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인 말 쓰기를 좋아하는 일본에는 재미있는 줄인 말이 한 둘이 아닙니다. ‘베르바라’도 그 중 하나입니다. 베르바라는 ‘베르사이유의 바라’를 줄인 말입니다. 바라는 장미입니다. ‘베르사이유의 바라’는 원래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라는 만화가가 그린 소녀 취향의 만화 제목입니다. 내용은 프랑스 혁명기에 베르사이유 궁전을 무대로 남장미인 오스칼과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이야기를 픽션화한 것인데 이것이 일본의 국민가극단인 다카라즈카(高塚) 가극단에서 뮤지컬로 공연을 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됐습니다.
이 가극단은 십대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극단으로 화려한 무대와 현란한 춤 그리고 노래로 유명합니다. ‘베르사이유의 바라’는 1974년에 뮤지컬로 각색돼 공연된 이래 40년 넘게 롱런하면서 일본국민 5백만명 이상이 이를 본 것으로 전합니다. 그리고 뮤지컬 성공으로 인해 거꾸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고 영화판까지 제작되면서 베르바라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츠오 미술관 전경
그래서 다카라즈카 가극단하면 이 베르바라가 연상될 정도인데 이 가극단을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고베 지역의 철도와 부동산 개발사업으로 이름을 날린 사업가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1873-1957)이고 그의 호를 따지어진 이츠오(逸翁) 미술관의 설립자입니다.
고바야시는 앞서 고토미술관을 소개하면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그는 시부자와 에이치(渋沢栄一 1840-1931)가 도쿄 세타가야구 일대에 전원주택을 개발하면서 그의 수완을 높이 사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는 이대 이미 고베에서 철도와 전원주택 개발에 성공을 거두면서 실업계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이런 수완으로 1940년에 잠시 상공대신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타고난 문학가에 미술 애호가였던 그는 사업에서도 남다른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운이 좋았다기보다 시대 그리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업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사업가적 혜안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사업에 발을 들여다 놓은 출발은 게이오 의숙과 미쓰이 은행에서 시작됩니다. 그의 고향은 일본의 산골지방인 야마나시(山梨)의 니라자키(韮崎)입니다. 하지만 유력 상가(商家)의 출신으로 어린 시절 고생을 모르고 자랐으며 15살에 도쿄로 올라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들어갔습니다. 게이오 시절에는 문학에 심취했는데 이는 이후에 사업가이면서 일면 쉬지 않고 글을 쓰는 극작가, 소설가, 시인으로 활동하는 배경이 됩니다.
게이오는 미쓰이 그룹과 인연이 깊어 게이오 출신들은 미쓰이에 많이 입사했습니다. 그것은 돈노 마스다 다케시(鈍翁 益田孝)와 함께 미쓰이 재벌의 형성기에 큰 역할을 하며 미쓰이 은행, 미쓰이 물산 등의 이사를 지낸 나카미가와 히코지로(中上川彦次郞 1854-1901)가 게이오의 창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조카였던 이유도 있습니다.
