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연암을 읽는다 (박희병/돌베개)

2016. 3. 4. 09:56잡주머니



       연암을 읽는다 (박희병/돌베개)  




큰누님 박씨 묘지명
말 머리에 무지개가 뜬 광경을 적은 글
‘죽오’라는 집의 기문
‘주영염수재’라는 집의 기문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
소완정이 쓴 '여름밤 벗을 방문하고 와'에 답한 글
한여름 밤에 모여 노닌 일을 적은 글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에 써 준 서문
홍덕보 묘지명
발승암 기문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서(序)
형수님 묘지명
정석치 제문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관재'라는 집의 기문
'초정집' 서문
소완정 기문
'공작관 글 모음'자서
'말똥구슬' 서문
경지에게 보낸 답장



   '묘지명'이란 죽은 사람의 이름.신분.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로 보통 돌이나 도편(도자기 조각)에 새겨 무덤 속에 넣는다. 묘지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엔 죽은 이의 이름과 행적을 산문으로 서술하는 바 이를 '지(誌)'라 하고 뒷부분엔 죽은 이에 대한 칭송을 운문으로 붙이는 바 이를 '명(銘)'이라 한다.

   <모>는 아무개라는 뜻이다. 남자의 묘지명에는 '휘' 다음에 이름을 적지만 여자의 묘지명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모'라고만 썼다. 조선 시대의 공식적 글쓰기에 여자는 늘 <익명>이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이 불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기껏해야 그 성에 '씨'자가 붙어 김씨니 박씨니 하고 불리든지 서씨의 아내, 유씨의 아내라는 뜻의 서처, 유처로 불리든지 난설헌이나 윤지당이니 하는 당호로 불리든지 수원댁이니 이진사댁이니 하는 택호로 불릴 뿐이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이런 문화를 낳았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집>은 이름을 상실해 버렸다. 근대 이전에는 지금과는 달리 자신의 집 대청과 별채, 서재, 다락 등에 아담하고 운치 있는 이름을 붙이는 게 일반적이었으며 이렇게 붙인 이름을 기념하여 지인이나 스승에게 기문을 받아 그걸 나무에다 새겨 해당되는 처소에다 턱 하니 걸어 놓았다. 또한 사람들은 이렇게 붙인 집 이름을 종종 자신의 호로 사용하였다. 자신의 거소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는 이런 행위는 자연(혹은 사물)과의 일체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지 않는가, 자신의 공간과 자신의 이름을 합치시키는 이런 문화적 행위가. 하지만 자아를 자연과 분리시켜 간 근대인에게는 이런 현상이 도무지 이해될 수 없다. 우리 근대인은 자신의 고유한 공간을 상실하고 익명의 공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다. 익명의 공간은 본질상 획일적이며 무개성적이다.


   한편 풍자와 해학, 역설과 알레고리를 권위, 엄숙성, 허위의식, 경직된 생각 따위를 깨뜨리는 데 아주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연암은 이 점과 관련해 '패관소설체'를 구사한다는 비난을 받곤 했지만 연암의 이 패관소설체야말로 기실 언어의 쇄신, 사상과 사고방식의 쇄신을 향한 일대 중요한 진전이었던 것이다.








   18세기 조선 사대부들이 보여주는 이런 취향의 문화적 진원지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명말에 이런 취향이 대대적으로 성행했으니 당시 중국 사대부들은 정원을 그럴 듯하게 조성하여 그 속에 누각이나 서재를 지어 넣고 거기다 각종 고기나 고서화를 비치하여 수시로 감상했으며, 고급 향을 피우고 좋은 차를 마시면서 고상하고 운치 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동시에 그들은 명리나 세속을 초월한 깨끗하고 담박한 정신세계를 강조했다. 이런 태도나 취향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내면세계와 감수성을 확장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으로서의 사대부에게 요구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다시 말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생각해야 하는 사대부 본연의 책무와 덕목을 방기하거나 소홀히 하게 만든 측면도 없지 않다.

