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의 그림, 불교 가르침에 빠지다] 13. 김홍도 ‘활쏘기’

2016. 3. 17. 03:54美學 이야기



       [조정육의 그림, 불교 가르침에 빠지다] 13. 김홍도 ‘활쏘기’| ******불교미술종합

고집통 | 조회 38 |추천 0 | 2014.04.04. 07:34


      
13. 김홍도 ‘활쏘기’

 

“지극한 발원과 갸륵한 노력도 없이 경지에 도달하려는가”

 

 

“그대가 몇 구절의 법을 구하고자 육신을 버린다고 하는데, 그걸 누가 믿겠는가.”  -열반경

 

교관 가르침 받는 초보궁사
긴장감으로 어깨 올라가고
얼굴표정은 잔뜩 굳어있어

한량없는 세월 보살행 닦아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처럼
지속적 노력만이 결실 얻어


 

  


▲ 김홍도, ‘활쏘기’, 종이에 연한 색,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






























   자전거타기를 시작했다. 10여 년 전 딱 하루 타고 포기했던 자전거를 쉰 세살에 다시 시도했다. 이유는 딱 하나. 자전거로 탄천변을 씽씽 달리며 꽃을 감상하고 싶어서였다. 지금 아니면 이번 생에 영영 탈 수 없을 것 같은 아쉬움도 한몫했다. 생각은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을까 조금 두려웠다. 망설임이 길어지자 행여 격려라도 들어볼까 싶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얘기했다. 예상과는 달리 바로 우려의 눈초리가 돌아왔다. 거의 말리는 분위기였다. 잘못하면 머리를 다칠 수도 있다는 둥, 뼈가 부러지면 잘 붙지 않는 나이라는 둥 들리는 소리마다 흉흉했다. 슬며시 약이 올랐다. 두고 봐라. 내가 탈 수 있나 없나 확실하게 보여줄 테니까. 하루가 다르게 몸을 열며 유혹하는 꽃들도 의욕을 자극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며칠을 고민하다 자전거를 사서 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우려는 곧바로 현실이 됐다. 마음은 국가대표급 사이클 선수인데 몸은 정확히 쉰 세 살이었다. 첫째날 둘째날 연이틀을 넘어지고 부딪쳐서 무릎이 깨졌다. 과거의 악몽이 떠올랐다. 중고로 팔까. 사흘 만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 심정이 어찌 나 뿐이겠는가. 무엇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나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김홍도(金弘道:1745-1806)가 그린 ‘활쏘기’에도 초보자의 불안함과 주저함이 들어 있다. 화면에는 세 명의 궁사와 교관 한 명이 보인다. 두명의 궁사는 각각 바위 위에 앉거나 쭈그리고서 활과 시위를 살피고 있다. 스스로 기구의 상태를 점검할 정도라면 초보자는 벗어났다. 나름대로 꽤 경력이 붙은 고수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교관의 가르침을 받는 왼쪽의 초보자다. 처음 활을 잡는 마당에 몸이 뜻대로 움직여줄리 만무하다. 활은 어깨로 쏘는 게 아닙니다. 긴장을 풀고 어깨를 낮추세요. 교관이 아무리 여러번 같은 말을 되풀이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궁사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다. 

   ‘활쏘기’는 ‘단원풍속도첩’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단원풍속도첩’은 최근 학계에서 제작자 진위 문제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연구논문이 여러 차례 발표된 화첩이다. 화성(畵聖) 김홍도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그림의 형태와 필치가 치졸하다. 여러 차례 수정한 흔적이 발견되는 것도 의심스럽다. ‘활쏘기’도 예외는 아니다. 교관의 가르침을 받으며 활시위를 당기려는 사람의 몸과 다리의 결합이 조금 어색하다. 활을 잡는 자세는 좌궁(左弓)인데 발모양은 우궁(右弓)이다. 국궁(國弓)에서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는 반대방향으로 활을 잡는다. 오른손잡이는 왼손으로 활을 잡고 오른손으로 시위를 당기는데 이를 우궁(右弓)이라 한다. 이때 왼발이 살짝 앞으로 나간다. 반대로 왼손잡이는 오른손으로 활을 잡고 왼손으로 시위를 당기는데 이를 좌궁(左弓)이라 한다. 이때 오른발이 조금 앞으로 나간다. 우궁이냐 좌궁이냐는 시위를 당기는 손을 기준으로 한다. 발은 팔의 방향을 따른다. 그런데 ‘활쏘기’에서는 손과 발이 따로 논다. 손은 좌궁(左弓)이고 발은 우궁(右弓)이다.


   물론 그림에서와 같은 활쏘기 자세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당시에 이런 자세로 활쏘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해도 활 쏘는 인물의 상체와 하체의 연결은 여전히 부자연스럽다. 머리에서 허리까지는 정면을 바라보는데 다리는 옆쪽을 향했다. 담졸(澹拙) 강희언(姜熙彦:1738-1784년 이전)이 그린 ‘사인사예도(士人射藝圖)’와 ‘활쏘기’의 궁사를 비교해보면 그 어색함을 금새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스럽지 못한 연결 때문에 ‘단원풍속도첩’이 도화서 화원의 교본용 화보의 화고(畵稿)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등장인물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고민 없이 교본을 보고 베낄 때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라는 뜻이다. 설령 ‘활쏘기’가 김홍도의 진작(眞作)이 아니라 후대에 보고 베낀 그림이라 해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풍속과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더없이 훌륭한 시각자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활쏘기를 배우는 초보자의 불안한 심리가 잘 드러나 있지 않은가. 저 궁사는 다음 날도 활터에 나타났을까. 감상자에게 궁금함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활쏘기’는 훌륭한 작품이다.