개황(開皇)2년명 금동관음병립상 589년(수나라) 노이 18.5cm
어쨌든 게이오를 마치고 미쓰이 은행에 들어가면서 그는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첫 발령은 본점 비서과로, 이곳에 근무하면서 그는 방 하나 건너편에 있던 당시 재계의 거물이자 대컬렉터 돈노(鈍翁)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오사카로 전근을 가는데 오사카 지점장은 나중에 대다인(大茶人)으로 변신하는 다카하시 요시오(高橋義雄)였습니다. 이래저래 미술품 컬렉션 그리고 다도와의 인연이 처음부터 생겨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철도 사업가로의 변신은 미쓰이 은행을 퇴사한 뒤 미노아리마(箕面有馬)전기궤도 주식회사의 설립에 참여하면서부터입니다.(이 회사는 오늘날 오사카, 고베 주변에 뻗어있는 한큐(阪急)전철주식회사의 전신입니다) 미노는 오사카 북쪽에 위치한 명승지이니다. 이곳의 폭포를 일본 수묵화의 거장 셋슈(雪舟 1420-1506경)를 그린 것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이름났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는 온천이 드문 간사이 지방에서 온천물로 이름난 곳입니다. 이 철도는 결국 아리마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다카라즈카까지만 연결됐습니다만 다카라즈카 역시 오카카의 온천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바야시는 이 회사를 맡아 운영하면서 철도의 성공은 승객에 있다고 보고 철도 연변의 땅을 대거 사들여 그곳에 저렴한 전원주택을 대거 지어서 공급했습니다. 신시가지 조성을 처음 시작한 곳이 이케다(池田)입니다. 그는 이 신시가지로 자신의 살림집을 옮겨 살면서 불편한 점의 개선에 노력했습니다. 화력 발전소를 세워 싼 값에 각 가정에 전기를 공급한 것도 그의 이런 생각에서 시작된 사업입니다. 시부자와 에이치가 그를 발탁한 것은 바로 이케다 신시가지 개발, 분양판매의 성공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좀 다른 에피소드인데 시부자와가 다마가와(玉川), 조후(調布) 전원도시를 개발하면서 그의 도움을 청할 때 그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첫째 자신의 이름을 회사에 올리지 않는다 둘째 보수를 받지 않는다 셋째는 일요일에만 출근해 이사회를 진행한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이렇게 철저한 자기 절제의 면이 있었습니다. 이는 다분히 미쓰이 시절에 익히 다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도에 심취하면서 ‘다도는 좁은 다실에서 함께 미술품을 감상하면서 동지적 결합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에서는 철두철미 독립독행(獨立獨行)을 주장하면서 ‘자신을 믿고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행동할 것’을 신념으로 삼았습니다. 또 ‘일반 대중을 원하는 바에 응하라’ 라는 등의 자신만의 사업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다케본(佐竹本) ≪삼십육가선 에마키≫ 중 <후지와라 다카미츠(藤原高光)>
12세기 35.7x59.1cm
그는 철도 연변에 신흥 주택지를 분양 판매했으나 종점에는 이렇다 할 시설이 없는 것을 보고 미노(箕面)에는 일본에서 첫 번째 가는 사립 동물원을 개원했습니다. 그리고 종점인 다카라즈카(高塚)의 온천을 찾아오는 온천객을 위해 이들이 보고 즐길 오락 시설로서 창단한 것이 다카라즈카 가극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가극단을 남녀노소가 모두 보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며 잡스러운 내용은 일체 금지했습니다. 대신 볼거리가 많고 화려하게 만든 가극을 중심으로 이를 운영했는데 이 가극단은 보기좋게 성공했습니다. 전후의 일입니다만 그는 이 가극단을 발판으로 도쿄에 진출했고 또 영화시대를 내다보며 일본 영화의 황금시대를 이끈 도호(東宝) 영화사도 세우게 됩니다.
그는 철도 사업에 있어 여러 면에서 후발주자들의 모델이 됐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인 출발역인 오사카 우메다(梅田)역에 대규모 백화점을 세운 일을 꼽을 수 있습니다. 1920년 세워진 한큐(阪急)백화점은 일본 최초의 터미널 백화점이 됐습니다. 백화점에 미술을 끌어넣은 것 역시 그가 처음 시도한 일입니다. 백화점 미술부를 만들고 도쿄예술학교 출신자를 영입해 당시 유명하던 고바야시 고케이(小林古徑 1881-1957), 마에다 세손(前田靑邨 1885-1977) 등의 전시를 개최했으며 또 백화점 내에 고미술상을 입점시키기도 했습니다.
미술관 설립자 소개가 장황해졌는데 그는 생전에 미술관을 지은 것은 아닙니다. 1957년1월 급성심장성 천식으로 8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술관은 평소 사립미술관 필요성을 역설한 그의 유지를 받들어 그해 10월 이케다의 자택인 아속산장(雅俗山莊)을 미술관으로 등록하면서 설립됐습니다.(현재 아속산방은 그의 기념관과 고급 미술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미술관은 골목 입구에 새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로 이전했습니다)
그는 평생 미술을 사랑하며 약5천점의 미술, 공예품을 수집했습니다. 그중 회화는 1,500점에 이르며 도자기 3,000점 그리고 기타 미술, 공예품 1,500여점으로 돼 있습니다. 회화 가운데는 18세기 화가이자 하이쿠 작가이기도 한 요사 부손(与謝蕪村 1716-1783)과 부손의 제자로 역시 화가이자 하이쿠 작가인 고슌(吳春 1752-1811)의 그림이 다수 수집했습니다.