   그 결과 명말의 사대부들은 대체로 개인적인 신변잡사에 매몰되면서 퇴영적인 의식이나 공허한 문예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내면적 세게와 외면적 정치의식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균형을 상실해 버리고 내면으로 달아나 버리고 만 것이다. 요컨대 '광장'에서 '밀실' 속으로 들어간 버린 셈이다. 명말의 중국 사대부들이 이런 성향을 보이게 된 이유는 그리 단순치 않지만 크게 보아 다음 두가지 요인이 특히 주목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이 시기 환관의 발호로 인해 사대부들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며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양명학 등의 영향으로 인간 본연의 감정과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쪽으로 문학과 예술의 사조가 바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취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물질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18세기 조선 사대부들은 어떻게 이런 물적 기반을 갖출 수 있었을까? 물론 조선 사대부 전체가 아니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근기 지역의 일부 사대부들에 한정되는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이런 취향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물적 기반이 어떻게 확보될 수 있었는지는 역시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17세기 후반 이래 역관배를 통한 대청 무역을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한다. 대청 무역을 통해 수입된 중국 물건은 부산에 있는 왜관에서 네댓 배의 이문을 붙여 일본에 수출되었다. 그리고 그 대금은 은으로 결제되었다. 말하자면 이런 중개무역으로 조선은 큰 이익을 얻었고, 이렇게 얻어진 이익은 주로 서울과 근기 지역의 지배층 사대부와 중인층 수중에 떨어졌다.

   이런 막대한 상업적 이익은 조선의 문화 공간에서 두 가지 괄목할 만한 변화를 초래했다. 하나는 서적 및 서화골동을 수장하고 완상하는 취향의 대두요, 다른 하나는 중인층의 소비적.향락적 문예 공간의 형성이다. 일본 막부가 18세기 중반 이후 정책을 바꿔 나가사키 항을 통해 중국과 직거래함으로써 이후 조선의 상업적 거품은 빠지게 되지만 그럼에도 18세기가 끝날 때까지 그 여파는 이어졌다. 


   <경>을 알릴  때는 북을 쳤고, <점>을 알릴 때는 꽹가리를 쳤다. 당시 서울 시민들은 때에 맞춰 울리는 이 북소리와 꽹가리 소리를 듣고 시각을 알았다. 한편 당시 한양에는 통금 제도가 있었으니 매일 밤 2경에 종을 28번 쳐 통행금지를 알렸으며 5경 3점, 즉 새벽 4시경에 종을 33번 쳐 통금 해제를 알렸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을 '인정'이라 하고, 통금 해제를 알리는 종을 '파루'라고 했다. 통금이 시작되면 성문이 닫혀 도성 출입이 일체 금지되고 공무 외에도 도성 안에 행인이 다닐 수 없었으며 순라군이 순찰을 돌았다.


   연암은 <오>를 통한 이 알레고리로써 청조 문화를 무조건 배격한 당대의 주류 사대부들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고 보인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거의 대부분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간주해 그 문화를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하였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는 옹정 황제를 거쳐 건륭 황제에 이르면서 융성한 문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연암은 조선의 주체성은 견지하되 청나라로부터 배울 점은 적극적으로 배워 조선의 국력과 민생의 향상을 기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연암의 이런 입장은 당대 조선의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조선 사대부 일반은 가소롭게도 조선은 소중화라느니, 혹은 한 술 더 떠 이제 바야흐로 조선은 중화라느니 하는 망상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우쭐거리면서 자기 자신을 그리고 동아시아의 정세를 냉정하게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량캐산 개 <오>가 조선에 들어오면 그 능력을 발휘하기는 커녕 빌빌거리다가 결국 굶어 죽고 만다는 이야기는 청조 문화 수용과 관련한 당대 조선의 지배적 풍토에 대한 비판일 수 있다.


   개구리 소리는 완악한 백성들이 아둔한 고을 원한테 몰려가 와글와글 소를 제기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엄격하게 공부시키는 글방에서 정한 날짜에 글을 외는 시험을 보는 것 같고, 닭 우는 소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는 한 강개한 선비의 목소리 같았다.

