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문학은 사실보다 작가의 바람을 담은 상상력이 원천이다. 작가는 실존보다는 상상의 세계에서 노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수호전은 북송말기에서 명말원초에 이르기까지 민간에 내려오던 설화를 시내암(施耐庵)이 집대성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가 노지심과 무송의 마지막을 육화탑으로 삼은 것은 소주(蘇州)가 출생지이고 항주는 벼슬을 살았기 때문이다. 시내암은 동향의 군주 주원장(朱元璋)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오직 수호전의 완성에 전력을 쏟으며 발분의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다. 정치권력에 의해 설정된 법과 그것을 시행하는 통치와 행정이 공정하지 못하고 민생이 고통으로 신음을 하고 있을 때 문인은 붓을 들고 항거한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문인의 무기인 붓은 천고에 남는다. 역사와 소설을 구분하지 못한 모택동은 초등학생일 때 삼국지와 수호전을 허구라고 가르친 선생을 내쫓으려고 모의했다. 정강산과 연안에서 장개석에게 끈질기게 저항한 힘은 양산박 호걸에 대한 감동 덕분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수호전을 농민혁명의 모델로 본다. 모택동에게는 수호전이야말로 마르크스 레닌의 혁명교범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송강이 끝내 투항하지 않았다면 공산당의 훌륭한 교재가 되었을 것이다. 한때 조정에 투항해 방랍(方臘)의 농민군을 진압하는 부분은 삭제됐다. 사람들은 애석한 마음을 담아 부귀영화를 버린 두 사람의 석상을 여기에 남겼다. 방랍의 반란을 평정한 두 사람은 육화사의 승방에서 잠이 들었다. 갑자기 강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관서출신인 노지심은 전당조신을 본 적이 없었다. 북소리로 오인한 그는 벌떡 일어나 선장을 들고 큰소리로 외치며 바깥으로 나갔다. 스님들은 웃으며 정확한 시간에 발생하는 전당조신을 설명했다. 문득 마음속에서 크게 깨달은 노지심은 손뼉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지진(智眞)장로께서 주신 게송에 ‘여름에 사로잡을 것(逢夏而擒)’이라고 하셨는데 송림에서 하후성을 사로잡았고, ‘섣달에 잡을 것(遇臘而執)’이라고 하셨는데 방랍을 사로잡았다. 오늘이 바로 ‘조수소리를 들으면 원만해질 것이고(聽潮而圓), 편지를 보면 고요해질 것(見信而寂)’이라고 하신 날이구나. 조신을 만났으니 원적하기에 적합하다. 원적이 무엇인가?”
스님들은 출가한 사람이 죽는 것이라고 하자, 노지심은 웃으며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물을 데워달라고 부탁했다. 목욕을 마치고 승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법당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았다. 송강이 황급히 달려왔을 때 노지심은 이미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무송은 청충(淸忠)조사가 되어 80세에 선종할 때까지 벗의 명복을 빌며 육화사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