부손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오쿠노 호소미치(奥の細道) 회권>도 그중 하나입니다. 『오쿠노 호소미치』는 하이카이(俳諧, 에도시대 들어 전통 시가인 와카(和歌)가 골계미 등이 더해진 형식)를 예술적으로 완성시켜 후세에 하이성(俳聖)으로 불린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가 1689년 제자인 가와이 소라(河合曾良)를 데리고 일본 동북 내륙지방을 여행하며 적은 일기입니다.
요사 부손 <오쿠노호소미치 회권>(상권부분)
1779년 , 28.0x1790.3(상권) 28.0x1215.1cm(하권) 색깔 노랗게
‘달과 해는 백대의 과객이요 오고가는 해 또한 나그네이다(月日は百代の過客にして、行きかふ年も又旅人也)’라고 이백의 시구 ‘광음자백대지과객(光陰者百代之過客)’을 인용해 시작하는 이 『오쿠노 호소미치』에는 바쇼의 대표적인 하이쿠가 다수 들어 있어 이후 하이쿠 작가들에게 경전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일본회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8세기를 무대로 활동한 요사 부손은 당시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들어온 중국 남종화를 익혀 남화가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로 하이쿠처럼 상큼하고 여운이 긴 그림인 하이가(俳畵)를 다수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오쿠노 호소미치』를 무척 즐겼는지 생전에 여러 벌의 두루마리를 그렸습니다.
이츠오가 손에 넣은 것은 현재 전하는 부손의 <오쿠노 호소 및> 회권 가운데 가장 늦게 그린 1777년작 입니다. 부손 제자의 아들인 구로야나기 고레고마(黑柳維駒)의 청을 받아 그렸다는 글이 적혀 있으며 아울러 제자인 고슌의 발문이 붙어있기도 합니다.
고슌은 부손에게 그림을 배워 나중에 교토 사조파(四条派)의 시조가 되는데 그의 본성은 마쓰무라(松村)이며 이름은 도요마사(豊昌)입니다. 하이쿠작가로 쓰는 호가 겟게이(月溪)여서 흔히 마쓰무라 겟케이라도 합니다. 고슌의 형제는 모두 그림을 그렸는데 특히 막내 동생 마쓰무라 게이분(松村景文)입니다. 그의 이름은 당시 조선에도 알려져 있는데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가 원앙을 그린 채색 화조화 하나를 보고 ‘하늘 바람과 바다 파도의 흥취가 일어난다’는 식으로 평을 한 그림이 있습니다.
고슌(吳春) <백매도> 병풍 6폭1쌍 18세기 견본담채 175.5x373.5cm
고슌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것이 이곳에 있는 <백매도>입니다. 한 겨울의 달빛 아래에 흰 꽃을 피우고 있는 매화나무를 그린 이 그림은 가지의 섬세한 묘사 위에 에도 시대 최고의 멋으로 쳤던 수수한 색감(しぶい色感)이 그대로 살아있어 일본의 매화 그림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수작입니다. 고슌은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30살 때 부인과 부친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 이케다로 옮겨가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고바야시는 고장출신의 화가인 고슌 작품에 애정을 기울이고 수집했다고 전합니다.
작자미상 <도요토미 히데요시 화고(畵稿)>
17세기 지본채색 53.5x59.5cm
이츠오미술관을 대표하는 또다른 그림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초상의 초고와 교토 삼십삼간당을 무대로 활쏘기 대회를 그린 <삼십삼간당 통시도(三十三間堂 通矢圖)>를 꼽을 수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은 그가 죽은 뒤 여러 벌이 제작됐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이 그림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 배경 없이 정장인 소쿠타이(束帶) 차림을 그렸는데 자세히 보면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부분이 별지에 그려 붙여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에 쓰인 글귀는 ‘이것이 가장 잘 닮았다고 할 수 있도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는 초상화를 그리기에 앞서 닮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그려진 초고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걸작은 교토 삼십삼간당(三十三間堂)의 기둥 사이로 화살을 날려 보내는 이른바 활쏘기 대회를 그린 <삼십삼간당 통시도>입니다. 삼십삼간당은 교토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불당으로 이 불당은 천태종 묘호인(妙法院)의 경외 법당으로 정식 명칭은 렌게오인 본당(蓮花王院 本堂)입니다. 이 불당 안에는 본존인 천수관음 좌상 외에 천개나 되는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천수관음입상 1천1구가 모셔져 있는데 이들은 13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모두가 국보입니다.