   선비의 본분이란 백성을 잘 다스려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는 것, 글을 읽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배우는 것, 군주가 잘못할 경우 목숨을 걸고 직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 소리를 선비의 본분과 관련된 이미지로 전환시키고 있음은 어디까지나 연암의 상상력에 속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이 상상력 속에 연암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저에 있는 문제의식, 어떤 능청이나 익살이나 페이소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그 정신의 가장 깊은 내핵에 있었다고 판단되는 저 경세의식이 담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연암의 경세의식은 선비의 책무, 다시 말해 긁 읽고 배운 자의 책무에 대한 처절한 자각에서 비롯된다. 일찍이 이우성 선생은 연암의 이런 자각을 '사(士)에의 자각'이라고 간요하게 이름한 바 있지만 바로 이 '사에의 자각'에서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실학'이 싹틀 수 있었으며 <나>에 대한 성찰과 타자에 대한 관심, 거짓과 불의와 위선으로 가득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양성되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효제충신이란 공자의 말로서 '효'는 부모를 비롯한 수직적 관계 속에 있는 웃어른에 대한 공경을 제(悌)는 수평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의 우애를 충은 자기 내면의 성실함을 신은 남과의 신의를 뜻하는 말이다.

제 몸을 위함은 양주를 닮았고
겸애함은 묵자를 닮았고
집안에 양식이 자주 떨어지는 건 안회를 닮았고
고요히 앉았기는 노자를 닮았고
자유롭고 거리낌 없기는 장자를 닮았고
참선하는 듯함은 부처를 닮았고
불공스럽기는 유하혜를 닮았고
술 잘 마시는 건 유령을 닮았고
밥 얻어먹는 건 한신을 닮았고
하염없이 자는 건 진단을 닮았고
거문고 타는 건 자상호를 닮았고
저술하는 건 양웅을 닮았고
자신을 큰 인물에 견주는 건 공명을 닮았으니
나는 얼추 성인일세!
다만 키가 조교만 못하고
청렴함이 오릉을 못 따라가니
부끄럽네 부끄러워!


양주는 양자를 말한다.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자기 몸의 터럭 하나를 뽑기만 한다면 온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기 몸을 위해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사상을 주장한 사상가이다. 여기서는 세수도 않고 망건도 쓰지 않고 경조사도 폐하는 등 예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사는 태도를 가리키기 위해 양주를 들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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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대용 박지원보다 여섯 살 위다. 그는 박지원과 함께 북학파의 리더였다. 박지원이 문학을 통해서 새로운 사유와 미학을 모색했다면 홍대용은 경학과 자연과학을 통해 동아시아의 낡은 패러다임을 깨뜨리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수립해 갔다. 홍대용은 음악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연암의 가장 가까운 벗이자 가장 존경한 벗이 바로 홍대용이었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은 평생 동안 처음 사귈 때처럼 서로 공경했다고 한다.

한편 서른 살의 박지원은 홍대용과의 만남을 계기로 과학과 기술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한편 당시 조선 사대부 일반이 견지하고 있던 존명배청론의 비현실성을 깨닫고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청나라를 직시하면서 조선의 낙후된 현실에 대한 타개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나가는 방향으로 사상을 '업그레이드'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북학'이다. 연암과 홍대용의 첫 만남을 적고 있는 이 단락은 바로 이 북학의 최초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한다.

   홍대용이 체험한 1766년 초봄의 이 만남은 이후 홍대용이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며 한중 교류사에서도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홍대용은 귀국 후 박지원과 함께 이른바 <북학>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흔히 오해되고 있듯이 홍대용의 사성적 성취가 고작 북학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홍대용은 그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즉 그는 오랜 숙고를 거쳐 진리의 배타적 독점성을 주장하던 당대의 주자학에서 벗어나 양명학, 서학, 불교, 노장, 묵가 등 모든 이단 사상도 그것 대로의 장점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징심구세>, 즉 인간의 마음을 맑게 하고 세상을 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바,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그 장점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주의, 자기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과 다른 존재의 경계, 나와 남의 경계, 이 종족과 저 종족의 경계, 지구와 다른 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공생과 공존, 호혜의 철학을 구축해 내기에 이른다.

