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명나라의 유로(遺老)들은 망국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심각히 반성하기 시작하였다.그 결과 그들은 리학(理學)이 리기(理氣)와 심성(心性)의 문제에만 너무 치중해 공리공담으로 전락함으로써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지 못한 것이 그 한 원인이라고 파악하고, 한족(漢族)의 문약(文弱)과 물빈(物貧)을 구제하고 당시 사회의 혼란상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송명의 리학을 비판·수정하여 현실의 행동 세계를 긍정하고 창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이론 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따라서 청대 초기에서부터 청대 중기에 이르는 동안의 유학은 송명리학의 말폐를 극복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송명리학의 관념적 세계관 자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즉 기철학적 세계관을 정립하고, 그것의 기초 위에서 실제의 정치와 사회 문제에 기여할 수 있는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구축해 나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가장 먼저 이러한 경향을 내보였던 것은 유종주(劉宗周)였다. 그는 북송(北宋)의 장재(張載)의 기론(氣論)을 계승하여 이 세계에서 실재하는 것은 오직 기(氣)뿐이며 리(理)는 단지 기를 질서지워 주는 것에 불과하다 단정하면서 기즉리(氣卽理)의 명제를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청초 기철학적 세계관의 단초를 여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초의 학풍을 대표하는 사람은 역시 '청초의 삼대유(三大儒)'라고 불려진 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왕부지(王夫之)였다. 그들은 모두 고전과 역사에 대한 박식을 토대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로 학문 연구를 진행하여 경세치용의 사상을 전개시켰다.
황종희는 주로 경학과 사학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경제적 견해를 표방하였다. 그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등의 저서를 통하여 명나라가 멸망하기에 이르기까지의 군주전제정치를 비판하고 이상적인 정치와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정론(政論)을 펼쳐나갔으며, 특히 군주의 이기적인 독선과 군주전제제도를 배제함으로써 백성을 위한 정치적 혁명의 실현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반군주전제론(反君主專制論)은 당견(唐甄)의 저서를 통해서도 제시되었다. 또한 황종희는 기와 심(心)을 본체로 보고 리를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 즉 조리(條理)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고염무는 철저한 실증주의자이자 경험주의자였으며, 그러한 기반 위에서 자신의 경세관을 성립시켰다. 그는 도(道)를 밝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을 학문의 요체로 삼아 성리학을 배제하고 경학을 제창하였으며, 학문 추구의 방법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였다. 그의 학문은 자연과 인문의 모든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으며, 역사와 지리의 풍부한 자료를 통해 여러 가지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엄밀한 고증의 방법은 청대 후기 고증학(考證學) 발달의 선하를 이루는 것이었다.
왕부지는 기를 음양(陰陽)의 실질로 파악하여 우주의 존재 원리를 철저하게 기에서 구하고, 리는 단지 기에 기초한 작용적 법칙으로 인식하는 기철학적 세계관을 구축하였으며, 현실 세계에서는 체용(體用)이 동재(同在)한다는 체용일원론(體用一元論)과 실재하는 것은 현상뿐이며 세계는 살아 움직이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실유생동론(實有生動論)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의 기초 위에서 그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그리고 정치 경제 전반에 걸쳐 논평을 가하였으며, 화이의식(華夷意識)에 입각하여 황제(黃帝)의 자손인 한족의 자주 독립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경세치용 학문은 학문적인 면에서는 적지 않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으나, 사회 개혁과 민족 독립은 달성할 수 없었다. 청조의 주자학적 문교 정책과 관료적 사회 기풍은 개혁되지 않았으며 만주족은 여전히 한족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이들 세 사람의 뒤를 이어서 이들 학문의 경세적 경향을 소극적으로 수정하려는 학자들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안원(顔元)이었다.
안원은 황종희 등과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송명리학에 대해서 극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실학(實學)을 중시하였으나 그가 말하는 실학은 경사의 이해를 통해 경세적 실천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성인이 제창한 예악(禮樂) 제도를 실천하여 현실을 충만히 하는 것이었다. 그의 학풍은 제자인 이공(李 )에게 계승되어 안이학파(顔李學派)를 형성하였다.이렇게 경세치용의 학풍은 그 자체적으로도 ??조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으나 그것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청조의 사상통제정책이었다.
