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끼에 의 대가 우다가와 시게요

2016. 2. 23. 16:34美學 이야기



       일본 우끼에 의 대가 우다가와 시게요| 기본 게시판

안정숙 | 2011.06.17. 18:33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廣重

 

1797 -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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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메이도의 매화 정원 - 명소 에도 100경 중에서 (1857)   목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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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히로시게는 1797년 하급 무사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에서는 세습적으로 소방조(불끄는)를 직업으로 삼았다.

당시 하급무사들은 사무라이로서의 일 뿐 아니라

부업을 가져 이를 세습해왔다고 한다.

 

그는 우타가와 도요히로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

주로 배우와 미인도의 판화작업을 했다고 한다.

당시는 주로 가부키 공연의 선전포스터나 팜프렛에 실리는 배우그림이

우키요에의 중요한 작업대상이었을 시절이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1828년 스승이 사망하고 나서는

그는 방향을 돌려 완전히 풍경화에 몰두하게 된다.

이때가 31세 때이니 그가 그린 인물화가 있을만도 한데도

아무리 인터넷을 검색해도 인물화는 한 점도 보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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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교에 내리는 소나기     1857
 
 
모네는 이 그림을 본따서 제베르니에 있는 정원에 일본식 다리를 만들기도 했다
모네는 수련을 많이 그리기도 했지만, 이 다리를 대상으로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1831년 도토 메이쇼 (동도 명소) 10부작 목판화

 1834년 도카이도 고주산쓰기 (동해도 53차)

1856년에는 118점에 달하는 판화시리즈로 메이쇼에도학세키(명소강호백경)

제작하던 중  2년에 거친 작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115점은 본인이 나머지 3점은 제자가 작업하여 완료하였다.

이 판화본은 미국 브루클린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만년의 그는 경제난으로 말미암아 다작을 하는 바람에

다소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은 아무리 낮추어 보아도 일본 미술의 최고봉으로 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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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화에 남겨진 19세기 도쿄의 풍경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廣重)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重廣:1797~1858)

탁월한 재능을 소유한 우키요에(浮世繪) 화가였다.

 

그는 에도(江戶)에서 세습적인 직업으로 불 끄는 소방관 일을 담당했던

하급무사 가문 출신이다.

 

히로시게의 걸작 <명소강호백경(名所江戶百景)>에서

19세기 에도의 풍경 100곳을 엄선하여 제작한

우키요에로 기타가와 호쿠사이(葛路北齋)의 <부악삼십육경(富嶽三十六景)>

비견할 만큼 매우 개성적이고 독특한 작품이다.

 

그는 전통적 일본 그림에서부터 서양의 회화기법까지 두루 익히고

새로 개발된 교토와 나라를 있는 도로를 따라 여행하면서

현실감과 현장사생을 극대화하여 무수한 걸작을 만들어 낸다.

 

히로시게는 자신의 작품이 파리의 문화계와 인상파 화가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막강한 영향을 전해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영원히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우키요에, 에도의 새로운 문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를 통일하고

에도를 수도로 결정했을 때만 해도 에도는 습지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후 100년 동안 에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일본의 다른 어떤 도시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정치, 군사, 경제적 힘을 갖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초창기의 에도는 문화적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에

17세기와 18세기 초에 비단, 칠기, 도자기, 그림과 같이 호화로운 물건들은

주로 오사카를 경유하는 뱃길을 통해 교토에서 수입해야만 했다.

 

이러한 낙후된 문화는

당시 너무 조잡하게 만들어져서 에도에서도 팔릴 수 없는 제품을 일컫는 말로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 볼품없는)’라는 경멸적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에도에서는 하급무사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지던 새로운 양식의 미술,

우키요에가 전통적인 교토미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함과 대량생산 방식에 따른

값싼 수요공급으로 서민들의 애호를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문화 트렌드가 되었다.

여기에는 수도와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의 개설과 그로 인한 빈번한 여행과

물자의 교류로 인한 경제적 여유도 큰 몫을 담당했다.

에도시대에는 무사들이 에도와 그들의 영지를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교토부터 수도 에도까지 두 지역을 잇는 도카이도(東海道) 같은 도로가 발달하였다.

 

그 결과 사무라이 귀족계급뿐 아니라 승려와 일반인들까지 여행이 빈번해 졌다.

산야의 사찰과 신사와 경승지를 순례하는 것이 대중화 되었지만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는 동부의 거대한 수도 에도였다.