   그것은 중국측의 중화주의-중국중심주의와 조선측의 조선중화주의-조선 중심주의, 이 양자를 근사하게 깨뜨려 버리고 전혀 새로운 이론적 대안을 모색한 의의를 갖는다. 그것은 또한 자기 존재에 대한 정당한 긍정과 발견이면서 동시에 자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른 존재, 즉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열고 손을 내미는 그런 성격의 철학이라 요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철학은 인간과 자연, 한 인간과 다른 인간, 하나의 종족과 다른 종족이 서로 이해하고 자신을 낮추며 서로 평등한 눈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홍대용이 제기한 이 평화의 메시지는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당대 동아시아의 어떤 사상가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고, 21세기인 지금 보더라도 여전히 진취적이고 매력적이다. 홍대용의 이런 철학은 <의산문답>이라는 책을 통해 완성되었다.

   한편 한중 교류사에서도 홍대용은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홍대용의 이 만남이 선례가 되어 이후 박지원.이덕무.박제가.유득공 등 북학파의 여러 인물들이 중국에 가 중국인들과 교유하게 되며 이런 현상은 19세기로 이어진다. 추사 김정희라든가 추사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이 그 좋은 예다. 이 두 사람은 당대 중국의 저명한 문인.학자들과 폭넓은 친교를 맺었으며, 이는 홍대용이나 박지원이 교유했던 중국인들이 별로 명망있는 사람이 못 되었던 점과 큰 대조가 된다. 중국의 명망가들과 접촉하면서 그들과 시를 수창하거나 그들의 글씨나 그림을 얻어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경향은 박지원의 문생인 <박제가> 등에서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 열두 번이나 중국을 드나든 역관 출신 이상적과 같은 문인에 이르러 가히 그 절정에 이른다고 할 만하다. 이상적은 국내의 중인 출신 문인들과는 거의 친교를 맺지 않은 반면 중국의 문인 및 석학들과 광범한 교유를 맺어 그들에게서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았다. 중국의 저명한 문인.학자들과 시를 수창하거나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이상적은 급기야 자신의 문집을 북경에서 간행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현상은 요새 말로 하면 한국 문학의 세계화라 할 만한 일이니, 긍정적으로 봐야 할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당시는 중국이 동아시아의 <중심>이었으니 중국에서 인정받고 통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앞서 말했듯 홍대용의 경우 중국인들과의 교유는 명예나 이익 따위를 넘어서 있는 것이었고 그 점에서 그것은 인격을 담보한 퍽 순수한 성격의 것이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박제가 등에 이르면 사정이 좀 달라지는 듯 하다. 즉 박제가의 경우 중국인과의 교유를 통해서 얻게 되는 명예나 이익에 대한 고려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없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박제가는 이른바 모화사상이 아주 강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중국 문인이나 지식인과의 친교는 박제가의 국내에서의 문화적 위상을 높여 주었으리라 생각된다가량 그가 양주 팔괴의 한 사람으로서 당대 중국의 저명한 화가였던 나빙과 접촉한 사실이나 그의 그림을 소장한 사실은 국내 문사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족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박제가로 하여금 묘한 자의식을 갖게 만들고 우월감이랄까 으스대는 마음이랄까 이런 기분을 다소간 갖게 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처럼 박제가에게서 중국인과의 교유-편지를 주고 받는 일까지 포함해-는 그 자체가 바로 명예였으며 현실에 작동하는 하나의 문화적 힘이 되고 있었다. 요컨대 저명한 중국인을 안다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크든 작든 하나의 <문화 권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홍대용이나 연암은 그렇지 않았는데 왜 박제가에게서 이런 미묘한 변화가 야기되었을까? 이는 신분 문제와 상당히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 조선은 서얼을 반쪽 양반으로 취급하면서 사회적.정치적 자기실현의 길을 막아 놓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적 모순 때문에 조선 사회 내에서 서얼들은 자기 비하와 콤플렉스와 불만을 안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이라는 공간에선 서얼이나 중인에 대한 차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인과의 교유-그리고 중국인들로부터의 높은 평가-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콤플렉스를 보상하는 하나의 장치가 될 수 있었다.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이상적 의 경우도 역관이라는 그 신분과 관련해 중국에의 경도가 설명될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추사의 경우는 이렇게 설명될 수 없다. 추사는 명문가 출신이니 신분적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추사의 경우, 조선의 지적.사상적 현실의 변화와 관련해 설명되어야 할 터이다.  즉 추사의 시대에 오면 이제 청나라는 더 이상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전의 선배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치부하는 관념은 아주 희박해졌거나 소거되어 있었다. 청나라를 오랭캐의 나라라고 시비 거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청나라는 금석학과 고증학과 문학과 예술의 선진국으로서 조선 사대부들이 배우고 따라야할 전범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존명배청이라는 헛된 명분론으로부터는 벗어났다고 할지 모르나 조선적 주체성은 그만큼 휘발되거나 약화되어 버렸 다는 점, 그리고 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긴장된 인식이 소거되어 버렸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홍대용과 연암이 북학(=중국 배우기)를 제창했다고는 하나 이런 현실을 희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청나라에 대한 경계심은 경계심대로 지닌 채, 헛된 명분론을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기술과 문물을 배움으로써 조선인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조선의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들의 청나라에 대한 태도는 양가적이다.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를 학습하자는 것, 이것이 그들의 기본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어찌 보면 모순 같기도 하나, 바로 이 모순에서 조선적 주체성이 발아할 <틈>이 생겨 나온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본다면 홍대용과 연암의 입점 아주 묘하고 아슬아슬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전의 경직된 의리론과 대립하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곧 도래할 청 추수주의와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홍대용과 연암의 사유에서는 팽팽한 지적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 지적 긴장감은 조선적 주체성에 대한 암중모색과 무관하지 않다. 요컨대 홍대용과 연암의 경우 북학의 제창이 곧 청에의 귀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북학파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북학파 내부에도 차이가 있다. 가령 박제가의 경우 청에 대한 학습만 있지 경계감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그의 <북학의>는 비록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는 높이 살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북학론>을 단순화한 혐의가 없지 않다. 이처럼 박제가-추사-이상적으로 넘어가면서 학청만 남고 청에 대한 대타의식은 슬그머니 소멸되어 버린다.