   부처님이 과거 전생에 ‘설산동자’라는 청년수행자로 살 때 얘기다. 어느 날 설산동자가 산속에서 수행을 하고 있을 때 도리천의 제석천(帝釋天)이 나찰(羅刹)로 변해 설산동자의 구도정신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제석천이 설산으로 내려가 고행하고 있던 동자 옆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가니 태어나 죽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네.”

동자는 그 소리를 듣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만난 듯, 원수에 쫓기다가 벗어난 듯, 오랜 가뭄에 비를 만난 듯 기뻤다. 동자는 누가 이렇게 좋은 구절을 말하는가 싶어 둘러보니, 험상궂게 생긴 나찰이 서 있었다. 동자가 나찰에게 말했다.

“당신이 말씀하신 구절은 매우 훌륭한 진리입니다. 제게 다음 구절을 알려 주십시오.”

나찰이 말했다.

“나는 배가 너무 고파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다음 구절을 알려주면, 내 육신을 보시하겠습니다.”

“그대가 몇 구절의 법을 구하고자 육신을 버린다고 하는데, 그걸 누가 믿겠는가.”

“제석천과 불보살이 증명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려주겠다.”

나찰이 다음 구절을 읊었다.

“나고 죽는 그 일마저 사라지면 거기에 고요한 즐거움이 있네.”

동자는 이 게송을 듣고 지극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나찰의 먹이가 되기 위해 절벽 위로 올라가 몸을 허공에 던졌다. 이때 나찰이 제석천으로 변해 동자의 몸을 받으면서 말했다.

“장하십니다, 동자시여. 동자가 법을 구하고자 하는 정신이 어떤지를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대는 참된 보살이며 앞으로 무량한 중생을 구제할 것입니다. 그때 저도 구제해주십시오.”

    ‘열반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담은 ‘자타카’에도 들어 있다.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던질 수 있는 용기와 각오를 잘 보여주는 얘기다. 부처님의 수행은 단순히 보리수 아래서의 6년 고행이 전부가 아니다. 한량없는 세월동안 보살행을 닦은 후에 석가모니로 태어나 마침내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셨다. 무상정등각은 나고 죽는 법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자 열반이다. 어찌 한 생의 공부만으로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 같은 분도 그러하거늘 그런 노력은 잊어버리고 몇 년 동안 공부한 것으로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해 절망하는 것은 부처님에 대한 무례다. 몸을 내던질 정도로 지극하게 발원하고 실천한 후에 절망해도 늦지 않다. 법을 구하든 자전거를 타든 배움을 구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자전거 타기 사흘째. 더 이상 무릎을 구부릴 수 없을 정도로 피멍이 들어 정형외과에 갔다. “제가 골다공증이 올 나인데 아무래도 자전거는 무리겠죠?” 의사의 말 한마디면 자전거를 중고로 팔아버릴 생각으로 물었다. 의사가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자전거가 무서워 타지 못할 정도라면 걷는 것은 어떻게 하십니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냥 집에 틀어박혀 계셔야죠. 그게 아니라면 마음대로 타십시오. 계속 부딪치고 깨지다보면 운동신경이 발달해서 몸이 저절로 안전하게 넘어지는 법을 찾아가는 법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대신 준비를 단단히 했다. 무릎에는 택배받을 때 들어있던 뽁뽁이를 여러겹 접어 테이프로 붙였다. 떨어져도 충격이 덜하도록 아들이 군대에서 가져온 깔깔이를 입고 손에는 장갑을 끼었다. 이제 넘어지더라도 무릎 깨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연습한지 일주일 만에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성공이다. 이제 조금만 더 연습하면 꽃나무 아래를 신나게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실력 늘어가는 재미에 취해 아파트 단지를 마구마구 휘젓고 다니는데 ‘띨롱’ 문자가 온다. ‘안녕하시죠? 중국어 학원가는 길이예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지난번에 보로부두르답사를 함께 갔던 도반이다. 답사지에 와서까지 중국어 단어를 외우는 그녀를 보고 존경스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문자 속에 싱싱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 역시 내 나이 또래다.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그녀가 아름답다. 레오 버스카글리아는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가진 것은 오직 너 자신뿐이다. 그러므로 너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전거 타기도 중국어 배우기도 자신을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우리는 때로 잘 나가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한다. 시기와 질투를 느낄 때도 있다. 별로 노력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운이 좋아 떴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노력 없이 되는 일도 없다. 어쩌다 한번 과대평가되는 경우는 있지만 오랫동안 이름값을 유지하는 사람은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다른 사람의 성취를 무시할 때도 있다. 그까짓 게 뭐 대단하다고 자랑질이야. 애써 무시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성취도 당사자에게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하고 뿌듯하다. 이미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에게는 쉰 세 살짜리 초보자의 자랑질이 유치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는 자전거타기가 단순히 두 발로 바퀴를 돌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기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0년 전에 운전면허를 따고서도 운전이 무서워 운전대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면허증을 반납했다. 자전거타기는 20여년의 무력감을 극복한 일대사건이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시작한다는 것은 위대하다. 세상의 모든 노력은 가상하다. 꽃을 볼 날이 멀지 않았다.


  

[1239호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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