청조는 경세치용의 학풍이 결국 반정(反淸)·반만(反滿) 사상의 고취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강제적인 정책을 통해 그러한 학풍을 소멸시킬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과도기를 지나 청조의 지배가 확립되고 사회가 안정되자 청조 정부는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삼대를 통해 본격적인 사상 통제, 사상 탄압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문자(文字)의 옥(獄)'과 금서(禁書) 정책이었다. 그에 따라 자유로운 사상 활동은 제한되었으며, 청초의 경세치용 학풍과 반청·반만 의식은 점차 소멸되어 갔다. 그 대가로 청조 정부는 실증적 측면의 학문을 권장하였는데 그러한 정책을 바탕으로 하여 고전의 문헌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행해졌으며, 『강희자전(康熙字典)』·『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의 대규모 편찬 사업이 진행되었다. 학자들은 현실의 정치로부터 눈을 돌려 한대(漢代) 훈고학(訓 學)으로의 복귀를 표방하고 실사구시의 방법을 중시하면서 정밀한 과학적 방법에 의한 실증적 연구로서 고전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학문이 문헌학·언어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한 고증학이었다. 고증학은 고전의 원초적 형태와 의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문헌이나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사상적으로 독특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청조의 고증학은 고염무를 개조로 하여 염약거(閻若 ) 등에게 계승되었으며, 건륭에서 가경(嘉慶) 년간에 이르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심적인 인물들은 오파(吳派)에 속하는 혜동(惠棟)·왕명성(王鳴盛)·전대흔(錢大昕) 등과 환파( 派)에 속하는 대진(戴震)·단옥재(段玉裁)·왕념손(王念孫)·왕인지(王引之) 등이었다. 특히 대진은 단지 고증학적 연구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청초 사상가들의 기철학적 세계관을 집대성하여 기철학을 완성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개개 사물의 생성이 음양오행의 기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기일원론을 제시하였으며, 리(理)가 정욕(情欲) 속에 있다고 하여 정욕긍정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고증학은 고전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통하여 근대적인 인문과학의 기초를 닦았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으나, 사회적 실천의 의의를 경시하면서 비역사적 태도로 일관하였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현실 세계를 보는 자세의 취약함과 현실세계에 대한 분석의 일천함은 청말의 급변하는 사회를 이끌어가기에 충분한 사상적 유산을 남기지 못하였으며, 그에 따라 도광(道光)·함풍(咸豊) 년간에 이르러 공양학(公羊學)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공양학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입각하여 성인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그 시조는 장존여(莊存與)였다. 그는 『춘추』의 서법(書法)과 미언대의를 중시하여 대일통사상(大一統思想)과 존왕주의(尊王主義)를 제창하였으며, 『춘추공양전』에 의거해 『춘추』를 자유롭게 해석하는 풍조를 조성하였다. 그의 학문은 유봉록(劉逢祿)에게 계승되어 공양학으로 일단 정비되었는데, 그는 한대의 금문학자(今文學者)인 하휴(何休)의 공양설을 빌어 청대 고증학자들에 의해 존중되던 정현(鄭玄)의 학설을 배척하고 공양사상을 경학사상, 나아가서는 세계관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그리하여 공양학의 원리는 고증학 내부의 법칙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와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인식되는 맹아를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당면한 현실 문제를 향해 더욱 접근시킨 사람은 위원(魏��)과 공자진( 自珍)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학문은 다시 현실 이해와 개조를 위한 도구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청말의 경제적 위기와 청조의 권위 실추, 외국 열강의 거듭된 침략은 일부 지식인으로 하여금 고증학에의 도피와 양무운동(洋務運動) 등의 미온적 개혁에 회의를 품게 하였다. 그에 따라 정치제도의 대변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변법사상(變法思想)이 대두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입장을 대변하였던 인물이 강유위(康有爲)였다. 그는 공자개제설(孔子改制說)을 통해 공자를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공교(孔敎)를 국가의 통일적 종교로 만들자는 개혁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그의 이상사회는 대동세계(大同世界)였는데, 그것은 국경과 계급, 종족, 남녀 구별의 철폐와 가족제도 폐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담사동(譚嗣同) 역시 강유위와 함께 변법운동을 주도하였으나 무술정변(戊戌政變)을 통해 일찍 처형되었다. 이외에도 양계초(梁啓超)·엄복(嚴復) 등이 청말의 계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