 

여행의 증가는 교통 숙박, 식당, 지도, 여행지침서 및

기행문학의 발달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고,

일종의 실경산수화에 대한 대중적 수요를 낳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에도의 많은 출판가들은 관광객에게 더 많은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에도의 중심 니혼바시(日本橋)로부터 주요 간선도로의 교차지역 부근에 있는

도시의 외곽지역으로 가게를 옮기거나 새롭게 지점을 개점했다.

 

오랫동안 에도의 독특한 상품으로 여겨져 왔던 목판화

이 시대에 들어 에도 방문객들을 위한,

비싸지 않지만 훌륭한 기념품으로 점점 시장을 넓혀 갔다.

히로시게 자신이 직접 여행하면서 사생과 인상을 담아 제작한 목판화는

유명한 명승지를 계절과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전통을 활용하여

신사와 사찰, 찻집과 식당, 극장과 가게, 강과 운하 같은

분주한 일상의 모습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히로시게는 지형의 세부를 정확하게 묘사하면서도

특이한 원근법과 계절에 대한 암시, 그리고 뛰어난 색채를 이용하여

각 화면마다 신선함과 함께 따듯한 서정성을 부여했다.

 

호쿠사이가 후지산 연작을 통해 우키요에 발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같이,

에도 경치의 아름다움과 물질적 번영을 찬미했던 히로시게는 에도시민과 여행객,

나아가 유럽의 일본애호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흐가 사랑했던 히로시게의 목판화

히로시게는 말년에 야심찬 <명소강호백경(名所江戶百景)> 판화를 제작하였다.

제목이 시사 하는 바와 같이 이 연작은 에도의 명소를 백군데 정하고 목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히로시게 화력 오십년의 총 결산인 셈이다.

 

이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고흐의 일본그림 모사 원본인

<대교에 내리는 소나기(大はしあたけの夕立) : 아래 6번 그림>

<가메이도의 매화가 있는 찻집(龜戶梅屋鋪) : 3번 그림>가 있다.

 

가메이도 매화그림은 히로시게가 절필하기 1년 전인 1857년 작으로 히로시게 최고의 걸작으로,

원숙한 필치와 대범한 구도, 일본다운 색채는 세대와 지역, 인종을 뛰어넘어 누가보아도 멋있고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1887년 파리, 고흐는 동생 테오의 소개로 알게 된 화방 주인인 쥴리앙 탕기 영감으로부터 건네받은

일본 목판화의 새로운 세계에 매료됐다. 고향 네덜란드의 준데르트나 런던과 헤이그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그림이었다.

 

캔버스나 서양의 두툼한 화지와는 사뭇 다른 얇은 일본종이에 인쇄된 다색목판화인 우키요에

구도의 대담함과 선명한 색감 강렬한 칼라가 한창 그림에 열중인 가난한 고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선한 모델이었다.

 

그 가운데 히로시게의 <가메이도의 매화가 있는 찻집(龜戶梅屋鋪)>은 고흐의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매화 고목에 새봄이 와서 가지에 듬성듬성 향기로운 꽃망울을 터트리고, 멀리 매화농원의 매화에는

만개한 매화사이로 사람들이 매화향기를 음미하며 봄나들이를 하는 풍경이다.

 

고향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었고, 기후가 맞지 않아 매화나무도 없던 터라 마냥

신기롭기만 하였다.   고흐는 처음 본 이 가슴 뛰는 우키요에를 그리기로 작정하고 우선 그림을

그리기 전에 다른 종이에 가로 17줄 세로 27줄의 격자 줄을 쳤다.   그리고 원화를 보고 한 치도

틀리지 않는 비례로 윤곽을 따라 선을 그었다.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옮겨 칠하기도 전에 이미

고흐의 마음속에는 일본매화가 만개해 있었다.




이렇게 정성껏 그림을 그리다 보니 옮기려는 캔버스와 그림크기가 안 맞았다.

원화인 우키요에가 캔버스에 비해 좌우가 홀쭉하였다.   고흐는 원화이미지를

캔버스 가운데 올리고, 좌우로 남은 여백을 주황으로 칠하고 그 위에 한자로 된, 뜻도 모르는,

심지어는 글자도 틀린 한자를 정성껏 그렸다. 완연한 고흐의 일본그림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대교에 내리는 소나기>는 고흐가 1887년 파리에서 모사한 작품으로 원작이 가지는

부드러우면서도 담백한 목판화의 맛 대신, 고흐의 거친 숨소리라도 들리듯 정성을 다해 작업하는

고흐의 진지함이 담뿍 묻어나는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목판화 원화와 캔버스의 크기가 달라 비례가 안 맞아 고흐는 소나기 내리는 다리풍경을

가운데 두고 마치 프레임 하듯 사방을 녹색으로 두르고 붉은 선을 가늘게 둘러 장식성을 더했다.