   박제가는 훗날 '북학'을 강조한 결과 조선인은 조선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런 경우가 바로 연암이 말한 '주장을 너무 높이 내세우면 혹 상도에서 벗어나는 데 가까워지기도 한다"는 데 해당하지 않을까.

요컨대 만주족이 중국을 점거했다고는 하나 그 땅과 인민과 학술과 문화는 의연히 옛 중국의 그것이라는 논리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바로 북학의 기저논리라는 점이다.

연암이 당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남인과의 교류는 보이지 않는다. 연암은 이익.이용휴.이가환.정약용과 같은 빼어난 남인 계열 문인.학자들의 소식을 당연히 듣고 있었을 터이다. 이들은 모두 연암과 동시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암의 글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일체 보이지 않는다. 누구도 자기 시대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니만큼 연암이 보여주는 이런 한계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연암은 자기 시대 사대부 사회의 문제점을 냉철히 지적하면서 스스로 그러한 문제점을 넘어서려고 노력했긴 하나 시대의 제약대문에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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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족이 같으며"라고 했는데 곧 민족이 같다는 말이다. <종족>이라는 말의 원문은 '족류'이다. <민족>이라는 말은 서양어 nation의 번역어로 근대 일본이 처음 만들어 쓴 용어인데 이후 동아시아에 두루 통용되었다. 전근대 시기에는 <민족>이라는 말보다 <종족>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나 싶다.


