳,遂以字行,改字顽伯,号完白山人,安徽怀宁人。他出身寒门,九岁便辍学谋生,后经梁闻山介绍,结识大收藏家梅,在梅家居住八年之久,期间,尽读所藏秦汉碑拓,金石瓦当等,心摹手追,笃志临习,每日早起,研磨盈盘,至夜晚墨尽始寝,寒暑无间,梅府八年,给邓石如艺术打下了坚实基础,是其艺术历程的重要时期,后至京师,得大学士刘墉赏识,声名益振。其书兼善各体,隶书成就最大,作品结体严整,具金石气,篆刻刀法苍劲浑朴,成就斐然,影响甚广。
就书法功力而言,邓石如是清代书家中用功最勤者,笔能扛鼎.章法结字也很完善,然而由于学养和艺术天分的限制,其作品中不免流露出一些匠气和黑、大、光、亮时弊的痕迹。隶书面貌更多的是唐人气息.在汉人的精神把握上,不如其他诸家,种种缺憾,其作品不能说是高格,乃功力型书家,形而下的上品。
邓石如一生的经历告诉我们,他是中国书法史中第一个真正意义上的职业书法家。
伊秉绶(1754-1815),字组似,号墨卿、默庵。福建汀州宁化人,乾隆五十四年进士。授刑部主事。迁员外郎,曾为广东惠州知府、扬州知府,喜绘画、治印、工诗文。著有《留春草堂诗抄》。
伊秉绶的隶书给人如对高山,如仰大贤的感觉,其面貌可用正、大、简、拙四字概括。“正”即正格。一方面是隶书创作发展史的正脉与主流风尚,同时也有人格精神层面的因素。从伊氏的作品中,我们可以看到颜真卿精神、风格面貌的隶书再现。人格的力量支撑着他的艺术风貌,磅礴壮严庙堂气的背后是一个磊落善政的廉史,书格即人格在其身上得到了最佳诠释。“大”不仅指作品体积,更多是指作者的气格与气象。“简”是伊氏书法的明显标志,也是他自觉的审美追求,结体方正,分布均匀,用笔平铺直叙,淡化了波挑,蚕头燕尾等等一些隶书的装饰用笔特征。作品给人以明朗、直截的印象。单纯而不单调,笔简而意足,这是伊氏的能耐。一种提纲挈领,以简驭繁的能耐。他的标志还体现一个“拙”字,用“成拙方为巧,入愚始见奇”这句话对应伊氏艺术再恰当不过了。这是艺术高层面的审美境界。

临摹范本编辑

1、《曹全碑
2、《张迁碑
3、《史晨碑
4、《礼器碑
5、《乙瑛碑
6、《石门颂
7、《西狭颂
8、《华山庙碑
9、《鲜于璜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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