 

여기에 익히 보아온 흥미로운 한자 서체를 드로잉으로 그려 넣었고 히로시게 판화의 독특한

특징인 제목과 서명의 붉은 사각 면을 테두리로 꺼내어 마무리 했다. 매화그림이나 소나기그림

모두 윤곽에 써넣은 한자어는 길원(吉原)이니 대흑옥(大黑屋) 혹은 신길원(新吉原),

강호(江戶)등의 한자어를 반복해서 그려 넣었는데 길원은 에도의 대표적 환락가였다.

고흐는 의미도 내용도 중요하지 않고 그냥 시각적 조형성만 강조하였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결과는 재미있다.


 


 


자포니즘의 영향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부국강병을 다지고,

그보다 1년 전인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일본의 참가는 유럽에서 일본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70년대 파리의 문화계와 사교계에 거세게 불어 닥친 일본열풍이 고흐에게는

정신의 환희 같은 기쁨을 주었다.

 

당시 유럽의 서양 미술 전반에 나타난 일본 미술의 영향과 일본적인 취향 및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자포니즘(japonism)은 참으로 대단하여 일찍이

언급하였던 마네, 모네, 로트렉, 보나르 등의 화가뿐 아니라 귀족과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영향을 미쳤고, 고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흐의 우키요에 사랑은 남달랐다.

파리의 화구상인 쥴리앙 탕기 영감의 초상화 뒤편에 우키요에로 도배한 그림을 두 점이나

남겼고, 파리 몽마르트르의 탕부랭 술집 여주인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배경에 우키요에를 그려 넣었다.

 

그뿐 아니라 1888년 12월 23일 남프랑스 아를에서 화가공동체를 꿈꾸며 고갱과의 조우를

기대했던 고흐는 끝내 자신의 귀를 자르는 발작적 비극을 경험하면서도 붕대를 머리에 두른

자화상 뒤편으로 후지산을 배경으로 기모노의 여인을 그린 우끼요에를 함께 그렸다.

 

심지어는 아를의 <밤의 테라스 카페나>나 오베르의 <밀밭 위로 내리는 소나기풍경>,

아를의 <아몬드 꽃> 그림 등 우키요에가 얼마나 고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차다. 그 영향의 중심에 히로시게의 우키요에가 자리하고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의 중심, 니혼바시

 

히로시게의 <동해도오십삼차(東海道五十三次)>는 에도의 니혼바시(日本橋)

에서 시작하여 시나가와(品川)을 거쳐 교토의 가모가와(鴨川) 삼조대교

(三 大橋)까지 모두 53개역의 풍경을 그린 판화히로시게가 다이묘 수행원의

일원으로 도카이도를 여행하고 나서 1년 뒤인 1833년 제작했다.

 

히로시게의 이 연작은 큰 성공을 거두어 훗날 프랑스 문화계와 인상파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히로시게는 또한 에도와 교토사이의 내륙도로였던

기소카이도(木曾街道)에 대한 <목승가도육십구차(木曾街道六十九次)>의 또 다른 연작을

제작하였다.

니혼바시가 처음 설립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1603년이라고 전해진다.

오늘의 니혼바시는 동경시에서 1911년 석조로 완성한 것으로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일본교는 동경의 중심지 천황이 거주하는 코우교(皇居)와 동격역이 바로 지척에 있고

긴자(銀座)와 간다(神田)를 잇는 다리로 유명백화점과 고급전문점이 즐비한 일본 경제의

중심가에 있다.

 

니혼바시 북쪽 미츠코시(三越) 백화점 정문에는 히로시게가 그린 <강호명소준하정

(江戶名所駿河町)>이라는 그림과 함께 미츠코시 백화점이 창업 336주년을 기념한다는

작은 안내문이 남색 노랭이 아래 설치되어 있다. 한 우물을 파는 일본의 기업정신의 단면이다.

히로시게가 1833년 제작한 <니혼바시(日本橋) : 위의 9번 그림>는 긴자와 간다를 잇는 다리 위로

아침 일찍 상인과 짐꾼들이 부지런히 물건을 나르는 역동적이고 활기찬 표정을 그려내고 있다.

거의 200년 전 니혼바시의 풍경과 오늘의 풍경은 비록 다르지만 에도와 도쿄의 중심지로서의

삶의 활기는 여전하다.   역사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하여 세월의 구력과

삶의 지층이 쌓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실감한다.

