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대의멸친(大義滅親)

2016. 2. 24. 22:17잡주머니

      

[고전 속 정치이야기] 대의멸친(大義滅親)
뉴스천지  |  newscj@newscj.com
2015.06.11 19:33:51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대의멸친은 원래 춘추시대 위(衛)의 석작(石碏)이 군주의 시해에 가담한 아들 석후(石厚)를 죽인 일에서 유래됐다. 다른 사례도 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제6대 황제 효문제 척발굉(拓跋宏)는 5세에 즉위해 24세에 친정한 후 10년 동안 불꽃처럼 살다간 황제였다. 당시 북위에는 자식이 귀하게 되면 어머니를 죽이는(子貴母死) 제도가 있었다.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한 조치였던 것 같다. 척발굉의 생모도 피살됐기 때문에 조모 풍(馮) 태후가 길렀다. 그는 강력한 한화정책을 추진했다. 조모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494년, 남정을 명분으로 산서 대동에서 하남 낙양을 천도하면서 본격적인 개혁이 추진됐다. 중국화의 주요내용은 선비의 복장, 언어, 성(姓)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자신부터 성을 척발에서 원(元)으로 바꿔 원굉이라 불렀다. 선비귀족과 중국명문가의 결혼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로 선비의 경제, 문화, 사회, 정치, 군사 등 다방면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민족 간의 갈등도 완화됐으므로 긍정적인 개혁이었다는 것이 중국인들의 평가다. 

   척발부는 척발규(拓跋珪)의 건국 이후 유목경제에서 농업경제로 바뀌었다. 북방을 통일한 후, 수많은 한족이 북위의 백성에 포함됐다.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척발규 이래 북위의 통치자들은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 인구가 많은 한족의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상징적인 조치가 중국인의 정치적 본향인 낙양으로 도성을 옮기는 것이었다. 척발굉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제(南齊)를 정벌한다는 구실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출격했다. 낙양에 이르자 마침 가을비가 내려 행군이 어려워졌다. 대신들이 출병을 만류하자 낙양천도를 조건으로 수락했다. 그러나 반대자도 적지 않았다. 496년 8월에 숭산을 순행하기 위해 효문제는 태자 원순(元恂)에게 낙양을 맡겼다. 원순은 학문을 싫어한 뚱뚱이었다. 낙양의 날씨가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면서 매일 북쪽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다. 중국어도, 중국옷도 싫었다. 그는 선비의 옛 풍속을 완고하게 지켰다. 고도열(高道悅)이 간곡히 충고했지만 여전했다. 결국 그는 효문제가 순행에 나선 기회에 측근들과 평성으로 돌아갈 음모를 꾸미고 궁중에서 고도열을 죽였다. 영군 원엄(元儼)이 궁문을 지키며 사태의 악화를 저지했다. 다음 날 새벽에 보고를 받은 효문제는 급히 낙양으로 돌아왔다. 직접 원순에게 매질하다가 함양왕 원희를 시켜 100대를 더 때렸다. 녹초가 된 원순은 별관에 구금됐다. 1개월 후에 원순은 겨우 일어났다. 태자의 폐위가 논의되자 태부 목량(穆亮)과 소부 이충(李沖)이 죄를 청했다. 효문제는 “그대들의 청죄는 사사로운 정이고, 폐태자는 국가의 일이다. 대의멸친은 군주가 가장 중시해야 할 기준이다. 아버지를 배반한 아들을 폐하지 않으면 국가에 화근이 닥친다”고 단언했다.

   원순은 서민으로 강등돼 무비성(無鼻城)에 구금됐다. 한화정책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여전히 원순을 중심으로 결집해 이듬해 4월에 반란을 모의했다. 밀고를 받은 효문제는 급히 원순을 독살했다. 당시 원순은 15세였다. 초라한 관과 평상복 차림으로 매장했다. 보수파가 사라지자 한화정책은 가속화됐다. 498년 8월, 남벌이 시작됐다. 아우 원협을 중군대장으로 삼았다. 원협은 “과거에 진사왕 조식은 문제에게 오와 촉을 공격해 보이겠다고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효문제는 웃으며 아우의 손을 잡고 “조비와 조식은 재능을 다투는 사이였지만 나와 너는 친하니 극기복례만 유의해라”고 당부했다. 499년 3월, 병든 몸으로 친정에 나섰다가 4월 1일, 행궁에서 향년 33세에 사망했다.

   그는 늘 “군주는 불공평한 마음과 불성실한 태도를 걱정한다. 이 두 가지만 지키면 호(胡)나 월(越)이라도 친형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법 적용에는 엄격했지만 사소한 일에는 관대했다. 음식에 벌레가 들어간 적도 있었고, 탕에 손을 덴 적도 있었지만 웃으면서 넘어갔다. 민력이 낭비되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행군할 때는 경내에서 사병들이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못하게 하고, 군용으로 벌목했을 때에도 반드시 보상해 주었다. 극단을 피하면서 때와 상황에 따라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추구했던 척발굉이 조금만 더 살았더라도 중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