   왕양명처음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그것이 공소하고 지나치게 번쇄하다는 점을 깨닫고는 마음공부와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상 체계를 창시하였다. 이것이 곧 양명학이다. 주자학에는 <물>을 객관적 실체로 인정함과 동시에 <이>를 초월적이면서도 내세적인 실체로 간주한다. 한편 心에는 하늘의 理가 품부되어 있는 바 이것이 곧 性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양명학에서는 物이란 心의 자기 확대에 물과하며 心 자체가 즉 理라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주자학에서는 마음과 사물에서 부단히 이를 궁구해 가는 일이 요구되는 반편 양명학에서는 간단히 <심>만 닦으면 된다. 전자가 객관유심론이라면 후자는 주관유심론이다. 이 점에서 양명학은 禪學과 친연성이 있다. 조선과 달리 명나라에서는 주자학보다 양명학이 성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청초까지 이어졌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다. 일찍이 퇴계가 양명학을 이단이라 비판한 이래 조선에서 양명학은 늘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는 하나 17세기 이후 소론 가문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그 학맥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조선의 학문 풍토에서는 설사 자신이 양명학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대놓고 표방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조선의 양명학자들은 주자학의 외피로 자신의 사상을 은폐하였다. 그만큼 조선은 주자학의 자장이 강했으며 주자학 일변도였다. 주자학이든 양명학이든 모두 중국에서 전래한 사상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과는 달리 조선은 사상적 융통성을 갖지 못했으며 아주 경직되고 편협하며 대단히 배타적인 방향으로 하나의 사상을 절대화해 갔다. 이는 조선 사대부의 고루함 내지는 이념적 편협성과 관련된다.

   너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순순히 보내어라. 내가 60년 동안 세상을 보니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넘실넘실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나니, 해와 달은 가고 또 가서 잠시도 그 바퀴를 멈추지 않거늘 내일의 해는 오늘의 해가 아니란다. 그러므로 미리 맞이하는 것은 거스르는 것이요, 쫓아가 붙잡는 것은 억지로 힘쓰는 것이요, 보내는 것은 순순히 따르는 것(順)이다. 네 마음을 머물러 두지 말며, 네 기운을 막아 두지 말지니 명을 순순히 따르며 명을 통해 자신을 보아 이치에 따라 보내고 이치로써 대상을 보라. 그러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물이 흐르고 거기 흰 구름이 피어나리라.


   왕망 전한의 평제 때 재상을 지냈던 인물로, 훗날 평제를 시해하고 평제의 아들을 황제로 세운 뒤 섭정을 하다가 결국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여 국호를 新으로 바꾸었다. 왕망은 고대의 이상적인 국가를 재현한다는 명목 아래 <주관>이라는 책에 의거해 신나라의 관제를 제정하였다. 하지만 신나라는 허울만 그러할 뿐 그 내부 모순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주관>은 <주례>라고도 불리는데, 천.지.춘.하.추.동의 여섯 부문으로 나눠 관계를 편성하고 관직 이름을 정해 놓은 책이다. 주나라의 주공이 저술한 책이라고 전하나 근대의 학자들은 후대 유학자의 저작으로 본다. 왕망은 재위 15년 만에 살해되고 광무제가 다시 한 나라를 중흥하게 된다. 이것이 곧 후한이다.


   낙서(洛書) 하나라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있었다는 45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아홉 개의 무늬를 말한다. 하도(河圖)는 복희씨 때에 황하에서 용마가 그 등에 지고 나왔다는 55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도상을 말한다. <주역>의 근본 이치가 바로 이 하도와 낙서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독서법 세가지
1. 성리학적 독서법 _ 편협하고 교조적인 독서법으로 긴요한 책목록을 적어 그것만 독서함.
2. 고증학적 독서법 _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으로 박학을 지향하는 특징을 지님
3.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독서법