글·사진 최선호(화가)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뉴욕대학교(NYU)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 SADI 교수 및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역임,

현재 전업 작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

 

- 한국경제매거진/2009.11월/제54호

 




100년전 일본 화풍에 반한 반 고호의 작품| 미술작품 갤러리

도깨비 | 2014.03.18. 08:19

 



 

 

 


   우키요에 대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그림 ① - 1)을 보면 서양화의 원근법을 받아들이면서 한층 과장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눈앞에 검은 나뭇가지가 하얀 매화를 달고 멋들어지게 뻗어 있고 그 가지 사이로 바로 원경이 펼쳐져 매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인다.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은 검은 가지, 흰 꽃과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네덜란드 태생의 후기 인상파 거장 빈센트 반 고흐는 프랑스에 와서 자포니즘 열풍에 휩싸였고, 히로시게의 풍경 판화에

반한 나머지 유화로 모사(模寫)하기도 했다. 그 모사화(그림 ① - 2)를 보면 히로시게의 그림 비례를 똑같이 따랐고 캔버스

 양쪽 남은 공간에 한자까지 정성껏 그려 (쓴 것이 아니라) 넣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지배하는 그 극도의 명쾌함을 보면 그들이 부럽더구나. (중략) 그들은 마치 조끼 단추 채우는

것만큼이나 수월하게 잘 고른 몇 개의 선만으로 형태를 그려내지.”




꽃피는 매화나무(히로시게를 따라서) (1887),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작,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박물관, 암스테르담.

 

아몬드 꽃(1890), 빈센트 반 고흐 작,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박물관, 암스테르담.

 

장미색과 은색: 도자기 나라에서 온 공주(1864),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1834~1903) 작

캔버스에 유채, 프리어미술관, 워싱턴 DC

 

 

http://opencast.naver.com/MS889/202




[J 스페셜 - 목요문화산책] 고흐가 ‘소녀시대’를 만났다면 …

                









그림 ① - 1 (위) 가메이도의 매화 정원 - 명소 에도 100경 중에서(1857),
우타가와히로시게(1797~1858) 작, 목판화.



   명화로 읽는 고전 100년 전 유럽 휩쓴 자포니즘 …

한류 K-Pop 파리공연 계기로 되짚어보니


   10~11일(현지시간) 파리에서 한국의 SM 소속 가수들이 공연을 한다. 원래 1회로 잡혀있었는데 지난달 프랑스 팬들이 루브르 앞에서 시위까지 하면서 추가 공연을 요구하는 바람에 2회가 된 것이다. 유럽의 한류(韓流)가 이제 잔물결 수준을 넘어섰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직 100여 년 전 유럽을 뒤덮었던 거대한 파도, 자포니즘(Japonism)만큼은 아니다. 그 일류(日流)에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인상파 화가들을 비롯해 수많은 미술가와 문인이 빠져들었다. 지금 유럽에 상륙한 한류의 선봉에 K-Pop과 TV 드라마가 있다면 당시 자포니즘의 선두에는 에도(도쿄)의 대중미술 우키요에(浮世繪)가 있었다.

   우키요에를 대표하는 목판화는 그 대담한 구도와 선과 색채 대비로 19세기 후반 유럽 화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사실 이것이 17~18세기 에도에 처음 퍼질 때는 일본인에게도 신선한 것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림 하면 오랜 수도 교토의 귀족이 즐기는 관념적인 전통 동양화였다. 반면 우키요에 목판화는 신도시 에도의 상공업자 계층을 위해 대량으로 찍어낸 파격적이고 세속적인 그림이었다. 이를테면 게이샤나 유녀(遊女)를 모델로 한 관능적인 미인도,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드라마틱한 원근법의 풍경화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림 ① - 2 (왼쪽) 꽃피는 매화나무(히로시게를 따라서) (1887),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작,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박물관,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우키요에 대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그림 ① - 1)을 보면 서양화의 원근법을 받아들이면서 한층 과장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눈앞에 검은 나뭇가지가 하얀 매화를 달고 멋들어지게 뻗어 있고 그 가지 사이로 바로 원경이 펼쳐져 매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인다.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은 검은 가지, 흰 꽃과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네덜란드 태생의 후기 인상파 거장 빈센트 반 고흐는 프랑스에 와서 자포니즘 열풍에 휩싸였고, 히로시게의 풍경 판화에 반한 나머지 유화로 모사(模寫)하기도 했다. 그 모사화(그림 ① - 2)를 보면 히로시게의 그림 비례를 똑같이 따랐고 캔버스 양쪽 남은 공간에 한자까지 정성껏 그려 (쓴 것이 아니라) 넣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지배하는 그 극도의 명쾌함을 보면 그들이 부럽더구나. (중략) 그들은 마치 조끼 단추 채우는 것만큼이나 수월하게 잘 고른 몇 개의 선만으로 형태를 그려내지.”

