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바로잡는 것… 인재를 키워 중심 잡는 ‘21세기 정조’ 뽑아라” 《 역사를 돌아보면 임진년엔 외국과의 전쟁이나 분쟁이 잦았다. 하지만 총선과 대선을 앞둔 2012년 임진년의 한국 사회는 정치 경제적인 분열의 양상이 ‘임진내란’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경세학(經世學) 연구서를 통해 이상적인 국가 지도자상을 제시했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에게 분열된 국론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려면 어떤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지, 새로운 지도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18∼19세기 조선시대사 전공자로 제왕학의 관점에서 다산과 정조를 연구해온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가 다산이 남긴 여러 글에서 답을 찾았다. 》 ○ 지도자의 마음 가짐은? ‘위국애민’ 통치 목표로 삼아야 다산이 생각한 국가 지도자 모델은 정조였다. 200년 전 다산의 소망이 이뤄질 수 있을지는 지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왼쪽은 정조 영정. 동아일보DB
다산은 ‘신아구방(新我舊邦·묵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함)’이라 하여 국가의 전면적 개혁을 꿈꿨다. 그의 이상적인 국가 지도자상 역시 개혁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 기반엔 ‘위국애민(爲國愛民)’ 이 있었다.
“전 삭녕(현 강원 철원군과 경기 연천군 일대)군수 강명길은 탐욕이 넘치고 인색함이 심한 자입니다. 백성의 소송과 관청 업무는 뒷전이고, 식비와 녹봉을 후려쳐 차지하고 멋대로 거둬들였습니다. 향청(鄕廳·조선의 지방자치기관)의 임원은 뇌물 바치는 문을 항상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의 짐 꾸러미가 너무 무거워 나룻배로 실어 나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1794년 다산이 정조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경기도에는 지독한 흉년이 들었고, 백성의 먹을거리를 걱정한 정조는 다산을 암행어사로 파견했다. 다산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부평부사로 부임해 있던 강명길을 즉시 파직했다. 정치의 목적도 위국애민이었다. 다산은 “정치(政)란 바로잡는 것(正)”이라고 풀이했다. 토지를 개량해 백성에게 고루 나눠주고, 유통을 원활히 해 물자를 통하게 하며, 군대를 조직해 죄 있는 자를 성토하고, 멸망할 위기에 있는 사람을 구제하는 게 모두 정치라고 했다. 또 백성의 고혈을 짜내 관리들의 배를 채우는 현실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위국애민을 달성하지 못하는 지도자라면 현직에서 바로 물러나야 한다”고 일갈했다. ○ 지도자가 인재 쓸 땐 실적 상세히 평가 후 인사 반영 다산은 올바른 지도자라면 인재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친위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립하고 초급 관리의 재교육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초계문신(抄啓文臣)제’ 를 운영했다. 다산은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됐기에 훌륭한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훗날 다산이 유배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방대한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규장각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관리의 등용과 업적을 엄격히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대부가 귀하게 되려는 욕구(貴欲)와 서민이 부자가 되려는 욕구(富欲)를 함께 충족시켜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봤다. 사람을 등용하는 일이 공정하지 못하면 좋은 사대부가 떠날 것이고, 재정을 모으는 일에 절제가 없으면 서민이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파, 가문, 출신 지역 등을 따지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해 적재적소에 활용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제안했다. 특히 다산은 실적의 평가를 중시했다. 태평시대라 불리던 요순 정치의 핵심이 ‘고적(考績·인사 고과)’에 있다고 봤다. 다산은 실적을 보고하는 단계와 보고한 실적을 평가하는 단계를 구분했다. 보고는 말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직접 보고하면 거짓으로 얼굴빛을 꾸밀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위정자의 고과는 매해 6월 말과 12월 말 여덟 글자의 서술로 하는 게 관례였다. 다산은 “이 방식이 너무 간략해 제대로 평가할 수 없으니 평가 조목을 세분하고 업적을 상세하게 서술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관은 실적을 9개 강령, 54개 조목으로 나눠 보고하고, 평가는 9등급으로 나눠 진행하라고 제안했다. 이 같은 평가항목은 ‘경세유표’와 ‘목민심서’에 최종적으로 정리돼 있다. 다산은 “지도자는 반드시 정확한 자료에 근거해 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 역시 이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황해 곡산 부사 시절 백성에게 군포를 거둘 때는 관아에서 사용하던 자를 버리고 국가에서 규정한 자를 새로 만들어 사용했다. 자의 길이를 늘려 잉여분을 착복하려던 서리의 농간을 막기 위해서였다. 호적도 새로 작성했다. 노련한 사람을 선발해 관할구역 내의 인구와 재산, 가옥, 우마(牛馬), 부역 상황을 조사하고 조사된 내용을 총괄하는 표로 만들어 관내 상황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이후로 통계에 변화가 있으면 직접 표를 수정했고, 관아에서는 이 통계에 근거해 세금을 거뒀다. ○ 지도자가 판단할 땐 여러사람 의견 들을 줄 알아야 다산이 생각한 국가 지도자 모델은 정조였다. 다산은 정조에게서 학문뿐 아니라 위정자로서의 지도력도 함께 배웠다. 정조는 다산을 암행어사로 보낼 때 여러 명의 암행어사를 함께 파견했다. 한 사람이 판단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암행어사들이 복귀하면 정조는 대신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감찰 결과를 보고받았다. 대신들의 견해를 두루 들은 뒤 최종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정조는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여러 사람에게 해결 방안을 물었다. 관련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다산의 개혁가적 면모가 가장 잘 나타난 글로 알려진 책문(策文) 역시 정조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된 것이다. 하지만 최종 판단은 정조의 몫이었다. 정조는 선입견 없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 후 중심을 잡고 결론을 내리는 지도력을 보여줬다. 이는 다산이 기대하는 지도자상이었다. 정계에서 밀려난 후 다산은 정조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오기를 기대하며 경세학 저술에 매달렸다. 하지만 다산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200년 전 다산이 기대했던 국가 지도자가 21세기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이제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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