도올(禱)(木兀)??
   도올은 원래 흉악한 짐승 이름이다. 한나라 때의 동방삭이 지었다는 <신이경>의 서황경에 따르면 이 짐승은 몸은 호랑이 같고 털은 개와 같으며 얼굴은 사람 같다고 한다. 춘추시대 초나라는 자국의 역사책을 <도올>이라고 했는데 이는 역사 기록을 통해 악을 징치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사마천의 <사기>는 그 <화식열전>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무덤의 도굴을 일삼는 도적들에 대해 서술해 놓고 있다. 반고의 <한서>에서도 도둑이나 살인자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진정지견(眞正之見) '참되고 바른 봄' 즉 '진정한 인식'이라는 뜻이다. 연암은 진정한 인식이 中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산술적인 의미에서의 '중간'이 아니다. 그것은 양극단, 즉 두 개의 대립항을 지양하면서도 동시에 품는 개념에 가깝다. 그 점에서 그것은 '포월' 즉 '대립자를 안고 넘어서는 것'이다. 중이란 <사이>라는 개념과도 통한다. 그것은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오른쪽과 왼쪽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조망함으로써 그 일면성을 넘어서면서 온전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지점이다. 이 점에서 <중>은 퍽 역동적이고, 미묘하며, 성찰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중>을 견지하려면 세심한 관찰과 함께 사유의 고통이 수반된다. 뿐만 아니라 평균대 위를 걸어가듯 시시각각 사유의 균형을 잡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금방 <중>에서 이탈하게 될지 모른다. 이처럼 <중>은 어렵다. <중>이 어렵다는 것은 진정한 인식을 획득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글에서 제시된 연암의 인식론적 견해는 연암이 당대에 취한 사회정치적.미학적 입장과 결부시켜 관찰될 필요가 있다. 연암은 북학을 주장하며 청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청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놓지 않았다. 이 점에서 연암은 북벌론이라는 하나의 극단과 청에 대한 사대주의적 흠모라는 또다른 극단을 동시에 뛰어넘어 사유한 것이 된다. 당시 조선인에게 이런 사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한편 연암은 글쓰기에 있어서 새로움과 파격을 추구하면서도 옛 전통을 잘 황용함으로써 높고 깊은 경기에 이를 수 있었다. 이는 연암이 '창신'이라는 한 극단과 '법고'라는 또다른 극단을 동시에 지양함으로써 가능했다.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둘 가운데 어느 한쪽에 편향되어 있었으며 연암처럼 이 이분법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했다.


사마천과 사기

   사마천 시대의 군주인 문제는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전제군주였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정복 전쟁을 벌였다. 베트남을 침공하고 한반도를 침략했다. 그리고 흉노와 줄창 싸웠다. 당시 이릉이라는 20대의 용맹한 장수가 있었다. 그는 흉노와 싸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불행히 흉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나 부하들이 전멸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제는 이릉이 자결하지 않고 포로가 되었다고 해서 그의 구족을 멸해 버렸다.

   사마천은 당시 궁정의 역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으로부터 이 직책을 물려받았다. 사마천은 이릉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무제의 이런 조처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무제에게 자신의 생각을 아뢰었다. 무제는 격분했고 사마천은 그날로 투옥되어 궁형에 처해졌다. 궁형이란 거세 즉 남자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잔인한 형벌이다. 하지만 정해진 보석금을 내면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사마천은 평소 알던 친구들에게 좀 도와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사마천은 이때 세상에 대한 통절한 경험을 했고 이 경험은 <사기>의 글쓰기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투사되어 있다. <사기>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남을 돕는 협객적 인간을 더없이 훌륭한 인간으로 찬미하고 있음도 이와 관련된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는 건 남자로서 너무나 수치스런 일이니 처음엔 자결을 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고민한 결과 아버지가 쓰다 만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죽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는 결국 궁형을 받았고, 석방되어 <사기>를 완성하였다. 바로 이런 개인적 배경 때문에 <사기>의 가장 깊숙한 밑바닥에는 수치심과 분만감(憤_滿心_感)이 깃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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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병 님의 책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나니
운화와 근대 - 최한기 사상에 대한 음미
한국의 생태사상
선인들의 공부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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