 


그림 ② (아래) 아몬드 꽃(1890), 빈센트 반 고흐 작,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박물관, 암스테르담.






그림 ③ 장미색과 은색: 도자기 나라에서 온 공주(1864),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1834~1903) 작,
캔버스에 유채, 프리어미술관, 워싱턴 DC.

  
   고흐가 이렇게 우키요에의 선과 여백을 연구한 끝에 그린 작품이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아몬드꽃’(그림 ②)이다.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힘있고 멋들어지게 구부러진 가지들과 하얗게 빛나는 꽃들만 있는 구도가 전통적인 서양화와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는 그림이었다. 테오가 아들을 낳아 고흐의 이름을 따서 빈센트라고 이름 지었다고 알려오자 고흐는 기뻐하며 남부 프랑스에서 가장 일찍 피는 봄꽃인 아몬드꽃을 그려 보냈던 것이다. 이 그림은 도상에서 동양의 매화도를 닮은 데다가 새봄의 전령이자 시련 속에 피어나는 희망의 상징이라는 점에서도 매화도를 닮았다. 고흐는 동양미술의 철학을 이해하는 단계까지 이른 것이었을까.

  한편 파리 중심의 자포니즘을 영국에 앞장서 전파한 사람은 미국인으로서 유럽에서 주로 활동한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였다. 그는 막 자포니즘 열풍이 시작된 1860년대에 이미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일본식 실내에 서 있는 장면(그림 ③)을 그렸다. 이 그림의 제목은 독특하게도 ‘장미색과 은색’이라는 색채 이름으로 시작한다. 휘슬러는 자신의 그림에서 어떤 이야기를 읽으려 하지 말고 마치 추상적인 음악의 화음과 리듬을 즐기듯이 색채와 형태의 조화를 보라고 주문했다. 그런 휘슬러에게 우키요에는 독특한 면 분할(서양 원근법을 따랐음에도 평면적으로 보이는)과 색채 대비, 그리고 일상의 섬세한 찰나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점에서 매혹적이었다.

 휘슬러를 찬미하는 시를 쓰기도 한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1885~1972)는 휘슬러의 그림과 우키요에, 그리고 우키요에와 함께 전파된 일본의 시 하이쿠에서 영향을 받아 이미지즘(Imagism) 운동을 일으켰다. 이미지즘 시는 우키요에가 고흐의 말마따나 “잘 고른 몇 개의 선만으로 형태를 만드는” 것처럼, 간결한 일상어로 뚜렷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파운드는 1913년 이미지즘의 대표시 ‘지하철 역에서’를 발표했다.

 지하철 역에서

‘IN A STATION OF THE METRO’

 군중 속 환영 같은 이 얼굴들;

 젖은, 검은 나뭇가지의 꽃잎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이 14단어로 된 짧은 시는 17개의 음절로만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그 둘째 행이 히로시게의 ‘가메이도의 매화 정원(그림 ① - 1)’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우키요에로부터 시작된 자포니즘은 일본의 다른 미술과 문학, 전반적인 미학과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발전했다. 여기에서 주지할 점은 그 기폭제 우키요에가 앞서 말한 것처럼 전적으로 일본 전통적인 것이 아니며 또 세속적인 대중미술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예술가들은 우키요에가 신선하면서도 너무 낯설어 공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대중예술 K-Pop이 한류의 선봉에 서는 것은 일각의 우려와 달리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앞으로의 관건은 그것이 한순간의 소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인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에 영향 받은 문화가 탄생하게 하고 그것이 한국의 더 전통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조이스·엘리엇 발굴하고 한시 번역했던 시인

에즈라 파운드







   파운드(사진)는 이미지즘 운동으로 영미 시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고, 일본과 중국 문학을 꾸준히 번역하고 깊이 있게 분석해 서구의 동아시아 문화 이해에 기여했다. 그는 또 제임스 조이스와 T S 엘리엇 등의 재능을 초창기에 알아보고 그들을 돕는 등, 여러 가지로 영미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지지해 제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방송을 했다. 결국 1945년 미 국군에 체포돼 반역죄로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거기서 12년을 보냈다. 그 안에서도 그는 한시를 번역하고 연작시 ‘칸토스’를 썼다. 병원에서 풀려난 뒤 이탈리아로 가서 생을 마쳤다.

문소영 기자


[출처: 중앙일보] [J 스페셜 - 목요문화산책] 고흐가 ‘소녀시대’를 만났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