작자미상 <삼십삼간당 통시도(三十三間堂 通矢圖)>
6폭1척 17세기 161.5x364.0cm
삼심삼간당은 천구나 되는 천수관음상을 모시기 위해 길게 지어진 건물로 전면이 33칸에 달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삼십삼칸의 길이는 120미터쯤 됩니다. 삼삽삼칸당의 활쏘기는 서쪽 끝의 복도에 서서 동쪽 복도 밖에 놓인 표적까지 활을 통과시켜 맞추는 것입니다. 구전에 의하면 13세기부터 시작됐다고 하지만 정식으로 유행한 것은 17세기초부터라고 합니다. 도오시야(通矢)로 불리는 이 행사는 현재도 매년 한차례씩 열리고 있는데 에도시대 무사들의 실력을 적은 기록에 따르면 성공률은 60%전후랍니다.
이 그림에도 왼쪽 마루 끝에 어깨 한쪽을 드러낸 무사가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오른쪽에 보이는 큰 대문으로 보아 이 대문이 지어진 1600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츠오 역시 이 시대의 다른 사업가들처럼 다도에 심취했습니다. 특히 그는 다도구에 대해 일가견이 있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 오사카 미쓰이 은행에 담보로 들어온 유서 깊은 가문의 차도구를 고바야시 요시오의 지도 아래 그가 몽땅 정리했는데 이때 차도구를 보는 눈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새로운 사업을 속속 전개한 것처럼 다도에서도 전통을 존중하되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 그 역시 이름난 다도 선생에 입문해 기초를 익혔으나 ‘차는 동지적 결의를 재확인하는 즐거움을 위해 마신다’는 신조처럼 그는 다도 예절이나 다도구의 명성 따위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다도구 가운데 메이부츠(名物)로 불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는 유명 다인이 사용했거나 혹은 기록으로 전하는 대차회에 사용된 물건들을 가리킵니다. 이 메이부츠 가운데 대(大)자가 더 붙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흔히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센노리큐(千利休 1552-1591)가 등장하기 이전인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1436-1490)를 중심으로 장군 집안에서 사용했던 도구들을 오오메이부츠(大名物)이라고 합니다. 메이부츠는 센노리큐 시대에 리큐가 사용하면서 좋은 다도구라고 추천한 것들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그의 다음 세대인 에도 전기의 다인이었던 고보리 엔슈(小堀遠州)가 명품이라고 인정한 다도구는 주코메이부츠(中興名物)이라고 구분해 부릅니다.
이도다완 명 노와키(野分) 16세기 높이 10.0cm 구경 15.1cm
메이지 이후 실업가들이 다도에 새삼 관심을 가지면서 옛 다이묘들이 지녔던 메이부츠들이 이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이미 앞서도 소개했습니다. 이츠오에도 이들 메이부츠로 이름 지어진 다도구가 여럿 소장돼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업에 있어 독립독행(獨立獨行)을 주장한 것처럼 차에 있어서도 남의 평가에 따를 필요가 없다고 시대에 맞는 차를 마시면 그만이라고 보다 개방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이에 대해 스스로 이름 붙이길 대승다도(大乘茶道)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명품 다완에 집착하지 않고 유명한 유리 제품 단완도 썼으며 서양도자기도 다완으로 사용을 시도했습니다. 또 다회에 곁들이는 요리에도 가이세키(懐石)요리 대신 돈가스를 먹는 파격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다도쿠 컬렉션은 역시 명물로 인정받았던 것이 다수 들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노와키(野分)라는 명(銘)이 있는 이도다완입니다. 이 다완은 상자에 고보리 엔슈의 셋째 아들인 호세츠(小堀蓬雪)가 명품으로 인정한 글이 적혀 있습니다. (*)
참고
大阪府池田市栄本町12−27
http://www.hankyu-bunka.or.jp/about/itsuo-museum/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